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4화 (15/225)

14화 용족, 드라칸

제오나는 그 대검과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봤다.

키가 큰 거구의 남자였다. 용병 같았지만 또 용병답지 않게 질 좋은 가죽 갑옷을 입었다.

투구는 없는지 맨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길고 밤하늘 같이 어두운 머리카락이 꽁지 머리로 묶여 늘어졌다.

문득 그가 고개를 내려 자신을 쳐다봤다. 예상보다 더 잘생긴 얼굴이었다. 어디 유력한 귀족가의 자제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반짝이는 자안은 그 심증에 불을 붙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똑같이 마력을 다루는 게 분명한, 언뜻언뜻 보이는 마력의 불길이 눈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어쩐지 그 보랏빛 불길이 일렁이는 눈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남자가 자신을 보고 말했다.

“괜찮냐?”

“네···.”

멍하니 대답하는 제오나. 그의 목소리는 높은 하늘 위에서 명징하게 퍼지는 듯, 대지를 떨어 울리며 탑처럼 솟아오르는 듯 했다.

그가 묻는 말에 뭐든 대답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에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뭐든 물어봐줬으면, 뭐든 시켜줬으면.

그 몽롱해진 푸른 눈동자와 이지를 잃은 모습을 본 남자는 아차, 하는 소리를 내더니 마력을 거뒀다. 반짝이던 자안의 빛이 꺼지자 멍해졌던 정신이 차츰 돌아왔다. 시야가 선명해지고, 멀어졌던 주변의 소음이 다가왔다.

그녀는 정신이 차려지자마자 방금 자신이 내뱉은 목소리에 놀람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기사들과 같이 훈련을 하면서 걸걸한 욕설도 주고받았던 그녀가, 어디 규수 아가씨처럼 네··· 하고 대답하다니!

무슨 일에선지 쯧, 하는 소리를 낸 남자가 갑자기 그녀에게 다가와 한 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훅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제오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깜깜해진 시야와 어쩐지 쿵쾅 거리는 심장 소리를 넘어서,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무언가 청명한 기운이 이마를 훑고 들어와 몸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머릿속에 막 생겨나던 알 수 없는 의식의 잔재가 말끔하게 사라지고, 콧속과 허파가 뻥 뚫리는 듯한 청량감에 그녀는 눈을 떴다. 그가 손등을 자신의 이마에 대고 있었다.

“속을 다친 것 같군. 피를 토하던데.”

“아, 아니오! 네! 괜찮습니다! 피를 토한 건, 그, 마력 역류 때문에! 네!”

제오나의 대답에 남자는 끄덕였다. 방금 훑은 그녀의 체내 마력 흐름은 엉망이었다.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요양을 오래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직접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그녀도 마력을 다루는 사용자이니 가라앉히는 가문의 고유 기술도 가지고 있을 터.

“렉시?”

제오나는 남자가 다른 이름을 부르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자신의 바로 옆에 한 인영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명을 꽥 질렀다.

“시발 깜짝이야!”

“······.”

“······.”

얼굴이 빨갛게 된 제오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어어어엉!

그때 물러서 있던 미노타우로스가 고함을 질렀다. 대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남자는 몸을 일으켰다.

“자기 빼놓고 대화하니 삐진 모양이군. 렉시, 이 기사 좀 지켜줘.”

“내가 왜?”

“안 그러면 대장간 가는 길 안 가르쳐 줄 거니까.”

“알았어.”

“그리고 제오나, 맞나?”

“예? 아, 예! 제 이름이 제오나 맞습니다!”

“그래. 여기 있는 흑요정이 호위를 서줄 테니 속을 다스려라. 빨리 안정시키지 못 하면 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고 남자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에 제오나가 다급히 외쳤다.

“저, 저!”

“뭐지?”

“이,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러셀은 피식 웃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건 갖다 와서 말하지.”

***

러셀은 걸어가서 저만치 물러서 있는 미노타우로스와 대치했다.

“흠.”

미노타우로스는 빈손이었다. 아까 그가 힘껏 날렸던 대검에 튕겨져 놓친 듯 했다. 도끼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러셀은 발치에 떨어져 있던 도끼를 주워들었다.

“그르르르르.”

그 모습에 미노타우로스가 낮은 울음을 흘렸다.

