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시비
***
러셀은 샤샤가 가지고 온 옷가지를 입었다. 가죽 바지와 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머리끈으로 치렁거리는 머리카락을 묶으려 했다.
“러셀님.”
“응?”
“제가 묶어드릴게요.”
어느 새 옷을 다 입은 샤샤가 다가왔다. 그녀는 용의주도하게도 러셀의 옷과 자신이 미리 갈아입을 옷을 같이 가져왔다. 아까보다 깨끗한 옷과 앞치마를 두른 샤샤가 머리끈을 받아들더니 러셀의 긴 머리카락을 묶기 시작했다.
“러셀님 머리카락은 참 곱고 예뻐요···. 계속 만지고 싶을 정도로.”
러셀은 피식 웃었다. 예전의 누군가가 한 말과 똑같아서. 그러고보니 잘 지내고 있으려나. 도망치듯 떠난 게 조금 미안하긴 했는데.
“자. 다 됐어요.”
러셀은 샤샤가 묶어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뒤돌아섰다. 진한 홍조가 오른 샤샤가 미소 지은 채 서 있었다.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은 촉촉했고, 피부는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고마워.”
“···뭘요. 제가 더 고맙죠.”
샤샤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고 싶은 말이 가슴 속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꺼내지 않았다. 지금의 이 순간이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기적 같은 것임을 알기에. 그렇기에 그녀는 다만 말했다.
“식사 다 차려져 있을 거예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러셀은 오늘 낮에 떠나기 전 했던 말을 기억하는 샤샤에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 이마에 입술을 맞춰 주었다.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잘 먹을게.”
샤샤는 러셀이 계단을 타고 식당으로 올라가고 나서도 한참을 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 손은 이마에, 다른 손은 배에 댄 더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
한 손에 대검이 들어간 칼집을 든 러셀은 식당의 벽난로에 가까운 자리에서 이블린과 렉시를 발견했다. 식당 안에 그들 말고는 별로 사람이 없었다.
용병인 듯 무장을 한 이들 몇몇 만이 동떨어진 구석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자 타닥거리는 장작불을 멍하니 보고 있던 이블린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야? 음식 다 식었잖아.”
“그렇게 됐어. 이게 내 고긴가?”
러셀은 식탁 옆에 대검을 기대 세우고 앉았다. 그리곤 곧장 큼직한 고깃덩이를 집어 뜯어먹기 시작하자 이블린은 기도 안 찬다는 얼굴이었다. 렉시만이 의미심장한 표정이었다.
흑요정은 곧 지하에서 올라오는 샤샤를 봤다. 올라오자마자 러셀이 있는 곳을 힐끔 보더니 바로 주방으로 들어가는 샤샤. 그 씰룩이는 엉덩이를 보던 렉시는 시선을 돌려 러셀을 쳐다봤다.
“좋았어?”
“뭐가.”
“목욕.”
고기를 우물거리던 러셀은 고개를 들었다. 렉시가 빨간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진한 분홍빛, 혹은 옅은 보랏빛 피부색의 귀가 쫑긋거렸다. 이런 젠장.
“···좋았지. 말 시키지 마라. 밥 먹는 중이다.”
“흐으응.”
“···지금 무슨 얘기 하고 있는 거야? 나만 못 알아듣는 은어, 그런 건가?”
혼자 이야기를 못 따라가던 이블린이 성을 냈다. 화제를 돌려야 겠군.
“아무것도 아니다. 너흰 안 씻었냐?”
“난 별로 더러운 것도 없었어. 청결 주문도 있고. 그것보다는 배가 더 고파서.”
“나도. 옷만 갈아입고 내려왔어. 누구처럼 깔끔 떠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 누구인 러셀은 피식 웃음만 짓고 식사를 이어갔다. 많았던 고기들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얼마 남지 않아 있었다.
곧 식은 스튜를 접시 째로 들어 마신 러셀이 손을 들었다. 바에 있던 샤샤가 종종 다가왔다.
