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60/71)

영욱은 녀석의 날카로운 발톱에 사로잡히기 직전에 자신을 대신할 희생양으로 대룡을 소환했다. 블랙수달은 영욱 대신 대룡을 움켜쥐었다.

-크아악! 주인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뭐해? 휘감지 않고?

-두 동강이 나게 생겼는데 감아서 뭘 어쩌자고요?

-발톱과 이빨만 강해. 나머지 부분은 별로니까 어서 조이라니까. 그리고 이빨을 사용하지 못하게 불을 내뿜어. 파이어볼!

-화구를 나한테 던지면 어떡해요?

블랙수달을 똘똘 감았으니 자칫 잘못하면 영욱의 공격이 대룡에게도 피해를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욱이 공격한 부분은 대룡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었다.

-넌 별로 뜨겁지도 않잖아. 엄살 부릴 걸 부려야지.

-빨리 어떻게 좀 해봐요. 두 동강이 나기 직전이에요.

-두 동강이 나도 상관없잖아.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듣고 보니까 별로 문제될 건 없겠네요.

-자! 이제 시작하자.

영욱은 경시 동작 잔상무를 추면서 블랙수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룡은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하지만 지렁이의 특성을 가진 대룡은 죽지도 않고 오히려 두 군데에서 불을 뿜어내면서 블랙수달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프잖아. 아, 뜨거.

-이제는 금강누치가 왜 죽었는지 알겠지?

-이렇게 강력한 조력자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것도 화염대룡이라니 정말 놀랍다.

-아무튼 너도 불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구나. 그럼 잘 가라!

영욱은 블랙수달에게 죽음을 언도했다. 실제로 녀석의 숨을 끊어 놓으려면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언어의 위력은 놀라워서 그 시간을 놀라울 정도로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영욱의 사형 언도는 효과가 있었다.

-잠깐만! 살려준다면 나도 너를 주인으로 모시겠다.

-그래? 그렇다면 절차는 잘 알고 있겠지?

-저, 절차라니?

-좀 더 맞아야 진심으로 싸움의 결과를 승복承服하게 되고 그래야 노예가 될 수 있는 거야. 몰랐나?

-아프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낫겠지.

말 한 마디로 블랙수달의 저항 의지를 원천봉쇄해버린 영욱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 금강누치보다는 현명한 것 같으니 나도 너를 내 노예로 삼고 싶어. 그럼 지금부터 눈을 감고서 매를 음미하도록 해.

-아, 알았다. 악!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반말을 찍찍 내뱉는 걸 보니 아직 노예가 될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물론 영욱으로서는 블랙수달이 꼭 항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진위가 밝혀질 때까지 공짜에 가깝게 구타할 수 있을 테니까.

블랙수달의 입장에서는 대룡 때문에 꼼짝 못하는 상황이 되자 시간이라도 벌어볼 목적으로 항복한 것인데 다짜고짜 몰매를 주기 시작하자 오히려 더 난처해졌다. 그렇다고 저항할 수도 없고 저항하지 않으려니 아파도 너무 아팠다. 결국 매 앞에 장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살려주세요. 주인님.

-조금만 더 견뎌봐. 아직은 매가 부족한 것 같으니 말이야.

-좀 대충하면 안 되나요?

-통과의례니까 조금만 더 참으면 돼. 

-정말 너무 아파요. 이제 제발 좀 그만해요.

-시작은 네 마음대로지만 끝은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바로 통과의례라는 거야. 대룡도 꿋꿋이 참아낸 일인데 네가 못 참는다는 게 말이 돼?

말은 격려 그 자체였지만 상황은 살벌했다. 기계 삽에 찍힌 블랙수달의 몸에서 선혈이 낭자했다. 물론 영욱의 간식거리로 활용되었지만.

-그, 그래요?

-그래. 조금만 참아봐. 그러면 너는 자랑스러운 내 노예가 될 수 있으니까.

-제가 대룡의 윗자리인 것은 확실하죠?

-지금은 대룡이 선배지만 도전할 기회는 언제든지 열려있어. 그러니 선배가 되고 싶다면 겨루어서 이기기만 하면 돼. 

