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영욱이 괴인에게 말을 걸었다. 아직도 죽은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형님! 이젠 죽은 척하지 않아도 됩니다."
"뭐, 뭐야? 네가 날 살려준 거야? 고맙다! 정말 고맙다."
"그게 아닙니다. 다만 갑자기 형님이 제 옆으로 소환되기에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죽은 사람이 소환에 응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내가 네 옆으로 소환되었다는 것은 너의 노예가 되었다는 거잖아."
괴인의 목숨은 질기고도 질겼다. 그리고 너무나도 교활했다. 하지만 영욱은 애초부터 이 괴인을 노예로 거느릴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괴인의 꼼수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가 스스로 이동한 것이기 때문이다.
"형님 같이 강한 분이 노예가 될 리 없다는 걸 잘 압니다. 사실 제가 소환한 것도 아니고요."
"그냥 대충 넘어가주면 안되겠냐?"
"그러고도 싶지만 딸린 식구가 많아서 죄송합니다. 다만 형님이 마지막으로 직접적인 실력대결을 원하시는 것 같으니 제가 몸으로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트랜스파워 대결에서는 운 좋게 영욱이 이겼지만 실제 전투에서는 이긴다는 보장은 결코 없다. 하지만 영욱은 별로 긴장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중천금
"너 혼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미 혼자의 몸이 아니고, 혼자의 목숨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
"젠장! 끝까지 빈틈을 보이지 않는군."
"그건 형님께서 너무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태까지 형님만큼 강한 분은 보지도 못했습니다."
영욱은 벌써 이박삼일 동안 괴인을 상대하면서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여태까지 싸웠던 환수들은 애들 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피가 튀는 싸움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력 대결과도 같은 트랜스파워 싸움이야말로 모은 것을 다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활인심방이 없었다면 승패를 떠나서 벌써 탈진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 두 번째 바벨탑이라는 곳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용담호혈인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겨우 201층에 둥지를 튼 이름도 모르는 괴인이 이 정도인데 다른 층은 어떨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영욱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바벨탑을 올라갈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비행기 태우지 마. 그래놓고도 날 죽일 거잖아."
"그것은 형님이 여태까지 인생을 살아오신 방식 때문입니다.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을 몰살시켰으니 저도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개과천선改過遷善이라는 것도 있잖아."
"개 꼬리는 삼 년을 묻어두어도 여전히 개 꼬리라는 말도 있습니다."
"너는 나를 죽이면 안 된다는데 자꾸만 이럴 거야?"
괴인은 대화 도중에 갑자기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말로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으니 영욱을 기습해서 제압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영욱은 그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준비된 한 수를 내놓았다.
"소희야! 블라인드."
"예. 블라인드!"
퍽! 퍽!
영욱은 공간의 제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니 포크를 소환했다. 그리고 아주 잠시 눈이 먼 옆집 괴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다.
"제법 손길이 맵구나."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더 갈고 닦아야 하는 줄 잘 알고 있습니다."
"맞아. 특히 네 녀석의 동작에서 뇌쇄적인 기운이 줄줄 흐르는 점은 고치는 게 좋겠구나. 너는 남자인데다가 로봇의 모습이니까 별로 효과가 없어."
"그렇군요. 이제부터는 좀 더 씩씩하게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영욱은 괴인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자신도 모르게 흐느적거리던 동작을 조금은 딱딱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여자도 아니고, 여자를 상대로 싸우는 게 아니니까 뇌쇄적인 기운이 필요할 이유가 없었다.
퍽! 퍽!
"이제 훨씬 낫군. 하지만 결정타로는 아직도 많이 부족해."
"좀 더 강력한 초식이 있긴 한데 그런 걸 형님에게 사용하기에는 좀 그래서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할 말 다하고 거품을 물어가면서까지 두들겨 패면서 뭘 아직도 배려한다는 거야?"
"이런! 들켰군요. 하하하!"
