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5화 (6/225)

5화 불타는 트롤

***

돌아가는 길은 순탄하지 못했다.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듯이 습격들이 이어진 것이다. 때는 이제 막 가을이 시작되는 시기였고, 그래서인지 먹을 것을 구하는 괴물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걸 고려하고 괴물 서식지와 동떨어진 길을 잡은 길잡이와 상인들은 잦은 괴물들의 준동에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원래 이맘때 괴물 놈들이 잦긴 했는데···.”

“이번엔 좀 유난스럽구만?”

“전쟁 때문일까요?”

“괴물 놈들이 그런 걸 알어?”

“아 그럼 몰라? 허구헌 날 마법사들이 산에 불 지르고 다니니 뛰쳐나오는 게지.”

“에잉, 쯧쯧쯧.”

여하튼 사흘이 더 지나가는 동안 그들은 고블린, 놀, 그 밖에 이름 모를 크고 작은 괴물들을 소탕하며 길을 빠져나왔다.

대부분 용병들 선에서 정리되는 것도 있으나, 그럴 수 없는 큼직한 놈들은 러셀이 처리했다. 키가 거의 사람만한 변종 고블린이나 놀등이 그러했다.

놈들은 뭘 잘못 처먹은 것처럼 적개심을 표출하며 발광했고, 러셀은 그놈들 모두 사이좋게 머리를 자르거나 허리를 잘라주었다.

그리고 나흘 째 되던 날, 도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정찰조로 뽑혔던 용병들이 헐레벌떡 돌아와 괴물이 길을 막고 있다고 말했다. 그들이 조심스레 다가가 보니 그 괴물은 트롤이었다.

트롤은 야트막한 언덕길에서 커다란 바위에 몸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커다란 입에서는 침이 흐르고 갈색의 피부는 우둘투둘, 근육은 우락부락했다.

뒤편의 서녘 하늘은 붉게 물든지 오래다. 저 앞 쪽에서는 검푸른 어둠이 달려오고 있었다. 고개를 막 넘어가는 참이었고, 야영을 하기에는 시간이 일렀다.

게다가 이 고개만 넘어가면 바로 목적지인 칼리스덴이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었다. 점차 쌀쌀해지는 저녁 공기에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때에 트롤이 나타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트롤은 길 한가운데서 길목을 막고 있고, 그곳에 일행이 다다른 것이지만.

마차 행렬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용병과 상인들은 대책회의에 돌입했다. 용병 대표와 상인들의 말.

“허허, 참. 이번 상행은 별별 괴물들을 다 만나는구먼.”

“도노반, 안 깨우고 지나갈 수는 없습니까?”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도슨. 길 한복판을 떡하니 막고 있는데 어떻게 지나가?”

“음···. 말을 먼저 걸어볼까요?”

“난 안 갈 테니 도슨 자네가 하게. 명복은 빌어주겠네. 대화가 통하긴 할지 모르겠군.”

“그래도 말은 할 줄 알잖아요?”

상인 중 가장 연장자인 도미닉이 혀를 차며 말했다.

“말만 할 줄 안다고 대화가 되던가? 정신 차리게, 도슨. 저놈도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야.”

“네···.”

“내가 자란 마을에서 트롤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 그랬어. 어릴 적부터 가을만 되면 가족 단위로 산에서 내려와 소나 돼지를 잡아갔지. 그놈들 잡겠다고 장정 여럿이 죽거나 다쳤고. 결국은 기사가 나서서 잡았지만.”

“음···”

그때 도노반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저놈 저거, 잡을 수 있으면 돈 깨나 될 텐데···.”

상인의 눈초리가 번뜩였다.

“···그건 그렇겠지?”

“다른 내장들은 그렇다 쳐도 심장이랑 피, 뇌는 마법사들한테 수요가 있으니까. 연금술사들도 없어서 못 사고.”

“흐음···.”

돈 냄새를 맡은 상인들이 제각기 머리를 굴리며 계산에 들어갔다.

“불알도 인기가 많어. 정력제로 쓰인다나?”

“해괴하네요.”

“펙센, 자네가 아직 중년 남자의 설움을 모르는구만.”

“그래, 안 사람의 목욕, 부엉이가 우는 싸늘한 밤, 그보다 더 차가운 아침 식사···. 그거 진짜 한 번 겪어보면, 어휴. 생각만 해도 심장 떨리는군.”