-화염대룡이 대단하긴 하지만 그녀가 견뎌냈다면 저도 할 수 있어요. 악! 

블랙수달은 너무 많이 두들겨 맞아서인지 영욱의 궤변에 당황해서인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노예가 되는 작업은 견뎌내서 될 일이 아니라 도저히 견디지 못해서 똥오줌을 줄줄 싸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피 끓는 충성심이라도 가지고 있든지.

블랙수달은 이를 악물고 매 타작의 고통을 견디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욱 역시 잔상무의 위력을 높이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했다.

기회가 주어지긴 했지만 아주 가까운 과거로의 타임 워프였기에 두 가지의 마법을 배운 것과 잔상무 초식의 진전밖에는 크게 얻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기계체조 구결도 얻긴 했지만 아쉽게도 90%짜리에 불과했다. 

그러니 기계체조의 경지가 100%로 오르는 기적은 없었다. 아니, 50%의 경지조차도 달성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겨우 30%에 근접한 것만 해도 대단한 성과인 셈이다. 사실 간절히 원하면 오히려 더 멀어져가는 게 세상사의 진리가 아닌가.

그걸 깨닫게 된 영욱은 기계체조의 경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경시동작 잔상무 초식에만 주어진 시간의 대부분을 투자했다.

몽구스 환수를 무찌르고 나서 다들 2QB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영욱은 수련을 위해서 좀 더 머무르다가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조금이 아니라 무려 1년이나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황급하게 눈을 떠야만 했었다. 

큰일이라도 벌어질 줄 알았지만 우려와는 달리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눈을 뜬 시각은 그전과 똑같이 새벽 두 시 경이었던 것이다. 

2QB 세상에서 무려 일 년이나 더 머물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 시간이 조금 더 걸렸을 뿐이다.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리는 게 가능한 것이 2QB 세상의 보편적인 룰인지 그게 아니라면 시간을 또 하나의 축으로 사용하는 경시 동작을 배웠기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게 영욱으로 하여금 두 가지의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만들었고, 경시 동작을 좀 더 깊이 수련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금강누치가 제공했던 타임 워프가 일으킨 진정한 기적인 셈이다. 

아무튼 일 년이라는 긴 시간이 불과 몇 시간 정도로 느껴질 만큼 몰입했던 덕분에 얻어낼 수 있었던 성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욱의 기계체조는 아직도 20%대 후반에 머물고 있었다.

진중권이 평생을 수련해도 20%대 초반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겨우 1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정말이지 대단한 발전을 이룬 셈이다. 하지만 시시각각 바벨탑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니 그걸 기뻐할 수는 없었다.

청출어람의 경지에 이른 것까지는 좋은데 이제 사부 진중권의 경지를 훌쩍 넘어서다보니 앞에서 끌어줄 사람이 없어진 게 제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몰입의 상태에서 블랙수달을 패고 있는 영욱은 또 다른 기연을 맞이하고 있었다. 구타에 완전히 몰입한 상태지만 습관처럼 블랙수달의 몸에서 난 상처로부터 피와 체액을 흡수하다가 1년 동안의 수련에서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격의 집중과 상대의 몸에서 발생하는 반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기계체조는 혼자 수련해서는 결코 대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깨달은 셈이었다. 

물론 블랙수달의 검은 피와 체액 속에 포함된 기운들도 큰 도움이 되었다. 영욱은 거친 기운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활인심의 구결을 외우며 경시 동작 잔상무의 초식에 더더욱 집중했다.

피를 뽑기 위해서 때린 곳을 정확하게 또 때리고, 또 블랙수달이 힘을 주어서 버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타격의 타이밍을 읽히지 않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경시 동작이 점점 더 유연해지고 느려지거나 때로는 빨라졌다.

꾸에엑. 꽥!

