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디 아일랜드-3화 (3/12)

#3.

조난 20일째.

물은 아직 며칠분이 남았고, 식량은 강진헌이 가져다줬다. 비스킷도 제법 남아 있다.

두려움은 짙어졌다. 짐승 울음소리가 들리는 밤에, 누군가를 묻은 나무 아래를 지날 때, 동료의 얼굴에 눈물 흔적이 있을 때,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 때.

배, 헬기, 비행기. 그중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 섬을 탈출할 수는 있는 걸까. 누군가 우리를 데리러 오긴 할까.

공포는 무기력함으로 이어졌다. 선선한 오전을 제외하면 일행은 대부분의 시간을 구명 뗏목에서 보냈다.

‘처음부터 여기 있었어야 돼. 배가 지나갔었을지도 몰라.’

‘그럴지도…….’

‘그러니까 제가 여기 있자고 했잖아요, 석훈 형.’

좁은 공간에서 작은 다툼이 일어날 때도 있었다.

‘미안하다, 하준아.’

‘아니 뭐, 말이 그렇단 거죠.’

그러나 대체로 김석훈이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였고 다툼은 커지지 않았다. 대신 침묵은 오래 흘렀다.

오늘도 일행은 구명 뗏목 안에서 저마다 쉬고 있었다. 서주는 목이 말라서 샘에 갔다 올까 고민 중이었다.

일행은 여전히 샘물을 마시지 않지만 서주는 이따금 한 모금씩 마셨다. 첫날 많이 마셨는데도 아무 탈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무리를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같은 걸 먹어도, 같은 곳에서 잠을 자도 누군가는 죽는다. 무리에게 뼛속 깊이 새겨진 사실이었다.

저벅저벅.

모래를 밟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 힘없이 늘어져 있던 팔다리들이 힘을 얻었다.

“어, 형님! 어서 오세요.”

하준이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나갔다.

“오늘은 뭐예요? 아, 또 생선이네.”

문어가 맛있었는데. 양동이 안을 살피며 하준이 버릇처럼 투덜거렸다. 이에 강진헌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누군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양동이를 하준의 머리 위로 쏟아부었다.

촤르륵, 바닷물이 먼저 쏟아지고 아직 살아 있는 물고기 몇 마리가 하준의 뺨과 어깨에 부딪히며 미끄러졌다. 까칠한 비늘의 감촉에 정신을 차린 하준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발치에서 펄떡거리는 물고기를 보고 또 비명을 지르자 강진헌이 시끄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식 밖의 행동이라 모두 굳어 버렸다. 하준 또한 많이 놀랐는지 어깨를 움츠린 채 아무 말도 못 했다.

쫄딱 젖은 꼴로 턱에서 물을 뚝뚝 흘리는 하준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진헌이 손을 들었다. 하준은 지레 겁먹고 눈을 질끈 감았지만 커다란 손은 젖은 뺨을 툭, 툭 성의 없이 두드리기만 했다.

“반찬 투정하면 안 된다고 엄마가 안 가르쳐 줬어?”

무심한 목소리의 온도는 낮았다.

점차 상황 파악을 마친 하준의 입매가 살짝 굳었다. 그러나 커다란 손이 툭, 그 옆을 건드리고 멀어짐과 동시에 가엾게 떨리기만 했다.

“크흠, 흠. 강진헌 씨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김석훈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소리를 높였다. 힐긋, 강진헌의 시선이 닿자 움찔 멈춰 섰다가 다시 걸었다. 그는 여기까지만 하준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자신도 강진헌에게 화가 날 때가 많지만 버릇없는 스무 살짜리는 그걸 감추지 못할 것이고, 괜히 강진헌의 심기를 거슬렀다간 그들의 손해니까.

“죄송합니다, 형.”

그런데 박하준이 순순히 사과를 했다. 오늘 오전에도 석훈에게는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며 대들었으면서.

“제가 반찬 투정한 게 아니라요…….”

쩔쩔매는 하준의 얼굴을 보며 석훈의 입술이 미세하게 비뚤어졌다.

“그렇대요. 강진헌 씨도 화 푸세요.”

애써 끌어 올린 석훈의 입꼬리가 조금 떨렸다. 강진헌은 제 발치에 닿은 생선을 가볍게 건드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화 안 났는데?”

“…….”

강진헌은 말문이 막혀 괴상한 표정을 하고 있는 석훈을 보고 피식 웃었다. 계속 사과를 하는 하준에게는 알겠으니까 닥치라고 시큰둥하게 말하곤 돌아섰다.

속 편하게 경치 감상을 하는 강진헌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시선을 교환했다. 짐작은 했지만,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이거 씻어야 할 것 같은데…….”

