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23화 (24/225)

23화 숨겨진 비밀

***

그럼 약혼이라도 하지 않겠냐는 성주를 말리는 건 지난했다. 결국 알베르트가 끼어들어 면박을 주고서야 프레드릭 성주는 멈췄다. 러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고 성주는 시무룩해졌으며 제오나는 혼란스러워 했다.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커다란 응접실에 앉아 쿠키와 과자를 대접받았다. 렉시만이 쿠키를 들고 깨작거렸다. 문득 러셀은 황녀에게 생각이 미쳤다. 같이 온 늑대머리 투구 기사도 중간에 어디론가 가버리지 않았던가.

“근데 황녀는···.”

성주는 황녀란 말을 듣자마자 질색하는 기색이었다. 알베르트가 ‘성주님, 표정 관리 하십시오.’ 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계속 그 얼굴이었을 것이다. 프레드릭 성주가 마지못한 태도로 말했다.

“황녀께서는 내게 먼저 자네를 양보해 주었지. 식사가 끝나면 보내달라고 하시더군. 하여간 병사를 이백 명이나 끌고 와서 생색은 다 낸단 말이지···.”

“그래도 자기 병사 먹일 식량에 대해 값은 치뤘잖습니까.”

“그러니 내가 이리 조용히 있지 않나? 그것마저 안 했으면 내쫓았을 걸세.”

“그럼 다른 도시나 영주들에게 그리 좋지 못한 시선을 받을 겁니다. 제국과 척을 지는 행동은 위험합니다.”

“에잉! 정말 황녀만 아니었어도.”

“난쟁이 은행에 대출을 빌리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황녀 전하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습니다.”

으으. 대출만큼은, 대출만큼은 안 돼···. 하고 머리를 부여잡으며 침몰하는 성주를 놔둔 알베르트가 러셀에게 다가와 지팡이를 쥐지 않은 다른 손을 내밀었다.

“어제 자네의 신위. 무척 인상적이었네. 아차, 내 소개를 아직 안했군. 알베르트라고 하네.”

“러셀입니다.”

알베르트는 여러모로 러셀이 상상했던 보통의 요정에 걸맞은 생김새였다. 약간 탁해진 금발에 짙은 남색 눈동자, 얼핏 여자로 착각할 만한 미형의 젊은 얼굴 등. 알베르트가 웃는 낯으로 말했다.

150년을 넘게 살았으면서도 그런 광경은 처음이었지. 그리고···.”

-그 머리 색깔과 자안도. 보기 드문 외형이지.

러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입에서 나오는 서로 다른 말. 하나는 육성의 것이고 하나는 마력의 것이었다. 알베르트는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무엇보다도 그 대검을 휘두르는 솜씨가 대단하더군. 보통 클레이모어보다도 커다란 검을 다루는 능력에, 트롤과 미노타우로스에 이어 용족인 드라칸까지 죽이다니! 거기다 마력 또한 마법사 못지않게 잘 쓰고. 우리 칼리스덴에도 이름난 검파가 길드로 있는데, 혹시 알고 있나?”

-검은 머리칼이야 드물긴 하지만 대륙에서 심심찮게 발견되는 색깔. 우리 요정 중에서도 나오니까 신기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자안이라. 들었던 소문 중 하나가 떠오르는군. 한 변방의 귀족 가문에서 가주가 실종됐다가, 일주일 만에 한 아기를 안고 나타났다는. 그 아기의 눈동자가 자안이었다고 하던데.

150년을 넘게 살았다는 요정은 확실히 보통 마법사가 아니었다.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솜씨가 이런 것인가. 성대로는 러셀에 대한 칭찬과 검술관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마력으로 빚어낸 음성은 그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그렇군요. 처음 들어봅니다.”

러셀은 말없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귀족 같이 잘생긴 얼굴이 웃는 모양새였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맹수도 찢어발길 수 있을 만큼 흉포한 것이었다.

“레필리아 검술관. 우리 제오나 아가씨를 가르친 검술 길드가 바로 그곳이라네. 자네도 나중에 한 번 가보게나. 검술 길드장이 아주 강한 사람이니까. 아마 자네도 검술만으로는 그녀를 쉽게 이길 수 없을 걸?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거야.”

-어이쿠,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 말게나. 자네의 비밀을 떠들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 그런데 솔직히 너무 대놓고 다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다니면 굳이 내가 아니라도 알 사람은 다 알아차린다네. 뭣하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러셀은 웃음을 지은 표정 그대로 말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바쁜 몸이라 힘들겠군요. 칼리스덴은 며칠 정도만 있다가 떠날 생각이라서요. 다음에 들리면 만나보도록 하지요.”