“맥주 좀 주겠어? 진한 걸로.”
“나도. 인간 맥주는 오랜만이야.”
“저도 한 잔 줘요.”
“네에.”
샤샤는 주방으로 들어갔다가 바로 맥주를 남은 나무잔을 갖고 왔다. 뭔가 전의 것보다 맑은 황금빛이었는데, 위에 얼음 몇 개도 동동 떠 있었다.
“맛있게 드세요.”
곧 거구의 남자, 빨간 머리의 마법사, 흰 머리의 보랏빛 피부 흑요정은 각기 맥주를 마셨다. 탁, 하고 내려놓은 이블린의 얼굴에 붉은 취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 어우. 이거, 확 도네···.”
러셀은 웃기만 하고 맥주를 다 마셨다. 맛이 썩 괜찮았다. 거기다 얼음까지 들어가 있어 더 좋았다. 샤샤의 서비스 인 듯 했다.
그가 한 잔을 더 주문하는 사이 렉시는 아직도 맥주잔을 입에 대고 있었다. 그리고 러셀이 새로 받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실 때가 돼서야 잔을 내려놨다.
“콜록, 에흠. 맛있네. 마시써.”
렉시의 얼굴색은 변함이 없었지만 말투는 그렇지 않았다. 취기가 돌아도 돈 것 같지 않은 피부색 덕에 겉으로 보면 참 멀쩡해보였다.
“취했냐? 발음이 왜 그래?”
“뭐어? 내 발음이 뭐 어때서어?”
요정이 술에 약하던가? 러셀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알게 뭔가. 집 나와서 처음 만난 요정이 흰 피부 요정도 아니고 흑요정인데. 알베르트를 보긴 했지만, 먼발치에서나 본 것이고 바로 전투가 이뤄져 대화를 나눠보진 못했다.
“야! 야아, 루시이!”
“러셀이다.”
“루시!”
“러셀.”
“루우시이!”
“···러셀.”
“너, 너 말이야! 어! 뭐 그렇게 강하냐? 어? 막, 날개 달린 놈들도 번쩍! 하니까 죽고. 소머리도 번쩍! 하니까 죽고. 용머리도 번쩍! 하고 죽이대? 그렇게 강하면! 강하면 다냐!”
이거 술 들어가면 딴 사람이 되는 요정이었군. 렉시는 이후에도 몇 번 더 헛소리를 하다가 식탁에 얼굴을 박고 잠들었다. 코오- 코오- 하고 작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이블린이 작게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꽤 술이 약한 흑요정이네. 언제 만난 거야?”
“오늘.”
“오늘? 오늘 언제?”
“낮에, 서점 거리에서.”
“서점? 서점은 왜?”
“마법을 배울 수 있을까 하고.”
“···서점에선 마법과 관련된 책은 안 팔아. 적어도 마탑 인증을 받은 상점에서나 취급하지. 그리고 그런 상점은 서점 거리가 아니라 마탑 거리에 있고, 웬만한 용병에게도 안 팔아. 뭐 아카데미나 대학을 다닐 생각이라면 몰라도.”
그랬나? 이 도시에 온 지 이제 겨우 이틀째인데 뭘 알겠나. 그것도 온 다음날에 괴물들과 전쟁을 치루기까지 했는데. 이블린이 물었다.
“아카데미를 다닐 생각은 아니지?”
“그런 데 다닐 시간 없어.”
이 나이 되고서 또 무슨 공부란 말인가. 그리고 만에 하나 다니기라도 하면 그의 가문으로 언질이 안 갈 리가 없다. 추격자가 붙지 않았을까 걱정되는 판에 그런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하긴, 그런 눈과 재능이 있으니까. 부럽네에. 나한테도 잠깐 눈 좀 보여줄 수 있어?”
러셀은 고개를 돌려 이블린과 눈을 마주했다. 녹빛의 눈동자가 꼼꼼하게 그를 살폈다. 굳이 마력을 일으키지 않아 그의 자안은 그냥 평범한 눈 그대로였다.
