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클레이모어
러셀도 놀랐다. 바깥에서는 만나지도 못했던 요정을 대장간에서 보게 되다니. 그것도 흑요정을. 요정이 대장간 일을 할 줄 알던가? 아니지, 반지의 제왕에서는 엘프가 아라곤에게 검을 고쳐줬었지···.
생각해보니 몇몇 신화에서는 요정이 난쟁이보다 뛰어난 야장 기술을 가진 종족이라고 소개됐던 것 같다.
그의 턱에 정수리가 닿는 키의 흑요정은 팔을 훤히 드러낸 멜빵 조끼와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검은 색의 찰랑이는 머리카락은 방해되지 않게 하기 위함인지 깔끔하게 뒤로 묶었다.
예쁜 얼굴에는 작업을 하다 나왔는지 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러셀은 그 땀방울 중 하나가 고운 턱선을 타고 흐르다가 목을 지나 쇄골을 넘은 다음 가슴골 속으로 쏙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흑요정이 그런 러셀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걸었다.
“엄청 크신 인간분이네요. 어떻게 오셨어요?”
“···처분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가슴골에서 시선을 뗀 러셀이 뒤를 가리켰다. 흑요정은 수건으로 턱과 목을 닦더니 뒤편에 놓인 수레에 다가갔다.
“갑옷이랑 칼이네요? 전리품이군요?”
“예.”
“음, 저 혼자서는 처분 못하고요. 안에 필리 아줌마 일 다 마치시면 같이 봐 줄게요. 저도 아직 잔업이 남기도 했고. 여기서 기다려 줄래요? 거의 끝나가거든요.”
필리 아줌마?
“그럼 조금 구경해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건 없지만, 꽤 뜨거울 텐데요.”
“괜찮습니다.”
마력을 각성하고 몸에 축적하면서 기온에는 그다지 영향을 안 받는 몸이 되었다. 이 정도 열기는 넘길 만 했다.
“그렇다면야. 더워서 뛰쳐나가도 이해해드릴게요.”
흑요정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작업장으로 향했다. 러셀이 뒤를 따랐다.
낮고 굵었던 목소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난쟁이가 흑요정처럼 팔이 그대로 드러난 차림으로 서 있었다. 주머니가 많이 달린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난쟁이는 집게로 쇳덩이를 잡고 화로에서 빼어들었다. 검신은 하얗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찌나 새하얗게 빛나는지 반대급부로 그 주변은 어두워 보일 정도였다. 난쟁이는 곧장 그것을 모루 위에 올려놓고는 망치질을 시작했다.
팅깡, 땅! 팅깡, 땅! 팅깡, 땅!
한 동안은 망치질 소리만 울렸다. 러셀은 그를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뜨거운 화로의 열기, 리듬감을 갖고 내려치는 망치질, 역동하는 근육, 조용히 흐르는 땀방울. 대장장이의 작업은 말을 꺼내기 어려운 엄숙함과 고요함이 공존했다.
흑요정은 반대쪽 모루에서 갑옷을 두들겼다. 흉갑인 듯 했다. 망치를 내리치는 움직임에 뒤로 묶은 머리카락이 춤추듯 흔들거렸다.
은근히 드러나는 잔근육 사이로 다시 땀방울이 흘렀다. 곧 완성된 것인지 흉갑을 걸이에 걸어두고는 러셀에게 다가왔다.
“인간치고는 잘 버티네요. 우리 대장간 화로 열기가 웬만한 곳 저리가라 할 정도로 뜨거운데.”
“버틸 만 합니다.”
“흐응.”
흑요정은 러셀 옆에 서서 난쟁이가 하는 일을 지켜봤다.
마무리 작업인지 난쟁이는 집게로 검신을 들어 모루 옆에 놓인 검은 액체가 담긴 통에 넣었다.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그러고는 꺼내 이리저리 보다가 흑요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리샤, 이 정도면 어떠냐?”
“엄청난데요? 제가 뭐 더 가르쳐드릴 게 없겠어요.”
“그래?”
뭔가 반대의 대화면 더 어울릴 말이 오갔다. 난쟁이는 흑요정의 칭찬에 씨익 웃더니 숫돌로 칼날을 갈았다. 싸악, 싸악 하고 문지르는 소리가 났다.
물을 붓자 쇳가루 섞인 검은 물이 주르륵 흘렀다. 몇 번 더 그렇게 간 다음 천으로 칼날을 닦고 슴베와 코등이, 자루를 검신에 끼워 맞췄다.
