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며칠이 지났다. 이틀 후면 조난된 지 딱 한 달이 된다.
남자는 매일 그들을 찾아왔다. 찾아와 식량을 던져주고 다시 돌아갔다. 생활감이 없던 그 요트로 돌아가는 거겠지. 서주는 가끔 남자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곤 했다.
“서주, 이리 와.”
남자가 꼭 강아지 대하듯 서주를 불렀다. 그에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슬쩍 눈치를 살폈으나 정작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이서주의 머리에 강진헌이 까만 모자를 씌웠다. 그가 좀 전까지 쓰고 있던 것이었다.
높게 틀어 올려 묶은 머리에 모자가 아슬아슬하게 걸렸다.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웃던 그가 모자를 벗기고 팔 아래에 꼈다.
서주의 머리만 한 손이 머리카락 뭉치를 잠깐 더듬다가 가까스로 머리끈을 쥐었다. 그리고 조심성 없이 휙 벗겨 냈다.
“악!”
서주가 머리를 쥐며 비명을 질렀다. 미안 미안, 하는 성의 없는 사과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래도 미안하긴 했는지 그녀의 머리를 누르듯이 살살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한다는 것이 못내 간지러워서 서주의 뺨이 발개졌다. 사르륵.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떨어졌다. 붉은 뺨이 조금 가려졌다.
잠깐 서주의 머리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다시 모자를 씌웠다. 앞코가 닿을 만큼 가까이 붙어 있던 커다란 발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음, 조금 크네.”
헐거운 모자를 쓴 서주의 얼굴을 보며 진헌이 중얼거렸다. 서주는 모자를 더듬어 보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그가 눈을 휘며 말했다.
“선물.”
“…감사합니다.”
매번 잊지 않는 감사 인사에 강진헌의 입꼬리가 비죽 솟았다. 서주는 잠깐 그를 보다가, 어제 정연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서주는 잠깐 눈치를 보다가 물었다.
“저기…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순간 서주는 모두 관심이 쏠렸다는 것을 느꼈다.
“저기 누구.”
강진헌이 모자챙을 툭, 쳐서 서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 강진헌 씨요.”
재빨리 정정하자 그가 느른하게 웃었다. 서주는 그를 보고 마주 웃으며 물었다.
“몇 살이세요?”
“서른.”
무심히 흘러나온 대답에 서주는 수긍했다. 얼굴은 이십 대 후반 같지만 분위기는 훨씬 성숙하니까 그쯤 될 것 같았다. 생각보다는 어린 것 같기도 하고.
생각을 이어 나가다 서주는 그가 김석훈보다 어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 이것 좀 이상해질 것 같은데……. 생각을 하자마자 저쪽에서 황당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서른이라고요?”
김석훈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강진헌을 보았다. 강진헌은 서주가 쓴 모자를 만지작거리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김석훈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봤다. 싸한 침묵이 흘렀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서주를 알아채고 진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표정은 무척 태연했다.
“지금 장난칩니까?”
얼굴이 새빨개진 석훈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치이익, 불씨가 빠르게 응어리로 향하고 있었다. 꼬이고 꼬인 길을 빠르게 먹어 치우며 타들어 갔다.
“내가 너랑?”
진헌이 고개를 바로 하고 석훈에게 시선을 주었다. 석훈이 앉아 있던 곳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줄곧 반말했잖아요. 나는 존댓말하고. 내가 서른하나라고 처음 만난 날에 분명히 얘기했는데.”
이를 악물고 한 석훈의 말에 진헌이 미간을 구겼다. 질색하는 표정이었다.
“너도 반말하든가.”
강진헌이 짜증이 듬뿍 담긴 말을 툭 내뱉었다.
“와…….”
하준이 감탄 비슷한 소리를 냈다가 인우에게 등을 맞았다. 등을 맞고도 인우에게 속삭였다.
“진짜 보통 아니다.”
인우도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서주는 자신이 실수한 것 같아 어쩔 줄을 몰랐다. 곤란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정연과 눈이 마주쳤다. 정연이 석훈을 눈짓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한 살이 큰 차이는 아니지만 확실히 기분 나쁠 법했다.
서주가 생각해도 강진헌이 좀 너무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여기가 외국의 무인도라지만 같은 한국 사람들인데.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다. 강진헌은 처음부터 예의가 없었고, 그에게 괜찮은 면이라곤 생존력 하나뿐인 걸 모두 모르지 않았다. 그가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점은 처음부터 눈에 보였다는 뜻이다.
“아, 짜증 나네.”
눈을 굴리는 서주를 보고 있던 진헌이 작게 중얼거린 이후로 분위기는 더욱 엉망이 되었다.
김석훈은 강진헌을 노려보았다. 그간의 언행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반말에, 명령에, 턱짓에……. 그것뿐만이 아니다. 개새끼가, 갑자기 나타나서 자리를 꿰찼다. 나이도 어린 게 큰형 행세를 하니까 다른 동생들이 줄줄 따랐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강진헌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달랐는지를 떠올렸을 때, 강진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새카만 눈동자가 마침내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쾅-!
마치 폭발처럼 불어난 불길이 오래 걸렸을지도 모르는 꼬인 길을 통째로 태웠다. 가장 안쪽에 있는 응어리가 화염에 휩싸였다.
“야, 이 개새끼야……!”
눈을 부릅뜬 김석훈이 주먹을 움켜쥐고 강진헌에게 달려들었다. 강진헌이 반사적으로 피했으나 주먹이 그의 뺨을 스쳤다.
서주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석훈 씨!”
가슴팍을 거칠게 들썩거리며 진헌을 노려보고 있는 석훈의 팔을 붙잡으려는데, 음산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아, 씨발…….”