블랙수달은 이제 돼지 멱따는 소리로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아프다보니 창피스럽다는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한 구타가 지속되던 중 어느 순간 블랙수달이 사라졌다가 영욱의 왼쪽 옆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영욱은 여전히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 환수들은 노예가 되어도 거만하기 짝이 없고, 어지간히 맞아도 분수를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계체조의 수준이 오르는 중이니 최악의 경우 블랙수달이 죽게 되더라도 구타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금강누치처럼 배신해서 달려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영욱의 공격으로 인해 고통이 뼈에 사무치는 블랙수달은 벌벌 떨면서 그저 애처로운 신음소리만 흘리고 있었다. 사실 움직이려고 해도 어느새 자신의 발목과 목을 채우고 있는 족쇄와 목걸이 때문에 움쩍달싹할 수도 없었다. 영욱이 그를 자신의 옆으로 소환할 때 미리 ULM 올무를 만들어서 채워둔 것이다.

블랙수달의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이 닿는다면 간단하게 끊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도록 세 방향에서 팽팽하게 당기고 있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처럼 뻣뻣하게 굳어있기만 했다. 

영욱은 이제 마음 놓고 구타에 돌입했다. 사실 노예가 되기 전까지는 언제 반격할 지도 모르니 긴장의 끈을 늦출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한 상태였다.

공격의 빈도수와 강도가 점점 더 늘어나고 강해질수록 블랙수달에게서 흘러나오는 피와 체액의 양도 점점 더 늘어났다. 영욱은 무엇에라도 홀린 것처럼 피를 빨고 또 빨았다.

-치유!

매를 견디지 못한 블랙수달이 기절하자 영욱은 얼른 치유 초능력으로 녀석을 깨웠다. 이제는 거의 치유 마법에 육박하는 지라 순식간에 멀쩡한 상태를 회복했다. 그리고 또다시 매 타작이 시작되었다.

-이제 제발 그만 때리십시오. 주인님.

-사실 대룡은 비슷한 시간 동안 열 번이나 기절했지만 너는 이제 겨우 한 번이니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구나. 참는 김에 조금만 더 참아라. 

-이미 항복했는데 왜 그렇게 많이 맞아야 하는 거죠?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노예가 되는 과정이야. 어설프게 관계를 설정하면 위험한 순간에 배신이 발생하게 되고 결말은 금강누치처럼 죽게 돼. 너도 죽고 싶어?

-아, 아뇨. 고통스럽긴 하지만 참고 견뎌서 주인님의 진정한 노예가 되겠어요.

-그래. 그럼 다시 시작한다.

퍽. 퍽.

개그콘서트를 찍는 것처럼 우습고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들이 오고갔지만 막상 당하는 입장에 있는 블랙수달로서는 그런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조장하고 그쪽으로 몰아가는 영욱이 더 오글거려서 견디기가 힘들 정도였다. 

영욱은 웃음을 참느라고 안면근육이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애써 삭이며 재차 기계체조의 수련에 돌입했다. 역시 기계체조의 성취는 실전이나 짜릿한 손맛을 보는 것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싸움 실력은 어디까지나 싸움을 하면서 늘어나는 것이다. 기계체조 역시 무술인지라 혼자서 달밤에 체조하는 식의 훈련으로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잔상무가 아무리 춤과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타격과 베기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 블랙수달을 패거나 베면서 그 동안 정체되어 있던 경지가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영욱은 몸과 포크를 관통하는 전류가 더 자주, 더 강하게 흐르는 것에 짜릿한 전율戰慄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의 전율은 아니다.

*바벨탑의 현신現身

영욱은 두들겨 패던 것을 잠시 멈추고는 빈사 상태에 빠져있는 블랙수달에게 물었다.

-너도 혹시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초능력을 지녔나? 

-그, 그것은 금강누치만이 가진 초능력입니다. 주인님.

-하지만 금강누치를 주된 먹잇감으로 삼는 너라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지는 모릅니다.

-그 초능력을 사용하는 방법이라면 내가 알고 있지. 바로 네 입을 통해서 걸어 들어가는 것이야.

-그렇다면 입을 크게 벌릴까요?

블랙수달 환수는 쾌재를 부르면서 입을 크게 벌렸다. 이빨 사이에 끼어서 썩고 있는 고기들 때문에 고약한 입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했다.