그렇게 검 하나가 뚝딱 완성되고, 난쟁이는 그것을 코에 닿을 정도로 쳐다보더니 구석의 지지대에 세워두었다.
일련의 일을 마친 난쟁이가 집게와 망치를 주머니에 넣더니 터벅터벅 걸어왔다. 러셀의 허리춤에 겨우 닿는 키 였지만 어깨는 넓었고, 훤히 드러낸 팔에는 근육이 가득했다.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묶었고 턱에는 갈색 수염이 났는데, 남자처럼 거친 수염이 아니라 솜털처럼 부숭부숭한 것이었다..
수염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의외로 매끈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아까 흑요정이 말했던 것처럼 여자였다. 툭 튀어나와 있는 가슴이나 수염만 지우면 여성적으로 생긴 얼굴이 그러했다.
난쟁이는 커다란 러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높이 치켜세웠다. 거의 허리가 꺾일 지경이 된 난쟁이가 투덜거렸다.
“원 그놈 참, 크기도 하다. 목 꺾이겠네. 거인의 피라도 이은 거냐?”
러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난쟁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어쨌든 기다려 줘서 고맙네, 젊은이. 난 필리라고 하네. 보다시피 난쟁이지.”
“러셀입니다. 착각하실 만 하지만, 인간입니다.”
난쟁이가 먼저 오른손을 내밀자 러셀이 화답했다. 러셀은 약간 허리를 숙여야 했고 난쟁이는 엄숙하게 발뒤꿈치를 들어올렸다.
둘의 악수를 나누는 모습을 보던 흑요정이 쿡쿡 웃었다.
“전 알리샤에요. 보다시피 흑요정이고요.”
러셀과 알리샤도 악수를 나눴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나자 난쟁이, 필리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생김새를 보아 성주 심부름을 온 건 아닌 것 같고. 용병인가?”
흑요정, 알리샤가 첨언했다.
“전리품을 처분하러 왔대요. 수레에 담아왔더라고요.”
“그래? 어디 보자고.”
“여기 있습니다.”
“음.”
러셀이 수레에 담긴 것들을 보여줬다. 주머니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 땀을 닦던 필리 아줌마가 가까이 다가와 그것들을 살폈다. 그러고는 곧바로 혀를 찼다.
“쯧쯧, 어떤 무식한 놈들이 갑옷을 이따위로 쓴 게야? 얼씨구, 칼날 이 나간 것 좀 봐라. 톱날로 써도 되겠어. 필시 덜떨어진 인간 도적놈들이나 괴물들이겠지. 맞지?”
“우룩크들의 습격을 이기고 얻었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음, 음.”
그녀는 크고 두툼한 손으로 갑옷과 무기들을 살폈다. 우룩크 아홉 중 여섯이 갑옷을 착용했었고 무기는 대검 하나에 칼 서너 개와 도끼 몇 자루가 있었다.
그놈들이 입었던 갑옷은 한 세트라기보다는 여기저기 구해서 이어 붙였던 것에 가깝다. 흉갑, 견갑, 완갑, 정강이 받이 등 다양하고 개수도 많았지만 손질을 제대로 하지 않아 외견상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필리 아줌마는 그것들을 훑으며 손가락으로 통통 두드려보기도 하고 칼날에는 엄지를 비벼보기도 했다. 베이나 싶었는데 무뎌져서 그런지 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필리 아줌마가 말했다.
“상태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그래도 양은 꽤 되는군. 금화 여덟 개. 알리샤, 괜찮지?”
“네. 그 정도는 돼 보이네요. 녹여서 써도 괜찮은 강철이에요.”
예상한 것보다는 값이 좋았다. 상태는 나빠도 강철은 강철이라 그런가. 양은 꽤 되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좋아.”
난쟁이는 그 많은 주머니들을 뒤적거리더니 가죽 주머니를 하나 꺼내 거기서 금화를 거슬러 줬다. 금화를 챙긴 러셀은 그것을 바로 품에 넣지 않고 손에 쥐었다. 러셀이 말했다.
“그리고 칼도 하나 봤으면 합니다.”
“응? 칼? 그건 곤란한데.”
“맞아요. 그건 좀 곤란한데요.”
러셀이 표정을 찌푸렸다.
“대장간에서 칼을 파는 게 왜 곤란합니까?”
“자네, 외지인인가 보군? 지금 이 칼리스덴의 프레드릭 성주가 병력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리 못 들었나? 덕분에 우리 대장간들만 호황이지. 칼 수십 자루에 갑옷들을 제작해달라는 주문이 넘치게 들어오니. 방금 우리가 만들었던 것들도 다 납품이 예정된 것들이라네.”
