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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6화 (17/225)

16화 승천하는 벼락

드라칸이 내리친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온 섬광과 반구형의 충격파. 그 힘을 막아낸 자들은 많지 않았다.

러셀이 대검을 내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마력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참혹했다. 막대한 충격파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몇 되지 못했다. 오백 가까웠던 자들 중 남은 이들은 백 명 남짓.

일부는 근처에 충격파를 막아낸 마법사들과 근처에 있던 자들이었다. 도시에 소속된 마법사 몇몇과 용병 마법사 몇몇이 눈과 코, 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방어막을 거뒀다. 그 중에는 빨간 머리 마법사도 있었다. 그녀는 그나마 나은 얼굴이긴 했으나 핏기가 가신 하얀 얼굴이었고, 표정은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가까이에 방어막을 펼칠 수 있는 마법사가 있었다는 사실 하나에 목숨을 구제받은 이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주저앉았다. 그들의 곁에는 고작 몇 미터 차이로 보호 받지 못해 죽은 시체가 가득했다.

아니, 그걸 시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고철과 가죽 약간, 그리고 핏물 한 줌으로 변해버린 그것들은 시체가 아니었다. 그냥 흔적이었다. 비명이 울려 펴진다. 방금까지 살아있던 동료, 친구의 흔적에 충격 받은 이들의 비명이었다. 누군가는 방어막에 들지 못해 손만 남은 것을, 또 누군가는 팔을 부여잡고 울었다.

다른 자들 중에는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드라칸이 나타나고 지팡이를 내려찍자마자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을 감쌌다. 제오나는 자신을 감싼 채 서 있는 기사들을 멍하니 쳐다봤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베, 베오른 아저씨. 피, 피가.”

“괜찮습니다, 아가씨. 이 정도는··· 잠깐만 쉬면···.”

말을 끝맺지 못한 기사가 풀썩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버티고 서 있던 자들도 하나 둘 쓰러졌다. 모두 허연 얼굴로 피를 토했다. 중심에 선 제오나가 주저앉은 기사들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랐다.

“···용족.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어.”

풀밭에 한 쪽 무릎을 꿇은 렉시가 중얼거렸다. 역수로 쥐고 있던 도는 두 개 모두 칼날이 부러져 절반 밖에 남지 않았다. 가진 마력을 뿜어내고 도를 휘둘러 충격파를 빗겨냈지만, 그녀 역시 성치 못했다. 얕게 베인 피부에서 붉은 피가 흘렀다.

나머지는 러셀의 뒤에 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살아 있었다. 러셀을 제일 위 꼭짓점으로 한 길쭉한 삼각형의 아래로 갈수록 커지는 대지 위에서 수십 명의 병사, 용병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얼이 빠져 있는 그들에게서 다시 고개를 돌린 러셀이 정면을 봤다. 충격파에 일어났던 먼지 구름이 일시에 확, 하고 밀려나 흩어졌다. 그 중심에 아까의 드라칸이 서 있었다.

반구형의 거대한 크레이터. 드라칸은 처음의 자리에서 공중에 떠 있었다. 원래 바닥이 받치고 있어야 할 자리였다. 카루곤이 말했다.

“이거 놀랍군. 이렇게 많이 살아남다니. 다 죽일 작정으로 날린 것인데··· 으응?”

카루곤의 말이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드라칸은 러셀을 쳐다봤다. 정확히는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탁탁, 하고 담배 한 개를 입에 물더니 태연스레 불까지 붙이는 러셀을.

그가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내쉬자 허연 연기가 코와 입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몇 번 더 연기를 마시고 내쉰 러셀이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카루곤은 그 태연스런 모습에 눈을 깜박였다. 위에서 덮이는 눈꺼풀과 안쪽의 속꺼풀이 노란 동공을 가렸다가 벌어졌다.

“···뭐하는 거냐?”

“젠장, 잘못 샀어. 맛대가리 존나 없네. 환불 되려나?”

“···지금 내 말을 무시한 건가?”

“방금 일어난 사실 마저도 물어봐야 아는 머리로 살기 만만찮았겠는걸. 너 친구 없지?”

드라칸은 그 폭언에 입을 쩍 벌렸다. 맹세코 살면서 인간한테 저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뭐, 뭐라고?”

“이젠 귀까지 막힌 건가? 너 친구 없는 찐따냐고 묻잖아.”

“······.”

툭, 투두둑. 투두두둑.

쏴아아아아···

침묵이 가득 찬 평원 위에 빗방울이 내리며 그 고요를 깨트렸다. 비는 세차게 내렸다. 이제까지 위에서 뭉치기만 했다는 아쉬움을 풀 작정으로, 거세게 내렸다.

러셀은 물고 있던 담배를 뱉었다. 계속 피고 싶지도 않은 차에 잘됐다는 투였다. 카루곤이 말했다.

“···그 불쌍하도록 비루한 머리가 미치기까지 했구나. 그런 네놈에게 어울리는 벌을 내려주도록 하지. 마침 하늘까지 나를 도와주는군.”

