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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22화 (23/225)

22화 제안과 거절

다음 날. 침대에서 눈을 뜬 러셀은 천장에 뭔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작은 도마뱀이었다. 갈색의 비늘이 돋은 거죽에 파란 점이 드문드문 박혀 있는.

도마뱀은 천장 이곳저곳을 발바닥에 붙어있는 흡착판을 이용해서 빨빨거리며 잘도 돌아다녔다.

한동안 그것을 지켜보던 러셀은 손가락을 들어 전기를 날렸다. 파칫! 검지 끝에서 쏘아진 전기는 바로 도마뱀의 몸통에 직격했고, 놈은 바닥에 뚝 떨어졌다.

러셀은 입과 코에서 하얀 연기를 내는 도마뱀의 시체를 들어 올렸다. 일격에 죽은 듯 눈깔이 허옇게 돌아가 있었다. 옅게 고기 구운 냄새가 났다.

그는 도마뱀 시체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런데 초가을에 도마뱀이 활동을 하던가? 잠깐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곧 계단을 타고 오르는 두 묵직한 발걸음에 금세 잊혀졌다. 두 발걸음은 러셀의 문 바로 앞에 섰다.

똑똑.

“들어가도 되겠는가?”

그 목소리가 낯이 익었다.

“들어오십시오.”

묵직한 발걸음의 주인은 두 명의 기사였다. 푸른 문양이 양각된 성주의 기사와 황녀의 기사, 둘이 동시에 찾아온 것이었다. 둘 중 누구 하나는 몸이 달은 게 분명했다. 아니면 둘 다거나.

러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침대에 앉아 그의 방에 들어온 두 기사를 쳐다봤다.

한 명은 늑대의 머리 외형을 본딴 투구를 쓴 자였고, 다른 한 명은 전날 전장에서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중년의 남자 기사였다.

중년 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용병 러셀, 성주님이 자네를 보고 싶어 하시네. 그분의 따님이자 우리의 주인 되실 분인 제오나님을 구해준 것과 도시를 침략한 괴물들, 거기다 사악한 용족을 토벌한 일까지. 어제는 경황이 없어 넘어갔지만, 오늘은 꼭 성에 와주길 바란다는 전언일세.”

러셀은 퍽 신기한 눈으로 중년 기사를 쳐다봤다. 일단 고작 용병인 그에게 기사가 직접 찾아온 것도 그렇고, 도시의 지배자인 성주가 명령이 아니라 부탁조로 전해달란 말도 그랬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듯 했다. 러셀은 옆에 뒷짐을 지고 선 늑대 머리 투구의 기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황녀 전하께서도 당신을 다시 보고 싶어 하십니다. 어제의 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의외로 맑은 여성의 목소리가 늑대의 입을 타고 흘러 나왔다. 키가 크고 갑옷이 두터워 못 알아봤는데, 여자였던 모양이다. 러셀은 늑대머리 투구 기사의 무장을 살폈다.

라이오스라는 기사가 착용했던 것과 비슷한 은빛의 튼튼한 갑주. 허리춤에는 장검 하나만 달려 있을 뿐 그처럼 전쟁 망치 같은 이색적인 무기를 들고 있진 않았다.

중년 기사가 코 아래 멋들어지게 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침 식사는 아직 들지 않았겠지?”

러셀은 당장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중년 기사가 허허, 웃었다.

“다행이군. 얼굴만 씻고 바로 오게. 갑옷과 검은 착용해도 되네. 아, 그리고 자네의 일행도 같이 들어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네. 빨간 머리의 마법사와 흰 머리의 흑요정, 맞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말을 마친 두 기사는 문을 열고 나갔다. 침대에 앉은 러셀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갑옷과 대검을 무장하고 방을 나섰다. 따로 2인실을 잡은 이블린과 렉시의 문을 두드려 상황을 전달한 다음 대답도 듣지 않고 내려와 여관 뒤편의 우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침 우물물을 기르던 샤샤와 마주쳤다. 무표정했던 그녀의 얼굴은 단박에 환해졌다.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러셀님?”

“덕분에. 나도 좀 써도 되나?”

“그럼요.”

두레박을 우물에 올려둔 샤샤가 비켜서자 러셀은 품을 뒤졌다. 이용료를 낼 생각이었다. 그러자 샤샤가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 안 주셔도 돼요! 괜찮아요.”

“낼 건 내야지.”