-내 눈은 웬만한 마법적 조치로는 숨길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런 것도 시도해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까?

보통 사람이라면 둘 중 어느 것도 알아듣지 못하고 혼란에 빠졌을 것이나 러셀은 당연하게 두 개의 대화 모두를 알아듣고 되려 똑같이 마력으로 빚은 음성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알베르트는 곧바로 자신의 수법을 간파하고 써먹는 러셀에게 놀람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내지 않고 말했다.

“그런가? 좋은 구경이 되었을 텐데. 아, 그리고 경매 대금을 받으러 상회에 갈 필요는 없네. 내가 트롤 시체를 샀으니까. 보상금은 여기서 한꺼번에 내줄 걸세.”

-역시 그 눈은 마안이로군. 어제 용족의 말을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 했네만. 잠깐 내 연구실에 와서 그 이능을 보여 달라고 하면 실례겠지?

하여간 마법사들이란. 러셀은 속으로 혀를 차고 말했다.

“그렇게 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감사합니다.”

-실례입니다.

“뭘. 우리 도시와 제오나 아가씨를 구해준 은인인데. 이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니겠나. 핫핫핫.”

-아쉽군. 알겠네.

둘의 대화는 겉으로 보기엔 아주 평범하고 단란한 것이어서, 누구도 그 이면의 속사정을 알지는 못했다. 둘 다 웃음을 띈 얼굴로 대화를 나눴기에 더욱 그랬다.

다만 러셀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본 제오나가 멍한 표정이 된 것에 프레드릭 성주가 그녀를 놀린 것과,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 제오나가 아버지의 등짝을 내리친 다음 줄행랑을 친 작은 소동이 있었다.

바닥에 엎어져 있던 성주가 허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나 에구구- 소리를 냈다.

“저것이 마력을 각성한 다음부터는 이 애비를 물 보듯 한단 말이지···. 에구. 늙으면 죽어야지.”

“제 앞에서 그런 말씀을 해봐야 우습기만 할 뿐입니다, 성주님.”

“젠장, 알베르트. 그렇게 나한테 면박을 주면 삶이 조금 즐거워지던가?”

“제 사는 낙 중 하나입니다. 존중해주시지요, 성주님.”

성주와 요정 마법사의 만담에 렉시가 입에 담고 있던 쿠키를 뿜으며 웃어댔고, 이블린도 피식 댔다. 러셀만이 차가운 눈으로 요정 마법사를 쳐다봤다. 과연 저 자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때 그는 문 바깥에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고 아까의 늑대머리 투구 기사가 들어왔다. 그녀가 말했다.

“성주님.”

그 한 마디로 충분했는지 프레드릭 성주는 곧바로 푼수 같은 표정을 지우고 허리를 세웠다. 그 모습에는 방금까지의 요정을 친구로 둔 남자,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는 없었다. 한 도시를 통치하는 지배자가 있었다.

“그래. 시간이 되었나?”

“예. 황녀 전하가 기다리십니다.”

“음. 바로 보내드린다고 전해주게.”

“그럼.”

기사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프레드릭 성주는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오늘은 이것으로 끝이군. 하지만 난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네.”

러셀은 작은 웃음만 지었다. 그러자 프레드릭 성주도 으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럼 보상을 주겠네. 그 다음 황녀 전하가 계신 곳으로 안내하지. 그분은 지금 별채에 따로 머물고 계시다네.”

성주가 품에서 줄이 달린 은종을 꺼내서 흔들자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듯 궤짝과 주머니를 든 시종들이 들어왔다. 러셀의 것이 궤짝이었다.

상자를 열자 빛에 반사된 노란 빛이 그의 얼굴을 환하게 물들였다. 수북한 금화가 잘 정리되어 늘어서 있었다. 족히 백 개는 훨씬 넘는 양이었다. 프레드릭 성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음 같아선 그 두 배는 더 주고 싶지만, 재정이 간당간당해서 말이야. 두 배를 줘버리면 꼼짝없이 대출을 받아야 되거든. 그러면 우리 도시는 망해버리지. 너무 서운해 말게나.”

서운하다니? 어떻게 이 황금을 보고 서운할 수 있단 말인가. 러셀은 크게 흡족해져 그 궤짝을 가방에 잘 담았다. 이 정도면 당분간 숙박 걱정은 덜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말을 사서 다닐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집에서 나온 지 꽤 시간이 흘러 여비가 다 떨어져 가고 있었기에 이렇게 많은 금화는 그에게 든든한 마음을 안겨주었다.