-그래. 내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도록 더 크게 벌려.

하지만 영욱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입속으로 걸어서 들어갔다. 사실 영욱은 블랙수달도 타임 워프 초능력이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아주 약간의 기대를 가지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험을 일부러 자처하는 것은 블랙수달의 진심을 알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려죽일 수는 있지만 매타작으로 충성심을 강요하거나 특히 충성심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위험도 감수하려는 것이다.

-정말 미련한 인간이로군. 맛있게 잘 먹겠다.

블랙수달은 영욱이 자신의 입으로 걸어 들어가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삼켜버렸다. 마음이 급해서 씹어서 삼킬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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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블랙수달의 목구멍을 통과하자 이번에도 영욱의 기억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영욱의 도박은 성공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억속의 모든 것들이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많이 거슬러 오르지는 못했다. 자신이 결단을 내려서 블랙수달의 입속으로 걸어가기 직전까지만 거꾸로 흐른 다음 다시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게 블랙수달이 가진 초능력의 한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는 여러모로 컸다. 블랙수달의 수작에 대응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는 물론이고 두 번의 경험으로 타임 워프라는 초능력을 배울 수가 있었다. 아직은 미약한 초능력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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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크게 벌릴까요?

-그래. 내가 걸어서 들어갈 수 있도록 더 크게 벌려.

영욱은 블랙수달의 의도를 알지만 전혀 주저하지도 않고 다시 블랙수달의 입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입안에 들어서자마자 강력한 화구를 소환해서는 목구멍 안으로 던져 넣은 것이 다른 점이었다.

녀석의 속셈을 알고 있으니 순순히 당해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물론 아주 약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맥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은 아니다. 이제는 보호막이 있으니 오히려 녀석의 속을 파먹게 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블랙수달의 위장 속이 그리 만만치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수류탄 수십 개의 위력을 능가하는 파이어볼이 연속적으로 터졌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위장은 멀쩡하기만 했다. 놀라운 재생력이었다. 

-흥! 발악해봐야 소용없다. 일단 내 뱃속에 삼켜지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소멸당하니까.

-네 녀석의 위장이 제법 튼튼한 편이긴 하지만 뚫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결코 없으니까 자신하지는 마라. 뚫는 일이라면 나를 따라올 자가 없으니까 말이야.

-위장도 튼튼하지만 녹이지 못하는 것이 없는 초강력 위산이 있으니까 네 놈의 몸이 녹아내리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그러니 발악할 시간적인 여유는 없을 것이다.

-초강력 위산이 강력하다고는 하지만 위장을 녹이지는 못하겠지. 그것은 바로 위산으로부터 위장의 벽이 녹는 것을 막아주는 점액 때문이지. 바로 이 점액 말이다. 하하하!

영욱은 사방팔방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위산을 이리저리 피하며 자신의 몸에다 점액을 바르기 시작했다. 보호막만으로는 견디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시가 급하니 잔상무 초식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꼭 전투에만 사용하는 초식은 아니니까. 덕분에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보호막 외부에 점액을 덧칠하는 작업이 끝나버렸다.

-흥! 그래봐야 녹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점액 역시 계속 보충해주어야 하는데 위산으로 가득 찬 지금은 그럴 기회가 없을 테니까 말이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네 걱정이나 해라.

아주 잠깐이나마 시간을 번 영욱은 헤드 스핀 초식을 이용해서 위벽을 뚫기 시작했다. 사실 구멍을 뚫는 일만큼은 누구보다도 잘할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녀석을 두들겨 패는 과정에서 나름 깨달음을 얻어서 이제 무려 30%대에 도달한 기계체조의 위력도 대단했다. 

특히 경시 동작으로 발휘하는 헤드 스핀 초식은 빠르고도 강했다. 블랙수달이 튼튼함을 장담했던 위장 벽은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서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그러니 위산이 복강으로 새어나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졸졸졸.

-뭐, 뭐야?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네 녀석의 위벽이 뚫어져서 위산이 밖으로 줄줄 새어나가는 소리지, 뭐겠어?