카루곤은 비에 젖어 달라붙는 로브를 끌어내렸다. 드러난 드라칸의 거체는 근육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부터 가슴, 팔, 다리로 이어지는 모든 피부에 푸른 비늘이 빼곡했다. 상대적으로 비늘이 적게 돋아있을 배는 흉갑에 가려져 있었다.

“내 주력은 벼락이다.”

카루곤이 큼직한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러셀은 지팡이를 그제서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인간은 양 손으로 감싸야 겨우 덮일 만한 굵은 몸체, 끝으로 갈수록 가늘고 날카로워지는 것이 창이나 피뢰침을 연상케 했다.

그 가늘고 뾰족한 송곳 같은 지팡이의 첨단부에는 네 방향에서 솟은 둥글게 휘어진 뿔 같은 것이 가운데의 송곳을 감싸고 있는 형태였다.

“벌레 같은 인간아, 천벌을 느껴보아라.”

직후 카루곤의 지팡이에서 쏘아진 마력이 비가 내리는 먹구름으로 파고들었다.

꽈르르릉!

러셀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하늘에서 황금색의 벼락이 그에게 내려꽂혔다. 벼락은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네 번, 지켜보는 인간들이 그 끔찍한 천둥과 번쩍이는 섬광에 더 이상 횟수를 세지 못하게 됐을 때도 쉬지 않고 내렸다.

“···러셀.”

서 있던 렉시가 비틀거렸다.

그녀가 보는 곳은 깊게 파인 구덩이였다. 수십 번의 벼락이 내리치고 내려쳐져 만들어진 구덩이. 흰 연기가 뭉게뭉게 솟아올랐다. 구덩이 주변의 흙은 흐릿한 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벼락이 품은 고열에 녹아서 유리가 된 것이었다.

“이름··· 아직 못 들었는데.”

제오나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시야에 주인 없이 방치된 대검이 보였다.

“······.”

이블린은 가라앉은 눈으로 러셀이 있던 자리를 보다가 카루곤을 보았다. 카루곤은 클클거리는 웃음소리를 냈다.

“가루도 남지 않았나보군. 잘 어울리는 결말이다. 그럼 이제 남은 목숨들을 거둬가 보실까.”

“그렇게는 안 된다, 용족.”

청량한 미성과 함께 하늘에서 수십 발의 광선들이 날아들었다. 전장에 도착한 알베르트가 쏘아낸 주문들이었다. 카루곤은 어렵잖게 지팡이를 휘둘러 광선들을 흘려냈다. 빗방울을 응집시켜 거대한 물의 원반을 만든 다음 광선을 굴절시켜 타점을 빗겨낸 것이었다.

“요정 마법사군. 멍청한 것, 이런 상황에서 빛을 이용한 주문을 날리다니··· 응?”

카루곤의 비웃음과 달리 알베르트의 주문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굴절된 광선이 땅에 직격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덩굴 줄기들이 치솟았다.

“설마 그 다음도 생각하지 않았을까.”

정확히 카루곤을 중앙에 두고 여덟 개의 지점에서 솟은 덩굴 줄기가 그를 칭칭 감아버렸다. 강력한 육체를 지닌 드라칸마저 꼼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의 구속 주문이었다.

“이런, 잔재주를···!”

투명한 방어막을 두른 알베르트가 지면에 내리지 않고 약간의 간격을 둔 채 멈춰 섰다. 방어막이 비를 막아주었기에 젖지 않은 모습이었다. 알베르트가 중얼거렸다.

“지금이다, 사제여.”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먹구름 아래에서 눈부신 광휘가 나타났다. 빛의 날개와 갑주를 두른 금발의 여인이었다. 검게 물든 하늘과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 빛을 뿜어내는 그녀를 지상의 인간 모두가 홀린 눈으로 올려다봤다.

“주께서 허락하신 광휘가 깃드니···”

엘레노아가 오른손에 든 메이스를 높게 치켜들자 신성한 오라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본래의 크기보다 훨씬 거대해진 메이스를 든 엘레노아가 그것을 카루곤을 향해 내리쳤다.

“그 아래 서 있지 못한 자는 악한 자 뿐이라···!”

“되먹지 못한 신의 종 따위가!”

덩굴 줄기에 몸이 묶인 드라칸이 가까스로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피뢰침 같은 지팡이의 끝에서 빠직, 빠직 소리를 내는 벼락의 구체가 응집되고, 메이스가 닿기 직전 터지며 번개를 흩뿌렸다.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섬광과 충격이 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알베르트가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어 그 모든 힘의 확산을 위쪽으로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빛의 기둥이 하늘로 올랐다. 내리던 빗방울은 증발하고 먹구름마저 구멍이 뚫릴 정도였다.

그 틈새로 잠깐 맑고도 청명한 푸른 하늘이 비췄다. 푸른 하늘은 빼꼼 고개를 내밀며 가려져 있던 지상을 보고자 했으나, 다시 먹구름에 가려져 얼마 보지 못했다. 성질을 부리듯이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울렸다.