결국 러셀이 쥐어주는 동화를 받은 샤샤는 그것을 꼭 쥐었다. 그녀는 그가 머리와 얼굴을 씻는 것을 지켜보다가 말했다.

“제, 제가 해드릴까요?”

“괜찮아. 안 들어가도 되겠어?”

“괜찮아요.”

주방에서 그녀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샤샤는 무시했다. 픽 웃은 러셀은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 꾹 짜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번에 뒤로 넘겼다.

목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고개를 젖힌 자세 그대로 하늘을 보던 러셀은 해가 밝게 떠 있는 것을 보았다. 날씨는 춥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더웠다. 가는 길에 알아서 마르겠지.

“러셀님, 잠시만.”

“응?”

그때 샤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까치발을 들어 그의 얼굴을 닦았다. 이마와 눈가, 우뚝한 코, 볼을 꼼꼼히 닦던 손길은 입술에서 잠시 멈칫거렸다가 그대로 이어나갔다. 러셀은 약간 무릎을 굽혀서 얼굴을 맡겼다.

“나 가봐야 하는데.”

“···다 됐어요.”

한참을 러셀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샤샤가 마지못해 손을 뗐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작게 웃은 러셀은 손을 뻗어 샤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샤샤는 눈을 꼬옥 감더니 말없이 그의 손길을 받아 들였다. 이따금씩 고양이처럼 저가 먼저 정수리를 손바닥에 비벼대기도 했다. 그럴 때의 얼굴은 행복에 가득 차 있어서, 언제까지고 쓰다듬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곧 러셀이 손을 떼자 샤샤는 아쉬움이 그득 담긴 표정으로 러셀을 올려다봤다. 아까는 고양이 같았는데, 지금은 또 강아지 같다. 러셀이 말했다.

“갈게. 아침은 안 차려도 돼.”

“···떠나시나요?”

“아직은. 점심이나 저녁은 먹으러 올 거야. 어제 맥주 맛있더라. 다른 음식들도 좋았어.”

“···갔다 오시면. 오늘 저녁에도 목욕 하실 건가요?”

샤샤는 저도 모르게 러셀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러셀은 짓굳은 웃음을 지었다. 그가 약간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대자 그녀의 얼굴이 금세 빨개졌다.

머리카락은 햇빛에 반사되어 연한 갈색으로 빛났고, 몸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어제 그의 몸을 닦았던 향유의 향이었다. 러셀이 물었다.

“왜? 내가 했으면 좋겠나?”

“···예.”

러셀은 그녀의 당돌한 대답에 부드럽게 손을 놓더니 그녀의 볼을 살짝 튕겼다. 앗, 하고 귀여운 신음을 낸 샤샤가 그를 흘겨봤다.

“시간 되면. 이따 보자.”

“···네!”

그의 말에 샤샤는 밝은 표정이 되더니 길었던 물통을 들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러셀은 작게 고개를 흔들다가 식당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갔다. 마침 계단에서 깨끗한 얼굴의 이블린과 렉시가 내려왔다. 이블린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성주가 부른다니? 보상 받는 시간은 오늘 오후 아니었어?”

“난 아니다. 너희들도 아니고.”

“그래? 강한 친구를 동료로 두니 좋은 일이 많네. 렉시도 갈 거야?”

렉시는 하품을 하다가 러셀을 쳐다봤다.

“대장간은?”

“이거 끝나고 안내해주지. 안 그래도 내 갑옷을 수리해야하니까.”

러셀은 가슴팍에 가로로 크게 찢어진 가죽 갑옷을 들어보였다. 전날 카루곤의 지팡이 창날이 훑고 지나간 부위였다. 그의 피부에 난 상처는 진즉 나은 뒤였지만 갑옷은 수선을 하거나 다른 가죽을 덧대야 할 듯 했다. 렉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좋아. 나도 돈 필요해. 칼 다 부러졌어.”

그러고 보니 렉시의 역수로 쥐는 도는 절반이 부러져 나갔었다. 손잡이만 남은 것이 검집에 끼워져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래, 가자고.”

합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자 아까의 기사와, 또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경비대까지 도열하고 있었던 것이다.

“···뭡니까, 이건?”

중년기사가 러셀의 물음에 답했다.

“아, 성주님의 호의일세. 시민들도 어제 우리 도시를 지켜준 사람이 누군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각을 잡고 선 그들 중에는 어제 용병들을 데려갔던 푸른 견장의 사내도 끼어 있었다. 푸른 견장의 사내가 보내는 반짝반짝 빛나는 존경이 담긴 눈빛에 러셀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염병하는군.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들은 그렇게 호위를 받으며 성으로 걸어갔고, 결과적으로 많은 시민들의 눈길을 받았다.

