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71)

다음날, 마법사 로빈이 환수 고기를 넉넉하게 가져다주고는 영욱과 한동안 수다를 떨다가 사라졌다. 

"블링크!"

그러자 이곳저곳 눈치를 살피던 영욱도 아주 짧은 거리만을 이동할 수 있는 공간 이동 마법을 이용해서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동 거리는 짧아도 장애물을 통과할 수 있으니 꽤나 쓸모 있는 마법인 셈이다.

*옆집 괴인

그그그그.

영욱이 블링크로 이동한 곳은 바로 옆에 있는 노역장이었다. 그가 블링크로 이동할 수 있는 최대거리가 아직은 10미터에 불과하니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영욱은 혼자서 바위 맷돌을 돌리고 있는 괴인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실례합니다."

"넌 뭐야?"

"옆 노역장에 새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하하!"

"그건 알고 있는데 여긴 왜 왔냐고?"

"그냥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서 들렀습니다. 초대받지도 않고 불쑥 들러서 불편함을 주었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영욱은 굽실거리면서 나름 정중하게 예의를 차렸다. 그러면서도 대뜸 날아들지 모르는 불의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깥세상이라면 총을 맞더라도 변명할 게 없겠지. 하지만 이곳에서 초대장을 보내거나 받을 방법은 없으니 이 무례에 관해서는 그냥 넘어가기로 하지. 그런데 정말로 인사만 하러 온 거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곳 구경을 좀 해도 될까요?"

"둘러봐. 하지만 그곳이나 이곳이나 다를 게 뭐 있겠어? 바위맷돌을 돌려야하는 궤적이 조금 더 클 뿐이지."

"그런데 이 큰 바위맷돌을 혼자서 돌리고 계십니까? 정말로 대단하십니다."

괴인이 시큰둥하게 반응했지만 영욱은 잠시도 아부를 멈추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기도 했다. 바위맷돌의 크기가 자신의 부하들이 돌리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폭은 다소 좁지만 무게로는 서너 배 이상 나갈 게 분명했다.

"여기에는 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마법 채찍 정도는 별로 아프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만."

"너희들처럼 여러 명이 있으면 마법 채찍도 여러 개로 나뉘기 때문에 별 거 아니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나로 뭉친 마법 채찍은 상당히 아파. 물론 채찍이 두려워서 뱅뱅 도는 것은 아니지만."

"심심하신가 보군요."

영욱은 엄청난 포스를 풍기고 있는 괴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마법 채찍이 아프다면 슬쩍 피해버리면 될 것이기 때문이다. 36개가 뭉친다고 해서 더 빨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면도 있지만 조금 전에 환수 고기를 먹었으니까 소화시키기 위한 운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소화 활동에 도움이 되는 운동법이라도 알고 계시는 모양이군요."

"당연하지. 누구나 한 수씩은 가지고 있지 않겠어? 너희들도 묘한 체조를 하던데 말이야."

괴인은 5미터가 넘는 철벽 너머에 있는 영욱 일행의 행동을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파악하고 있었다. 영욱은 머리털이 뻣뻣하게 서는 것을 느끼면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견지했다. 사실 자신도 이 괴인의 행동을 어느 정도 살피고 나서야 이곳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저희들의 일을 환하게 알고 계시는군요."

"바로 옆집인데 들리지 않을 리가 없잖아."

"엿보았다고 타박하는 게 아니라 능력이 정말 대단하시다는 뜻입니다."

"소화 능력만큼은 대단한 편이지. 동료 서른 명을 다 먹어치우고도 확실하게 소화시켰으니까."

소리장도笑裏藏刀, 웃음 뒤에 예리한 칼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둘의 대화는 칭찬과 겸손 뒤에 노골적인 비난과 협박을 담고 있었다.

"설마 점잖으신 분으로 보이시는데 설마 동료들을 잡아먹기야 했겠어요?"

