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애보기
그 높고도 청량한 목소리에 모든 기사들이 화답했다. 제각기 창을 들거나 검을 든 기사들의 대형이 첨단은 뾰족하고 뒤는 넓은 하나의 쐐기꼴 형태를 만든 것이었다.
하아! 하아! 달려라! 달려!
성벽 아래로 뿜어지던 화염들이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벌겋게 탄 땅을 기사들이 달려갔다.
먹구름 아래서도 빛을 잃지 않는 은빛 판금을 두른 초인들.
소수만 느낄 수 있다는 마나를 느끼고, 그를 넘어 마력이라는 힘으로 가공해서 육체적 능력을 괴물에 비견될 만큼 끌어올리는 비술을 터득한 자들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자.
괴물들도 겁도 없이 성문을 박차고 나온 인간들을 향해 마주 달려들었다. 활과 화살을 지닌 놈들은 곧바로 그것을 쏘아냈다.
“투사체를 보호하는 장벽!”
선두에 선 물빛 머리의 여기사가 검을 앞으로 쭉 내밀자 푸른 보호막이 생겨났다. 귀걸이가 빛을 내고 있었다.
투둥, 투두둥! 화살들은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났고, 기사들은 방해 없이 파죽지세로 달려 나갔다. 괴물들의 집단과 뾰족한 쐐기꼴의 기사들은 급속도로 거리가 줄어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달려들고 있음에 그러했고, 둘 모두 멈추지 않았기에 그러했다. 괴물들은 흐릿한 의식 속에서 본능과 하나의 명령만을 떠올리며, 인간들은 내 가족과 도시, 동료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내던졌다.
충돌. 굉음. 비명.
기마병들은 가뿐히 괴물들을 지르밟으며 나아갔다. 사위가 어둑어둑한 가운데 안 그래도 검고 짙은 피부를 지닌 괴물들은 더 검게 보이고, 그 사이에서 푸른 빛을 발하는 기사들은 확연히 눈에 띄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건 선두에 섰던 여기사였다. 찰랑이는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검으로 괴물을 찔러 죽이는 여자.
덩치 큰 다른 기사들에 비해 왜소한 체형을 지녔지만 이따금씩 그녀의 몸 주위에서 푸르게 일어나는 불길이 마력을 각성한 초인임을 알렸다.
흉벽 위에서 담배를 태우는 러셀은 그 모든 것들이 잘 보였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다시 성주의 목소리가 닿았다.
-저 아이의 이름은 제오나. 내 딸이네. 용맹하지?
“···딸이라고?”
러셀은 굳이 성주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괴물들의 틈새에서 칼을 휘두르는 물빛 머리의 기사를 지켜봤다.
어디서 칼 배우는 솜씨를 익혔는지 휘두르는 자세가 나쁘지 않았다. 말 위에서도 안정적으로 괴물들의 머리를 쪼개는 것이 후에 살아남는다면 이름을 떨칠 수도 있어 보였다.
-그렇다네. 어릴 적부터 인형이나 바느질 보다는 목검과 허수아비 인형을 더 좋아하던 아이지. 용을 무찌른 전사의 이야기를 가장 즐겨 읽고, 또 그것이 꿈인 아이라네.
러셀은 피식 웃었다. 그에 맞춰 담배 연기가 뭉텅이로 빠져나왔다가 허공으로 스며들었다.
-웃길 수도 있는 것 아네만, 아무리 허무맹랑한 꿈이라도 지켜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지. 그래서 그렇네만, 용병들을 이끄는 것 말고도 하나 더 부탁해도 되겠는가?
러셀은 아버지의 부탁이 뭔지 짐작했다.
“하지만 날 얼마나 봤다고?”
-오래 보아 왔다고 그 사람을 다 알 수 있다고 할 수 없듯이, 한 순간만 보아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 또한 있지. 자네는 후자일세. 내가 이제까지 봐온 전사 중 손에 꼽는 전사. 보상은 걱정 말도록.
괴물들 죽이고 돈 버는 것 추가에, 동화에 빠진 여기사 지키기. 나쁘지 않아 보였다.