“마력까지 일으켜달라고 하면 실례려나?”
“별로 하고 싶지는 않군. 집에 있을 때 이 눈 때문에 험한 꼴을 본 적이 있어서. 전투 이외에는 잘 안 쓰는 편이야.”
“그런가···. 미안. 마법사나 마녀라는 족속들이 이래. 궁금한 거 있으면 파내려고 하는 거.”
러셀은 어깨를 으쓱이고 맥주를 마셨다. 차가운 청량감에 이어 씁쓸한 중간, 그리고 깔끔한 목넘김을 남기는 괜찮은 맥주였다.
식당은 차츰 새로운 손님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용병들이 태반이었지만 망토를 두른 여행자나, 화려한 모자와 옷을 입은 상인들도 눈에 띄었다. 슬슬 식사보다는 술을 마실 시간대였다.
그에 맞춰 종업원들도 바삐 움직이며 음식과 술잔을 날랐다. 그 중에는 샤샤도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식탁과 손님 사이들을 오가면서 의식적으로 러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런 샤샤의 뒷모습을 쫒다가 말했다.
“너는? 이 도시에 온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처음 나한테 같이 다니지 않겠냐고도 물었고.”
“어? 어. 맞아, 그런 게 있지. 사실 나도 우연히 찾은 정보에 가까워서, 긴가민가하면서 온 거야. 그래도 마법과 주문에 몸을 맡긴 사람으로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지.”
이블린도 나무잔의 맥주를 홀짝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가까이 붙어 있는 벽난로의 장작을 향했고, 그래서 러셀도 그 장작불을 쳐다봤다.
흔히들 불멍이라고 하는 말이 현대에 있었다. 그냥 멍하니 모닥불이나 장작불이 타는 걸 바라보는 걸 뜻하는 신조어였는데, 러셀은 그게 꽤나 잘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따금씩 불티 튀는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은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여 놓지 않는 기이한 힘이 존재했다. 넘실거리며 허공을 핥는 불의 혓바닥. 치솟아올랐다가 스러지는 짧은 불티의 생.
결국 다 타고 나면 남는 것은 회색의 재. 그 화려함과 후의 허무함에서 사람은 눈을 때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러셀이 물었다.
“그래서?”
“···오늘 낮에 괴물들이 쳐들어왔지. 같이 공존할 수 없고, 서로 영역다툼을 벌이던 괴물들이 한 데 모여서. 마치 누군가의 지시를 받고 싸우는 것처럼. 싸울수록 알았어. 괴물들을 누군가 조종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결국 나타났잖아?”
“카루곤.”
이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것도 용족, 드라칸이었지. 사실 드라칸들은 인간 사회에서 보기 힘든 종족들이야. 일단 그 외견부터가 너무 괴물과 비슷하고··· 요정 같이 아름다운 드래코니안들과는 확실히 다르지. 살짝 불쌍하기도 하지만, 그거야 그들이 처신할 문제고. 어쨌든. 네가 어제 쓰러트렸던 트롤, 기억하지? 나주렉.”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장작불을 향했고 손에는 여전히 맥주잔이 들려 있었다.
“트롤과 오늘 네가 죽인 미노타우로스. 모두 마력을 각성한 괴물들이었어. 그리고 괴물이 마력을 각성하는 경우는 드물지. 극한의 오지에서나 가끔 발견되는 괴물들이, 이렇게 인간의 도시가 근접한 곳에서 둘이나 나타난다? 말이 안 되지. 그럼 가능성은 딱 하나. 누군가 괴물의 몸속에 마나의 씨앗을 심은 거야. 아주 강력한 마력과 주문을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가.”
그놈이 그렇게 강했나. 그냥 덜떨어진 놈 같았는데. 마지막에는 제 마력에 잡아먹혀서 괴물이나 되고. 이블린은 계속해서 말했다.
“드라칸, 카루곤이 트롤과 미노타우로스에게 마력을 각성시키게 하고 괴물들을 불러모아 칼리스덴을 친 거야. 왜 그랬는지에 대한 이유도··· 난 짐작이 가.”