쿠구구구···.

굉음과 먼지가 가라앉았다. 빛의 날개와 갑주를 두른 그대로 엘레노아가 땅에 내려섰다. 알베르트가 새삼스런 눈으로 그녀를 훑었다.

“성녀 후보라더니, 이건 고작 그 정도가 아니군. 광휘의 권능에 닿아 있지 않은가.”

“주의 은총에 힘입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 예상보다 저 용족이 가진 힘이 크군요.”

그녀의 말 대로였다. 먼지가 완전히 걷히자 아까보다 더욱 거대해진 구덩이가 드러났다. 그리고 안에서 노란 번개의 결계를 두른 드라칸이 웅크렸던 몸을 일으켰다. 놀랍게도 그는 별다른 외상을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낱 인간의 도시에 요정 마법사와 신의 화신에 버금가는 사제라. 그럼 나도 지원군을 만들어야지.”

카루곤이 품에서 무언가를 한 움큼 쥐고 꺼내더니 땅에 뿌렸다. 그것은 이빨들이었다. 인간의 치아가 아니라 악어나 도마뱀의 것처럼 끝이 날카로운 이빨들이었다.

“일어나라, 용의 노예들아!”

카루곤의 외침에 이빨들이 저 스스로 땅속으로 파고들어갔다. 곧 그 주위의 바닥이 검게 물들더니, 피처럼 끈적해졌다. 그리고 건틀릿에 감싸인 손이 대지를 뚫고 튀어나왔다.

바닥을 딛고 일어선 그것들은 온전한 갑옷을 입은 시체들이었다. 칼이나 방패, 철퇴와 창 등 다양한 무구를 갖추고 투구 사이로 푸른 광망을 흘리는 살아 움직이는 시체 병사들. 사이사이에는 마법사 복장을 하고 지팡이도 들고 있는 놈들도 있었다.

시체들이 대지를 헤집고 나오면서 묻었던 흙덩이들은 빗줄기에 빠르게 씻겨 내려갔다. 그 수는 무려 쉰에 육박했다. 알베르트가 침음성을 흘렸다.

“용아병. 겁도 없이 용과 용족에게 덤벼든 자들을 용서하지 않고, 그 혼과 육신을 지상에 속박함으로서 만들어진 괴물들. 그네들도 영혼이 타락할 위험성에 잘 사용하지 않는 주문이건만, 저놈은 잘만 쓰는군.”

“아마 이미 타락했기 때문이겠지요. 저 정도 전력이면 도시는 짓밟히고도 남을 것입니다. 여기서 막아야 해요.”

“당연한 소리를. 애초에 난 저놈의 머리를 갖고 가기로 성주님에게 약속했다.”

고개를 끄덕인 엘레노아가 다시금 메이스를 높게 들었다. 그러자 황금빛의 성력이 솟아오르더니 평원 여기저기 쓰러져 있거나 주저앉은 자들에게 깃들었다. 병사들과 용병들의 상처와 마음 속의 두려움이 빠르게 물러났다. 그리고 빈자리를 용기와 투쟁심이 채웠다.

알베르트가 하늘로 오르고, 엘레노아는 메이스를 잡아 자세를 잡았다. 그들의 뒤로 병사와 용병들, 마법사들, 기사들이 모여 뭉쳤다.

렉시는 바닥에서 주인 없는 칼 두 자루를 들었고 이블린은 손을 풀었으며 제오나는 기사들의 가장 앞에서 검과 방패를 들었다. 다 합쳐봐야 백 명 약간 안되는 숫자였으나 모두 도시를 등지고, 죽음을 각오하며 서 있었다.

대치되는 자리에 오십 기의 용아병들이 자리했다. 군대처럼 창을 든 놈들은 전위에, 검과 방패를 든 놈들은 중위에, 후위에는 서 너 명의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맨 뒤에 드라칸, 카루곤이 거인처럼 서 있었다.

쏴아아아···

비는 멈출 기색도 없이 내렸다. 방어막을 두른 알베르트와 빛의 날개를 펼친 엘레노아 외에 모두가 흠뻑 젖었다.

허나 추위를 느끼는 자들은 없었다. 심장을 가진 자들은 두근대며 온몸으로 도는 혈류에 추위를 잊었고, 심장이 없는 병사들은 애초에 추위를 느끼지 못하기에.

모두가 당장이라도 격돌할 듯이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는 그때.

꽈르릉!

별안간 대지 한켠에서 벼락 한 줄기가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그 반대되는 현상에 모두가 하늘로 용처럼 승천하는 번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벼락이 솟은 구덩이에서 한 인영이 뛰어올랐다. 그는 두 집단의 중간되는 위치에 정확히 착지했다. 2미터로 짐작되는 신장, 장대한 어깨와 검게 그을린 가죽 갑옷이 보였다. 머리끈이 풀려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치렁거렸다. 하얀 얼굴에서 보랏빛 눈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한 번만 맞았으면 긴가민가했을 텐데. 고맙다.”

파지직. 러셀의 손에서 푸른 전기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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