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태는 이웃나라 아가리의 제어가 풀리자마자 땅바닥에 풀썩 엎어지면서 두 손을 싹싹 빌었다. 그도 자기 입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지은 죄도 있고.
-주, 주인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그럼 죽어라.
-사, 살려 주십시오.
-그러고도 살기를 바라는 거야?
-겨우 간통죄 정도로 사람을 죽이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노예라지만 정말 너무 하시는군요.
박상태는 정신이 아직도 오락가락했다. 공포에 떨기는커녕 오히려 불평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영욱도 하려던 공격을 멈추고 말았다. 죽일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군. 하마터면 내가 불법을 저지를 뻔했어.
-고맙습니다. 주인님. 억? 지금 무슨 짓을 하신 거죠?
-내 선물이야. 고농도의 세로토닌이지.
-아프잖습니까? 그게 대체 뭡니까?
-조금은 고통스럽겠지만 그게 발기를 아주 오랫동안 지속시켜줄 거야. 그러면 네 애인도 아주 좋아할 거야. 안 그래?
-그렇다면 저를 해방시켜주실 겁니까?
은영과의 사이를 인정하고 선물까지 주었으니 그런 착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독정의 성분인 고농도 세로토닌이 선물일 리가 없다. 그러니 해방 역시 없다.
-그럴 수는 없지. 팔면 꽤나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제가 제 몸값을 지불할 테니까 풀어주십시오.
-그러지. 10억만 내놔.
-그건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돈을 몰래 감추어둔 노예의 몸값이 10억이면 싼 거 아냐? 그냥 빼앗아도 되는 돈인데 말이야.
영욱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박상태의 몸값은 10억 이상이기도 했다.
-제가 가진 돈이 아니라 제 애인 은영이가 지불할 거니까 그렇지요.
-예쁜 애인 있다고 자랑이군. 안 그래도 쓰라린데 아예 소금을 뿌려라. 그러는데도 가격을 깎아줄 것 같아.
-5억 드리겠습니다.
-좋아. 놓고 꺼져.
-당장 통장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확인해보십시오.
-휴대폰도 터져?
-이미 알고 계셨잖습니까?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면서?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상태는 영욱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런 것도 모르냐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영욱은 애써 모른척하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켜서 입금 내역을 확인했다. 몹시 불쾌하지만 거래 중이니 때려죽일 수는 없었다.
-들어왔군. 어서 여기서 꺼져.
-가기 전에 먼저 노예 소유권 이전을 해 주셔야지요.
-그건 또 뭔데?
-그냥 제 이름을 부르면서 노예에서 해방시켜준다고 외치시면 됩니다. 그것도 모르셨습니까?
-너는 아는 것이 많아서 배부르겠다. 박상태는 이제 나의 노예가 아니다. 됐지?
-응. 그럼 잘 있어. 덕분에 그 동안 즐거웠어.
-나야말로 즐거웠다. 잘 가. 행복해야 해.
-당연히 행복하지. 여기서 나가는 즉시 회포부터 풀 생각이니까 말이야. 하하하!
박상태는 둘큐비가 열어놓은 조용한 바벨탑의 출구를 향해서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면서도 영욱을 놀리는 걸 중단하지 않았다.
-계속 풀어줘야 할 거야. 그러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뭐가 어찌 되는데?
-변강쇠가 되는 것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부러우면 지는 거야. 하하하!
-그래. 부러워 죽겠다. 그러니 어서 꺼져!
-붙잡아도 간다. 하하하!
박상태는 낙하산도 없이 구름 위로 뛰어내렸다. 하늘을 나는 마법은 없지만 그 정도의 능력은 이미 충분했다.
독정의 기운인 고농도 세로토닌의 부작용은 발기 지속에 있다. 발기한 혈액을 일시적으로 가두어서 생기는 현상임으로 지속된다는 결과는 아주 참혹하다. 괴사, 즉 썩어버리는 것이다. 고인 물이 썩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간 시장
영욱은 구름 아래로 사라져가는 박상태의 모습을 보면서 빙긋이 웃었다.
-병신! 곧 고자가 될 지도 모르고 좋아하는군. 게다가 기계체조의 기운과 씨 마나는 모두 회수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말이야. 그래도 사퍼모어 중에서도 강한 편이니까 죽지는 않겠지.