낮게 울리는 음성이 닿은 곳에 솜털이 오소소 섰다. 서주는 뻗었던 손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아랫입술에 피가 맺힌 강진헌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흉흉하게 빛이 나는 검은 눈동자를 확인한 순간 서주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와 거의 동시에 묵직한 주먹이 눈앞을 지났다.
퍽 둔탁한 소리가 났고, 김석훈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서주는 비명을 질렀다. 말려 보려 했으나 딱딱한 팔이 자꾸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김석훈에게 올라탄 강진헌은 일방적인 폭행을 시작했다.
“악! 이, 미친놈이……!”
김석훈도 가만히 있지 않고 주먹을 마구 휘둘렀으나 겨우 강진헌의 턱을 스칠 뿐이었다. 두 사람은 애초에 체격 차이가 너무 컸다.
분노 때문에 잠깐은 같이 싸우던 김석훈의 얼굴에 슬며시 공포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강진헌의 눈빛은 마치 무생물을 보는 것처럼 싸늘했고, 팔로 얼굴을 가리는데도 주먹은 일정한 속도로 계속 떨어졌다.
“좀! 씨발, 누가 이 미친 새끼 좀 어떻게……!”
마침내 김석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달려갔다. 그러나 하준과 인우가 허리를 끌어안고 뒤로 당기는데도 육중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퍽. 강진헌의 몸을 밀어내느라 미처 방어하지 못한 김석훈의 얼굴이 주먹에 맞은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서주는 그의 굵은 팔에 매달려 있다가 고개를 돌리곤 헛숨을 들이켰다.
정신을 잃은 것 같은 김석훈의 입 주변이 온통 피범벅이었다. 서주는 질끈 눈을 감고 그의 팔을 세게 끌어안고 당겼다.
“놔.”
낮은 목소리가 거칠게 말했다. 서주는 마치 학습된 것처럼 손에 힘을 풀었으나 하준과 인우는 계속 그의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강진헌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기고 그들의 팔을 비틀어 떼어 냈다. 팔꿈치에 관자놀이를 찍힌 하준이 머리를 쥐고 끙끙거렸다.
정신을 잃은 사람을 또 때릴까 봐 겁을 먹고 있었으나 강진헌은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또 때리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서주는 너무 놀라 쿵쾅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김석훈을 보았다. 하준과 인우가 그에게 다가가 뺨을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형, 형. 괜찮아요?”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이었는데 김석훈의 입술 사이로 시뻘겋게 젖은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끈적하게 실을 이루며 떨어진 핏덩이 같은 그것은 작고 딱딱했다.
“어어…….”
먼저 발견한 하준이 당황한 눈으로 인우를 보았다.
“왜. 뭐…….”
시선을 준 인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가 피로 흠뻑 젖은 석훈의 입술을 벌렸다. 또 하나가 미끄러지듯이 떨어졌다.
“어떡하지.”
“일단은 지혈해야 할 것 같은데…….”
이가 두 개나 빠진 걸 보고 당황한 하준과 인우가 서로 눈치만 볼 때였다. 흰자위를 보이며 넘어갔던 석훈의 눈동자가 돌아왔다.
“으으…….”
“괜찮아요?”
눈을 뜬 석훈은 모래에 떨어진 제 이를 보고 잠깐 말을 잃었다가 이내 바쁘게 강진헌을 찾았다.
“미친 새끼가 씨발…….”
피가 묻은 제 손을 인상을 찌푸린 채 보고 있던 진헌이 스윽 고개를 돌렸다. 그것만으로도 모두 긴장해서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시선이 하준과 인우, 피범벅인 채 씩씩거리는 석훈의 얼굴에 닿았다. 한숨을 내뱉은 남자는 피곤한 듯 말했다.
“죽여 버릴까, 그냥…….”
싸늘한 안광이 번뜩였다. 작은 목소리를 제대로 들은 사람은 없었으나 그의 눈빛에서 모두 같은 것을 느꼈다.
김석훈은 순간 겁을 먹었지만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준과 인우가 더 빨랐다.
“아, 형님. 왜 그러세요. 기분 푸시고 앉아 계세요.”
“예. 과일이라도 좀 드시면서…….”
하준의 목젖이 긴장한 듯 움찔거렸다. 강진헌은 그들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잠깐 허공을 보더니 목을 돌리고 어깨를 푸는 그를 확인하곤 조난자들에게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김석훈은 입술을 덜덜 떨며 표정을 구겼다. 누가 봐도 강진헌이 잘못한 상황인데, 모두 강진헌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야, 너희 지금…….”
“형이 좀 참으세요. 네?”
하준이 석훈의 어깨를 토닥였다. 목소리는 진헌에게 들릴까 속삭이듯 작았다. 석훈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의 눈이 바쁘게 하준과 인우의 얼굴을 살폈다. 그들은 곤란하다는 눈치를 하고 있었다.
석훈의 시선은 조금 더 멀리, 놀라 굳어 있는 정연에게로 닿았다. 피로 젖은 얼굴이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자 비위가 약한 정연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석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걸로 피 좀 닦으세요.”
고개를 돌려 보니 이서주였다. 서주가 내민 수건을 보고 석훈의 마음이 조금 풀리려던 찰나였다.
“이서주.”
수건으로 뺨을 닦아 주려던 서주의 손이 멈췄다.
흘깃 뒤를 돌아본 서주는 하준과 인우를 살피고는 자리를 떠도 되겠다 싶었는지 하준의 손에 수건을 쥐여 주고 돌아섰다.
