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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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성주와 성직자 엘레노아는 마법사 알베르트가 크게 키워놓은 멀리 보는 시야 주문과 거울 주문이 합쳐진 둥근 창으로 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개의 주문을 합쳐서 수백 미터 바깥의 현장을 1초의 오차도 없이 볼 수 있게 하는 알베르트의 마법 실력은 가히 대단하다고 할 만 했다. 러셀이 옆에 있었다면 스트리밍 중계방송 같다고 말했을 것이다. 다만 그 이적을 눈앞에서 보는 프레드릭 성주는 영상에 푹 빠져있어 대단함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성주는 그의 딸 제오나가 말을 독려하며 괴물 사이를 질주할 때마다 몸을 들썩였다. 알베르트가 옆에서 힐긋 보니 딸에 대한 대견함으로 표정이 환해 있었다.
“잘한다, 제오나! 다 죽여 버려라!”
“딸을 가진 아버지로서 참 사려 깊은 말씀이십니다, 성주님.”
옆에서 알베르트가 핀잔을 줘도 프레드릭 성주는 박수까지 쳐가며 딸을 응원했다. 그러나 그 응원은 곧 미노타우로스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가 휘두른 도끼에 제오나가 낙마하고, 말 이스타가 죽어버리기까지 하자 성주는 투구를 부여잡았다.
“허억! 아, 알베르트! 내 딸, 내 딸 제오나가!”
그 모습은 당장 몇 십분 전 제오나의 출격에 냉정한 얼굴과 목소리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로서의 얼굴이었다. 알베르트는 그런 프레드릭의 모습에 작은 안도를 느꼈다. 그래도 딸이라고 아끼기는 아끼는구나, 하고.
“···잠시만, 성주님. 잠시만 더 지켜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알베르트 또한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지팡이 끝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수정체가 파칫, 파칫 하고 마력의 전조를 울렸다.
그들은 제오나가 미노타우로스와 대치하다가 싸우는 장면까지 숨죽이며 지켜봤다.
푸른 마력을 일으킨 제오나가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도끼를 막아내며 분투하는 모습에 성주는 땀에 흠뻑 젖은 손을 쥐었다 폈다하며 안절부절 못 했다.
제발, 제발 하고 조용히 되뇌는 프레드릭 성주. 허나 알베르트의 눈에는 제오나의 마력 흐름이 크게 흔들리고 있음이 보였다. 거기다가 미노타우로스 또한 전력을 내지 않고 장난감처럼 갖고 놀고 있음 또한.
“으악!”
성주가 비명을 지르는 것과 동시에 미노타우로스의 발길질에 걷어차인 제오나가 땅바닥을 뒹굴었다. 주문이 담겨져 있던 유물 목걸이가 산산이 부서지고, 쓰러진 제오나의 입에서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프레드릭 성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내 저 소머리 새끼를 그냥! 알베르트! 당장 주문을 날리지 않고 뭐하는 겐가! 저러다 내 딸 죽겠네!”
“······.”
“알베르트!”
지켜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알베르트의 행동에 얼굴이 벌게진 프레드릭 성주가 멱살을 잡아 올리는 찰나.
“성주님. 보십시오.”
엘레노아가 손가락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프레드릭 성주가 알베르트의 옷깃을 잡은 그대로 고개만 돌렸다.
막 도끼로 제오나를 내리치려던 미노타우로스가 비척이며 물러서고 있었다. 허공으로 높이 튕겨져 올라간 도끼. 그리고 같이 회전하고 있는 익숙한 대검.
곧 도끼가 땅에 떨어지고 대검 또한 바닥에 푹 박혔다. 그리고 거구의 전사 하나가 큼직한 손을 뻗어 대검을 들어올렸다. 프레드릭 성주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손을 마구 흔들었고, 결과적으로 그 손에 멱살이 잡힌 알베르트의 고개도 앞뒤로 흔들리게 되었다.
“그렇지! 으하하! 저 친구가 있었지! 다행이군! 다행이야!”
“다행이시면 제 멱살 좀 놓아주시지요, 성주님.”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는 알베르트. 성주는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알베르트의 옷깃을 세워주고 뒷짐을 졌다.
“큼,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구만. 미안하네, 알베르트.”
“괜찮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로서의 진실된 일면을 볼 수 있어 기뻤습니다.”
프레드릭 성주가 사과를 건넸고 알베르트는 담담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면서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러셀의 빛나는 자안과 그로 인해 잠깐 이상해진 제오나를 본 사람은 엘레노아 밖에 없었다. 엘레노아는 몽롱해졌던 제오나의 표정이, 러셀이 눈에서 마력을 거두자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확인했다.
“······.”
