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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8화 (9/225)

8화 흑요정과 난쟁이

늦었으니 이제 그도 머물 여관을 찾아야 했다. 부러져 버린 칼이나 담배는 내일 사기로 마음먹었다.

도시 중앙의 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주점과 여관이 밀접한 거리에 접어들었다. 관문과 무역을 겸한 도시이기 때문인지 규모가 컸다. 세워진 여관들도 3층 이하가 없을 정도였다. 대부분 4층이었다.

러셀은 길을 걷다가 대충 여관 하나를 골랐다. 란쉬무어의 바람이라는 산뜻한 이름의 여관이었다.

정문에 문은 따로 없고 나무 판 두 개가 보통 사람 가슴께에 달하는 위치에 달려 있었다. 러셀은 그것을 윗배로 밀고 들어섰다.

안은 넓은 홀이었다. 여느 여관들이 그렇듯이 1층은 주점 겸 식당이고, 윗 층부터 숙박실이었다. 천장은 약간 낮았고, 램프가 매달려 있었다.

그 불빛 아래에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시민들보단 갑옷을 차려입은 용병들이 눈에 띄었다. 모두 제각기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삶에 침잠해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풍경들이었다.

일순 들어선 러셀을 보고 그 키와 덩치에 시선이 모였다. 하지만 잠깐 놀라기만 했을 뿐, 곧 자기 앞의 그릇이나 술잔으로 돌아갔다. 작게 ‘뭐야, 거인이야? 덩치 개 크네.’ ‘짐승 놈들 이랑도 비슷하겠어.’ 하는 소리만 들렸다. 짐승은 수인을 말하는 건가?

여급 하나가 주방에서 나오다가 러셀을 발견했다.

“어서 오세··· 와.”

여급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한 밤색 머리에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에 넓은 골반을 가진 아가씨였다. 예쁜 얼굴은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다.

그녀는 넋을 놓고 러셀의 얼굴을 보다가 핫, 하고 정신을 차리더니 인사를 마저 했다.

“흠흠, 어서 오세요. 뭘로 먼저 드릴까요?

“일단 식사부터. 고기 종류면 상관없이 4인분, 그리고 맥주도 부탁합니다.”

러셀이 동화를 한 주먹 내밀자 여급은 허리를 꾸벅 숙이더니 주방 안으로 되돌아갔다. 러셀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따뜻한 벽난로 주변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러셀은 창가에 앉아야 했다. 유리는 질이 나쁜 것인지 불투명했고, 그렇기에 밖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흐릿한 아지랑이 같은 모습으로 창가를 스쳤다.

잠시 후 아까의 아가씨가 소반에 먹거리를 들고 다가왔다. 커다란 맥주잔과 잘 구워진 고깃덩이가 담긴 접시였다.

“맛있게 드세요!”

러셀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여급은 입가에 미소를 띄고는 가까운 탁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힐끔힐끔 러셀을 훔쳐봤다.

러셀은 맥주를 먼저 마셨다. 미지근하고 탄산도 없어 밍밍했지만 알코올은 듬뿍 담겨 있었다. 쭉 들이켜자 화끈한 불덩이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듯 했다.

후우, 하고 입김을 불자 코끝이 뜨거워지면서 알딸딸한 취기가 돌았다. 딱 기분 좋은 수준의 취기를 즐기면서 러셀은 고깃덩이를 잘라 입에 넣고 식당 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들에 귀를 기울였다. 다양한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서북쪽 숲에 골칫거리가 나타났다는데.”

“도적단 말이지? 나도 들었어. 듣기로는 괴물들을 앞세운다면서?”

“하수도에서 기어 나오는 괴물을 잡으면 돈을 준다는군. 갈 텐가?”

“냄새가 워낙 심해서···. 고민 좀 해야겠어.”

“진짜일까? 그, 그. 하수도 아래에···, 지하 미궁이 있다는 이야기.”