“난 내 구슬 두 짝이 떨리는 듯해.”

“제 결혼관에 회의감이 드는 발언은 그만둬주시죠.”

“도슨 자네 결혼할 생각이었나?”

“어이, 그 앞은 지옥이라구.”

용병 대표, 펙센이 표정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트롤 죽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전에 만났던 우룩크를 생각하면 안 돼요. 웬만한 곰도 찢을 수 있는 놈입니다. 재생력도 위협적이고요. 기사나 마법사들이 모여야 겨우 죽이는 괴물인데.”

펙센의 으름장에 상인들은 고민하는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대가 시간대였다. 도미닉이 말했다.

“아 뭐 꼭 잡아야 한다는 건 아니고. 근데 어차피 길도 여기밖에 없어. 다른 길 잡으려면 왔던 길로 돌아서 한참을 가야한다고. 일정도 사흘은 더 걸릴걸.”

“아이고 허리야. 내일은 푹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엄살 부리지 마요, 도미닉.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그를 불러야 하지 않겠는가.”

“어, 저희 돈은 있나요? 안 그래도 러셀님한테 드려야 할 추가 수당이 많은데요.”

“우린 없지만 상회에는 있겠지.”

“에휴. 결국 또 대출이구만···.”

“아 그럼 빚 안지고 장사하는 상인 봤습니까? 그리고 저 트롤 잡아 넘기면 대출 안 받아도 돼요!”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잖어?”

“아 물어보면 되죠.”

“그럼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상인들은 태연스런 대화를 나누고는 시선을 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부상자인 주인을 대신해서 말에 탄 소녀와 고삐를 잡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두 말할 것 없이 러셀과 다프네였다. 그의 양 옆에는 어째서인지 금발의 사제, 엘레노아와 적발을 휘날리는 이블린이 서 있었다.

러셀의 강함은 확연히 증명된 바였다. 어느 용병이 혼자서 우룩크 아홉을 죽일 수 있겠는가? 아무리 마력을 다줄 줄 안다고 해도 말이다.

거기다 다음 날 고블린들의 매복을 먼저 알아차린 것도 그였고, 그에게 구함받은 용병들의 수도 부지기수였다. 지금 이 상행의 사람들 중 최소 한 번이라도 그에게 목숨 빚을 지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상인들의 눈초리가 고와진 건 당연했다.

러셀은 그들의 반짝이는 시선에 깔끔히 면도된 볼을 긁적였다. 쑥스러운 걸.

“아저씨 쳐다보는데요?”

“···나 아저씨 아니라니까. 수염 깎은 거 안 보이냐?”

“베에.”

“축복 걸어드릴까요?”

“됐어.”

“알겠지만, 트롤은 재생력이 강해. 자상 같은 건 그냥 아물어버릴 정도로.”

“아직 싸운다 뭐한다 얘기도 없는데.”

“저 반짝이는 눈들 좀 봐. 척하면 척이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화염구 쏴 줄 테니까. 트롤은 불을 무서워하거든.”

“그래, 여차하면 신호하지.”

러셀은 고삐를 이블린에게 쥐어주고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입니까?”

이미 저 앞에 있는 트롤도 봤고, 상인들의 대화도 들었지만 그래도 선행돼야 할 질문이었다.

“지금 저 앞에 트롤이 있어서 말입니다.”

“나도 봤습니다. 싸워야 합니까?”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럴 확률이 큽니다. 아니면 길 한복판에서 저러고 있진 않겠지요.”

“음.”

“이왕이면 그냥 지나가는 게 가장 좋겠지만···.”

“세상이란 게 그리 만만하진 않겠지요.”

수염만 자르면 앳되어 보이는 러셀이 그런 말을 하자 각기 청년, 중년,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상인 셋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중 중년의 상인, 도노반이 표정을 지우고 말했다.

“혹시 저 트롤을 잡을 수 있겠나? 이왕이면 산 채로. 값은 넉넉히 치르겠네.”

“뭐 쓸 만한 부분이 있나보군요?”

“아시다시피 심장이나 피는 좋은 마법 재료가 된다고 하더구만. 죽여서 적출해도 되지만, 이왕이면 살아있는 상태에서 뽑은 것이 가장 싱싱하지. 마법사 공방 같은 데 갖다 주면 좋아라할게요. 틀어박혀서 연구만 해대는지 시세도 모르고 금화를 던져주기도 해서···.”