-그래서 순순히 보내주었군요.
-몸값을 5억이나 지불했는데 보내주는 것이 당연하지.
-그렇다면 능력을 회수한 것은 무슨 이유죠? 그 녀석이 노력해서 만든 것일 텐데 말이죠.
둘큐비는 영욱의 행동이 못마땅한지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라는 소리였다.
-내가 기계체조와 활인심방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벌써 주화입마에 빠져서 죽었을 거야. 씨 마나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활성화시켜준 것이었고. 그러니 그 녀석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지. 내 것을 회수하는 게 뭐가 어떻다고 따져?
-제 생각보다는 훨씬 더 잔인하군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목을 비틀어서 단숨에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머릿속까지 지우지는 않았으니까 노력하면 다시 그 경지를 회복할 수도 있어. 그러니 죽이는 것보다는 낫겠지. 다만 고자로 산다는 게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겠지만.
영욱 역시 기분이 썩 즐겁지는 않았다. 자신의 말처럼 자기 것을 회수한 것이고 사소한 복수는 충분히 할 이유가 있는데도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그게 둘큐비가 지적하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느낌이었다.
-복수를 한다고 해서 즐거워지지는 않는 모양이군요. 표정이 오묘한 걸 보니까.
-너도 내 입장이 되면 즐겁지는 않을 거야.
-아무튼 일큐비와는 어떻게 싸우실 건가요?
-조금 전 그 아가리의 이름이 일큐비인가?
-진짜 이름은 따로 있겠지만 주인님께서 제 이름을 대충 지은 것처럼 그냥 마구잡이로 지은 거죠.
-그렇다면 나머지 녀석들은 미큐비, 중큐비, 러큐비, 영큐비, 이런 식으로 불러야겠군.
영욱은 은영과 소희 그리고 화리의 변심과 박상태의 배신으로 참담한 심정이지만 그보다 더 급한 일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둘큐비를 제압하는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는 했지만 상대의 반응이 너무 빠르고 너무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하죠. 하하!
-나도 당연히 내 방식대로 싸워야지.
-주인님의 방식이라뇨?
-내가 제일 잘하는 것으로 싸우겠다는 말이지.
-고자 만들기를 말하는 겁니까?
-그것도 좋겠군.
그 나라 사람들이 섹스에 열중한다는 사실은 비밀 아닌 비밀이다. 영욱도 그 나라에서 출판한 누드집을 여러 권 섭렵한 바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고자란 상당히 고통스러운 천형이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영욱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럼 아토피 작전인가요?
-그 나라가 삼나무 때문에 원래 그 병이 많은 곳이지. 하지만 국민들이 무슨 죄야?
-그렇다면 대체 뭐죠?
-잘 생각해봐.
둘큐비를 놀리려는 것이 아니라 영욱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어서 이러는 중이었다.
-사냥을 잘하시는 편이긴 하지만 전면전에서 그런 방법이 통하지는 않을 텐데요?
-몰이사냥도 나쁘지 않겠네. 그 정도는 되어야 효과가 있을 테니까.
-그렇다면 설마 기계체조로 승부를 보겠다는 겁니까?
-땅을 파는 것이야말로 내 특기고 할 수 있지. 게다가 그 나라는 지반이 아주 약하고 지진이 잦은 곳이니까 조금만 파도 큰 효과를 볼 수 있겠군.
-그렇다면 대체 뭐죠? 주인님께서 가장 잘하시는 게?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는 데에 나름 일가견이 있지.
영욱의 대답은 여전히 시큰둥했다. 해결책이 그리 쉽게 나올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럼 일큐비의 약점을 파악한 후에 정면 승부를 펼치시겠다는 말이시군요.
-내가 바본 줄 알아? 그런데 소모할 힘이 있으면 여자 친구를 찾는 게 낫지.
-그럼 대체 뭡니까?
-안 가르쳐 줘.
갑자기 영욱의 말투가 밝아졌다. 이제는 해결책을 마련했다는 뜻이었다.
-제발 좀 가르쳐 주세요. 궁금해서 돌아가실 지경입니다요. 잉?
