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로 보자면 딱 하루의 시차가 발생했다. 하지만 호그질라 환수는 나타났던 그 장소에서 나타났고, 삼백족도 제 차례가 되자 어김없이 나타났다.
영욱은 이동하는 도중에 가끔씩 은영과 함께 춤을 미친 듯이 추는 것 이외에는 달리 더 수련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순조롭게 흘러가서 결국 영욱이 과거로 거슬러 오른 바로 그 시점이 되고 말았다.
강치는 영욱의 잔상이 자신의 입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갑자기 입을 닫으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포크를 조종하고 있던 영욱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아울러 포크도 함께 사라졌다. 소환이 취소된 것이다.
-하하하! 네 녀석이 걸려들 줄 알았다.
-결국 목적이 이거였군.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강해질 건데 겨우 너 따위의 허접한 인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 것 같으냐? 그리고 아직까지도 내 말을 믿다니 너무 순진한 거 아냐?
-너는 아주 좋은 기회를 놓친 거다.
-기회를 놓친 건 바로 너야.
-과연 그럴까?
-끝까지 큰소리군. 그럼 잘 먹겠습니다.
콸콸!
영욱을 감싸고 있는 강치의 위벽에서 거품 섞인 액체가 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
-흥! 냄새 나는 위산이군. 겨우 이 정도로 나를 먹겠다고 큰소리 친 거야?
-무엇이든지 소화시킬 수 있는 위산이니까. 하하하!
-보호막은?
-그건 소화시킬 수 없지만 네 녀석에게 보호막이 있을 리 없잖아.
-그럼 이건 대체 뭘까?
영욱은 자신의 몸에 두른 보호막 실드를 자랑했다. 위벽에 비비자 질긴 위벽의 껍질이 맥없이 벗겨져 버렸다.
-악! 언제부터 보호막을 만들 수 있게 된 거지?
-네 말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보호막에 대한 비밀도 보이더군. 그럼 잘 가라.
영욱은 강치의 위장 속에서 잔상무를 추기 시작했다. 보기에는 너무나도 멋진 춤이었지만 보호막으로 덮인 영욱의 손끝과 발끝에 닿은 강치의 위장이 푹푹 패여 나갔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껄이다니 내가 믿을 것 같아?
-그럼 믿지 말든가.
영욱은 질긴 위벽을 뚫고서 복강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잔상무와 보호막은 궁합이 잘 맞아서 막아서는 것은 무엇이라도 부숴버렸다.
-아악!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네가 튼튼하다고 자랑하던 위장에 구멍이 뚫린 거지.
-주, 주인님!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제발!
-내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서걱. 서걱.
영욱은 손날을 마치 칼처럼 사용하며 복강의 내장들을 휘저으며 어디론가 향했다.
크아아아.
보호막을 제외한 것은 모두 녹인다는 위산이 새어나가서 다른 장기를 녹이기 시작하자 강치는 엄청난 고통에 처절한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아직도 낚싯바늘에 꿰인 상태라서 제 자리에서 뱅뱅 돌기만 했다.
-오! 여기 있군. 물의 정화인 수정이 무려 열 개나 되고, 토정도 다섯 개나 되니 오늘도 봉 잡았군. 하하하!
영욱은 과거로 거슬러 오른 이후 환수를 잡을 때마다 각종 정화들은 자신이 직접 챙겼다. 일부 대룡에게 나눠준 것도 있지만 자신이 챙긴 것이 훨씬 더 많았고, 그 과정에서 상대 환수를 죽이기 전에 정화부터 챙기는 버릇까지도 생겨났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너도 다른 녀석들처럼 내 안에서 영원히 살게 될 거야. 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모조리 삼켜줄 테니까 말이야. 하하하!
산 채로 뜯어 먹히는 강치는 영욱이 갑자기 풍겨내는 압도적인 기세에 놀라서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했다. 영욱은 강치의 각종 정화들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먹어치웠다. 비늘과 껍질만 남겨놓고서야 그 작업이 끝났다.
