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실을 굳이 숨기고 싶다면 그냥 억지라고 해두자. 아무튼 나는 무럭무럭 자라서 이제는 98%다. 어때?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하지?
-99%까지는 오를 수도 있을 거라고 했잖아.
-맞아. 이제 막 99%에 올랐다. 이제는 정말 쫄리지?
경지가 오를수록 영욱의 입심은 더욱 강력해졌다. 마치 입심의 경지라도 되는 것처럼. 그 놀라운 입심에 두 번째 바벨탑은 사색이 되고 말았다.
-내, 내가 왜 쫄려?
-내가 100%가 되면 너는 뒤지기 직전까지 맞을 테니까.
-그, 그렇다면 죽이지는 않을 거야?
-당연하지. 노예로 삼아서 두고두고 부려먹어야지, 왜 죽여?
-왕 노릇만 하던 내가 노예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맞고 나면 누구나 다 잘하게 되니까 염려 마.
-지금 100%야?
-이젠 안 보여?
은영과는 달리 자신보다 강해지면 읽을 수가 없는 듯했다. 어쩌면 은영도 지금의 경지는 읽지 못할 수도 있고.
-100%냐고 물었잖아.
-아니!
-100%가 아니라고?
-응.
-이제 더 오를 기미는 없는 거야?
-그러게. 가파르게 오르더니 갑자기 딱 멈추고 말았네.
-씨발! 그럼 괜히 쫄았잖아.
-개기면 더 세게 맞는 거 몰라?
-99%의 경지로는 나를 어떻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잖아. 그러니 이제 넌 좆 됐다.
여태까지 사색이 되어 있던 두 번째 바벨탑이 갑자기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살려만 주면 노예라도 할 것처럼 고분고분하게 굴었던 것은 혹시라도 100%의 경지에 오를지도 몰라서였던 것이다.
-누가 99%래?
-100%가 아니라고 했잖아. 설마 거짓말을 한 거였어?
-당연히 100%가 아니지.
-그런데 무슨 개소리야?
-100%가 끝인 줄 알았어?
-그, 그럼 101%도 있나?
-내가 경험하기로는 119%까지 있어. 그런데 120%는 없나봐. 아니면 너 하나를 통째로 삼키는 걸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영욱의 말을 들은 두 번째 바벨탑은 얼른 무릎을 꿇었다.
-제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했잖습니까?
-그런가? 이젠 더 이상 못 까불겠지?
-당연하지요. 주인님.
-아직 절차가 남아있으니까 주인님이라고 부르지 마. 괜히 마음 약해지잖아.
-저, 절차라니요?
-죽기 직전까지 맞아야 충성스러운 노예가 될 수 있어. 그것도 몰랐어?
왕이 아니라 신을 자처하던 자였으니 몰라서 그랬을 리가 없다. 다만 자신이 그 입장에 처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러는 것이다.
-그, 그러다가 진짜로 죽어버리면 어쩌려고요?
-그렇다면 너와 나의 인연이 그것밖에 안 되는 거겠지. 그런데 불멸을 운운하더니 그렇게 쉽게 죽기야 하겠어? 쉽게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주인님의 공격이 너무 강하니까 이런 말을 하는 거죠. 정말 아픕니다요.
-그렇다면 불멸이란 지극히도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거네. 잉?
-다, 당연하죠.
-너와 비슷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시니어 망령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지?
영욱은 잠시 구타를 멈추고 가장 궁금한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노예를 만드는 작업은 꼭 구타의 강도를 올리는 것보다 그 강약을 조절해서 스스로 절망하도록 만들어야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욱은 이 녀석을 노예로 만들 참이었다. 환수지왕이니까 가질 수 있는 생각이다.
*인간의 망상이 쌓아올린 바벨탑
-사람들은 똑같은 2QB 세상이라고 느끼지만 지구상의 국가 숫자만큼 각각의 시니어들이 그 지역을 통치하고 있습니다요. 주인님.
-그럼 주니어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지?
-그들의 대부분은 현실 세상의 요직을 맡고 있는 자들입니다. 국가 원수나 장관 그리고 국회의원들 중의 일부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경쟁에 밀려서 은거하고 있는 자들도 더러 있습니다.
