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마법의 시작과 끝
전생이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이런 미인과 나란히 앉아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다니. 전생의 그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았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어릴 적 돌아가셨고 아는 일가 친척도 없었다. 배우자를 따로 두지도 않았기에 자식도 당연히 없었다.
그런 러셀이 태연하게 미인과 대화할 수 있는 건 새로 태어나 얻은 육체의 잘난 점과 그가 생각해도 능청스러워진 성격 덕분이었다.
남은 음식을 먹어치우고 삭정이를 계속 던져 넣으며 불을 살렸다. 배는 부르고, 타오르는 불꽃과 연기를 보니 괜히 담배가 생각났다.
전생의 그는 담배를 피지 못했고 친구들은 모두 애연가였다. 자연히 식사 전, 중간, 후의 흡연하는 자리에서 그는 식탁을 지키고 앉아 있어야 했다.
“식후땡?”
“시, 식후땡? 그게 뭐야?”
“담배 있냐고.”
“···내가 있을 것 같아 보여?”
“난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야.”
“쳇.”
이블린은 곧 담뱃갑을 꺼내 안을 들여다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갈등하는 표정을 짓다가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내밀었다. 담뱃갑을 우그러트리는 걸 보니 한 개비만 남아있었던 듯 했다.
“마지막 거 아닌가?”
“···살려준 값이야.”
“돚대는 건드는 거 아니라고 했는데.
“···돚대? 배 위에 세우는 기둥? 그게 왜 나와?”
“그런 게 있어.”
러셀은 킬킬 웃으며 담배를 받았다. 이블린은 아리송한 얼굴을 했다가 담배에 대해 설명했다. 마지막 남은 한 개비를 바라보는 눈빛에 아쉬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냥 담배가 아니라 유프렌 약초를 말아놓은 거야. 몸에 해는 거의 없을 걸.”
“중독성은?”
“···조금 있긴 해. 아껴 피우고 있었던 건데···.”
이블린이 같이 내민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 후 빨아들였다. 과연 청량한 향이 입천장과 콧속을 넘어 폐 깊숙이 느껴졌다. 감기던 눈이 뜨여지고 감각이 명료해지는 느낌.
빈 말이 아니라 털이 올올이 일어나며 사위의 쌀쌀한 공기를 더 잘 느끼는 것 같았다. 체내와 체외의 마나의 흐름이 또렷해지고 오감이 일어섰다. 그놈들이 이걸 알면 얼마를 제시하던 피고 싶어 하겠군.
“괜찮은데.”
“그렇지?”
“불량청소년이 된 기분인걸.”
“······.”
이블린은 러셀의 뜻 모를 말에 대꾸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사실 스무 살쯤 되면 이 세계에서는 이미 자식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다.
심지어 16살에 바로 장가가는 놈들도 있으니. 러셀 그도 아버지로부터 자식을 보지 않겠냐는 말에 넌더리를 낸 적이 많았다. 나도 네 나이쯤에 네 누나를 가졌다면서.
앞에서 눈에 불을 켠 누나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러셀은 일찍부터 자식을 가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결혼이나 자식에 대한 생각은 회의적이다. 전생에서 그런 경험이 없다보니 더욱 뭘 할 생각이 없었다.
심심하면 괴물들이 쳐들어오거나 젊은 남자들을 징병해가는 시대다.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짧다.
“후우우···.”
어쨌든 이블린이 입을 다물거나 말거나 러셀은 담배를 폈다. 내쉬는 숨결에 푸른 반짝임이 섞이는 걸 보니, 과연 마법사의 담배다 싶었다. 지구에도 이런 게 있었으면 한 번은 피고 죽었을 텐데.
“한 입?”
러셀이 묻자 이블린은 처음에는 못 알아들은 표정을 지었다가, 곧 얼굴이 빨개졌다. 오, 여기도 간접키스라는 개념이 있나?
“돼, 됐거든!”
“싫음 말고.”
뻐끔뻐끔. 러셀이 맛나게 피자 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붕붕 흔들었다. 그런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음 지은 러셀이 말했다.
“아까 마법에 관심 있냐고 물었지?”
“어? 어, 어.”
“그럼, 관심 있지. 세상에 마법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가능하다면 나도 쓰고 싶을 정도야. 대단해. 멋있어. 짜릿해.”
“그렇지?”
잘록한 허리에 손을 얹은 이블린이 흥흥 거렸다. 바로 기고만장해지는 걸 보니 또 놀려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삭정이를 집어 모닥불에 넣자 타는 소리를 내며 불티가 튀어올랐다. 허공을 수놓는 반짝임의 향연. 시원한 담배의 향. 전생에서는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없었다. 천식 환자에게 담배 피라는 건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니.
“아까 그 불덩이, 만들어 볼 수 있나?”
“왜? 보고 싶어?”
“한 번은.”
“어려울 거 없지. 원래 이런 건 안 보여주는 법이지만, 잘 보라구.”
입으로는 주문을 외우고 양 손으로는 수인을 맺는 이블린. 러셀은 그 과정을 한 시도 눈에서 떼지 않고 지켜봤다.
