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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7화 (18/225)

17화 두 번째 불청객

“···어떻게. 한낱 인간이 내 벼락을 정통으로 맞고 살아남을 리가 없다. 무슨 수를···.”

경악한 카루곤이 문득 러셀의 눈을 마주봤다. 어두워진 사위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 보랏빛 눈. 그 눈을 직시한 카루곤은 순간 어지럼증을 느끼며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크윽!”

비늘로 덮인 커다란 손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지만 굳게 눈을 감고 그 위로 손을 덮어 어둠을 만들어도 망막에 새겨진 러셀의 눈은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파칫, 파칫. 카루곤의 검푸른 비늘 위로 생성된 노란 전기가 실뱀처럼 꿈틀거리더니 그의 두 눈 속으로 파고들었다. 카루곤이 눈을 떴다. 그의 노란 눈 동공 주위로 핏줄이 벌겋게 일어나 있었다. 피 섞인 눈물을 흘리며 카루곤이 말했다.

“보랏빛 눈···. 그 드물다는 마안이로군. 어떻게 일개 인간이 마안을 가지고 있는 거지?”

“내가 어떻게 알아.”

카루곤의 지랄을 보던 러셀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근처에 같이 떨어진 클레이모어를 주워들었다. 손잡이에 감긴 가죽이 검게 타 있었다. 러셀은 거추장스런 가죽을 완전히 풀어버리고 차가운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 어차피 넌 뒈질 텐데.”

“빌어먹을 놈. 네놈 따위에게 분이 넘치는 마안을 뽑아주겠다!”

카루곤이 지팡이를 들어 그들을 겨누자 시체 병사들이 천천히 전진해 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러셀이 씨익 웃더니 바닥을 박차 마주 달려갔다. 50기의 용아병과 홀로 맞서려는 그의 모습에 공중에 떠서 상황을 지켜보던 알베르트가 경악성을 냈다.

“저런 멍청한! 혼자 달려가서 뭘 어쩌겠다고! 모두 전투 준···! 엉?”

다급히 수인을 맺던 알베르트가 이상한 의문성을 냈다. 그의 눈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지기 시작했기에. 용아병들이 박살나고 있었다. 대검을 든 한 전사에게.

찔러오는 수십 개의 창들을 한 번에 위로 들어올리고, 훤히 드러난 시체 병사들의 허리를 클레이모어가 내달렸다. 좌에서 우로 크게 휘둘러지는 검격에 시체 병사들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이별했다.

대검을 휘두르면서 드러난 러셀의 빈틈에 다른 시체 병사들이 들고 있던 창, 검, 방패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벼락이 쳤다. 카루곤의 눈이 더 없이 커지고 위아래 세로로 길쭉한 동공이 가늘어졌다.

“말도 안돼···!”

파직, 파지지직. 러셀의 왼손에 푸른 전기가 명멸하고 있었다. 처음 러셀이 벼락과 함께 나타났을 때부터 설마설마 했지만, 정말 벼락을 다루게 된 것이었다.

“있을 수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아무리 마안의 소유자라 한 들, 저런 건 불가능하단 말이다!”

드라칸의 비명과는 상관없이 러셀은 시체 병사들을 말 그대로 학살하고 있었다. 이미 죽은 놈들을 또 죽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나 상반신이 쪼개지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게 죽었다고 표현해도 무방해 보였다.

방패를 튕겨내고 대검을 찔러 넣었다. 보통 검보다도 훨씬 길고 커다란 클레이모어에 의해 처음 찔린 놈 뒤로도 세 구의 시체 병사가 한꺼번에 꿰뚫렸다. 앙상한 팔을 움직여 칼날을 잡고 버르적거리는 놈들의 옆구리를 박살내며 클레이모어가 빠져나오고, 다시 푸른 번개가 쳤다.

시체 병사들의 말라비틀어진 몸에서는 뜨거운 피나 내장이 쏟아지지 않았다. 그저 정체모를 검은 덩어리들만이 와르륵 쏟아졌다가 연기를 내며 녹아 내렸다.

검격. 벼락. 검격. 벼락. 그 끝없는 순환에 쉰 기가 넘는 용아병들이 벌써 반 이상이 줄어들었다. 전투 속에서 러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처음 카루곤에게 벼락을 맞은 그 순간부터 러셀은 어째서인지 익숙한 감각이 찾아오는 것을 알았다. 예전 이블린의 불꽃을 따라했을 때보다, 트롤의 화염 숨결을 막아냈을 때보다 더 쉽고 간결한 감각. 벼락은 더없이 익숙한 감각으로, 원래부터 있었던 오감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러셀의 육체에 스며들었다.

