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1/71)

"내 경우에는 큰 도움이 되었지. 하지만 네 경우에는 어떨지 모르지. 자, 보낸다."

"응."

영욱으로서도 켕기는 부분이 있으니 얼른 그녀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영욱의 트랜스파워 초능력은 이제 기운을 보내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 물론 보내주는 속도는 아주 느리고 소량만이 가능해서 이 은밀한 작업은 천천히, 상당히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다 됐어. 기운들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버리기 전에 얼른 유나로 바꾸도록 해."

"고마워, 오빠."

은영은 서둘러서 헤드 스핀 동작을 실시했다.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유연하고 아름다운 몸매가 더욱더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영욱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은영의 몸매를 훔쳐보고 있던 노예들을 노려보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하늘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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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소희가 다가와서 영욱을 귀찮게 만들었다. 그녀로서는 제 몫을 배급받으려는 것이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겠지만.

"뭘 그렇게 바라보는 거죠?"

"아무래도 바벨탑이 도착한 것 같아."

"곧 도착할 것 같다가 아니라 이미 도착했다고요?"

"응."

"하지만 하늘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요?"

"보이지는 않지만 토네이도보다도 수백 배는 강한 기운의 회전이 느껴져."

영욱은 유나까지 동원해서 제 3의 눈을 최대한으로 증폭시켜서 바벨탑의 실체를 느껴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강력한 기운들로 똘똘 뭉쳐진 것이라는 사실만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바벨탑이 회전한다는 건가요?"

"거대한 탑이 허공을 마음대로 떠다니려면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할 테니까 회전할 가능성이 높겠지. 물론 바벨탑 전체가 빙빙 도는 게 아니라 모터처럼 내부의 축만 빠르게 회전하는 것 같아."

"그런데 저에게는 왜 보이지 않는 거죠?"

"나도 보이지는 않아. 그냥 느껴질 뿐이지. 느낌만으로도 정말 대단하군."

영욱은 두 번째 바벨탑이 자신을 잡으러 왔다는 이야기를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피의 페스티벌과 관련이 있든지 그게 아니면 우연한 조우遭遇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도 얼핏 들었다. 그러니 숨을 궁리는 하지도 않은 채 마치 에펠탑을 감상하는 것처럼 감탄을 늘어놓는 것이다.

"투명화 마법이라도 걸어둔 걸까요?"

"아무리 마법이지만 그게 가능한 일이야? 만일 1,000층도 훨씬 넘을 것 같은 거대한 탑 전체에 그런 고급 마법을 걸어두는 게 가능하다면 그곳은 정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곳이겠지? 안 그래?"

"하지만 영욱 씨는 잘해낼 수 있을 거예요."

"너도 잘해야 할 것 같아."

"예? 제가 왜요? 이제 저는 빠질 건데요."

소희는 결정적인 순간이 왔음을 느끼고서 몸을 빼내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너무 늦은 듯했다. 

"그럼 얼른 달아나. 하지만 불가능할 것 같아. 투명한 두 번째 바벨탑에서 투명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고 있는데 그 크기가 아주 커서 그래. 저게 엘리베이터인지 거대한 투망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를 데려가려는 게 분명해."

"도전자라면 혼자 다녀오는 게 상식이 아닌가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크기를 보아하니 내 부하들까지도 모두 다 데려가고 싶은 모양이야.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으니까 다들 내 옆으로 모여!"

"악!"

"화리 너는 어떡할래? 함께 가지 않을 거라면 어서 탈출용 아이템을 사용해서 이곳을 벗어나."

"이번에는 나도 같이 갈래."

"좋아. 그렇다면 내 옆으로 바짝 붙어. 그러지 않으면 이산가족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나보고는 안 물어봐?"

"너도 네 마음대로 해."

번쩍!

잠시 후 영욱 일행은 밝은 빛에 휩싸이더니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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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바벨탑의 내부로 여겨지는 장소로 옮겨지고 나서 십여 분이 지난 후에야 마법사로 보이는 자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나타나더니 아직도 멀미에 시달리고 있는 영욱 일행을 손짓으로 한 곳으로 불러 모았다.

"나는 이곳을 관리하는 책임자다. 신입 노예들은 모두 내 앞으로 집합해라."

"예?"

"아니, 그러고 보니까 쇠사슬을 차고 있지도 않는 녀석들이군. 그렇다면 너희들은 대체 뭐냐?"

"저희들은 노예가 아닌데요."

영욱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리고서 엄중하게 항의하고자 했다. 분위기와 마법사의 태도로 보자면 누군가 영욱 일행을 노예라고 주장하면서 두 번째 바벨탑에 팔아버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관리 마법사가 이토록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을 리 없을 것이다. 의심이 가는 녀석은 당연히 보부상 제임스였다.

"뭔가 문제가 있긴 한데 이곳에 들어온 자들은 결코 돌아갈 수가 없어. 그러니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해."

"선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은 노예가 아닙니다."

"조용히 하라니까! 자꾸 시끄럽게 굴면 혀를 뿌리째 잘리게 될 거야. 이곳이 조용한 바벨탑으로도 불리는 이유를 잘 알고 있겠지?"

"예. 조용히 하겠습니다. 다들 조용히 해."

"악!"

"조용히 하라니까."

"……."

영욱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전자가 아니라 노예 취급을 받는 것이 살아날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으니 흥분하는 부하들과 여자들을 얼른 진정시키고자 했다.