"내분이 있었지. 서로 의견이 다른 두 무리로 나뉘어서 싸우다가 결국은 모두가 자멸하고 말았지. 방치하면 썩어서 역한 냄새가 날 테니까 어쩔 수 없이 먹어치운 것이지. 그래도 잡아먹은 것이겠지만. 하하하!"

사체가 생기면 담당 마법사가 빠르게 수거해서 다른 노예들이나 환수들의 식량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니 썩어서 냄새를 풍길 일은 전혀 없는 곳이다. 그러니 이 괴인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굳이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왜 공포분위기를 조장하십니까?"

"네가 신부님이 아닌 줄은 나도 알아.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고해성사를 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그래. 속도 더부룩하고."

"속이 불편하다면 피를 조금 뽑아버리는 게 어떨까요?"

영욱은 협박과 공포분위기 조성을 생뚱맞게 고해성사라고 주장하는 괴인에게 아주 특이한 처방을 내렸다. 피를 뽑는 게 치료법이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혈瀉血을 말하는 건가?"

"잘 아시는군요. 저도 소화불량에 걸리면 손가락 끝에 피를 내곤 하는데, 그러면 그 핏방울과 함께 사기邪氣가 빠져나가서 거짓말처럼 개운해지곤 하죠."

영욱은 괴인의 병증을 과식으로 인한 소화불량이라고 몰아붙였다. 물론 버리는 피를 노리고서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한 방울이 아니라 적어도 한 바가지는 뽑아야 할 것 같군. 자네가 피 뽑는 것을 좀 도와주겠나?"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와버렸다. 괴인이 자신의 왼팔을 영욱에게로 내밀었건 것이다. 피를 뽑아 달라는지 갑자기 영욱을 잡아채려는 것이지는 알 수 없지만 영욱은 망설이지 않고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예. 경험이 많은 편이니까 그리 아프지는 않을 겁니다."

"하하하! 그 아픔이라는 것을 나도 제발 좀 느껴 보았으면 좋겠어."

"피부가 아주 질기시군요. 하지만 이제 다 끝났습니다."

"어라? 진짜로 피를 냈잖아."

괴인은 깜짝 놀라서 자신의 손을 빼냈지만 이미 상당량의 피가 흐른 다음이었다.

"블랙수달의 날카로운 이빨이 제법 도움이 되는군요."

"그렇다면 그 녀석을 잡은 적이 있다는 거야?"

"예. 그 녀석을 아세요?"

"당연히 알지. 그 녀석의 기운이 소화에 아주 큰 도움이 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지."

괴인도 블랙수달의 막강한 소화 흡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발 그 기운을 좀 나눠달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피를 뺐으니까 곧 체기滯氣가 가라앉을 겁니다. 하하!"

"조금 나은 것 같지만 아직도 많이 더부룩해."

"그럼 피를 좀 더 뽑을까요?"

"그보다 자네가 가지고 있는 블랙수달의 기운을 내게 좀 나눠주면 안 되겠나?"

"그러고 싶지만 제가 빈혈이 좀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하하!"

"그렇다면 내 피를 마음껏 마시도록 하게. 버리는 피를 몰래 주워 먹지 말고 말이야. 하하!"

괴인은 영욱의 행동을 모두 꿰고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기운이 필요한 영욱이 그러한 목적으로 이곳을 방문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하하! 평소에 빈혈을 앓고 있다 보니 버리는 피가 아까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나라도 그랬을 걸세. 자, 마음껏 마시게."

"고맙습니다. 어르신."

괴인이 자신의 팔뚝을 칼로 그어서 대량의 피를 쏟아내자 영욱도 말리기는커녕 얼른 염동력을 동원해서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받아마셨다. 

"아직 쉰도 되지 않았는데 어르신이라니, 그냥 형님이라고 부르게."

"예. 형님."

괴인의 피를 실컷 마신 영욱은 블랙수달의 기운을 조금 나누어 주었다. 피를 배불리 마신 것에 대한 적당한 대가를 지불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형님."

"겨우 이 정도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는가?"

"그게 제가 가진 기운의 80%입니다. 20%는 남겨야 저도 소화를 시키지요. 하하!"