-여기가 걔 나와바리라며?
-그런 식으로 주장하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라야 말이죠. 가만!
-이제야 겨우 감이 오는 거야?
-일큐비, 미큐비, 러큐비, 중큐비를 한꺼번에 상잔시키자는 거군요. 이제 보니 이간질과 충동질이 바로 형님의 특기였군요.
괴인들을 처리한 방법이 바로 이간질과 충동질이긴 했지만 둘큐비로서는 여러 아가리들을 상대로 통할 지는 의문이라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영욱의 충동질에 응한 것과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녀석들 중에서 가장 강한 자에게 너를 헐값으로 넘기겠다고 하면 다들 그냥 있지는 않을 거야.
-저는 왜 걸고넘어지세요? 잉?
-노예의 운명이 팔리고 또 팔리는 거 아니겠어? 무슨 문제라도 있어?
-저를 패죽이지 않은 이유가 바로 팔아먹으려는 생각 때문이었군요.
둘큐비는 정말 팔아먹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박상태도 팔아먹었으니 자신이라고 팔아먹지 못할 이유가 없기에. 사실 한몫 챙긴 후에 유유자적하면서 사는 것도 나쁠 리 없다.
-대가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닌데 너를 왜 죽여? 팔면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는데 말이야.
-괜히 판을 키우는 게 아닐까요?
-어차피 판은 커지게 되어 있어. 그 녀석들의 입장에서는 나를 도저히 묵과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야.
-저를 노예로 만든 것은 아무래도 좀 심했죠. 다른 녀석들은 신이라는 추앙도 받는 위친데 말이죠.
둘큐비에 대한 의리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상놈이 양반을 능멸하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처벌했던 것처럼.
-너희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데 너는 왜 신 행세는 안 한 거야?
-그땐 몽땅 다 잡아먹을 생각이었으니까 괜히 정 주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신 행세를 했으면 몽땅 다 잡아먹지 않아도 오히려 더 이익일 것 같은데?
-신앙심 역시 망상 못지않게 좋은 먹잇감이죠. 게다가 관리해주지 않아도 결코 마르는 법도 없고요. 하지만 저는 원래부터 망상을 더 좋아했습니다.
결국 둘큐비가 신 노릇을 하지 않은 것은 식성이 달라서라는 소리였다. 아가리마다 즐기는 음식이 다른 듯했다.
-웬 과거형?
-앞으로는 신앙심도 가끔 먹어두기로 했습니다.
-하긴, 1/3을 돌려주게 되면 너를 믿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군. 좋은 선택이야.
-꿩 대신 닭이지요, 뭐.
둘큐비는 꿩보다 오히려 닭을 더 좋아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신앙심도 먹어야 하니까 일부러라도 그렇게 마음먹은 듯했다.
-그런데 진짜 신도 있어?
-똑똑하신 분께서 갑자기 어리석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만일 존재한다면 사이비 신 행세도 서슴지 않는 우리와 같은 존재를 그냥 묵과하고 있겠습니까?
-그렇겠군. 인간들의 망상 역시 에너지의 발출인 셈이니 모든 것은 인간들로부터 비롯된 것이겠군.
-그렇습니다. 다만 인간들 역시 태양과 지구에 빌붙어 사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지요.
-다른 큰 아가리 속의 작은 아가리일수도 있다는 소리군. 아무튼 내 뜻을 일큐비를 제외한 다른 녀석들에게 전해. 일큐비가 노리고 있으니까 나를 보호해주는 쪽에게 너를 헐값에 넘기겠다고 말이야.
2QB 세상 역시 완벽한 또 하나의 세상이다. 그러니 영욱은 미생물과 인간의 관계처럼 규모가 태양계나 은하계만큼이나 큰 아가리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꼭 제가 해야겠습니까?
-그럼 이 나이에 내가 하리?
-쪽팔려서 말이지요.
-그럼 너 대신 나를 넘기겠다고 하든지. 관심이 없지는 않겠지만 선뜻 달려들 것 같지는 않아서 문제지만.