그나마 조용한 바벨탑이라는 악명과는 달리 무조건 혀부터 자르는 것은 아니라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말귀를 알아듣는 놈이 있으니까, 일벌백계로 실시하는 작업을 하지는 않겠다. 지금부터 바위 맷돌에 달려있는 손잡이들을 잡고서 시계 방향으로 돌려라. 잠시라도 멈추게 되면 허공에서 마법 채찍이 사정없이 날아들 것이다. 멈추지 않더라도 돌리는 속도가 일정 이하로 늦어지면 마찬가지다."

"……."

"식사는 하루에 한 번씩 제공되지만 죽을 때까지 식사 시간과 쉬는 시간과 휴식 시간 등은 따로 주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시간도 없다. 화장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

"대신에 천천히 도는 것이니까 재주껏 쉬거나 교대로 쉬거나 심지어 잠을 자도 된다. 단, 바위 맷돌을 최저 속도 이하로는 절대로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그럼, 실시!"

소나 말의 힘으로 돌리는 연자방아와 같은 바위 맷돌을 노예들의 힘으로 돌리라는 소리였다. 그 방향은 중심에서 빠르게 돌고 있는 탑의 회전축과 반대였다. 

그것은 아마도 노예들이 가진 정신력이나 기운을 빨아들여서 마나나 유나로 바꾸려는 것인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노예들이 돌려야 하는 맷돌 같은 거대한 바위 속에 자석처럼 기운이 내포되어 있든지.

그르르르.

일행들이 각각 손잡이를 잡고서 시계 방향으로 밀기 시작하자 거대한 바위에서 맷돌 갈리는 소리가 나면서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좀 더 천천히!"

영욱은 먼저 최저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와 벌로 가해진다는 마법 채찍의 위력부터 알아보기로 했다. 실험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휙! 철썩! 크아악!

속도를 점점 줄여서 천천히 걷는 속도보다 느려지자 갑자기 허공이 찢어지듯이 열리더니 총 서른여섯 개의 투명 채찍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그 투명 채찍에 가격당한 자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다들 백족이나 백우 아머를 겹쳐 입고 있어서 찢어지거나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영욱과 여자들의 경우에는 아슬아슬하게나마 피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피했다고 해서 그 보복으로 다시 채찍을 휘두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피할 능력만 있다면 피해도 된다는 소리다.

"시간당 4킬로미터를 걷는 속도가 최저 속도다. 바위 맷돌의 무게가 무겁긴 하지만 우리 일행의 삼분의 일 정도만 끌어도 충분할 것 같으니 지금부터 돌아가면서 8시간씩 돌리는 삼교대를 하기로 한다. 먼저 3조부터 돌린다. 실시!"

"악!"

아홉 명의 힘만으로도 거대한 바위 맷돌을 돌릴 수는 있다. 하지만 다들 힘이 들어서 끙끙거리는 걸 보자 화리 일행 중의 일부를 추가로 붙여주기로 했다. 사실 그들이 빈둥거리고 있는 꼴을 그냥 넘길 영욱이 아니었다.

"화리야. 너희 일행들 중에서도 두 명을 붙여."

"좋아. 너희 셋 중에서도 하나가 붙는다면 그렇게 하지."

"그렇다면 관둬. 3조 정지!"

"악!"

화리가 까칠하게 나오자 영욱은 아주 화끈하게 반응했다. 사실 영욱으로서는 피할 수 있는데 굳이 두려할 이유가 없었다. 바위 맷돌의 속도가 줄어들자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허공이 갈라지면서 수많은 투명 채찍들이 날아들었다. 피하는 놈은 피하고 피하지 못하는 놈은 지독한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 분명했다.

휙! 철썩! 크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채찍질이 수차례나 계속되자 결국은 견디지 못한 화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세 사람 중의 하나를 빼놓겠다는 것은 의논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해석되어서 그래.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결국은 힘이 빠져서 채찍에 맞아 죽게 될 테니까 처음부터 굳이 힘 뺄 필요가 있겠어? 바로 맞아 죽는 게 훨씬 더 편한데 말이야."

"내가 못할 말을 했어? 하려면 공평하게 해야지. 너희들이 대체 뭐기에 그런 특혜를 누리겠다는 거야?"

"그게 공평한 거야."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곳에 끌려왔는데 꼭 이런 식으로 나와야겠어?"

"내가 분명히 달아나라고 경고했는데도 굳이 따라나선 건 바로 너야. 그리고 내가 너보고 맷돌을 돌리라고 했어? 아홉 명으로는 여덟 시간을 돌리지 못할 것 같아서 네 노예들의 힘을 좀 보태라고 한 건데 그걸 꼭 이상하게 해석해서 우리 셋 중에서 하나를 걸고넘어지려니까 이러는 거 아냐? 그렇다고 저런 중노동을 2교대로 시킬 수는 없고 말이야."

휙! 철썩! 크아악!

별로 싸울 만한 일도 아닌데 함께 채찍질을 당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은 결국 헤게모니 장악을 위함이었다. 이제부터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아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화리처럼 겉도는 병력이 없도록 초반에 기선을 제압하려는 것이었다. 

화리 역시 그런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시비를 붙었던 것이지만 영욱이 같이 죽자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나오자 결국은 꼬리를 말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알았어. 둘을 붙여줄 테니까 어서 돌리라고 해. 대체 언제까지 공짜 채찍을 맞을 거야?"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엄살은……."

