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1화 (62/71)

"어이쿠!"

회전축에 바짝 붙어서 빠르게 돌고 있던 영욱이 급기야 비명을 지르면서 밖으로 세차게 튕겨져 나왔다. 더 이상 빠른 회전을 견디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근처에 노예들을 관리하는 마법사가 나타났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바벨탑의 가장 바깥쪽에서부터 차례대로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있었는데, 지금은 바로 옆 칸 노역장에 있는 노예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는 공간이동 마법으로 영욱이 있는 맨 안쪽 공간에 나타났다.

마법사가 나타났다면 벌써 하루가 지났다는 걸 의미했다. 영욱은 회전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뼈로 다리를 만들다니 대체 누구의 짓이냐?"

"접니다."

"왜 이런 짓을 했느냐?"

"부하들이 쉴 공간이 부족해서 그랬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런 목적이라면 아주 훌륭하게 만들었군. 초능력을 사용하든지 검은 마법을 사용하든지 간에 아무런 상관도 없다. 다만 누구 작품인지가 궁금해서 물어보았을 뿐이다."

마법사는 영욱의 작품이 검은 마법임을 바로 지적했다. 하지만 문제 삼지는 않았다. 오히려 꼼꼼히 살펴보기까지 했다. 마법사와 검은 마법이 별로 친하지 않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듯했다

"금기 사항이 아니라니까 다행입니다."

"이곳에 금기 사항은 없다. 심지어 마법 채찍이 두렵지 않다면 굳이 바위 맷돌을 돌리지 않아도 된다. 다만, 식량 공급은 곧바로 끊어지니까 참조하도록 하게."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배고픈 건 질색이거든요."

"아주 좋은 태도야. 그럼 내일 또 보세."

"예. 살펴 가십시오."

영욱은 조금이라도 나은 고기를 배급받기 위해서 싹싹하게 굴었다. 사라지는 마법사를 향해서 구십 도로 고개를 숙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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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식량 배급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양은 그나마 조금이나마 늘었지만 품질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뭐야? 이번에도 반쯤 썩어버린 환수 뒷다리잖아."

"너는 비상식량이라도 있잖아."

화리가 또다시 불평을 터뜨렸지만 영욱은 한마디로 일축했다. 먹기 싫으면 먹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래도 그것만 축낼 수는 없으니까 하는 말이잖아."

"이 층에서는 우리가 제일 졸병이니까 얻어먹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양도 적지 않은 편이고."

"좋아. 이번에는 내 몫을 나눠줘."

"잘 생각했어. 상태야. 들었지?"

"예. 대장님."

노예로 잡혀온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으니 화리의 비상식량이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 썩은 고기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가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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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모처럼만에 박상태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야 겨우 정신적인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어때? 맷돌은 돌릴 만해?"

"예. 힘은 좀 들지만 그것도 훈련이라고 생각하니까 즐겁기도 합니다."

"구르는 것은 어때?"

"조금씩이지만 유나가 생겨나는 게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추월하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하하!"

영욱이 중심 회전축에 붙어서 빠른 회전을 하는 동안 상태와 부하들 역시 구르는 수련을 열심히 했다. 무엇보다 그들을 열광시킨 것은 구르는 게 경쟁이라는 사실이었다. 추월하는 자와 추월당하는 자로 나누어지니 잠시도 멈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힘든 수련을 오히려 재미있다고 생각하다니 다행이구나."

"다들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번번이 추월당하기만 하는 조원들은 더욱더 분발하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즐거워서 좋겠구나. 그런데 너는 이 상황이 걱정스럽지도 않은 거야?"

긍정적인 마인드는 꼭 필요한 것이지만 박상태는 천국에라도 와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무슨 좋은 일이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징그러운 벌레 취급하던 은영과도 요즘은 이야기도 도란도란 나누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래서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죄송한 말이지만 모든 근심과 걱정은 대장님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들이야 그저 시키는 대로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래. 잘 생각했다. 나도 이 상황이 그리 나쁘다고는 생각지는 않으니 이번 기회에 다들 탈태환골에 가까운 발전을 일구어내도록 하자."