-거, 거짓말 하지 마라. 만일 그게 뚫어졌다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그것은 내가 잠시 치유 마법으로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응급조치를 해두었기 때문이지. 

-웃기고 있네. 네 녀석이 왜 나에게 도움을 주는 거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 생각에는 네 녀석이 너무나 놀란 나머지 오줌을 지려서 나는 소리가 분명해.

-오줌 가릴 나이는 이미 지났다. 그리고 너를 도와주려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화끈하게 한 방에 보내기 위함이지. 그럼 잘 가라!

크아아악!

영욱의 치유 마법이 중단되자 블랙수달의 뱃속 전체가 위산에 의해서 녹기 시작했다. 그제야 녀석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서 절규를 하기 시작했다. 블랙수달이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동안 영욱은 반쯤 소화된 기운들을 양껏 흡수하기 시작했다. 

초강력 위산에 의해서 반쯤 소화된 기운은 그 성질이 상당히 유순해서 영욱으로서는 다루기가 아주 좋았다. 사실은 이미 금강누치의 뱃속을 파먹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블랙수달의 뱃속으로 들어오기를 자처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산소를 발생시키는 나노 캡슐을 두 개씩이나 보유하고 있는 영욱으로서는 위장 속이나 뱃속이라고 해도 호흡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예전이라면 단시간 동안 보조 역할밖에는 못하겠지만 이제는 생체 전기의 전압도 꽤나 높아지고, 전류량도 많아져서 가능한 것이다. 격렬하게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며칠이라도 충분히 버틸 수가 있었다. 그게 바로 기계체조의 경지가 올라간 가장 큰 효용 중의 하나였다.

기계체조의 경지가 올라가면서 생긴 또 하나의 효용이라면 포크의 움직임이 거의 실시간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딜레이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자신의 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까지 움직임이 좋아졌다. 

게다가 포크를 소환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영욱의 몸이 포크처럼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도 보너스라면 보너스였다.

영욱은 자신의 손날을 마치 포크의 기계 삽처럼 사용하면서 걸리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잘라냈다. 위산이 닿지 않는 부분에 있는 장기들을 모두 녹이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가끔은 구석진 곳에 숨어 있는 물의 정수나 흙의 정수를 찾아내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이러한 흡수 작업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살려주세요. 주인님.

-뭐야? 아직까지도 안 죽었어? 

죽은척하고 있다는 것은 영욱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을 제3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까.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만 주신다면 정말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네가 나를 삼키면서 했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한데 어떻게 또 미련한 인간이 되고 싶겠어? 사실은 말이야. 처음부터 네가 배신할 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자발적으로 네 뱃속으로 걸어 들어온 거야. 보다시피 이곳이 바로 너의 약점이니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험이었다.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예 처음부터 삼켜지는 길을 택했을 테니까. 물론 수달의 습성을 보자면 먹이를 통째로 삼키기보다는 짧은 앞발로 꽉 잡고서 잘근잘근 씹어 먹는 경향이 있으니 다급한 상황을 연출할 필요는 있었다.

-이 기생충 같은 놈아! 제발 좀 살려달라니까.

-맞아. 내부기생충이야말로 숙주의 약점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는 존재들이지. 네가 그렇게도 믿었던 강한 위벽과 강력한 위산이 통하지 않는 존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너무나도 오만하게 살아온 거야. 오만의 결과는 바로 죽음이지. 그럼 잘 가라.

-흥!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으냐?

-이 상황에서 개복開腹 수술 말고는 별로 뾰족한 방법은 없을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기대되는군.

-나 정도 되는 환수에게는 항상 마지막 카드가 있는 법이지. 바로 자폭이지. 하하하!

-그럴만한 기운이 남아있다면 자폭해도 좋아. 나야 활성화된 기운이 훨씬 더 좋으니까.

-끝까지 큰소리군. 좋아! 그럼 같이 죽자.

-제발 나도 좀 죽여줘. 하지만 벌써 늦은 것 같군.

