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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6화 (7/225)

6화 살아있다는 감정

“가아아아아!”

쾅! 쾅!

아까처럼 기술도 뭣도 없는 마구잡이 같은 공격이었지만 그 기세는 사뭇 달랐다. 역시 전신을 넘어 돌도끼까지 옮겨 붙어 있는 화염 때문이다.

러셀은 칼로 돌도끼를 흘리거나 빗겨내는 식으로 정면에서 맞부딪치는 것을 삼갔다. 정면으로 받는다면 아무리 강철검이라도 휘거나 부러질 것이었다. 그 정도로 화염을 두른 트롤에게는 박력이 있었다.

그 화려한 모양새도 그렇지만 떨어져도 훅 끼쳐오는 열기가 대단했다. 러셀은 트롤의 얼굴을 살폈다. 눈에서 흘리는 붉은 빛이 유성꼬리처럼 잔영을 남기고 혈관이 울뚝불뚝 일어나 있다.

근육도 훨씬 커져서 괴력을 내고 있지만 썩 효율적이진 못했다. 너무 과해져서 오히려 운신의 폭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러셀의 귀에 들리는 작은 소리. 뿌득, 뿌득 하는 마치 나뭇가지들을 부러뜨리거나 얇은 끈 같은 것을 잡아당겨 끊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트롤의 몸에서 나는 소리였고, 러셀의 눈은 과하게 마력을 흡수중인 트롤의 몸이 과부하를 일으키고 있음을 알아챘다.

하지만 동시에 마력으로 증폭된 트롤의 재생력이 무너지는 것보다 빠르게 몸을 수복하고 있었기에 괴물의 몸뚱아리는 이전보다 1.5배는 커져 있었고, 그 성장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과부하가 일어나고 있다곤 하나 그것이 당장 트롤의 죽음을 부를 것 같지도 않았고, 폭탄처럼 펑 터질 것 같지도 않았다. 이대로 가면 정말 대단한 괴물 하나가 탄생할 건 자명해보였다.

“죽는-다! 인간!”

바우웅!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러셀에게 화가 난 트롤이 돌도끼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에 가깝게 휘둘렀다. 러셀은 아까처럼 신기한 기술을 선보였는데, 누가 그를 줄로 묶어 뒤로 잡아당긴 것처럼 등이 땅바닥에 닿을 정도로 누워버린 것이다.

“죽긴 누가 죽어.”

그러면서도 발은 대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유연한 발목과 무릎, 허리가 러셀의 상체를 번쩍 일으켜 세웠고 손에 들린 검이 아래에서 위로 번뜩였다.

트롤의 오른 손목이 반쯤 잘려 나갔고 돌도끼가 쿵, 바닥에 떨어졌다. 그대로 이어나간 칼은 트롤의 가슴에 깊숙이 꽂혀 들어갔다. 손잡이만 삐죽 나올 정도로 검신이 깊숙이 박혀 들어간 것이다. 그러면서 러셀은 찌른 것보다 빠르게 칼을 뽑았다.

다시 한 번, 그의 단련된 육체가 감각을 곤두세웠다. 숨을 들이마셔 안에 가두고 근육을 긴장시켰다.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화염, 돌도끼를 휘두르느라 크게 벌려진 트롤의 상체, 강한 힘에 밀려나는 흙, 땀방울, 뜨거운 공기, 시선들. 하늘의 구름은 지상의 일은 신경도 쓰지 않고 유유히 움직였고, 그에 맞춰 가려진 햇살도 밝아지거나 흐려졌다.

러셀의 칼이 잔상을 그렸다. 뒤에서 화살을 활에 먹이거나, 칼을 뽑거나, 기도하거나 마법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그 속도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본 건 흐릿한 잔영과 트롤의 가슴, 어깨, 복부에 수없이 그어진 검상들, 그곳에서 푸확 튀어 오르는 트롤의 핏물이었다.

한 눈에 봐도 손가락 하나는 깊숙이 들어갈 만큼 깊게 베인 자상. 트롤은 왼손으로 너덜거리는 오른 손목을 감싸 쥐고 비척거리며 물러났다.

“크워어어···.”

“퉤.”