와아아아!
함성 소리에 러셀이 고개를 돌리자 기사들에 이어 보병들, 그리고 용병들이 성문에서 나와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가자아! 괴물들을 죽여라아!
목표는 기마병들에 의해 반으로 쪼개지고 분열된 괴물들의 무리. 괴물들은 이제 하나의 군대나 집단 같지 않았다. 놈들은 창날과 칼날, 마법사들이 쏘아낸 주문들에 죽어갔다.
-할 텐가?
“하지.”
-그럼 도대체 언제 내려갈 생각인가?
“지금.”
말을 내뱉은 러셀이 흉벽에서 뚝 떨어졌다. 그를 보던 성주와 마법사가 깜짝 놀라고 금발의 사제도 푸른 눈을 치켜떴다.
알베르트가 거울의 상을 만들자 아무렇지 않게 바닥을 딛고 선 러셀이 보였다. 다친 곳 하나 없어보였다. 그는 툭툭 발목을 돌리더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알베르트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계단 타고 내려가면 될 것을.”
“늦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나도 가끔 생각한 방법이라네.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남자의 로망을 아는 친구로군.”
“남자의 로망은 다 얼어 죽었답니까?”
“큭큭, 알베르트. 내가 어디 잡지에서 읽은 말인데, 남자가 말한 유언 중 가장 많았던 말이 뭔 줄 아나?”
“······.”
“‘괜찮아, 나 안 죽어.’”
크하하핫!
웃어젖히는 프레드릭 성주를 알베르트가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금발의 사제는 무사한 러셀의 모습에 남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거울에는 어느새 같이 떨어진 것인지 흑요정 하나가 같이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옆에서 그녀가 뭐라고 하자 러셀이 고개를 저었다.
엘레노아는 대교회에서 받은 신탁을 떠올렸다. 머지않아 괴물과 악의 무리가 세상을 덮을 것이란 불길한 신탁을. 세상은 혼돈의 폭풍에 휩쓸릴 것이고, 그 중심에는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이가 있으리란 예언을.
그녀의 푸른 눈이 깊어졌다.
***
제오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자신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괴물 하나가 상처를 입거나, 목이 달아나 죽었다.
삶의 증명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나를 죽이려는 살의에 맞서 그것을 깨부수고 도리어 내가 죽여 버리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있음을 아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였다. 제오나는 그렇게 느꼈다.
“아하하하! 덤벼라, 괴물들아! 이 제오나 경에게 죽어 명예와 영광의 초석이 되어라!”
그녀의 검술은 물론 가진 마력의 재능도 무시 못 하는 것이지만, 그보다도 무구의 영향이 컸다.
손에 들린 날카로운 검은 그녀가 특별히 주문한 흑요정 대장장이가 만들어준 것이고, 상체와 하체를 보호하는 갑주는 난쟁이 대장장이가 만들어준 것이다.
그뿐인가. 양쪽 귀에는 길쭉한 육각형 모양의 수정 귀걸이가 달려 있었고 목에는 똑같은 모양의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아버지의 측근이자 성주의 마법사, 알베르트가 구해 준 유물 목걸이였다.
칼은 괴물의 두꺼운 가죽과 갑옷을 쉽게 베어내고 그녀의 갑옷은 괴물들의 무딘 칼과 창을 막아내며, 멀리서 날아온 화살 같은 투사체도 유물이 빛을 내면서 튕겨냈다.
제오나는 거의 무아지경이 되어 괴물들을 참살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마치 이야기 속의 전설적인 기사가 된 듯 했다.
마법의 무구로 몸을 감싸고 일신의 무력으로 괴물들의 군대를 박살내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기사!