러셀은 같이 온 흑요정에게 무어라 말하고는 대검을 들고 미노타우로스에게 다가갔다. 흑요정이 제오나의 곁에서 칼을 빼들고 주위를 경계하는 모습으로 보아 호위를 부탁한 듯 했다. 러셀은 땅에 떨어져 있던 도끼를 줍고는 그것을 미노타우로스에게 던져 줬다. 알베르트가 지적했다.
“아니, 저걸 왜 돌려줍니까? 무기가 없으면 더 수월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을.”
“쯧쯧쯧.”
프레드릭 성주가 혀를 찼다.
“그것도 모르나, 이 친구야. 저 러셀이라는 자는 맨 손으로 서 있는 자하고는 무기를 대지 않겠다는 것 아닌가. 그것이 설사 이지가 없는 괴물이라 해도! 이 얼마나 멋진 남자인가? 그야말로 전사 중의 전사 아닌가?”
“제가 보기엔 그냥 싸움을 어렵게 만드는 멍청이 같습니다만···.”
“혹시 결혼했을까? 젊어보였는데 아직 안 했겠지? 제오나가 자기 엄마를 닮아서 참 미인이긴 한데···.”
“성주님!”
“아 말도 못하나, 자네?”
“···조용히 좀 하시지요. 두 분 다.”
금발의 성직자가 푸른 눈을 치켜뜨자 한 사람과 한 요정은 입을 다물고 러셀과 미노타우로스를 바라봤다. 도끼를 돌려받은 소머리의 괴물이 콧김을 뿜어내며 돌진했다. 누가 봐도 분노한 모양새였다. 거기다가 피부 위에서 일어나는 마력의 흐름까지. 알베르트의 눈이 반짝였다. 프레드릭 성주가 말했다.
“저 괴물의 붉게 번쩍이는 게 설마 마력인가?”
“예, 마력이 맞습니다. 하지만 미노타우로스가 마력을 각성하다니. 기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럴 수 있는 확률은 무척 낮을 텐데···.”
요정 마법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경매장에서 트롤의 시체를 샀을 때가 기억났다. 경매 진행자는 이 트롤이 마력을 각성했던 트롤이라며, 그 피가 평균 트롤의 재생력을 크게 웃도는 효능을 담고 있노라고 장담했다.
많은 입찰자들이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손에 넣은 것은 당연히 알베르트였다. 그리고 직접 확인한 결과 진행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로 마력을 각성했던 트롤이었던 것이다. 채취해서 뽑아낸 트롤의 피는 그야말로 대단한 순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 트롤의 피에서 정제한 재생력의 정수와 약초를 배합해서 만든 힐링포션의 성능은 엄청났다. 가히 성국의 교황이나 성녀가 직접 신성력을 쏟아 부어 만들었을 성수와 비견이 가능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는 진행자를 불러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날 남문으로 들어왔던 상행이 갖고 왔던 시체이며, 트롤을 죽인 자가 일개 용병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비록 마법사와 바로 옆에 있는 성직자, 엘레노아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대단한 업적인 것은 분명했다.
알베르트는 옆길로 샜던 생각의 흐름을 다시 바로잡았다. 중요한 건 근래 칼리스덴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북쪽과 서쪽의 숲에는 웬 도적단이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다가, 지금에 와서는 갑자기 괴물들의 군대가 들이닥쳐 도시를 침공했다. 그런데 그 도적단으로 추정되던 인간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도시의 남문으로는 마력을 각성한 트롤이 나타나 길목을 막았다. 다행히 나타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한 전사에게 죽기는 했다. 마력을 각성한 트롤. 북쪽에서 밀어닥친 괴물 집단. 또 그 사이에서 마력을 각성한 미노타우로스. 이 일련의 일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괴물들이 한데 규합되고, 동시에 낮은 확률을 뚫고 두 마리나 마력을 각성한 괴물이 나타난 것. 만약 그것이 의도된 것이라면. 그 의도가 망상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라면···.
“오오오옷!”
프레드릭 성주의 감탄사에 알베르트의 정신이 과거의 기억과 추론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돌아왔다. 막 러셀이 미노타우로스의 강철 도끼를 자르고 있었다. 이어서 대검이 귀신같은 빠르기로 움직이더니 괴물의 사지가 잘려나갔다. 어찌나 빨랐는지 떨어지는 시간이 얼마 차이 나지도 않았다.
잘린 절단면으로 대지를 디딘 미노타우로스가 고개를 들어올리고. 그 목이 단칼에 잘려나갔다. 제오나를 밀어붙이던 소머리는 그렇게 힘없이 어깨에서 떨어져 풀밭을 뒹굴었다.
“이야아아!”