"기운을 읽는 면에서는 나도 자네 못지않네만."

"하하! 저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조금 더 드리겠습니다. 이젠 만족하십니까?"

영욱은 가지고 있었던 블랙수달 기운의 절반을 정확하게 넘겨주었다. 괴인을 속일 수 없으니 아깝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절반이군. 아쉽지만 자네도 필요한 기운일 테니까 이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배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형님."

"나는 소화불량에 자주 걸리는 편이니까 가끔씩 들러서 내 피를 좀 뽑아주도록 하게. 내가 직접 할 수도 있지만 기분이 별로라서 말이야."

앞으로도 자신의 피와 영욱이 가진 기운을 적정 비율로 교환하자는 소리였다. 다양한 종류의 기운이 필요한 영욱으로서도 나쁠 게 전혀 없는 거래 제의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형님."

"그럼 어서 가보게. 자네 부하들이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래요? 그럼 이만."

영욱은 화들짝 놀라서 부하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화들짝 놀란 이유는 괴인의 기운 감지 능력이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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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대부분의 부하들이 기진맥진해 있었다. 탈진한 것은 소희와 은영 등도 마찬가지였다.

"한심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리고 너희들도 왜 그리 부실해?"

"그게 아니라 갑자기 누군가가 우리들의 기운을 빨아 당기는 것 같았어."

"그렇다면 저 회전축 안에 누가 살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영욱은 심각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은 다른 곳에 있어서 피할 수 있었지만 정기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욱은 제 3의 눈을 최대한으로 작동시켜서 기운의 흐름을 살폈지만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회전축 안에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게 아니라 반대 방향이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마. 지금 그 형님과 같이 있다가 왔는데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그렇다면 그 다음 칸에 있는 자의 소행일 수도 있겠지."

"그럴 수는 있겠군. 아무튼 회전이나 준비해."

"알았어. 오빠."

영욱은 자신의 부하들의 기운을 빼앗아서 허탈하게 만든 장본인이 자신과 거래했던 이웃집 괴인임을 이미 알아차렸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블랙수달의 기운을 달라고 해서 영욱의 신경을 잠시 흐려놓고는 그 짧은 순간에 그런 짓을 했던 것이다. 그러한 강탈의 순간을 포착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한 증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 괴인의 핏속에 섞여있는 기운들 중에서 부하들의 기운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욱에게 형님이라고 불리기를 원한 그 괴인은 자신의 방에 있던 동료들은 물론이고 옆방 노예들의 기운마저도 원거리에서 마음대로 빨아들일 수 있는 트랜스파워 초능력의 절대강자였던 것이다. 

영욱은 그의 방에서 그런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만일 눈치 챘다면 오히려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부하들을 건드린 것은 곧 자신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의 중대한 도발이다. 그래서 영욱은 빼앗긴 기운들을 다시 회수해서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로 했다.

일단 영욱은 회전축의 도움으로 빠르게 회전하면서 괴인의 피에서 흡수한 기운들을 유나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뀐 유나를 이용해서 괴인의 기운을 힘차게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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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괴인으로부터 반응이 왔다.

-동생! 지금 내 기운을 훔치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제 부하들의 기운을 훔친 사람이 형님이었군요. 그걸 돌려받으려는 중이었습니다만.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하는 녀석들이 어떻게 자신의 기운이라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거지?

괴인은 전혀 망설이지도 않고 자신이 한 짓임을 시인했다. 기운의 주인에 대한 그의 논리 역시 명쾌했다.

-물론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힘의 논리를 앞세우면 사는 게 너무 팍팍하고 또 쓸쓸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혼자 계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모든 것을 알 수 있고, 필요하다면 기운도 내 마음대로 가져갈 수 있는데 외롭긴 뭐가 외로워? 하나도 안 외로워.

-그래봐야 201층으로 한정되어 있을 거 아닙니까?

영욱은 괴인의 기운을 열심히 끌어당기는 한편 대화 역시 멈추지 않았다. 상대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괴인의 기운은 쉽게 빨려오지 않았다.

