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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9화 (20/225)

19화 휴식

“전하!”

“조용!”

참지 못한 듯 라이오스가 경악성을 내질렀지만 황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쳤다.

그녀의 눈은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러셀 한 사람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금안이 자안을 직시했다.

러셀은 그 금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내쉬었다. 모두 감히 입도 벙긋 못 한 채 둘을 바라봤다.

어딘가의 이야기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이, 군주가 유능한 사람에게 직접 찾아와 등용을 청하는 모습에 제오나는 홍조 띈 얼굴로 두 손을 쥐고 둘을 번갈아봤다.

러셀의 눈은 연기와,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 흩어지는 것과, 그 위의 걷힌 하늘을 순서대로 올려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짙고 단단하게 뭉쳐있던 먹구름은 카루곤이 죽자 힘을 잃고 사라졌다.

하얀 색의 뭉게구름은 저물어가는 서쪽의 노을빛과 동쪽의 검푸른 색을 받아 연보랏빛의 비현실적인 색감을 자아냈다. 자연이 가장 위대한 화가라는 말이 실감나는 풍경이었다.

러셀은 다시 눈을 내려 그 노을을 한 몸으로 받는 황녀를 봤다. 170이 약간 안 되는 키. 호리호리한 몸을 보호하는 유려한 곡선의 화려한 갑옷. 늘어트린 손은 무엇 때문인지 꼭 쥐어져 있었다.

황녀의 얼굴을 보자 러셀은 속으로 작게 웃었다. 말없는 러셀을 응시하는 황녀의 눈은 살짝이지만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설렘과 동요, 작은 두려움 등이 보였다. 무엇을 기대하는지 러셀은 알았지만, 그는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러셀은 전생의 그가 죽을 때까지 이루지 못한 목적을 아직 완성하지 못했다. 이제 겨우 집을 나왔는데 무슨.

그리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완성이 아니라 그 과정이라고 하지 않던가.

러셀이 말했다.

“거절하지요.”

황녀의 아름다운 금안이 크게 뜨였다.

“···왜지요?”

“이유도 말씀드려야 합니까?”

“네. 말해줘요.”

그리고 그녀는 답을 듣기도 전에, 가슴 속에 꾹꾹 눌러져 있던 말을 토해냈다.

“난 부족한가요?”

“예?”

측근의 기사들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말을 눈앞의 남자에게는 말하고 싶었다. 그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당신도 내가 부족하다고, 후궁의 자식이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나요.”

“······.”

“미래가 없다고, 정략의 일환으로만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무슨 소리야. 러셀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자격지심이 있는 것 같은데.

러셀은 그런 사람을 안다. 자존심은 높지만 되려 자존감은 낮은. 전생의 약한 몸을 가진 그보다도 약한 정신을 가졌던 사람들.

더 악질인 몇몇 사람들은 튼튼한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골방에 틀어박혀 가상 세계에서 살았다. 익명의 이름으로 남들을 마구 헐뜯고, 욕하고, 비아냥댔다.

현실에서는 눈도 마주치지 못할 것들이 가상에서는 얼마든지 그러할 수 있었다. 현실의 비루먹은 자신과 비교해보면 저들은 너무 찬란히 빛나는 자들이기 때문이었다.

흠.

물론, 황녀가 그런 뱀의 심장을 지닌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그런 자들도 보듬어 안아줄만한 성품을 지닌 듯 했다.

당장 일면식도 없었으면서 러셀의 신위를 보고 기사로 등용시키려는 지금의 상황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무슨 연유에선지 모르나 그녀에게는 힘과 내 사람이 절실한 것이었다.

러셀의 보랏빛 눈이 잠깐 마력을 담아 번쩍거렸다. 그러자 이상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보랏빛 눈깔은 평소에는 의지대로 상대방을 호랑이 앞의 토끼처럼 꼼짝 못하게 만들거나, 마법의 구동원리를 파악하거나 하는 이능을 지녔다.

그런데 가끔은 생각지도 못한 별 요상한 능력들을 발휘하곤 했는데, 지금이 그때 중 하나였다.