체통도 잊은 채 프레드릭 성주가 환호성을 질렀다. 엘레노아는 시종일관 무표정이었지만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가 있었다. 알베르트 혼자서만 약간 굳은 표정으로 러셀을 응시했다.
미노타우로스마저 죽고 나자 남은 괴물들은 지리멸렬했다. 기사들이 제오나에게 달려가고, 전장의 상황이 끝나가는 모습에 프레드릭 성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잘 마무리 됐구만. 나 참. 초가을에 이 무슨 날벼락인지. 밭들이 많이 상하지 않았어야 할 텐데.”
프레드릭 성주의 걱정에 알베르트는 잠깐 들었던 가설을 치웠다. 아직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고 낮은 확률이라 해도 그것이 0을 의미하지는 않는 까닭이다. 갑작스레 몰려온 괴물들이나 트롤, 미노타우로스에 대한 조사는 나중에 해도 충분하다. 지금은 도시와 성주의 마법사로서 해야 할 말을 해야 했다.
“성주님이 제때 기사들을 출격시켰기에 밟힌 면적은 그다지 넓지 않습니다. 조금만 돌보면 예년과 마찬가지로 많은 수확량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게만 되면 다행이지. 어쨌든 이제는 저들에게 주어야 할 보상이 남았군. 금고의 돈은 충분한가?”
“재정관리부에서 보고한 대로라면 조금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근래 무기와 갑옷을 대장간에서 많이 주문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따님에게 들어간 유물 값이 만만찮았습니다. 유물에 내장된 방호 주문을 깨우기 위해서 마법 시료가 적잖게 소모된 터라. 거기다가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달래기 위해서 축제도 열어야 할 테고, 러셀이라는 이름의 저 전사에게 따로 보상도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난쟁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알베르트의 말이 이어질수록 썩어 들어가던 프레드릭 성주의 얼굴은 마지막의 난쟁이 은행, 대출이라는 단어를 듣자 펄쩍 뛰었다.
“뭣?! 대출! 그 악독한 난쟁이 놈들한테 돈을 빌려야 할 정도로 우리 도시의 재정이 악화됐단 말인가!”
“정확한 건 추후 계산을 해봐야 알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다, 정도로 말씀드린 것이지만. 그래도 생각은 하고 계시지요.”
“으으음···!”
침음성을 흘린 성주가 고민에 들어갔다. 작은 목소리로 난쟁이 은행은 안돼··· 대출은 더 안 돼···! 하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안쓰럽다. 사실 칼리스덴 도시의 재정은 괜찮았다.
유물의 주문을 깨우는 데 들어간 시료는 많지도 않았고, 그가 만든 힐링포션을 몇 개 팔기만 해도 소모했던 돈 이상의 재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외상이든 내상이든 치료가 가능한 힐링포션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잘 팔리는 인기 상품이니.
그럼에도 알베르트가 조금 과장되게 말한 것은 아까 성주의 멱살잡이를 잊지 않고 있었음이라. 그렇게 프레드릭에게 소소한 복수를 마친 요정 마법사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진실을 알게 된 프레드릭 성주가 길길이 날뛸 테지만, 그거야 그때 가서 달래면 그만이다.
“······.”
그때까지 둘의 대화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엘레노아는 거울이 비추는 장면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시종일관 러셀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러셀의 얼굴이 확 굳고, 그가 몸을 홱 돌렸을 때 그 끝에 나타난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성주님.”
“응? 무슨 일인가, 엘레노아 사제?”
그녀의 부름에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던 프레드릭과 그런 성주를 장난기 어린 미소로 보고 있던 알베르트가 다가왔다. 그리고 곧장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가장 먼저 그 존재의 정체를 알아차린 알베르트가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드라칸! 용족이 어째서?!”
“뭐, 뭐? 드라칸? 용족? 무슨 말인가, 알베르트!”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저들에게 가야···!”
다급히 지팡이를 든 알베르트가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거울 속에서 거대한 섬광과 충격파가 일어났다. 그건 거울 뿐만 아니라 그들이 서 있는 성벽에서 보일 정도로 거대했다.
“······!”
프레드릭 성주와 알베르트, 엘레노아가 부릅뜬 눈으로 거울과 멀리 있는 폭발을 응시했다. 알베르트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어째서 괴물들이 이지를 잃은 것처럼 도시를 향해 달려들었는지, 트롤과 미노타우로스가 어떻게 마력을 각성했는지··· 하하. 그 배후에 용족, 그것도 드라칸이 있었다면 모두 설명이 되지. 이렇게, 이렇게 멍청했을 수가!”
“내, 내 딸. 제오나! 제오나!”
