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처리
마차 행렬을 습격한 우룩크는 총 아홉 마리였다.
러셀이 하나를 해치웠으니 남은 건 여덟. 고용된 용병의 수는 열다섯이었으나 우룩크는 가진 힘이 대단하고 피부가 질긴 괴물이다.
둘에서 셋 정도 되는 용병이 우룩크 한 마리에게 붙어 있었으나 쉽게 처리 되지 않았다. 마수와 비견될 정도로 강인한 놈들이 갑옷까지 입고 있으니 날붙이를 대는 것만으로는 쉽지 않은 게 당연했다.
벌써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은 용병들이 상처 입은 부위를 감싸쥔 채 서 있었다. 그나마 축복을 내릴 수 있는 사제와 마법사가 있었기에 사망자는 없었다. 그 중 마법사는 아까 마차에서 내린 이블린이었다.
“자애로운 빛이여, 여기 당신의 종이 적에게 대항할 힘을 소망하나이다.”
“피어오르는 작은 불꽃이여···”.
러셀은 사제와 이블린의 주문을 바라봤다. 한 손에 메이스를 든 금발의 여 사제가 빈손을 곧게 세워 기도하자 황금빛이 전신에 어렸다.
피어오른 황금빛은 손짓에 따라 땅에 닿자 물결처럼 퍼져 싸우는 용병들을 감쌌다. 그러자 흐르던 피가 멈추고 상처 난 부위가 아물었다.
지쳐있던 자들은 활력을 얻으며 보다 강한 힘으로 괴물들을 밀어냈다.
“파이어 애로우!”
이블린이 시동어를 외치자 양 손 사이로 이글거리는 불덩이가 만들어졌다. 크기를 키운 불덩이는 곧 수십 개의 불화살로 변하더니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 우룩크들에게 꽂혔다.
우룩크들은 사지 중 하나에 꽂히거나 머리를 스친 불화살들에 움츠러들었고, 그런 놈들은 용병들에게 한 칼을 맞으면서 비명을 질렀다.
허나 전투는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다. 우룩크는 성인 남자보다 큰 신장에 근육으로 똘똘 뭉친 놈들이다. 놈들은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 가장 먼저 죽여 없애야할 것을 알아차렸다.
“파이어 애로우!”
두 말 없이 마법사였다. 사제도 죽여야 할 대상에 포함되어 있겠지만, 아무래도 피부에 꽂힌 불화살의 고통이 너무 큰 모양이었다.
“쿠아악!”
별안간 덩치가 큰 한 놈이 괴성을 지르며 대검을 휘둘렀다. 반경에 있던 용병 둘이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흉포하게 빛나는 탁한 노란 눈동자가 가까운 거리의 이블린을 포착했다.
“마법사를 노린다!”
“피해!”
계속해서 마법을 날리며 전투를 보조하던 이블린의 얼굴이 굳었다. 성난 소처럼 달려오는 우룩크. 다른 용병들은 맡고 있는 우룩크 하나를 상대하는 것도 벅찼다.
그녀는 허리춤에 장비하고 있던 소검을 빼어들었다. 허나 달려오는 우룩크가 든 대검에 비하면 반의 반도 되지 않는 크기. 그녀는 다른 한 손으로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스톤 윌!”
몸에 아지랑이를 두른 이블린이 바닥을 내려치자 돌로 된 벽이 네 방향에서 솟구쳤다. 자신을 가두려는 돌 벽에도 우룩크는 아랑곳 않고 콧김을 내뿜으며 어깨를 들이박았고, 그 충격에 돌벽이 부서지며 잔해를 뿌렸다.
“미친···!”
설마 부숴버릴 줄은 짐작 못한 이블린이 욕설을 내뱉으며 불덩이를 날렸다. 허나 짧은 시간 내에 급조한 불덩이는 충분한 추진력을 가지지 못했고, 휘둘러진 대검에 터져나갔다. 하지만 이블린이 노린 것도 그것이었다.
구체의 형상을 유지하는 핵을 일부러 불안정하게 만들었기에 담겨져 있던 화염이 삽시간에 일정 공간을 살라 먹어갔다.
“······.”
한 손을 들어 연기와 화염이 퍼지는 것을 막던 이블린이 눈을 크게 떴다. 사그라드는 화염 속에서 회색 피부 이곳저곳이 검게 그을린 우룩크가 흉흉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놈이 괴성을 지르며 땅을 박찼다.
“카아아아악!”
“며, 명하노니 저지하라···!”
쥐어짜낸 마력이 푸른 형상을 그리더니 우룩크의 다리와 팔을 붙잡았다. 허나 붙들린 것은 1초 남짓, 우룩크는 바로 마법을 떨쳐내고 재차 돌진했다.
그 살 떨리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던 이블린이 발을 헛디뎌 뒤로 자빠졌다.
