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화 (68/71)

-회전축을 부수려는 거야. 속도 조절을 제대로 못해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지만 자살하려는 것은 아니니까 염려하지 마.

-회전축에 붙어서 도는 것만 해도 대단하긴 하지만 회전축을 손상시키려는 시도는 무모한 짓이다.

-손상시키려는 게 아니라 아예 두 동강을 내려는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을 것 같군.

영욱은 두 번째 바벨탑이 왜 공격하지 않는지가 의아했지만 곧바로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혹시라도 빗나가서 중심회전축을 손상시킬 것을 우려하는 듯했다. 그것은 노예들마저도 약한 순서대로 중심 회전축 근처에 두는 것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듯했다. 물론 아직은 영욱의 추정일 뿐이다.

-손상시킬 수도 없겠지만 그걸 손상시키는 순간 너도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

-같이 죽게 된다면 나 혼자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결과잖아. 부러뜨리면 다 같이 죽지 않을까?

-타, 탈출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나를 탈출하게 해준 다음 천천히 사냥할 생각이었지? 내 말이 맞지?

영욱은 중심 회전축이 조용한 바벨탑의 아킬레스건임을 확신했다. 그 근처에 있는 한 녀석의 공격을 지연시킬 수 있음이 확실했다. 여유가 생기니 특유의 입담이 작렬하기 시작했다.

-이곳이 바로 호랑이의 입속인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입속은 입속인데 호랑이의 강력한 이빨로 물어뜯을 수 없는 부위이기도 하지. 게다가 이제는 먹이를 이빨로 보내는 혀의 역할을 하던 마법사들도 사라졌으니까 더욱더 난처할 거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마법사들뿐만이 아니라 가디언들도 아주 많다. 네가 없앤 마법사는 겨우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두 번째 바벨탑은 영욱의 주장이 어처구니없음을 꼬집었다. 하지만 영욱은 동의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스페어로 활용할 수 있는 자는 겨우 둘 뿐임을 잘 알고 있다. 나머지는 각자의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한 녀석은 죽고 한 녀석은 한동안 거동이 불편할 테니까 하는 말이다.

-있어도 이곳으로 동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구나. 하지만 네 말대로 중심 회전축에 손상이 생긴다면 다른 층을 관리하는 게 문제일 것 같으냐?

-애써 쌓아올린 바벨탑일 텐데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나라면 당장 포기하겠지만.

-아깝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중심 회전축이 부러지는 것보다는 낫겠지. 네 예상대로 된다면 최소한 200층 이상이 떨어져나갈 테니까 말이야.

중심 회전축을 부러뜨려도 추락이나 공멸하지는 않는다는 소리였다. 물론 200층이 떨어져나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적은 성과는 아니겠지만.

-중심축을 부러뜨려도 도마뱀 꼬리를 자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군. 

-그렇다.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당연하지. 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아까는 왜 같이 죽는다는 표현을 사용했던 거지? 너 지금 거짓말하고 있는 거지?

-감히 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야? 나는 거짓말 따위를 하지는 않는다.

두 번째 바벨탑이 같이 죽는다는 소리를 했던 적은 없다. 하지만 거짓말을 한다는 말에 격분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도마뱀 꼬리와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2QB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이 속임수가 아니더냐? 그런데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웃기고 있네. 

-그것은 인간들이 그렇게 착각했을 뿐 내가 그런 말은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사람들의 꿈을 훔치는 괴물과는 쉽게 매치가 되지는 않지만 너 혹시 이은석 박사 알아?

*대리인

영욱은 두 번째 바벨탑이 곧 2QB 세상의 핵심적인 부분이니까 2QB 세상마저도 환수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웬만한 나라보다도 크다는 소리를 들었으니까 가능한 상상이다. 두 번째 바벨탑만으로는 그 정도의 크기가 아니니까.

다소 엉뚱하지만 두 번째 바벨탑이 녀석의 입이거나 심장이고 2QB 세상이라는 것은 녀석의 몸뚱이라는 상상이다. 그러한 상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이 바로 이은석 박사가 저술한 비몽사몽이다. 