김석훈은 마치 서주가 개새끼처럼 강진헌에게 달려간다고 생각했다. 개새끼는 이서주뿐만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강진헌의 잘못인데 그의 편에 서서 꼬리를 흔드는 모두가 다 개새끼들이었다.
그의 눈이 괴상하게 빛났으나 피로 젖은 얼굴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
다시 며칠간 강진헌이 무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하준과 인우는 알게 모르게 석훈에게 눈치를 줬다. 강진헌이 오지 않는 이유가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까지 빠지면서 더 많이 맞았잖아.”
“그러니까 왜 이기지도 못할 사람한테 덤벼요.”
“너 말 다 했어, 개새끼야?”
“말이 심하시네. 개새끼라니요!”
엉망이 된 분위기는 단지 며칠 전 있었던 일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오늘로 조난 31일째가 되니까. 바다에서 한 달 동안 조난된 사람도 한 달이 되는 날에는 구조되었으니까.
한 달. 그건 우리가 갖는 희망이었다. 두려움을 감추고 제법 멀쩡한 행세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던 것.
“오빠, 그만하세요.”
정연이 씩씩거리는 석훈의 팔을 붙잡았다. 석훈이 그녀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뿌리치며 말했다.
“놔 봐, 씨발 년아.”
“…….”
상스러운 욕설을 들은 정연의 낯이 창백해졌다. 석훈은 씩씩거리며 하준을 노려보다가 아차, 하는 낯을 했다.
“아, 미안, 정연아. 내가 진짜 미쳤나 봐.”
석훈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정연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스스로를 자책하듯 눈 위를 꾹 누른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비어 있는 이가 보였다. 그것을 목격할 때마다 서주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시선을 돌리곤 했다.
“서주 누나, 같이 먹을 것 좀 구하러 가요.”
하준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주는 잠깐 눈치를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곳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
구명 뗏목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나오자 마음이 아주 조금 편안해졌다. 그러나 하준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서주는 그를 흘깃거리며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준아, 너 어디 아파?”
“…아뇨.”
하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몇 개의 칼자국이 있는 나무에 습관처럼 칼자국을 내고서 머뭇거리다 말했다.
“좀… 내가 많이 변한 것 같아서…….”
“…….”
“무서워요. 배도 고프고.”
서주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애써 씩씩하게 말했다.
“저기 코코넛 있다. 코코넛 먹자, 하준아.”
“저걸 어떻게 따요…….”
흘긋 서주가 손짓하는 곳을 본 하준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영 기운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엄청 높지는 않잖아. 내가 한번 해 볼게.”
“됐어요. 괜히 다쳐요. 그러지 말고 그냥 떨어진 거 있는지나 좀 봐요.”
“할 수 있는데…….”
서주는 나무 아래를 보느라 고개를 숙인 하준을 보며 중얼거렸다.
“근데 진헌 형님은 계속 안 오시는 거 아니겠죠?”
“글쎄…….”
“누나가 보기엔 어때요?”
고개를 든 하준이 서주에게 시선을 줬다. 고등학생 티가 남은 앳된 얼굴에는 절박함이 떠올라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
“뭐 따로 얘기한 거 없어요?”
“…응. 없어.”
대답하며 서주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오지 않으면 이어지지 않는 관계다. 휴대폰 따위는 고철에 불과한 이곳에서는 ‘따로 얘기’할 방법도 없다. 유일한 연결이라곤 그가 사는 곳뿐이었다. 생활감이 없는 그 요트.
“아, 씨.”
하준이 돌멩이를 찼다.
“이게 다 그 꼰대 새끼 때문이에요. 한 살밖에 차이 안 나면서 왜 지랄이래. 처맞기나 하고…….”
구시렁거리던 하준은 흘깃 서주를 보고는 “아, 배고파 죽겠네.” 하고 한마디를 덧붙인 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아까처럼 나무 아래를 뒤졌다.
성과는 썩 좋지 않았다. 떨어진 것 중에 상태가 깨끗한 열매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하준이 높이 뛰면 손이 닿을 곳에 빨간 과일이 딱 하나 달려 있었고, 하준은 그것을 땄다. 옷에 슥슥 닦으며 과일을 빤히 보던 하준이 서주를 보았다.
“누나, 우리 이거 여기서 먹고 갈까요?”
“어?”
“먹고 가요. 다섯 명에서 나눠 먹으면 더 배고프기만 하잖아요.”
“그래도 같이 먹어야지…….”
서주의 말에 하준이 눈을 세모꼴로 떴다.
“누나 진짜 짜증 나는 스타일인 거 알아요?”
그리고 뾰족한 말을 내뱉었다. 서주는 당황스러워 눈을 깜박였다. 하준이 습관처럼 툴툴거리긴 해도 한 번도 서주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준은 당황한 서주를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말없이 과일을 반으로 갈라 서주에게 내밀었다. 먼저 먹는 하준을 보며 서주도 입으로 과일을 가져가야 했다.
과일을 전부 먹은 후에는 다시 해안가로 돌아갔다. 분위기는 참담했지만 일과대로 비스킷을 나눠 먹고, 물을 나눠 마셨다. 앉은 순서대로 돌아가다 보니 마지막은 하준이었다.
“아! 아깝게…….”
물을 마시다 아래로 흘려 버린 하준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자기 실수에 크게 짜증 내지도 못하고 그가 가슴팍에 묻은 물을 문질렀다. 그러던 때였다.
“뭐야. 뭐 먹고 왔어?”
석훈의 목소리가 무심한 듯 흘러나왔다. 눈을 크게 뜬 서주는 하준의 티셔츠에 옅은 색의 과즙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빨래를 자주 하는 게 아니라서 며칠 전에 묻은 거라고 우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준은 그러지 않았다.