문득 제오나는 검술 길드의 마스터가 그녀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처음으로 검에서 마력의 불길을 일으켰을 때였다. 잠깐이지만 검기를 발현하고 기뻐서 폴짝폴짝 뛰는 그녀에게 길드 마스터는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아가씨, 아가씨가 뛰어난 검의 재능과 마력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깥의 괴물들을 얕봐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마력의 힘으로 괴물과 비견될만한 힘을 얻기는 했지만, 진정한 괴물들은 정말 무지막지한 무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례로 용족들이 그렇습니다. 위대한 존재의 피를 이은 그들은 태생적으로 강력한 육체 능력과 마력 기관을 타고 납니다. 또한 수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은 마법 능력과 전투 기술은 인간 대마법사와 마스터를 간단히 압도합니다. 그러니 만약 그런 괴물을 만나게 된다면 목숨을 부지할 생각만 하십시오. 살아남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오나는 코웃음 쳤다.
“흥. 난 그런 괴물들 따위 두렵지 않아.”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은 가볍고, 덤벼드는 괴물의 가죽은 버터 가르는 것 같다. 그건 무기가 가진 예리함과 고대의 유물이 그녀를 보조하면서 주는 힘이었지만, 제오나는 갈수록 그것이 온전한 자신의 힘인 것으로 착각해갔다.
우-어-어-어-어!
돌연 전장 전체를 울리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제오나는 그 소리의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뿔이 달린 거대한 소머리, 검은 인간형의 육체. 손은 인간의 것과 닮았지만 발은 소의 발굽이다. 피부는 짙은 갈색이었고, 끔찍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들과 혈관들이 툭툭 튀어나와 있었다.
키는 작게 잡아도 3미터 이상. 미노타우로스의 손에 들린 긴 자루의 전투 도끼가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쓸어냈다. 작은 고블린이든 놀이든, 오크든 상관없었다. 놈은 똑바로 제오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커다란 콧구멍에서 흰 김이 쏟아진다.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흉흉히 빛나는 붉은 광망에 제오나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흐.”
주위를 둘러보자 어느새 그녀 혼자 말을 타고 서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흩어져 트롤이나 변종 고블린 같은 다른 대형 괴물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기사들이 떨어진 게 아니라 그녀가 스스로 떨어져 나온 것이었다. 그 증거로 몇몇 기사들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제오나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곧 미노타우로스와 똑바로 마주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고 비명 같은 고함을 질렀다. 아가씨! 돌아오십시오!
물빛 머리칼의 기사, 제오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씨익 웃음을 지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내 방 장식물에 딱 어울리는 머리통을 달고 있군. 너도 그 흉측한 몸보다는 아리따운 아가씨 방에 걸리는 게 더 좋을 거야. 가자, 이스타!”
히히히힝.
그녀의 애마가 울음소리를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앞에 가로막히는 것들은 모두 걷어차이거나 걷어차이기 전에 옆으로 몸을 날렸다.
곧 제오나와 미노타우로스 사이에는 어떤 것도 서 있지 않았다.
짙은 먹구름 덕에 한 없이 낮아 보이는 하늘, 그 아래 서 있는 소머리의 괴물 거인이 보였다. 얼굴에 부닥치는 바람에는 비 내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온몸에는 이스타가 대지를 박찰 때마다 전해져 오는 진동이 느껴졌다.
그 고양감. 세상에 나와 저 괴물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 주위의 배경이 아스라이 멀어지고 점점 가까워지는 괴물의 피부 모공마저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도끼가 들려지고, 제오나는 높이 든 칼을 휘둘렀다.
나는 고함을 질렀나, 비명을 질렀나.
빙글빙글 돌아가는 시야. 왜 하늘이 땅 밑에 있을까. 몸이 한 없이 가볍다. 나를 이루는 피와, 살과, 근육과, 뼈가 한순간에 사라진 듯 하다.
콰앙!
격렬한 고통. 사라진 듯 했던 피와 살과 근육과 뼈가 순식간에 다시 나타나더니 제자리에서 그대로 있었음을 호소했다. 나는 수없이 뒤바뀌는 하늘과 땅의 교차에 비명을 질렀다. 그만 좀 멈춰줬으면. 이 돌아버릴 것 같은 현기증.
어느새 그녀는 자신이 엎드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욱.”
우웨에엑. 속에서 올라온 것들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침과 피가 섞인 액체가 땅을 적셨다. 끈적한 것이, 붉은 피의 지분이 더 많은 듯 하다.