“다른 길은?”

“길은 여기 하나 뿐이여. 돌아가려면 다시 뒤돌아서 멀리 가야 할 거여.”

묻는 사람은 하난데 답하는 사람은 여럿이니 약간 정신 사나웠다. 그것도 들어서 다 아는 내용을. 대충 알아들은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잡아주죠.”

어차피 맞닥뜨려야 할 놈이라지 않나. 이제껏 온 거리를 다시 되돌아가는 건 피곤한 일이다.

그리고 트롤은 처음 보는 괴물이기도 했다. 북부에는 트롤이 드물다. 괜히 어린 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상인들의 환호를 들으면서 러셀은 트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졸던 트롤이 번쩍 눈을 뜨더니 코를 킁킁 거렸다. 그러고는 바로 가까워지는 러셀을 발견했다.

우어어어엉.

고함인지 하품인지 모를 괴성을 낸 트롤이 입을 쩍쩍 다시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른손에는 돌도끼를 들고 있었다.

키는 3미터가 넘었고 다리와 팔은 통나무 같았다. 머리카락은 없는 대머리였다. 얼굴에 비하면 작은 눈과 눌린 코, 커다란 입에서 솟아난 어금니가 흉악하게 번들거렸다.

커다란 근육들이 울퉁불퉁 박혔지만 전체적으로 뚱뚱했고, 특히 배는 민둥산처럼 툭 튀어나와 있었다. 허리춤에 두른 알 수 없는 동물의 가죽 띠가 사타구니를 가리고 있어 눈살 찌푸릴 일은 없었다.

점차 검어지는 푸른 어둠을 배경으로 선 트롤과 석양을 배경으로 선 러셀. 트롤은 러셀 뒤의 노을빛이 눈이 부신 지 왼손으로 차양막을 만들었다.

트롤이 말했다.

“안녕.”

지금 저놈이 인사를 한 건가?

가장 앞에 선 러셀과 뒤의 사람들 표정이 괴상해졌다. 괴물이 말을 한다는 것도 놀랍지만 인사를 한다니. 슬쩍 뒤를 돌아봤지만 그네들의 표정을 보아 이게 흔한 일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안녕 못하다. 넌 뭐냐? 왜 여기서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거지?”

러셀이 묻자 트롤은 미간을 찌푸리며 으르렁거렸다. 그 살 떨리는 울음에 용병들이 부산해졌지만 러셀은 무기를 잡지 않고 트롤을 마주봤다. 다시 트롤이 말했다.

“많은 질문. 하나씩.”

“아, 그래. 넌 뭐냐?”

“나. 나주렉.”

“그래, 나주렉. 왜 여기 있지?”

“카루곤이··· 아니다.”

“카루곤?”

“아니다.”

뭐가 아니라는 거야? 트롤은 말을 이었다.

“배고프다. 산 색깔 바뀐다. 인간 많다. 절반 남아라.”

흠.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지만 대충은 알아들었다.

“겨울 되니까 식량이 필요하다는 거군. 그 카루곤이란 놈이 여기 오면 인간 많이 지나간다고 알려주디?”

“······.”

트롤은 침묵했지만 말을 못 알아들은 것 같진 않았다.

“밖으로 나오길 잘했어.”

중얼거린 러셀을 의문어린 눈으로 보던 트롤이 다시 뭔가를 말하려는 찰나. 제자리에서 훅 하고 러셀이 사라졌다. 트롤의 눈이 크게 뜨인 순간, 사라진 러셀의 몸이 여지껏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있는 트롤의 머리 위에서 나타났다.

트롤은 조금 늦게 러셀을 알아차렸고, 그때는 그의 주먹이 휘둘러진 뒤였다.

뻐어억!

주먹이 트롤의 머리를 내려쳤다. 목이 부러질 듯 아래로 꺾이고 등과 무릎이 굽혀지며 양 손이 땅을 짚었다. 그러나 트롤은 죽지도, 정신을 잃지도 않았다. 여태 러셀의 주먹에 우룩크든 고블린이든 괴물 놈들의 머리통이 한 방에 부서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무섭도록 단단한 머리통이었다.

“뭐냐! 왜 때리냐!”

“그럼 새꺄, 여기다 사람 놓고 가겠냐.”

“쿠아악!”