-그게 아니라 주인님을 넘긴다는 말은 저도 덤으로 따라가는 것이니 마다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겉으로는 주인님만 넘기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둘큐비가 외부의 힘을 이용해서 주인인 영욱을 처리하겠다는 것이 다른 아가리들의 입장에서는 좀 더 믿음이 갈 것이다.
-그건 네 마음대로 해. 분명한 것은 확실하게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효과가 시원찮으면 저를 팔겠다고 광고를 하시겠다는 말 아닙니까?
-잘 아는군. 그럼 나는 수련이나 할 테니까 너는 가서 일 봐.
-예. 주인님.
영욱은 중심 회전축에 기대서 헤드 스핀을 돌면서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박상태가 두려워서 벌벌 떨던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한때나마 불멸의 존재라고 주장하던 둘큐비를 노예로 거느리게 된 것이 쉽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 기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이다.
박상태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서 기계체조를 배우기 시작한 것 역시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극성의 경지라는 120%에 올라있었다. 평생 동안 매진했던 사부 진중권이 아직도 24%에 불과하니 자신의 성취를 믿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터무니없을 정도의 기연들이 여러 차례나 이어져서 이룩한 경지다. 그것이 영욱으로 하여금 둘큐비보다도 훨씬 강한 아가리들과의 전면전도 불사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기연들이 너무나도 소중하기에.
그러나 정작 영욱으로서는 그리 짧지 않았던 세월이다. 반복적인 타임 워프를 통해서 수련한 시간을 계산하면 족히 20년은 넘을 것 같았다.
그것은 영욱이 발휘할 수 있는 초능력 항목 중에 타임 워프 마법도 버젓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배운 마법은 아니지만 금강누치가 발휘하던 초능력보다 훨씬 강력한 타임 워프 마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
물론 20년 수련이 아니라 200년 수련이라고 해도 오르기 힘든 경지가 바로 기계체조 극성의 경지다. 재능도 중요하지만 부단한 반복 수련만이 다음 단계의 경지를 허락해주기 때문이다.
열심히 수련하는 것이야 영욱을 당할 자가 없다. 그러니까 기연들이 고스란히 기계체조의 경지를 높이는 쪽으로만 작용했던 것이다.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게 가능했던 것이다.
은영과 상태에게 치명적인 배신을 당하고도 무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영욱이 보낸 그 세월 덕분이었다. 실제로 살아낸 나이로는 벌써 불혹이 넘으니 아직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은영이 또 다시 떠난다고 해서 별로 충격 받을 것도 없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늘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사실 은영이 미성년자는 아니지만 지나친 연륜의 차이 때문에 더더욱 서먹하던 차였다. 그러니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여겨지기까지 했다.
타임 워프 마법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것 역시 전가의 보도는 아니다. 과거로 돌아가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것을 바꾸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변형이 가능하면서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수련을 통한 실력 배양이다. 물론 약간의 변형 정도는 가능하지만.
또한 타임 워프로 보낸 시간은 고스란히 본인이 살아낸 시간이 된다. 그러니까 영욱의 나이는 벌써 40대 중반인 셈이다. 수명 역시 그런 식으로 계산해야 한다. 겉으로는 전혀 변화가 없으니 별 거 아닐 수도 있지만 친구나 애인과 느끼던 감정마저도 옛날과 똑같을 수는 없다.
뭔가를 얻었으니 당연히 잃는 게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젊은이 얼굴을 하고서 40대나 30대 후반의 나이를 가진 여자 친구를 사귈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이성교제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겠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그럴 만한 시간도 없고.
얻은 것 중의 하나는 배신에 대해서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불혹不惑이라는 말처럼 세상사에 휘둘리지도 일희일비하지도 않게 된 것이다.
배신하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배신할 만한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정당하거나 절실한 이유일 수도 있다.
은영의 경우도 손에 넣기 힘든 영욱보다는 이제는 꽤나 똘똘해진 박상태와 다시 사귀는 것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게 아니라면 박상태에게 영욱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술이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고.
그러니 박상태를 고자로 만들어버린 것은 사소한 복수인 셈이다. 하지만 고칠 수 있는 치유 초능력자들이 얼마든지 있는 세상이니 그 정도쯤은 장난이라고 보는 게 옳다. 치료받아야 할 시기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세 여자가 함께 떠나버려서 황당했던 것도 사실이다. 만약에 모든 문제가 잘 해결된다면 은영보다는 화리와 진지하게 만나볼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말을 트고 지냈던 관계니 20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어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까닭이다.