석훈이 상황을 정리하며 말했다.

“형, 저는 좀 씻고 올게요.”

“제가 할게요.”

하준이 기운 없이 말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서주가 정리를 자처했다. 서주가 가까이 다가가자 석훈이 옆으로 비켜섰다. 서 있는 석훈 앞에 쪼그리고 앉은 서주가 양동이에 생선 몇 마리를 주워 담았다.

강진헌은 조금 멀찍이 서서 그들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침 태양치고 밝은 햇빛이 그의 미간에 부서졌다.

이서주는 생선에 묻은 흙을 바닷물로 씻고 바닷물을 한가득 퍼 담은 양동이에 다시 넣었다. 그러고 양동이를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서주 씨, 그거 손질해야 할 것 같아요.”

“아, 네!”

“언니, 좀 도와 드릴까요?”

“아니야. 만진 김에 내가 할게.”

서주를 보는 진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멍청한 게 누가 뭘 시켜도 다 하겠지. 그런 평가를 내린 순간 진헌은 이상하게도 배알이 꼴렸다. 그래서 생각했다.

이서주 혼자 이 섬에 들어왔었더라면 어땠을까.

진헌이 음험한 생각에 빠진 동안 서주는 나뭇잎 몇 장을 펼치고 그 위로 생선을 옮겼다. 짧은 나이프로 비늘을 긁어내고 배를 가르는 것이 능숙했다. 생선 손질을 도맡아 한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땡볕에서 생선 손질을 하느라 서주의 뒷목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야무지게 칼을 움켜쥔 작은 손을 보고 있던 시선이 그쪽으로 옮겨 갔다. 목뼈가 툭툭 튀어나온 가느다란 목덜미. 시선은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

***

무슨 일인지 강진헌은 나흘간 우리를 찾아오지 않았다.

첫째 날에는 저녁까지 그를 기다리며 그가 전에 갖다 준 생선과 과일을 먹었고, 둘째 날에는 비스킷을 먹었다. 셋째 날부터는 불안을 표하기 시작했다.

“강진헌 씨 오늘도 안 오실 건가 봐요.”

“그러게요. 벌써 3일째예요.”

서주는 강진헌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위험하다는 것이 어쩐지 믿기지 않았지만.

그때 인우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아, 배고픈데…….”

서주는 눈을 깜박였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이 선명히 보였다. 불안, 짜증, 굶주림, 두려움……. 오직 그것뿐이었다.

서주는 몇 주를 같이 지낸 사람들이 어딘가 변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혹시 너 때문에 기분 나빠서 안 오시는 거 아냐?”

정연이 불쑥 꺼낸 말에 하준이 눈을 크게 떴다.

“아냐! 내가 그 뒤로 얼마나 눈치를 봤는데. 근데… 누나 말이 좀 그렇다?”

“내가 뭐?”

“왜 내 탓을 해. 누나는 뭐 잘했어?”

언성이 높아졌다. 서주는 생각에 잠겼고, 인우는 관심 없는 듯 비스킷을 손에서 부수고 있었다.

“자자, 그만들 해. 하준이 넌 정연이가 그냥 한 얘긴데 왜 그래.”

정연과 하준을 말린 사람은 김석훈이었다. 그러나 평소라면 금방 수그러들었을 다툼이 조금 더 이어졌다.

“아아, 커플 납셨네.”

“박하준.”

석훈이 목소리를 깔고 그를 무섭게 불렀으나 하준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불쑥 텐트를 벗어났다.

“열 살 차이 나는 여자애랑 그러고 싶을까.”

빈정거림을 툭 던져두고서.

싸한 침묵이 흘렀다. 김석훈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차정연의 눈치를 살폈다. 서주도 놀라 둘을 살피다가 행여 눈이 마주칠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실 김석훈이 차정연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서주뿐이었다. 모르는 사실이 또 있다면, 강진헌의 등장 전까지는 그가 서주에게 은근한 호감을 표현했다는 것이었다.

“바람 쐬고 올게요.”

서주는 어색함이 가득 찬 공간에서 벗어났다. 저녁 공기가 싸늘해 팔을 문지르며 두리번거렸다. 하준이 먼발치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서주가 그의 곁으로 가서 앉자마자 인우도 밖으로 나왔다. 인우 역시 도망쳐 나온 듯했다.

세 사람은 바다를 향해 나란히 앉았다. 수평선 너머는 불그스름했고 엉덩이에 닿는 모래는 서늘했다.

“내일은 과일이라도 좀 따러 들어가 볼까?”

서주가 눈치를 보다 물은 말에 하준과 인우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서주는 분위기를 살려 보려는 노력을 관뒀다.