어째서 그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저 저 친구 없는 찐따 용대가리 괴물 놈한테 이 짜릿한 번개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콰가가가가!

푸른 전격과 하얀 검격에 용아병들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갔다.

***

“···인간이 맞는 건가?”

알베르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를 필두로 한 인간들의 집단은 알베르트처럼 멍청하게 서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필사의 각오를 하고 싸울 준비를 마쳤건만, 웬 전사 하나가 혼자 날뛰며 용아병들을 다 박살내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 말했다.

“···우리 필요 없지 않아? 저치 혼자서 다 쓸어버릴 것 같은데.”

“···그러니까. 저거 누구야?”

···“아까 혼자서 미노타우로스 죽인 놈 같은데.”

“···괴물이었구만?”

“···응.”

카-아-아-아-아-악-!

그때 전장을 울리는 거대한 괴성이 울려 퍼졌다. 인간 집단이 흠칫하고 놀라며 그 괴성의 진원지를 쳐다봤다. 어렵지 않았다. 용아병들의 뒤편에 서 있던 3미터의 용머리 괴물 거인, 카루곤이었다.

어느새 용아병들을 거의 다 박살낸 러셀이 카루곤에게 대검을 휘두른 것이었다. 무언가가 하늘을 날다가 툭 떨어졌다. 검푸른 비늘이 덮인 왼팔이었다.

***

“이, 개 같은 인간 놈!”

한 무리의 용아병들을 쓸어버린 러셀이 시체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카루곤의 공격을 피했다. 허나 예상한 것보다 반경이 넓었고, 그래서 가슴팍의 가죽갑옷이 지익하고 그어졌다.

러셀은 옅게 베인 피부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놈은 들고 있던 지팡이의 끝을 창날로 변환 시킨 다음 휘두른 것이었다.

“개도 안 키우는 새끼가 무슨 개새끼 욕을 하고 자빠졌어.”

러셀이 클레이모어를 들었다. 대검을 든 남자와 창을 든 용머리 괴물 거인은 서로의 무기를 맞부딪쳤다.

카루곤은 인간 수명의 몇 배가 넘는 세월을 살며 육체의 강건함을 더하고, 전투 기술의 숙련도를 높이며, 주문사용의 대가로 성장했다.

허나 그럼에도 러셀을 이길 수 없었다. 압도할 수 없었다. 거기다, 동수조차 이루지 못했다.

콰앙!

지팡이 창으로 대검을 막은 카루곤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이 내가, 힘과 기술에서 밀린다고?”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를 낸 카루곤이 바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위에서 내려찍힌 대검이 대지를 파며 대량의 토사를 만들었다. 빗물에 젖은 진창을 구른 카루곤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비늘 위로 흙과 더러운 용아병들의 내장 찌꺼기를 뒤집어 쓴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이···!”

꽈릉!

그리고 분노를 토해낼 사이도 없이 토사를 꿰뚫은 푸른 번개에 직격 당했다.

“끄아아아아!”

카루곤이 감전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시야가 검게 번쩍이며 흐려졌다 선명해지기를 반복했다. 그 어지러운 시야에 러셀이 대검을 휘둘러오는 게 보였다.

아직 감전을 떨치지 못한 근육은 움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부들거리며 왼팔이 들어 올려졌다. 수인을 맺으려 하나 마력도, 손가락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처음 이 칼리스덴이라는 인간의 도시 아래에 거대한 지하 미궁이 있고, 그 안에 고대의 용이 한 마리 봉인되어 있다는 기록을 찾아냈을 때만 해도 카루곤은 행복한 상상에 부풀어 있었다.

오래 전 대부분의 용들이 떠나거나 자취를 감추고, 그나마 남은 용들도 행방이 묘연해진 작금의 시대였다. 그나마 자신과 같은 용족들 말고는 그 위대한 존재의 흔적이 모두 사라졌다.

그런 와중에도 카루곤은 용의 흔적을 계속해서 찾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발견한 것이다. 수백 년 전 칼리스덴, 그때에는 데 칼라스라는 이름을 가졌던 도시가 이스메니오스라는 용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던 장소라는 것을.