러셀은 어제 식당에서 들었던 대화 중 하나를 떠올렸다.
“···서북쪽 숲에 골칫거리가 나타났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바로 그거야. 어디서 나타난 건지, 숲에 똬리를 틀고 앉은 도적단 놈들이 있지. 규모가 꽤 커. 그놈들 때문에 서쪽 관문은 발걸음이 뚝 끊기다시피 했어. 북쪽 관문도 그 수가 훨씬 줄어들었고.”
러셀이 온 곳은 남쪽 관문이었다. 그가 호위했던 행렬의 길잡이가 괴물의 서식지와 최단 거리를 고려해서 빙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룩크나 고블린 같은 괴물들에, 막바지에는 화염을 다루는 이상한 트롤까지 맞닥뜨렸으니 그 노력이 실현된 건 아니었지만.
“그냥 골칫거리 정도가 아닌가 보군요.”
“무역 도시이자 관문 도시인 이 칼리스덴에 발길이 끊길 정도면 그놈들 패악질이 수준 이상이라는 거지. 안 그래도 일주일 전에 성주가 병사들을 보내 정찰해봤는데, 놈들이 괴물을 부린다더군. 스물을 보냈는데 다섯이 겨우 돌아왔어. 질 나쁜 마법사나 마녀 같은 게 있는 건지 원. 그러고 보니 자네는 어디서 왔나? 동문?”
“남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엉?”
“남문이요?”
필리 아줌마와 알리샤가 의문성을 뱉었다.
“남문이면, 무슨 괴물이 길목을 틀어막고 앉았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은데. 오우거였나요?”
“트롤입니다. 그리고 그 트롤은 어제 잡았습니다.”
“뭐야? 사람들이 떠들어댔던 게 그거였구만?”
필리 아줌마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 참. 그건 그렇고 계속 올려다보니 목이 꺾일 지경이야.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지. 알리샤, 다 마쳤지?”
“전 흉갑만 조금이었잖아요. 진작에 다 했죠.”
러셀은 필리 아줌마가 안내해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인간 사이즈로 맞춰진 의자라 불편하진 않았다. 바로 옆에 알리샤가 앉았다.
필리 아줌마는 의자에 앉더니 손을 아래로 내려 뭔가를 조작했다. 그러자 뭔가가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위로 쑥 올라왔다. 그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기하지? 의자 아래에 용수철을 달았지. 다시 내리려면 손잡이를 돌려야 하지만, 이럴 때는 편리하지.”
그러고는 바로 옆의 선반을 뒤적거리더니 큼직한 술통과 나무 잔 세 개를 꺼내 알리샤와 러셀 앞에 뒀다. 그녀가 뚜껑을 열자 맥주 향이 났다.
“더운 데 오래 서 있느라 고생했어. 여기 받게나.”
“일하는 데 또 술이에요?”
“뭐 어때? 내가 내 술 마시겠다는데.”
“못 말리겠어요. 전 됐으니 둘이 마셔요.”
알리샤가 거절하자 필리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자신과 러셀의 것에만 에일을 부었다. 황금빛 음료가 콸콸 쏟아졌다.
“난쟁이에게 맥주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 자, 건배하게!”
러셀은 피식 웃고는 술잔을 마주쳤다. 생각보다 더 호탕한 난쟁이 아줌마였다. 꿀꺽, 꿀꺽.
맥주를 마신 그의 눈이 커졌다. 이 뜨거운 대장간 안에서도 맥주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필리 아줌미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며 탄성을 흘렸다.
“캬하아! 좋구만.”
“시원하군요. 마법입니까?”
“그럼 뭐겠나? 인간들은 별 요상한 주문을 많이 알고 있단 말이지. 좋긴 하지만!”
“이런 데다 쓰니 수요가 있는 거겠죠.”
아무래도 그 술통에 마법이 부여되어 있는 듯 했다. 난쟁이가 솜털 같은 수염에 묻은 맥주를 닦아내면서 말했다.
“그래, 그 트롤을 잡았다고? 듣기로는 덩치가 엄청났다던데. 설마 혼자 잡았나?”
“도움이 있긴 했습니다.”
“어디 설명 좀 해봐. 무용담 좀 들어보자고.”
러셀은 반짝이는 난쟁이와 흑요정의 눈을 마주 보면서 트롤과의 전투를 설명했다. 둘은 생각보다 입담이 뛰어난 러셀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었다.
러셀은 트롤이 불꽃을 다뤘다는 이야기는 빼고 같이 있던 마법사와 사제의 도움으로 이겼다고 하고 설명을 마쳤다.