그대로 앉아 먼 바다를 응시했다. 반경 몇 킬로까지 사람이 없을까. 저 수평선 너머에는 누군가 있지 않을까.

바다를 오래 보고 있자면 항상 의문 하나가 떠오른다.

‘우리가 정말 돌아갈 수 있을까?’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그 문장은 속에 남아 유영했다.

***

다음 날 아침, 서주는 강진헌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은 비스킷밖에 먹지 않아 힘이 없는지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깨우지 않고 조용히 바깥으로 나왔다.

요트에서 지낸다고 했었지. 텅 빈 해안가를 걷는 서주의 그림자가 뒤로 길게 늘어졌다.

모래 위를 저벅저벅 걸으며 그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를 가늠해 보았다. 그러다 문득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곳에 홀로 간다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하준이라도 깨워 볼 걸 그랬을까.

그러고 보니 이 무인도에 함께 고립된 사람이 지내는 곳에 가 본 적 없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혹시 강진헌이 요트에 있다면, 그녀를 보고 뭐라고 할까. 초대하지 않은 손님을 반길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닌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길었던 그림자가 아주 짧아졌을 때쯤 서주는 요트 한 척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검은빛을 띠는 바위 뒤쪽에 정박한 요트는 자그마했다. 두세 사람이 타기에 쾌적할 것 같았다. 서주는 잠깐 요트의 선체를 보다가 바위 위로 발을 디뎠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밟고 요트 가까이로 향한 서주가 입을 열었다.

“강진헌 씨.”

목이 말라 목소리가 조금 갈라져 나왔다. 헛기침을 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강진헌 씨, 계세요?”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서주는 망설이다가 요트 위로 올라섰다. 얕게 출렁이는 파도에 선체가 흔들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탈출하던 당시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가 흩어졌다.

심호흡 후 몇 번 더 진헌을 부르던 그녀는 결국 선실로 들어가는 문을 당겼다. 의외로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하긴, 이 무인도에서 굳이 문단속할 필요가 있을까.

열린 문을 앞에 두고 서주는 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볼 수 있는 곳은 계단과 그 앞의 공간이 전부였다.

“강진헌 씨? 저 들어갈게요.”

서주는 어둑한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천장의 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계단을 비췄다.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을 때마다 먼지 입자가 피어올랐다.

계단을 전부 내려온 서주는 빛이 만든 도형 안에 서서 선실을 쭉 둘러보았다. 아늑한 공간이었다. 벽에 붙어 있는 침대와 작은 주방, 소파.

그러나 그녀가 찾는 사람은 없었다.

“어어.”

돌아서려던 때에 배가 살짝 출렁여서 서주는 손을 뻗었다. 작은 테이블이 손에 잡혔다. 중심을 잡고 나서야 테이블을 놓은 그녀는 문득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회색 먼지가 손가락 마디마다 묻어 있었다.

손바닥을 털며 서주는 다시 선실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침대는 시트나 이불 없이 맨몸을 드러낸 상태였고, 주방에 있는 집기들은 제자리에 걸려 있었으며 바닥에는 서주의 발자국뿐이었다.

“강진헌 씨?”

서주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 기묘한 기분을 떨쳐 버리려면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찬장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엔 뭐가 들어 있을까. 무심코 향하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남의 공간에 멋대로 들어온 것만으로도 벌써 큰 실례를 끼쳤다. 강진헌이 아파서 대답을 못 할지도 모른다는 가정도 깨어졌으니 그녀는 이만 이곳을 떠나는 것이 맞았다.

서주는 그대로 뒤돌아 계단을 올랐다. 시야에 푸른 바다가 담기기 직전 서주는 고개를 돌려 잠깐 불 꺼진 내부를 바라보았다.

바깥으로 완전히 나오자 바람이 살랑 불었다. 습기를 머금은 더운 바람이었다. 관자놀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그녀는 생각했다.

요트에 있는 게 아니라면 어디에 있을까. 혹시 숲에서 무슨 일을 당한 거라면 훨씬 더 나쁜데. 숲으로 가 볼까.

잠깐 고민됐으나 우선은 돌아가기로 했다. 그녀 혼자 숲을 전부 찾아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해가 조금 기울었다. 서주는 입을 벌리고 색색거렸다. 목이 말랐다. 아침, 점심까지 물을 먹지 않았으니 두 모금을 마실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멀리 구명 뗏목과 그 앞에 선 몇몇 사람이 보일 때쯤에는 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그리고 그중 그녀가 오전 내내 찾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발이 바쁘게 모랫바닥을 밀어냈다.

서주가 달려오자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주 씨, 어디 갔다 와요? 씻으러 간 줄 알았더니.”