영욱은 겉으로는 껄껄 웃는 한편 은밀하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형님도 짐작하시겠지만 지켜보는 눈이 있어서 최후의 초식만큼은 숨기고 싶습니다. 그래도 궁금하실까봐 힌트를 드린다면 오체분시五體分屍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섯 개의 잔상이 아니라 모두 진짜라는 건가?
-잔상이면서도 모두 실상이지요. 또한 실상이면서도 모두 잔상이지요.
-좋아. 믿어주지. 지금부터 잘 들어.
-뭘요?
-내가 죽기 전에 알고 있는 정보는 알려주고 죽어야지. 내 바깥방에는 총 19명의 강자들이 머물고 있는데…….
-왜 갑자기 말씀을 멈추십니까?
-살려주면 나머지를 다 말해줄게. 이박삼일 동안 이야기해도 부족하니까.
-제가 파악한 바로는 겨우 20팀 정도인데 무슨 이박삼일이나 필요하다는 겁니까? 그리고 형님처럼 남의 기운을 빼앗지 않는다면 다 알아야할 이유도 없고요. 무엇보다 형님을 보내고 나면 도전자가 될 텐데 굳이 다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을까요?
텔레파시를 교환하면서도 영욱은 결코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 옆집 괴인의 초능력은 기운을 빼앗는 것에 특화되어 있는지 직접적인 교전 능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러니 구타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영욱의 기계체조가 뛰어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연히 파악해야할 필요가 있지. 그들을 모두 네 부하로 거느리든지 그들의 힘을 몽땅 흡수해야 너에게도 조그만 승산이라도 생길 테니까.
-대부분이 꺼지기 직전의 촛불들인데 무슨 도움이 될까요? 시체 치우는 일이라면 사절입니다.
-그들을 원래대로 되돌릴 힘이 너에게 있잖아.
옆집 괴인은 영욱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오로지 빼앗는 일만 할 수 있지만 영욱은 나눠주는 일도 아주 잘 한다는 것을.
-하지만 저는 오지합졸을 원치 않습니다. 그들이 힘을 되찾는다고 해도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군요.
-너라면 그들을 충분히 충성스러운 부하로 만들 수 있어. 그리고 내가 옆에서 도와주지.
옆집 괴인의 살아남으려는 집념은 정말로 지독했다. 남의 목숨을 휴지조각처럼 여기던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었다. 영욱은 이 모습을 보면 볼수록 이 괴인을 절대로 살려놓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다.
-당장 형님이 문젭니다.
-날 믿어봐. 솔직히 너의 노예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어주는 것은 가능하니까.
-일단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생각하는 동안 그만 좀 때리면 안 될까?
-그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하던 대로 계속하는 게 낫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쳐다보는 눈이 있어서…….
-정말 지독하군. 마음대로 하게.
둘 사이의 대화는 물론이고 텔레파시마저도 끊어진 상태에서 지독한 구타가 하루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영욱은 결론이 아직 나지 않은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서 포크로 잔상무를 계속 춰댔다. 마치 신들린 것처럼 푸닥거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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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중천금重千金이야. 제발 날 좀 믿어줘.
반면에 옆집 괴인은 틈만 나면 이야기를 걸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까지 했는데 얼핏 들어도 본명은 아닌 듯했다. 남아일언 중천금에서 따온 단어가 분명했다.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허튼 수작이었다.
-저는 박영욱입니다. 형님.
-왜 날 믿는다는 말을 하지 않는 거지?
-죄송하지만 저는 사람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행동만을 믿는다는 소리냐?
-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중천금의 행동만큼은 믿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중천금의 행동에는 영욱도 어쩔 수가 없었다.
-좋아. 너에게 무릎을 꿇지. 나 중천금은 박영욱을 주군으로 모시고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맹세한다.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형님.
-저를 믿어주십시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보여드리겠습니다. 주군.
-알겠으니까 일단 머무시던 곳으로 돌아가십시오.
-예. 주군.
결국 영욱은 중천금을 죽이지 못하고 부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중천금을 믿어서가 아니라 위험을 늘 옆에 두고 경계하는 것도 강해지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억지로 마음을 고쳐먹었기 때문이다.