“그래도 대단해요. 기사나 돼야 단독으로 성체 트롤을 죽일 수 있을 텐데.”
“흠. 그놈이 나타난 지 이제 나흘 밖에 안 되긴 했지만, 그 정도만 해도 상인들에게는 충분히 말이 돌 시간이지. 빨리 처리돼서 다행이야. 안 그래도 그놈 때문에 길을 빙 돌아가야 했다고 투덜거리던 놈들이 많았거든.”
“흠. 그놈이 나타난 지 이제 나흘 밖에 안 되긴 했지만, 그 정도만 해도 상인들에게는 충분히 말이 돌 시간이지. 빨리 처리돼서 다행이야. 안 그래도 그놈 때문에 길을 빙 돌아가야 했다고 투덜거리던 놈들이 많았거든.”
그런데 말이야. 필리 아줌마가 남은 맥주를 마시면서 말했다.
“크하. 자네 어쩌면 일에 휘말릴 수도 있겠어.”
술이란 건 신기한 것이다. 마셔도 마셔도 목이 타게 만드니. 어쩌면 그게 술의 마력이지 않을까. 러셀도 맥주를 홀짝이며 물었다.
“무슨 일 말입니까?”
“무슨 일이긴.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나? 성주가 병력을 모집하고 있단 말이네. 거기에는 꼭 병사뿐만 아니라 용병도 포함이지. 그것도 실력 있는 놈들로. 자네, 마력 다루지?”
“그렇습니다.”
“놀라는 척도 안 하는구만?”
“필리 씨도 마찬가지잖습니까. 알리샤 씨도 그렇고.”
필리 아줌마는 털털거리며 웃더니 잔에 맥주를 부었다. 보글거리며 흰 거품이 부옇게 올라왔다.
“눈이 날카로운 친구구만. 나야 아버지 어머니, 선대로부터 배운 기술일 뿐이야. 불이랑 쇳덩이나 조금 다룰 줄 아는 거지. 알리샤도 마찬가지고.”
“ 아, 아까부터 궁금했던 게 하나 있습니다.”
“왜 흑요정이랑 난쟁이가 같이 야장일을 하냐, 그거 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알리샤, 네가 말해줘라. 난 쑥스럽다.”
“아줌마도 참. 별 게 다 쑥스러워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필리 아줌마랑 저는 서로가 가진 야장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입장이에요. 이 도시에 먼저 정착하고 있던 건 저였고, 일거리를 찾으러 온 아줌마랑 동업하게 됐죠.”
맥주를 마시던 필리 아줌마가 덧붙였다.
“알리샤는 나보다 칼 만드는 실력이 뛰어나지. 내가 많이 배우고 있어.”
“아우, 부끄러워요 아줌마.”
“됐어, 이 녀석아. 그래 궁금한 건 풀렸나?”
“네.”
“그래. 돌아와서, 자네가 마력을 다루는 데다가 트롤을 잡을 정도의 실력 있는 용병이면 성주가 부를 거야. 토벌대에 합류하라고.”
“거부하면요?”
필리 아줌마가 어깨를 으쓱였다.
“도시에서 쫓겨나는 거지. 그리고 다시는 못 오고.”
“그건 좀 심한 처사 같은데요.”
알리샤가 말했다.
“어쩌겠어요? 이 도시의 지배자는 프레드릭 성주인데. 이 커다란 도시에서 오가는 재화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제가 예전에 다른 도시들도 둘러봤지만 모두 칼리스덴의 반도 되지 못해요. 지리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그러니 만약 찾아오면 그냥 받아들여요. 성주가 인색한 사람은 아니니 보상금은 후하게 받을 거예요.”
러셀은 머리를 긁적였다. 어차피 며칠간은 이 도시에서 쉴 생각이기도 했다. 이 칼리스덴 외의 대도시는 일주일에서 이주일 이상은 도보로 걸어야 할 만큼 먼 곳에 있으니까.
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느긋하게 떠돌 생각으로 집을 나온 것이니.
“알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칼은 필요한데, 진짜 다 나간 겁니까?”
“그래. 다 나갔어. 지금 제작 중인 것들도 다 납품될 것들이고.”
“필리 아줌마, 안 나간 거 하나 있잖아요.”
“엉?”
필리 아줌마가 의뭉스런 표정을 짓자 알리샤가 배시시 웃었다. 곧 필리 아줌마도 뭔가를 알아차린 표정이 되었다.
“아, 그거? 괜찮겠냐?”
“뭐 어때요. 혹시 몰라서 손질은 계속 해왔는데.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걸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팔아넘기겠어요?”