"예. 대장님."

영욱도 그렇지만 모두가 노예 생활을 나름대로는 즐기고 있었다. 화리 일행만 제외하고는 다들 용맹정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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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모처럼 소희와 은영과 함께 먹을 한 끼의 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말이 준비일 뿐 자기 몫으로 주어진 환수 고기를 살짝 굽는 게 식사 준비의 전부였다.

"오빠! 나는 살짝 태워줘."

"이 정도면 되겠지? 소금은?"

"환수 고기는 원래 짭짤해서 특별히 더 간을 더할 필요는 없겠지만 혹시 상했을지도 모르니까 조금만 더 뿌려줘."

영욱은 이제 아주 능숙한 솜씨로 불을 다루어서 은영 몫의 환수 고기를 골고루 익혀주었다. 화정을 활용하는 능력이 늘어난 것이다. 아무튼 썩는 냄새를 없애자면 바짝 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소희 너는?"

"저도 똑같이 해주세요. 그런데 열흘 내내 빙빙 돌기만 하던데 괜찮아요?"

"응. 아주 즐거운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야."

"그렇다면 저희들도 함께 돌 수 있을까요?"

소희가 중심 회전축과 붙어먹는 것에 관심을 보인 것은 걱정을 한 게 아니라 이런 청탁을 하기 위함이었다. 영욱에게 또 한 다리 걸치겠다는 의도였다.

"불가능할 거야 없겠지만 속도가 워낙 빨라서 견딜 수 있겠어?"

"영욱 씨의 기어보다 더 큰 기어를 대면 속도가 줄어들지 않을까요?"

"그래봐야 속도는 줄어들지 않아. 내가 기어 크기를 줄인 만큼 빠르게 회전하니까."

"그렇다면 영욱 씨가 중간에서 반클러치를 잡아서 속도를 줄여주세요."

영악한 소희 아니랄까봐 회전 방법에 관해서는 이미 다 생각해두었던 것이다. 어려운 내용은 아니지만 자동차 운전을 하지 않는 소희로서는 꽤나 연구했을 게 분명했다.

"좋아.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오빠, 나도!"

"나도 하겠어."

은영 역시 한 다리를 걸쳤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옆에서 엿듣고 있던 화리까지도 얼른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뭐야? 너도 헤드 스핀이 가능해?"

"어릴 때의 꿈이 피겨스케이팅 선수였어. 그러니까 헤드 스핀은 아니라도 회전이 가능하니까 걱정하지도 마."

발레리나들이 빙빙 도는 스핀을 말하는 듯했다.

"보호막은 만들 수 있어?"

"그건 은영과 소희처럼 네가 만들어줘야지. 쟤들도 못 만들잖아."

"그건 그렇지만 내가 슈퍼맨이라도 되는 줄 알아? 한꺼번에 네 개를 만들지는 못해. 내 것까지도 만들어야 하니까 말이야."

영욱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설령 만들 수 있다손 치더라도 화리에게는 만들어주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리는 이러한 영욱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대가를 지불할 테니까 너무 비싸게 굴지 말고 나도 좀 끼워줘."

"무슨 대가?"

"내 부하들을 모두 너에게 넘길게."

"한극상… 까지?"

"당연하지."

"좋아! 그렇다면 도와주기로 하지. 하하하!"

전혀 의외의 거래가 갑작스럽게 이루어졌다. 이것은 지휘권을 넘긴다는 의미를 넘어서 소유권 자체를 넘긴다는 의미였다. 노예 소유권 이전인 셈이다. 그러니 영욱으로서는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극상 씨를 너무 미워하지 마."

"누가 미워한다고 했어? 흐흐흐흐!"

영욱은 안절부절못하는 한극상을 힐끗 쳐다보면서 실소를 참지 못했다.