강력한 후보인 소희를 배제시킨 것은 그가 배경태와 다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알려준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표정 변화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제는 그런 눈치도 120%의 경지에 올랐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아무튼 사부 진중권과의 관계가 아쉽기는 하지만 인륜이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소희에 대한 미련 아닌 미련을 완전히 접기로 했다.
아버지 박득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길길이 날뛰겠지만 이제는 굳이 자신과 소희라는 매개체가 없어도 두 사람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위했다. 게다가 그보다는 훨씬 더 좋은 술이 있으니까. 술값이라면 죽을 때까지도 댈 수가 있다.
영욱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빙빙 잘도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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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자가 나타나서 영욱의 수련을 방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영욱이 여자 친구를 간절히 원하니 하늘이 내려준 듯이 아주 예쁘고 늘씬하고 피부도 하얀 외국 여자였다. 첫눈에 반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였다. 소희의 얼굴과 은영의 몸매를 합쳐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예쁜 월드 클래스 미녀였다.
-누, 누구시죠?
-저는 아나스타시아라고 해요. 러시아에서 왔습니다.
-예? 러시아라고요?
-그쪽에서 러큐비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그런데 벌써 움직인 겁니까?
영욱은 러큐비가 스스로를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했다. 그녀는 이미 아나스타시아라는 여자의 몸을 차지한 듯했다. 물론 아나스타시아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아가리가 그녀일지 그놈일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적적해서 데이트 상대를 구하고 있던 중인데 마땅한 상대가 없어서 애를 끓이던 차였어요. 그런데 영욱 씨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들리기에 한걸음에 달려왔지요. 호호호!
-어이쿠! 영광이군요. 그런데 제가 마땅한 데이트 상대일 수도 있다는 건가요?
-당연하죠. 둘큐비 녀석을 노예로 삼은 분이시니 당연히 자격이 있지요.
-저도 외롭던 차에 잘 되었군요.
영욱도 잘됐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궁한 상황이니 결혼 동맹이라도 불사할 기세였다.
-그러고 보니까 함께 다니던 세 아가씨는 떠나갔군요.
-저에 대해서 많이 아시는군요.
-당연하지요. 지금은 비록 몰락했지만 한때는 우주선이나 인공위성 제작의 최강국이었잖아요.
-두 세계가 겹친 곳에서도 볼 수가 있는 모양이죠?
-극비 사항이지만 그 정도의 기술은 보유하고 있다고 보시는 게 옳을 겁니다.
아나스타시아의 표정에는 지금까지 영욱이 지나왔던 모든 여정들을 쳐다보고 있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마법도 어느 정도 가미했겠지만 인공위성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정말 대단하군요.
-마법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구적인 마법 즉, 마법진이 이뤄낸 쾌거지요.
-마법진이라고요? 그런 것도 있었군요.
영욱은 눈을 크게 뜨면서 아나스타시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영욱도 마법보다는 마법진이 더 유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배운 적은 없지만.
-간단한 예를 들자면 라이트 마법은 단발적이고 한시적이지만 라이트 마법진은 마치 태양처럼 반영구적인 빛을 뿜어내지요.
-정말 대단한 능력이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영욱 씨도 제법 마법을 할 줄 아시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겁니다. 호호호!
-제가 할 줄 아는 마법은 몇 개 없습니다. 배우려고 시도한 것은 많지만 대부분 위력이 너무 약해서 중도에 포기해버렸습니다. 하하하!
-더 위력적인 기계체조가 있는데 굳이 구차한 것들을 따로 배울 이유는 없었겠지요. 호호호!
-지금까지도 관심은 있지만 마법에 대한 재능이 부족해서 사실상 포기한 상탭니다.
마치 소개팅이라도 하는 것처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갑자기 돌변해서 아가리를 벌릴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더 드는 상황이었다. 영욱의 느낌으로는.
-치명적인 결함만 없다면 마법도 그리 나쁘지는 않죠. 다만 특별한 소질과 재능이 있어야만 배울 수가 있다는 것도 문제점이고, 배워야 할 마법의 가짓수가 너무 많다는 것도 흠이라면 흠이고요.