“네. 제가 딴 거라서 제가 먹었어요. 왜요?”
구겨진 얼굴 그대로 고개를 든 채 하준이 석훈을 똑바로 보았다. 석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눈을 그따위로…….”
“죄송해요, 석훈 씨. 하나라서 그냥 제가 먹고 가자고 그랬어요.”
서주가 하준을 변호했다. 그녀는 단지 평화를 바랐을 뿐이었다.
“서주 씨도 진짜 너무하네. 우리 쫄쫄 굶고 있는 거 알면서 그래요?”
“미친. 그럼 직접 나가서 먹을 걸 구하든가.”
“개새끼야, 말 다 했어?”
언성이 높아졌다. 정연은 입술을 깨물며 석훈을 말렸고, 인우는 하준을 말렸다. 서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툼은 조금 수그러들었다가 또 얼마간이 지나면 다시 불이 붙곤 했다. 주위가 완전히 컴컴해지고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것이 반복되었다.
조난 31일째의 하루가 저물어 갔다.
***
조난 32일째 아침.
오늘 아침 분량의 비스킷을 먹으려 석훈이 식량 가방을 열었다. 그의 표정이 이내 심각해졌다. 그는 가방을 더듬거려 보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왜요?”
정연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쏠렸다.
“하나밖에 없어.”
“…네?”
1인용 구난 식량을 우리는 이틀 동안 나눠 먹는다. 섬에서 첫 일주일 이후로는 강진헌이 있었기 때문에 식량을 거의 먹지 않았지만, 그가 며칠 오지 않으니 다시 빠른 속도로 식량이 줄어들었다. 어제는 세 개가 남아 있었다. 즉, 우리의 6일 치 식량인 셈이었다.
“어어?”
무릎걸음으로 다가간 정연이 얼빠진 소리를 흘림과 동시에 모두 우르르 다가갔다. 정말이었다. 가방 속 회색 패키지는 딱 하나뿐이었다.
“이게 무슨…….”
하준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활짝 열린 가방 속을 손 몇 개가 더듬거렸다. 훤히 보였으나 확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은요? 물은 있어요?”
인우가 물었다.
“어. 물은 그대로야.”
“이게 어떻게 없어졌지?”
“그러게. 가방 지퍼도 닫아 놨는데.”
“여우나 뭐 그런 게 가져간 것 아닐까요? 엄청 똑똑하대요.”
서주가 말했다.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그럴 수도 있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모두 답을 알고 있었다. 다만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을 뿐이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고요한 공기에서는 뾰족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마침내 석훈이 입을 열었을 때,
“우리 중에 누군가가 손댄 거겠죠.”
피하고 싶었던 잔인한 진실이 던져졌다. 그것이 제법 아파 우리는 조금 더 침묵해야만 했다.
“…누가요?”
정연이 희미한 목소리로 물었다. 석훈은 참담한 눈빛으로 텅 빈 가방을 보다가 문득 표정을 굳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시선이 하준에게 닿았다.
“하준아, 너 혹시…….”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멍하게 석훈을 보던 하준이 점점 얼굴을 구겼다. 하준이 설마 하는 표정을 하고 물었다.
“지금 절 의심하는 거예요, 형?”
“뭐, 어제 그런 일도 있었고.”
“씨발, 그거랑 이거랑 같아요? 하.”
하준이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였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또 김석훈과 한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하준은 이내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박하준, 그런 거면 그냥 지금 얘기해. 아직은 없던 일로 할 수 있으니까.”
냉정한 말을 내뱉은 사람이 인우였기 때문이었다. 하준은 부릅뜬 눈으로 인우를 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얼마간 말을 잇지 못했다.
“…씨발. 형도 날 의심해? 좆같네, 진짜.”
하준의 눈 밑에 새까만 그림자가 생겼다.
“욕하지 마.”
“욕이 씨발, 안 나오게 생겼어?”
창백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거친 숨을 색색 내쉬며 하준은 인우와 석훈을 차례로 노려보았다. 그다음으로 시선이 닿은 곳은 서주였다.
“어제 일 때문이면 왜 나만 의심해요? 서주 누나도 같이 먹었는데.”
하준의 말과 동시에 네 쌍의 시선이 서주에게 쏠렸다. 서주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조금 겁을 먹은 표정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니에요.”
“저는? 뭐, 그럼 누나도 내가 그랬다고 생각해요?”
하준의 뾰족한 말이 서주를 겨눴다. 서주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을 내저었다. 애처로울 정도로 절박한 몸짓이라, 하준의 분노도 한풀 꺾였다.
“서주 누나는 아닐 거 같아요. 어제도 내가 강요하다시피 먹인 거니까.”
하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서주는 입술을 깨문 채 하준의 지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 후에 김석훈이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은… 이거라도 먹읍시다. 얘기한다고 범인이 밝혀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모두 맥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퍽퍽한 비스킷을 먹으며 서주는 슬퍼졌다. 그리고 또, 두려워졌다.
무언가 아주 많이 변할 것 같은 예감. 조금은 익숙해진 이 낯선 곳이 더욱 낯설어질 것 같다는 그 예감이 심장을 불쾌한 박자로 두드려 댔다.
***
조난 35일째.
“아니, 씨발. 내가 왜 또 가야 되는데요?”
하준이 충혈된 눈을 하고 씩씩거렸다. 석훈도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누가 너만 간대? 나랑 정연이는 낚시하러 간다니까.”
“낚시는 개뿔. 둘이서 떡치러…….”
“하준아!”