흐트러진 자세에서도 손에 든 검은 놓치지 않고 쭉 치켜들었으나, 두려움에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렇게 넘어진 그녀를 향해 우룩크는 대검을 높게 들었다.
이블린의 녹색 동공이 커지며 빛을 빨아들였다. 죽음이 눈앞에 있었다. 회색 피부의 괴물이 든 대검의 형상으로.
머릿속이 하얬다. 수 년 넘게 배운 주문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혈관을 돌며 이적을 자아내는 마력도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체감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았다. 고점을 찍었다가 내려오는 대검, 피비린내, 마른 침, 후끈한 공기만이 느껴졌다. 앞으로 1초 후에는 느끼지 못할 것들이었다. 그렇게 확정된 죽음을 감히 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을 때.
어디선가 날아든 외날 도끼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우룩크의 가슴팍에 틀어박혔다. 거기 실린 힘이 얼마나 강한지 우룩크는 대검을 놓치고 거의 직선으로 날아가 뒤편에 처박혔다.
이블린은 살며시 눈을 떴다. 죽음은 찾아오지 않았다. 누군가 던진 도끼에 맞아 밀려났다.
싸우는 모든 이들의 시선이 도끼를 던진 자에게 향했다. 당연히 그는 러셀이었다.
도끼에 맞아 나가떨어진 우룩크가 일어나려하다 쩍 갈라진 가슴팍에서 피를 쏟으며 드러누웠다.
동족의 죽음에 화가 났는지 우룩크들이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내며 상대하던 용병들도 뿌리치고 러셀에게 달려갔다.
“어, 어엇!”
“우아악!”
거친 힘에 밀려나 엉덩방아를 찧은 용병들도 있었지만 도리어 물러났다가 우룩크에게 공격을 성공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방어를 도외시한 놈들은 날아드는 칼날이나 도끼질을 갑옷이나 강인한 육체로 버텨내면서 무시했다. 우룩크들의 시야에는 한 남자만이 존재했다.
성체 우룩크보다 눈높이가 높고 체구가 장대한 남자. 러셀이 대지를 울리며 달려오는 우룩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그로 제대로 끌었네.”
“네, 네?”
“혼잣말이야. 신경 쓰지 마.”
이블린의 물음에 답한 러셀이 발치에 떨어져 있던 창을 발등으로 들어 올려 잡았다. 손재주가 별로 없는 우룩크들이 만들었을 리 없는, 인간이 만든 실전적인 투창이었다. 러셀은 곧바로 자세를 잡았다가 창을 날렸다.
우룩크는 지능은 다소 떨어져도 전투 감각은 예리한 종족이었다. 가진 힘 또한 곰과 맞서도 이길 정도이기에 날아오는 투창에 칼의 옆면을 들이 댈 수 있었다. 그러나 투창에 담긴 힘은 곰에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검이 뚝 부러지고 가슴을 관통한 창이 바로 뒤편의 우룩크의 배에 꽂혔다. 즉사한 우룩크가 쓰러지고 등에 창날 머리가 솟아난 놈도 양손으로 창대를 부여잡다가 모로 누웠다.
다른 사람들이 입을 벌린 사이 남은 다섯의 우룩크가 러셀을 덮쳤다. 하지만 다섯이 한꺼번에 덮친 건 아니었다. 신장과 덩치가 있는 괴물들이었기에 러셀에게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반경은 제한적이다.
합격술이란 걸 할 줄 안다면 러셀을 포위한 채 궁지에 몰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우룩크는 그렇게 똑똑한 괴물이 아니다. 그저 순차적으로 맨 앞에 선 놈이 공격을 날리면 그 뒤에 놈이 이을 뿐이었다. 물론 합격술은 인간들도 오랜 시간을 연습해야 겨우 할 수 있는 공격술이긴 하다.
제일 먼저 덮쳐온 것은 우룩크의 손에 들린 칼날이었다. 러셀은 그 큰 덩치로 재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머리를 노리는 칼끝을 좌로 돌며 흘리고 왼손으로 우룩크의 손목을 잡았다.
왼발에 힘을 준 채 오른발을 내딛고 안쪽으로 접었던 오른팔의 팔꿈치가 쏘아졌다. 괴성을 지르려는 우룩크의 입에 팔꿈치가 틀어박혔다.
콰직, 하는 소리가 나고 그 한 방에 목이 180도 뒤로 꺾였다. 러셀의 힘을 견디지 못한 목 앞부분이 완전히 찢겨졌다. 이제 등을 돌리지 않고도 뒤를 볼 수 있게 된 우룩크였지만, 그 동공에 담긴 빛은 꺼져 있었다.
