24화 흑기사와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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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페리온 황가의 황궁에는 숨겨진 공간들이 있다. 어떤 것은 교묘한 빛의 각도와 지형의 착각으로 숨겨져 있기도 했지만, 어떤 것은 특정한 요소가 동시에 맞물려야 열렸다.
천년의 세월 동안 제국의 자리를 지킨 그 저력은 가히 강대했고, 황궁은 오랜 시간 축조되기만을 반복해 그 안은 웬만한 미궁과 비견할 만 했다.
“저희 할아버지, 레오노드 황제 때부터 쓸모없는 궁을 부수고 밀어내는 작업을 진행했죠. 세상에, 황궁 안에서 마차를 타고도 끝에서 끝까지 가는데 몇 시간이 걸렸다고 해요. 넓이도 넓이지만 워낙 길이 복잡해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상상이 가나요?”
심지어 국정을 보는 자리까지 가는 데에도 만만찮은 시간이 소요될 정도였다. 그리고 레오노드 라젠카 드 휘페리온은 황제들 중에서도 유난히 불같은 성질머리를 가졌던 젊은 황제였다.
‘에에잇, 시발! 못 해먹겠다! 야! 난쟁이들이랑 요정들, 건축가들 불러!’
‘폐, 폐하. 왜 그러시는지요.’
‘집이 이 따위로 큰 게 말이 되냐! 그냥 크기만 하면 말도 안하지. 왜 이렇게 빙빙 꼬아져 있는 거야!“
‘폐하, 폐하께서 조금만 일찍 더 준비를 마치셨으면···.“
‘그게 내 잘못이냐? 어? 황제인 내가 왜 대전까지 가는데 이리 촉박하게 움직여야 하냔 말이다! 다 뜯어고칠 것이다! 주춧돌부터 기왓장까지 전부 다!’
‘허, 허나 폐하. 역대의 황제 폐하들께서 불편함을 감수하시고 국정을 운영하시는 데에는 그만한 전통과 역사가 깃들어 있기에···.’
‘그만! 지금은 내가 바로 그 전통과 역사다! 헛소리 그만하고 건축가들 불러와-!’
제국의 수도이자 황궁인 히폴리아스는 그렇게 수십 년에 걸친 공사 끝에 간소해졌다. 물론 그 간소해진 규모마저 어느 왕궁도 못 미치는 크기였으나, 최소한 미궁이라는 오명은 벗어던지게 된 것이었다.
“제국의 모든 요정들, 난쟁이가 철저히 계획을 세워서 재건된 황궁은 그야말로 마법과 신비가 곳곳에 숨겨진 공간이 되었죠. 물론 황궁의 대부분을 무너트린 것이 아니라 벽을 허물고 쓸모없던 별궁들을 재배치 한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복잡했던 길이 풀리고 건물과 건물,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 또한 훨씬 간편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강성하게 제국을 이끄셨지만, 말년에 이르시기까지 자신이 한 업적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는 황궁 재건축 사업을 꼽으셨지요.”
황녀는 오래 전의 추억을 회상하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곧 지워졌다.
“그리고 12살의 저는 우연히 어떤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검술 연습을 하다가 손바닥이 찢어져 상처가 났을 때였다. 피가 흘렀고, 극성맞은 유모는 사제를 데려오겠다며 달려갔다. 유리아는 유모를 기다리다가 피 묻은 손으로 어떤 벽을 짚었고 그 안으로 쑤욱 빨려 들어갔다.
“그 방은 내 아버지, 할아버지도 몰랐던 방이었습니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공간에서 황족의 피를 묻혀야만 열리는 비밀의 방이었죠.”
엎어졌던 유리아가 일어나서 본 공간의 첫 감상은 이러했다. 뒤죽박죽. 바로 앞의 복도가 갑자기 천장으로 치솟는가 하면 서너 갈래로 갈라졌다가 낭떠러지처럼 뚝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벽 없이 서 있는 문들이 길가에 듬성듬성 서 있기도 했다. 길 바깥으로는 어둠이 가득 차 있었고, 그곳으로 가려고 해도 길이 없기에 가지 못했다.
아주 요상한 공간이었다.
“원래부터 그 공간이 그런 모습이었는지는 짐작 가지 않았습니다. 황궁 재건축 사업을 하면서 멀쩡했던 것이 그렇게 된 건지 아니면 애초부터 그랬던 건지. 하지만 저는 왠지 처음부터 그런 모습이었을 것 같았습니다.”
유리아는 바로 앞의 길을 따라 걷다가 멈췄다. 길은 직각으로 꺾여 벽처럼 이어져 있었다. 소녀는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용기를 내어 그 벽 같은 길에 발바닥을 댔다.