다른 일행을 보니 이블린과 렉시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머니 입구를 닫고 가방에 넣고 있었다. 그쪽들도 예상한 것보다 많은 보상금이 들어있는 듯 했다. 성주가 이블린에게 말했다.

“이블린 양, 맞지? 자네의 활약도 들었네. 용족과의 전투에서 가장 많은 병사들을 살려낸 마법사. 많이들 고마워하더군.”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흑요정, 렉시. 성벽 위에서 러셀과 더불어 가장 눈에 띈 여검사. 병사와 용병들이 하나 같이 발키리가 강림한 줄 알았다는구만.”

“잘하는 게 칼질이었을 뿐이야.”

성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도시와 병사들을 지켜줘서 고맙네. 여기 성주의 공방을 무료로 쓸 수 있는 증표도 주겠네. 대장간 거리에 가서 많이 사용하게나.”

그는 다른 시종이 든 상자를 열더니 그 안에서 훈장 비슷한 쇠붙이를 꺼내 러셀과 이블린, 렉시에게 건넸다. 수리비 굳었군.

보상금과 공방 무료 이용 증표도 받고나자 알베르트가 문을 열었다.

“황녀님이 계신 곳은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난 나중에 가겠네. 먼저 가게나.”

이후 그들은 알베르트의 인도에 따라 성 내부 복도를 걸었다. 커다란 창문이 줄지은 복도를 지나 몇 개의 작은 문과 큰 문을 통과하니 바깥이었고, 그 끝에 아담하게 지어진 별채가 있었다. 정문에는 두 명의 병사가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도시의 제복이 아니라 황녀의 것이었다.

병사는 일행을 알아보더니 말없이 창을 바로 세웠다. 알베르트도 별 말 하지 않고 그들을 지나쳤다.

별채는 아담했던 바깥과 마찬가지로 소박했지만, 있을 건 다 있었다. 그리고 황녀는 그 별채의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뒤에는 사자머리 투구를 쓴 라이오스와 늑대머리 투구의 여기사만 시립해 있을 뿐 다른 여명 기사단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맞은편에는 익숙한 금발 머리의 사제가 앉아 있었다. 엘레노아였다. 그녀는 들어온 사람들을 확인하더니 작게 목례했다.

소파에 앉아있던 황녀도 일행, 그 중 러셀을 보고 환한 얼굴이 되어 벌떡 일어섰다. 그 모습이 좀 전 홀의 성주와 똑같아 렉시는 작게 웃었다. 황녀가 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

알베르트는 황녀에게 고개만 숙였다가 그대로 나갔다. 방해하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거실에 남은 사람은 황녀와 두 동물 머리 투구의 기사, 러셀, 이블린, 렉시, 엘레노아 일곱뿐이었다.

간략하게 이블린과 렉시가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이 지나갔다. 이블린이 손으로 뭔가 수인 비스무리한 형상을 맺더니 인사했다.

“적색 마탑에서 수학한 이블린 쿠드밀라입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유리아예요. 마탑에서 오신 분이군요. 어떻게, 마스터들은 모두 정정하신가요?”

“염려해주신 덕분에 모두 건강하십니다.”

그 다음은 렉시였다.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대충 고개만 숙이는 시늉만 했다.

“렉시. 보다시피 흑요정. 남부에서 여동생을 만나러 올라왔어.”

그 불손하다면 불손한 어투와 행동에 소파 뒤에 선 라이오스가 움찔거렸지만, 전에 일이 있어서인지 행동으로 나서진 않았다. 황녀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인사를 받았다.

“흑요정은 오랜만에 보는군요. 반가워요, 렉시. 북동부라 사막보다 추울 텐데, 괜찮은가요?”

“사막도 밤에는 만만치 않게 추워. 여기는 선선해서 좋아.”

“다행이네요. 언제 한 번 제국에도 들러줘요. 멋진 볼거리가 많으니까요.”

“생각해보고.”

둘의 인사가 끝나고서야 황녀는 러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생기 넘치는 표정은 마치 생크림 케이크 위의 딸기를 마지막에 맛 보겠다는 듯한 어린 아이 같았다.

“하루 만에 다시 보는군요. 잠은 잘 잤나요?”

“염려해주신 덕분에 편안히 잘 잤습니다.”

“아침을 같이 먹지 못해 아쉬웠어요. 순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지만요.”