"넌 피해버리니까 아프지 않겠지만 내 부하들은 벌써 피투성이가 되었잖아."

"피하는 것도 훈련이고 매를 맞고 고통을 견디는 것도 역시 훈련이야.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뭐가 어때서 그래?"

"그럼 맷돌을 왜 돌리려고 했는데?"

"그것도 훈련이니까."

영욱은 화리의 항복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닦달을 했다. 이번 기회에 화리의 못된 버르장머리를 확실하게 고쳐놓을 생각인 듯했다.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 채찍이라고는 해도 여러 번 반복되다보니 피하는 것이 쉬워져서 이제는 화리의 노예들을 제외하고는 정통으로 맞는 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영욱으로서는 더더욱 배를 쨀 수가 있는 것이다.

휙! 철썩! 크아악!

"일단 돌리고 나서 이야기하자니까. 이대로 계속 채찍을 맞을 수는 없잖아."

"채찍을 맞는 것도 훈련이라고 했잖아. 그리고 아프면 피하라고 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좀 돌리라고 해. 우리 애들 다 죽이겠어."

"잘못했지?"

"응! 잘못했어."

화리는 두 손까지 번쩍 들면서 항복했다. 도저히 영욱을 당할 재간이 없음을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3조, 들었지."

"악!"

3조가 다시 맷돌을 돌리기 시작하자 화리의 부하들 중에서 비교적 덜 다친 두 명이 힘을 보탰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텐데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려고 멀고도 험한 길을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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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런 식으로 해야겠어?"

"나야말로 하고 싶었던 말이다. 겨우 여섯 명으로 대등한 관계를 부르짖지 말고 앞으로는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알겠지?"

화리가 또다시 불평을 토로했지만 영욱은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이제 지휘권은 자신에게 있으니까 내리는 명령에나 잘 따르라는 소리였다.

"매번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니까 어쩔 수 없이 협조하긴 하겠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아."

"지금 너 때문에 대책 회의가 자꾸 늦어지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둬. 맷돌을 돌리다가 죽을 참이면 회의 따위는 상관도 없겠지만."

"대책회의를 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길 것 같지도 않으니까 이러는 거잖아. 이곳 두 번째 바벨탑에서 탈출할 가능성은 제로니까 말이야."

"그건 사실이 아니야. 탈출한 자가 가끔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유언비어라면 사절하겠어."

영욱으로서는 금강누치로부터 들은 사실이지만 화리는 그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바벨탑에서의 탈출이란 꿈도 꿀 수 없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게 여태까지의 상식이니까.

"안되겠다. 너는 저리로 꺼져. 그냥 우리끼리만 이야기할 테니까."

"흥! 잘들 해보셔. 난 잠이나 자둘 테니까."

화리는 한극상 등을 이끌고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소희와 은영도 그녀를 붙들지는 않았다. 친하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녀가 심각한 월권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노예 생활1

화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세 사람은 눈을 맞대고서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먼저 은영이 입을 열었다.

"오빠, 뭔가 잘못된 것 같지 않아?"

"맞아. 도전자가 아니라 노예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잘못된 것이야 마법사의 반응으로도 알 수 있잖아. 아무튼 기분은 별로지만 나쁠 것도 없겠지."

"원래부터 도전자가 아니라 노예로 데려올 생각이 아니었을까?"

은영은 눈을 반짝이면서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도전자의 지위보다는 노예의 신분이 살아남는 데에는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아무튼 환수지왕이니 도전자니 하는 소리가 모두 헛소리임이 밝혀졌으니까 속은 시원하다."

"탈출구는 꼭대기에 있겠지? 아무래도 여기는 아래쪽에 위치한 곳인 것 같은데 위층으로는 언제 올라갈 거야?"

"내가 미쳤어? 층을 하나 오르려면 수문장을 꺾거나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데 그 어려운 짓을 왜 해? 게다가 올라야할 층이 999개나 되고, 올라갈수록 상대는 더욱더 강해질 것이며 꼭대기까지 올라가도 여전히 탈출구가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야."

영욱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위로 올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밝혔다. 그저 조그만 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개구멍이라도 기어서 탈출할 생각뿐이었다.

"그럼 여기서 죽을 거야?"

은영도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영욱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일단 이곳의 분위기 파악부터 하고 나서 판단하도록 하자. 부족한 수련도 하면서 말이야."

"3교대로 돌아가니까 수련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가슴이 답답하고 몸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것 같아. 구름 위에 있는 세상이라서 산소 농도가 희박해서 그런 건가?"

"그게 아니라 탑의 중심 회전축에서 우리들의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는 거야."

영욱은 회전에 대해서라면 남부럽지 않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은영의 이상異狀 상태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럼 우리가 이 바벨탑의 연료라는 거야?"

"맞아. 힘을 써도 죽고, 가만히 있어도 죽게 되는 구조야. 시쳇말로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상황이지. 그러니까 채찍을 피하더라도 별다른 보복 조치를 하지 않는 거였어."

"그럼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이곳의 실체를 알게 되었으니까 지금부터 방법을 찾아봐야겠지."

어느 정도는 회전에 답이 있음을 느끼고 있는 영욱으로서는 그리 심각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러니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이렇게 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이다. 

"무슨 방법이 있을까?"

"이론이야 아주 간단하지. 빼앗기는 기운보다 더 많은 기운을 만들어 내든지 아니면 한 톨의 기운도 빼앗기지 말든지 해야겠지."