둘은 러셀의 위아래를 훑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가져올까?”
“어제 정리했잖아요. 제가 가져올게요.”
알리샤는 대장간 뒤쪽으로 사라지더니, 곧 품에 큼직한 검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가히 대검이라 할 만했다.
“그건?”
보기에 클레이모어처럼 생긴 그 큰 칼은 보통 클레이모어보다도 검신이 넓고 길었다.
칼집에 들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폭은 15센티미터는 넘었고, 검신의 길이는 120센티미터는 되어보였다.
손잡이는 가죽으로 덮여 있었고 그 길이도 넉넉해 두 손으로 잡아도 될 것 같았다.
알리샤가 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전에, 프레드릭의 아버지 파트리키가 젊을 적에 만들어달라고 했던 검이에요. 혈기가 넘치는 작자였죠. 뭘 만들어드릴까 했더니 그냥 크고 멋있는 검이면 된다고 해서 골치 좀 썩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만들어주니 너무 무겁다고 못 들겠다고 하더군요. 돈도 제대로 못 받았고. 개새끼.”
러셀이 필리 아줌마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프레드릭 성주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삼십 대 후반 쯤 되지 아마? 그건 왜?”
“······.”
러셀은 가만히 눈앞의 흑요정을 바라봤다. 절대 이십대를 넘기지 않는 외모. 오히려 어떻게 보면 십대 후반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저 검은 최소한 삼십 년 전 무기다. 프레드릭의 아버지인 파트리키가 젊을 적이라면 사십에서 오십년 전 일 수도 있었다.
“나이 물어봐도 말 안 해줄 거예요. 묻지 말아요.”
알리샤가 빨간 눈을 흘겼다. 러셀은 어깨를 으쓱이고 그녀가 건네주는 대검을 받고 천천히 뽑아보았다.
스르릉!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검신이 빠져나왔다. 칼집 모양 그대로의 칼이 그의 손에 잡혀 있었다. 삼십 년 전에 만들어졌음에도 그 날카로움은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 필리 아줌마가 휘파람 소리를 냈다.
“멀쩡하구만.”
“대단하군요.”
“아니에요. 역시 옛날에 만든 거라 그런지 아쉬운 점들이 보이네요.”
검신의 아랫부분에 문양 하나가 양각되어 있었다. 어디가 나뭇가지고 어디가 뿌리인지 짐작가지 않는, 완전히 대칭으로 그려진 나무의 그림이었다. 알리샤는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확인하고는 설명해줬다.
“아, 그건 세계수의 문양이에요. 우리 요정들의 신화에 따르면 위아래로 똑같은 모양의 거대한 나무가 서 있고, 그 줄기마다 세계를 열매처럼 매달고 있다고 하죠.”
러셀도 전생의 언젠가 들어본 듯한 신화 속의 나무였다. 생각하는 사람들 상상은 다 비슷비슷한 모양이다.
“보통 대장장이 일을 하는 요정들은 만든 무구에 세계수 문양을 새겨요. 나중에 필생의 역작 같은 것을 만들면 자신만의 문양을 새기기도 하죠.”
“이 정도는 필생의 역작이 아닌가 보군요.”
“당연하죠. 재료도 다른 마나 메탈을 섞은 것도 아닌 그냥 강철인데. 마법을 따로 부여한 것도 아니고요. 그냥 튼튼하고 날카로운 칼이죠.”
“칼이 튼튼하고 날카로우면 됐습니다. 이걸로 하죠.”
“금화 2개만 줘요.”
러셀은 바로 금화 두 닢을 건넸다.
“아싸, 애물단지 팔았다!”
“잘됐구나, 알리샤!”
흑요정과 난쟁이가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키가 한 참이나 차이나고 종족도 앙숙으로 표현되는 게 다반사인 창작물들을 봐온 러셀에게는 많은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칼집과 벨트를 연결해 등에 맸다. 등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이 든든했다. 오른손을 어깨 위로 가져가면 손잡이가 잡혔다. 칼은 무리 없이 뽑혔다가 들어갔다.
춤을 추던 두 이종족은 그런 러셀을 보면서 나란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네요. 제 주인을 찾아서 다행이랄까요.”
“그러게나 말이다.”
“잘 쓰겠습니다.”
러셀은 대장간을 나왔다. 그런 그에게 마중을 나온 알리샤와 필리 아줌마가 외쳤다.
“또 와요! 수리할 거 있으면 싸게 해줄게요!”
“맥주 마시러 와!”
“아줌만 술 좀 그만 마셔요!”
러셀은 손을 흔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