“쉿, 목소리 더 낮추라고. 아직 모르는 놈들이 더 많아···. 한 탕 할 수 있는 기횐데 날려버리면 안되지.”

“론도, 아직까지 미련이 남았냐? 그깟 여자는 잊어버리라고.”

“뭐? 그깟 여자? 네가, 네가 뭘 알아! 그녀는 내 전부였는데!”

한 구석에선 조용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소문과 괴물, 하수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또 어디에서는 한 남자가 시뻘게진 얼굴로 다른 남자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다 엉엉 울며 식탁에 엎어졌다.

러셀은 그 모든 걸 귀로 들으면서 식사를 마쳤다. 그가 손을 들자 여급이 쪼르르 달려왔다.

“부르셨어요?”

“몸을 씻고 싶은데, 장소가 있습니까?”

“아, 지하에 욕탕이 있긴 해요. 그런데 뜨거운 물을 다 써서, 다시 덥히려면 시간이 조금 걸려요. 그렇게 해드릴까요?”

러셀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시린 물을 원했다.

“그냥 차가운 물로 씻겠습니다.”

“그럼 여관 뒤편으로 가시면 우물이 있어요. 거기서 두레박으로 씻으시면 돼요.”

“얼마죠?”

“두레박 세 번에 동화 한 닢이에요.”

생각한 것보다 쌌다. 아마 바깥으로 강이 흐르는 덕분일 테지.

러셀은 동화 두 닢을 건네주고 바로 뒤뜰로 나갔다. 한쪽에 세워진 원뿔형의 천막은 여성 전용인 듯 했다.

갑옷과 옷을 벗자 근육으로 가득한 몸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떡 벌어진 어깨 아래로 흉악하게 갈라진 가슴, 등근육과 툭 튀어나온 핏줄이 꿈틀거렸다.

가느다란 팔다리에 배만 툭 튀어나왔던 전생의 몸과는 비교하는 것이 미안한, 그야말로 전사의 몸이었다.

우물물을 머리부터 뒤집어쓰자 여행 내내 묵었던 먼지와 흙들이 씻겨 내려갔다. 상쾌했다.

“와···.”

감탄사가 들리는 곳을 보니 그를 뒤뜰로 안내해줬던 여급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러셀의 몸에서 시선을 떼진 않았다.

여급은 근육의 결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를 멍하니 보다가 러셀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퍼뜩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수건을 건넸다.

“필요하실 것 같아서···.”

“고마워요.”

몇 번 더 두레박으로 물을 끼얹어 몸을 씻은 러셀이 옷을 입으며 말했다.

“숙박도 하려고 합니다.”

“아, 2층에 공동 객실이 있고 3층에 개인 객실이 있습니다. 공동은 동화 네 닢, 1인실은 여덟 닢입니다.”

“1인실로 하죠.”

숙박비를 주고 안내받은 3층의 빈 객실에 들어갔다.

“좋은 밤 되세요.”

인사를 남긴 여급이 미소를 남기고 물러갔다. 러셀은 방을 둘러봤다. 벽에 붙은 창문, 침대, 나무 탁자밖에 없는 단출한 구성의 방이었다.

문을 닫고 침대에 가방을 던진 러셀은 창문을 열고 아래를 바라봤다.

달이 높이 떠 있었다. 은은한 달빛은 도시의 환한 빛 위에서 어물쩡 흐르고 있었다. 밤이어도 거리는 시끄럽고, 복잡했으며 더러웠다.

도로 위는 아까보단 적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있었다. 굳은 표정의 병사들이 창과 방패를 들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사람들은 약간 두려움을 담은 표정으로 병사들을 바라봤다.

그 두려움은 병사 자체에게 향했다기보다는 그 병사들이 걸어가는 이유, 그리고 그 이유로 인해 벌어질 사건들에 향한 것 같았다.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러셀은 창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할 일이 많았다. 칼도 새로 장만해야 하고, 담배도 알아봐야 했으며 상회에 들러서 경매에 올라간 트롤 시체 대금도 받아야 했다.