러셀은 손에 들린 도끼를 살폈다. 거대한 전투 도끼. 자루는 1미터가 넘고 그 끝에 달린 양날 도끼의 폭은 사람 몸통만 하다.

무게도 40kg은 족히 넘어가 보일 정도로 묵직했다. 물론 미노타우로스나 러셀에게나 의미 없는 무게였지만.

도끼날에는 피가 묻어 번들거렸고. 손잡이도 오랫동안 사용했던 것인지 손때가 거뭇하게 타 있었다.

물끄러미 그걸 돌려보던 러셀은 그것을 획 하고 던졌다. 미노타우로스는 얼결에 도끼를 돌려받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러셀은 소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으니까.

그래도 입을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저 표정 정도면 멍하다고 표현해도 이상할 건 없어 보였다.

“이따가 저승 가서 네 친구들 만나면 억울하단 소리는 하지 마라. 난 무기 줬다.”

훅, 훅, 훅, 훅.

거세게 콧김을 내뿜기 시작하는 미노타우로스. 저렇게 기뻐하다니. 좀 더 빨리 돌려줄 걸 그랬나.

우어어어어-!

고함을 지르며 소머리의 괴물 거인이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핏발 선 눈동자, 심하게 벌름거리는 콧구멍.

달려오는 놈의 피부 위로 불그스름한 아지랑이가 서렸다. 덩치도 아까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시발, 요즘 만나는 놈들은 개나 소나 다 마력 쓰네.

미노타우로스는 전에 만났던 나주렉이라는 이름의 트롤처럼 불꽃같은 속성력을 지니진 않은 듯 했다. 그러나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마력을 각성한 괴물은 괴물 이상의 존재였다.

트롤이 극도로 강해진 재생력과 화염을 가졌듯이, 미노타우로스는 커다래진 덩치와 아까보다 더 강력해진 괴력으로 도끼를 휘둘러왔다. 그 도끼에 러셀도 똑같이 대검을 휘둘렀다.

꽈아앙!

쇠붙이끼리 만났다고는 믿기지 않는 굉음. 뒤편에 서 있던 흑요정, 렉시가 표정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막 마력을 다스리는데 성공한 제오나도 마찬가지였다. 귀를 틀어막은 제오나가 입을 벌렸다.

“세상에.”

어느새 주변의 괴물들은 거진 다 처리가 된 상황이었다. 트롤들도 기사들의 손에 죽었고, 남은 고블린과 놀, 오크들도 용병들과 보병들, 마법사들의 주문에 죽고 있었다.

한 마리도 도망치지 않은 것이 약간 의외라면 의외였으나 어차피 괴물들의 생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잦다.

남은 사람들은 이제 막 시작된 전투를 목격했다. 붉은 마력 줄기를 뿜어내는 미노타우로스와 그에 맞서는 거구의 전사.

대지를 끝장낼 듯한 기세로 미노타우로스가 꽝꽝 도끼를 내리쳤으나 전사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제자리에서 그 공격들을 막아냈다.

모두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

미노타우로스는 다급해졌다. 마력을 일깨우고 나자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안개가 걷혀지고 이성이 돌아왔다. 이성이라 봤자 괴물의 이성이었지만, 어쨌든 괴물은 지금 이곳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본래는 숲속에서 사냥감들을 사냥하고 있어야 할 것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영역 다툼을 벌이던 놈들과 한 자리에 모여서 인간들의 도시를 침공하고 있지 않은가.

당장 숲으로 돌아가야 했다. 허나 그것도 불가능했다. 바로 앞의 인간 때문에.

아무리 도끼를 내리쳐도 빗겨내고 흘려내며 제자리에서 꿈쩍도 않는 이 무서운 인간 때문에.

“크허어엉!”

미노타우로스는 고함을 내지르며 그 감정을 부정했다.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해온 스스로가 그런 두려움을 느낀 것은 규격 외의 종, 용족을 맞닥뜨렸을 때 뿐이었다. 그때 미노타우로스의 머릿속에 이상한 장면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로브와 후드를 쓴 정체불명의 침입자. 자신과 맞먹는 키와 덩치. 언뜻 드러난 피부 위는 비늘로 가득했다. 후드 속의 어둠에서 두 개의 노란 빛이 번뜩이는 순간, 미노타우로스는 이지를 잃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와 있었다.

