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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판타지의 마안기사-1화 (2/225)

1화 습격

“아저씨는 어디서 왔어요?”

아저씨라 불린 남자, 러셀이 눈을 떴다. 시선을 내리자 천진난만한 인상의 여자 아이가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 아저씨 아닌데.”

“수염이 그렇게 많이 났는데요?”

“이게 뭐가 많이 난 거냐. 그냥 좀 까칠해진 것뿐인데.”

“아닌데. 엄청 많은데요, 아저씨.”

“왜 아까부터 시비지.”

“베에.”

여자 아이가 메롱 빨간 혀를 내밀었다. 러셀은 마주 혀를 내밀까 하다 관뒀다. 그저 뚱한 눈으로 여자 아이를 봤을 뿐이었다.

러셀의 복장은 간편하면서도 실용적이었다. 무두질된 가죽 갑옷과 가슴을 사선으로 교차하고 허리에도 둘러진 가죽 띠, 그곳에 매인 장검 하나와 단검, 광택이 도는 가죽 바지, 징 박힌 부츠 등. 누가 봐도 잘 무장된 용병이었으나 여자 아이는 그것에 딱히 무서워하지 않았다.

마을과 마을, 도시와 도시를 들리는 마차 행렬에 합류한 지 이제 이틀 째였다. 낮을 가리는 듯 했던 아이는 러셀이 의외로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것을 알고 나자 서슴없이 말을 걸어왔다.

머리 엄청 새까맣다, 손이 크다, 다리가 길다, 등등.

아마 이번 생에서 그의 아래에 있던 이복동생들을 돌봤던 경험 덕분일까. 아니면 아이라고 무시하지 않아서 그랬나. 어린 아이는 어른의 감정에 민감한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어린 아이 취급을 좋아하는 어린 아이는 없다.

뭐, 그런 걸 차치하더라도 그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러셀이 손을 들어 턱을 쓸자 확실히 까칠해진 감촉이 느껴졌다.

일어날 때마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면도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니 자연히 수염이 자라난 것이다. 거울을 가지고 다니지도 않으니 수염 깎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수염 났다고 다 아저씨냐.”

“네냐 언니가 그랬는데, 남자는 수염 나면 다 아저씨랬어요.”

“그러냐.”

러셀은 픽 웃었다. 그의 나이가 아저씨라 불릴 만한 나이가 아니기는 했지만 소녀의 눈에는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아저씨, 어디서 왔냐니까요.”

“내가 어디서 온 게 왜 궁금한데?”

“웅···.”

여자 아이는 말끝을 흐렸지만 러셀은 대충 짐작이 갔다. 아마 이국적인 그의 외모 때문일 것이다. 또 뒤로 모아 묶은 길고 검은 머리도 이 땅에서 흔하진 않을 테니까. 그것도 밤하늘보다 새까맣고, 밝은 빛에 비추면 짙은 자줏빛이 나는.

그런 머리카락은 보통 서리 폭풍이 몰아치는 아운힐나르 산맥 너머의 초원에서 사는 유목민들이 많이 가졌다. 물론 대륙에도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고정관념이라는 게 앞서 있을 뿐이다.

거기다 러셀의 덩치 또한 야만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장대했다. 마차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음에도 머리는 천장에 닿을 듯 했고 어께는 떡 벌어졌으며, 길쭉한 다리는 안 그래도 좁은 공간을 널찍이 차지했다.

어릴 때부터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산맥에서 내려온 검은 머리의 털북숭이 괴물이 잡아간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들에게는 러셀의 모습이 딱 그 괴물 같이 보였을 터다.

“내가 에르카샤 같니?”

러셀은 허리를 약간 숙이며 산맥 너머에서 살아가는 부족의 이름 중 하나를 댔다. 그나마 이 대륙에서 이름이 알려진 초원 부족의 이름이었다.

소녀는 가까워진 러셀의 둥글게 휜 눈매와 얼굴을 보다가 뺨을 붉혔다.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니요.”

“왜?”

“눈 색깔이 예뻐서요.”

아이에게는 그 이유면 충분하다는 걸까. 하긴, 러셀의 눈동자 색이 특이하긴 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보다도 더 희귀한 자색 눈동자였으니까.

“그래? 너도 나쁘지 않은데.”