-네 녀석이 거느린 주니어는 몇 명이나 되지?
-어, 없습니다.
-왜 없어? 그렇게 작은 나라도 아닌데.
-오래 전에 모두 정리해버렸습니다. 달아난 자들도 제법 있습니다만.
-네 녀석이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먹어 치운 거야?
-그런 목적도 있지만 머지않아 시니어의 경지에 오를 것 같아서 처리해 버렸습니다. 이 바닥에서는 다 그러니까 이상한 눈으로 보시 마십시오. 주인님.
영욱은 자신에게 자발적으로 기운을 넘겨준 괴인들이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안에서 지금 이 꼴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돕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승리니 자축할 만도 했다.
-뱀이 뱀의 천적이라더니 바로 그 꼴이군.
-어차피 시장은 한정되어 있으니 미래의 경쟁자를 제거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요.
-각 시니어간의 유대 관계는?
-알고 계시는 국제 정세처럼 별로 좋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서로 웃지만 언제 뒤통수를 칠지도 모르는 사이라고 보시면 됩니다요.
-거기에서 너의 위치는?
-저도 요즘은 제법 강해져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는 됩니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1, 2, 3, 4등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진짜 불멸에 근접한 자가 이렇게 쉽게 노예가 될 리는 없을 테니까.
-죄, 죄송합니다. 주인님.
-아무튼 넌 좀 더 맞아야 해.
퍽! 퍽!
진상의 하늘을 오르기 위한 두 번째 바벨탑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존재도 알고 보니 시니어라는 높은 경지에 오른 인간들의 욕심이 변형시켜 놓은 환수에 불과했다.
자신은 드림헌터 중에서 시니어 레벨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영욱이 보기에는 시니어의 망령이 환수가 되어버린 게 분명했다. 그것은 마지막 도전자를 환수지왕으로 정한 것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유달리 환수에게 강세를 보이던 영욱으로서도 그편이 더 좋았다. 세상을 통째로 삼키려는 존재가 사람일 리는 없으니까 이제는 환수라고 보는 게 옳을 것 같았다.
-쿠에엑! 사, 살려주세요! 주인님.
-이런!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힘 조절에 실패했구나. 이젠 안 아프지?
-제, 제발 살려주십시오. 주인님.
다친 자리를 치유해준 후에 다시 그 자리를 집중적으로 패기 시작하자 2QB는 거의 자지러졌다.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되었음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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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바벨탑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 노예가 되어버렸다. 속담처럼 매에는 장사가 없었다.
-이제부터 너를 둘큐비라 부르겠다. 불만 없지?
-여, 영광입니다. 주인님.
-이 두 번째 바벨탑은 당장 해체시키고 2QB 세상은 예전처럼 그대로 운영하기로 한다. 다만 사람들의 꿈을 절반만 챙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영욱은 자신이 2QB 세상의 대통령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사실 그럴 만한 자격도 있다.
-그렇게 하시면 현실 세상에서 강한 힘을 가진 자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보통 사람들이 위험해집니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사망 사고가 속출할 테니까요.
-그렇다면 2/3만 챙긴다. 그 정도면 되겠지?
-아무래도 3/4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주인님.
둘큐비는 자신의 아가리인 2QB 세상을 나름대로는 잘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 세상에 큰 파급 효과를 끼치지 않겠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렇지만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니 결코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아가리 닥치고 2/3만 챙겨! 머지않아 큰 전쟁이 벌어질 테니까 다들 강해질 필요는 충분히 있어.
-저, 전쟁이라뇨?
-네 녀석이 주니어들을 다 집어 삼켰다면 다른 녀석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역시 그런 절차를 밟았을 게 분명해. 그들의 정보력은 장난이 아니잖아.
-그, 그랬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진짜로 불멸에 근접한 자가 있을 지도 모르지.
-저도 주인님만 삼켰다면 그랬을 테니까 아마도 여럿 될 겁니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뭘까?
-혼자서 해먹겠다고 생각하겠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요.
따다닥! 딱! 아코!
영욱의 잔상딱밤이 둘큐비의 머리를 난타했다. 둘큐비는 머리를 감싸 쥐고서 자지러졌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팠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욱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둘큐비의 기운을 계속 빼앗고 있는 중이니까.