러셀이 걷어차자 시체는 거칠게 피를 튀기며 나뒹굴었다. 그는 볼에 튄 살점과 핏방울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남은 우룩크는 넷이었다. 우룩크들은 연이은 동족들의 죽음에도 러셀에 대한 공포보다는 분노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러셀의 자색 눈이 번쩍였다. 일순 그의 감각은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맡고, 느꼈다.
무딘 칼날과 거기 묻은 핏방울, 살점을. 우룩크의 거친 숨소리를. 피에 젖은 진흙과 땀 냄새를. 피부에 닿는 바람결을.
러셀은 허리와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렇게 찔러오는 칼을 부드럽게 피하고 훤히 보이는 배에 한 주먹, 옆구리에 한 주먹 씩을 먹였다. 그 권격이 어찌나 빨랐는지 소리는 한 번으로 들렸다.
감히 끼어들지 못하고 지켜본 사람들은 검을 휘두르던 우룩크 두 놈이 갑자기 묶인 줄에 당겨 날아가는 듯한 모습만 보았다.
입은 갑옷이 박살나며 날아간 두 우룩크들이 우웩, 피를 토했다. 토한 핏물 사이로 붉은 살 조각들이 보였다. 찢겨진 내장 조각들이었다.
남은 둘이 덤벼들었다. 뻗었던 주먹을 회수한 러셀은 차분하게 서서 기다렸다.
피가 튀고 근육이 부서지는 싸움의 한복판에서 그의 심장은 고요했다. 마차에 실려 가고 있을 때와 지금이 다르지 않았다. 그 강력한 심장이 러셀은 더 없이 좋았다.
도끼가 날아왔다. 횡으로 베어오는 도끼의 반경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러셀이 안으로 파고들었고, 그의 두 손이 기이하게 움직이더니 우룩크의 손목을 꺾고 떨어지는 도끼를 잡아챘다.
오른발을 축으로 빙글 돌아서며 러셀의 왼팔이 두 번 휘둘러졌다. 우룩크의 어깨가 갈라지며 팔을 뚝 떨어트리고 등허리에 깊은 자상이 척추를 끊었다. 놈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도끼자루가 뚝 부러졌다. 러셀의 힘을 견디지 못한 것이었다. 애초에 너무 낡아 있었거나.
마지막 놈은 양 손에 하나씩 칼을 든 놈이었다. 가장 덩치가 컸고, 그래서인지 내딛는 발자국이 묵직했다. 놈은 괴성을 지르며 손에 든 두 개의 칼을 곧게 찔러왔다.
미련 없이 부러진 도끼 손잡이를 내던진 러셀이 측면으로 몸을 비틀며 찔러오는 칼날을 마주봤다.
눈이 다시 번쩍거리고 있었다. 마치 초고성능의 카메라가 순간의 프레임을 담듯이 러셀의 눈은 찔러 들어오는 칼의 움직임을 인지했다.
바닥을 굳게 디딘 오른발을 축으로 들어 올린 왼다리를 휘둘렀다. 왼발이 칼을 밀어내고 오른 팔의 완갑으로 다른 칼끝을 빗겨냄과 동시에 오른 손이 우룩크의 왼팔 손목을 붙잡았다. 놈은 이제 벗어날 수 없었다.
우룩크는 왼팔을 당기려 했으나 돌 틈에라도 박힌 듯 빠지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당황은 동작을 느리게 했다. 러셀에게는 차고 넘치는 공격의 기회였다.
깊숙이 파고들자 러셀과 우룩크의 틈이 좁아졌다. 훤히 열린 가슴에 굳게 쥐어진 왼 주먹이 닿았다.
쿠웅.
러셀과 우룩크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린 흙먼지가 푸확, 하고 밀려나고 우룩크의 흉갑 뒷부분이 움푹 부풀어 오르더니 산산이 깨지며 그 잔해를 비산했다.
우룩크의 손에 들린 검이 땡그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괴물은 선 자세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드러난 회색 피부에는 러셀의 주먹 자국이 깊숙이, 인(印)처럼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조용했다. 배와 옆구리에 맞은 놈들이 진즉 죽은 뒤였다.
주저앉아 있거나 엉거주춤 서 있거나, 러셀이 위기에 처하면 칼을 들고 달려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자들 모두 그를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초인이라 불리는 기사가 아니면 일대일로 이기기 힘든 우룩크를 용병 한 명이, 한 놈도 아니고 다섯 마리를 잡아 죽였다. 그것도 허리춤에 달린 칼은 뽑지도 않고 맨 주먹으로.
또 그 전에 죽인 우룩크 셋도 모두 러셀이 죽인 것이었다. 실질적으로 마차 행렬을 덮친 우룩크 아홉을 러셀 혼자서 막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멀뚱하게 서 있던 러셀이 그 시선들을 받아 넘기다가 말했다.
“안 움직이나? 정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