소녀의 눈동자는 진한 파란 색이었다. 아마 이 대륙에서 가장 흔할 색 중 하나. 신기하게도 이 대륙의 인종들은 다채로운 눈 색깔을 지니고 있었다. 파란 눈은 전생에서 사진이나 영상으로밖에 보지 못했다. 대신 이번 생에서 많이 보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

“헤헤. 그래요?”

“그래.”

질문은 금세 잊어버린 듯 여자 아이는 헤헤 웃었다. 그 천진한 모습에 러셀은 현생의 여동생을 떠올렸다. 도망치듯 떠날 때만 해도 키가 허리춤에 올까 말까 했는데. 많이 컸을까.

러셀을 바라보며 목마 태워달라는 게 어제 일처럼 훤했다. 올망졸망한 눈이 참 귀여웠었다.

“진짜 신기하긴 하네요. 자연적으로는 거의 발현되지 않는 눈동자 색인데.”

그때 다른 누군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타는 듯한 적색 머리카락에 연녹색 눈동자를 지닌 여자였다. 곱고 흰 피부, 아미를 가로지르는 눈썹, 커다란 눈, 그 아래로 고운 곡선을 그리는 콧대, 혈색 좋은 빨간 입술. 서구적인 미를 한데 몰아 만든 듯한 미인이었다.

뒤로는 얇은 로브를 둘렀고 안쪽으로 여러 개의 사슬과 가죽을 덧댄 갑옷을 입고 있었다. 능숙한 여행자의 모습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책에서 보길, 마나의 축복을 받으면 그런 눈동자 색깔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데···. 마력을 다룰 줄 아나요?”

마나. 지금 이 순간에도 러셀의 호흡에 따라 들어왔다가 나가는, 이세계의 힘.

마력. 지금 이 순간에도 꾸준히 러셀의 체내에 축적되어가는 가공된 힘.

“굳이 대답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꼭 듣고 싶은 건 아니에요. 오래된 고대 문헌에서 나오는 얘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저도 이 아이와 마찬가지로 당신 눈이 예뻐서 그런 거니까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이블린이에요.”

이블린이라 밝힌 여자의 손은 하얗고 가늘었다. 러셀은 섬섬옥수라는 예전 세상의 고사성어가 떠올랐다. 이 땅에도 비슷한 말이 있을까?

“러셀.”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이블린의 손을 쥐고 악수했다. 직접 잡아본 이블린의 손은 생각보다 차가웠고 보드라웠다. 그때 보고 있던 여자 아이도 끼어들어 작달막한 손을 내밀었다.

“전 다프네예요!”

“반가워, 다프네. 난 이블린이야.”

“반가워요, 이블린!”

이블린과 악수를 나눈 다프네가 러셀을 향해 눈을 빛냈다. 그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를 보고 피식 웃은 러셀이 손을 쥐었다. 그의 손가락 세 마디가 다프네의 손을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러셀.”

“반가워요, 러셀!”

인사가 오가자 이블린이 러셀을 보고 말했다.

“아까 이 마차에 타기 전에 내 소개는 들었죠?”

“그래. 마법사라고.”

“어머. 잘 안 믿는 말투인데.”

“젊어보여서. 마법사, 마녀라면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상상했었는데 말이지. 혹시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가?”

“아니거든요. 그쪽이야말로 진짜 야만족 아녜요? 아운힐나르 산맥 너머의.”

여자에게 나이 언급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까칠한 태도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이블린은 다프네와 잘 놀아줬다. 마법사라는 게 거짓이 아닌지 작은 빛무리를 만들어 손바닥 위에서 뛰놀게 만들기도 했다. 다프네가 입을 벌린 채 빛으로 만들어진 토끼를 구경했고, 그 모습을 구경하던 러셀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이블린이 굳은 러셀의 표정을 보고 빛을 꺼트렸다.

“어, 왜 그래요?”

“쉿.”

이블린의 변명을 러셀은 검지 하나로 막았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마차 너머의 뭔가를 잡아냈다. 덩달아 심각해진 이블린이 속삭였다.

“무슨 일인데요?”

“습격이군.”

“예?”

이히히힝!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뭔가가 마차 벽을 뚫고 머리를 내밀었다. 화살이었다.

“습격이다앗!”

“괴물들이야!”

마차가 급정거를 하며 멈추고 고함 소리와 비명이 합 중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블린은 다프네를 부모의 품에 안기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러셀도 따라서 나가려는 찰나, 여자 아이가 외쳤다.

“아저씨, 죽지 마요!”