그래서 이 또한 조작된 것이 아닐까하고 찔러본 것이다. 그런데 반응이 있었다.

-아, 알기는 알지.

-그 사람이 혹시 너 아냐?

-웃기고 있네. 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까 네가 내세운 대리인이 아니냐는 말이지.

-내가 그런 작자를 대리인으로 왜 내세웠다는 거지?

-그야 사람들이 2QB에 대해서 확실하게 착각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니까.

영욱은 취조 모드를 계속 이어갔다. 녀석의 반응으로 보아하니 이은석 박사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유희를 즐긴 것 같지는 않았다. 이은석 박사의 외모가 못생긴 것은 아니지만 피부가 전반적으로 시커멓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몽사몽의 에필로그에 언급되어 있는 이은석 박사의 주장에 의하면 어렸을 때는 백옥처럼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항변은 저자 사진을 보고 흑인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한 소리다. 

하지만 어릴 때 하얀 사람이 멜라닌 생성 세포가 더 많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한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새카맣게 변한다. 

-누구나 신천지를 찾고 싶어 하지. 하지만 시야가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사람들은 2QB 세상이라고 불리는 것이 내 입속인 줄도 모르고 다들 신천지新天地를 발견했다고 좋아 했지. 

-젠장! 입만 큰 괴물이었군. 아무튼 신천지라면 신천지겠지. 이빨 사이에 끼어있는 시체들의 살점 때문에 썩은 냄새가 풀풀 나서 혐오스러운 신천지지만.

-잘 아는군. 아무튼 내 입장에서 보자면 여러 인간들 중에서도 이은석 박사는 특히 큰 공을 세운 자라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나의 대리인이나 하수인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조력자라고 불러야 정확한 표현이겠지.

-아주 지능적이군. 하지만 아직까지도 조력자나 대리인 혹은 하수인이 필요하다는 것은 너도 100% 완벽한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겠군.

영욱과 두 번째 바벨탑의 대화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여차하면 공격을 가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지만 중심 회전축이 볼모 아닌 볼모가 되어서 묘한 평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존재는 없다. 나 역시 사람들의 허망하고 삿된 환상들을 먹고 사는 존재이니 완벽과는 아직도 거리가 좀 있지.

-진상의 하늘에 도달할 수 있다면 상황이 180도로 달라진다면서?

-그것 역시 또 하나의 허상일 뿐이다. 난 그저 주린 배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지금 나와도 거래를 하자는 것이냐? 무조건 죽이겠다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은데?

이은석 박사도 두 번째 바벨탑과 거래를 했을 거라는 전제하에서 던져보는 말이었다. 물론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녀석이 타협할 의사가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거래에 응할 자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야 네 녀석이 일단 나를 토해낸 다음에 처리할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내 생각을 네 녀석이 읽는다고? 정말 웃기는군.

-아쉽게도 모든 생각을 다 읽을 수 있는 아니지만 네 녀석이 내 생각을 읽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지.

영욱의 말은 그저 허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세상사는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에 조용한 바벨탑이 영욱의 생각을 읽으려고 할 때 그 반대의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역시 도전자다운 실력이군.

-허접한 마지막 도전자를 원했을 텐데 이를 어쩌나?

-너를 처리하고 나면 내 약점이 사라지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전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니 네가 마지막 도전자는 아닌 셈이지.

-사람들과 공존할 생각은 없나?

-망상과 삿된 욕망을 가지지 않은 자들로 이루어진 세상이라면 충분히 공존할 수도 있겠지. 최소한 너 정도만 되어도 이런 일은 없겠지.

영욱은 조용한 바벨탑과 제법 진지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잠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언제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려고 들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은영으로서도 가능한 일이니 주의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네가 그런 세상에서는 힘을 발휘하기 힘들 테니까 하는 소리겠지. 아무튼 그건 불가능한 조건이야. 내 말은 네가 조금만 욕심을 비운다면 공존의 가능성이 커진다는 소리야.