입에 들어간 핏물을 뱉은 러셀이 자세를 잡았다. 왼발은 내밀어 가볍게 땅을 지르밟고, 오른발은 기둥처럼 단단히 뿌리박아 몸을 지탱했다. 허리를 낮춰 어깨는 사선으로, 양손으로 든 칼은 머리 바로 오른쪽에 수평으로 세워서 그 끝을 트롤에게 겨눴다.

격렬한 움직임이 있은 후에도 그의 눈은 차가웠고 숨결은 침착했다.

어느 새부터인가 러셀의 몸에도 트롤의 것과 비슷하게 아지랑이 같은 것이 일렁였다.

화염보다 덜 이글거리고 막대한 열기를 뿜어내지도 않았지만 단단하게 굳혀진, 옅은 자청빛의 아지랑이였다. 트롤이 내뿜는 화염 줄기는 그 마력을 뚫지 못하고 겉껍질만 핥고 있었다.

하지만 마력은 러셀의 몸을 화염으로부터 지킬 수는 있어도 그 연장선인 칼까지 지켜주진 못했다. 아직 그의 마력을 다루는 기술이 칼을 완전히 덮을 정도까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러셀이 들고 있는 칼은 화염의 열기와 그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뒤틀리거나 이가 빠진,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러셀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날붙이일 뿐이다. 필요하면 다시 사면 될 뿐.

“라이트닝 볼트!”

그때 뒤편에서 푸른 번개가 날아들어 트롤을 직격했다. 막 검상을 회복하던 트롤이 왼손을 들어 전격의 줄기를 막으려 했으나, 전격이란 건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카가가가각!”

고함 보단 비명 같은 괴성. 트롤의 몸이 뒤로 밀려가며 고랑을 만들어냈다. 고기 타는 냄새가 났다.

러셀이 뒤를 돌아보자 이블린이 두 어 걸음 앞으로 나서서 손을 뻗고 있었다. 그 손에서는 여전히 번개의 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러셀의 눈이 빛났다. 진짜 뇌전을 쓸 수 있었군.

시간이 좀 더 있고, 안정된 상황이었다면 저 뇌전의 구현원리도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상념이 스쳐지나갔다. 그때 이블린이 외쳤다.

“오래 못 가! 바로 달려들어!”

러셀은 바로 앞을 보고 다리에 힘을 줬다. 땅바닥이 움푹 패이고 그 반동만큼 러셀의 몸이 튀어나갔다.

때 맞춰 전격의 줄기가 끝나고 감전에 부들거리는 트롤의 목을 향해 칼이 날아들었다. 트롤의 피부 위에서 타오르는 화염을 가른 칼날이 목의 피부를 자르며 그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칼날이 트롤의 목의 3분지 1을 파고들었을 때 트롤의 눈과 러셀이 눈이 부딪쳤다. 트롤의 노란 눈이 마력에 빛나고 있는 것처럼, 러셀의 눈도 자청빛 불꽃을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과 다른 감각들이 위험을 감지했다.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어느새 재생된 트롤의 목 근육이 칼날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러셀은 그걸 힘으로 잡아 당겼고 칼은 버티지 못했다.

팅, 하고 칼이 부러졌다. 반으로 뚝 부러진 칼을 쥔 러셀이 튕겨지듯 뒤로 물러났을 때, 트롤의 양 손바닥이 그가 있던 자리를 손뼉 쳤다. 그새 오른손목을 재생시킨 것이다. 충격파와 함께 화염이 이글거리며 대지에 난 잡초와 나무를 불태웠다.

물러났던 러셀이 반 토막 난 검을 집어던졌다. 부러진 칼날은 정확하게 트롤의 왼쪽 눈으로 빨려 들어갔고, 트롤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설산의 가시!”

그리고 때 맞춰 뒤에서 이블린이 날린 얼음으로 만들어진 송곳들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화염을 주춤거리게만 했을 뿐 물리적인 타격을 줄 순 없었다.

그럼에도 이블린은 계속 주문을 외며 마법을 날렸다. 타격은 줄 수 없어도 화염은 약화시키겠다는 의도였다.

그 의도를 읽은 러셀이 달려들었다. 그의 강맹한 주먹이 약해진 불꽃을 뚫고 트롤의 턱을 올려쳤다. 박살난 괴물의 이빨과 피, 부러진 러셀의 칼이 위로 높이 흩날렸다.