-그게 자랑이냐? 아무튼 현실과 너희들의 더러운 아가리끼리 부딪치는 전쟁이 동시에 일어날 거야. 그러니까 우리도 준비를 해야지.
-그리 되면 제가 약해지지 않습니까?
-누가 너보고 싸우랬어? 너는 그저 아가리 관리나 잘 하면 돼.
-주인님께서 강하긴 하지만 저들도 가려움에 약할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가려움에 약할 거야.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어. 내겐 무적의 기계체조가 있으니까 말이야.
이제 영욱의 자신감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불멸을 앞두고 있던 둘큐비를 노예로 거두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물론 기분을 내는 것만은 아니다.
-저들에게는 핵무기도 있습니다. 설마 기계체조로 핵무기와 맞서 싸우시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당연히 맞설 수 있지. 이제 나의 잔상침이라면 대륙간탄도탄을 대기권 밖에서도 요격할 수가 있지. 사실 그렇게 어렵게 요격할 필요도 없지만.
-다른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그건 비밀이야. 너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니까. 하하하!
빙정의 기운을 담은 잔상침을 사용하면 폭탄의 작동을 중단시킬 수 있다. 그것은 곧 한국이 핵무기 보유국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염동력으로 부서지지 않도록 챙길 수 있으니까.
-저도 불멸을 거론할 정도로 오만했던 적이 있지만 주인님께서는 한술 더 떠시는 것 같습니다.
-당연하지. 그런 너를 노예로 만든 사람이 바로 나니까.
-그것은 제가 주인님의 몸을 차지하려고 주인님의 꿈속에서 싸웠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일 뿐입니다. 하지만 돈과 돈이 부딪치는 현실 세상에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좀 더 맞고 싶은 모양이구나.
-아, 아닙니다. 제발!
-네 신분을 또 다시 잊는 순간 너는 소멸이다. 네 녀석이 아니라도 노예로 삼을 녀석들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거들먹거리는 것은 사절이야.
-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주인님.
-그건 두고 보면 알 일이겠지. 아무튼 좀 맞자.
-제, 제발 때리지 마십시오. 주인님.
-감히 주인인 나에게 명령을 내린 거냐? 이 새끼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퍽! 퍽!
꾸에엑! 아구구!
영욱은 틈만 나면 폭행을 자행했다. 그게 당분간은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초반에 기선을 확실하게 제압해야 나중이 편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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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꿈을 꾸니까 다 같이 강해진다면 둘큐비가 우려하는 인간들끼리의 안전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힘의 일정 부분을 봉인해둔다면 그런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나중에 힘이 필요한 시기에 봉인을 풀어주면 그 효과가 더더욱 극대화될 수도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둘큐비를 영욱의 혀처럼 구는 존재로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드센 녀석을 조교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개 패듯이 패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게 아니다.
영욱에게 가학적인 취미가 있어서 구타를 자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기계체조의 수련을 위해서 연습 스윙을 하는 것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둘큐비보다 강한 아가리들이 존재하는 한 지금의 경지로 만족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힘을 키워서 세계정복을 하겠다는 소리는 결코 아니다. 아직도 대학생에 불과한 영욱이 그런 거창한 꿈을 꿀 리 없다.
다만 예상되는 도전에서 확실한 실력과 태도를 보여준다면 더 이상의 도전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이 환수의 경계에 걸쳐있는 이상 영욱에게 승산이 있을 거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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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밤낮을 두들겨 맞던 둘큐비가 갑자기 사라지자 여느 때처럼 은영이 가장 먼저 달려왔다.
"오빠! 어떻게 된 거야?"
"우리가 이겼지. 뭘 어떻게 되었겠어?"
"그런데 왜 탈출하지 않는 거야?"
"내가 이곳의 주인이 되었는데 탈출을 왜 해?"
"여기에 계속 있을 거야? 집에 안 가? 그리고 강원도 횡단여행은 어떡하고?"
이긴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 빨리 이곳에서 나가자는 소리였다. 하지만 영욱의 생각은 그렇지도 않았다.