비명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괴물이 등을 곧추세우고 내려선 러셀에게 달려들었다. 머리에 선명했던 러셀의 주먹 자국은 차츰 지워지고 다시 살이 오르고 있었다. 그 눈에 띄게 빠른 속도에 러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 재생력이군.

“싸, 싸운다!”

“우린 어, 어떡하지?”

“전열을 유지해! 여차하면 지원한다!”

“우, 우리가 무슨 지원을 해!”

뒤편의 용병들이 허둥거리며 마차를 벽으로 방진을 형성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저 괴물들의 싸움에 도움이 될 수 없으리란 것도 알았다.

쾅! 쾅! 쾅! 쾅!

트롤의 돌도끼가 커다란 손아귀에 잡혀 땅을 내려찍는다. 그 사이를 러셀이 미꾸라지처럼 피하며 중간 중간 주먹을 날렸다. 그럴 때마다 트롤의 몸이 들썩였지만 트롤은 재생력을 앞세운 채 공세를 이어갔다.

트롤의 괴력에 땅이 움푹 패이고 돌도끼가 궤적을 그리며 러셀을 노렸다. 평범한 인간 병사였다면 단박에 핏자국이 되었겠지만, 그 공격들은 러셀에게 닿지 않았다. 그의 기묘한 발걸음은 그 큰 덩치를 표홀하게 이끌며 돌도끼와 주먹을 피하고 공세의 틈마다 주먹을 먹였다.

노을이 지며 눈부신 주황색 빛을 뿜어대고 있었기에 둘 모두 자기의 색깔을 잃은 채 싸우고 있었다. 용병들은 상황도 잊고 침음성을 흘렸다.

“와, 저런, 말도 안 되는···.”

“마투술사들이 초인들이란 건 알았지만, 이건···.”

“기사 출신인가?”

“도와야 하는 것 아닌가?”

“가만히 있어. 괜히 끼어들었다간 오히려 방해야.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이거 마력 없는 놈들은 서러워서 살겠나···.”

용병들이 감탄하거나 말거나 싸움은 계속 흘러갔다.

트롤은 가진 괴력과 재생력을 밀어붙이며 여타의 자잘한 상처들은 무시한 채 싸우는, 마치 광전사 같은 모습으로 싸웠다.

반면 러셀은 트롤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그의 키는 2미터에 가까웠기에)로 큼직한 공격들을 회피하거나 흘려내며 큰 동작 이후에 드러나는 빈틈을 공략했다.

뻐억! 뻐어억!

트롤의 공격은 하나도 맞지 않는데 러셀의 주먹은 뻗는 족족 무릎, 오금, 복부, 가슴, 머리를 두드려대니 트롤은 분노가 머리 끝 까지 오른 모양이었다. 트롤이 어금니를 드러내며 외쳤다.

“인-간! 제대로 싸-워-라!”

새끼가. 지는 한 대도 못 때리는데 처 맞고만 있으니 억울하냐?

“입 냄새 난다.”

아랑곳 않고 트롤의 턱주가리에 주먹을 날려 물러서게 한 러셀이 외쳤다.

“이블린!”

신호를 알아들은 이블린이 준비하고 있던 마력을 풀어 헤치고 다시 꼬았다. 입에서는 주문이 흘러나오고 손은 수인을 맺느라 바빠졌다. 화르륵! 곧 머리 위에서 큼직한 불꽃의 구가 만들어졌다.

“하앗!”

기합성과 함께 화염구가 무시 못 할 속도로 쏘아졌다. 화염구는 곧바로 러셀을 넘어 트롤에게 직격했다. 커다란 소리가 울리고 러셀은 손으로 화염과 열기를 막았다. 손가락 틈 사이로 솟아오르는 불기둥이 보였다.

“···음?”

폭발음과 화염이 걷힌 자리에는 검게 그을렸지만, 예상한 것보다는 멀쩡한 모습의 트롤이 다리를 굽힌 채 서 있었다. 화상도 입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으르렁 거리는 트롤의 눈에서 일순 붉은 빛이 스쳤다.

“···트롤이 저렇게 강한 괴물이었나?”

불도 안 피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이블린.

그 사이 러셀이 다시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트롤은 화염구의 충격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 한 채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다.

그저 육신의 힘으로만 때렸다면 모를까 러셀의 주먹에는 마력이 담겨 있었다. 맞을 때마다 질긴 피부를 넘어 근육과 뼈까지 울리는 통증에 트롤이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

곧 눈을 번뜩인 트롤이 사납게 팔을 휘둘렀다.