호위 임무 완수금과 트롤 시체가 팔린 돈이 적지는 않을 것이다. 상인이 호언장담한 게 맞다면 금화가 한 주머니는 나올 테니까.

하지만 무기는 품질이 좋은 경우 값이 천정부지로 뛴다. 담배 같은 기호품도 싸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도 이블린이 줬던 것은 마법사들이나 연금술사들이 만들어 파는 것일 테니 비쌀 게 당연했다.

그리고 마법에 대해서도 더 관심이 생겼다. 그저 손가락 위에서 피워 올렸던 불꽃은 후에 트롤과의 싸움에서 크나큰 도움이 됐다.

우룩크와 싸웠을 때 이블린의 불꽃 마법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밤마다 마력으로 만든 불꽃을 가지고 놀지 않았다면 트롤의 화염에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물론 어떻게든 이기긴 했을 것이다. 러셀에게는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기고 난 후의 상태는 지금 같진 않았을 것이다. 엘레노아라는 치유가 가능한 사제가 있긴 했지만 그건 행운에 가깝다. 애초에 신성력을 쓸 수 있는 사제가 드무니까. 언제까지 그런 행운에 기댈 수는 없다. 결국 믿을 건 본신의 실력뿐이다.

그런 면에서 러셀이 저도 모르게 터득한 마법 파훼(이블린은 마력 간섭, 주문 역산이라고도 말했지만 러셀은 마법 파훼가 더 마음에 들었다.)는 나중에 마법사나 마녀와 싸울 일이 있을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네들은 화염 주문을 곧잘 쓰니 반격의 한 수라고 봐도 되겠지.

또 이블린이 경악할 만큼 러셀은 원소 마법에 재능을 보였다. 그건 러셀 본인이 태어날 때부터 지녔던 마나에 대한 감각이나 조작 능력에 근거한 것이었고, 스스로도 이게 평범한 재능은 아니란 것을 알았다.

마법에 관한 지식을 얻고 싶었다. 또 어떤 마법에 재능이 있는지 모를 일 아닌가.

여기에도 서점은 있겠지. 마법과 관련된 책을 팔려나 모르겠군.

낯선 나무 천장을 바라보던 러셀은 문득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그건 나흘 전, 이름 모를 길가에서 밤하늘 자락을 이불 삼아 누워 있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는 바로 몇 시간 전 트롤과 싸웠을 때를 회상했다. 이블린이 쏘아냈던 전격의 줄기와 얼음송곳. 하지만 아무리 검지를 노려봐도 전기나 서리 같은 건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격전 중에서 스치듯이 보았던 마법들이고, 화염구는 코앞에서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지 봤던 차이 같았다.

러셀은 트롤과의 전투, 마법, 밍밍한 맥주, 도시의 어수선한 분위기 같은 것을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

이튿날. 동쪽에서 뜬 태양이 아침 안개를 걷어냈다. 갈라지는 구름, 지평선을 타고 퍼지는 황금의 물살. 밤새 잠들어 있던 도시가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다. 차차 거리가 소란스러워졌다.

느지막한 아침 겸 점심 식사를 마친 러셀은 상회에 먼저 들렀다. 상회가 맡았던 갑옷과 무기들을 대장간에 처분하기 위해서였다.

정오를 향해가는 시간이었다. 도시는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서고 있었다. 대로 여기저기서 마차가 지나가고 노점들은 물건을 깔았다.

광란의 밤을 보낸 듯한 핼쑥한 얼굴의 사람들이 벽을 붙잡고 토하거나 골목길에 등을 기대며 주저앉아 있었다. 흔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이었고, 러셀은 그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상회에 들어서자 이름을 대기도 전에 직원 하나가 튀어나왔다. 아마 미리 언질을 받은 듯 했다.