-치명적인 결함이라면 마나홀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나홀과 마나 모두를 말하는 거예요.
-대충이나마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나 봅니다.
-얻는 게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게 생기는 법이죠. 모든 것을 다 얻기는 쉽지 않죠.
-그쪽도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몸을 얻은 대신에 잃은 것도 있다는 소리로 들립니다만.
영욱은 용기를 내서 다소 껄끄러울 수도 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몸뚱이를 얻음으로써 손해를 보는 부분도 있음을 지적하려는 게 아니라 굳이 젊고 예쁜 여자의 몸을 얻은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느냐는 다소 노골적인 대시였다. 둘큐비가 영욱의 몸뚱이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처럼.
-뭔가 오해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원래 젊은 여잡니다. 그리고 이 몸뚱이도 원래의 제 것이고요. 호호호!
-그런데도 러큐비라고요?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영욱 씨 또한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더없이 높은 경지를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봤는데 조금은 아쉽군요.
-시니어의 망령이 아니라니까 저로서는 더욱더 좋군요. 하지만 시니어라는 경지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닌 줄로 압니다. 게다가 그중에서도 최고봉까지 올라간 존재들만이 아가리 아니, 조용한 바벨탑을 운용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나스타시아 역시 영욱처럼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방법으로 지금의 경지를 이룩한 것이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경지는 결코 아니지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결코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요. 호호호!
-대단한 기연을 만났던 모양이군요. 아무튼 본신이라니 더 반갑습니다.
-제 얼굴을 너무 자세히 살피시면 부끄러워요.
-주근깨가 몇 개 있군요. 하지만 얼굴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하!
영욱의 시선은 벌써 아나스타시아의 몸매를 훑고 있었다. 물론 실루엣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몸속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숫총각이라고 알고 있는데 제법이시군요.
-숫총각 생활도 오래 하다 보니 나름 여자에 대한 내공이 쌓이더군요. 몸매가 정말 예술입니다. 하하!
-그 말씀은 저와 동맹을 맺겠다는 뜻인가요?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이 있지요. 가장 먼저 오셨으니까 당연히 그만큼의 혜택이 따라야겠지요.
일찍 일어난 벌레가 될지 일찍 일어난 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영욱으로서는 결혼동맹이라는 모험을 마다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4강구도 속의 양자동맹이라서 이 난국을 헤치고 나가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나머지 3강이 결혼동맹을 맺는다면 우리가 불리하겠지요.
-지금 결혼동맹이라고 하셨나요?
-그게 방문의 목적이지 않습니까? 저도 바라던 바고요.
이미 결심을 굳힌 영욱은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인 단어 구사를 서슴지 않았다.
-서로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요. 하지만 어느 한쪽이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알고 계시죠?
-당연하죠. 얻는 것이 클수록 치러야할 대가도 큰 법이죠.
-별로 두려운 기색이 없군요.
-그야 서로에게 도움이 될 확률이 더 높으니까요. 지금의 상황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지겠다고 무리할 가능성은 적지 않겠습니까?
영욱은 노련미를 풀풀 풍기면서 이 상황을 리드했다. 예전 같으면 입 안에서만 맴돌 수준의 말들이지만 지금은 망설임도 전혀 없었다.
-좋습니다. 제가 가진 기운의 49%를 넘겨드리도록 하겠어요.
-저는 60%를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래야 얼추 비슷할 것 같네요.
-과찬이십니다. 하지만 사양하지는 않겠어요.
-그럼 시작할까요?
-당장 시작하자고요?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시작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아나스타시아 역시 이런 경험은 처음인지 얼굴이 빨갛게 변해버렸다. 무드를 잡을 필요가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영욱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무척 즐거운 시간이 될 겁니다. 모든 것을 제게 맡겨 두십시오.
-숫총각이 맞긴 맞나요?
-당연하죠. 숫총각과 숫처녀가 아니라면 이러한 거래가 가능할 리 없잖아요?
-제 말은 너무 능숙하시다는 뜻이에요.
-실전은 처음이지만 연구는 정말 많이 했으니까요. 하하!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