소머리의 괴물은 그 장면을 곱씹기 전에 이 인간을 먼저 죽이기로 했다. 미노타우로스가 마력을 뿜어냈다. 생명력도 불태울 기세였다. 기름 부어진 장작의 불처럼 활활 타올랐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그 증거로 제자리에서 꿈쩍도 않던 인간이 점점 뒷걸음질 치고 있지 않은가.

서걱!

승리의 가능성에 도취되어 가던 그때, 휘두르던 도끼의 무게가 갑자기 가벼워졌다.

자루가 잘려나가면서 도끼날이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인간의 검이 자신과 같이 마력의 불꽃에 타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이 몇 번 더 움직이자 괴물의 팔과 다리가 뚝뚝 떨어져 나갔다.

쿵.

미노타우로스는 허벅지 아래가 잘려나간 덕에 무릎 아닌 무릎을 꿇었다. 어깨죽지의 절단면 위로 잘려나간 흰 뼈와 근육이 그대로 드러났다. 워낙에 빨라서 고통은 도리어 늦게 찾아왔다.

허나 괴물은 고통의 신음도 지르지 못하고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자신은 분명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괴물은 인간이 순간 자신의 눈으로도 쫒지 못 할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멍한 눈으로 인간을 올려다봤다. 다리가 다 잘려나갔기에 눈높이가 아까와 반대였다. 괴물의 시야에 인간이 검을 느릿하게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급할 것 없다는 듯이 느긋하게, 다 잡아놓은 사냥감을 확인하는 것처럼.

시야가 빙글, 한 바퀴 돌더니 하늘과 땅이 반대의 자리로 돌아갔다. 회전은 짧았고, 곧 괴물의 꺼져가는 시야에는 푸른 풀이 가득 찼다.

아직 잔존하는 후각에서는 싱그러운 풀 냄새가, 귀로는 인간들의 함성 소리가 들렸다. 그것들은 점차 멀어졌다. 곧 아무것도 보이지도, 맡아지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암흑이었다.

***

괴물들은 거진 다 죽었다. 이상하게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도 목숨을 돌보지 않고 덤볐고, 그렇기에 다 죽었다.

병사들은 그런 괴물들의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찌르는 창을 멈추진 않았다.

어차피 돌아오는 가을에 식량을 얻겠다고 평야나 숲에서 여행자들을 덮칠 놈들이었다. 수를 줄이면 줄일수록 도시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아질 테니 나쁠 건 없었다.

전장은 빠르게 마무리 되었다. 러셀과 미노타우로스가 잠깐의 전투를 치르는 동안 기사들이 기동력을 십분 살리며 바깥에서 괴물들을 깎아낸 것이다.

그들이 지켜야 할 성주의 딸이 무사한 걸 확인하자마자 내린 판단이었고, 그렇기에 괴물들은 기사들의 무자비한 창칼에 죽어 나갔다.

할 일을 마친 기사들이 곧바로 제오나에게 달려갔다. 그녀를 지키면서 다가오던 괴물들을 베어내던 렉시는 말없이 물러났다.

기사들이 무사한 제오나를 살피다가 무슨 대화를 나눈 건지 와하하- 하고 웃어젖혔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제오나도 머리를 긁적이며 웃고 있었다.

그때 기사들 중 망토를 걸친 기사 하나가 다가왔다. 걸어올 때마다 암적색의 망토가 멋들어지게 휘날렸다. 러셀은 칼을 칼집에 꽂아 넣으면서 생각했다. 멋진데. 성주한테 가면 나도 저런 거나 하나 달라고 할까.

기사가 말했다.

“대단한 솜씨군. 도시에 이런 실력을 가진 용병이 있다고는 못 들었는데. 온 지 얼마 안 됐나?”

투구에 가려져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중후한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중년의 남자로 짐작할 수 있었다.

“어제 들어왔소.”

“음. 제오나 아가씨를 지켜줘서 고맙네. 성주님이 아시면 큰 상을 내릴 걸세.”

“그 성주가 지켜달라고 부탁했기에 했을 뿐이오.”

“그런가? 역시, 아닌 것 같아도 자식은 끔찍하게 위하시는 분이시니까. 그렇다 해도 자네의 업적은 업적일세. 세상에, 미노타우로스를 그렇게 쉽게 죽이다니. 나조차 다른 기사들과 협공 하지 않으면 자신 없는 괴물인데 말이야.”