"겨울 방학 동안 집에 가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갈 필요도 없고, 지금 바벨탑을 타고 강원도를 횡단하는 중이야."
"나는 집에 가고 싶단 말이야."
"왜? 이젠 내가 싫어진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헛물만 켜는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해."
"그럼 소희와 화리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거야? 그래도 집에 가고 싶다면 당장이라도 보내주지."
영욱은 갑자기 황당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둘큐비마저도 작살낸 자신에게 달려와서 안겨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여자의 얼굴에서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소희 언니와 화리 언니도 같이 갈 거야. 우릴 곱게 보내줘. 제발 부탁이야."
"이제 보니까 셋이서 작당을 했구나. 좋아. 떠날 사람은 떠나! 잡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건 네 부탁을 들어준다고 했기 때문에 보내주는 거야."
"미안해, 오빠."
"얼마 전까지는 모든 것을 다 줄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목적달성을 했다는 거구나."
"오빠 덕분에 상상할 수도 없던 경지에 올랐으니까 목표 달성은 이미 초과했지."
"나도 네 도움이 컸다. 고마웠어."
영욱은 은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제는 더 이상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은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내밀었다.
"오빠가 멋있긴 하지만 사실 내 타입은 아니었어. 정말 미안해."
"설마 벅벅 긁었다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그건 둘큐비 녀석을 이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자해한 거라니까?"
영욱은 은영이 악수마저도 망설인 이유를 깨닫자 불같이 노했다. 그런 정도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정말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목불인견目不忍見이 따로 없었어. 아마도 오빠를 볼 때마다 그 모습이 떠오를 것 같아. 미안해."
"넌 아직도 마음이 아니라 허상을 추구하는구나. 그래, 네 둘째 언니가 이쯤해서 빠지라고 한 거야?"
"아냐. 언니는 끝까지 오빠를 잡고 늘어지라고 했어. 이건 전적으로 내가 내린 판단이야."
"쯧쯧! 불쌍하구나. 겨우 둘큐비 따위에게 휘둘리다니."
영욱은 은영을 내려다보면서 혀를 찼다. 그녀의 눈빛이 아님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건 내 판단이라니까."
"둘큐비 녀석이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착각하는 거지만 네가 그 농간에 놀아났다는 것은 실망이야. 아무튼 여기서 꺼져!"
"보내줘야지."
"둘큐비! 이들을 보내줘."
-예. 주인님.
할 말을 마친 영욱은 기계체조의 경시 동작으로 중심 회전축을 갈아내기 시작했다. 둘큐비를 확실히 노예로 거두었다고 착각했던 자신을 탓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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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회전축이 30센티 쯤 패이자 둘큐비가 당황한 표정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주, 주인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몰라서 물어?
-모릅니다. 제발 바벨탑을 부수지 말아주십시오. 주인님.
-네 녀석이 은영에게 매혹 마법을 걸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부인할 거야?
-아, 아닙니다. 주인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둘큐비는 무릎을 꿇으면서도 끝까지 모르쇠작전을 고수하려고 했다.
-흥! 내가 매혹 마법을 모를 것 같아? 나를 한 여자에게 두 번씩이나 차이게 만든 죄가 실로 크다. 그러니 이 바벨탑은 즉각 해체될 것이고 너는 소멸당할 것이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니까 저항하고 싶으면 지금 해라.
-지금이 그때와 같은 줄 안다면 착각이다. 이미 네 녀석의 꿈속이 아니니까 말이야.
둘큐비가 벌떡 일어나더니 태도를 확 바꿨다. 나름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었던 듯했다.
-뭐야? 이제 보니 노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바보였잖아. 둘큐비 소환!
영욱은 눈을 감고 꿈속 세상으로 들어가서는 노예인 둘큐비를 자신의 옆으로 소환했다.
-억! 내가 왜 여기에?
-병신아. 이렇게 멍청한 녀석이 불멸의 존재가 되면 뭐할 거야? 두고두고 세상에 민폐나 끼치게 될 테니까 너는 이제 소멸이다.