공세는 멈추지 않았다. 뒤로 돌며 뻗은 왼다리가 정확히 트롤의 배에 직격으로 꽂혔다. 고개가 위로 젖혀지면서 열렸던 품이 앞으로 확 숙여지고 그 숙여진 몸통에 러셀의 오른발이 날아들었다. 뻑, 하는 소리와 함께 트롤의 허리가 옆으로 젖혀진 채 땅 위로 나뒹굴었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트롤의 위에 러셀이 훌쩍 뛰어올라 양발로 내려찍었다. 트롤을 받친 땅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거미줄 모양으로 쩍 갈라졌다.

“크헉!”

트롤은 아까처럼 괴성도 지르지 못하고 피와 살점 조각을 토했다. 하지만 노란 안광은 여전히 살기에 가득 차 있었다.

“크아아아아!”

트롤이 양 주먹으로 땅을 내리쳐 그 반동으로 벌떡 일어서자 자연히 그 몸 위에 서 있던 러셀이 잠깐 공중에 머물렀다.

위로 번쩍 들린 트롤의 주먹이 망치처럼 내리꽂혔다. 피하거나 흘려내기가 어려운 자세였고, 그래서 러셀은 양팔을 들어 위를 막았다.

콰앙!

거센 타격음과 함께 이번에는 러셀의 몸이 흙을 갈아엎으며 지면에 처박혔다.

속이 울렁거리더니 식도로 뜨거운 게 치밀어 올랐다. 러셀은 그것을 힘주어 다시 삼켰다. 입안에 비릿한 쇠맛이 감도는 것이, 불안정한 자세에서 막느라 속이 진탕된 듯 싶었다.

그리고 그런 러셀을 향해 트롤이 쿵쿵 걸어왔다. 어느새 러셀이 입혔던 상처들은 씻은 듯 재생된 후였다.

멋들어지게 다시 자라난 이빨을 드러내고 눈에서는 붉은 빛을 흘리던 트롤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이 크게 부풀고 숨결에 맞춰 불꽃이 주둥이 바로 앞에 모여들었다.

넋을 놓고 싸움을 지켜보던 용병들이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어, 어, 저거!”

“공격해! 화살 쏴!”

“마법사 양반, 빨리 뭐 좀 해봐!”

“기다려 봐!”

용병들이 쏜 화살들이 날아들고 이블린이 다급히 주문을 외웠다. 화살들은 트롤의 피부 위로 이글거리는 화염을 뚫지 못하고 떨어졌다. 이블린이 양 손을 들고 입으로 시동어를 외쳤다.

“서리 숨결!”

안개 흐르는 소리와 함께 하얀 냉기가 쏘아졌다. 그리고 트롤도 화염을 뿜어냈다. 서리 숨결은 5초간 화염을 막아내다가 스러졌다. 차가운 서리는 뜨거운 열기에 자욱한 수증기가 되었다가 그마저도 증발했다.

“쿨럭!”

주문이 그보다 강한 마력에 깨어진 것에 속이 진탕된 이블린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때 구석에서 한 쪽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엘레노아가 손을 뻗어 러셀을 가리켰다.

그러자 황금빛의 성력으로 이루어진 방어막이 러셀을 감쌌다. 직격으로 오는 화염을 막는 엘레노아가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구슬 같은 땀을 흘렸다.

용병들은 용감히 고함을 지르며 트롤에게 달려들 수 없었다.

저런 대형 거인 종류의 괴물들은 한낱 용병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군대나 초인들이라는 기사, 마법사들이 있어야 대응 가능한 괴물이었다.

곧 방어막도 화염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 사라졌다. 불길이 덮쳤다.

용병들은 화염이 덮치는 러셀을 차마 보지 못하고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렸다.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아저씨이!”

그 사이 러셀은 힘겹게 상체를 들어 짓쳐오는 화염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리 숨결과 방어막으로 벌어준 짧디짧은 시간이었다.

순간 그는 바로 앞에 있는 불꽃보다 사흘 전부터 밤마다 다뤘던 작은 불꽃을 생각했다. 그 움직임을, 불꽃의 본질을 생각했다. 1초, 1초를 1분처럼 느끼면서.