김석훈의 말에는 어디 갔다 왔는데 그 꼴이냐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빨개진 얼굴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서주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강진헌의 앞에서 멈춰 섰다. 마른 입술 사이로 가쁜 호흡이 색색 흩어져 나왔다.

“괜찮으세요?”

그녀는 헐떡이며 물었다. 강진헌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서주는 그제야 그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아팠던 흔적 없이 단단했다.

“아… 혹시 무슨 일 있나 해서요…….”

진헌을 올려다보는 서주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진헌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여졌다.

“그래서?”

“그래서 요트에 갔다 왔어요. 아, 안 계시길래 바로 나왔어요.”

혹여 기분 나빠 할까 봐 말을 덧붙였음에도 빤히 보는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화를 내려나. 서주는 얼굴을 살짝 일그러뜨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멋대로 들어가서 미안하다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진헌이 짧게 중얼거리는 것이 더 빨랐다.

“…물도 없이.”

무단침입에 기분이 나쁜 건 아닌가 보다. 서주는 한숨을 내쉬며 어설프게 웃었다.

“아니, 왜 서주 씨 혼자 다녀와요.”

“그러게요. 누나 저한테 말씀하시지.”

석훈과 하준이 진헌의 눈치를 살피며 헛기침을 했다. 자기들도 진헌이 걱정되었다는 둥 안 그래도 가 보려 했다는 둥, 하는 말에 이서주는 ‘아, 죄송해요…….’ 하고 되레 사과했다.

강진헌은 혀를 찼다. 그는 땀으로 젖은 서주의 이마를 흘긋 보고는 제 배낭에서 물병을 꺼냈다.

“깨끗한 물이야.”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한 서주가 물병을 받아 딱 한 모금을 마셨다. 물이 조금 시원해서 더 아쉽게 느껴졌다. 샘물인가. 입맛을 다시며 물병을 든 손을 내리는데 큰 손이 손목을 가볍게 밀었다.

“다 마셔.”

“…네.”

서주의 목울대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목 안쪽이 적셔지는 감각을 음미했다.

물병을 전부 비우고 나자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강진헌은 멀뚱히 선 그녀에게서 물병을 가져가며 말을 걸었다.

“씻을 거지?”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서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얘 데리고 갔다 올 테니까 저녁 준비해 놔.”

진헌의 시선이 석훈에게 닿았다. 석훈은 잠깐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서주는 바닥에 놓인 생선 몇 개와 과일을 흘금 보았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형님.”

하준이 꾸벅 인사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싹싹한 태도였는데,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하준에게 심한 짓을 했는데도 모두 없던 일처럼 군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심지어 그를 찾아 오늘 내내 헤매기도 했다. 이상하네.

아니지, 그게 뭐 이상한가. 강진헌이 없으면 다 죽을 텐데. 사람들은 그에게 친절해야지. 그는 좀 제멋대로 굴 수도 있지.

“다녀오세요.”

그들은 오랜만에 분주하게 움직였다. 꺼진 불씨를 살려 모닥불을 피우고 나뭇잎 위로 생선을 쏟아부었다. 미끌거리는 생선을 보고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뒤로한 채 진헌과 서주는 숲으로 들어갔다.

샘까지 걸어 들어가는 동안 대화는 없었다. 더위에 지친 서주는 어딘가 몽롱했고 진헌은 생각에 잠긴 듯 이따금 서주를 바라보았다.

샘에 도착하자 강진헌은 멀찍이 등을 돌리고 앉았다. 다 씻고 부르라는 말에 서주는 조금 망설이다가 티셔츠와 바지를 벗었다. 묶었던 머리를 풀고 속옷 바람으로 샘에 들어갔다.

차가운 기운이 화끈거리는 피부를 감쌌다.

“하아…….”

나른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목 아래까지 잠기도록 깊이 들어간 서주는 몇 번 세수를 했다. 머리도 시원하게 감고, 몸도 깨끗이 씻었다. 비누나 샴푸가 없어도 충분히 상쾌했다. 물론 땀에 젖은 옷을 그대로 입어야 하는 게 좀 아쉬웠지만.

머리를 꾹꾹 짜서 대강 털고 옷을 입은 서주가 진헌에게로 다가갔다.

“다 씻었어?”

“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물기가 묻은 얼굴이 말갛다. 진헌은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그을린 뺨을 보다가 젖은 머리에 시선을 줬다. 축축한 티셔츠도 눈에 담았다.

“음…….”