“반갑습니다! 러셀님 맞으시죠?”

“네. 우룩크들이 썼던 갑옷과 검을 가져가려고 왔습니다.”

“네, 이리 오십시오.”

직원은 상회 옆에 지어진 창고에서 천이 덮인 큼직한 수레를 꺼내왔다. 낑낑 거리면서 수레를 끌어 러셀 앞에 두더니 품에서 종이를 한 장 꺼냈다. 직원이 설명했다.

“이건 칼리스덴 도시의 대략적인 지도입니다. 대장간이나 공방은 여기, 외성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옆에는 상회에서 보증하는 공방 이름이 적힌 목록입니다. 살펴보시고 맞는 곳에 들어가시면 됩니다.”

“호.”

종이를 받아들자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와 용도에 맞는 공방 이름이 적혀 있었다. 탐험에 필요한 소도구를 취급하는 장인이나 방어구를 전담하는 대장간, 무기와 방패의 전문 공방이었다. 러셀은 찬찬히 살펴보다가 한 곳을 짚었다.

“이 표시는 뭡니까?”

“아, 그건 성주님이 지정하신 전용 공방입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실력 좋은 장인이 있는 곳이지요. 상회는 성주님의 재가를 받아 저희가 고른 용병에게 공방을 이용권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것까지 챙겨줄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어지간히 좋은 인상을 남긴 것 같았다. 묻지도 않았는데 트롤 시체를 경매에 올려주겠다거나, 수수료를 제한 돈은 전부 주겠다고 한다거나, 이렇게 솜씨 좋은 대장간을 소개해준다거나.

상회 입장에서도 러셀 같이 강한 용병과 친하게 지내면 좋으니 이런저런 호의를 봐주는 것이리라.

러셀은 종이를 품에 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다면 모를까 챙겨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수레를 밀며 나아가자 차츰 뚱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대장간 거리는 시가지에서 약간 떨어진 외성 동문 쪽, 강가에 근접해 있었다. 그 소음도 소음이지만 아무래도 물의 중요성이 더 컸던 것 같았다.

대장간 외에도 가죽 방어구를 만드는 공방과 밧줄, 사슬, 램프 같은 것들도 취급하는 상점들도 보였다. 고리에 걸려 전시된 갑옷이나 방패가 조금씩 흔들거렸다.

다양한 장인들이 각자 눈앞에 놓인 것을 주무르거나 조립하며 뚱땅거렸다. 러셀은 종이와 거리를 번갈아 보다가 한 대장간을 골라 들어갔다. 깃대와 그 위에 깃발이 꽂혀 펄럭이고 있었다. 상회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멀찍이 놓인 화로는 벌겋게 빛나고 있었다.

화로는 숨을 쉬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불티를 뿜어지만 생각한 것보다 뜨겁진 않았다. 자세히 보니 달아오르고 있을 뿐 그 열기를 밖으로 내뿜지는 않고 있었다.

천장은 높았지만 그 아래의 도구들, 탁자나 의자 같은 가구들은 모두 그 키가 낮았다. 마치 그 주인의 신장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한 쪽에는 인간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듯 사이즈가 더 큰 것들도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잠깐만 기다리게!”

“제가 나가볼게요!”

낮고 굵은 목소리 이후 높고 명랑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시끄러운 망치 소리가 울리고 있음에도 러셀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린 듯 했다. 귀가 좋거나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이 좋은 것이 분명했다.

고함 소리가 들렸던 곳으로 가니 다른 화로와 모루가 보였다. 그리고 그 모루에 쇳덩이를 놓고 망치를 두들기는 난쟁이와 막 마중을 나오는 여인이 있었다.

약간 붉은 빛이 감도는 구릿빛 피부에 검은 머리칼과 빨간 눈동자를 가졌는데, 귀가 무척 길었다. 흑요정이 러셀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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