-사, 살려주십시오. 주인님. 제가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없는 게 도와주는 거다. 한 여자에게 두 번이나 실연당하게 만들어 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
영욱은 포크를 소환해서 둘큐비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이젠 죽일 생각이기 때문에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둘큐비도 사력을 다해서 영욱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면서 영욱의 화를 풀기 위해서 갖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정면 승부로는 이길 자신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 여자에게 이미 그런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 여자 역시 매혹 초능력의 대가라는 사실을 주인님도 잘 아시잖습니까?
-그 여자의 매혹 초능력이야 내가 더 잘 알지. 하지만 네 녀석의 농간을 견딜 수 있을 정도까지는 결코 아니라는 것도 알지.
-하지만 저는 결백합니다.
-결백 좋아하시네.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주제에 결백은 무슨 결백?
영욱은 둘큐비가 피하려고 해봐야 자신의 옆에 소환하는 동시에 가격하면 절대로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피하는 녀석을 가격하는데 정신을 집중했다. 그것이 훈련이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먼저 그런 제의를 했습니다. 자신에게 매혹 마법을 걸어달라고.
-그런 전과前科가 이미 있기는 하지. 하지만 네가 나를 주인으로 생각했다면 거절하는 것뿐만 아니라 곧바로 나에게 보고를 했을 테지. 안 그래?
-안주인이 되실 분이라기에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결백합니다.
둘큐비의 표정은 정말로 억울하다는 기색이 완연했다. 아마도 그런 일이 있었던 듯했다. 둘큐비가 제 자리로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달려왔으니 정상적인 시간으로 보자면 불가능하지만 은영도, 둘큐비도 시간을 다룰 수 있으니 작당을 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너 바보지? 나와 헤어지는 걸 도우라는데 어떻게 안주인이 된다는 거야? 내가 그렇게도 식성이 좋은 놈으로 보여?
-이미 한 번 배신했던 여자를 다시 데리고 다니시기에 결코 그녀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게 연인들끼리 주도권을 잡기 위한 일종의 밀당 작업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그렇게 보입니다.
-네가 나를 그렇게도 우습게보았구나.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치더라도 주인인 나를 우롱하고 대드는 노예는 살려둘 수가 없다. 소환!
영욱은 소환과 동시에 오체분시로 둘큐비를 사로잡고 다섯 방향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찢어 죽이려는 것이었다.
-악! 저를 소멸시키면 다른 아가리들을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주인님.
-너를 곁에 두면 결정적인 순간에 오히려 너에게 당하게 될 거야. 그러니 넌 소멸행이야.
-정말 너무하시는군요. 여자들을 셋이나 끼고 있으니 은영도 그런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거 아닙니까?
둘큐비는 힘으로 오체분시 초식에 저항하면서 영욱에게도 잘못이 있음을 탓했다.
-셋 다 내 여자가 아니었어. 취하지도 않았고 취할 생각도 전혀 없었어. 그나마 은영이 내 여자가 될 가능성은 조금 있었지만 걔는 제 발로 복을 차버린 거야.
-그래도 여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취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 데리고 다니는 겁니까? 괜히 헛물만 켜게.
-진정한 환수지왕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게 바로 연애야. 그것은 일방통행이 아니라 쌍방통행이어야 하기 때문이지. 그리고 여자들은 사랑이 아니라 조건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은 게 바로 연애라는 거야.
솔직히 영욱은 둘큐비를 상대로 싸우는 것보다 연애가 어려웠다. 특히 또 다시 버림을 받게 되니 그 상처가 너무 컸다. 어쩌면 두 번 다시 여자를 사귈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 변명으로 여자들을 셋이나 데리고 다닌 사실을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는 아무 짓도 안했다니까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제가 전국에 있는 솔로를 대표해서 꼭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겁니다.
-불멸의 존재라고 자랑하더니 아직도 숫총각 딱지를 떼지도 못한 거야?
이야기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보아하니 둘큐비도 연애에는 젬병인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 사이의 힘겨루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흥! 사돈 남 말 하시고 있네요. 주인님 역시 숫총각이잖습니까?
-나는 아직 나이가 어리잖아.
-또래 친구들은 이미 수십 번도 더 경험했을 텐데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잉?
-대체 어떤 새끼가 수십 번을 경험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게 자랑이야? 아직 아이를 낳아 키울 능력도 안 되는 무능력자들 주제에 오입질 횟수만 많다는 게.