-공존해서 뭐하게? 나는 지금 불편한 게 전혀 없는데.

-네가 사람들의 꿈을 이런 식으로 지배하면 네 먹이인 망상이 더욱더 늘어나겠지만 그것이 오히려 너로 하여금 파멸을 불러올 것이다.

-그게 무슨 억지 논리냐? 나는 망상을 많이 먹을수록 강해지는 존재라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냐?

-망상의 끝은 좋지 않지. 망상을 가진 사람들의 끝 역시 좋지 않지. 그러니까 네가 취할 수 있는 망상의 총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 거라는 말이지.

영욱은 공학도답게 수학적인 주장을 늘어놓았다. 물론 궤변에 가까운 주장이었다.

-망상이 망상을 낳는 법인데 얼어 죽을 개소리를 하다니.

-망상조차도 사람이 건강해야 꿀 수 있는 것이니까.

-지금 나더러 양을 사육하라는 말을 하려는 거냐?

-표현이 좀 거북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공존하자는 거지. 완벽한 지배 체제가 더 나은 생산 효율을 보장하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너도 알겠지만 오히려 더 빨리 망해버렸지.

이번에는 공산주의를 들먹이기도 했다. 물론 제대로 알고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건 완벽하지 않아서 그런 결과가 나온 거야.

-네가 나를 삼키더라도 도전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말과는 상반되는 주장이군. 완벽完璧이란 있을 수 없는 거잖아. 구슬의 흠집이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야.

-나쁘지 않은 주장이군. 하지만 너를 삼키고 난 후에 다음 도전자와 함께 그런 세상을 만들어갈 생각이니까 너는 그만 포기해라.

-나는 싫다고? 왜지?

-내 약점을 너무 많이 알고 있으니까 싫어하는 게 당연하잖아.

-이 중심 회전축이 네 약점 중의 하나일 거고, 이은석 박사가 너의 또 다른 약점이라는 거냐?

-맞아. 아무래도 그 자가 2QB에 대한 진실을 세상에 알리게 되면 파급 효과가 적지는 않겠지.

두 번째 바벨탑은 영욱이 자신의 생각을 읽는다는 말을 아직도 믿지 않는 듯했다. 믿는다면 일일이 대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욱의 말은 두 번째 바벨탑의 생각을 읽지 않고서는 쉽게 뱉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닌 부분도 많았다.

-내가 읽었던 소설 중에 너와 아주 흡사한 존재가 있지. 사람들의 시간을 훔쳐서 호의호식하는 회색신사들처럼 너도 사람들의 꿈을 훔쳐서 연명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그게 비록 망상이라고는 해도 그 사람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꿈인데 말이야.

-내 정체를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구나. 그 점이 바로 내가 너를 제거해야만 하는 이유라고 볼 수 있겠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 오직 나 혼자뿐일 것 같으냐?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너 혹시 지금 이곳이 완벽한 2QB 세상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영욱은 갑자기 자신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느끼고 다소 엉뚱한 소리를 했다. 아마도 자기 소유의 산이나 임야 위를 지나갈 때 나타나는 현상인 듯했다.

-피의 페스티벌이 벌어지는 장소니까 현실 세상과 포개진 부분이지. 하지만 거의 내 입 속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현실 세상의 영향을 벗어나지는 못해. 게다가 내 몸도 현실 세상의 몸이잖아. 그러니까 도전자란 곧 육체를 가진 상태로 너와 마주하는 것이겠지. 어때? 내 말이 맞지?

-잘 아는군.

-내 꿈만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흡수하겠다는 저의는 내 몸을 네 몸뚱이를 구성할 성분으로 사용하겠다는 거겠지?

-잘 아는군.

-꿈을 지배하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 일도 있는 모양이군. 설마 직접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건 꿈만으로는 도저히 실현시킬 수 없는 감정일 테니까 말이야.

영욱은 두 번째 바벨탑마저도 은영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렇다면 그도 은영의 춤을 구경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영욱의 몸을 차지하려고 모습을 드러낸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시간을 늦추면 영욱이 먼저 그녀를 취해버릴지도 모르니까.