뭔가 그녀의 속마음이 보이는 듯 했다. 어째서인지 형태가 없을 감정이 어떤 선을 그리며 만들어졌다. 황녀의 갑옷을 뚫고 가슴 안쪽에서 한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축 늘어진 해바라기였다. 노란 꽃잎은 빼곡하고 줄기와 잎사귀도 푸릇푸릇하지만, 정작 해를 찾지 못해 어디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해바라기가 있었다.

러셀은 이게 자신의 알 수 없는 두 눈이 보여주는 환상인지, 아니면 정말로 황녀가 가진 감정의 형상인지 알 수 없었다.

러셀은 다만 말했다.

“제가 전하의 제안을 거절한 건 전하가 부족해서도, 다른 하잘 것 없는 이유 때문도 아닙니다. 저에게는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맡겨진 일이 있고, 그 일들을 끝마치기 전에는 다른 누군가를 섬기며 자유를 잃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차마 전생부터 꿈꿔왔던 세계 여행이라고는 말하지 못한 러셀은 적당히 포장한 말을 읊었다.

그의 대답을 듣자 죽은 동태 눈깔이던 황녀의 눈이 차츰 빛을 되찾았다.

“그런가요?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서 거절한 게 아닌가요?”

러셀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는 왜 이렇게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하면서.

“황녀 전하는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자신을 잃지 마시고, 자존을 세우십시오. 고작 야인 하나를 들이지 못했다고 어린 아이처럼 어리광 부리지 마십시오.”

그의 말을 듣는 황녀의 먹구름 가득했던 표정이 조금씩 개이며 밝아지기 시작했다.

시들었던 꽃이 햇빛과 물을 받으며 살아나는 듯한 광경에 사람들이 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째선지 오늘 하루는 계속 놀라는 일밖에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군요. 어째서인지 당신 앞에 서니 이상한 말들을 하게 되네요. 미안해요. 방금 한 말들, 잊어줄래요?”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는 해맑게 웃더니 자! 하고 외쳤다.

“나 하루 종일 달려서 배고파요. 밥 좀 해줄래요? 성주님도 만나고 싶은데.”

그 당당한 선언에 알베르트가 말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시지요.”

“좋아요. 그럼 제 병사들도 같이 들어가도록 하지요.”

“예? 병사들이라니요?”

알베르트의 물음에 황녀가 눈을 치켜떴다.

“아무렴 제가 호위기사 여섯만 데리고 다닐까요? 저 언덕 뒤에 약 이백 명 정도 되는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그들도 데려가야지요.”

“···알겠습니다. 성문을 활짝 열도록 하지요.”

알베르트는 어쩌면 난쟁이 은행으로부터 대출 받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칼리스덴의 병사와 용병들, 황녀의 기사단과 병사들은 도시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루가 저물며 마지막 노을빛으로 온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곧 밤이 되었다.

***

프레드릭 성주는 몸소 나와 황녀와 그녀의 여명 기사단, 병사들을 밝은 표정으로 환영했다. 아마 알베르트에게 먼저 언질을 받은 것 같았다.

제오나는 러셀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으나 성주가 눈썹을 치켜뜨자 아무 말 않고 성으로 돌아갔다. 그 곁을 성주의 기사들이 함께 했다.

도시의 얼마 남지 않는 병사들은 몸을 추스르고 병영으로 갔다. 용병들은 다음날 대대적인 보상을 받을 것이란 말과 증표를 받고 뿔뿔이 흩어졌다.

러셀은 감사를 표하는 성주에게 성에서 머물 것을 제안 받았으나 거절했다. 여관에 있을 짐을 굳이 옮기고 싶지도 않았고, 거북한 식사 자리에 초대되는 것도 사양이었다.

몇 번 더 설득하려 했던 성주였지만, 알베르트가 뭐라 귓속말을 하자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납득하고 물러났다. 아마 황녀의 제안도 거절했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황녀 또한 러셀을 부르고 싶은 눈치였지만 두 번이나 거절당하기는 싫었는지 다음을 기약했다. 러셀은 호기심을 담고 쳐다보거나 노려보는(아직 빨개진 코를 움켜쥐고 있는 라이오스의) 여명 기사단들의 시선을 무시했다.

성주와 알베르트, 황녀, 엘레노아는 성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뒤따라가던 엘레노아가 알 수 없는 눈길로 러셀을 바라보았으나, 고개만 꾸벅 숙이더니 걸음을 옮겼다.