사실 한극상은 노예가 아니다. 그런데 노예가 아닌 부하직원까지도 모두 넘긴다는 것은 화리로서도 최후의 수를 던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살아서 탈출한 자가 없다고 알려진 바벨탑의 노예가 된 것을 이제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나니 무리의 대장인 영욱에게 힘을 실어주는 길만이 탈출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을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마저도 영욱에게 맡긴다는 의사이기도 했다. 노예로 부리든지 여자로 대접해주든지 간에. 

그러니 성질이 몹시 더러운 한극상마저도 찍소리도 내지 않고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이미 그런 결론을 내린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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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바벨탑의 회전축과 반클러치 상태로 붙어서 조금 천천히 돌면서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는 세 여자들에게 보호막 기어를 만들어주었다. 먼저 은영과 소희를 양쪽으로 세우고 보호막 기어끼리 스칠 듯 말듯하게 하면서 느린 회전을 유도했다.

"나는?"

"화리 너는 조금 있다가 소희에게 붙여줄게."

"나는 왜 차별 대우야?"

"그야 네 스핀 실력이 아직 검증되지 않아서 그러는 거니까 조금만 참아."

톱니가 맞물리는 기어가 아니라 매끄러운 표면을 가진 보호막끼리의 접촉이라 그런지 전달되는 회전속도는 채 10%에 지나지 않았다. 반클러치 상태니까 더더욱 그렇다.

"우욱!"

하지만 그 속도만으로도 은영과 소희는 거의 혼수상태에 빠졌다.

-오빠! 속도 좀 줄여!

-더 이상은 못 줄여. 견딜 수 없으면 다치기 전에 포기해.

-흥! 내 사전에 포기란 없어. 그러니 끝까지 견뎌볼래.

-저도요.

-겨우 10%의 속도니까 둘 다 힘을 내라고.

-흥! 지금 자랑질하는 거야?

-맞아요. 잘난 척은 사절이에요.

-자랑하는 거 맞아. 이러는 내가 얄미우면 속도를 좀 더 올려달라고 해.

-조, 조금만 더 있다가…….

-저, 저도요.

금방이라도 튕겨나갈 것처럼 위태위태했지만 의외로 두 여자는 이를 악물고서 끝까지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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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가 의외로 빨리 안정적인 스핀을 하게 되자 영욱은 회전축과의 반클러치 기어가 미끄러지는 속도를 조금 줄여서 회전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화리의 보호막 기어를 소희에게로 접촉시켰다.

-악! 너무 빠르잖아.

-너는 소희의 10%니까 내 회전속도로 치자면 겨우 1%야. 겨우 이 정도로 엄살 떨 거라면 집어치워.

-아냐. 버텨볼게.

은영과 두 여자는 헤드 스핀 동작으로 회전을 감당했지만 화리는 꼿꼿하게 선 채로 빙빙 돌면서 회전을 감당했다. 어쩌면 유명한 발레리나에게 배웠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아하고 숙달된 모습으로 휙휙 돌아갔다.

-견딜 수 있겠어?

-이젠 좀 나아. 그러니 속도를 조금만 더 올려줘.

-그러지. 그리고 이건 내 선물이야.

-이, 이게 뭐지?

-씨 마나라고 부르는 것인데 그것이 네 몸속에도 유사 마나가 생겨날 수 있도록 도와줄 거야.

이젠 화리에게도 씨 마나를 조금이나마 나누어 주었다. 그게 없다면 미친 듯이 회전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미친 듯이 구르고 돌고 있었던 거야?

-응. 바벨탑의 중심축이 빠르게 회전하는 걸 보면서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야 당연하지만 너에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지.

-네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똑똑하고 강하니까 앞으로는 잘 모셔. 알겠지?

-알았어.

화리는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그것은 씨 마나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순종적인 태도에 오히려 영욱이 더 당황하고 말았다.

-뭐, 뭐야? 이젠 농담도 못하게 하는 거야?