그러자 놀랍게도 유리아는 벽에 서게 되었다. 아니, 벽이 바닥이 되었다. 소녀가 뒤를 돌아보자 아까까지 디디고 있던 길이 등 뒤의 벽이 되어 있었다.
왔던 길에 다시 발을 대자 중력은 그녀가 디딘 곳을 중심으로 다시 아래로 향했다. 신기하게도 공간의 중력은 닿는 바닥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 것이다.
“난 그 놀라운 공간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탐험했습니다. 내 머리 위에 다른 천장 같은 길이 있고, 힘껏 뛰어오르면 어느 지점에서 중력이 역전되어 떨어지게 되었죠. 중력이 역전되는 순간에는 잠시나마 붕 떠 있게 됐는데, 저는 그 느낌이 그렇게 짜릿할 수 없었습니다.”
12살의 어린 유리아는 지지대 없이 덩그러니 서 있는 문을 열어보려고도 했다. 대부분은 잠겨서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몇 개는 열렸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유모가 날 찾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어디서 왔는지도 짐작가지 않을 정도로 그 미지의 공간은 뒤죽박죽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옆의 문을 보니 그곳에 출구라고 적혀 있더군요. 마치 이 공간이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았습니다.”
출구라고 적힌 문은 부담 없이 열렸다. 문 안으로 들어선 유리아는 처음 벽을 짚었던 그 장소에 서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모가 사제를 데리고 돌아왔다.
‘유모!’
‘유리아님, 오래 기다리셨지요? 여기 사제님을 모셔왔습니다. 어서 손바닥을 보여주세요.’
‘아니, 유모. 나 없어지지 않았어?’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 계셨던 것 아니셨나요?’
‘···아니야.’
“난 더욱 더 그 비밀의 공간에 빠져들었습니다. 틈만 나면 그곳으로 들어갔지요. 그곳은 중력의 방향이 이상하게 작용하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도 비틀려 있었기에, 내 할 일을 다 마치고 난 후라도 그 공간을 탐색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습니다.”
유리아는 황녀로서 받아야 할 수많은 수업과 교육, 훈련이 있었고 다른 형제들과 경쟁을 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한 번 원리를 알게 되니 굳이 훈련장의 벽이 아니더라도 들어가는 데는 문제가 없더군요. 중요한 건 내 피와 의지였습니다. 사실 검술 훈련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유모가 오기 전까지 어디 숨을 곳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나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였고, 경쟁이나 지고 이기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때는 아직 형제자매끼리 사이도 괜찮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허나 그런 유리아라도, 자신이 찾은 공간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난 어린 마음에 나만의 비밀 공간이 생겼다는 것에만 기뻐했을 뿐, 그 방이 가진 가치는 몰랐지요. 하지만 차차 알게 됐습니다. 그곳에는 그 공간을 발견한 역대의 황제, 혹은 황족들이 남겨둔 수많은 기록과 보물들이 있었지요. 보물들은 대부분 골동품이나 그도 못하는 쓰레기가 대부분이었지만, 몇 개는 지금 기준으로도 놀라운 성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유리아는 어떤 문을 열었고, 그 안에 가득 찬 책장을 발견했다. 책들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오래 전 절판됐다고 알려진 서적이나 인물 도감, 소설, 각종 상식이나 지리 등 장르와 종류가 많았다. 하지만 유리아의 관심을 가장 끈 건 이 공간을 발견한 역대의 황족들이 남긴 기록들과 도색 서적이 가득 꽂힌 책장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난 사람 아닌 줄 알아요?”
황녀는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그런 그녀가 루드비히라는 삼백 년 전의 조상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비교적 최근인 2년 전이었다.
“왜냐면 이제 본격적으로 황위 계승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난 장녀였지만 어머니는 황후가 아니었어요. 반면 내 남동생은 황후 소생에 장남이었지요. 하지만 제국 역사에 버젓이 여제, 루이즈 라페다 드 휘페리온이 통치한 시절이 있었기에 내 위치는 그리 불안하진 않았어요. 그리고 난 그 여제의 오빠인 루드비히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됐죠.”
하지만 루드비히에 대한 기록은 황가의 계보나 역사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유리아는 자신의 비밀의 공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서재를 뒤진 끝에, 한 수필을 찾아냈다. 루드비히 드라카스 드 휘페리온이 남긴 수필이었다.
“그분에 대한 기록은 고작해야 얼굴이 그려진 초상화와 황위를 여동생에게 물려주었다는 짤막한 글줄이 전부였습니다. 어째서인지 그분은 자신의 공식적인 기록이 남겨지는 것을 저어하셨죠.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후에 황제가 될 여동생을 생각해서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습니다.”
유리아는 앉아서 수필을 읽기 시작했다. 그 수필에는 루드비히가 어째서 황위를 뿌리쳤는지, 황야를 떠돌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손 글씨로 쓰여져 있었다.