러셀의 기준으로 왼쪽 위에서 돌도끼가 날아왔다. 석양빛을 받으며 갈색으로 빛나는 돌도끼. 그는 거의 땅에 엎드린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돌도끼의 궤적을 피해냈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오른발을 한 발자국 강하게 내딛었다.

꾸웅, 하고 대지가 울었다. 러셀은 들이마신 숨과 체내의 마력, 근육, 대지를 강하게 밟은 발에서 올라오는 반발력에 집중했다. 호흡의 짧은 들숨과 날숨에 의해 전신의 근육이 이완되거나 팽창했고, 그 모든 과정은 아주 빠른 찰나로 이뤄졌다.

반발력은 오른 무릎, 허리, 왼쪽 어깨, 팔꿈치를 하나하나 통과할수록 증폭되고 나선으로 꼬아졌다. 관절의 튕김과 근육의 비틂, 거기에 체내의 마력을 순환시키면서 담은 힘을 담았다. 그의 왼 주먹이 텅 빈 트롤의 오른쪽 옆구리에 직격했다.

쿠앙!

트롤의 뒷 허리 부근이 시뻘겋게 부풀더니 뻥 터지며 뼛조각과 살점, 핏물을 비산했다. 러셀의 주먹보다 큰 반경의 구멍이 트롤의 옆구리를 집어삼킨 모습으로 훤히 뚫렸다. 게다가 그 구멍 주위의 피부는 국소적인 회오리가 휘몰아친 것처럼 구멍을 중심으로 오그라들어 있었다.

러셀의 육체는 그가 상상으로만 그쳤던 모든 육체 기술을 현실로 구현할 수 있을 정도로 재능 넘치는 몸이었다.

“그어어어···.”

허약했던 전생의 몸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자신보다 커다랗고 힘도 센 괴물을 몰아붙이고 무릎 꿇리는 것.

자신을 죽이겠다는 살의에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그 살의에 정면으로 맞부딪쳐 깨부술 수 있다는 것.

헤아릴 수 없는 황홀감.

“후.”

아무래도 성격이 많이 이상해진 것 같은데.

정신은 육체를 따라간다더니. 드잡이질 한 번 못하던 그도 여기에선 많이 변한 게 실감이 났다.

러셀은 숨을 한 번 내쉬는 것으로 달아올랐던 근육을 식혔다.

그의 앞에는 한 쪽 무릎을 꿇은 트롤이 옆구리를 부여잡으며 끙끙 거리고 있었다. 갈비뼈가 서너 대 날아갔고 자리에 있던 내장들도 흔적만 남은 채였다.

아무리 재생력이 강하다 하나 저런 큰 상처를 한 번에 수복하는 건 어려울 터였다. 과연 트롤은 죽을 상처는 아닌 듯 하지만, 그래도 단박에 재생하기도 어려운 것인지 몸을 부들거리고만 있었다.

재생력이라 함은 원래의 상태로 복원하려는 힘을 말한다. 아무는 것과는 달랐다.

인간도 피부에 상처가 나면 약이나 본인의 치유력으로 낫긴 하지만 흉터가 남는다. 또 손가락이나 사지가 잘리면 다시 자라는 게 아니라 상처 주위로 살이 오므라드는 것으로 끝이다.

허나 재생력은 잘려나간 사지도 다시 나게 할 수 있다. 그 힘에는 마력이 작용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마법의 범주에 들 수 있다. 그것이 트롤이 가진 본성이고 본능이기에 그렇다.

러셀은 허리춤의 칼을 뽑아들었다. 그의 체격에 맞게 보통보다 더 넓적한 검신을 가진 롱소드였다. 칼날에 하루의 마지막 햇빛이 반사되어 번쩍였다. 암청색 하늘 아래서 칼을 빼어들고 다가가는 러셀은 고대의 기사 같았다.

그리고 곧바로 노을은 완전히 저물었다. 밤이 다가왔다.

하지만 아직 남은 붉은 기운이 서쪽을 밝히고 있었고, 그래서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동쪽 하늘에는 태양빛에 밀렸던 별들이 하나 둘씩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허나 아무도 그 반짝임을 보아주지 않기에 그들도 빛을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언제나처럼 제자리에 서서 묵묵히 아래의 대소사를 지켜볼 뿐이었다. 서서히 차오르는 달님이 흥미로운 얼굴로 어둠 자락 아래의 세상사를 바라보았다.

