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사제와 마법사
그 말에 정신 차린 용병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상처입고 쓰러진 자를 일으켜 세우고, 부축하고, 떨어진 무기를 주워 갈무리했다.
마차 행렬을 이끌던 상인 중 한 명이 러셀에게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 뒤로 다른 상인들도 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괴물 놈들을 이겨냈습니다.”
“됐습니다. 입은 피해는?”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 전사님이 없으셨다면 다 잃었을 텐데요.”
상인의 말에 같은 상회 소속의 동료 상인 두 명도 고개를 끄덕였다. 러셀을 바라보는 눈에 감탄과 존경이 가득했다.
“역시, 내가 이 분 데려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는감? 도노반, 자네는 좀 미심쩍어 했잖는가. 덩치만 큰 어린애 아니냐고.”
“으랏차차! 아니 도미닉 형님, 무슨 말을 그리 섭하게 하시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
러셀은 피식 웃어넘겼다. 그때 먼저 그에게 다가와 인사했던 젊은 얼굴의 청년 상인이 하늘을 살피더니 말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여기서? 괜찮겠습니까?”
“네, 뭐. 원래 이쯤에서 야영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룩크는 포악한 놈들입니다. 저 놈들이 이 근처에서 설칠 수 있는 것도 보다 강한 괴물이 없어서 가능한 걸 겁니다. 기껏해야 고블린, 놀 정도나 있겠죠.”
그런가. 그가 이 세상에서 새로 환생하고 이제 2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길을 수십 번은 오갔을 상인의 말이기도 했다.
“아, 그리고 전리품이랑 보상은 걱정 마십시오. 모두 책정해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야 이놈들아! 빨리 저것들 안 내다버리면 늑대들이랑 한솥밥 먹을 줄 알아!”
도노반이 고함을 지르자 숨어있던 마차의 짐꾼들이 튀어나와 정리를 시작했다. 죽어 나자빠진 우룩크 시체들을 한데 모아 숲 안쪽에 던져놓고 장작개비를 쌓아 모닥불을 피웠다.
몇몇은 우룩크들이 입고 있던 갑옷과 무기들을 한데 모았다. 모두 러셀의 전리품이었다. 나중에 대장간에 가서 팔던 상회에 팔던 이익이 날 것이다.
용병들은 러셀의 주변을 얼쩡거리면서도 감히 먼저 다가와 말을 걸지는 못했다. 그의 이국적인 생김새와 덩치도 그랬지만 역시 한 방 한 방에 우룩크들을 날려버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화인처럼 깊숙이 박힌 탓이다.
그럼에도 강한 동료라는 건 임무에서 더없이 믿음직한 요소다. 러셀은 그에게 눈짓과 고갯짓으로 감사를 전하는 용병들에게 똑같이 끄덕여줬다.
“아저씨 엄청 세네요?”
어디선가 다프네가 튀어나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러셀을 올려봤다.
“척 보면 모르겠냐?”
“그냥 수염 난 아저씬 줄 알았죠.”
“요게.”
러셀이 주먹 드는 시늉을 하자 아이가 꺄아 하고 장난스레 머리를 감쌌다. 그때 그 모습을 아이가 혼난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부모가 달려와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리!”
“어, 어린 아이니 한 번만 봐주셔서···.”
“됐습니다. 혼낸 것 아니오. 어디 다친 덴 없습니까?”
“예, 예. 괜찮습니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부모는 다프네를 데리고 다른 여행자 무리로 돌아갔다. 마지못해 끌려가는 다프네가 뒤돌아봤다. 러셀은 가만히 손만 흔들어줬다.
칼잡이 용병과 대화하는 건 양민들에게 두렵고 부담스러울 것이다. 그것도 맨 주먹으로 괴물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는 남자라면.
러셀은 입을 쩍 다시다가 몸을 돌려 모닥불 가로 향했다. 슬슬 요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
서너 개의 모닥불 위에 삼발이와 냄비가 올려졌다. 요리 잘하는 용병들이 음식 재료들을 걷어 던져 넣고 끓이자 곧 고소한 냄새가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자기 몫의 스튜와 육포를 그릇에 담은 러셀이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았을 때, 두 사람이 다가왔다. 금발의 사제와 이블린이었다.
러셀에게 다가오던 두 명은 가까이 와서야 서로를 의식한 듯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오던 발걸음을 돌리진 않았다.
육포를 씹어 넘기던 러셀이 대각선 자리에 앉은 둘을 쳐다봤다.