서주가 하준의 팔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렸다. 하준이 서주를 흘긋 보더니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니, 잘하지도 못하는 낚시보다는 그냥 게나 주워 오든가. 아니면, 같이 바나나라도 따든가 하는 게 낫잖아요.”
“내가 물고기 낚아 오면 어쩔 건데. 너 자꾸 사람 무시하는데…….”
하준이 조금 누그러지니 이번에는 석훈이 발끈했다.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씩씩거렸다.
“이게 다 형이 진헌 형님 건드려서 그런 거 아니에요? 누구 잘못인데 진짜 뻔뻔하게.”
“뭐, 뻔뻔? 그러면 그쪽 가서 붙든가, 개새끼야.”
“아니, 씨발.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씨발이랬냐?”
“누가 먼저 욕했는데!”
서주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식량이 없어진 후 지난 사흘은 마치 지옥의 초입 같았다. 하준과 석훈은 틈만 나면 싸웠고, 이상한 데서 고집을 부렸다. 인우는 입을 꾹 다문 채 허공만 보았고, 정연 역시 의욕이 없었으므로 둘을 말리는 것은 항상 서주였다.
“진헌 형님 계셨을 때가 좋았는데…….”
멍하게 허공을 보던 인우가 혼잣말 같은 한마디를 흘렸다. 격앙된 목소리들이 고장 난 라디오처럼 뚝 끊겼다.
하준은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고, 석훈은 이가 빠진 곳을 혀끝으로 문질렀다. 뒤쪽에 누워 있던 정연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한번 찾아가 보면 안 돼요?”
그녀의 눈에 오랜만에 생기가 어린 것 같았다.
“이러다 진짜 굶어 죽을 것 같아. 그래도 진헌 오빠 있을 때는 잘 먹고 지냈었는데…….”
회상하며 입맛을 다시는 정연을 보며 석훈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정말 찾아가 봐요! 우리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하고 덧붙인 말에는 남몰래 정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배가 고픈 것은 석훈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침묵을 유지했다. 증오, 분노와 배고픔은 결이 다른 고통이었다.
구난 식량이 동떨어진 후 조난자들도 먹을 것을 구해 보기 위해 애를 썼었다. 수영을 못하므로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엄두를 못 냈지만 근처 바위를 들춰 보기도 했고, 숲으로 들어가 바나나 나무와 씨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바위를 들춰 나오는 것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게뿐이라 배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고, 바나나 나무는 한나절 동안 매달려 겨우 쓰러뜨렸으나 불개미 떼가 나무에서 나오는 바람에 도망쳐야 했다.
나무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하준은 개미 몇 마리에 물려 온몸이 울긋불긋했다. 많이 가렵고 고통스러운지 자다가 흐느끼는 소리를 서주는 분명히 들었다.
강진헌이 없는 우리는 정말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지도 몰랐다.
“서주 누나, 누나랑 저랑 둘이서 갔다 올까요?”
“…나는 안 갈래.”
이상하게도 서주는 요트에 간다고 한들 진헌을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요?”
하준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서주를 설득해 보려 했으나 석훈이 끼어들었다.
“나도 갈래.”
“…형이요? 괜히 또 진헌 형님 신경 건드리…….”
“안 그래!”
버럭 소리를 지른 석훈이 한숨을 내쉬곤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안 그럴 테니까, 같이 가.”
“뭐… 사과를 바라고 계실 수도 있으니까.”
석훈은 하준의 말에 왜 자신이 사과를 해야 하냐고 태클을 걸고 싶었으나 참았다. 이제는 화를 낼 기력도 없었을뿐더러 조금 숙이고 들어가면서 차라리 강진헌을 이용하는 게 이기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거의 호구 아니었는가. 혼자서도 잘 사는 새끼가 매일 먹을 걸 갖다 바치고. 어쩌면 그 요트에는 먹을 게 훨씬 많은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 분명히 먹을 게 많을 것이다. 생필품도 있을 것이고. 개새끼가 그걸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한다.
많이 갖고 있으면서 적선하듯 우리한테 나눠 주고 대장 놀이를 즐겼을지도 모르는 거다. 씨발 놈. 꼭 확인해 봐야지. 정말 그렇다면 그놈을…….
“그럼 저도 석훈 오빠랑 같이 갈래요.”
정연의 목소리가 상념을 흩뜨려 놓았다. 어둡게 내리깔리던 석훈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하준, 석훈, 정연. 세 사람은 강진헌의 요트로 향했고, 구명 뗏목에는 인우와 서주만 남았다. 인우는 며칠 그랬던 것처럼 같은 자세로 앉아 멍하게 시간을 죽였다. 서주는 혹시나 보일지도 모르는 배나 헬기를 기다리며 수평선을 보았다. 요트는 꽤 먼 곳에 있었으므로 그들이 돌아오려면 해 질 무렵은 되어야 할 것이다.
“진헌 형 못 데려오면 오늘은 아무것도 못 먹겠네요.”
인우가 무감각한 표정을 하고 중얼거렸다.
“과일 좀 구하러 가 볼까?”
“…아뇨. 어차피…….”
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서주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인우는 꼭 구조대가 오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그리고 이 섬에서 우리 모두 죽게 될 것처럼.
“인우야, 내가 먹을 것 좀 구해 올게!”
서주는 다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부산스럽게 움직이는데도 인우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서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문득 강진헌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 그가 보고 싶다. 자신조차 놀랄 만큼 많이.
그런 감정이 그녀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으로 가야 그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도저히 이유를 모를 직감이었다.