그렇기에 하고 있던 모든 일을 집어 치우고 이 멀고 먼 북동쪽의 대도시까지 찾아왔다.

규모 있는 인간 도적단에 들어가 몸집을 키우고, 괴물들을 잡아 조종하고, 점점 이상함을 느낀 도적 수뇌부들을 싸그리 몰살해 용아병에 추가시키고, 트롤과 미노타우로스에게 마력의 씨앗을 품어 전 방위로 이 도시를 포위해 말려 죽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용의 존재를 찾아 자신의 마법 실력을 향상하고 새로운 진리를 얻으려 했다. 살아있어도 봉인된 상태이니 어렵지 않게 거꾸러 트릴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용족 중에 최초로 용을 길들인 용족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만, 그렇게만 된다면···!

기억의 회상은 섬광과 거대한 고통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아···?”

카루곤은 멍하니 고개를 내렸다. 왼팔이 없었다. 조금 뒤늦게 잘려나간 왼팔이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아···.”

카루곤이 비척거리며 물러났다. 어깨 죽지 바로 아래로 잘려나간 팔에서 검은 피가 주르륵 떨어져 내렸다.

“아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카루곤이 비명을 토하기 시작했다. 비명은 갈수록 쇳소리가 섞이더니 나중에는 숫제 괴성이 되었다.

카-아-아-아-아-아-아-!

“다! 모조리! 죽여버리겠다-!”

검고 혼탁한 마력이 카루곤의 피부에서 스멀거리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징조가 일어나는 모습에 러셀은 바로 달려들려 했으나,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쾅 하고 치는 것에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날아가던 러셀은 공중에서 자세를 바로 잡아 발을 아래로 해서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내려선 그는 클레이모어를 들었다.

“뭐야?”

엄청난 비바람이 불어 닥쳤다.

“우아악! 뭐야!”

“제, 젠장! 나 좀 잡아줘!”

눈도 뜨기 힘든 엄청난 비바람에서 멀쩡한 건 몇 되지 못했다. 알베르트와 엘레노아, 렉시, 마법사들, 기사들과 제오나만이 마력을 일으켜 바람에 떠밀리지 않았다. 알베르트가 카루곤을 향해 모여드는 부정한 기운들을 보고 경악했다.

“저건 죽은 자들의 원념과 백(魄)이잖아? 저 미친 놈이 무슨 마법을···!”

러셀도 바람이 불어져 오는 곳을 쳐다봤다. 아까 성벽에 있었을 때 봤던 음습하고 부정한 기운들이 카루곤에게 빨려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검은 회오리가 놈을 감싸는 것처럼 보였다. 저 놈이 한 짓이었군.

카루곤의 주위에는 살아남은 용아병 넷이 서 있었는데, 그 복장을 보니 마법사 용아병이었다. 비틀어진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마법사들이 네 개의 방위에서 카루곤을 보며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와 불안하게 회오리치는 마력의 흐름이 소용돌이쳤다. 주문이 뚝 끊겼다.

그리고 네 기의 용아병 마법사들이 픽 쓰러졌다. 바람이 멈췄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확연히 약해졌다. 카루곤이 마지막 시동어를 읊었다.

“재앙의 검은 가지.”

콰자자자작!

검은 먹구름이 덮인 하늘에서 그와 비슷한 색깔의 검은 번개가 내려쳤다. 그 수가 한 둘이 아니었다. 수십, 혹은 수백 개의 벼락이었다.

“광휘의 물결이여! 그 따뜻함과 자애로운 마음으로 널리 보듬어 안으소서!”

엘레노아가 바로 메이스를 두 손으로 잡으며 깃발처럼 들어올렸다. 그러자 그녀가 두르고 있던 빛의 날개와 갑주가 고운 입자의 물결로 변하더니 팔을 타고 올라 메이스에 응집됐다.

그리고 메이스에서 뿜어진 황금빛의 선이 어느 지점에 이르더니 반구형으로 퍼지며 인간 집단을 보호하는 방어막을 형성했다.

엘레노아가 늦지 않게 방어막을 만든 덕에 인간 집단들은 무사했다. 모두 감탄의 눈빛과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동시에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송골거리며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땀방울. 힘에 부친 듯 떨려오기 시작하는 팔다리. 아득 깨문 입술에서 피 한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콰자자자작!

“사제! 이런···!”