한 명은 마차 안에서 인사를 나눴던 마법사, 이블린이었고 한 명은 전투에서 용병들을 보조하던 사제였다.
이블린보다 약간 작은 키였지만 머리가 작고 비율이 좋아 겉으로 보았을 때는 그렇게 차이 나 보이지 않은 사제는 금빛 테두리에 흰 색의 로브를 입고 있었다.
머리를 감쌀 수 있는 후드는 뒤로 접혀져 있었고, 로브 안쪽으로는 사제복과 가슴을 감싼 흉갑이 보였다. 질겨 보이는 허리띠에는 팔뚝만 한 길이의 소검과 메이스가 메여 있었다. 여러모로 사제보다는 용병과 비슷한 수준의 무장이었다.
“무슨 일이지?”
사제가 이블린을 쳐다보자 그녀는 먼저 하라는 듯 손을 저었다.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고 러셀에게 인사했다.
“엘레노아 루네스입니다. 미력한 몸이지만 광명을 받들어 모십니다.”
가까이서 본 사제는 이블린과는 다른 종류의 미를 가진 여자였다. 살짝 처진 눈꼬리는 왠지 모를 처연함을 풍겼고, 오뚝한 콧대 아래 자리한 분홍빛 입술 아래에는 작은 점이 찍혀 색기를 자아냈다. 처연함과 색기. 두 상반된 매력이 공존하는 미인이었다.
“러셀.”
고개를 든 엘레노아의 눈 색깔은 맑은 하늘빛이었다. 금발에 푸른 눈이라. 정석적이군.
그녀가 말했다.
“오늘 저희 일행을 지켜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아직 하지 않아서 찾아왔습니다.”
“···그래.”
마치 아직 밀린 숙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말투에 러셀이 떨떠름하게 답했다.
“나도 고용된 입장이지. 당연한 일이었다.”
“러셀님이 없었으면 사상자가 많이 나왔을 겁니다. 아니면 아예 이겨내지 못 하고 도망쳤을 수도 있고요.”
“···그랬을 수도.”
러셀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그가 없었다면 몇몇은 살아서 다음 날의 햇빛을 보지 못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싸우다 도망치던가. 신용은 잃겠지만 그게 목숨보다 귀한 것은 아니다.
“당신은?”
“네?”
“당신도 도망쳤을까? 아니면 끝까지 싸웠을까.”
러셀의 물음에 엘레노아가 눈을 마주쳐왔다.
“아마 저도 도망쳤을 것 같습니다.”
“사제가?”
“제게도 목숨은 소중하니까요.”
“듣던 것과는 다르군. 신실한 사제들은 목숨의 위기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다던데.”
“결국 죽지 않았으니 빛의 돌봄이 있었던 게지요. 그리고 저도 제 목숨은 소중하답니다. 제 남은 삶은 신에게 바쳤으니, 죽음만큼은 원하는 곳에서 얻고 싶군요.”
“이번 전투는 그 끝으로 어울리지 않았다는 말이군.”
“어울리다··· 제가 얻는 것이 있었다면 그리 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가.”
이게 무슨 대화인지 모르겠군. 작게 웃은 러셀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레노아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기도하겠습니다. 러셀님께 태양과 빛의 축복이 여정의 끝까지 함께하길 빕니다.”
엘레노아가 기도하자 아까처럼 황금빛이 전신에서 일렁거렸다. 황금 밀밭을 연상케하는 부드러운 빛은 러셀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음. 고맙다.”
러셀은 몸에 차오르는 활력을 느꼈다.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으로 본 엘레노아는 체내에 마력을 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를 기점으로 막대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그녀를 통로로 다른 차원의 힘이 흘러들어온 듯 했다. 성력은 러셀의 몸 안을 이리저리 떠돌다가 왼손으로 모여들었다.
러셀은 그 힘의 흐름을 느끼고 손을 들어올렸다. 그 손등에 황금빛의 문양이 나타나 옅은 빛을 뿌리다가 사라졌다. 뭐야 이건?
러셀이 엘레노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했다.
“언젠가 사악한 것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럼 이만.”
엘레노아는 축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부상자를 돌보러 가는 듯 했다. 상처 입은 자들이 적지 않은 데 굳이 그를 먼저 찾아와 축복을 내린 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경건한 듯 보였던 사제의 눈에서 러셀은 작은 불꽃을 보았다. 정확한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단순히 감사의 마음 하나만 담겨져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그릇에 담긴 스튜를 먹던 이블린이 엘레노아가 떠나자 입을 열었다.