"대답은 간단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와 같은 거 아냐?"

"우리가 생쥐라면 불가능하겠지만 사람이라면 그까짓 일이 불가능할 리 없잖아.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사람이니까 당연히 가능할 거야."

영욱은 아주 이상한 삼단논법을 동원해서 조용한 바벨탑을 하찮은 고양이로 만들어버렸다.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성격이 오빠의 가장 큰 장점이야."

"전에는 옹졸하고 여자만 밝힌다고 타박했으면서 갑자기 웬 칭찬?"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탈태환골 했잖아. 요즘은 여자를 밝혀도 되는데. 호호호!"

"영욱 씨의 표정이 그리 어둡지 않은 걸 보니까 뾰족한 방법이라도 있는가 봐요?"

빠져나갈 타이밍을 놓쳐서 한동안 의기소침해 있었던 소희도 이제는 바벨탑의 노예가 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인 듯했다. 뿐만 아니라 영욱의 표정을 살피는 여유까지도 회복한 걸 보니 지극히 현실적인 그녀다웠다. 

"뾰족한지는 찔러봐야 알겠지만 내 느낌으로는 마나와 유나는 빼앗기지 않는 것 같아. 아마도 이곳이 허접한 녀석들의 기운을 빼앗는 곳이라서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확인된 사실은 아니지만 이곳이 바벨탑의 하층부라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는 관리하는 책임자가 마법사인 걸로 보아서도 마나를 빼앗지는 않는 듯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진 모든 기운을 유나로 바꿔야 한다는 거야?"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우리는 일부라도 가능하겠지만 오빠의 부하들은 어떡하라고?"

"지금부터라도 가르쳐야겠지."

"그럼 그렇게 해. 다들 불안해 하니까."

"좋아. 그러자."

영욱은 부하들에게 아낌없이 베풀기로 했다. 그들이 있으니까 영욱은 사역使役에 동원되지 않아도 되고, 그 덕분에 당면한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니 그들을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게 아깝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부하들이 강해질수록 자신이 더 강해질 수도 있으니 이제는 부하들에게도 신경을 써야할 순간이 왔다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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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조용히 들어라."

"……."

"너희들도 느끼고 있겠지만 이 바벨탑의 중심 회전축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주변에 있는 기운들을 강하게 빨아들이고 있다."

"……."

"그 기운들을 빨아들여야만 이 거대한 덩치를 가진 바벨탑이 하늘을 떠다니거나 추가로 연료가 되거나 노동력을 제공할 노예들을 포획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는 노예들에게 투명 마법 채찍을 가동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영욱은 아주 담담하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부하들에게 설명했다. 다들 느끼고 있는지 분위기는 아주 차분했다.

"……."

"어떻게 생각하자면 우리 신세가 불쌍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다른 각도로 생각한다면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

"일단 기운을 빼앗기지만 않으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것이고, 그 시간 동안 훈련을 통해서 엄청나게 강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다들 할 수 있겠나?"

"악!"

"박상태! 너 혼자만 대답했다. 혀를 잘리고 싶어서 그래?"

박상태는 물론이고 영욱 역시 큰소리로 떠드는 중이니까 영욱마저도 혀를 잘리게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겨우 이 정도의 소음으로 혀를 자르지는 않을 듯했다. 잘라봐야 치유 능력으로 재생시켜버리면 그뿐이기도 하고. 예전과 같지는 않아서 말을 좀 더듬기는 하겠지만.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몸속의 기운을 모두 유나로 바꾸어 버리면 빼앗기지 않는다. 다들 유사 마나, 즉 유나를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겠지?"

"모, 모릅니다."

"이미 가르쳐 주었는데도 왜 몰라?"

"……."

"애들도 아닌데 그걸 일일이 알려줘야 하는 거야? 좋아. 이번 한 번만 알려주기로 하지. 윈드밀 스핀이나 헤드 스핀을 빠르게 실시하면 몸속의 기운들이 유나로 바뀐다. 내가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겠나?"

"……."

직접적으로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다들 모를 리가 없는 사실이다. 다만 주인인 영욱으로부터 허락 절차를 거치는 손님으로서의 통과의례인 셈이다. 이제는 공공연히 그 방법을 사용해서 유나를 만들어도 좋다는 허락인 셈이었다.

"맷돌을 돌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다들 유나를 만드는 작업에 매달리기 바란다. 실시!"

"악!"

"박상태! 너 자꾸만 고함지를래? 여기서는 악 소리를 내지 말랬잖아."

"죄, 죄송합니다. 대장님."

영욱도 목청을 있는 대로 높여서 박상태를 꾸짖었다. 다분히 의도적인 구석이 있는 행동이었다.

박상태가 자꾸만 악을 썼지만 혀를 잘리지는 않았다. 사실 박상태는 이미 유나를 생산하고 있는 중이니 흥분해서 그런 실수를 한 것은 아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유겠지만 영욱이 텔레파시로 그렇게 하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혹시 도청장치가 작동 중일 지도 모르니까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한편 엿듣고 있는 마법사를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씨 마나가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니까 그냥 맨땅에 헤딩만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 다행스럽게도 가장 중요한 씨 마나는 내가 가지고 있다. 조금씩이나마 나눠줄 테니까 다들 그리들 알고 있도록 해. 