-맞아. 내 마음을 읽는다는 게 진실이었군.

-난 너처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지는 않아. 내 여자들을 이곳으로 끌고 온 이유 역시 나를 처리한 후에 당당하게 내 여자들을 취하기 위함일 테지.

-빙고! 곧 그렇게 될 거야.

-애석하지만 저 여자들은 나를 원하는 게 아냐. 나의 능력을 원하는 것이지. 

-그러한 능력쯤은 내가 더 잘 발휘할 수 있다. 그러니 네 여자들은 나를 따를 거야.

-정말 한심한 녀석이군. 겨우 여자 몇 명을 취하기 위해서 결함투성이에 불과한 몸을 가지겠다는 거잖아. 그게 바로 허상이 아닌 진상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신을 자처하던 존재마저도 은영의 매혹 초능력에 끌린 듯했다. 물론 그녀의 노예가 되지는 않겠지만 하렘을 건설할 망상을 꾸게 되는 데에는 은영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영욱은 자신처럼 은영을 저평가하는 남자는 세상에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 세상을 내 아이들로 가득 채울 계획이다. 그러니 몇 명이 아니라 몇 억도 되겠지.

-꿈도 야무지군. 좋아. 그렇게 된다고 치자. 하지만 그 다음은?

-그 다음이라니?

-네 아이들의 꿈을 빼앗아서 연명하면 기분이 좋을까? 또한 네 아이들끼리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그건 근친상간이 아닌가?

-그런 윤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인간들이 만든 가소로운 규제일 뿐이야.

하렘도 나쁘지 않지만 세상을 전부 자신의 자식으로 채우는 것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바벨탑은 별로 걱정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그것은 그럴 생각이 없든지 모든 세상을 자신의 자식들로 채울 수 없다는 소리다. 

-사람들이 그런 윤리를 만들어낸 이유는 근친 교배가 유전적으로 엄청난 결함을 가지고 있음을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지.

-망한다는 거냐?

-네 아이들로만 채워진 세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멸망하게 될 것이다. 내 예측으로는 불과 10대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너도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 지는 짐작할 수 있겠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뭔가 대안이 있는 모양인데 그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네가 진상으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면 너 역시 생로병사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머지않아 죽게 된다는 소리지.

-웃기지 마라. 나는 불멸의 존재다.

-진짜 불멸의 존재라면 굳이 사람들의 망상을 빼앗아 먹어야 연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의식주의 해결과 생로병사를 혼돈하지 마라. 게다가 식사에는 연명의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과연 그럴까? 아무튼 나의 몸을 차지하려면 어디 한 번 그렇게 해봐라.

영욱은 상대가 아직까지는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적어도 자신의 몸을 차지하고 말고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바벨탑이 자신에게 과도할 정도의 유예 기간을 주고 지금도 싸움을 보류하는 이유가 바로 혹시라도 닥칠지 모를 사멸에 대한 우려 때문인 듯했다. 제대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는 것처럼.

-의외로 포기가 빠른 편이군.

-내 몸속에서 싸우자는 말인데 그게 왜 포기라고 생각하는 거지? 어차피 내 영혼을 제압하고서 그 자리를 차지할 계획이잖아. 안 그래?

-내 생각을 너무 잘 읽는군. 좋아, 좀 이른 감이 없지는 않지만 네가 원하니 그렇게 해주지.

-어서 들어오너라. 하지만 이제부터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하하!

영욱은 눈을 감고서 자신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현실과 2QB가 겹쳐진 곳에서는 꿈을 꿀 수가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약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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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낯선 산비탈에서 눈을 떴다. 힘이 불끈 솟는 걸 보니 아마도 자신의 명의로 되어 있는 땅인 듯했다. 이어서 두 번째 바벨탑이 영욱과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꿈을 지배하는 자가 바로 나다. 그런데도 감히 지옥을 운운해?

-꿈을 훔치는 자가 바로 너겠지? 게다가 여긴 내 꿈속이다. 그러니까 너에게는 이곳이 지옥이 될 수밖에.