사실 앞으로 힘을 키우는 과정에서 모든 부하들을 믿을 수 있는 자들로만 채울 수는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친위대 성격의 부하들은 이미 만들어 두었으니까 지금부터는 배신 가능성이 있는 자들도 포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들을 전투의 선봉에 세우고 영욱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만 싸우게 하고, 끊임없이 감시하다가 혹시라도 배신의 기미가 보이면 그때 바로 처리하는 것도 전력의 수직 상승이라고 본 것이다.
물론 그런 이유만으로 중천금을 살려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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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천금이 사라지자 곧바로 로빈이 나타나서 영욱을 꾸짖기 시작했다.
"왜 처리하지 않았느냐?"
"오셨습니까? 로빈 님."
"그 녀석을 왜 처리하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느냐?"
"살려주면 다른 방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면서 협상을 제의해 오더군요. 하지만 실질적인 이유로는 제게 결정타가 없어서입니다. 승기를 잡긴 했지만 죽이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영욱은 조금은 과장해서 변명을 했다. 굳이 죽이고자 했다면 오체분시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속여야 하는 대상은 비단 중천금만이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변명을 하는 것이다.
"그래도 이중천금泥中天衾의 말을 믿은 것은 자네의 명백한 실수야."
"이름이 중천금이라고 들었는데 아니던가요?"
"성이 이 씨지. 천금도 많은 금을 의미하는 게 아니고."
영욱은 로빈이 말하는 천금의 뜻이 무엇인지 정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중천금이 한자를 밝힌 것도 아니니까 그때는 당연히 알아차리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천금이라면 혹시 시체를 관에 넣고서 그 위에 덮는 이불을 의미하는 겁니까?"
"맞아. 잘 아는군."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니군요."
"그것도 진흙 속에 묻힌 천금이니까 결코 좋은 의미는 아니지."
'이' 씨도 오얏 리가 아니라 오물이나 진흙을 의미하는 니泥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실수를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일단은 살려주기로 약속했으니까 당분간은 지켜보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다 기회가 생기면 확실하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하게나. 그 자는 냉혹하고도 교활한 자야. 무엇보다 집요하기가 이를 데 없지."
"예. 로빈 님."
로빈은 고개를 잘래잘래 저으며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거의 다 된 밥인데 갑자기 재를 뿌린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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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이 사라지고 나자 영욱은 중심 회전축에 바짝 기대서 헤드 스핀을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하는 부하들은 누구든지 간에 보호막 기어를 배 주위에 만들어 주었다.
이중천금을 살려두기로 한 것은 더 이상 기운을 흡수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뽑아냈는데도 상대가 여전히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화시킨 후에 또 다시 뽑아먹을 수 있다는 기대와 함께 오히려 때리다가 지쳐서 도리어 당할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튼 당장으로서는 영욱이나 부하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이중천금으로부터 빼앗은 기운을 소화시키고 흡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기계체조의 초식들 중에서도 특히 회전과 관련된 스핀 동작들은 소화 흡수에 탁월한 효용을 지니고 있어서 모두가 다른 동작 대신 헤드 스핀 자세를 취하고 빠르게 회전했다.
영욱이나 회전축의 속도에 비하면 불과 1%에 불과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낼 수 있는 속도는 결코 아니라서 소화 흡수의 효율은 아주 뛰어났다.
영욱은 소화 흡수를 핑계로 이중천금이 있는 방으로 다시는 건너가지 않았다. 솔직히 혼자서 그를 감당할 자신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이중천금 역시 영욱에게 기운을 빼앗긴 탓인지 침묵하면서 바위맷돌만 묵묵히 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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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이중천금으로부터 빼앗은 기운을 소화시키는 작업을 하면서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마법사 로빈은 내가 이중천금을 처리해주길 간절하게 바라고 있다. 그것은 바위맷돌만 돌릴 수 있다면 전혀 상관없다고 말하던 그의 말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동이다.'