"……."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텔레파시로 전달했다. 얄미운 화리를 골탕 먹이겠다는 의도도 있지만 감청당하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군대에 복무하던 시절 지휘관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게 바로 보안이라서 이제 지휘관이 된 영욱도 그 부분부터 신경을 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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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제 3의 눈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기운을 가진 바벨탑의 내부를 살피기에는 아직도 수준이 많이 얕아서 그 범위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특히 위층이나 아래층의 상황은 전혀 살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있는 층의 상황은 대충이나마 느낄 수가 있었다.

이곳은 원형 경기장을 수십 개나 합쳐놓은 것 같은 장소인데 마치 양파껍질처럼 켜켜이 싸여있는 구조였다. 영욱 일행이 노역하고 있는 이곳은 바벨탑의 중심 회전축이 돌고 있는 가장 안쪽 부분인데 바깥쪽으로도 무려 20팀이 넘는 노예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거대한 맷돌들을 돌리고 있었다. 

신참들이 제일 안쪽에서 맷돌을 돌리고, 오래 될수록 바깥쪽으로 밀려나가는 듯했다. 그들의 몸속에 분포하고 있는 기운들을 느껴보니 바깥쪽으로 갈수록 걸어 다니는 시체에 가까울 정도여서 다른 층으로의 이동은 아무래도 불가능한 듯했다. 

아마도 능력이 강한 환수사냥꾼들이나 환수들일수록 상층에서 노역을 담당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욱 일행보다도 쳐지는 자들은 보나마나 더 아래층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더 아래층이 있다는 보장은 결코 없지만.

그래서 영욱은 이 방면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은영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여기는 과연 몇 층쯤일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구름 위니까 바벨탑에서도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층은 아닐 것 같아.

-바깥이 전혀 보이지도 않는데 여기가 구름 위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어? 

-물론 보이지는 않지만 습도나 기압 등을 고려해서 하는 말이야. 물론 짐작이야.

-네 판단은 언제나 그럴 듯하지만 이번에는 좀 엉성하다. 그래도 신빙성은 있는 것 같아. 

영욱도 은영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제 3의 눈으로 살핀 결과와 대충 비슷했기 때문이다.

-고마워, 오빠. 오빠에게 실수한 것 딱 하나만 빼면 내가 안목은 좀 있는 편이지. 

-그때의 네 안목은 아주 정확했어. 그 뒤에야 환골탈태한 거니까 네가 판단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게 아냐. 언니가 항상 현재의 상태 판단보다는 미래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판단이 더 중요하다고 노래를 불렀는데, 그냥 귓등으로만 들었지 뭐야. 오빠에게 큰 실수를 하고 나서야 겨우 그 말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으니까 하는 말이야.

-지금으로서는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니까 별로 도움이 되지도 않는 사랑 타령은 다음에 듣기로 하지. 아무튼 습도나 기압을 느끼는 것은 네가 나보다 나은 것 같으니까 바벨탑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으면 내게 알려줘.

-맡겨둬.

영욱은 이곳이 최하층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영욱 역시 바벨탑의 최하층은 구름 아래로 불쑥 튀어나와 있었음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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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식사다. 사이좋게 나눠먹든지 혼자서 다 먹든지 상관없지만 맷돌이 멈추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하루 정도가 지나서야 담당 마법사가 다시 나타나더니 거대한 환수 사체로부터 분리한 뒷다리 하나를 던져주고는 사라졌다.

"상태야."

"예. 대장님."

"사람 숫자대로 정확하게 나눠라."

"예. 대장님."

가진 기운을 탑의 회전축에 거의 다 빼앗겨버린 환수 사체라서 그런지 양질의 기운이나 영양가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거라도 먹어두지 않으면 5대 영양소 부족으로 굶어죽을 게 분명하니까 다들 사이좋게 나눠먹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다 협조적인 것은 아니었다.

"난 먹지 않을래."

어디선가 실컷 자다가 식사 소리에 기어 나온 화리가 투정을 부리고 나왔다. 사실 곱게 자란 그녀가 반쯤 썩어가는 환수 고기를 먹을 리 없다.

"그럼 내가 대신 먹을 테니까 너는 먹지 않아도 돼."

"정체도 알 수 없는 환수인데다 썩는 냄새가 풀풀 나는 걸 어떻게 먹으라고 강요하는 거야?"

"아직도 정신을 덜 차렸군. 숨겨둔 비상식량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기로 하자."

영욱은 대놓고 화리를 비웃었다. 사실 꼬불쳐둔 것으로 치자면 영욱과 부하들도 만만치 않게 많지만 첫 끼니부터 그걸 꺼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흥! 죽어야만 비로소 해방된다는 바벨탑의 노예가 되고도 여전히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 모양이군."

"태어나고 처음으로, 그것도 공짜로 비행기를 타게 되었는데 기죽을 이유가 뭐지? 속도가 좀 느려서 아쉬운 감은 있지만."

영욱을 태운 바벨탑은 강원도 일대를 천천히 주유하는 듯했다. 그것은 아마도 피의 페스티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했다.

"네 노예들이야 원래 노예니까 그렇다지만 너는 어떻게 아직도 유쾌해?"

"내 부하들이 왜 노예라는 거야? 요즘 세상에 억대 연봉이 어디 있어? 게다가 올해가 가기 전까지 몇 억을 더 받을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노예면 뭐 어때? 돈만 잘 벌면 장땡이지."

"노예들은 그렇다 치고 너는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아? 매일 기분 좋은 사람이라면 머리에 꽃이라도 꽂아야 하는 거 아냐?"