알베르트가 곧장 그녀의 부담을 깨닫고 지팡이를 들어 안쪽에 새로 방어막을 형성했다. 요정 마법사가 전력을 다해 방어막을 치자마자 엘레노아는 메이스를 놓치고 쓰러졌다. 그리고 아직도 내려치고 있는 검은 번개가 알베르트의 방어막에 꽂혔다.

“크으윽! 이··· 런, 무지막지한 마법을···!”

150년을 넘게 산 요정 마법사마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지팡이의 갈고리 안쪽에서 돌아가는 푸른 수정이 모양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회전했다.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거야?”

“하나도 안 보여!”

“시발, 이렇게 죽는 건가···.”

사위를 검게 뒤덮은 검은 벼락 때문에 방어막 바깥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쩌적, 하는 불길한 소리. 알베르트가 만든 방어막에 조금씩 균열이 가는 소리였다.

쓰러진 엘레노아가 파들거리는 손을 들려 했지만 계속 힘에 부치고, 그 옆에서 렉시와 이블린, 제오나가 사제를 받친 채 방어막 바깥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표정에는 다른 병사나 용병들 같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체념의 감정이 없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푸른 섬광이 번뜩였다.

검은 벼락 줄기가 멈췄다. 알베르트가 쿨럭, 하고 피를 토하며 앞으로 엎어졌다. 방어막이 사라지자 잠깐 멈췄던 비가 다시 내렸다. 전과 같지 않게 약해졌다. 부슬비에 가까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그곳에 카루곤의 가슴에 클레이모어를 찔러 넣은 러셀이 있었다. 그의 왼 손등 위에서 빛나던 신성력이 흩어졌다.

언젠가 우룩크들을 해치웠을 때, 엘레노아가 러셀에게 불어넣어준 성력이 카루곤의 검은 번개를 막은 것이었다. 막아낸 시간은 잠깐이었으나 러셀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카루곤이 쿨럭, 하고 피를 토했다. 그는 뭔가 목소리를 내려했다.

“······!”

우-우-우-우-우.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성대가 떨리며 나는 소리도 뭣도 아니었다.

러셀이 클레이모어를 뽑아내자 카루곤의 거체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질척한 검은 액체가 그를 덮어갔다. 타락한 카루곤의 마력이 이제 그 주인을 집어삼키려 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 그들이 싸운 평원 위에서 죽은 괴물들, 인간들, 용아병들의 찌꺼기가 한데 뭉친 것이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와 사악한 기운이 풀풀 풍겼다.

러셀은 자신의 앞에 일어선 4, 5미터 정도 되는 거인을 올려다봤다.

“징글징글하다.”

검은 거인이 주먹을 내리쳤다. 러셀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하늘 높이 떠오른 상태였다. 카루곤에게서 벼락의 힘을 터득한 그는 이전보다 한 차례 더 강력해진 육체와 마력을 갖게 되었다.

이른 바 깨달음이라는 것으로, 목숨의 위기나 동수인 적과 싸울 때 초인의 경지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을 뜻했다.

하늘에서 수없이 내리치는 벼락 속에서 러셀은 벼락의 구동 원리, 뼈대를 이루는 마력의 형상, 가지 치며 뻗어나가는 광포한 힘의 근원을 깨달은 것이었다.

지금 러셀은 벼락을 맞기 이전의 그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자신을 실감했다. 평소라면 오르지도 못했을 상공을 발돋움 하나로 뛰어오른 것만 해도 그랬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지상이 까마득했다.

그때 러셀은 서쪽 멀리서 일어난 마력의 파동을 느꼈다. 귀에 들리는 맑은 목소리도. 그건 여기 있는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제 3자의 것이었다.

“케노-카스토!”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한 번 섬광과 천둥이 일어나더니, 하얀 번개가 그물처럼 일어나다가 한 지점에서 쏘아졌다. 그 목표는 러셀이 아니라 검은 거인을 향해서였다. 아니, 이게 어디서 스틸을 하려고.

러셀은 짜증난 마음 그대로 대검의 끝을 하늘로 향했다. 그러자 거인을 향해 내달리던 하얀 벼락이 돌연 방향을 틀더니 러셀에게 내려 꽂혔다.

“어엥?!”

아까의 목소리가 의문성을 내뱉었다.