그것은 이중천금의 어마어마한 생명력과 엄청난 파워 강탈 능력에 마법사인 로빈마저도 두려움을 느낀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영욱의 생각은 또 다른 부분에까지 미쳤다.
'중심 회전축이 흡수해야 할 기운의 일부를 이중천금이 가로채고 있기 때문에 제거하겠다는 결심을 한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나 역시 요주의대상이겠군.'
영욱은 이곳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이 아니라 같은 노예들끼리의 상잔을 이용하려는 것 역시 이중천금의 처리가 만만치 않다기보다는 다른 능력 있는 노예들의 움직임까지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일 거야.'
그러한 내용들을 종합해보자면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201층의 관리자인 로빈을 죽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의미인 듯했다. 그리고 누구든지 간에 201층에 있는 다른 존재들을 죽이거나 굴복시킨 다음 202층으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듯했다.
'그러자면 다들 힘을 감추고 있다는 소린데…….'
영욱은 제3의 눈이라는 기감을 넓혀서 201층에서 거주하고 있는 노예들을 다시금 면밀하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들 겉으로는 시들시들하게 보이지만 더욱더 정확해진 제3의 눈에 의하면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다들 강력한 기운을 숨기고 있는 절대 고수들이었던 것이다. 자신과 이중천금 따위가 넘볼 수 있는 상대들이 결코 아니었다.
'쩝! 복마전이 따로 없군. 겨우 201층이 이 정도의 춘추전국 시대라면 상층부는 대체 어떤 자들로 채워져 있을까.'
영욱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젓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었다.
'차라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게 더 나을 지도 모르겠군. 그래도 200층이나 되니 무사히 내려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겠지만.'
영욱은 이중천금을 죽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라면 실현 가능성이 가장 많은 탈출 계획을 세워두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알려준다는 보장은 결코 없지만.
하지만 당분간은 자신과 부하들의 전투력을 올리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서른여섯 명이 모두 달려들어도 옆방 괴인 하나를 어쩌지 못하는데 철옹성과도 같은 바벨탑의 탈출을 운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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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며칠이 지나서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향한 곳은 의외로 이중천금이 있는 곳이었다.
"형님! 몸은 좀 괜찮습니까?"
"왜 온 거냐?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이곳에서 꺼져!"
"벌써 약속을 잊으신 모양입니다. 아니면 제가 착각하는 건가요?"
"내 말을 믿었어? 내가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너를 어떻게 주군으로 모셔?"
이중천금은 자신감을 피력했다. 다시 싸운다면 자신이 이길 수 있다는 일종의 시위였다. 하지만 영욱은 예상했다는 듯이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나이 때문인가요?"
"나이가 아니라 실력을 말하는 거야. 나보다 약한 녀석을 주군으로 어떻게 모셔?"
"그래도 저한테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리지 않았습니까? 살려달라고 애걸해 놓고는 이제 와서 약해서 안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건 네 부하들의 도움 때문이지."
"그러니까 형님께서도 저를 좀 도와달라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 다른 노역장의 괴인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영욱은 이중천금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너의 실력을 잘 알고 있으니 더 이상은 까불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칫! 알고 있었나?"
"예. 로빈 님도 속을 정도로 기세를 잘 감추는 자들이 무려 20명 가까이 되더군요."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바벨탑 전체를 통 털어도 여기만큼 위험한 곳은 없을 거다.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나로서는 완전히 똥 밟은 거지."
영욱이 이곳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니 이중천금의 표정도 많이 밝아졌다. 영욱의 기세가 며칠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는 사실도 인지한 듯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너무 믿은 거겠죠."
"너와 내가 힘을 합친다고 해도 대적하기 힘든 상대들이야. 그러니까 탈출하겠다는 생각은 버려."
"그 말씀은 저들 몇 명만 이기면 탈출구에 접근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요?"
"엉? 네 녀석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제가 탈출하겠다는 말은 한 적이 전혀 없었는데 생각 자체를 버리라니까 하는 말이지요."