화리와 영욱은 인신공격도 마다하지 않고 서로를 헐뜯고 비난했다. 미친년이라는 소리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늘 머리에 꽃을 꽂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미쳤다는 소리였다.

"조용한 곳에 틀어박혀서 십 년쯤 폐관 수련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졌어. 그런데 기분이 나쁠 리가 있겠어?"

"드디어 미쳤군. 완전히 돌아버렸어."

화리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면서 손가락을 빙빙 돌리자 영욱은 빙긋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맞아. 헤드 스핀을 하면 머리가 빙빙 도니까 그 말도 옳은 지적이야. 하지만 내 말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야."

"그럼 썩은 환수 고기나 맛나게 드시고 기다리고 기다렸던 훈련이나 열심히 하셔."

"당연하지. 너도 꿈을 이루고 싶으면 이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할 거야."

"너나 꿈을 이루세요. 나는 그동안 밀린 잠이나 더 자야겠어."

"맘대로 하세요."

화리는 무슨 꿍꿍이속인지 다시 영욱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도넛 형태의 공간이니까 조금만 이동해도 시야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런다고 제 3의 눈을 가진 영욱이 모를 리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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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있는 공간은 파인애플의 심을 파내고 절편으로 잘라놓은 것과 같은 곳이다. 바깥지름이 대략 10미터 정도 되고 안지름이 2미터 정도 되는 듯했다. 그러니까 바벨탑의  중심 회전축의 두께가 2미터라는 소리였다.

빈 공간은 8미터 폭의 거대한 도넛 모양이지만 거대한 바위 맷돌과 손잡이가 대략 6미터를 차지했고, 양쪽으로 1미터씩의 공간이 있기는 했지만 가운데 부분은 중심축이 빠르게 회전하기 때문에 위험했다. 그러니 많은 숫자의 부하들이 편히 누워서 쉴 만한 공간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나마 높이는 10미터 가까이 되어서 여유 공간이 무려 6미터 정도나 있지만 하늘을 날지 않고서야 이용이 불가능한 공간인 셈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휴식 시간인 조들도 벽에 기대서 쉬거나 앉아 있을 뿐 수련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맞아. 맷돌 위에 올라가서 쉬거나 수련하면 되잖아."

"그리 되면 돌리기가 더 힘들 텐데?"

"맷돌의 무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까 다들 위로 올라가. 그리고 중노동이 아니라 수련이니까 이왕이면 무거운 게 좋잖아."

"악!"

지금 바위는 맷돌을 돌리고 있는 3조 조장 허풍선장의 표정이 그리 밝지 못했지만 주인인 영욱이 하는 일이니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는 못했다. 

사실 쉬는 시간이라도 편히 쉬고, 훈련이라도 할 수 있어야 밝은 미래가 있는 것이니 조금 더 무겁다고 해서 불평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즐거운 노예 생활

바위 맷돌의 윗부분은 평평하고 넓었다. 폭이 4미터 정도이니 훈련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데에도 충분했다. 다만 아래쪽에서 서있는 것보다 기운이 더 많이 빠져나간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스핀 연습을 하거나 훈련으로 달리기를 할 때는 반드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라. 알겠나?"

"악!"

"박상태, 너 또 고함지를래?"

"시정하겠습니다. 대장님."

영욱은 헤드 스핀이 아니라 굼벵이처럼 몸을 바닥에 뉘고 굴리는 동작을 몸으로 직접 보여주었다. 그게 상대 회전 속도를 줄이면서 회전에 의한 이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들 백족의 껍질을 여러 장씩 착용하고 있으니 옷이 닳아 없어질 것을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보기에는 우스꽝스럽지만 나려타곤懶驢打滾 초식처럼 적의 공격을 회피할 수 있는 좋은 움직임이기도 해서 이러한 수련의 필요성은 충분히 있다고 판단되었다.

"추월은 앞사람을 넘어서 한다. 알겠나?"

"악!"

저마다 구르는 속도가 다르니 빚어질 수 있는 문제는 교통 체증인데, 영욱이 한 바퀴를 따라잡아서 제일 뒤에서 구르고 있는 부하를 가볍게 뛰어 넘어서 추월함으로써 보여주었다. 

공중 추월을 하기 위해서는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야 하니까 에너지 소모량이 매우 늘어났다. 하지만 허공에서 빠른 공회전이 가능하니 유나를 만드는 속도가 빨라져서 보상받는 부분이 있어서 그럴 만한 의미는 충분했다.

영욱은 부하들을 추월할 때마나 씨 마나를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나눠준다고 해서 유나를 생산할 수 있다는 보장은 결코 없지만 땅바닥을 구르는 일이 그저 헛수고가 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마음에서 농부와도 같은 마음으로 씨 마나를 뿌렸다.

영욱은 수십 번을 추월하면서 부하들의 몸 상태를 체크했다. 이미 씨 마나를 나누어준 적이 있었던 박상태는 구르는 동작만으로도 조금씩이나마 유나를 생산해내고 있었고, 반백신감의 경우에도 미량이지만 벌써부터 유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조 조장과 2조 조장은 유나 생산에 성공했다. 그러니 다들 힘을 내라. 너희들도 할 수 있다."

"악!"

영욱은 더 이상 나누어줄 씨 마나가 없음을 느끼고는 자신의 수련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구르는 회전 속도로는 평소에 만들어 내던 회전 속도를 도저히 따를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곤란했다.