친구들과 비교 당하자 영욱은 또다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그러한 열등감이 없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짐승들이나 번식을 위해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지요.
-나도 알아. 하지만 그런 사랑을 나누기에는 아직 어리다는 말이야. 결혼을 해야 그런 게 가능한 거 아냐?
-미리 연습해서 나쁠 게 뭐가 있습니까?
-흥! 너나 많이 연습하세요.
-그렇게 하려고 주인님의 몸을 탐낸 것인데 괜히 제 신세만 처량하게 되었습니다.
둘의 작태는 노총각 둘이서 서로 머리채를 쥐어뜯고 싸우면서 서로의 신세한탄을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니 동병상련의 감정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똥 밟았다고 생각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제가 숫총각이니까 숫총각의 몸을 고집한 것이 에러였습니다. 숫총각이 결격 사유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으니 저는 바보였습니다.
-그래. 나는 모자란 놈이다. 그러나 너는 더 모자란 놈이야. 왜냐하면 나 같이 모자란 놈을 제물로 택했으니까.
-인정합니다. 그래서 모자란 놈을 주인님으로 모셨잖아요.
-제대로 모시면 죽이지는 않을 텐데 도대체 왜 그랬어?
이야기로만 보면 화해 분위긴데 둘의 힘겨루기는 여전했다. 아토피를 작동시키지 않은 상태에서의 힘겨루기라서 그런지 팽팽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까?
-말해. 어차피 죽을 거니까 손해 볼 것도 없잖아.
-주인님만 숫총각 신세를 면할 것 같아서 배가 아팠습니다. 이제 속이 시원하십니까?
-그렇다고 그런 짓을 해?
질투는 여자의 소유물인 줄 알았는데 남자 역시 만만치 않은 듯했다. 오히려 현실적인 여자들끼리는 질투보다 협력을 하는데 모자란 두 남자는 서로를 죽이려고 상잔하는 중이었다.
-글쎄! 은영 씨의 마음은 제가 조작한 게 아니라니까요.
-진짜 그 여자가 너를 협박한 거야?
-그 여자뿐만이 아니라 세 여자들이 다 안방마님 행세를 하려고 들더군요.
-나머지 두 여자는 뭐라던데?
-자기들을 도와주면 나중에 잘 봐주겠다고 합디다. 나 참 더러워서.
군대 이야기로 남편이 별 하나면 아내는 별 두 개, 자식은 별 세 개라고 한다. 둘큐비의 이야기가 바로 그런 소리였다.
-그래서 돌아버린 거야?
-예. 그래도 끝까지 거절했어야 할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던 걸 보니 아마도 제가 그 여자의 매혹 초능력에 당한 듯합니다. 쪽 팔려서 끝까지 숨기려고 했는데 이해해 주실 것 같아서 털어놓습니다.
-꼴좋다. 겨우 그런 여자에게 당하는 녀석이 불멸의 존재라고?
-원래 남자는 세상을 지배하고 그 남자를 지배하는 건 여자랍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이렇게 대단한 존재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건 찌질한 놈들이 툭하면 가져다 붙이는 변명일 뿐이야. 속물 근성 그 자체일 뿐인데 뭐가 대단해?
영욱도 속으로는 여자들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냥 대단한 게 아니라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도 찌질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한심한 놈 같으니라고. 쯧쯧쯧!
-그래도 한 여자에게 두 번씩이나 배신당한 주인님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하하하!
-꺼져!
영욱은 오체분시 초식을 거두며 둘큐비를 뻥하고 걷어차 버렸다. 바보들끼리의 힘겨루기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죽인다더니 마음이 변했습니까?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이번 한 번만 살려주는 거다. 앞으로는 절대 용서 안 해. 알겠지?
-두 번 실망시키지는 않겠습니다.
-흥! 한 번 실망시킨 놈은 두 번 세 번 실망시키기 마련이야. 어차피 넌 내 손에 죽게 될 거야.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놀라는 법이다. 영욱은 이제 다시는 사람을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달려들면 무조건 죽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아니까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 까먹게 될 거야. 왜냐면 너도 한때는 불멸을 꿈꾸던 존재였으니까 말이지.