턱을 매만지며 잠깐 생각하던 진헌이 등을 돌렸다. 서주는 그의 곁으로 바짝 붙어 걸었다. 온몸에 나른하게 힘이 풀렸다. 어서 저녁을 먹고 좀 자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까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홀쭉한 배를 만지작거리는 서주를 물끄러미 보던 진헌이 걸음을 멈췄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나무 하나에 손쉽게 올랐다. 순식간에 저 위로 올라간 그의 손이 열매 다발에 닿았다. 툭, 떨어진 그것을 보며 서주는 멀뚱히 눈을 깜박였다.

강진헌은 여유롭게 내려와 땅에 떨어진 열매 다발에서 가장 모양이 고르고 잘 익은 것을 하나 땄다. 나뭇가지를 통째로 꺾었기에 열매 몇 개가 붙어 있었지만 나머지는 건드리지 않았다.

저건 안 가져갈 건가. 가져가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텐데.

‘아, 이런 거 말고 라면 먹고 싶다.’

‘또 생선이에요?’

…좋아하나?

서주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졸리다. 자꾸 생각이 둔해지는 걸 보면 더위를 먹은 것일지도 몰랐다.

“먹어.”

손에 쥐여 준 과일을 서주가 입으로 가져갔다. 턱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입술에 과즙이 스며들었다. 열심히 먹는 서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서주의 머리에 툭, 손을 올렸다. 작은 머리가 전부 가려졌다.

“너 저 새끼들 말도 잘 듣지.”

“…네?”

서주는 그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눈을 깜박이다가 진헌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묘하게 가라앉은 낯을 하고 있었다.

그녀가 바보 같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걸까. 서주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눈치를 살피느라 바쁜 눈망울을 보며 남자가 픽 웃었다. 그의 얼굴에 은근한 심술이 떠올랐다.

“싫어요, 해 봐.”

서주가 멍하게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싫어요…….”

“그래. 저 새끼들한테 그렇게 해 봐.”

“…….”

정말 이상한 말이다. 게다가 그는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묘한 오기가 들어 서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헌이 머리를 덮은 손을 거뒀다. 커다란 손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서주는 그의 손이 무척 무거웠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손을 얹었을 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주는 진헌을 흘금 올려다보았다. 눈동자만 굴려서 몰래 보려니 고작 그의 턱 언저리만 보였다. 그가 그러는 것처럼 그녀도 그를 빤히 쳐다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숲을 막 벗어나자 생선 굽는 냄새가 솔솔 났다. 그 냄새를 맡자 배가 꼬르륵 소리를 내며 난동을 부렸다. 역시 과일 하나로는 배가 안 찬다.

“왜요?”

알게 모르게 걸음이 빨라지던 서주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진헌은 말간 얼굴을 보며 입술을 휘었다. 그가 나긋하게 물었다.

“음식, 어떤 거 좋아해?”

“음… 라면?”

요즘 가장 먹고 싶은 것이었다. 강진헌은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핥는 서주를 보며 말했다.

“라면 앞에 두곤 무슨 표정 지을지 궁금하네.”

서주는 제 표정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싶어 괜히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이 섬에서는 배가 고픈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처음에야 다른 사람의 꼬르륵 소리를 듣고 딴청을 부렸지, 지금은 별로 신경도 안 썼다.

그런데 강진헌이 배고프다고 하는 건 못 들어 본 것 같았다. 그는 심지어 우리와 함께 있을 때 잘 먹지조차 않았다. 어떻게 이런 몸을 유지하는 거지.

서주는 제 허벅지만 한 그의 팔뚝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하긴, 그야 열매를 따는 것도 물고기를 잡는 것도 쉬우니 혼자 있으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도 먹겠다.”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서주는 자신이 두툼한 그의 가슴과 팔, 넓은 어깨를 훑어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황스러워서 빠르게 눈을 깜박이자 남자가 기분 좋게 웃었다.

남은 웃음을 마저 흘린 진헌이 서주의 뺨을 손가락 등으로 툭 건드렸다. 그리고 먼저 일행에게 걸어갔다. 서주는 잠깐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뒤쫓아 갔다.

서주가 모닥불 주변에 털썩 앉자 하준이 먹을 것을 챙겨 주었다. 모두 배가 고팠었는지 대화는 없었다.

제 몫을 다 먹은 서주는 이번에도 진헌이 별로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일까. 뭘 먼저 먹고 온 걸까.

오늘의 서주는 뇌가 굼떴다. 살갗 아래에서는 여전히 열이 나는 것 같았고 머리는 이따금 지끈거렸다. 눈꺼풀은 무거웠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석훈이 입 주변을 닦으며 말했다.

“서주 씨, 저희가 준비했으니까 뒷정리 좀 부탁드릴게요.”

다른 사람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지 다들 움직일 기색 없이 늘어지게 앉아 있었다. 서주는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싫어요.”