러셀은 공중에 뜬 그대로 하얀 번개를 받아들였다. 하얀 번개는 뱀처럼 클레이모어의 검신을 타고 러셀에게 스며들었다. 그의 피부 위로 푸르고 하얀 번개가 번쩍였다. 마치 천둥신의 강림 같았다.

우-우-우-우-우!

검은 거인이 아래서 러셀을 올려다보며 아이처럼 팔을 휘적거렸다. 그 아이 같은 행동에서 아까의 드라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아직 논리적인 이성을 지니지 못한 갓난아이가 부모를 찾아 우는 듯 한 어설픈 움직임이었다.

러셀은 벼락을 휘감은 대검을 그대로 검은 거인에게 휘둘렀다. 청백색의 벼락이 대검의 검격을 따라 허공을 내달렸다.

섬광이 일었다.

지상의 모든 이들이 감았던 눈을 떴다. 러셀은 바닥에 내려서 있었다. 실뱀 같은 전격이 그의 몸 여기저기를 핥다가 곧 사그라들었다.

그의 바로 앞에는 까맣게 타 버린 석탄 같은 것이 있었다. 두 무릎을 꿇고 양팔을 늘어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아까의 검은 거인이었다.

무릎과 고개를 숙인 검은 거인 앞에 우뚝 서 있는 러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망막에 새겨진 지금의 광경이 얼마나의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검은 거인의 몸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곧 벼락에 의해 사악한 마력의 근원이 태워진 검은 거인은 몸을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돌덩이로 갈라져 떨어졌다.

카루곤은 그렇게 죽었다.

“와! 당신 누구죠? 방금 어떻게 한 거예요?!”

그때 아까 하늘에서 하얀 벼락을 만든 제 3자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투구를 쓰고 있어 웅웅거리는 목소리는 얼핏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실치 않았다.

그는 하얀 백마를 타고 황금과 은이 양각된, 그야말로 호화로운 전신 갑옷과 망토를 착용하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값비싸 보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칼집과 칼 손자루가 튀어나와 있었다.

범상치 않은 재력과 높은 신분을 짐작케 하는 외견이었지만, 방금 다 잡은 괴물을 뺏길 뻔 했던 러셀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그렇게 묻기 전에 자기소개를 먼저 해줬으면 하는데.”

“아차, 그렇죠. 미안해요, 너무 놀라운 광경이었다 보니.”

백마에 타고 있던 자는 바로 말에서 내렸다. 그는 투구에 이어 얼굴 가리개까지 쓰고 있어 얼굴과 눈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저러고 앞이 보이나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걸로 봐서 시야에 제약은 없는 듯 했다.

그가 투구 속에서 무어라 중얼거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얼굴 가리개가 양옆으로 밀려나 접히더니 쓰고 있던 투구마저 뒤로 착착 접히기 시작한 것이다. 뭐 아이언맨이야?

러셀이 그 이 중세 판타지에서 보기 힘든 광경에 놀란 표정을 지었을 때.

투구가 완전히 뒤로 접혀 망토 사이로 사라지고, 만천하에 숨겨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여기저기서 숨막힌 탄성이 흘렀다.

위로 틀어 올려져 있던 은발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만지면 분이 묻어날 듯한 희고 고운 피부, 가지런한 눈썹, 깨끗한 이마, 오똑한 콧대와 앙증맞은 붉은 입술까지. 비에 젖은 평야보다는 어디 귀족가나 왕가에나 어울리는 외모의 소유자였다.

이마를 타고 내려온 은발을 뒤로 넘긴 그녀가 눈을 떴다. 세상을 오시하는 찬란한 황금빛 금안이 반짝였다.

그리고 타이밍이 맞은 것인지 먹구름이 걷히고 서광이 드리웠다. 먹구름 탓에 지상을 관전하지 못했던 하늘이 그 서광을 타고 주홍빛을 드러냈다.

서광이 가장 먼저 목도한 것은 서쪽을 등지고 선 그녀의 뒷모습이었다. 하루가 저무는 노을빛이 그녀에게 닿았다. 은발마저 금빛으로 물들었다. 금발과 금안을 빛내는 그녀는 마치 태양신의 딸이 지상에 내린 것 같았다.

바로 머리 뒤의 서광을 배경으로 선 그녀가 허리에 손을 짚고 당당하게 말했다.

“내 이름은 유리아 히폴리아스 드 휘페리온. 천년 제국 휘페리온 황가의 제 1황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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