남은 것은 러셀과 이블린, 렉시 세 사람이었다. 러셀은 거의 다 피운 담배꽁초를 탁 튕기더니 여관 거리로 걸어갔다. 그 뒤를 이블린과 렉시가 뒤따랐다.

도시는 완전히 안정을 되찾아 있었다.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던 잡동사니들도 모두 치워져 있었고, 시민들도 안심한 기색으로 길거리를 걸었다.

란쉬무어의 바람 여관에 들어서자 식탁을 닦고 있는 종업원들이 보였다. 그중 샤샤가 러셀을 발견하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피와 비에 젖어 엉망인 모습을 보고는 놀라 달려왔다.

한 달음에 달려온 샤샤는 러셀의 몸 이곳저곳을 살피며 다친 곳은 없는지, 의사를 불러와야 하는 건 아니냐며 걱정 어린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러셀은 고개를 젓고 목욕이 가능한지만 물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뜨거운 물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러셀은 식사를 주문하고 욕탕으로 들어갔다. 욕탕은 지하에 있었다.

갑옷과 옷을 대충 벗어놓고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큼직한 나무통에 들어가자 그의 무게에 밀려난 물이 촤악, 소리를 내며 바닥에 쏟아졌다. 모락모락 흰 수증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후우우···.”

노곤한 감각이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러셀은 눈을 감았다. 무척 긴 하루를 보낸 것 같았다.

종탑이 울렸을 때가 정오를 넘긴 시간이고 지금은 어둑해진 밤이니, 대충 여섯 시간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체감 상으로는 하루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낸 기분이었다. 그 여섯 시간이 보통 여섯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엄청난 밀도로 꽉꽉 압축되었던 시간들이 러셀의 뇌리를 헤엄쳤다.

종탑이 울리고, 시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 소중한 것을 품에 안고 이쪽으로, 저쪽으로 뛰었다.

성벽에 올라서자 보인 괴물들의 군대. 하피의 웃음소리. 병사들의 비명. 제오나의 고함. 미노타우로스의 멍한 표정.

카루곤의 벼락. 검은 거인. 걷힌 먹구름. 눈부신 노을빛. 황녀.

러셀은 피식 웃었다. 다짜고짜 자신을 주군으로 섬기지 않겠느냐는 당돌한 표정의 황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가진 꿈이 무언지는 몰라도, 그만한 태도와 인품을 가진 이라면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러셀을 가지지 않아도.

그때 러셀의 귀에 지하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샤샤의 발소리였다. 샤샤는 뭣 때문인지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는 듯 했다.

그의 귀에는 떨리는 숨소리와 두근두근 하며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러셀은 그런 자신의 감각에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시발, 이제는 문 바깥의 사람 심장 소리도 들린다니. 갈수록 괴물 같아지는 신체 능력이 조금은 무서워질 정도였다.

그렇게 몇 초간 서 있던 샤샤는 나무문을 똑똑, 하고 두들기더니 말했다.

“···러셀님. 갑옷이랑 입고 계시던 옷 수거했습니다. 그리고 러셀님의 방에서 옷가지도 가져왔어요.”

“가기다 놔줘. 고마워.”

하지만 샤샤는 돌아가지 않고 우물쭈물거렸다. 심장 박동 소리가 아까보다 더 거세게 뛰는 것이 들렸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몸 씻는 것을 도와드려도, 될까요?”

“······.”

러셀은 가만히 물에 몸을 담근 채 침묵했다. 잠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갔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그 침묵을 부정과 긍정 중 후자로 알아들은 것인지 샤샤가 문을 열고 욕탕으로 들어왔다.

끼이익. 나무문의 경첩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하얀 수증기가 가득 찬 욕탕에 들어온 샤샤의 얼굴은 새빨개져 있었다.

그녀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와 허리를 묶은 천, 그 위에 걸친 앞치마 차림 그대로 걸어왔다. 그런데 얼굴에는 뭐를 발랐는지 윤기가 흘렀고, 입술도 아까보다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나무통에 들어가 있는 러셀을 힐끔 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 닦는 것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

곧 러셀은 나무 의자에 앉은 상태가 되었다. 샤샤는 향유를 문지른 수건으로 그의 등을 닦고 있었다.

스윽. 스윽. 스윽.

“······.”

“······.”