벌레와 뱀을 조심하며 지나는 나무마다 칼로 표식을 남겼다. 땀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질 때가 돼서는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혼자서 너무 멀리까지 들어온 것 같았다. 여기서 그녀가 죽는다면 아무도 그녀를 발견하지 못할 게 뻔했다. 갑자기 멧돼지라도 나타나면 어떡하지. 울고 싶은 기분이 되어 걸음을 조금 더 재촉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일까. 해가 아주 조금 기울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거의 정신을 놓고 풀숲을 헤치며 나무에 표식을 새겼다. 호흡은 점점 가빠졌고, 눈앞은 어질했다.
스윽. 칼끝이 나무를 긁었다. 어지러워 휘저은 손이 그 위를 덮었다. 까칠한 감촉이 느껴지고 멀어지자 언젠가 안겼던 단단한 품이 생각났다.
서주는 비틀거리며 몸을 돌렸다. 아찔하게 일그러지는 시야에 초록색 배경이 담겼다. 눈을 몇 번 깜박이자 시야가 조금 선명해졌다. 지겹도록 지나온 나무들이 아닌 푸른 강이었다.
전에 보았던 강과 달리 표면이 잔잔했다. 이쪽이 강의 하류인 것 같았다. 서주는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비쭉 튀어나온 돌부리를 보지 못해 그대로 몇 바퀴를 굴렀다. 경사를 따라 굴러 내려오던 서주는 풀을 움켜쥐고 겨우 멈췄다. 초록색 강물이 코앞이었다.
저 안에 식인 물고기가 산다는 말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다. 서주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무릎과 손목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강을 건너야 하나. 이대로 강으로 들어간다면 피 냄새를 맡은 무언가가 자신을 잡아먹지 않을까. 이젠 어떡하지.
멍하게 두리번거리던 서주의 눈이 돌연 빠르게 깜박였다. 강 위로 길게 늘어진 나무 아래, 무언가 보였다. 찰랑거리는 강물이 부딪히며 모습을 드러냈다 지웠다 하는 것.
“어……?”
다리였다. 단어를 떠올려 내고 서주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의심을 품은 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서주는 혼란스러워졌다.
수면과 거의 비슷한 높이에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다리가 맞았다. 평평한 돌바닥이 이곳에서부터 맞은편까지 쭉 이어지고 있었다.
“왜 이런 게…….”
서주는 강물로 젖어 짙은 색을 띠는 다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이곳이 무인도가 아니었던 걸까. 무인도가 아니라면, 누가 여기 살고 있는 거지? 어쩌면 아주 옛날에 사람이 살다가 떠나간 섬일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의 높이가 강물과 비슷한 거다.
서주는 찰랑거리는 강물을 내려다보다가 발을 내디뎠다. 혹시 초록색 물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와 발목을 콱 무는 게 아닐까 두려워 발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하지만 한 번 미끄러질 뻔한 이후로는 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그녀는 마침내 강을 건넜다. 뒤를 돌아보자 강의 반대편이 실제 거리보다 훨씬 멀어 보였다. 이 강을 건너 빽빽한 나무들을 지나야만 동료들이 있는 해안이 나오겠지. 저 먼 곳을 잠시 바라보던 서주는 등을 돌렸다.
좀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부지런히 걸었다. 다만 머리는 조금 맑아져 있었고, 심장은 그녀의 발걸음만큼 고동이 빨랐다.
강에서 점점 멀어지자 축축했던 나뭇잎들이 마른 것으로 바뀌었다. 습지라 뱀이 많다고 했었는데.
서주는 나무에 표식을 새기며 온 길을 흘긋 보고는 다시 걸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이 피곤하다며 소리를 쳤다.
뚝. 발바닥이 마른 나뭇가지를 밟았다. 머리 위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멀리……. 서주는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톡, 톡, 톡, 톡.
아주 희미하고 일정한 소리가 들렸다. 단단한 무언가를 두드리는 것 같은.
피곤해서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서주는 오감이 선명했다. 몸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도 각성된 것처럼 감각이 뚜렷하다.
동물일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서주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확인해 보고 싶었다. 몸을 숨기고 몰래 확인해 본 후 도망가면 그만이었다.
아주 작은 소리를 내었으므로 큰 동물도 아닐 테다. 소리는 잠깐 멎었다가 다시 반복되었다. 서주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갔다. 바로 지척이었다.
늘어진 나뭇잎 사이로 검은 형체가 보였다. 서주는 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미칠 듯이 쿵쾅거렸다. 생각보다 거대했다. 그녀쯤은 손쉽게 갈가리 찢을 수 있을 정도로…….
“…….”
쪼그려 앉아 고개를 살짝 내민 서주의 눈이 이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숲의 소음은 멎고 풀냄새는 옅어졌으며 바람 한 점 느껴지지 않았다. 선명했던 오감이 시각에 집중되었다.
강진헌. 그 사람이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들어온 한 줄기 햇살이 각이 뚜렷한 얼굴의 반쪽을 비추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내리깔린 그의 눈동자가 얼마나 새카만지, 서주는 알고 있다.
마치 처음 만난 그날 같았다. 나뭇잎 사이로 보인 검은 형체를 짐승이라고 생각해 얼어붙은 그녀를 새카만 눈동자가 응시하는 것. 변함없이 이 숲과 잘 어울리는 그를 보며 서주는 순간 호흡을 멈췄다.
그다음으로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달렸다.
온 힘을 다해, 빠르게.
오싹하고 서늘한 기분이 드는 것마저 그날과 비슷했다. 그러나 그 기분의 원인을 알게 되었을 때 서주는 우뚝 멈춰 섰다.
두 걸음 앞의 강진헌은 그녀의 등장에 놀란 듯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그 얼굴에서부터 서주의 시선이 조금씩 내려갔다. 각진 턱과 넓은 어깨, 가슴, 팔.
톡, 톡, 톡, 톡.