그와 함께 이 탁 트인 공간에서 자신의 전방을 살라먹으며 침범해오는 뜨거운 화염을 선명하게 느꼈다. 그건 눈으로 그 눈부심을 보는 것과도, 코로 그 매캐한 냄새를 맡는 것과도, 피부로 그 열기에 달궈지는 것과도 달랐다.

머릿속에서 철컥, 철컥하고 톱니바퀴 같은 것이 맞물리는 소리가 난다.

러셀의 기감(氣感), 혹은 마력감각(魔力感覺)이라 불리는 여섯 번째 감각이 타오르듯 번뜩였다. 그 감각은 세상을 구성하는 힘이자 동시에 존재를 이루는 마력을 느끼는 것이었다.

자신의 육체를 강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밤마다 손끝에서 노녔던 불꽃을 다루는 법의 다른 사용이 러셀의 뇌리에서 새로운 불꽃으로 타올랐다.

필요한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 공포를 물리치고 싶다는 열망, 그리고 재능이었다. 그리고 재능은 러셀이 넘치도록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짧은 상념 끝에 그의 오른손이 화염을 향해 뻗어졌다. 손가락 끝이 부드럽게 허공을 유영하며 불꽃 사이의 공간 한 지점을 짚었다.

그러자 이변이 일어났다.

푸화악-

금방에라도 러셀을 숯덩이로 만들 법한 불이 러셀이 손을 짚은 공간을 기점으로 갈라지다가 흩어지는 것이었다.

마치 덮쳐오는 파도가 손짓 한 번에 갈라졌다가 가라앉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건 러셀이 마력을 일으켜 방어막을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조립되어 있는 것을 푸는, 숙련된 기계공의 손길과 비슷했다.

트롤의 마력을 기원으로 삼고 두려움과 갈망을 먹어치우며 구현된 불꽃은 러셀의 손짓에 낱낱이 해체되어 스러졌다.

엘레노아는 파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다리가 풀린 채 러셀을 보던 이블린은 작게 중얼거렸다.

“···마력 간섭?”

러셀의 마력이 바닥나기 직전, 그의 시야를 한가득 채우고 있던 화염의 줄기가 끝났다.

화염 세례가 끝난 저편에서 트롤은 불타버리지 않고 멀쩡한 러셀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문쟁이?”

“아니, 네 아빠다.”

러셀의 말에 트롤과 사람들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유머를 모르는구만.

러셀은 천천히 일어났다. 트롤의 주먹을 받아냈던 왼팔이 조금 후들거렸다. 금이 갔든가 부러졌을 것이다. 속도 메슥거렸다.

하지만 오른팔은 멀쩡했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트롤의 화염 때문인지 싸움의 열기 때문인지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맥박 치는 심장은 온몸으로 피를 돌렸다. 피부 안과 바깥 모두 뜨거웠다.

고통과 열기 속에서 러셀은 되려 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좋았으니까.

지난 나흘 간, 밤마다 가지고 놀았던 장난의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한 것도 그렇고, 방심 한 번에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의 순간에서 선 것도 그랬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흥분과 긴장이 러셀을 한없이 고양시켰다.

그리고 그 고양에 맞춰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올라선 그의 정신과 육체가 주위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아까 트롤이 각성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연출됐다.

“다시 와봐.”

“크워어어어!”

분노한 트롤이 콧김을 뿜으며 달려왔다. 러셀은 피하지 않았다. 4미터에 다다른 거인이 쿵쿵 발소리를 내며 뛰어오는 건 체감상 산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러셀은 그 위용 앞에서 멍하니 서 있지 않았다.

트롤이 화염에 횝싸인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러셀은 날아오는 주먹을 향해 자신의 주먹을 날렸다. 화염의 열기는 러셀의 몸을 침범하지 못했고, 그를 넘어 아까처럼 흩어졌다. 왼발이 땅에 깊숙이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둘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괴력과 거력이 충돌하며 꾸웅- 하고 공간을 울리는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그들이 딛고 서 있던 바닥이 덜덜 떨며 흙먼지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졌다. 트롤의 몸을 감싸던 화염이 팍- 하고 걷어졌다.