뺨에 거친 흙의 감촉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쓰고 있던 투구는 어디 갔지?
괴물들의 고함 소리. 인간의 고함 소리. 제오나 아가씨!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 일어나십시오, 아가씨! 그래. 일어나야 해.
“쿨럭, 쿨럭! 커헉, 허르르르.”
이게 내 입에서 나온 소린가? 유모가 들으면 기겁을 하겠는걸. 안 그래도 아가씨답지 못하다고 맨날 잔소리했는데.
“이히히히힝!”
말의 울음소리. 나는 고개를 들었다. 쓰러진 채 네 개의 다리를 휘젓는 생물이 보인다. 일어나려 하지만, 곧 그 배를 짓밟는 괴물이 있었다.
콧김을 내뿜는 미노타우로스가 들고 있던 도끼를 내리쳤다.
서걱, 하고 말의 목이 잘려나갔다. 하늘을 향해 버둥거리던 네 다리가 꼿꼿이 세워지며 부르르 떨더니, 곧 축 늘어졌다.
이스타. 13살 생일에 선물로 받았던 나의 말. 나의 친구.
“크흐윽. 하그으아아악.”
땅에 손을 짚으며 나는 일어났다. 아니,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넘어졌다.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하루 종일 목검으로 허수아비 인형을 내리쳤을 때보다도 더 격렬히 떨리는 팔.
쿵, 쿵 하고 미노타우로스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놈은 다 잡은 먹잇감이라고 생각하는 지 느긋하게, 급할 것 없다는 듯이 오고 있다. 내가, 내가 먹잇감이라고? 내가 져? 이 제오나가?
“하아아아!”
어느 순간 나는 일어나 있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가슴과 배가 아프고, 볼이 쓰라리고, 손에 들린 검이 무거웠다.
귓가에 다른 손을 가져가자 느껴져야 할 감촉이 없었다. 귀걸이가 부서진 것이었다. 아마 저 미노타우로스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겠지.
그녀가 별다른 외상없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말과 그 이후의 낙하 충격까지는 막지 못 한 것 같았다.
목을 더듬으니 목걸이는 남아 있었다. 이게 몇 번이나 더 날 지켜줄 수 있을까.
문득 고개를 드니 미노타우로스가 눈앞에 서 있었다. 놈은 기다려 준 것 같았다.
“하. 괴물 주제에.”
제오나는 몸 내부의 마력을 일으켰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과 같은 푸른 마력의 불길이 몸을 덮었다. 머리카락이 넘실거리며 중력을 거스르고 떠올랐다. 하늘 색 눈이 빛났다.
그러나 무리하게 마력을 일으킨 부작용인지, 속에서 또 핏물이 올라오려 했다. 그녀는 그것을 힘주어 삼키고 미노타우로스를 노려봤다.
이스타의 안장 옆에 걸어놓았던 방패가 없으니 양손으로 장검을 붙잡고 괴물을 마주봤다.
여기사와 미노타우로스가 대치했다. 바람은 멈췄다. 기사들이 달려오려 했으나 주변의 괴물들에 저지당했다. 그녀와 미노타우로스의 반경에는 어떤 방해물도 없었다.
우-어-어-어-어-엉!
“흐아아아압!”
미노타우로스의 거대한 도끼와 제오나의 칼이 부딪쳤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 힘을 견뎌냈다. 가진 마력과 검술 길드 마스터마저 감탄한 검술의 재능이 그를 가능케 했다.
칼과 도끼가 부딪치는 굉음이 수차례 전장을 울렸다. 그녀는 도끼를 막아내고 쳐내면서 해볼 만 하다고 느꼈다. 승산이 있다고.
비록 방심 때문에 이스타를 잃고 내상을 입었지만, 이대로 더 버티면서 기회를 보면 될 것이라 여겼다. 그때는 이스타가 죽은 것처럼 똑같이 가슴을 밟고 참수자처럼 목을 쳐 내리라.
콰앙!
그때 예상치 못한 괴력에 손목이 꺾였다. 그리고 그 꺾임에 따라 제오나가 쥐고 있던 검이 그녀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끄으으윽!”