-저보다 강한 자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절대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이제 주인님도 그 리스트에 올랐으니까 말이죠.
-주인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데?
영욱은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자들의 숫자가 궁금했다. 정체는 보나마나 다른 아가리들이겠지만.
-주인님까지 포함해서 총 13명이군요.
-그렇게 많아? 아가리들 중에서 대충 10등쯤은 한다더니 뻥이었어?
-소희와 화리 포함입니다. 원래는 14명이었는데 이제 은영은 리스트에서 뺐습니다. 하하하!
둘큐비는 이제 은영이 가버리게 되어서 속이 시원하다는 듯이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또다시 올지도 모르는데? 걔 특기잖아.
-박상태가 보고 싶으면 돌아올 수도 있겠군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몰랐습니까?
-뭘 모른다는 거야? 얼른 말하지 못해?
영욱은 최근 들어서 은영이 실실 웃고 다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게도 박상태와 바람을 피웠던 것이었다. 온통 수련에만 신경 쓰느라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주인님을 만나기 전에 박상태와 은영이 진한 사랑을 나누었다는 걸 정말로 모르셨습니까?
하지만 둘큐비가 보충하는 설명은 영욱의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게 진실이 아니라면 너는 죽는다. 박상태 소환!
-부르셨습니까? 대장님.
-예전에 은영과 깊은 관계였다고 하던데?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주인님.
-그거야 네가 먼저였으니까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도 사귀는 거야? 솔직하게 말해 봐.
-죄, 죄송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은영이가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입니다. 주인님께서 너무 방치하시니 가끔씩 저를 찾곤 했습니다.
영욱으로서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박상태의 입에서 태연스럽게 쏟아져 나왔다. 무릎을 꿇고는 있지만 승리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우리가 지금 놀러 다니는 거야? 그리고 수련하기에도 부족한데 그런 짓을 할 시간이 대체 언제 있었다는 거야?
-주인님께서는 늘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수련에 매진하셨지만 저희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죠. 그리고 수련하는 만큼 실력이 느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어째 어감이 좀 이상하다. 열심히 수련하는데 실력이 왜 안 늘어?
-저희들에게 가르쳐주신 구결이 가짜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노예 따위에게 진짜 구결을 가르쳐주실 리는 없지만 그래도 서운하더군요.
박상태는 모든 진실을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비아냥거렸다.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면 죽거나 노예상인에게 팔려갈 수도 있다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듯했다. 아니면 뭔가 믿는 곳이 있든지.
-그래서 내 여자가 될 수도 있는 여자와 놀아났다는 거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이미 저와는 틀 만큼 튼 사인지라서 그런지 그런 생각이 별로 들지도 않더군요. 닳고 닳은 사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겠군요. 하하하!
영욱은 박상태의 말을 들으면서 입이 쩍 벌어졌다. 아무리 믿는 구석이 있다고 해도 박상태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너는 박상태가 아닌데 대체 누구냐?
-제가 누구겠습니까? 눈치가 빠르시군요. 하하하!
-아가리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걸 보니 이웃나라에서 사기를 쳐 먹던 녀석이겠군.
-하하하! 잘 아는군.
-동작 한 번 빠르군. 그리고 소식도 무척이나 빠르고.
박상태의 몸에 이웃나라의 아가리가 빙의한 것이었다. 얄미운 녀석의 목을 날려버리고 싶지만 애먼 박상태만 죽고 말 테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도 들어봐야 하고.
-여기 또한 나의 나와바리니까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소식이지. 안 그래?
-언제 있었던 일을 또 다시 주장하려는 거냐?
-한 번 노예는 영원한 노예인 법이지.
-도둑질과 강도질도 모자라서 억지 주장을 하려는 거냐? 아무튼 잘 걸렸다. 기분도 꿀꿀한데 말이야.
-죽여 봐야 이 녀석의 몸뚱이일 뿐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으니 곧 정식으로 싸워보기로 하자. 그럼 또 보자. 하하하!
과거 강점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게다가 둘큐비를 자신의 수하처럼 생각하는 놈이니 이미 불멸에 가까워진 자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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