-일단 몸을 의탁했으니까 거짓말이라도 믿을 거야. 잘 부탁해.

-설마 너도 내 은혜를 받고 싶다는 것은 아니겠지? 응?

-그건 경쟁이 치열해서 힘들 것 같으니까 다른 부하들보다 조금만 더 챙겨주면 돼.

-노예를 다섯 명이나 바쳤으니까 그 공로를 높이 평가해서 너는 친구 정도로 대해달라는 소린가?

지금 영욱과 세 여자의 모습은 여러 개의 기어가 서로 맞물려서 돌아가는 상황과도 흡사했다. 커다란 보호막 기어가 그 일을 하니 실제로 서로의 몸이 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이 묘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런 말들이 오가는 것이다.

-그래 주면 더 좋고.

-예전처럼 바락바락 대들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대해주지.

-정말 고마워.

-고마우면 좀 더 회전에 집중해.

-알았어.

영욱은 자신의 회전 속도는 물론이고 세 여자의 회전 속도도 조금씩 높이기 시작했다. 지금 놀고 있을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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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영욱 혼자서 돌기 시작한 것이 열흘이 지나고 나서는 세 여자까지 함께 돌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자 박상태, 반백신감, 허풍선장 그리고 한극상까지도 보호막 기어의 도움으로 초고속 회전을 경험하게 되었다. 

어차피 회전축의 힘을 공짜로 이용하는 것이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상황이다. 다만 많은 숫자의 보호막을 만들어야 하는 영욱의 일이 많아지긴 했지만.

그리고 누워서 구르는 것의 놀라운 효용이 새롭게 발견되어서 세 여자는 물론이고 영욱까지도 가끔씩 바위 맷돌 위를 빠르게 굴러다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효용이란 다름이 아니라 바나의 흡수가 극대화된다는 것이었다. 영욱으로서는 헤드 스핀으로도 흡수할 수 있는 기운이지만 바닥을 구르는 것이 훨씬 더 효율이 크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짬짬이 시간을 내서 맷돌 위를 구르는 수련에 재미를 붙였다.

사실 바나를 모으는 것도 즐겁지만 카 레이싱처럼 부하들을 추월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또한 그것이 부하들에게 선의의 경쟁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도 한몫했다.

다들 목숨을 걸고 구르는 일에 몰두했다. 그리고 당번이 되어서 바위 맷돌을 끄는 일에도 열성을 다했다. 모든 것이 수련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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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보름이 지나자 가져다주는 환수 사체의 양과 상태가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기 시작했다. 영욱이 매번 담당 마법사에게 싹싹하고 예의바르게 굴었던 효과가 이제야 겨우 나타난 것이다. 

"고맙습니다. 마법사님."

"별 거 아냐. 그리고 아직까지는 다들 잘 버티고 있군."

"삼교대로 돌리면서 나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더니 그런 모양입니다. 그리고 영양가가 많은 환수 고기를 가져다주시는 마법사님의 배려가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노예들을 최대한 오랫동안 버티도록 하는 게 나의 일이니까 챙겨주는 것이 당연하지."

"아무튼 마법사님만 믿겠습니다."

영욱은 손바닥을 싹싹 비비면서까지 아부를 떨어댔다. 그런데 오늘따라 마법사의 눈길이 영욱의 귀걸이를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물이 없어서 세수를 못했더니 그런 모양입니다. 하하!"

"자네의 귀걸이 말이야. 그거 혹시?"

"예. 고위 마법사이신 헬렌 컬러님께서 만드셨다는 아이템입니다."

"운이 좋았군. 그녀의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다니……."

"그분을 알고 계십니까?"

"당연하지. 마법사들끼리는 웬만하면 다 아는 사이니까."

"혹시 만날 기회가 있으면 제 소식 좀 전해주십시오. 여기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말입니다. 하하!"

영욱은 휼버린과 헬렌 킬러가 이미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니 소식을 전해달라는 말은 선을 대서라도 구명 운동을 해달라는 말이 아니라 그저 담당 마법사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휴가 다녀온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소식을 전해주기는 쉽지 않을 걸세."