기사의 너스레에 러셀이 빙긋 웃으려는 순간, 되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사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 했나 생각한 찰나, 러셀이 획 뒤돌았다.

그곳에는 방금까지만 없던 존재 하나가 서 있었다. 그는 러셀의 감각권 안에 갑자기 나타났다.

키는 3미터는 되어보였고 회색의 후드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전혀 얼굴을 알 수 없었다. 손에는 재질을 알 수 없는 금속성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병사들과 용병들도 거인의 갑작스런 등장에 웃고 떠들기를 멈추며 뒤로 분분히 물러났다.

곧 거인을 중심으로 둥글고 넓은 빈 공간이 생겼다. 거인은 뼈지팡이를 바닥에 짚은 채 고개를 반 바퀴 휘이 돌렸다.

인간들의 군대를 둘러보던 시선은 곧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 시선의 끝에는 러셀이 있었다. 다른 병사들이나 기사들과 같이 물러서지 않아서 안쪽의 동심원 중 유일하게 돌출되어 있는 상태였다.

후드를 뒤집어 쓴 존재가 말했다.

“네가 나주렉을 죽인 놈이구나.”

러셀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칼리스덴에 도착하기 전 죽였던 트롤의 이름을 아는 자들은 많지 않다. 그 자리에 있었던 상행의 상인들, 이블린, 엘레노아, 용병들이 전부다. 그는 트롤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그럼 네가 카루곤이군.”

“···나주렉이 말했나? 멍청한 것. 그나마 가진 재능이 있어 마력을 일깨워줬더니, 입이 그렇게 가벼웠었나.”

대화를 나누면서 러셀은 마력과 신체를 점검했다. 아무 이상을 느끼지 못 했다. 감각에는 이상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저 거인이 러셀조차 속여 넘길 수 있는 은신 실력을 가졌거나, 아니면 투명 마법이든 은신 마법이든 간에 주문을 썼거나 였다. 하지만 저 거인은 말 그대로 갑자기 나타났다. 은신이 풀린 것도, 주문이 풀린 것도 아니었다.

러셀은 마지막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공간이동.

인간 마법사, 마녀 중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이들이 손에 꼽고 요정들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위험이 동반된 최고위의 이동 마법.

하지만 눈앞의 거인은 요정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그리고 그건 거인이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내리면서 확실해졌다.

“요, 용족이다!”

“드, 드레코니안? 드레코니안이야?”

“멍청아, 드레코니안은 사람같이 생겼어!”

“용, 용의 머리에 거인의 육체! 드라칸이야!”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 못하는 병사들과 다르게 용병들의 것은 확실히 더 자유분방했다.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 오지와 험지를 수없이 나다닌 뼈 굵은 용병들은 저 거인의 정체를 한 눈에 유추했다.

여러 개의 뿔이 달린 용의 머리를 보다 작은 사이즈로 축소 시켜놓은 듯한 외견, 파충류의 위 아래로 길게 찢어진 노란 홍채.

검푸른 비늘이 덮인 피부와 로브 사이로 드러나는 근육질의 거대한 육체, 그 뒤편으로 보이는 도마뱀의 꼬리까지.

위대한 존재의 피를 이은 후손 중 드라칸이라 불리는 종족이었다.

그때 망토를 두르고 있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고매하신 용족이여, 인간들의 도시에는 무슨 일로 온 겁니까? 괴물들의 침공을 알고 도와주려 온 것이라면 감사한 일이나, 전투는 끝났습니다. 혹여 저희가 도울 일이 있으면 손닿는 내에서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기사의 말에 검푸른 비늘의 드라칸이 큭큭 웃었다. 굵고도 낮은 목소리가 바닥을 타고 흘렀다. 알 수 없는 마력이 담긴 웃음소리에 담이 약한 자들이 잘게 떨고, 누군가는 침을 삼켰다.

“그래, 비루먹은 너희 인간들이 도와줄 일이 있지.”

모욕적인 언사에 이어 드라칸의 지팡이가 들어 올려졌다.

“너희들의 처절한 공포와 절망, 목숨. 그것들만 주면 된다.”

지팡이가 대지를 내려찍는 것과 동시에 섬광과 충격파가 그들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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