-싸우지 않고 그 간지러운 대사를 언제까지 계속할 건가? 

-내 썰렁한 멘트 때문에 온 몸에 닭살이 돋는 것 같지? 이제부터 지옥이 시작될 거야. 

-그야말로 '족'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두 번째 바벨탑은 권투 자세를 취하면서 걸쭉한 욕을 쏟아놓았다. 말싸움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으니 실컷 두들겨 팰 심산인 듯했다. 하지만 영욱의 잔상침 공격이 더 빨랐다. 물론 두 번째 바벨탑으로서는 피하지도 않고 그냥 맞아주었다.

-이제부터 가려움의 지옥부터 경험해보도록 해라. 아토피는 지옥의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니까.

-응? 정말로 가렵잖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20년 이상 앓아왔던 가려움에 대한 기억을 몽땅 잔상침에 담아서 너에게 보냈으니까 아주 가려울 거다. 하하하!

-누구 마음대로 네 기억을 보내? 

-여긴 내 꿈속이니까 아무래도 내 마음대로 될 공산이 더 크겠지. 안 그래?

-나는 꿈을 지배하는 자다. 그러니 네 꿈이라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분명히 그래야 하는데 영욱의 저항은 자신의 상상 이상이었다. 심지어는 공격을 당하기까지 했으니 두 번째 바벨탑으로서는 싸우는데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영욱의 능력 또한 상상 이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너는 고작 남의 꿈을 훔치는 자야. 그러니 내 꿈이니까 달라질 것은 아주 많아. 더구나 내 영역이라면 네 녀석의 좀도둑질이 통할 리 없지.

-강원도 일대가 너의 소유라는 주장은 아무래도 좀 과하군 그래.

-그야 당해보면 알게 될 일이지. 그럼 가려움을 좀 더 강하게 느끼도록 해주지.

영욱은 포크를 소환하고는 얼른 탑승을 완료했다. 그러자 두 번째 바벨탑도 비슷한 크기로 커지면서 대항할 자세를 취했다. 한없이 커질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는 않는 듯했다.

-어설픈 기계체조 따위로 나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시니어를 어떻게 보고 감히 이런 장난을 치려는 것이냐?

-네 녀석이 시니어라고? 웃기고 있네.

-뭐가 웃긴다는 거지?

-너는 시니어가 아니라 한 때 시니어였던 자의 망령일 뿐이야. 아무튼 이 2QB 세상이라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소리군.

영욱은 경시동작 잔상무 초식으로 두 번째 바벨탑과 손을 섞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텔레파시를 주고받은 것은 잊지 않았다. 아직 서로가 힘을 제대로 발휘하는 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치 하나는 무지하게 빠르구나. 잉?

-얼씨구! 사투리까지.

-어차피 정체가 드러났는데 굳이 숨길 이유는 없겠지. 잉?

-가려우면 긁어. 인상만 더럽게 쓰지 말고. 

영욱은 싸우는 것을 잠시 중단하고 뒤로 물러섰다. 말처럼 등을 긁을 시간을 주려는 게 아니라 최후의 초식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참을 수 있어. 이깟 가려움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그럼 계속해서 참고 있어. 잔상 오체분시!

-그, 그만해! 간지럽잖아. 하하하하!

영욱은 포크를 다섯 대로 늘여서 자칭 시니어라고 주장하는 조용한 바벨탑의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 총 다섯 군데를 붙잡고 잡아당기면서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등을 사정없이 간질이기 시작했다. 

좀 유치하긴 하지만 꼭 피가 튀고 뼈가 부러져야 효과적인 전투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대는 자신을 불멸의 존재로 착각하는 시니어의 망령이니 소멸시킨다는 것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입만 무지하게 큰 환수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

그러니 가려움이라는 지독한 경험을 맛보게 해주는 길만이 그가 진상이 되려고 하는 시도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영욱 자신을 마지막 제물로 선택하지는 못할 것이라 여겼다. 평생 고질적인 피부병으로 고생할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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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바벨탑은 아주 간단하게 오체분시를 무력화시키면서 영욱의 공격을 벗어났다. 하지만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독한 통증이라도 곧 내성이 생기는 법인데 이 가려움은 왜 줄어들지가 않는 거지?