크지 않은 목소리였으나 모두가 들었다. 순간 침묵이 흐르고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만 들렸다.

빨간 불길에서 시선을 거둔 서주가 당황한 얼굴의 석훈을 보았다. 그녀의 고개는 천천히 돌아갔다. 하준, 정연, 인우……. 모두 놀라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시야에 강진헌이 담겼다. 그는 무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주는 그를 빤히 보았다.

‘봐요. 제가 싫다고 말했어요.’

하고 속으로 말하면서.

턱을 미세하게 치켜든 서주의 얼굴을 보던 진헌의 입술이 슬며시 벌어졌다. 실소가 비집고 나온 탓이다.

흐음. 무릎에 팔꿈치를 댄 그가 턱을 괬다. 불을 반사하는 눈동자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며 그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서주 씨, 어디 아파요?”

“아니요.”

석훈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서주의 눈길은 진헌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미소가 조금 더 진해졌다.

“아, 누나 너무한다. 나 아까 생선 만지다가 손가락 까졌단 말이에요.”

하준이 징징거렸다. 인우도 누나 은근히 뻔뻔한 면이 있다며 말을 보탰다. 장난기를 섞었으나 어이없다는 투였다.

“아픈 거 아니면 서주 씨가 좀 해 주세요.”

마지막으로 김석훈이 쐐기를 박았다. 서주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싫다고는 말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려 진헌을 보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순진한 눈빛에 남자는 짧은 숨을 터뜨렸다. 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가시게요?”

하준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진헌이 서주 옆을 지나며 낮게 속삭였다.

“넌 많이 했다고 해.”

서주는 알았다. 아까 숲에서 싫다고 말해 보라고 한 말이 심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이것은 기대였다. 그가 제게, 기대를 하고 있었다. 가슴 아래쪽에서 화끈거리는 감각을 인지하기도 전에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저는 많이 했잖아요.”

더위를 먹었다는 핑계를 댈까. 남자가 시킨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는 꼴이라니. 정말 제정신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어쩌면, 자신은 계속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뭐든 억지로 한 적은 없는데.

그럼 목구멍부터 가슴까지 퍼져 나가는 이 시원한 감각의 이유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당황한 듯이 그녀를 보던 사람들이 결국 일어섰다. 하준이 “그렇게 안 봤는데 누나 성질 있다.” 하고 투덜거리듯 말하긴 했으나 그들도 서주가 도맡아 일한 걸 모르지 않았기에 화를 내지는 못했다.

서주는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강진헌은 벌써 저 멀리 가 있었다.

‘상 줘야겠네.’

그러나 웃음기가 스민 목소리를 서주는 분명히 들었다.

***

다음 날 아침에는 강진헌이 찾아왔다. 서주를 제외한 무리는 알게 모르게 안도했다. 진헌이 전처럼 매일 와 주지 않는다면 굶주려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도 생선을 잡고 나무를 타서 열매를 딸 수 있다. 하지만 강진헌만큼 잘할 자신은 없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바엔 가만히 앉아서 체력을 비축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아직 비스킷도 조금 남았고 물도 남아 있다. 한 달이 다 되어 가므로 곧 구출이 될지도 모르는데 위험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서주는?”

순수한 반가움과 약간의 가식이 섞인 인사에 답도 않고 강진헌이 물었다.

“누나 아마 샘에 갔을걸요?”

하준이 말했다. 진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금 비켜섰다. 그의 손에는 평소와 달리 스포츠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건 뭐예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정연이 물었으나 진헌은 그대로 그녀를 지나쳤다. 정연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가 숲으로 들어간 후 석훈이 말했다.

“강진헌 씨는…….”

많은 말이 함축되어 있었으나 알아듣기는 쉬웠다.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괜히 웃었다.

“원래 저런 성격인 것 같아요.”

인우가 말을 내뱉었고 정연과 하준도 수긍했다. 석훈 혼자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무슨 일 했을지 궁금하긴 하다.”

“음, 군인?”

하준의 말에 인우가 턱을 긁으며 말했다. 하준은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듯 턱을 긁적였다.

“존나 어울리긴 한데… 안 어울려.”

“아하하, 맞아. 어울리는데 안 어울려.”

정연이 동의했다. 인우도 저런 식이면 영창 간다며 키득거렸다. 그 후에도 사업가나 탐험가, 운동선수, 조폭 등등의 추리가 나왔다.

그들이 강진헌의 직업을 추리하는 동안 강진헌은 이서주를 찾았다. 샘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세수를 하는 뒷모습이었다. 진헌은 동그랗게 말린 작은 등이 살짝만 걷어차도 멀리 날아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서주는 얼굴을 꼼꼼히 씻고 팔과 목덜미에도 물을 적셨다. 개운했다. 빨래도 해 버릴까. 서주는 제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았다. 어제 땀을 많이 흘려서 찝찝했다.