하지만 그녀가 웅얼거리는 주문이나, 현란하게 놀리는 수인에서 어떤 법칙을 알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그의 자안이 이블린의 손으로 모이는 어떤 흐름을 포착했다.
육안이 아닌 좀 더 본질적인 것을 보게 하는 감각이 떠지고, 배경이 검게 물들었다. 주위의 상은 아지랑이가 이는 것처럼 점차 흐릿해지고 색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다종다양한 색깔의 마나의 흐름뿐.
이블린의 명치에서 어른거리는 마나의 움직임과 그에 호응하는 바깥의 마나가 보였다.
오감을 넘어선 육감, 마력감각. 태어날 때부터 숨 쉬듯이 느낄 수 있었던 감각이 이블린의 손짓 하나하나를 슬로우 모션처럼 보며 그 흐름을 읽어냈다.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어떤 규칙과 법칙의 배열 하에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곧 양 손바닥 사이로 타오르는 구체가 만들어졌다. 작은 태양을 보는 것 같았다.
“오···.”
담배를 입에 문 채로 감탄사를 냈다. 몇 초간 타오르던 구체는 곧 크기가 줄어들더니 사라져버렸다. 눈을 껌벅거리면서 이블린을 보자 그녀는 땀방울을 훔치더니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까 마력을 다 소모해서···.”
“흠. 한 번만 더 보여줄 수 있나?”
“어? 힘든데···.”
“방금처럼 불덩이를 만들라는 게 아냐. 작은 불꽃이라도 괜찮아.”
“그렇다면야.”
이번에는 긴 주문이나 수인은 필요하지 않았다. 짧지만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끝내자 손바닥 위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촛불 정도 크기의 작은 불이었다. 러셀은 방금처럼 그 불꽃이 생기는 과정을 유심히 살폈다. 뭔가 손끝이 간질간질했다.
“됐어?”
“그래.”
러셀은 고개를 끄덕이고 약간 앞으로 숙였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따라해 볼 수 있을까? 러셀은 연기를 내쉬며 주문과 수인보다는 마나의 배열 자체를 회상했다. 그의 머리는 그 주문의 발음, 억양, 높낮이와 수인을 파악했지만 그걸 그대로 따라한다고 똑같이 불덩이가 튀어나오리란 법은 없었다.
세상의 마법은 다양하고 쓰는 사람마다 다른 방식으로 구현되는 까닭이다. 이블린의 방식은 러셀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시도해볼 가치는 있어보였다. 기왕 판타지 세계에서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는데 마법 하나쯤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벼락같은 걸 내리지는 못 하나?”
“번개 부름은 엄청 어려운 마법이야. 하늘의 날씨도 살펴야 하고,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게 많아.”
“그런가?”
“당연하지. 애초에 뇌전이란 건 다루기 까다로운 속성이라고. 그리고 지금 그런 걸 만들면 엄청 시끄러울걸.”
“할 수는 있고?”
“하, 할 수 있어!”
“그래. 어쨌든 구경 잘했다. 난 이만 자야겠군.”
러셀은 다 핀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슬슬 잠자리에 들어갈 준비를 하자 이블린이 물었다.
“저, 저기! 혹시 어디까지 가?”
“이 행렬의 도착지가 칼리스덴 시 아닌가? 일단 거기까지 가지.”
“그 다음은?”
“몰라. 따로 정하진 않았어. 그냥 막연하게 세계 여행 정도.”
“세계 여행?”
“오래 전부터 꿈이었거든.”
물론 원래 가고 싶었던 세계는 이제 영영 돌아갈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더 좋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신비와 이종족을 실제로 만나고 사귈 수 있을 테니. 미련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건 새로 태어나 시간을 보내면서 털어버렸다. 전생의 그에게 가족이나 자식도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미련은 빠르게 버릴 수 있었다. 지금의 러셀에게는 현생의 가족, 현생의 인연들이 더 소중했다.
이블린은 뭔가를 더 물으려다 러셀이 하품하는 시늉을 하자 멋쩍은 미소를 짓고 물러났다. 다시 혼자가 된 러셀은 차분히 주위를 둘러봤다.
여러 대의 마차와 짐마차를 벽과 기둥 삼아 천막을 펼쳐 간이지붕을 만들고, 그 아래에는 서너 개의 모닥불을 피웠다. 모닥불 하나 당 용병 두 엇이 앉아서 쉬거나 사주를 경계 중이었다.
오늘 해낸 일도 있고 해서 불침번에서 제외되었기에 러셀은 편안히 잠을 잘 수 있었다.
적당한 자리에 모포를 깔고 눕자 밤하늘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손으로 뒤통수를 받친 러셀은 눈으로 그 작은 빛 덩이들을 이리저리 이어봤다.
그가 모르는 별들이 모르는 신화를 따라 선을 잇고 그리며 옛 시대를 노래하고 있었고, 그 무수한 별들의 강 옆에는 밝은 빛을 내며 부풀어 오르는 하나의 커다란 달이 보였다. 지구의 노란 달과 달리 이쪽의 달은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색이었다.