이블린은 로브에 달려있는 후드로 머리를 눌러써 시선들을 피했고 렉시는 별 상관없다는 얼굴로 걸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쳐다본 건 러셀이었다.

남들보다 머리 두 개에서 세 개는 큰 키와 덩치에, 등에 맨 거대한 클레이모어까지. 러셀의 귀에 사람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워낙 많았지만, 그 중에 대검··· 벼락··· 대전사··· 천공의 사자··· 등 단어를 공통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 밤새 용병과 병사들의 입을 탄 소문들이 많이 부풀려진 듯했다.

러셀은 성주가 왜 이런 퍼포먼스를 벌였는지 대충은 짐작이 갔다.

칼리스덴 도시는 오랫동안 전란이 없던 도시다. 위치는 북동부의 끄트머리에 가깝고, 근처에 주의해야할 괴물 군락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도시가 어제 괴물들의 침공을 받았다. 시민들은 하늘의 검은 먹구름과 성벽 바깥에서 울리는 굉음에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도시는 괴물들을 무찔러 이겨냈고, 그 중심에는 대검을 든 한 전사가 있었다. 그의 특색인 검은 머리카락은 쉬이 보기 힘든 색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금세 저 호위의 중심에 선 자가 소문의 그 전사라는 것을 알았다.

아침 장사를 나온 사람들과 일을 하러 가는 상인들, 농부들이 그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누군가는 꽃잎을 뿌리고 꽃을 던졌다. 그젯밤 시간이 늦어 하지 못했던 승리의 기쁨을 러셀과 병사들에게 뿌렸다.

병사들은 미소를 지었다. 중년의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늑대 머리 투구의 기사만이 표정이 보이지 않아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성주가 노린 것은 이것이었겠지. 이거 잘못하면 코 꿰이겠는데.

그들은 환호를 받으며 계속해서 걸어갔다. 성은 칼리스덴 도시의 중앙에서 약간 북쪽에 자리했다. 중앙 광장에 서면 커다란 저택과 고성 몇 개가 보이는 것이었다.

지대가 완만히 올라가 있어서 절로 사람들이 우러러보게 만드는 성이었다. 큰 대문과 안쪽의 복잡한 길, 몇 개의 크고 작은 문들을 통과할수록 병사들은 줄어들더니 남은 건 중년의 기사와 그리고 러셀 일행뿐이었다. 늑대머리 투구 기사는 중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들은 성주의 홀에 들어섰다. 가장 상석에 성주가 앉아 있었고, 그 옆에 제오나가 앉아 있었다. 안주인으로 짐작되는 여성이나 황녀는 보이지 않았다. 프레드릭 성주가 러셀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우리 칼리스덴을 구한 용사가 왔군!”

프레드릭 성주가 박수를 치자 홀 양옆에 도열한 기사들도 손뼉을 부딪쳤다. 짝짝짝짝···.

큰 홀이 울리던 박수 소리가 차츰 가라앉았다. 성주는 제오나를 이끌고 내려와 러셀에게 다가왔다. 뒤에 요정 마법사, 알베르트가 조용히 따라왔다.

“어제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감사 인사도 못 했네. 거기다 부르지 않은 손님까지 오신 마당이라 더 그랬지.”

성주가 오른손을 내밀자 러셀은 선선히 마주 손을 내밀었다. 프레드릭 성주는 신나게 팔을 흔들더니 옆에 선 딸에게 고개를 돌렸다.

“노아야, 인사 드려야지?”

러셀은 새삼 제오나를 쳐다봤다. 어제와는 딴판인 여자가 서 있었다. 진창에 굴렀던 갑옷은 어디론가 벗어 던지고 검은 색과 푸른 색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어깨가 훅 파이고 가슴골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제오나는 물빛 머리칼에 어울리지 않게도 새빨개진 얼굴로 치마를 손으로 붙잡고 인사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러셀은 아무 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을 유심히 보던 프레드릭 성주는 자, 하고 말하더니 그들을 식당으로 이끌었다.

“아직 아침 안 들었지 않은가? 우리 요리장의 솜씨를 보여줄 수 있어 기쁘구만. 어서 들어오게.”