영욱은 헤드 스핀의 속도를 최대한으로 높여서 이제 막 활성화되기 시작하는 블랙수달 환수의 기운들을 닥치는 대로 흡수해서는 유나로 바꾸기 시작했다. 큰소리를 뻥뻥 치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화약고 속에 들어와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블랙수달 환수의 몸속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기운들이 존재했다. 녀석이 얼마나 많은 존재들을 집어삼켰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영욱의 몸은 그 모든 기운들을 모두 자신의 기운인 것처럼 여기면서 하나도 남기지 않고 빨아들이고자 했다. 

다양한 기운들은 유연성을 증진시키는 방식으로 회전축과의 상대 회전 속도를 더욱더 빠르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 유나의 생산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희승 교수의 팔을 삼키는 것으로부터 생성되기 시작했던 염동력은 이제 기운들을 움직이거나 통제하는 작업에도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게다가 박상태의 피와 눈알을 삼킴으로서 더욱 강력해진 제 3의 눈도 기운의 종류와 위치를 파악하는데 매우 탁월한 효용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기계체조의 수준 증가로 인해 강해진 생체 전기는 제 3의 눈을 더더욱 강력하게 만들어 놓았다.

영욱은 블랙수달의 몸 중심 부분에서 빠르게 회전하면서 태풍의 눈이 되어버렸다. 빠르고 강력한 회전은 어마어마한 음압을 형성하면서 주변의 기운들을 마구잡이로 빨아들였고, 또한 강한 전기를 만들어냈다. 

지지직. 치직.

마치 적란운 중심부의 빠른 공기 회전처럼 어마어마한 기운들이 소용돌이를 형성하면서 중심부에서 회전하고 있는 영욱에게로 몰려들었다.

-대, 대체 뭐하는 거지?

-이것이 바로 헤드 스핀의 진정한 위력이지. 이런 부가적인 효과도 없는데 왜 자꾸 미친놈처럼 빙빙 돌겠어? 안 그래?

-사, 살려줘.

-너도 금강누치 녀석처럼 내 몸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대룡처럼 수십 배로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은 오롯이 네 녀석의 잘못이니까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제발 살려줘.

-내단이 되어서도 노예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 

-젠장! 이제 보니 내가 내 꾀에 넘어간 것이었군. 

-꾀는 나도 부릴 줄 아니까 당연하지.

-아무튼 간에 오랜만에 아주 대단한 인간이 탄생한 것 같군. 어쩌면 나도 네 녀석 덕분에 바벨탑을 구경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 차라리 잘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는지 갑자기 블랙수달의 말투가 담담해졌다. 하지만 그 내용은 그야말로 충격적이고도 파격적이었다. 그 역시 영욱을 환수지왕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래. 내가 꼭 바벨탑의 꼭대기까지 오를 테니까 내 몸 속에서 구경이나 잘 하라고.

-자폭의 기운마저도 흡수해 버리는 놈이니까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군. 그럼 잘 부탁한다.

-염려하지 마. 그리고 너도 심심하면 좀 도와주도록 해.

-어차피 이젠 너에게 속하게 되었으니까 도움이 필요하다면 최선을 다하겠다.

-그럼 잘 가라.

-그래. 너를 주인으로 모셨다면 나도 대룡처럼 수십 배 이상이나 강해졌을 텐데 정말 아쉽군. 그래도 너를 만나서 즐거웠다.

-나도.

삶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버리니 결말은 이토록 부드러웠다. 어차피 소멸은 없는 거니까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블랙수달이나 사람이나 내려놓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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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블랙수달 환수의 내부에서 헤드 스핀을 돌면서 모든 기운을 흡수해버리자 모피 중에서도 최고라고 알려진 수달의 가죽이 영욱의 몸에 맞게 줄어들었다. 그러더니 마치 잘 맞는 외투를 걸친 것처럼 변해버렸다. 또 다른 방식의 교감이 이루어진 셈이다. 블랙수달이 숨을 거두고도 시간이 한참 더 걸린 후였다.

"오빠! 걱정했잖아."