"휴가를 순차적으로 다녀오시나 봅니다."

"층을 맡고 있지 않은 마법사는 겨우 둘 뿐이니 동시에 휴가를 갈 수 있는 마법사도 겨우 둘인 셈이지. 그러니 삼 년에 고작 이틀이 휴가인 셈이지. 그때까지도 살아있다면 자네 소식을 전해주도록 하지."

"들리는 말로는 999층이라고 하던데 마법사님의 말씀대로라면 대략 1,100층은 되는 모양입니다."

"맞아. 계산이 아주 빠르군. 최근에 탑을 쌓아 올리는 속도가 좀 더 빨라져서 그래. 머지않아 1,200층까지 쌓아올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더군."

담당 마법사는 굳이 비밀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지 미주알고주알 다 털어놓았다. 영욱도 위로 올라갈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그 엄청난 높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끝입니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되겠지. 하늘이라는 새로운 차원에 걸칠 수 있는 사다리가 될 테니까."

"하늘을 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하늘에 도달할 수 없었던 모양이군요."

"맞아. 허상의 하늘이야 누구나 다 날 수가 있지. 하지만 우리가 찾는 곳은 진상眞相의 하늘이니까."

"지, 진상이요?"

"그래. 실상이라고도 하지."

영욱은 진상이라는 소리에 뿜을 뻔했다. 하지만 진상의 유래가 바로 진짜 하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간신히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낼 수 있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지금 이곳이 몇 층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까짓 걸로 실례랄 게 뭐 있겠어? 201층이야."

"그렇다면 거의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층이로군요."

"왜? 자네들의 수준이 겨우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아서 실망했나?"

"그런 점도 없지는 않지만 제가 보기에 이곳을 관리하시는 담당 마법사님께서는 헬렌 컬러 님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서 잠시 당황했습니다."

영욱은 말을 살짝 비틀어서 마법사의 반응을 보고자 했다. 아래층에 있을수록 수준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알아들었으니 담당 마법사들의 능력 역시 그런 순서인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마법사들끼리만 순서를 매기자면 나도 거의 상층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렇다면 주니어나 시니어도 이 바벨탑의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주니어와 시니어가 이렇게 천한 일을 할 리는 없지."

"그렇다면 그분들이 만든 분신이나 골렘들이 이 일을 대신하겠군요."

관리하는 마법사들 역시 강한 순서대로인데 마법사들보다 더 강한 존재들이 훨씬 많다는 소린 듯했다. 분신이라든지 골렘들과 같은 존재들에 대한 지식은 마법서를 통해서 알게 된 내용이다.

"아주 영리하고 아는 것도 많은 젊은이였군. 맞아, 이곳에는 자네가 만든 그 어설픈 스켈레톤과는 차원이 다른 피조물들이 다수 존재하지."

"그럼 마법사님도 적당한 것을 하나 만들어서 대신 근무를 시켜도 되지 않습니까?"

"로빈이라고 부르게."

"예. 로빈 님."

"그럴 수도 있지만 이 201층의 노예들은 아주 유순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 그리고 나도 하루 종일 연구만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산보와 소일거리 삼아서 직접 순찰과 식사 배급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었지만 영욱으로서는 별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 무엇인가를 만들 능력이 없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여겨졌다. 재료를 구할 만큼의 돈이 없든지 간에. 

"노예들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소일거리는 되겠지만 이 또한 성가신 일일 테니까 휴식까지야 되겠습니까?"

"휴우! 휴식을 포기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지. 마법사들이야 원래 죽을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존재들이니까 어쩔 수 없지."

로빈은 한숨을 내쉬면서 마법사의 숙명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다. 영욱도 대충이나마 알고 있던 내용이기는 했다.

"혹시 마나 홀의 특성 때문에 그런 겁니까?"

"헬렌 컬러가 말해주었나?"