'안되겠군. 좀 위험하긴 하지만 모험을 할 수밖에.'

영욱은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는 바벨탑의 중심축으로 조금씩 접근했다. 그리고 중심 회전축에 바짝 붙어서 헤드 스핀을 시도했다. 회전축의 회전력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사실 헤드 스핀이라기보다는 원동기의 회전축에 맞물려 도는 기어와 같은 행동을 하고자 했다. 영욱은 시계 방향으로 맹렬하게 돌면서 반시계방향으로 돌고 있는 중심축과의 밀착을 시도했다. 회전 속도의 차이로 인한 충격을 최소화시키려는 생각에서다.

지지직.

하지만 차이가 너무 많이 나다보니 요란한 마찰음을 내면서 세차게 튕겨나가고 말았다.

"어쭈? 이 새끼가 감히 나를 튕겨냈어?"

사정없이 나가떨어졌던 영욱은 스핀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여서 또다시 밀착을 시도했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현저한 회전 속도의 차이는 강력한 반발력이라는 배척으로 표출되고 말았다. 

보통의 경우라면 거친 그라인더에 갈리듯이 살점이 다 떨어져 나갔겠지만 영욱의 몸은 보호막과 각종 환수 가죽들로 겹겹이 싸여 있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좋아! 나는 튕기는 여자가 더 좋더라. 너랑 붙어먹지 못한다면 내가 성을 갈고 말겠다."

영욱은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야한 농담까지 해가며 계속해서 부딪쳐갔다. 하지만 여전히 현저한 속도 차이로 인해서 계속 튕겨나기만 했다. 옆에서 그 꼴을 보고 있던 은영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빠!"

"바빠! 말 시키지 마!"

"운전도 못해? 처음부터 5단을 넣으면 어떡하자는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유능한 포클레인 기사라는 거 몰라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런데도 출발이 1단부터라는 걸 모르는 것 같으니까 하는 소리지. 어떻게 유능하다고 자처하는 포클레인 기사가 어떻게 그것도 몰라?"

"알지만 내 몸에 기어가 어디 있다고 그래? 넌 알아?"

"나도 몰라. 그 정도만 알려주면 나머지는 오빠가 자체적으로 해결해야지, 안 그래?"

"아무튼 고마워."

영욱은 은영의 충고 아닌 충고를 듣고 회전 속도의 차이도 많이 나지만 맞물리는 원주율의 차이가 너무 커서 붙어먹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실드와 보호막으로 자신의 배 둘레를 공처럼 부풀리기 시작했다.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마치 눈사람처럼 변한 영욱은 다시 중심 회전축과 붙어먹기를 시도했다. 

지지직. 쿵!

하지만 결과는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튕겨나는 속도와 소음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젠장! 공간이 좁아서 지랄 같구나."

영욱은 창피스러운 마음에 결국은 장소 핑계를 대고 말았다. 사실상 부하들이 온통 바닥을 구르고 있어서 그것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곧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하들이 영욱의 눈치를 보면서 구르기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누가 중단하라고 했어? 어서 굴러!"

"악!"

영욱은 폭 8미터를 모두 이용해서 몸 둘레에 직경 8미터에 보호막을 만들어내는 길만이 중심축과 붙어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딛고 설 장소가 여의치 않음도 동시에 깨달았다.

그리고 어찌어찌해서 붙어먹는데 성공한다고 해도 추후 더 빠른 회전을 위해서 보호막으로 만든 기어의 크기를 줄이지 않을 수 없다. 그리되면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결국은 부하들에게 방해가 될 것이라는 사실도 동시에 깨달았다.

'아직 날 수도 없지만 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허공에서 중심잡기는 어려울 테니까 난감하군. 그렇다면 구름다리라도 놓아야 하나?'

영욱은 높이 1미터짜리 다리라도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한쪽 구석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환수들의 뼈다귀에 눈길이 갔다.

'내 머리 속에 들어있는 마법 중에는 죽은 환수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도 있다. 하지만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으니 가능할지는 모르겠군.'

영욱은 유나와 환수들로부터 흡수한 기운을 총동원하다시피해서 뼈다귀에 불어넣기 시작했다. 실패를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아니라 꼭 성공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서 하는 시도였다.

"스탠드 업! 스켈레톤."

영욱은 사파이어 귀걸이의 증폭 기능까지도 최대한으로 동원해서 뼈다귀들을 일으켜 세웠다. 잠시 후 영욱의 희망대로 뼈다귀로 만들어진 거대한 악어가 만들어졌다.

"좋았어."

다리 길이가 그리 길지는 않지만 그 아래로 부하들이 굴러가는 데에는 크게 문제될 것 같지 않았다. 

처음 시도치고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만들어진 스켈레톤이 움직일 수는 있지만 빠르게 이동하거나 공격을 하는 것에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영욱이 원하던 단단한 구조물의 역할 정도는 충분히 수행할 것 같았다.

영욱은 뼈로 만들어진 악어 스켈레톤의 등 중간 부분에서 헤드스핀을 실시하면서 자신의 배 둘레에 보호막 기어를 최대한으로 크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동차의 수동기어로 변속할 때 클러치 페달을 조심스럽게 놓는 것처럼 부드럽게 중심축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그렇지! 바로 이거야.'

자동차의 수동 변속 기어에는 반클러치 상태가 존재한다. 기어를 넣고 클러치를 반쯤 밟아서 동력의 일부는 전달받고 일부는 미끄러지는 상태를 말한다.