그녀를 이곳으로 이끌었던 소리가 들렸다. 길쭉한 손가락이 검은색의 매끈한 표면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가 걸터앉은, 산악 오토바이 말이다.
강진헌에게 항상 느꼈던 희미한 위화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서주의 동공이 혼란스럽게 떨렸다.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고 서주를 바라보던 남자가 스르르 미간을 폈다. 그리고 이내 웃었다.
서주는 그 순간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쳐야 해. 위험을 감지한 머리가 소리쳤다. 웃고 있는 그에게서 시선을 뗄 수조차 없었다. 등을 돌리면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 같아서.
그런데 왜 도망쳐야 하지?
오토바이쯤이야 요트에 실어 올 수 있는 거잖아. 이성적인 생각을 했으나 발은 또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때 남자가 그녀를 불렀다.
“서주야.”
다정한 목소리로.
“…….”
서주는 멈춰 서서 진헌을 응시했다. 잘 웃지 않는 그가 유난히도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이리 와.”
그의 손짓을 보고도 서주는 굳은 채 서 있었다. 하지만 남자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자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바스락. 마른 나뭇가지와 흙이 밟혔다.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강진헌의 얼굴이 느른하게 풀렸다. 그가 엉망이 된 서주의 모습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나 찾았어, 저번처럼?”
고개를 모로 기울인 그가 서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서주가 조금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눈이 번뜩였다.
“넘어졌나 보네.”
퍽 안타깝다는 듯이 말한 것과 달리 그의 입꼬리는 만족스럽게 휘어졌다.
더 가까이 와. 낮은 목소리가 꾸물거리는 서주를 재촉했다. 서주는 터질 듯이 쿵쾅거리는 제 심장 박동을 들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또 물도 안 마시고 헤매고 다녔나…….”
진헌이 슬쩍 흘린 말에 이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앞에 얌전하게 서 있는 조그만 여자를 보며 눈매를 휘었다.
“우선 물부터 마셔.”
“…감사합니다.”
서주는 진헌이 건넨 물병을 받아 들고 물을 마셨다. 보온 물병에 들어 있는 물은 참 시원했다.
이 물이 정말, 샘에서 떠 온 물이 맞을까.
“왜 자꾸 찾아다녀. 숨고 싶게.”
위로 치솟은 입술 사이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매는 줄곧 부드럽게 휜 채였다.
그녀와 달리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이 상황을 반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에 서주는 묘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그럼에도 그녀는 용기를 냈다.
“이 섬에 있었지.”
당연한 얘기를 내뱉은 그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사그라들었다. 서주의 심장이 큰 소리를 내며 뛰어 댔다. 이 섬이 무인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순 들었다.
“서주야.”
“…….”
“그 새끼들한테는 나 만났다고 말하지 마.”
“…왜요?”
머뭇거리다 물은 말에 진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는 어깨를 움츠렸으나 조금 더 용기를 냈다.
“왜 이런 곳에 계시는 거예요? 강 건너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으면서……. 오토바이는 또 뭐고…….”
강진헌은 혼란스러운 말을 흘려 내는 서주를 빤히 보았다. 그의 눈이 점점 싸늘하게 식어 가는 걸 보면 그가 하준이나 김석훈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에게 심한 짓을 할지도 몰랐다.
“아, 이걸 어쩌지…….”
제게 무슨 짓을 할지 고민하는 낮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눈썹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긴 듯하던 그가 얕은 한숨을 내쉬며 오토바이의 반대쪽 몸통으로 손을 뻗었다. 철컥, 쇳덩이가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나고, 이내 서주의 가슴에 딱딱한 것이 닿았다.
서주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아…….”
그녀의 심장 위를 정확히 겨냥하고 있는 것은 짐승을 잡을 때 쓰는 엽총이었다. 이로써 강진헌이 더욱 수상해졌고, 두려워졌다.
“서주야.”
차가운 총구가 빛을 반사하며 싸늘하게 빛났다. 강진헌은 총을 비틀어 그 모습을 감상하고는 조금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런 것 없어도, 내가 그러라면 넌 그렇게 해야지. 잘하면서 왜 그래. 응?”
“…히익, 으…….”
창백하게 질린 서주가 신음 같은 소리를 흘렸다.
“귀찮게 하지 마.”
귀찮게 하지 말라고. 사람들이 그의 수상함에 대해 알게 되는 걸 말하는 걸까. 아니면 그녀를 살해하는 것을 말하는 걸까.
호흡이 가빠져 서주의 가슴팍이 크게 부풀었다. 그러나 엽총의 주둥이에 닿자 화들짝 놀라 뒤로 몸을 물렸고, 중심을 잃어 뒤로 넘어졌다. 강진헌은 그런 서주에게 서늘한 시선을 던졌다.
서주는 제게 총을 겨누고 있는 강진헌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와 아주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속이 좋지 않아졌다. 먹은 것도 없는데 전부 토해 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져 서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뜨자 강진헌의 인영이 두 개로 보이다 하나로 겹쳐졌다. 총은 여전히 그녀를 겨누고 있었다. 서주는 눈을 부릅뜨고 숨을 헐떡였다.
“쯧.”
강진헌은 곧 기절할 것처럼 창백한 서주의 얼굴을 보며 혀를 찼다. 철컥, 하는 작은 소음과 함께 그가 총을 내려놓았다.
“말 들을 거지?”
남자가 조용히 물었다. 서주는 꽉 막힌 가슴속에서부터 겨우겨우 호흡을 내뱉느라 정신이 없었다. 뻐근한 가슴팍이 꼭 터질 것 같았다.