"아닙니다. 제가 읽은 책에 의하면 마나 홀은 아주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마나를 생성시키거나 보관한다고 되어있기에 그렇게 짐작한 겁니다."

둘의 이야기가 제법 깊이를 더하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로빈은 다른 노예들과 나누는 대화보다는 영욱과의 대화를 더 좋아하는 듯했다. 제법 말이 통하는 편이니 그럴 것이다.

"맞네. 그런데 왜 그렇게 마나 홀이 빨리 돌아야 하는지를 아는가?"

"그것은 레미콘이 빙빙 도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 굳어져버리는 시멘트처럼 말이죠. 물을 만난 시멘트라고 해야겠군요."

"마나의 성질에 대해서도 잘 아는군. 맞아. 활성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계속적인 운동 상태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지."

"그러자면 마나 홀을 품고 있는 마법사도 역시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군요."

영욱 자신처럼 헤드 스핀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굉음을 울리며 회전하는 고속 엔진을 가슴에 달고서 편하게 앉아 있거나 깊은 숙면을 취하기는 힘들 거라고 예상했다.

"맞아. 모르는 사람들은 마법사를 일컬어서 축복받은 존재라고들 하지만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안쓰러워하지. 가슴 속에 소형 원자로를 달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그래도 제 입장에서는 여전히 축복받은 존재로 보입니다.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하늘을 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휴가 갈 때마다 날아보기는 하니까 노예 신세보다는 나은 편이겠지. 하지만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지."

로빈의 말로 미루어보면 바벨탑이 땅에 착륙하는 경우는 없는 듯했다. 아무튼 로빈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되었는지 얼른 말을 끊고 돌아섰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로빈 님."

"자네도 열심히 수련하게."

"예."

대충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직접 마법사인 로빈의 말을 듣고 보니 마법사가 측은할 수도 있는 존재들로 느껴졌다. 그들 역시 주니어나 시니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또 다른 피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아무튼 간에 축복일지 저주일지는 그 강력한 힘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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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이 공간 이동 마법으로 사라지자 영욱은 다시 회전축에 붙어서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빈과의 대화를 되새김질하기 시작했다.

로빈의 말에 의하면 이웃에 있는 노예들은 미치지도 않았고, 그렇게 공격적이지도 않은 듯했다.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마법사들이 만든 마나는 회전이 멈추면 쉽게 굳어버린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유나의 경우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바나의 경우에도 그 정도는 아니다. 바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나는 여러 가지 기운을 섞어 만들어서 그런 듯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기운을 섞는 것처럼 유나와 마나 그리고 바나를 적당한 비율로 섞으면 그렇게 바쁘게 돌리지 않더라도 굳지도 않으면서 항상 활성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법사가 만든 마나를 구할 길이 없으니 당장 실용성이 있는지를 알아보기는 힘들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마나를 가속시킬 마나홀이 없지만 실드로 대충 만들어서 쓰는 중이니 마나만 구할 수 있다면 실험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닐 듯했다.

그렇다고 해서 마법사를 환수처럼 처리하고 나서 마나를 흡수할 수는 없는 일이니 당분간 마나 안정화 실험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로빈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내린 결론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눈알이라도 하나 뽑아 먹을 수 있겠지만 그리 되면 마법사들의 공적이 될 공산이 크니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는 행동이 분명했다.

하지만 영욱은 그 실험이 미치도록 하고 싶어졌다. 자신이 아직 제대로 된 마법사는 아니지만 그런 칵테일 요법이 도움이 된다면 더 많은 양을 안정적이고도 활성화된 상태로 보관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편법이 가능하다면 만드는 족족 부하들에게 다 퍼줄 이유도 전혀 없다. 미리미리 모아 두었다가 혼자서 사용하거나 부하들이 간절하게 필요로 할 때에나 조금만 나눠줘도 충분할 테니까. 

영욱이 그토록 선심을 썼던 것은 안정적인 마나홀이 없다는 슬픈 사실이 숨어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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