고요 속에서 수건으로 러셀의 등을 문지르는 샤샤의 손길만이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넓은 어깨와 팔, 등을 닦은 그녀는 곧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도 뒤로 넘겨 거품을 묻혀 감겨주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 전 미용실에 갔을 때의 느낌이 생생했다. 샤샤는 두피를 꾸욱꾸욱 누르면서도 이따금씩 살짝살짝 긁어서, 러셀은 시원하면서도 간지러운 이상야릇한 감각이 들었다.

그의 귓바퀴에 샤샤의 콧바람이 닿았다. 심장은 아까처럼 더없이 뛰고 있었다. 샤샤는 나무 바가지로 물을 퍼 올려 조심조심 러셀의 머리에 부었다. 따뜻한 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흘렀다.

“이, 이제 가슴 쪽을 닦아드리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를 낸 샤샤가 천천히 러셀의 앞으로 넘어왔다. 러셀은 하반신을 가린 수건을 두른 상태로 가슴을 폈다. 샤샤는 아까처럼 똑같이 수건으로 그의 목과 쇄골, 가슴팍을 닦았다.

“······.”

샤샤는 차마 러셀의 얼굴을 마주보지 못한 채 푹 숙인 채였다. 러셀의 눈에 새빨개진 귓바퀴가 보였다.

샤샤의 손길은 거의 무아지경으로 이르렀다. 그녀의 손길대로 러셀이 말없이 팔이고 손을 내밀자 겨드랑이와 팔오금, 손바닥과 손가락을 꼼꼼히 씻어댔다. 탄탄한 근육을 더듬는 손길은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지만, 이제는 즐기는 듯 거침없이 그 위를 오갔다.

꿀꺽.

이제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하나 밖에 없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킨 그녀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러셀의 하반신을 덮은 수건을 벗기려 할 때.

“거긴 안 해도 돼.”

“···아.”

러셀의 말에 샤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곧장 그의 보랏빛 눈을 볼 수 있었다. 자수정 같이 아름다운. 사람을 홀리는. 눈을 땔 수 없는···.

수증기가 맺혀 만들어진 천장의 차가운 물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며 톡, 소리를 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샤샤는 이미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비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새 코앞에 있는 러셀의 얼굴과 눈동자에 화들짝 놀랐다.

그의 표정은 아까부터 무표정이었다. 어떤 감정의 편린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가슴이 지독하게 아파왔다.

그녀는 살며시 입술을 떼었다. 점막과 점막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감각이 몸서리치게 간지럽다. 샤샤는 달뜬 숨을 내쉬면서,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죄, 죄송- 흐읍!”

사과의 말을 뱉으려던 샤샤의 입술은 다시 러셀의 입에 잡아먹혔다. 샤샤는 입안을 침범하는 부드러운 혀에 아낌없이 호응했다.

옷이 젖는 것에 상관없이 온몸으로 그를 껴안았다. 풍만한 가슴이 탄탄한 그의 가슴 근육에 이리저리 뭉게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째서인지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가슴은 터질 것처럼 뛰고 있었고, 머리는 갈수록 몽롱해졌다.

나무통의 물은 차츰 식어갔지만, 두 사람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져갔다. 욕실 선반에 놓인 호롱불이 흔들거리며 두 남녀의 살결을 훑었다.

***

···식당에서는 이블린과 렉시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른 종업원들이 러셀이 산더미처럼 시킨 음식을 식탁 위에 차렸다. 이블린은 고개를 삐쭉 내밀어 욕탕을 보며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안 나와?”

렉시는 묘한 표정으로 욕탕을 바라봤다. 그녀의 쫑긋 솟은 뾰족한 귀에 어떤 신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고통에 찬 것이 아니었다. 못 참겠다는 듯, 쾌락에 겨운 야릇한 소리.

점점 더 거세지는 소리에 흑요정의 몸이 반쯤 일으켜졌을 때, 곧 소리는 무언가에 차단된 듯이 들리지 않았다.

“···에이.”

“응? 왜 그래요, 렉시?”

“아무것도 아냐. 우리 먼저 밥 먹자. 러셀은 늦게 나올 거야.”

“에?”

이블린은 렉시의 영문 모를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렉시는 아무렇지 않게 빵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그것을 오물거리며 욕탕을 지그시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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