-202층은 괴물들이 너무 많아서 조금 힘들지만 200층도 가능하지. 

-정말 대단한 능력이군요. 아무튼 그 두 층에 사는 자들이 모두 죽어버리면 외롭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흥! 이 조용한 바벨탑은 아주 뛰어난 노예선이야. 결원이 생기는 족족 곧바로 보충되는 곳이지. 그러니 내가 그런 걸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어.

영욱은 이곳 조용한 바벨탑의 201층에 어마어마한 능력을 가진 괴물이 도사리고 있음을 직감했다. 같은 층은 물론이고 다른 층의 기운까지도 마음대로 강탈할 수 있다면 이 자는 노예로 팔려왔다기보다는 일부러 이곳에다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영욱으로서는 대적할 수 없는 절대강자임을 의미했다. 어쩌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주니어나 시니어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최소한 사퍼모어는 아닌 게 확실했다.

-하지만 요즘 분위기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던데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흥! 네 녀석이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분위기 타령을 해?

-그야 그렇지만 로빈 님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런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더군요. 저희들이 탈진하지 않도록 챙겨주시는 것도 그렇고요.

영욱은 로빈과 나누지도 않은 대화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주장을 꿋꿋하게 이어갔다. 닥치는 대로 주변의 기운을 빼앗다가는 오히려 굶어 죽을 수도 있다는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내 방에 생긴 결원을 보충해주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런 이유에선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저희 일행이 201층의 마지막 신입일 지도 모릅니다. 아무나 노예로 끌고 오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지금 네 부하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거냐? 아니면 나를 협박하는 거냐?

-애원도 협박도 아닙니다. 다만 건드리지 말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그리고 빼앗아간 기운도 순순히 돌려달라는 소리고요.

-그럴 능력이 있으면 가지고 가. 괜히 애만 쓰지 말고.

괴인도 영욱의 주장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여기는 듯했지만 야금야금 기운을 가져가려는 영욱의 시도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말을 끝낸 괴인은 오히려 영욱으로부터 기운을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그럴 참입니다. 형님.

-기대가 되는구먼. 자,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시게.

-그럼 시작합니다.

영욱은 배 둘레의 보호막 기어 크기를 점점 줄이면서 회전속도를 점점 더 높이기 시작했다. 그래야 괴인의 기운을 끌어당기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끌어당기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기운이 괴인에게로 썰물처럼 빨려나가기 시작했다.

-뭐하는가? 자네 기운은 이미 충분히 흡수했는데 왜 또 주고 그러는가? 나야 공짜라서 좋지만. 하하하!

-월척을 잡기 위한 떡밥이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하하하!

영욱은 지기 싫어서 헛소리에 가까운 궤변을 늘어놓았다. 과거에 소화되지 않은 피들이 상대의 내장을 후벼 파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있다면 되찾아가시게.

-당연하지요.

영욱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배 둘레의 보호막 크기를 계속해서 줄여나갔다. 이대로 기운을 빼앗긴다면 죽게 될 것이다. 어차피 죽는 것이니 차라리 모험이라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제법 빠르게 도는군. 하지만 회전축만큼 빨리 돌아도 내 기운을 빼앗지는 못할 거야.

-그런가요? 그렇다면 더 빠르게 돌아야겠군요.

영욱으로서도 회전 속도 증가가 곧 트랜스파워 초능력의 강화임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돌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으로 빠르게 돌아볼 참이었다.

-회전축의 도움으로 돌고 있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는가? 회전축의 속도 이상은 무리 아닌가?

-기어비가 다르니까 당연히 가능한 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다면 직접 느껴 보시면 됩니다.

-듣고 보니까 자네의 몸이 회전축보다는 훨씬 더 날씬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흡인력이 나를 능가할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네.

-저도 트랜스파워 쪽에는 재능이 좀 있는 편입니다. 게다가 응원군도 있고요.