바벨탑 회전축의 회전 속도가 너무 빨라서 회전력을 전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니까 결국은 일부만을 받아들이고 일부는 미끄러뜨리려는 시도가 성공한 것이었다. 

그그그그.

물론 그 대가로 엄청난 소음이 발생하면서 강하기로 이름난 보호막이 빠른 속도로 손상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엄청난 속도의 회전으로 인해서 빠르게 생산되는 유나가 손상된 부분을 고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영욱은 한동안 반클러치 상태를 유지하다가 빠른 속도에 대한 적응을 시도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겉도는 비중을 서서히 줄이면서 회전축과 밀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개의 톱니바퀴가 정확하게 맞물린 것처럼 폭발적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빠른지 회전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니, 숨을 쉬면 혹시라도 중심이 흐트러질까봐 일부러 숨도 쉬지 않았다. 당연히 호흡은 두 개의 나노캡슐에서 생산되는 산소에 의존했다.

무작정 회전한다고 해서 유나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만들어진 유나는 몸속의 회전축 근처에다 모으고 재료가 될 다른 기운들을 끌어와야만 했다. 

그 기운들 중에는 몸속에서 자유롭게 분포하던 녀석들도 있었고, 가죽과 가죽들 사이에 보관되어 있던 녀석들도 있지만 회전 속도가 터무니없을 정도로 빨라지자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해지는 순간이 오고 말았다. 

결국 영욱은 은영과 소희 그리고 부하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들을 가로채기로 했다. 어차피 중심 회전축에게 빼앗기는 것이니까 미안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바깥의 다른 노역장에서 바위 맷돌을 돌리고 있는 노예들의 기운도 가로채야만 했다.

그리고 회전하고 있는 바위 맷돌에서 흘러나오는 기운 역시 영욱이 가로챈 기운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막상 흡수하고 보니 놀랍게도 또 다른 형태의 유사 마나였다.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마나와도 조금 다르고, 유나와도 조금 다르지만 그 역시 같은 계통의 마나였던 것이다.

'좋아. 바위에서 나온 마나니까 너를 '바나'라고 불러주겠어. 잘 부탁해.'

영욱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혼잣말 놀이를 계속했다. 지금은 회전축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운 중에서 아주 일부만 가로채는 게 가능한 상태지만 나중에 숙달되면 상당한 양을 가로챌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녀석의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바나의 발견은 영욱으로 하여금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사실 바벨탑이 계속해서 이동하는 이유는 바나를 생산하는 거대한 맷돌을 돌릴 노예들을 포획하거나 구입하기 위함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대기 중에 충만한 기운들을 빨아들이기 위함인 듯했다.

회전축이 가지는 엄청난 흡인력은 환수나 사퍼모어 급의 노예들이 가진 기운도 강제적으로 뽑아낼 정도니 대기 중에 떠도는 기운 정도는 간단하게 불러 모을 수 있었다. 

오대양을 유영하면서 플랑크톤이나 크릴새우 떼를 진공청소기처럼 흡입하는 향유고래와도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 위력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크지만 최고 포식자로서의 유유함은 많이 닮아 있었다. 

영욱은 자신에게 또 하나의 기연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영욱은 유나를 만드는 족족 그리고 바나를 끌어모으는 족족 바위 맷돌을 돌리고 있는 부하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물론 열심히 구르면서 유나를 생성시키기 위해서 애를 쓰는 부하들 역시 챙겨주었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만들어진 유나와 흡수한 바나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일단 부하들부터 챙겨야 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더 빠른 회전 속도를 얻어내야 하는 것임을 잘 숙지하고 있었다.

영욱은 자신의 배 둘레에 만들어 놓은 보호막의 크기를 조금씩 줄이면서 회전축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회전 속도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빨라졌다. 

끄어어어.

태풍의 눈에 해당하는 부분은 고요하지만 영욱의 몸속은 그러지도 못했다. 흘러가는 기운들을 모아서 유나로 바꾸는 작업 속도는 훨씬 더 빨라졌지만 속도로 인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엄청난 원심력 때문에 몸속의 혈액이 죄다 피부 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가속되어서 얼굴이나 피부가 술 취한 사람처럼 빨갛게 변해버렸다. 살짝 손만 대어도 피가 쏟아질 것 같았다.

'젠장! 이젠 혈액 순환까지도 직접 개입해야 하다니…….'

영욱은 투덜대면서도 결코 회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보호막의 크기를 조금씩 줄여가면서 회전 속도를 더 높이는 데 집중했다.

경시 동작이란 원래 삼차원에다 시간이라는 사차원 축을 끌어다가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잠시 시간의 흐름을 늦추어서 피부 쪽으로 죄다 쏠려버린 피들을 심장으로 불러 모으는 일도 가능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다시 시간의 흐름을 더 빨리 돌려서 떨어진 회전 속도를 보상해야만 했다. 고통은 더 심해졌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영욱의 몸은 빠른 속도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빙빙 도는 연습을 꽤나 오랫동안 했고, 열심히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도는 데에는 타고난 재능이 있기 때문이다. 

영욱은 보호막 기어의 크기를 조금씩 줄이면서 바벨탑의 중심 회전축에 조금씩, 조금씩 다가갔다. 그 거리는 아주 조금이지만 회전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라졌다. 기어비라는 것이 가지는 마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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