빨래를 해도 대충 말리고 다시 입어야 한다는 찝찝함이 있지만 그 정도는 햇볕에 나가면 금방 말랐다. 서주는 망을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동시에 시야가 까맣게 가려졌다.

비명을 지르며 몸이 뒤로 휘청 넘어갔다. 물에 빠지려던 몸을 커다란 손이 단단히 붙잡았다.

“놀랐어?”

낮은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얼굴을 덮은 무언가가 스르르 떨어졌다.

“아…….”

되찾은 시야에서 강진헌이 웃고 있었다. 뭐가 재밌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그가 턱짓했다. 서주는 제 어깨에 걸쳐진 무언가를 내려다봤다.

옷이었다.

“갈아입어.”

“주시는 거예요?”

“주시는 거예요.”

그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서주의 말을 따라 했다. 서주는 눈을 깜박이다가 그의 티셔츠를 내려다보았다.

“이것도.”

강진헌이 그녀의 앞에 가방을 툭 내려놓았다. 열린 지퍼 틈으로 옷과 수건이 보였다. 서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면 진헌 씨는요?”

그녀의 말에 진헌이 웃었다.

“없을 것 같아?”

“아뇨.”

서주는 널찍한 요트를 떠올렸다. 여행 중 조난된 거라면 옷가지도 여러 개가 있을 테다.

“감사합니다.”

인사하느라 보인 동그란 정수리를 보던 남자가 무릎을 굽혀 앉았다. 고개를 기울이고 서주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잡소리도 안 하고, 말도 잘 듣고. 서브미시브 성향이 있나…….”

“서브……?”

모르는 단어라 서주가 되묻자 진헌이 턱짓하며 “뭐 해, 안 갈아입고.”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일어서자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거대한 기둥 같은 그의 뒷모습을 보다가 서주는 얼른 옷을 갈아입었다.

시원한 소재의 티셔츠는 그의 몸에 딱 맞을 것 같았다. 즉, 서주의 몸이 두세 개쯤 더 있다면 알맞게 맞을 것이다.

물론 사이즈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깨끗한 옷을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서주는 그의 반바지가 제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살피고는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희미하게 향기가 느껴졌다. 여기 와서 별로 빨지 않았던 걸까.

“감사합니다.”

서주의 인사에 진헌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가 완전히 돌아섰다. 그가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바지의 허리를 너무 꽉 졸라매서 생긴 주름을 보고는 조금 웃었다.

그와 함께 해안으로 돌아갔을 때 사람들이 서주를 보고 놀란 눈을 했다. 어제부터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많이 놀라는 것 같아 괜히 웃음이 나왔다.

“옷 뭐예요, 언니?”

“강진헌 씨가 주셨어.”

“와, 대박. 거기 있는 거 다 옷이에요? 저도 입을래요.”

정연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서주가 가방을 넘겨주려는데 진헌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눌렀다.

“얘 거야.”

“…….”

정연의 얼굴이 무안함으로 달아올랐다. 석훈이 헛기침을 하고는 슬쩍 말했다.

“진헌 씨가 잘 모르시나 본데, 우리끼리는 그런 거 없어요. 이 상황에…….”

“너희가 뭔데?”

강진헌이 코웃음을 치자 이번엔 석훈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준과 인우는 눈치를 살피다가 진헌의 말에 동조했다.

“다 공유하는 건 좀 그렇죠.”

“맞아요.”

석훈은 하준과 인우에게 흘깃 시선을 던지고 이를 악물었다. 그때 정연이 서주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며 나긋한 어투로 말했다.

“언니, 언니. 저희 빨래하러 갈래요?”

“아, 아까 하려고 했는데 깜박했네. 같이 가자.”

“아, 참. 진헌 오빠 죄송해요. 저는 그냥 궁금해서 그랬어요.”

서주와 팔짱을 낀 정연이 진헌을 보며 웃었다. 김석훈은 그런 정연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저렇게 사근사근 구는 건 그가 갖은 노력을 다해야 적선하듯 내어 주는 행동이었다.

문득 석훈은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준과 인우는 자리를 피하듯 구명 뗏목 안으로 들어갔고, 정연은 서주와 진헌에게 붙어 실실대고 있다.

석훈은 태연하게 모닥불을 뒤적이는 진헌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치이익. 숨겨 놓았던 불씨가 마음속의 응어리를 향해 움직였다. 꼬이고 꼬인 길은 너무 엉켜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불씨는 천천히,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다. 지나온 길을 검게 태우며.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정연이 명랑한 인사를 남기고 서주와 함께 걸어갔다.