영욱은 자신의 기어 크기를 줄여서 회전 속도를 높이는 한편 김호진을 동원하기로 했다. 자기가 죽으면 어차피 다 죽는 것이니 죽기 전에 가지고 있는 수단을 죄다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허접하기 짝이 없는 자네 부하들 중에서 응원군이라고 부를 만큼의 자격이 있는 자가 있어? 정말 웃기는군.

-겪어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기대가 되는군.

-그럼 이제부터는 회수하도록 하겠습니다. 형님.

-어? 제법인데?

-당연하죠. 이제 시작입니다.

영욱은 김호진에게 유나를 보내주면서 괴인의 기운을 뺏도록 하는 한편 자신도 최선을 다해서 트랜스파워의 최고봉인 '강탈'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괴인도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지만 아무래도 2대 1의 싸움이라서 그런지 영욱이 가져오는 기운의 양이 조금씩이나마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만큼 호진의 초능력도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제법이구나. 동생.

-이제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형님.

-설마 나를 말려죽이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가져가신 것에다 약간의 이자 정도는 챙겨 와야 공평한 거래겠지요.

-내가 아직 몸이 덜 풀려서 실력 발휘를 다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리 쉽지는 않을 걸세. 

-누가 감히 형님을 쉽게 볼 수 있겠습니까? 대충 헤아려 봐도 200명의 기운이 훨씬 넘는데 말입니다. 물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요.

영욱이 이 괴인의 피를 탐했던 이유가 바로 상태의 피처럼 그야말로 색다른 기운들의 백화점이었기 때문이다. 유나를 더욱 유연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두고두고 이 괴인의 피를 뽑고 싶었다.

-네 부하들 중에서도 그런 녀석이 하나 있더구나. 하지만 그런 허접한 녀석과 나를 비교하면 곤란하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형님께서는 일부러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도 말입니다.

-너도 다양한 종류의 기운들을 좋아하는구나. 맞아. 우린 그런 면에서 서로 통하는 게 있어.

노예 생활을 하면서 힘을 키운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허실실의 전략이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니 가장 강력한 포식자인 바벨탑의 사냥감이 되지도 않을 것이고, 제물이나 사냥감이 끊기는 경우도 없을 테니까. 

영욱 역시 같은 이유로 쾌재를 불렀던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형님.

-얼추 다 돌려준 것 같은데 이제 그만 하기로 하지.

-원금은 대충 돌려받았지만 아직은 이자가 남았지 않습니까? 

-이제 그만하지. 이자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 말이야.

-이율이 좀 세야 다음부터는 함부로 가져가시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사채 수준으로 돌려받으려는 것은 아니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영욱은 승기를 잡았을 때 확실하게 괴인의 기운을 빨아들이기로 했다. 말과는 달리 사채私債 수준이 아니라 아예 사체死體로 만들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두 번 다시 가져가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까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시게.

-형님에게 죄송한 말이지만 약속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말은 공수표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아시잖습니까?

-그럼 뭐가 필요한데? 각서라도 쓸까?

-그걸 제 입으로 어떻게 말씀드리겠습니까?

-말을 해! 난 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데 대체 뭐가 필요하다는 거야?

-형님의 심장이 필요합니다.

영욱은 이 자리에서 괴인을 죽이겠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밝혔다. 지금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게 될 테니까 어쩔 수 없는 결정인 셈이다.

-그 말은 나를 죽이겠다는 소리잖아. 우리 사이에 시시한 좀도둑질을 가지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형님도 잘 아시겠지만 저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형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형님께서는 이제 제 조력자의 존재를 알고 계시니 그 녀석 따위는 언제든지 죽여 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되면 저도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겠죠. 정말 죄송합니다. 형님.

-설마하니 내가 동생인 자네를 해치겠나? 그 점은 염려하지 말게.

-어렵게 잡은 승기라서 그런지 놓치기가 아깝습니다. 형님께서는 그동안 많이 승리하셨으니까 이번 한 번만 제게 양보하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영욱이 중단하지 못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백했다. 원래 생사투라는 것은 한 번에 결판을 내야 후환이 남지 않는 법이기도 하고.