알베르트가 말없이 지팡이를 휘젓자 거울이 크게 확대되었다. 곧 뿌옇게 솟아올랐던 먼지가 훅, 하고 가라앉았다. 그 중심에는 여전히 드라칸이 금속성의 지팡이를 내리꽂은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광경. 드라칸을 중심으로 갈아엎어진 반구형의 대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핏물로 거기 있었음을 알리는 시체들. 그 충격파를 흘려낸 이들은 많지 않았다.
기민한 감각과 실력을 지닌 마법사들이 곳곳에서 방어막을 펼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주위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이나 용병들도. 한 쪽에는 기사들이 둥글게 뭉쳐서 마력을 내뿜어 충격파를 흘려냈다. 바깥의 기사 몇몇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자 안쪽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제오나가 드러났다.
흑요정은 두 개의 도를 이용해 충격파를 막은 것으로 보이나 절반이 부러져 나간 칼, 피부 곳곳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이 성치 않음을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러셀. 그는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멀쩡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언제 뽑은 것인지 양손으로 굳건히 잡은 대검을 앞으로 내민 자세였다. 그 뒤로 충격파에 갈리지 않은 브이 자의 멀쩡한 대지와 주저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뒤편의 사람들도 지켜준 것이었다.
딸의 생사를 확인한 성주였으나, 그 표정은 아까보다 밝지 못했다. 갑작스레 나타난 용족 하나에 태반의 병사와 용병들이 죽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백 명도 되지 않는 숫자.
“···알베르트.”
“예, 성주님. 바로 아가씨를 구출···.”
“저 용족을 이길 수 있나?”
요정 마법사가 고개를 들었다. 성주의 얼굴은 무서우리만치 굳어 있었다.
“저 용족이 북쪽에서 괴물들을 보내고, 내 백성들을 해친 주범인가?”
“···맞을 것입니다. 저 드라칸이 범인이라면 많은 의문들이 일시에 해소됩니다. 어떻게 서로 영역을 다투는 괴물들이 일사불란하게 보여 도시를 침공할 생각을 하게 됐는지, 트롤과 미노타우로스가 마력을 각성했는지.”
“그럼 다시 묻겠네. 저 용족을, 드라칸을 이길 수 있겠나?”
알베르트는 잠시 침묵했다. 그 또한 긴 수명을 보장받은 장수종, 요정 족으로서 수많은 세월을 보내고 마법의 진리를 탐구해온 마법사다. 하지만 상대는 위대한 존재의 피를 이은 후손, 용족. 그것도 가장 용의 피를 짙게 물려받았다고 알려진 드라칸이었다.
이길 수 있을까? 요정보다도 오랜 시간을 살고 강대한 육체와 마력기관을 가지고 있는 저 무서운 종족을 상대로?
마법사의 정신은 냉정하게 승산을 계산한다. 저 드라칸의 덩치를 미루어보아 성년임은 확실하다. 다만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정확히 얼마나 나이를 먹었을지, 얼마나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스스로 15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강력한 마력과 주문을 쌓았다고 자부하지만, 용족과의 주문 대결은 또 다른 상황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완전히 이길 수 있다고는 확신할 수 없다. 잘 해봐야 동수, 아니면 동귀어진일 터.
허나 인간의 도시 칼리스덴을 사랑하고, 전대 성주인 파트라키의 친우이자 그의 아들 프레드릭을 어릴 적부터 봐왔으며, 또 그의 딸 제오나도 귀여워한 요정, 알베르트 델퀴네스는 말했다. 그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이겨내겠습니다. 기필코.”
“좋다. 알베르트 델퀴네스. 나 프레드릭 데오센이 명한다. 가라. 가서 우리 도시를 도탄에 빠트린 주범의 머리를 갖고 오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때 가만히 있던 엘레노아도 손을 들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사제님. 저희는 아직 대교회에게 정식으로 사제님의 참전을 허락 받은 적이···.”
“제 의지입니다. 대교회에서도 뭐라 하지 못 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크나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칼리스덴은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엘레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가 곧바로 주문을 외우자 그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사제님은 어떻게 가실 생각이십니까?”
“저도 제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바로 뒤 따라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곧바로 알베르트가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짙게 깔린 먹구름 아래 요정 마법사의 신형이 까마득해졌다.
엘레노아는 제자리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작은 목소리로 기도문을 읊었다. 그러자 그녀의 피부 위로 찬란한 황금빛의 신성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프레드릭 성주는 알베르트가 남겨둔 거울을 통해 전장을 보았다. 굳게 움켜쥔 두 주먹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쿠르릉.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처럼 하늘에서 천둥이 울렸다. 그건 이제 막 시작될 전투를 관람하기 전 내는 신들의 기대감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