“됐어! 러셀님! 사지만 잘라주시면 됩니다!”

“자른 다음에는 꼭 부위에서 멀리 떼어놓고! 안 그러면 붙어버린다네!”

누가 더 괴물인지. 상인의 잔인한 말을 들은 러셀이 피식 웃고는 다가갔다.

그때, 트롤이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노려봤다. 그 노란색 눈동자에 붉은 빛이 어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순간.

푸화악- 화염이 러셀의 바로 앞에서 터져 나왔다. 급작스러운, 그야말로 예상할 수 없었던 공격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러셀이 할 수 있었던 행동은 발끝으로 강하게 바닥을 밀어차고, 몸을 웅크려 피격 범위를 최소화하는 것 뿐이었다.

콰앙! 양팔을 교차한 러셀이 폭발력 때문에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졌다. 거의 끝난 싸움에 긴장이 플려 느슨해져 있던 사람들이 입을 딱 벌렸다.

“아저씨-!”

“러셀님!”

“이런 빌어먹을, 웬 불이야?”

“어, 어? 저 괴물 놈이···?”

소녀와 상인, 용병들의 외침 속에서 이블린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트롤이 불꽃을?”

트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에서 붉은 광망이 흘렀다. 주위로는 마나가 괴물을 중심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눈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 휘말린 잡초나 나뭇가지들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었다. 마력을 흡수한 트롤의 근육이 울긋불긋 하더니 전보다 더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큰 구멍이 뚫려 있던 옆구리는 치이익- 소리를 내며 빠른 속도로 아물어갔다. 부러져나갔던 갈비뼈가 뾰족하게 자라나고 결손 됐던 내장들이 뭉클거리며 살점들을 부풀렸다. 그 속도가 마치 시간을 빠르게 되돌리는 것 같았다.

종국에는 뚫렸던 자국 하나 없이 완벽하게 수복해냈다. 재생된 부위 바깥쪽으로 난 오그라든 흔적만이 구멍이 있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크르르르··· 다··· 죽인다-!”

원래의 목적을 잊어버린 것인지 트롤이 침을 흘리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처음부터 불꽃을 생성할 정도의 마력을 갖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죽음의 위기 앞에서 각성한 것인지는 이블린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트롤이 불꽃을···. 가장 두려워했던 힘을 갈망한 건가?”

불은 숲에 사는 짐승과 괴물이 아니더라도 무서운 힘이다. 모든 걸 불태우고 파괴하는 힘은 인간이 세운 문명의 기초에서 빛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마법사들도 화염 주문을 즐겨 사용하고, 사람들이 마법 하면 떠올리는 것도 대개 불꽃이다. 그만큼 생명체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다만 지금 저 트롤이 마력에 취해 이성을 잃은 것은 확실했다. 애초에 괴물에게 이성 운운하는 것이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트롤의 전신에 화염이 아지랑이처럼 타으르기 시작했다.

피부 거죽은 태우지 않고 바깥쪽으로만 발산되는 것이 뜨거운 열기를 담은 채 사람들에게 훅 끼쳐왔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흙이 검게 타며 부스러졌다. 어둠이 밀려났다.

땅에 떨어져 있던 돌도끼를 부여잡자 화염은 그 돌도끼까지 퍼져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트롤이 아니라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 같은 모습에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키거나 뒷걸음질 쳤다.

“어이구 시발··· 판타지라는 게 실감나는구만···.”

그때, 쓰러져 있던 러셀이 몸을 털며 일어섰다. 커다란 키가 솟아오르고 크게 벌어진 어깨, 단단한 근육들이 꿈틀거렸다. 묶었던 머리끈이 풀리면서 검은 머리칼이 어깨 아래로 흘렀다.

허연 연기가 몸 곳곳에서 피어오르긴 했으나 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드러난 피부도 약간 붉어졌을 뿐 멀쩡했다.

트롤과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트롤은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렸고,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 안 죽었어요?!”

저 꼬맹이가. 피식 웃은 러셀이 뒤로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화염에 휩싸인 채 서 있는 트롤을 보고 칼을 치켜세웠다.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 보스 같은 놈이 2 페이즈도 있고. 좋아, 해보자고.”

“크우워어어어-!”

어둔 동녘 하늘을 배경으로, 불타는 트롤이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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