-흥! 대충 속이려고 했더니 제법 똑똑한 녀석이군. 하지만 나를 끝까지 죽이겠다고 했으니까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하하! 이제야 겨우 본색을 드러내셨군요. 선수끼리 유치한 연극일랑은 집어치우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결판을 내도록 하지요.

-하하하! 나야 선수가 맞지만 네 녀석도 선수라고? 중심 회전축과 하찮은 부하의 도움을 받고 있는 주제에 선수라는 말이 나와?

괴인이 자신의 기운을 어느 정도 빼앗겨 준 것은 영욱의 약점을 이미 파악했기 때문에 나중에 손쉽게 이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빈틈이 전혀 없으며 냉정하기만 한 영욱의 태도에 괴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아서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게 다 제 운이지 않겠습니까?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운칠기삼이라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하하하! 

-나는 그게 네 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힘이란 온전히 자신에게 속한 것이어야 해. 너같이 운이나 추구하는 비겁한 놈은 결코 선수가 될 수 없어.

-혼자서 살고 싶다면 그래야겠지요. 하지만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괴인은 더 이상의 기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한편 영욱을 자극하기 위해서 별의별 소리를 다 늘어놓았다. 하지만 영욱의 말발을 당할 수는 없었다. 

-약자들의 단골 변명일 뿐이지. 너는 아직 독야청청獨也靑靑의 재미를 모를 거다.

-그건 독야청청이 아니고 왕따를 당하는 것입니다. 또한 독방에 수감된 것이지요. 형님.

-말로는 도무지 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구나.

-말뿐만이 아니라 힘도 그럴 겁니다.

-흥! 이제부터는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가져간 내 기운이 네 편은 아니니까.

둘의 생각은 놀랍게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괴인 역시 떡밥을 뿌리는 기분으로 자신의 기운을 넘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욱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과연 그럴까요? 저도 남의 기운을 소화시키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소화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었어. 나조차도 그렇게 과식하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낚시 바늘이 들어있는 떡밥을 삼킨 붕어가 어떤 기분인지를 알려주도록 하마.

-형님답지 않게 제법 귀엽게 반항하시는군요. 할 수 있다면 한 번 해 보세요. 하하하!

영욱의 몸속에 있는 괴인의 기운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계체조와 활인심방의 도움을 받고 있는 영욱에게는 그리 큰 고통을 주지 못했다.

-어때?

-뱃속이 조금 불편하군요. 그래도 이 정도는 견딜 만합니다. 하하!

-자식! 태연한 척하기는…….

-농담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직은 좀 더 먹어야 배가 찰 것 같습니다.

-정말로 아직도 배가 고프단 말이냐? 아픈 게 아니고?

-예. 저는 혼자가 아니니까요. 여태까지 가져온 기운들은 죄다 부하들의 배를 채우는데 사용되었고, 이제부터는 제 배도 채울 생각입니다. 그러니 배가 아파도 제 부하들의 배가 아프겠지요. 하하하!

영욱은 괴인이 떡밥으로 내주었던 기운들을 낚싯바늘에 걸리지도 않고 교묘히 먹어치웠음을 자랑했다. 다들 나눠먹었으니까 아직도 배가 고픈 것이다.

-부하라고? 오지합졸들을 가지고 잘난 척이군.

-오지합졸 맞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전투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도시락으로서의 역할을 제법 하는 편이지요.

-뭐야? 그럼 보조 밥통들이었나?

-정작 본인들이 그 말을 들으면 싫어하겠지만 아직까지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게 진실이지요.

영욱은 괴인의 기운을 계속해서 강탈했다. 하지만 괴인의 기운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끊임없이 솟아 나와서 오히려 영욱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주 특이한 경우군.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네가 도전자임을 알고 있다.

-그런가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갑자기 천한 노예가 되어버려서 많이 놀랐습니다. 하하!

-그건 로빈이 나를 견제하기 위한 수작이지. 