“짐작이 간다고?”
이블린은 약간 멍한 얼굴이었다. 러셀에게 말한다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어떤 생각에 확신을 품은 듯한 태도였다.
“내가 이 도시에 온, 나조차 믿기지 않았던 이유가 상당한 신빙성을 얻었다는 걸 알았어.”
“그게 뭐지?”
이블린은 남은 맥주를 모두 꿀꺽이며 들이켰다. 그녀의 머리색과 비슷하게 빨개진 얼굴이 불기운을 받아 더 빨갛게 달궈졌다.
그녀는 그렇게 침묵을 지키다가, 술기운을 빌리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는 듯이 맥주를 털어 마시고는 조그맣게 말했다.
“···내 생각에. 아마 이 도시 어딘가에 용이 있는 것 같아.”
“용?”
갑자기 무슨 용이 나온단 말인가? 아니, 드라칸이 용족이긴 했지만. 그래도 용이라니?
러셀이 그것에 대해 더 물으려 할 때, 식당 어딘가에서 여자의 비명과 큰 웃음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이었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 커다란 웃음과 비명 소리에 골이 울린 듯 이블린은 머리를 부여잡았고, 러셀은 고개를 돌렸다.
대 여섯의 용병 일행이 앉은 식탁에서 남자 하나가 여급 하나를 붙잡고 있었다. 여급은 잡힌 팔을 빼려 이리저리 몸부림 쳤지만 근육이 억센 남자 용병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 이거 놓으세요!”
“이, 이거 놓으시라는데? 그렇게 해서 어디 놔지겠냐!”
“더 흔들어봐! 옳지! 아이쿠 잘한다! 으하하!”
용병이 크게 웃자 다른 놈들도 술잔을 식탁에 쾅쾅 두드리면서 웃어댔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작태에 눈살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들이 단검까지 꺼내 위로 던졌다 받는 시늉을 하자 뭐라 하지는 못했다.
여섯의 용병들은 모두 얼굴에 큼직한 흉터 하나씩을 달았고, 칼이나 도끼를 착용하거나 식탁에 기대놓고 있어 위협적이었다.
“이년아, 그렇게 큰 엉덩이랑 가슴을 가지고 있으면 언제 한 번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했어야 하는 거 아냐?”
“야, 델슨! 오늘 말빨 좋은데?”
“당연하지 임마! 이 혀로 천국 보내준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 여자도 보내줄 거야?”
“이렇게 계속 흔들어주면 못 할 것도 없지! 하하하!”
러셀은 바에 서 있는 여관주인을 흘끗 쳐다봤다.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튀어나온 여관주인은 굳은 표정에 주먹을 쥐고 있었지만, 저들에게 대들 수 있을 만한 깜냥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이블린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그 맥주, 다 떨어진 것 같은데.”
러셀은 그녀의 말에 잔을 보다가 그녀처럼 웃었다.
그는 다 마신 맥주잔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두웅- 하는 진동이 퍼지며 모든 소음을 일시에 걷어냈다. 별것 없는 동작이었지만 잔이 부딪치면서 낸 소리가 마력과 합쳐지자 마치 커다란 종이라도 울린 듯 했다. 식당 안은 조용해졌다.
모든 사람들의 눈이 그 소리가 난 식탁으로 향했다. 러셀은 여행자와, 상인들과, 시끄럽던 용병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붙잡혀 있는 여급, 샤샤에게 잔을 들어 올려 보였다.
“술 한 잔 더.”
드르륵, 드드득!
의자와 식탁이 시끄럽게 밀리는 소리가 나더니 용병들이 일어섰다.
“어이, 장발 머리 형씨. 내가 지금 이 여자랑 놀고 있는 거 안 보여? 어디서 작업질이야? 다른 년들 없어?”
“옆에 그 무식한 칼은 쓸 줄은 아시나? 지가 무슨 벼락의 대전사인줄 아나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