러셀과 정면으로 주먹을 부딪친 트롤의 오른팔에서 손목, 팔꿈치, 어깨에서 뿌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근육이 터지고 갈라진 피부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트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탈구 된 것이었다. 가진 마력을 거의 쓴 모양인지 강화된 재생력도 팔을 수복하지 못했다. 움찔움찔 떨리기만 하고 제자리로 돌아가지도 못했다.

“크우우우우.”

트롤은 왼팔로 어깨를 쥐고 물러섰다. 러셀을 보는 눈동자에 처음으로 분노 말고 다른 감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고통, 외경, 두려움.

“왜···, 왜 안 죽지?”

러셀도 오른손이 퉁퉁 부어올랐지만 트롤처럼 어깨가 빠져버리진 않았다. 그는 조금 휘청대는 몸짓으로 고개를 들어 트롤을 쳐다봤다.

“내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지 않았기에 밤하늘의 어둠 자락 같은 머리카락이 러셀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리워진 그 머리칼 사이에서 자청색 눈동자는 더없이 흉흉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보다 강하니까. 새꺄.”

사위는 완전히 어두웠고, 트롤의 불꽃도 그 기세가 아까 같지 않았다. 그렇기에 러셀의 빛나는 자안은 어둠 속에서 도깨비불처럼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러셀은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을 그러모아 주먹을 쥐었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에 머릿속이 짜릿했지만, 그 눈동자에는 여전히 투지가 넘실거리며 이글거리고 있었다.

상반된 감정을 담은 눈이 다시 마주쳤다. 러셀이 한 발자국 내딛자 트롤은 다시 뒷걸음질 쳤다. 그 괴물이 겁에 질린 듯한 모습에 사람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탓!

러셀은 땅을 박차 왼쪽으로 파고들었고, 트롤의 탈구된 오른 팔은 그를 잡지 못했다.

퍼억!

트롤의 오금을 걷어차 무릎을 꿇게 하고 낮아진 트톨의 목을 러셀의 단단한 팔이 감쌌다.

트롤은 왼주먹으로 러셀을 치고 잡아끌려 애썼다. 뒤로 드러누워 어떻게든 그를 떼어놓으려 했다. 흙먼지가 매캐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마력을 모두 소모하고 그 반동으로 약해진 재생력, 체력으로는 러셀을 떨쳐낼 수 없었다. 무엇보다 싸워도 싸워도 죽지 않는 러셀의 모습이 트롤에게 사슬 같은 두려움으로 옭아매었다.

“카아악! 그아아아!”

목전까지 다가온 죽음에 트롤이 발버둥 쳤으나 러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도 가진 마력을 다 쓴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강력한 육체가 있었다. 10살 때부터 성인을 거꾸러트릴 만큼 강했고, 15살에는 기사와 순수한 육체적 능력으로 동수를 이룬 경이로운 육체.

그가 이를 악물며 오른손은 트롤의 머리통을, 왼손은 턱을 잡았다. 왼다리는 트롤의 왼팔을 구속해 더 이상 날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근육이 크게 부풀고 지렁이 같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키아아아아!”

부어오른 왼팔과 오른손에서 뇌리로 꽂히는 고통이 그의 눈앞을 하얗게 물들였다가 꺼지기를 반복했으나 러셀은 힘을 풀지 않았다.

“으··· 아아아!”

기합소리와 함께, 섬뜩한 소리가 모두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콰드드득!

트롤의 목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크게 돌아갔다.

고요가 찾아왔다. 트롤은 사후경련을 하는 듯 움찔움찔 거리다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러셀의 숨소리만이 작게 들렸다.

그 괴물과 괴물의 싸움 같았던 광경을 본 사람들의 안색들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어 지금의 고요를 깰 엄두를 내지 못했다.

러셀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트롤의 시체를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 그대로 드러누워 하늘을 봤다. 검은 하늘이 보였다. 풀어 헤쳐진 그의 머리카락 색깔과 같았다.

심장은 더없이 쿵쾅거리며 뛰고, 힘을 쓴 근육은 경련이 이는 듯 떨렸다. 왼팔과 오른손이 무척 아팠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충족감이 가슴 속에서 솟아올랐다. 죽고 죽이는 전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양감. 살아있다는 감정.

별안간 작은 실소가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이런 승리감을 맛 본 건 오랜만이었다.

“···큭큭, 아, 시발. 담배 땡기네.”

동쪽의 검푸른 하늘 위로 별들이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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