-그런 깊은 뜻이 숨어있었군요. 하지만 아직 분위기 파악이 덜 끝나서인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나를 처리하는 순간 너는 다시 도전자로 인정받게 될 거라는 말이야.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허술하기 짝이 없지만 도전자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는 아주 컸다. 게다가 이 괴인을 죽이게 되면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킬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살려달라는 말씀이군요.

-동생에게 삶을 구걸하자니 비루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사는 게 낫지 않겠나?

-물론 저도 그게 좋습니다. 하지만 형님을 살려드리면 제가 더 빨리 죽을 것 같으니까 그게 문제죠. 그러니까 형님이 그냥 포기하세요.

-이렇게 소심한 녀석이 어떻게 도전자가 된 거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

반응으로 보건데 이 괴인은 영욱 이전에도 도전자들을 본 적이 있었던 듯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이 괴인의 꼬임이 넘어가서 애써 잡은 승기를 반납해버린 자들도 적지 않은 듯했다.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바로 적들의 깨끗한 뒤처리죠.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게 가능하니까 후환을 남기지 않을 수가 있죠. 살인이 죄가 아닌 세상이니까요.

-그야 현실 세계의 강자는 국가와 법이니까 다른 자들의 폭력을 용납하지 않는 거지. 그보다는 초강대국이 더 강자일 테고.

-잘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그 속에서 개인의 무력이 힘을 쓸 방법은 전혀 없지요. 그런 면에서 보자면 2QB 세상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너와 좀 더 긴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되어서 유감이구나.

-저도 형님이 좋습니다.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다면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면서 밤새도록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정말로 아쉽습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이런 상황에서 만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서로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이지만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끝이 날 상황이었다.

-나도 동감이다. 하지만 우리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게 명백한 사실이니까 이왕이면 네가 죽어라.

-죄송합니다만 저에게는 딸린 식구들이 많으니 그냥 형님이 포기하십시오.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사실 너를 삼키면 위층으로 옮겨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 네가 이해하렴.

-억! 이제야 형님의 진짜 실력을 드러내셨군요.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야말로.

둘의 싸움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집중력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곧바로 패배로 직결될 만큼 살벌한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었다. 마치 무림고수들의 내가공력 대결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형님.

-너도 매우 대단하다. 하지만 이제 가진 기운이 다 소모된 듯하구나.

영욱은 강한 흡인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나를 물 쓰듯이 소모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은 부하들과 세 여자의 기운을 가져다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

하지만 영욱의 대결 결과가 자신들의 목숨이 좌우된다는 사실을 아는 부하들과 세 여자는 아끼지 않고 기운을 내주었다. 그것은 이번에 새로 부하가 된 한극상 등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옆집 괴인 하나를 당하지 못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뭣들 하고 있어? 스핀을 해야지.

이대로 가다가는 무조건 패배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욱은 모든 부하들과 여자들의 배 둘레에 보호막 기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전원 스핀 시도라는 도박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첫 번째 시도임에도 불구하고 36명 동시 스핀이 성공하고 말았다. 모두가 절체절명의 상황임을 아니까 집중한 것도 성공의 이유겠지만 영욱이 서열대로 회전 속도를 잘 조절해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저마다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른여섯 명이 빠르게 회전하면서 주변의 기운이나 회전축으로 빨려가는 기운을 인터셉트해서 유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영욱으로부터 씨 마나를 부여받은 효과가 이제야 비로소 발휘된 것이다.

영욱은 부하들로부터 전폭적인 유나의 지원을 받게 되자 다시 큰 흡인력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은영과 소희가 보내주는 유나의 양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많아서 상당히 큰 도움이 되었다.

-뭐야? 다시 살아난 거야?

-예!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야겠죠.

-그랬으면 좋겠지만 마지막 안간힘을 쏟아 붓는 거겠지. 흔히들 회광반조라고 부르는 상황이지.

-그보다는 자가 생산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겁니다. 형님.

-좋아. 이틀만 더 버틴다면 그렇다고 인정해주지. 하지만 그전에 관리 마법사 로빈 녀석이 나타날 테니까 나의 승리라고 볼 수밖에 없겠군.