만약 황녀까지 식사 자리에 있었다면 아무리 러셀이라도 속이 거북했을 것이다. 러셀은 적당히 말했다.

“다음에 기회가 오면 같이 드시지요.”

“어! 지금 말 기억했어요! 진짜 같이 밥 먹어요? 그냥 인사치레로 말한 거면 가만 안 둘 거예요?!”

“···예.”

그의 답에 황녀는 삿대질하던 손가락을 느릿하게 구부렸다. 얼굴도 약간 빨간 것이 방금 한 행동이 부끄러운 듯 했다.

“큼. 못난 모습을 보였군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 도시에 온 이유를 말하기 위해 당신들을 불렀어요. 듣자하니 러셀뿐만 아니라 이블린 양과 렉시도 전장에서 활약했다고 하더군요.”

또 무슨 말을 하려고. 러셀은 슬쩍 다른 이들의 면면을 확인해봤다. 엘레노아는 언제나와 같이 무표정했다. 렉시는 하품을 참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블린은···. 뭔가 알아차린 듯한 눈빛이었다. 황녀가 말했다.

“내가 칼리스덴에 온 이유는 이겁니다. 내 조상 중 한 명의 흔적이 이 도시에서 끝났기 때문이지요.”

조상?

“삼백 년 전. 제국에 나타나 큰 피해를 끼친 악룡, 드라콘 이스메니오스를 상대한 용사.”

모두의 눈이 커졌다. 엘레노아의 파란 눈, 이블린의 녹색 눈, 렉시의 빨간 눈. 그리고 러셀의 자안까지. 그 눈동자들을 지켜보는 황녀는 어째서인지 즐거운 듯 했다. 특히 내내 별 감흥 없어 보이던 러셀을 흔든 것이.

“스스로 황위를 걷어차고 황야를 떠돈 방랑자. 여동생을 제국 최초의 여황제로 옹립한 오라버니. 그리고 제국의 수도, 히폴리아스를 완전히 불사를 뻔 했던 악룡을 물러나게 만든, 검은 갑주의 기사.”

황녀는 그 이름을 또박또박 발음했다. 루드비히 드라카스 드 휘페리온.

“난 그 위대한 조상의 흔적을 찾기 위해 칼리스덴, 이전에는 데 칼라스로 불렸던 이 도시로 온 것입니다.”

러셀은 가만히 떠오르는 생각들을 내버려 두었다. 나주렉. 괴물들. 미노타우로스. 카루곤. 용. 루드비히. 그때 이블린이 말했다.

“···전하. 저 또한, 어떤 흔적을 발견하여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황녀가 미소를 지었다.

“용의 흔적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어제 여관 식당에서 듣다 말았던 화두가 다시 올랐다. 황녀가 부드러운 손짓으로 엘레노아를 짚으며 말했다.

“여기 계신 엘레노아 사제님 또한, 비슷한 이유로 이 도시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러셀이 왼편에 앉은 엘레노아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은 잠깐 러셀에게 향했다가 다시 황녀에게 돌아갔다. 그녀가 말했다.

“제게 빛이 말씀하시기를, 오래된 도시 아래에서 전쟁과 대지의 자식이 일어날 것이라 하셨고, 또한 그것을 막으라 하셨습니다. 신의 인도와 한 전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칼리스덴에 입성하게 되었지요.”

황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깥으로는 새소리와 병사들의 기합 소리, 성 아래의 시장에서 벌어지는 왁자한 소음들이 들렸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아담한 공간 안은 더욱 고요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사제님, 마법사님은 한 목적을 가지고 모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만남이 그저 우연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군요. 마치 아무렇게나 던진 조약돌들이 완벽한 다각형을 그린 것 같습니다. 혼돈은 조화에서 깨어나고, 조화는 혼돈 속에서 잠든다 하던가요.”

황녀는 희고 고운 손을 무릎에 올려 깍지를 꼈다.

“내 조상님과 악룡. 신탁을 들은 사제. 용의 흔적을 찾았던 사악한 용족과 마탑의 마법사. 그 모든 걸 아우르는 이야기가 제게 있습니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텐데, 괜찮으시겠죠?”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소화할 시간이 필요한 참이었다. 다른 여성들도 찬성하는 기색이었다. 천장에서 빛나는 샹들리에의 빛을 내리받는 황녀의 은발과 황금 눈동자가 반짝였다.

황녀는 천천히, 부드럽고도 그윽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황궁에는 숨겨진 공간들이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