“꽤 대단한 성력을 가지고 있네요. 차기 성녀 중 한 명으로 지목될 만한데요.”
“성녀후보?”
이블린의 말에 러셀이 되물었다.
“네. 엘레노아 루네스. 나름대로 이름이 좀 있죠. 주로 낙후된 마을 같은 곳을 들리면서 병자들을 치료해준다고 해요. 이번에는 여기 북동부 쪽을 골랐나 보군요.”
“혼자서 말인가?”
아무리 이 세계가 판타지라지만 그렇다고 꿈과 희망이 넘치는 동네는 아닐 텐데.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더 위험하다고 볼 수 있다.
“뭐 가진 성력도 충분하니 웬만한 괴물이나 강도는 쉽게 물리치겠죠. 아까 보니 메이스도 들고 다니던데, 그거 엄청 무겁거든요. 그리고 교회의 교세는 꽤 막강해요. 생각이 있다면 굳이 건들진 않겠죠.”
“생각하면서 사는 놈들이 많지는 않을 텐데.”
“어련히 알아서 다녔겠죠.”
그렇겠지. 러셀은 이제 막 세상에 발을 디딘 참이었다. 어디 소설이나 게임에 나올 법한 성녀의 존재가 놀랍긴 했다. 그럼 어딘가 악마도 있을까. 사악한 것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된다고 했으니,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겠지.
잠깐 대화가 끊어졌고, 러셀은 육포를 질겅거리며 씹어넘겼다. 이블린은 조금씩 안절부절거리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쪽쪽 빨며 육포의 소금기를 빨아먹은 러셀이 말했다.
“할 말 있으면 하고, 없으면 말고.”
“···큼! 잘 싸우던데요. 마투술사에요?”
“응.”
러셀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가문이 무가(武家)이긴 했으니까. 마투술사는 무인과 같은 말이었다. 그들은 마나를 받아들여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해 싸우는 초인들이다.
“어쩐지. 무술도 배운 거죠?”
“어릴 때 잠깐. 어깨 너머로.”
러셀의 답에 이블린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러셀이 대 여섯 마리의 우룩크들의 공격을 모조리 피하면서 한 방 한 방에 목숨을 끊어놓은 장면들을 기억했다.
그의 동작에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하나같이 깔끔했다. 그 상황, 그 자세에서 취할 수 있는 최적의 동작. 상대방의 숨결을 단박에 끝내버릴 힘이 실린 권격들. 단순히 어깨 너머로 배웠다는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어깨 너머로 배운 게 그 정도군요. 아니 잠깐, 어릴 때? 지금 몇 살인데요?”
“스무 살.”
“······.”
러셀은 갑자기 끊긴 대화에 고개를 들었다. 이블린이 입을 딱 벌리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 나랑 동갑? 그 덩치, 그 얼굴에?”
“···젠장, 수염 깎든가 해야지.”
이블린은 자기보다 서너 살은 많은 줄 알았는데, 이런 법이 있느냐며 구시렁거렸다. 러셀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
이블린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가까이서 보니 앳된 구석이 남아있긴 했다. 수염을 깎고 나면 본래 나이 대에 가까울 것이다.
“목소리나 말하는 투나 이십대 중반은 되어보여서···.”
“말투라.”
그의 아버지도 이따금씩 아들이 아니라 동갑내기 친구와 대화하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었다. 전생과 현생을 합치면 실제로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할 테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는 어떻게 넘어갔지만 러셀은 좀 더 나이에 맞는 언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일이었다.
큼큼 헛기침을 한 이블린이 말했다.
“아까 구해줘서 고마워···요. 그쪽 아니었으면 꼼짝도 못하고 죽었을 거야··· 요.”
“그냥 반말해.”
“알았어.”
“나도 마법 잘 봤다.”
주문과 손짓으로 불덩이를 만들다니. 지구에서는 영화나 만화, 소설로만 존재하던 것들이다. 직접 눈앞에서 보게 되니 감개가 무량했다.
이블린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 그 미소에는 어째서인지 뽐내는 듯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왠지 얄미운데.
“마법을 처음 봐?”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내가 살던 곳은 마법 쓰는 인간이 귀했거든.”
“음, 음. 혹시 관심 있어?”
“너한테?”
“뭐, 뭐?!”
얼굴이 붉어진 이블린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를 질러?”
“마법을 말했는데 왜 내가 나와?!”
“주어를 명확히 해야지.”
“맥락이 있잖아, 맥락이!”
러셀은 실실 웃으며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쑤셨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