영욱의 강탈 초능력이 거의 마법에 가까운 위력을 발휘하자 다시 전세가 영욱에게로 기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괴인은 이것이 마지막 발악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반면에 자신은 이틀 이상 버틸 기운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싸움이 중단된다면 그것은 무승부가 아니라 자신의 승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기회를 엿보다가 김호진부터 죽여 버리면 싸움은 끝일 테니까. 

-이건 말짱 제 생각이지만 로빈 님이 갑자기 급한 용건이 생겨서 며칠 동안 휴가를 떠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입장에서는 서른여섯 명이 죽는 것보다는 형님 혼자 죽는 게 더 나을 테니까요.

-그, 그럴 리가 없다. 그 인간은 원래 고지식하고 원리원칙을 지키는 자니까…….

-그러니까 휴가를 떠난 거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분의 강직한 인품으로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말리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하하하!

-믿을 수가 없다.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가 있는 거지?

-바위 맷돌을 돌리지 않는데도 마법 채찍이 멈춘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것은 이곳의 관리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노예 신세나 다를 바 없는 로빈이 자신의 자리를 비웠을 리는 없다. 그러니 이 싸움을 방관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지금도 어디선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게 분명했다. 또한 이 텔레파시 역시 엿듣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절대로 개입하지 말라는 의미로 방법을 일러준 것이다.

-로빈 그 새끼가 나를 죽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다.

-형님도 로빈 님의 인품으로 보아서는 그럴 리가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모르긴 해도 저의 행방을 백방으로 찾아 헤매는 고위 마법사 헬렌 컬러 님의 연락을 받고서 급히 휴가를 떠난 듯합니다. 하하하!

-아냐! 이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 분명해. 나는 절대로 이 결과를 승복할 수 없어. 이건 분명히 내가 이긴 싸움이야.

-맞습니다. 분명히 형님께서 이긴 싸움입니다. 사실 서른여섯 명이 달려들고도 형님 혼자를 어쩌지 못하는 게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이렇게 운까지 따라주니 행운의 연속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분명한 사실은 형님의 승리가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영욱은 말로는 인심을 팍팍 썼다. 그렇게 해도 죽는 자가 괴인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내가 죽어야 하지?

-스포츠에서도 가끔씩은 판정 오류가 발생하잖습니까? 세상의 일이라는 게 꼭 법대로, 원리원칙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잘 아시잖습니까?

-그렇군. 하지만 내가 죽으면 너도 곧 죽게 된다. 도전자의 길은 곧 죽음이니까…….

-그렇다고 형님을 살려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전에 죽게 될 테니까 말이죠.

-그렇다면 내가 너의 노예가 되면 되잖아.

결국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고 말았다. 영욱이 노예를 서른다섯 명이나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하는 소리였다. 사실 이 괴인을 노예로 거둘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보다 힘들 가능성이 더 높았다. 이미 결론을 내린 영욱은 고개를 내저으면서 입을 열었다.

-형님은 저의 영원한 우상이십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난 살고 싶어.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한 단계를 더 넘어설 수가 있는데 여기서 그만둘 수는 없어.

-그 한 단계를 넘어서면 또 다른 벽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마음을 비우십시오. 그게 바로 진짜로 큰 벽을 넘는 방법입니다.

-젠장! 뜻이나 알고 지껄이는 말이냐?

-아뇨. 그냥 주워들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래도 귀에 솔깃한 이야기이기는 하네.

괴인은 영욱의 말장난과 같은 대답에도 흥분하지 않았다. 이미 그런 식의 대화에 익숙한 까닭이다.

-이제 마음의 준비가 되셨습니까?

-그래. 네가 나를 이겨줘서 정말 고맙다.

-저도 형님을 만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그래.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주고 가서 기쁘다.

-형님!

둘 사이의 대화가 중단되고도 흡수는 오래도록 진행되었다. 그만큼이나 괴인이 가진 기운의 양이 많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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