칙칙한 대한민국의 밤 아래에서는 꿈도 꿀 수 없던 풍경이었고, 그 풍경에 러셀은 썩 만족 중이었다.
푸른 달은 지구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컸고, 그래서 그 표면에 새겨진 크레이터 자국들도 선명했다. 그 크레이터 자국들을 어떻게 이어보면 포효하는 늑대 얼굴이 보인다고 하는데, 러셀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달하면 연관 지어지는 동물이 늑대인 것은 이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우우우···.
“뭐, 뭐야?”
그때 숲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숲 안쪽에 버려둔 우룩크의 시체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흠칫 놀란 용병들이 메어두거나 세워두었던 무기들을 움켜잡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러셀은 고개만 모로 돌려 숲 쪽을 쳐다보았다. 그의 뛰어난 시력은 어둠을 꿰뚫고 숲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노란 반딧불 같은 것을 잡아냈다. 늑대의 안광이었다.
다만 늑대들은 불로소득을 얻은 것만으로 만족한 듯 했다. 우룩크 시체를 질질 끌고 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늑대들이 멀어졌다. 커다란 고깃덩이가 아홉 개나 있으니 무리를 먹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늑대들이 물러가는 것을 알고 어색하게 하하 웃는 용병들과 조용히 타오르는 모닥불.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과 구수하게 풍기는 음식 냄새.
그 모든 것을 감각으로 느끼던 러셀은 문득 한 손을 올렸다.
아까 눈으로 보았던 마나의 배열을 기억하며 대기 중에 퍼져있는 마나를 끌어 모았다.
마법(魔法)의 시작과 끝은 같다. 의지의 발현. 아무런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라도, 그 정신력과 의지가 강대하다면 대기의 마나를 통해 마법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대기 중에 미세하게 떠다니는 수분을 응집해서 물 한 컵을 만들려는 일이니까. 그것도 여타 도구도 없이. 아예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한없이 그에 가깝다.
처음 마법은 용으로부터 용족과 엘프, 그 다음 인간으로부터 이어져 왔다. 그리고 그 길고 긴 세월 속에서 인간은 나름대로의 수련법을 세워 마법을 만들었다.
마법의 첫 가르침은 마나의 존재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한다. 인간은 용족이나 엘프 같이 마력을 다루는 마력기관이 없기에 그렇다. 재능 있는 자라면 한 달 안에 느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수 년은 흘러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나를 느까는 일은 내가 행하려는 이적의 기본적인 요소를 아는 일이다. 러셀은 태어나 생각이란 걸 할 수 있을 때부터 주변에 마나가 가득함을 ‘느꼈’다.
그 다음은 그 흐름을 명상과 심상의 단련으로 체내로 이끄는 것이다. 일정한 세기까지 만들어낸 흐름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저 혼자 흐름의 연속성을 이끈다. 그 흐름의 모양은 원(圓). 서클이다. 러셀은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수련공의 운용을 따라 마력을 일으켰다.
그 과정들은 일종의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0과 1처럼 정보 체의 근원을 이루는 요소를 파악하고 그것을 토대로 의지, 상상, 언어의 과정을 거쳐 세상에 존재감을 알린다. 주문과 수인은 그 과정을 돕는 보조 도구에 가깝다.
체내에 만든 원에서 가지를 쳐 식을 이루고, 상상과 의지를 합일시켜 그 염상(念想)을 시동어로서 세계에 명령하면.
“파이어.”
화륵!
마법이 발현되는 것이다.
러셀은 검지 바로 위에서 약간의 간격을 두고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봤다. 그 불꽃을 이루는 마력의 배열과 구조를 이해했기에 러셀의 마력을 장작 삼아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작은 촛불만한 크기의 불꽃. 마치 양초의 심지 같은 모습이나 뜨겁지는 않다. 또 이블린이 허공에 수놓은 불덩이나 불꽃 화살처럼 위협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그 모든 결과물의 앞에는 항상 이 작은 불꽃이 존재했을 것이었다. 산천초목을 뒤엎는 산불이 누가 내버린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듯이.
러셀은 쏟아질 듯 쏟아지지 않는 별을 잡으려 허공을 움켜쥐기보다 작은 불꽃을 피워 올렸다.
검지 위에 타오르는 불꽃은 누가 입 바람을 불면 훅 꺼질 정도로 위태로웠지만.
동시에 아름다웠다.
러셀은 그렇게 생애 처음 발현한 마법을 바라보며 불꽃의 위치를 이리저리 바꿔봤다.
손가락 끝을 오가다가 주먹을 쥐고 엄지에 올려 엄지 척 손짓을 해보기도 하고, 조약돌처럼 튕겨서 손가락 사이사이를 동전을 굴리는 것처럼 굴려보기도 한다.
처음에는 불안정하게 흐트러지던 불꽃은 점차 안정된 모양으로 서커스 같은 묘기를 부렸다. 그렇게 한참 불꽃을 가지고 놀던 러셀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파란 눈동자가 하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