-네가 천형天刑이라는 아토피를 알 리가 없지.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가려움이야. 내가 겪은 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고 봐야겠지.

-이, 이런 가려움을 이기려고 드림헌터가 되었던 것인가?

-물론이지. 하지만 그보다는 기계체조를 배운 게 가려움 해소에는 더 큰 도움이 되었지.

영욱은 가려움의 효과가 기대 이상으로 크고 오래 가자 추가적인 공격은 보류하기로 했다. 공격이 오히려 가려움을 완화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려움을 견디기 힘들어할 거라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네가 간식으로 삼는 마나와 바나의 성질이 급하고 뜨거운 열기를 내포하고 있기에 그런 예상을 했었지. 하지만 네가 나를 마지막 도전자로 삼은 것이 결정적인 실수였다고 봐야겠지.

-나는 불멸의 존재니까 이따위 가려움만으로는 승부가 달라지지 않아.

-그러니까 더 위력적인 공격이라는 거다. 불멸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지독한 가려움으로 고통 받게 될 것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너를 살려 두지는 않아.

말싸움으로는 영욱의 압승이었다. 또한 서로의 정신을 장악하는 게 이 싸움의 목표이니 영욱에게도 일말의 승산이 생기기 시작했다.

-네 능력이라면 당연히 나를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벅벅 긁으면서 여자에게 접근하면 여자들이 좋아할 것 같아?

-너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여자들이니까 겨우 그 정도로 문제 삼을 것 같지는 않은데?

-넌 여자를 모르는구나. 예전에 은영이 나를 버리고 떠났던 적이 있었지.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틈만 나면 벅벅 긁는 버릇 때문이었어.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은 내가 그 버릇을 고쳤기 때문이지. 너도 짐작하겠지만 그녀의 취향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야.

영욱은 아토피를 악화시킬 만한 행동들을 서슴지 않았다. 땀을 흘리는 것은 물론이고 일부러 자신의 몸을 박박 긁어서 가려움을 더욱더 증폭시키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물론 긁는 영욱 자신도 가려워서 미칠 것 같았다. 피가 나도록 손톱으로 벅벅 긁어서 온 몸에 선혈이 낭자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서 영욱보다 더 가려워하는 존재는 바로 2QB를 자처하는 시니어의 망령이었다. 

웬만한 질병이라면 간단하게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였지만 아토피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듯 했다. 게다가 증상의 악화를 자초하는 영욱의 행동으로 가려움은 더욱더 심해지기만 했다.

-이 버러지만도 못한 사퍼모어 주제에 시니어를 농락하다니, 죽어라!

-흥! 나는 아직도 프레시맨이다. 그리고 영원한 프레시맨일 것이다.

결국 견디지 못한 시니어 망령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소멸시키겠다는 듯이 영욱을 덮쳐왔다. 그러자 아주 강력한 기운들이 사방으로 요동을 쳤다.

영욱은 80% 경지에 오른 기계체조 경시동작을 총동원해서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래도 불가능할 것 같았지만 그냥 포기하고서 목을 내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방어가 가능했다. 

-어쭈! 프레시맨 주제에 그걸 막아냈어? 

-프레시맨도 막을 수 있는 수준의 형편없는 공격력을 가지고 뭘 그래?

-좋아! 그럼 또 막아봐라!

-뭐야? 이게 무슨 공격이야? 좀 더 힘을 써보라고.

영욱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상대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면서도 깐죽거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야 상대가 열을 받을 것이고, 그것은 곧 지독한 가려움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가려움 때문에 분산된 정신력으로는 최고의 공격을 펼칠 수가 없다.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영욱은 벌써 소멸 당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만큼이나 강력하기 짝이 없는 공격이었기 때문이다.

-언제 이렇게까지 강해진 거지?