넘겨짚기와 상대의 말에서 숨은 마음을 읽는 것은 영욱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것이다. 물론 여자의 마음을 읽은 것은 아직도 서투르지만.
"그럼 위로 기어 올라갈 생각이었다는 거야?"
"아뇨. 아래로 내려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벨탑의 바닥에 구멍을 뚫어서 탈출하려고요."
"그럼 201층의 바닥부터 뚫으면 되잖아. 200층은 오합지졸들뿐이니까."
이중천금은 영욱의 탈출 계획이 터무니없음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런 시도를 했던 적이 있든지 그러한 시도가 불러들일 반향이 너무 큰 것이든지 간에.
"그것도 좋은 방법이군요. 하지만 로빈 님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200층의 관리 마법사도 당연히 좋아하지 않을 거고요."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올라가는 것보다는 쉽겠지만 200층까지 내려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아?"
"그러니까 형님과 내가 힘을 합치자는 거 아닙니까?"
"여기가 대체 어딘지 알고서 하는 소리야?"
"당연히 알고 있지요. 여기가 바로 2QB 세상의 핵심부가 아닙니까?"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
"이 2QB 세상의 비밀은 시간의 흐름을 어느 정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영욱은 자신이 지금 테스트를 당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중천금이 자신을 주군으로 모실 리는 없지만 동료나 의형제의 관계를 이어갈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평가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이중천금의 착각이지만 영욱은 성실하게 답변했다.
"알긴 아는군. 그리고 그 시간을 쥐락펴락하는 자들이 바로 주니어와 시니어라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
"또 있습니다."
"뭐가 있다고 그래?"
"바로 마법삽니다."
"웃기지 마! 마법사들은 그 축에 끼지도 못해. 시니어나 주니어가 만든 골렘도 이길 수 없는 자들이 시간을 어떻게 쥐락펴락한다는 거야?"
"마법사도 마법사 나름이겠지요."
영욱은 빙긋이 웃으며 시간을 다루는 마법사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마법사를 말하는 거냐? 그 녀석의 이름이 뭐야?"
"박영욱이라고 하는데 바로 접니다."
"하하하! 허접한 녀석이 농담은 제법 잘 하는군."
"농담이 아닙니다. 형님."
영욱은 갑자기 기세를 이중천금에게로 집중시켰다. 기세를 숨기는 괴인들을 관찰하다가 기세를 숨기는 요령과 집중시키는 요령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라더니 예전에 보부상 제임스에게 당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아, 아니, 언제 이렇게까지 강해진 거지?"
영욱이 강한 기세를 쏘아대자 이중천금은 하얗게 질려버렸다. 자신이 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수련을 좀 했습니다. 그게 시간을 다루는 마법사의 진정한 힘이죠. 이제는 제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 재주가 있다면 잡히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곳에 오지도 말았어야지."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서 말이죠.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고 해도 저는 여전히 여기에 있을 겁니다."
"네 눈빛이 왜 그래? 징그럽잖아."
영욱은 이중천금을 마치 맛있는 간식 쳐다보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맛을 다시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제가 이렇게 강해진 것은 전적으로 형님 덕분이니까요. 흐흐흐!"
"그동안 네 녀석이 몰래 내 기운을 훔쳐갔구나. 어쩐지 요 며칠 동안 맥이 하나도 없더라니까."
"훔쳐가다니요? 언제는 지킬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면서요."
"어쩐지 쉽게 회복되지가 않더라니 그런 일이 있었던 거였구나."
"쉽게 회복되었다면 저를 죽일 생각이었습니까?"
"그, 그럴 리가 있나? 난 단지 몸이 좀 찌뿌둥해서 그러는 거야."
정곡을 찔린 이중천금이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거렸다.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젠 제 부하가 되고 싶은 생각이 팍팍 들죠?"
"그냥 내가 형님하면 안될까? 대신에 일은 팍팍 도울게."
"저는 아무래도 괜찮지만 제 부하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영욱은 자신이 주군임을 강조했다. 이중천금은 여러 노예들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다.