“저는 정신없이 조상님이 쓴 글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마지막에 남긴 유언을 읽게 되었지요.”
***
황궁은 화려한 곳이나 차갑고 냉엄한 공간이다. 태어날 적부터 다음 황제로 지목된 후계자, 루드비히에게 황궁은 그런 곳이었다.
여느 황족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은발과 금안의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루드비히는 황제나 권력, 고개를 조아린 신하들보다는 다른 것에 더 이끌렸다.
창 바깥의 자유. 광활한 평야,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설산과 대수림이 더 좋았다. 어릴 적부터 여행자들이나 모험가들의 수기를 즐겨 읽은 루드비히에게 그런 동경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리고 여동생, 루이즈는 그런 오빠의 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 그렇다면 세상으로 나가시지요.”
“그럼 황제는 누가 한단 말이냐?”
“제가 하겠습니다.”
루드비히는 여동생의 선언을 듣고 놀란 표정이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루이즈가 그런 결심을 품은 것이.
“나 때문이냐?”
“무슨 그런 착각을. 오라버니가 자유로운 세상에 뜻을 가졌듯, 저 또한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뜻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럼 준비를 해야겠구나.”
루드비히는 그 때부터 방탕한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수업과 훈련을 내팽개치고 황궁을 빠져나가는 것은 예사요, 저잣거리에서 신분을 숨긴 채 도박을 즐기다 걸리기도 했다.
결국 루드비히는 귀족원에 의해 황태자의 자리에서 숙청되었다. 그리고 여동생, 루이즈가 다음 황제의 후계로 지목되었다.
루드비히가 그런 생활을 하는 동안 루이즈는 빈틈없이 공부와 귀족들간의 인연을 쌓아나갔다. 그녀를 지지하는 대신들은 과반수를 훌쩍 넘길 지경이었다.
“계획대로다, 루이즈. 다만 너에게 과도한 짐을 부여한 것은 아닐까 걱정되는구나.”
“미소나 거두고 얘기하시지요. 언제 떠나십니까?”
“내일.”
“그럼 또 언제 뵐 수 있겠습니까?”
“살아만 있다면 다시 만나지 않겠느냐. 잘 있거라, 동생아.”
루드비히는 다음 날 황궁을 나섰다. 그의 바램을 알고 있던 황제는 다만 침묵으로 아들을 배웅했다. 루드비히는 황궁을 향해 절을 한 번 하고 뒤돌았다. 드넓은 세상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의 나이 스물이었다.
마법으로 머리카락 색깔과 눈동자를 바꾼 루드비히는 자유를 만끽했다. 그리고 9년의 세월 동안 황야를 떠돌았다. 북부의 아운힐나르 산맥, 중부의 왕국들, 남부의 대 사막과 대 수림 등. 수많은 종족, 유적, 인연들.
좋은 인연도 있었지만 그보다 나쁜 연이 더 많았다. 루드비히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말을 타고, 때로는 걸으며 태양과 달, 별을 머리에 이고 여행을 이어나갔다.
가끔씩 황제의 자리에 오른 여동생이 제국을 잘 통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렇게 서부에서 북부, 중부, 남부, 그리고 다시 위로 올라간 루드비히는 북동부의 오래된 도시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예전에 황궁을 박차고 나온 황자 아닌가.”
“···그걸 어떻게?”
루드비히를 보며 웃음 짓던 그녀의 동공이 한차례 위아래로 길쭉해졌다가 다시 동그래졌다.
“···위대한 존재를 만나게 되어 영광···.”
“으엑, 집어쳐.”
“알겠소.”
시간이 지나고, 그와 그녀는 연인을 넘어 부부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는 가지지 못 했다. 그리고 루드비히는 왜 그런 것인지 알고 있었고 수긍했다. 하지만 그녀는 수긍하지도, 납득하지도 않았다.
“저, 이스? 이 수갑은 뭐야? 왜 내가 묶여있는 거지? 아래의 마법 진은 또 뭐고?”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어.”
“아, 그거 참 멋진 말이야. 어디다 적어두고 싶을 정도인데. 일단 이 수갑 좀 풀어주면··· 후읍?!”
“입 닥쳐.”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 아이는 가질 수 없었다. 15년이 흘렀다. 루드비히는 늙어갔고, 그녀는 늙지 않았다. 그녀는 가끔씩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은 괜찮아. 아직은.’
10년이 더 흘렀다.
그녀는 점점 여러 마법, 주문들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잊혀진 고대의 주문, 혹은 이차원의 존재와 닿을 수 있는 어두운 주문들도 있었다.
루드비히는 차마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그저 옆에서 변함없이 사랑과 응원을 보내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