-원래부터 강했다. 하지만 다 보여줄 필요가 없어서 숨겼을 뿐이지. 병신아.

-이 교활한 놈 같으니라고.

-교활하다기보다는 자신의 실력을 어느 정도는 감추는 것이 곧 승리할 수 있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는 숨겨둔 실력이 전혀 없어서 예상했던 것보다도 전혀 강하지가 않구나. 도둑질 말고는 별로 잘하는 것도 없잖아.

영욱은 조용한 바벨탑이 이중천금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운을 훔치는 능력은 최고지만 그게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강자들을 피해 하늘을 떠다니면서 도둑질이나 하는 것이다.

-그래봐야 이 싸움은 내가 이길 거다.

-아니, 머지않아서 네가 항복하게 될 거다. 가려움이 더더욱 심해질 테니까.

-어떻게 이렇게 가려울 수가 있는 거지? 정말 아토피란 병이 이렇게 가려운 거야?

-그야 다분히 상대적이지. 수십 마리의 벌레에게 물려도 멀쩡한 사람이 있는 반면 한 마리에게 물려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사람도 있지. 그게 바로 내성의 차이인데 불멸을 운운하던 네 녀석이 그런 지저분한 일들을 당해봤을 리 없으니 내성 역시 있을 수 없는 거지.

피부병에 관해서라면 어지간한 피부과 의사보다도 아는 게 많은 영욱이었다. 그러니 입만 열면 해박한 의학 지식이 줄줄 흘러나왔다. 그것도 두 번째 바벨탑을 절망시키는 내용으로만 골라서.

-그렇다면 시간이 지나면 나에게도 그 내성이라는 게 생겨나겠군.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네 마음대로 시간을 빠르게 흘려보낼 수는 없을 테니까.

-설마 나보다 네 놈이 시간을 더 잘 다룬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방해할 정도의 능력쯤은 가지고 있지. 

영욱은 두 번째 바벨탑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해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근접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여러 가지로 만들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었다. 몇 차례 시도해보던 두 번째 바벨탑은 영욱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맨 주제에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질 수 있다는 거지?

-프레시맨으로서야 불가능하겠지만 기계체조는 꽤 잘 하는 편이니까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거기서 갑자기 기계체조가 왜 나와?

-기계체조도 시간을 다루는 무술이거든. 그 정도쯤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하찮은 기계체조 따위는 관심 없다. 아무튼 내가 똥 밟은 것이 확실하군.

-똥을 밟아? 맞아, 아주 지독한 똥을 밟았지. 하하하!

영욱은 자신이 조금이나마 승기를 잡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온 몸을 벅벅 긁어댔다.

사실 영욱만의 힘으로 이 시니어 망령에게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자발적으로 목숨을 바친 여러 괴인들의 기운은 물론이고 부하들과 세 여자들도 모두 힘을 합쳤기 때문에 가능한 저항이었다. 노예들의 소환은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세 여자조차도 소환이 가능했다.

이중천금 역시 큰 힘을 보탰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 것은 마법사들의 마나였다. 각 층을 관리하던 마법사들이 영욱의 꿈속으로 달려와서 자발적으로 마나를 보내주었던 것이다. 

마법사들에게 가장 끔찍한 존재는 바로 조용한 바벨탑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헬렌 킬러와 휼버린도 연락을 받고서 달려왔다.

그리고 기계체조 역시 일등공신이었다. 시니어의 공격마저도 막아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기계체조 경시 동작이었다. 게다가 막대한 마나와 유나와 바나의 유입으로 가파르게 증가하는 기계체조의 경지가 큰 도움이 되었다.

영욱은 이제 소극적인 수비뿐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공격까지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겨우 포클레인 따위로 나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 덕분에 기계체조의 경지가 무려 10%나 올랐지 뭐야? 그래서 이 정도의 공격이라도 가능해진 거지. 어때? 좀 아프지?

-아직은 가소로운 수준의 공격이다. 겨우 이 정도의 충격으로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하나도 안 아프겠지. 나로서는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으니까 참아줘.