"섭섭하군. 내가 이런 허접한 녀석에게 당할 줄 알았다는 말이잖아. 환수지왕이라는 소리도 듣는 나를 너무 낮춰보는 거 아냐?"

"대룡과 둘이서도 힘에 겨워서 낑낑거렸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어? 게다가 삼켜지기까지 했고."

은영은 영욱이 제 발로 블랙수달의 입속으로 걸어 들어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영욱의 행동이 상식 범주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범의 소굴로 들어가라는 말이 있잖아. 그걸 꼭 알려줘야 이해할 수 있겠어?"

영욱은 목숨을 걸고서 모험을 한 대가로 많은 기운들과 유나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큰소리를 뻥뻥 치는 것과는 달리 두 번 다시 시도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삼켜지기 직전에 여러 개의 화구들을 던져 넣지 않았다면 강력한 블랙수달의 위벽을 뚫어내지 못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덧바른 점액이 강력한 위산으로부터 녹지 않도록 지켜준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줄인 것은 아무래도 처음에 던져넣은 화구들의 공로였을 것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내구성이 같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무지 오빠는 종잡을 수가 없어."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야?"

"어떤 때는 한없이 약한 것 같다가도 어떤 때는 한없이 강한 것도 같으니까 말이야."

"네가 내 수준을 모르면 누가 안다고 그런 말을 해?"

"오빠의 수준이야 잘 알지. 이제 기계체조의 경지로 치자면 족히 33%는 되는 것 같아. 하지만 오빠의 능력은 기계체조만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니까 전체적인 수준을 논하기는 어려워."

은영은 영욱이 사용했던 마법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그게 마법인지를 아직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너무 놀라서 말을 꺼낼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라도 고맙다. 그런데 내 기계체조 수준이 33%라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너도 그 경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잖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그런 아주 판단에 능해. 내가 33%라면 33%가 확실하니까 그냥 믿어."

"아무튼 간에 그것도 대단한 재능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33%밖에 안 된다니 정말로 실망이야. 아무래도 나는 재능이 없나봐."

은영은 영욱이 블랙수달과 싸우면서 여러 단계 올라간 기계체조의 경지를 33%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블랙수달의 내부에서 또 한 차례의 깨달음이 있었으니까 34%일 가능성이 높았다. 

게다가 십여 개의 내단과 더불어 엄청난 량의 기운을 흡수했으니 그 이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스러운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바벨탑이 자신을 잡으러 오고 있는 중이니까…….

"평생을 기계체조에만 매진하신 우리 아빠와 진중권 아저씨가 겨우 24%라는 걸 잊었어?"

"나는 입장이 전혀 다르잖아. 언제 바벨탑의 초청을 받게 될 지도 모르는데 한가하게 20%대에서 놀 수 있겠어?"

"흥! 자랑질은 이제 사절이야. 그런데 마법은 대체 언제 배운 거야?"

결국 마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말았다. 그녀 역시 기계체조의 경지가 무려 20% 대에 이르렀으니 기계체조의 동작과 마법을 구분하지 못할 리 없다.

"그야 2QB 세상에서 열심히 수련한 거지."

"마법서도 없는데 무슨 수로 마법을 배워?"

"초능력의 위력을 극대화시키면서 에너지의 소모를 극단적으로 줄인다는 면에서 보자면 기계체조나 마법이나 크게 다를 것도 없어. 게다가 이제는 유나도 만들 수 있는데 혼자서 마법을 배우지 못할 이유라도 있어?"

영욱은 사파이어 귀걸이 아이템을 만지작거리면서 마법 독학론을 펼쳤다. 마법을 창조한 사람들도 존재하는 세상이니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할 리가 없다. 

물론 영욱은 마법사 휼버린이 귀걸이 아이템 속에다 여러 권의 마법서를 넣어두었기 때문에 배운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은영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다. 곧바로 화리에게로 정보가 새어나갈 테니까.

"오빠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법사라는 종족이 별로 특별한 사람들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해."

"아냐.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그들이야말로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야."

"내 말은 헬렌 컬러 씨나 휼버린 씨는 마법사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지만 마법사들 전부가 다 그렇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는 소리야."