뒤에서 느껴지는 음울한 시선을 모른 채 정연은 일행과 멀어지자마자 서주를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언니 진헌 오빠랑 뭐 있죠.”

“어?”

“전부터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당황스러워서 눈을 동그랗게 뜬 서주의 팔을 툭 치며 정연이 키득거렸다. 서주는 잠깐 멍하게 있다가 “그런 거 아냐.”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정연이 그럼 왜 언니한테만 그런 걸 주냐고 서주가 손에 든 가방을 가리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상인데. 서주는 뒷말을 삼켰다. 다른 사람들에게 못되게 굴고 받은 상이라는 건 말할 수 없었다.

“아무튼 아냐.”

서주가 고개를 젓자 정연은 음, 그런 것 같았는데 하고는 물러났다. 그 주제는 샘에 도착해서 빨래를 할 때 이어졌다.

“자, 정연아. 이거 입어.”

서주가 남자가 준 옷 가방에서 티셔츠와 바지를 꺼냈다.

“와, 저 입어도 돼요? 진헌 오빠가 뭐라고 하면 어떡해요?”

정연이 좋아하다 말고 조금 겁먹은 얼굴을 했다. 서주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 주지 말라곤 안 했어.”

“그래요? 그럼 잘 입을게요.”

눈에 띄게 환한 얼굴을 하고 정연이 옷을 챙겼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을 훌렁 벗었다. 그녀가 알몸으로 샘에 들어가자 뻘쭘해진 서주도 목욕을 한 번 더 하기로 했다. 머리도 감고, 가방에 있던 수건으로 물기도 닦았다. 그리고 보송한 옷을 입었다.

“와, 이게 뭐라고 갑자기 눈물 날 것 같아요.”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서주 또한 시큰거리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언니, 저는 구조되면 제일 먼저 샤워부터 할 거예요. 샴푸랑 바디워시 한 통 다 쓸 거야.”

정연의 너스레에 서주가 웃음을 터뜨렸다. 과장된 말이긴 해도 서주 역시 그러고 싶었다.

“그러고 라면 하나 딱 먹는 거지.”

“역시. 이 언니가 뭘 아네.”

하이파이브를 치고 서주는 눈가를 꾹 눌렀다.

“이제 빨래하자.”

이런 유의 얘기는 오래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낫다. 얘기를 오래 하다 보면 생각에 잠기게 되고, 그리워하게 되고, 걱정하게 되고, 두려워지게 된다.

잔상처럼 떠오른 부모님의 얼굴을 지워 내며 서주는 벗어 놓은 옷과 속옷을 들고 샘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옷은 이제 여분이 조금 있으므로 빨래를 한 후 더 이상 축축한 옷을 입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속옷은 여분이 없어서 빨고 나면 속옷을 입지 않고 얼마간 지내야 했다. 무인도에서 그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들은 아직까지는 사회와 그리 멀어지지 않았다.

볕이 잘 드는 바위 위에 빨래한 옷과 속옷을 널어놓고, 서주와 정연은 잠깐 쉬었다.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앉아 있다가 정연이 문득 입을 열었다.

“언니, 근데 진헌 오빠 몇 살인지 알아요?”

“아니.”

“언니도 모르시는구나. 나이도 모르고, 직업도 모르고…….”

그렇지. 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보이는 코코넛 나무를 바라보았다. 딱 저렇게 생긴 나무를 오르다가 손에 힘이 풀렸고 아래로 추락했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그녀의 의지로.

온몸을 감싸던 그 단단함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때 어렴풋이 좋은 냄새가 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녀를, 그가 참 빤히 바라봤었다.

“아무리 여기선 의미 없다지만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요. 우리는.”

“맞아, 그렇지.”

생각에 잠긴 서주가 습관처럼 맞장구를 쳤다.

“언니, 언니가 한번 물어보면 안 돼요?”

“맞… 응?”

“진헌 오빠가 그래도 언니 말엔 답을 잘 해 주시잖아요.”

…그런가. 입꼬리가 이상하게 간질거려서 서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까 얘기했는데, 인우랑 하준이는 그 오빠가 서른다섯 같대요. 근데 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얼굴만 보면 한 이십 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것 같거든요.”

“음, 그런 것 같아. 어려 보여.”

심술이 묻어 있던 얼굴을 떠올린 서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가 한번 물어봐요.”

정연은 꼭 서주가 물으면 그가 답을 제대로 해 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런 확신에 찬 눈빛이 싫지 않았다.

“그럼 그럴까…….”

이것이 누군가의 가슴속에 숨 쉬는 불씨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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