주저앉은 채로 얼어붙은 서주를 보며 진헌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툭, 서주의 발끝을 발로 건드렸다.
“서주야, 대답.”
“…흐으, 네…….”
냉랭한 말에 서주가 겨우 대답을 내뱉었다.
그러자 그가 서주를 일으켜 주었다. 휘청거리며 잘 서지 못하자 그가 앉아 있던 곳에 서주를 앉혔다. 발끝이 바닥에 닿지 않아 또 휘청이는 바람에 그가 등을 잡아 주어야 했다.
진헌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이서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단지 무서워서 그런 거라기엔 서주의 얼굴이 수척했다. 며칠 사이 볼이 홀쭉해진 것 같았다.
“굶었어? 구난 식량인가 뭔가 있잖아.”
“갑자기 없어져서…….”
서주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헌은 뭔가를 생각하다가 질린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허리를 굽혔다. 그대로 서주와 눈을 맞추고 조용히 물었다.
“나 따라올래?”
“…….”
“그럼 넌 내가 하는 말이면 다 듣는 거야.”
조금 탁하게 느껴지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서주는 생각했다. 지금까지도, 그가 하는 말을 다 하지 않았던가.
“…섬 밖으로요?”
“아니.”
강진헌이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꼭 원해서 이곳에 머무르는 것처럼 보였다. 서주는 돌아가야 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로, 살던 곳으로.
그러려면 그와 엮여선 안 된다. 본능적인 판단이었다.
“영 멍청한 건 아닌가 봐.”
픽, 웃은 그가 서주의 허리를 붙잡고 내렸다. 서주는 아까보다는 멀쩡히 제 몸을 가눌 수 있었다. 긴장한 채 그를 살피는 서주를 두고 진헌은 오토바이의 안장을 열었다.
그가 꺼낸 것은 단백질 바였다. 이로써 그가 조금 더 수상해졌다. 그는 사회와 단절된 이 섬에서 전혀 결핍이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옷도 항상 멀끔했다. 비슷한 운동복을 입어 눈에 띄진 않았으나 옷이 자주 바뀌는 것도 같았다. 향기를 맡은 적도 있었다.
서주는 순간 강을 잇던 다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강에 식인 물고기가 산다고 말할 때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끔 그녀에게 보이던, 그 장난스러운 표정.
“생각은 나중에 하고. 해 지기 전에 돌아가.”
그녀의 관자놀이를 툭 건드린 진헌이 그녀가 입은 티셔츠를 들쳤다. 서주가 뒤늦게 놀라 몸을 굳혔으나 그는 바지 주머니에 단백질 바를 밀어 넣고 금방 손을 거뒀다.
“그 새끼들한테 주지 말고 혼자 먹어.”
“네…….”
서주가 멍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내뱉었다.
“언제 오세요?”
“되게 보고 싶었던 것처럼 말하네.”
“보고 싶었…….”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자 진헌이 눈살을 찌푸리고 웃었다.
“아, 사람 돌게 하네, 이게.”
서주를 내려다보는 진헌의 눈동자가 음산하게 빛났다. 순간 겁에 질린 서주가 뒤로 돌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마다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몇 걸음을 걷다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강진헌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몇 걸음쯤은 되는 거리인데, 그가 손만 뻗어도 그녀를 낚아챌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주가 걸음을 옮기지 않고 멍하게 서 있자 진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씨발, 서주야, 이대로 끌고 가고 싶게 쳐다보지 말고, 가라면 좀 가.”
“아…….”
“경고가 부족했어?”
그가 엽총을 다시 쥐었다. 그대로 서주에게 겨누자 서주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철컥. 장전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고, 서주가 도망치듯 달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거칠게 울려 대는 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 뒤로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숲을 지났는지 모른다. 서주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강을 건넌 뒤였다. 그녀는 젖은 바짓단을 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숲만 무성했다.
강진헌……. 총, 오토바이, 향기, 목소리. 뒤엉킨 것들이 서주의 머릿속을 온통 흐리게 만들었다.
‘넌 내가 하는 말이면 다 듣는 거야.’
어둡게 빛나던 눈빛이 떠오르자 서주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총. 그는 총을 가지고 있다. 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다. 오토바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강에 식인 물고기가 산다고 했던 것도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았다. 강 너머에 뭐가 있길래.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일단 그가 아주 위험한 사람이란 건 분명했다. 빨리 가서 사람들한테 알려 줘야 한다.
오는 길마다 나무에 새긴 표식을 보며 달리던 서주는 이내 익숙한 곳에 도착했다. 샘이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부터는 해안과 그리 멀지 않았고 늘 오던 곳이었으므로 긴장이 조금 풀어졌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쉬며 서주는 흘깃 뒤를 보았다. 강진헌이 금방이라도 총을 들고 쫓아올 것 같았다. 총을 들고 와 사람들을 전부 죽일 것만 같았다.
김석훈을 때릴 때 보았던 그의 눈빛을 떠올려 보면 그것이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니게 느껴졌다. 서주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다시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긴장이 조금 풀어졌기 때문일까. 바닥에서 둥글게 솟은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몸이 그대로 옆으로 넘어갔다.
“아아악!”
그냥 넘어진 것이 아니라 뿌리에 발이 끼인 채 넘어진 탓에 발목이 그대로 꺾였다. 끔찍한 고통이었다. 서주는 눈물이 핑 돌아 종아리를 부여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으흑, 으으…….”
발목 쪽은 만지지도 못하고 웅크리고 있던 서주는 해가 질 무렵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절뚝거리며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뺨이 눈물로 척척하게 젖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훗날 서주는 종종 생각했다. 그때 그녀가 발목을 다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어떤 일이 일어나고, 또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