"내가 알고 있는 마법사라고는 그 두 사람이 전부니까 마법사는 모두 특별하다고 생각할래."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영욱도 알량하게나마 블링크 마법과 파이어볼 마법을 배워보니 마법사들의 능력을 더 잘 파악할 수가 있었다. 골프를 전혀 쳐본 적이 없는 사람이 6써클의 경지에 해당한다는 타이거 우즈를 존경할 리가 없는 것과도 같은 이치다. 

"혹시 그 분들이 오빠에게 마법의 씨앗이라도 뿌려준 거 아냐?"

"마법의 씨앗이라는 것도 있어? 그게 뭔데?"

"고위 마법사가 마법에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 마법의 씨앗을 뿌려두면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어서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나도 말로만 들었어."

"그렇다면 마법의 씨앗 덕분은 아닌 것 같아. 그보다는 오히려 이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이유를 깨달은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을 것 같아."

영욱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 마법의 씨앗이라는 것이 자신에게 마법을 가르쳐주지는 않았음을 확신했다. 왜냐면 자신이 얻은 것이라고는 네 권의 마법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이유라니? 진리나 존재의 이유 같은 거 말이야? 너무 어려운 거 아냐?"

  

"그게 아니라 자전自轉하는 것을 말한 거야. 지구가 돌듯이."

"난 또 뭐라고. 하지만 나는 왜 못 배우는 거지? 이제는 유나를 꽤 많이 만들 수 있는데도 말이야."

"회전 속도를 빠르게 하면 할수록 유나가 생성되는 속도도 비례해서 빨라져. 그래서 유나의 축적량이 아주 많아지게 되면 어느 순간 너도 나처럼 부지불식간에 마법을 깨닫게 될 거야. 물론 운이 좋다면 말이지."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아무튼 유나의 축적량이 많으면 마법을 배우기가 훨씬 더 쉬울 테니까 열심히 수련할게."

"네가 매혹 마법을 터득하게 되면 여러 남자들이 죽어나갈 텐데 이걸 응원해야 하나? 아니면 터득하지 못하게 따라다니면서 방해를 해야 하나?"

빙빙 돌기만 해서는 아무리 빨리 돌아도 결코 마법을 터득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영욱은 엄살을 팍팍 부렸다. 자신의 비밀이 노출될 수는 없으니까 그게 진실인 것처럼 굴 수밖에 없었다.

"난 오빠뿐이니까 염려 마."

"나야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까 전혀 상관없지만 하루 종일 헛물만 켜는 내 부하들이 불쌍해서 그렇지. 특히 박상태 녀석은 상태가 아주 심각한 것 같아."

"오빠는 매혹 마법이 꼭 이성을 유혹하는 효과만 있다고 생각해?"

은영은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색다른 주장을 했다. 하지만 헛물켜는 부하들의 시선을 늘 즐기고 있던 그녀의 행동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이었다. 

"그럼 다른 효과도 있나?"

"당연하지. 감히 그런 삿된 마음이 들지 못하도록 상대의 마음을 완전히 억누르는 게 매혹 마법의 궁극적인 경지야. 물론 지금의 매혹 초능력 수준으로는 그게 불가능하겠지만."

"그렇다면 꼭 배울 수 있도록 응원해 줘야겠군."

"고마워. 열심히 할게."

"내가 여러 종류의 기운들을 선물로 줄 테니까 열심히 해."

이 역시 전투를 함께 했으니 획득한 전리품의 공정한 배분인 셈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배분하는 게 더 공정하겠지만 영욱이 블랙수달을 통째로 삼켜버렸으니까 이런 식으로 적당량의 기운을 나눠주게 되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기운이라면 통제하기 어렵거나 속이 부대끼지 않을까? 박상태처럼 말이야."

"아직 네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일차적으로 순화시킨 것들이니까 다루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그리고 활인심방의 구결을 외우면서 기계체조를 수련하면 소화가 아주 잘된다는 거 이제는 너도 잘 알잖아."

"그게 마법을 배우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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