눈앞이 번쩍이는 고통에 절로 무릎이 굽혀졌다. 제오나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미노타우로스의 얼굴이 있었다. 황소의 머리를 세 배 쯤 확장시킨 크기였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짐승의 냄새가 났다. 석달 열흘 동안 말 오줌통에서 삭힌 옷감을 하수도의 진창에 빨면 이런 냄새가 날까 싶었다.
그 냄새의 근원에서, 제오나는 괴물이 웃고 있음을 알아챘다. 비죽이 찢어진 입가와 그 틈에서 누렇게 번들거리는 이빨. 끔찍한 입 냄새. 둥글게 휘어진 잔인한 붉은 눈동자.
미노타우로스는 제오나를 가지고 논 것이었다. 일순간의 승리감, 일순간의 도취를 이끌어내기 위해.
“개 같은 새끼.”
어깨에 파고드는 검의 통증과 점점 바닥에 닿아가는 무릎을 느끼면서 제오나는 입가를 비틀었다. 그리고 그 웃음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괴물은 발길질을 날렸다. 제오나는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목걸이가 눈부신 빛을 내면서 터지고, 그녀의 몸을 감싼 보호막이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다시 한 번 하늘과 땅의 뒤바뀜.
제오나는 구르기를 간신히 멈췄다. 울컥, 하고 참았던 핏물이 뿜어졌다. 턱과 목, 가슴팍을 적시며 피가 흘렀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충만하다고 느꼈던 마력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쓰러진 채 돌진 해오는 미노타우로스를 쳐다봤다.
이제 끝내겠다는 듯 양손으로 자루를 쥐었고, 그 끝의 번뜩이는 도끼날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에 따라 제오나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달려오는 소머리의 괴물, 털로 수북한 상체, 터질 듯한 근육질의 팔, 그 손에 쥐어진 도끼, 그 위의 검은 하늘.
이렇게 끝인가?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가 밤마다 읽어준 용을 무찌른 전사의 동화를 읽으며 잠들고, 검의 날카로움에 홀리고, 검술과 마력의 재능이 있음에 기뻐하고, 하루 온 종일을 훈련하고, 터진 살갖 위에 다시 굳은 살이 생기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앞에서 이리 당당한 전사가 되었다고 자랑하고 싶었던 내가.
정점을 찍었던 도끼가 내려쳐진다. 제오나는 그걸 막을 수 없다. 쥐고 있었던 칼은 어디론가 날아갔고, 갑옷은 걸레짝이 되었으며 그녀를 지켰던 유물은 모든 힘을 잃고 부서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눈을 돌리지 않고 도끼를 정면으로 쳐다봤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 속에서 제오나는 나름대로 할 말을 했다.
엄마. 나, 그래도 잘 했어요. 도시를 침공하는 괴물도 많이 죽였어요. 내가 없어도 남은 기사들이 괴물들을 무찔러 줄 거예요. 그러니까 왜 이렇게 빨리 왔냐고 혼내지 마요. 나. 엄마, 정말정말 많이 보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미안. 아빠.
콰앙!
제오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선가 날아든 하얀 선이 미노타우로스의 도끼와 충돌했다. 그 힘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미노타우로스는 튕겨나는 도끼를 놓치고 뒷걸음질 쳤다.
떨그렁! 푹.
순차적으로 도끼가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도끼를 튕겨냈던 하얀 선이 땅에 박히는 소리였다.
제오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것을 바라봤다.
그것은 대검이었다. 보통 클레이모어보다도 커다란 검. 길쭉한 손잡이와 그를 감은 하얀 가죽, 그 아래로 난 십자 막이와 넒고 커다란 검신이 있었다. 그녀의 눈에 검신에 새겨진 나무의 문양이 보였다.
그것은 그녀가 아무리 찍어달라고 해도 거절했던 흑요정 대장장이의 상징이었다. 위아래로 나뭇가지와 뿌리가 대칭을 이루는 나무. 세계수.
“멀리도 와 있네.”
투덜거리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이 대검을 잡고 뽑아들었다.
“어떻게 난 여기에 와서도 애를 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