"그까짓 녀석들이 불평해봐야 한 주먹에 조용히 시키면 될 거 아냐? 뭐가 문제야?"
"과연 그럴 수 있을까요?"
"이, 이럴 수가! 어떻게 네 부하들이 저렇게 강해졌지?"
"제가 시간을 좀 다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하들도 시간을 거슬러서 소환할 수 있으니까 당연히 강해질 시간이 있었지요. 여자들은 노예가 아니라서 불가능하지만."
박상태를 위시해서 반백신감들이 상당히 강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중천금이 벌벌 떨 정도는 결코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도시락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욱과 싸워서 이길 승산이 현저하게 줄어드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저, 저렇게 강한 부하들이 많은데 나 같은 건 왜 필요하다는 거지?"
"일단一段은 영양가 만점의 도시락으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싫어. 요즘 빈혈이 심해져서 안 돼. 그건 네가 더 잘 알잖아."
"이단二段은 길잡이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탈출구까지 안내해주십시오."
"삼단三段도 있어?"
"당연하죠. 운이 좋아서 탈출하게 되면 제 운전기사로 쓸 계획입니다. 세상에 풀어놓으면 뱀파이어가 출현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게 될 테니까요."
영욱은 이중천금을 철저하게 노예로 부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에 풀어놓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니까.
"피는 네 녀석이 나보다 더 잘 빨잖아?"
"저는 이제 기운만 골라서 빱니다. 피는 살찌거든요. 아토피에도 좋지 않고."
"내가 거절한다면?"
"많이 아플 겁니다."
"전에 때리던 정도로는 시원하기만 하던데?"
"매를 버시는군요. 포크 소환!"
"자, 잠깐만 기다려!"
이중천금은 항복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덩치를 포크 크기로 키워서 대항하고자 했다.
"대항하시겠다는 거군요. 그렇다면 바뀐 손맛을 좀 느끼고 나서 다시 대화를 재개하도록 하지요. 잔상지!"
"아악! 내 눈!"
영욱은 전혀 새로운 초식을 선보였다. 잔상지殘像指는 수십 개의 잔상으로 이루어진 손가락인데 그걸로 눈이나 급소를 찌르는 공격을 하게 된다. 잔상이 곧 실상이고 포크의 엄청난 출력과 하중과 속도가 손가락 끝에 집중되니 그 관통력과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그걸로 비명을 지르다니 형님답지 않군요. 다음 초식입니다. 얼음을 가장 쉽게 깰 수 있는 것은 바로 바늘이지요. 잔상침殘像針!"
이번에는 수백 개의 잔상으로 이루어진 바늘들이 허공을 빽빽하게 뒤덮으면서 이중천금을 사방팔방에서 찔러댔다.
"아악! 사람 살려!"
"제가 기계체조 50%의 경지를 돌파한 기념으로 직접 만든 초식입니다. 그러니까 실전 동작인 셈이죠."
"너, 너무 아파! 제발 살려줘."
"바늘에 찔려서 죽었다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그냥 아플 뿐이니까 견뎌보십시오. 사람이 자존심이 있지 벌써 항복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주인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영욱이 기계체조 50% 경지를 넘겼다는 소리를 듣더니 이중천금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 30%라면 어떻게 버텨 보겠지만 이미 그럴 상황이 아님을 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그럼 그러지. 하지만 넌 좀 더 당해야 해."
"사, 살려주십시오. 주인님."
"아직 멀었어. 잔상꿀밤!"
딱! 따닥!
크아아아!
말이 꿀밤이지 골프채로 후려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꿀밤 수만 개가 동시에 작렬했다. 그러니 맷집이라면 자신 있다던 이중천금도 발을 동동 구르면서 통증을 호소했다.
"이번에는 잔상똥침인데 막아봐야 소용없을 것이다. 똥꼬 대신 낭심도 가격하는 초식이니까."
퍽! 끄아아아!
그렇게 영욱의 새로운 초식 발표회는 계속되었다. 영욱이 개발한 실전 초식은 무궁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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