영욱은 자신이 개발한 기계체조 실전 동작으로 계속해서 공격을 시도했다. 어느 순간 잘 피하고 있던 두 번째 바벨탑의 동작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만든 실전 동작 중에 침술과 비슷한 수법이 있지. 너무 가늘어서 눈에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냥했던 환수들의 각종 더러운 부분과 치명적인 독을 버무린 엑기스를 듬뿍 묻혀두었지. 그러니까 간질간질할 거야.

-그런데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뭐지?

-겨우 백족의 독정인데 설마 그 정도로 마비되었다는 거야? 그리고 그것은 마비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통증을 선사하려는 것인데 네가 뭔가 착각한 거 아냐?

영욱은 딴청을 피웠다. 시니어 망령을 마비시킨 것은 다름 아닌 잔상침과 독정의 놀라운 효과였다. 독정의 성분인 고농도의 세로토닌이 묻은 침들은 일시적인 마비 효과를 불러일으켰던 것이었다. 마치 혈도를 누른 것처럼.

평소라면 잠깐의 마비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란 보잘 것 없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영욱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려운 부위를 긁을 수도 없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법이긴 하다만 나를 어쩌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네 녀석이 이룬 기계체조의 경지로는 어림도 없다.

-내 경지가 보여?

-나는 불멸의 존재니까 당연하지. 

-불멸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너 그냥 넘겨짚은 거지?

-91%군. 나를 어찌 보고 그런 개소리를 하는 거야? 잉?

놀랍게도 두 번째 바벨탑 역시 은영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척보면 상대의 경지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방금 1%가 또 올랐는데 91%라고?

-그렇군. 이제 92%군. 제법 빨리 오르는 편이군.

-또 올랐다.

-정말 93%잖아. 어떻게 이런 일이?

-진상의 기운이 도움이 되고 있어. 하하하!

영욱은 빙그레 웃으면서 두 번째 바벨탑을 빤히 쳐다보았다. 

-지, 진상이라니?

-진상이 되고 싶어 하는 너 말이야. 

-이런, 이제 보니 내 기운을 훔쳐가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럴까? 또 1%가 올랐는데?

-젠장! 94%잖아.

-안색이 왜 그래? 똥색이잖아. 이젠 너를 어찌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거야?

두 번째 바벨탑은 마비 증세로 인해 기운을 빼앗긴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영욱이 아니라 이중천금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도둑질이 가능한 것일 지도 몰랐다. 아무튼 진상의 기운은 영욱에게로 전해져서 가파른 성장의 밑거름이 되고 있었다. 진상이 아니라 진국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았다.

-흥! 100%가 되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

-또 올랐다. 아싸! 95%다.

-네 녀석의 행운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모르지만 100%는 어림도 없다.

-왜지?

-100이라는 숫자는 깨달음으로써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니까.

-이것도 화룡점정 작업이 필요하다는 건가? 하긴 100점 받기가 좀 힘들긴 하지.

영욱은 별로 어렵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왜냐면 100점은 많이 받아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포기해라.

-내가 왜? 또 올라서 96%인데.

-그래봐야 소용없다니까 그래.

-네 녀석이 얼마나 많은 존재들의 꿈을 삼켰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겠다.

-그걸 네 녀석이 어떻게 알아?

-기운의 가짓수가 많을수록 나에게는 더 큰 도움이 되는데 방금 또 1%가 올라서 97%가 되었으니까 하는 말이지. 이게 네 녀석의 기운이 그야말로 짬뽕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거지. 이것저것 막 섞어서 만드는 짬뽕 알지?

-내가 허접한 인간들의 기운을 빼앗아서 대체 어디에 쓴단 말이냐? 그건 말도 안 돼.

두 번째 바벨탑은 진짜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간들의 기운을 빼앗은 적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욱의 견해는 전혀 달랐다.

-몽상이나 망상 역시 기운의 일종이라고 봐야지. 오히려 액체가 아니라 기체에 가까우니까 활성화된 기운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건 억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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