러셀이 돌아보자 아이는 겁먹은 표정으로, 하지만 눈은 흔들림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러셀은 아까의 아이처럼 메롱 혀를 내밀었다가 삼켰다. 마차 안에 있던 이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고 있었기에 그 모습을 본 건 다프네밖에 없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저씨 아니라니까.”

그는 마차를 나섰다. 해는 머리 꼭대기에 섰고, 구름은 보이지 않았다. 양옆으로 숲이었다. 길목에서 기다리며 누군가를 습격하기에 썩 괜찮은 지형.

러셀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셨다. 콧구멍과 목구멍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도 없다는 건 이렇게나 좋은 일이었다.

콧바람을 거세게 내쉰 것과 동시에, 그의 시야 사각지대에서 머리를 향해 날아오던 창을 보지도 않고 잡아챘다.

“흠.”

고개를 돌린 러셀은 창을 던진 놈을 마주봤다.

우룩크. 오크의 먼 친척뻘이라는 회색 피부의 괴물이었다. 인간을 상대로 한 습격이 처음이 아니었는지 갑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전리품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는데, 비쩍 말라붙어 거죽만 남은 인간의 머리통들이었다.

햇볕에 오랫동안 쬐여서 그런지 검어진 피부와 썩어 문드러진 코, 사라진 입술 안쪽으로 듬성듬성 난 이빨. 러셀은 눈을 찌푸렸다.

“고약한 취향인데.”

“크아아아! 인, 간! 주긴, 다!”

우룩크는 도끼를 들고 곧바로 러셀에게 돌진했다. 창을 잡아챈 것에 대한 분노인지, 취향존중을 해주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는 불명확했다.

애초에 우룩크들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오크에 비해 여러모로 열등한 종자인건 분명했다.

지척까지 달려온 우룩크가 위에서 아래로 도끼를 내리쳤다. 힘이 넘치는 괴물답게 빠르다.

하지만 기예도 기술도 없는 정직한 일격이었고, 그래서 러셀은 옆으로 한 발자국만 내딛는 것으로 공격을 피했다.

칼은 뽑지 않았다. 그는 오늘 자신의 감각과 주먹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도끼가 흙바닥에 쾅 틀어박힌 것과 동시에 러셀의 오른 주먹이 바람을 갈랐다.

쾅!

우룩크의 손에서 힘이 빠지더니 땅에 박힌 도끼의 손잡이를 놓쳤다. 잠시 몸을 앞뒤로 흔들거리던 우룩크는 무릎을 꿇더니 앞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우룩크에게는 머리가 없었다. 거칠게 뜯겨나간 목의 단면에서 피가 흘러 흙을 적셨다.

더 없이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그였지만 러셀은 터럭만큼도 동요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그였다면 주저앉았으리라. 아니, 애초에 이렇게 주먹을 날릴 수조차 없었겠지. 그는 하루에도 대 여섯 개의 알약을 먹어야 했고, 팔굽혀 펴기 10개도 못 할 정도로 약해 빠졌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계의 러셀은 다르다. 그는 강하다. 육체와 정신 모두.

주먹에 닿았던 피륙이 산산이 부서지는 감각이 아직도 선하지만.

떨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다.

새로 태어나 생각이란 걸 할 수 있게 됐을 때부터 이 몸에 탑재되어 있던 강인한 정신력과 침착성은 이성을 더욱 또렷이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아마 사람을 직접 죽인다고 해도 변치 않으리라.

러셀은 뻗었던 주먹을 회수하고 손마디를 살폈다. 상처 하나 나지 않았다. 그리 알고 내지른 것이긴 했지만, 새로 태어나 얻은 이 몸은 어릴 적부터 범인과는 다른 기이함이 존재했다. 거기에 마나라는 힘이 더 해지니 그의 주먹은 차돌바위보다 단단했다.

그가 집을 나오게 된 이유와도 맞닿은 면이 있었다.

멀쩡한 손을 주억거리던 러셀이 등을 돌렸다. 마차 안에서 벌벌 거리며 떨고 있는 여행객들이 보였다. 러셀은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다 어머니의 품에 꼭 안긴 다프네에게서 멈췄다.

다프네는 밖의 비명과 괴성에도 두렵지 않은지 반짝이는 눈을 러셀에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그가 보인 모습에 감명 받은 듯 했다.

“얌전히 안에 있으시오. 괜히 눈 먼 화살이나 창에 맞지 말고.”

그리 말하자 여행객들이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러셀은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들을 무시하며 싸움의 현장으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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