불편한 표정의 러셀과 무표정한 이블린, 렉시가 길다란 식탁 앞 의자에 앉았다. 가장 상석에는 성주가 혼자 앉았고, 러셀 바로 앞에는 제오나가 마주 앉은 자리였다. 알베르트는 성주의 뒤에 서 있을 뿐이었다.

곧 흰 모자를 쓴 요리사들이 음식이 담긴 카트를 밀고 들어와 식탁에 차리기 시작했다.

프레드릭 성주는 용병인 러셀이 어떻게 식사를 하나 지켜보다가, 의외로 품위에 떨어지지 않는 식기 사용법을 보이자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러고는 뭔가 의심하고 있던 것에 확신을 굳힌 듯 했다.

성주는 식사 하는 내내 러셀을 보며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나이는 몇 살인가, 여행한지는 얼마나 되었나, 부모님이 계신가.

러셀은 간단하게 나이는 스무 살이 되었고, 떠돈 지는 얼마 되지 않았으며, 부모는 모두 어릴 적 헤어졌다고 답했다. 그럼 어떻게 그리 강하냐는 질문에는 그저 어렸을 때부터 검을 쥔 덕분이라며 말을 돌렸다.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와 와인이 담긴 유리잔이 모두의 앞에 내려졌다. 이블린은 담담히 와인을 마셨고, 렉시는 신기한 걸 보는 눈으로 유리를 들여 봤다. 러셀이 와인 잔을 굴리는 것을 지켜보던 성주가 불쑥 물었다.

“혹시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가?”

“푸흡!”

내내 조용하던 제오나가 마시던 와인을 뿜었다. 하얀 식탁보가 붉은 와인 방울에 점점이 물들어갔다.

“콜록, 아빠! 콜록, 콜록!”

“제오나.”

제오나는 프레드릭 성주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가 그의 표정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아버지.”

작게 고개를 저은 성주가 다시 러셀을 보았다.

“만약 그런 여인이 없다면, 여기 있는 내 딸과 자네를 짝 지어주고 싶은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너무 갑작스런 제안입니다만.”

“아네. 하지만 내 평생 살면서 자네 같은 됨됨이와 무력을 지닌 자는 보지 못했네. 오죽하면 성주인 내가 이런 말을 하겠는가.”

“······.”

러셀은 물끄러미 프레드릭 성주를 마주봤다. 금발에 가까운 연한 빛의 머리카락과 푸른 눈. 제오나는 아버지의 눈을 물려받은 듯 했다. 그럼 저 물빛 머리카락은 어머니의 것일까. 러셀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열었다.

“부인께서도 같은 생각일지는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처음 홀에 들어섰을 때부터 성주와 제오나의 곁에 어머니로 짐작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과연 성주와 제오나의 표정이 굳더니, 짙은 수심이 자리했다. 성주가 말했다.

“···내 아내는 제오나를 낳고 얼마 못 있어 세상을 떴다네. 딸아이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보이나? 몇 없는 아내의 흔적 중 하나지. 눈은 나를 꼭 닮았고.”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네. 그래서, 어떤가? 고슴도치 같을 진 몰라도 내 딸이 어디 가서 못난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버지, 그만 좀···.”

“조용히 하거라, 노아야.”

성주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러셀의 답을 기다렸다. 그 모습에서 칼리스덴의 성주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딸에게 좋은 인연을 연결해주고 싶어하는 아버지가 보였다.

러셀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어 아직 배우자를 들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프레드릭 성주와 제오나가 동시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성주의 것은 안타까움의 것이었지만, 제오나의 것은 짐작이 힘들었다. 그녀 스스로도 지금 내뱉은 한숨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안도의 숨일까? 아니면?

그리고 어째서인지 안도의 숨은 러셀의 옆에서도 들렸다. 그가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지만 이블린과 렉시 모두 뻔뻔한 얼굴 그대로였다. 러셀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프레드릭 성주는 아쉬워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혹시 약혼자는 있는가?”

약혼자라. 러셀은 여기서 멀고 먼 자신의 가문, 집을 생각했다. 그곳에 두고 온 인연을 생각했다.

천둥 번개가 치던 날. 쏟아지는 폭우, 오가는 고성, 질끈 깨문 입술, 굳게 쥔 양 주먹. 돌아선 러셀과 그를 태워버릴 것 같이 이글거리던 시선. 그녀가 작게 되뇌인 다짐을 그는 무시했다. 그리고 집을 나왔다.

러셀은 말했다.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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