*시간을 거슬러 오른 부작용, 뒤바뀐 운명
서걱!
순식간에 족히 10톤은 족히 나갈 강치를 뱃속에서 모조리 먹어치운 영욱은 배 부분의 가죽을 가볍게 자르고 밖으로 나왔다. 물론 황금 누치와는 달리 대부분 기운이 뭉쳐진 것이니 실제로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오빠! 잡혀 먹힌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저런 허접한 녀석에게 잡혀 먹힐 정도라면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남았겠어?"
"하지만 대룡까지도 불렀으니까 여태까지 나타난 놈들 중에서 가장 강한 녀석이 아니었어?"
"아냐. 녀석의 강점이자 유일한 약점이 바로 강력한 소화력이거든. 그래서 날 삼키게 만들려고 일부러 약세를 보였던 거지."
"오빠는 가끔씩 사람을 헷갈리게 해."
영욱은 가장 먼저 달려온 은영에게 너스레를 떨며 강치의 비늘과 가죽을 챙기기 시작했다. 당장 쓸 곳이 떠오르지는 않지만 나중에는 분명히 쓸 곳이 생길 테니 일단 챙겨두기로 했다.
"뭐가 헷갈린다는 거야?"
"어떤 때는 굉장히 강해 보이다가 어떤 때는 전혀 그렇지도 않으니까 하는 말이지."
"그야 케이스 바이 케이스 아닐까?"
"상대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건가?"
"당연하지. 누구에게나 다 강할 수만 있다면 그게 진정한 강자라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너하고 나는 제비처럼 춤만 잘 추잖아. 안 그래? 안 그래?"
영욱이 막춤을 추면서 은영을 도발하자 은영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자지러졌다.
"호호호! 오빠는 너무 짓궂어. 그리고 소희 언니도 잘 추는 편인데 왜 자꾸 빼놓고 그래?"
"걔가 무슨 춤을 잘 춰? 다른 초식은 다 잘하는 편이지만 춤은 너무 살벌해."
"그렇다면 칼춤이라도 춘다는 거야?"
"맞아. 칼만 들면 무당인 너희 둘째 언니 저리 가라할 정도겠어."
"호호호! 소희 언니 온다. 쉿!"
소희가 접근하자 두 사람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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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귀가 아주 밝은 소희가 둘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을 리 없다.
"두 사람, 지금 내 흉을 본 거지?"
"무슨 말이야? 우리가 언니의 흉을 왜 봐?"
"맞아. 결점이 있어야 흉을 보지."
"툭하면 된장녀라고 비아냥대더니 결점이 없다는 소리는 또 뭐죠?"
"그게 무슨 결점이야? 너처럼 예쁜 미녀는 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해."
영욱은 소희의 살벌한 잔상무를 흉내 내어 추면서도 말만은 아주 예쁘게 했다. 소희는 그러한 영욱의 잔상무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핏 보면 장난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어서 그만 두라고 항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사람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어떤 때는 그대로인 것 같기도 하고……."
"미우나 고우나 이미 강원도 횡단 여행을 같이 하기로 했잖아. 그러니 매번 꺼지라고 소리칠 수는 없지 않겠어?"
"아무튼 좀 이상해졌어요. 하지만 저에게는 좋은 방향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겠죠?"
"너한테 좋은 방향이 될지 나쁜 방향이 될지 어떻게 아는데?"
강원도 횡단 여행만이라면 좋은 일이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곳에 도착할 바벨탑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올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일단은 근처에 머물 수 있게 해주니까 좋은 거죠."
"역시 굿이나 보고 떡이나 얻어먹겠다는 소리군. 하지만 공짜 너무 밝히다가는 대머리가 되는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여자가 대머리 되는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아주 드문 편이죠. 특히 저는 머리숱이 굵고 풍성해서 대머리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호호호!"
"아무튼 강치 녀석도 처리했으니 풀어주었던 황금 누치들이나 다시 잡아들여야겠다. 다 죽지는 않았을 테니."
미친 듯이 잔상무를 추고 있던 영욱은 갑자기 하고 있던 동작을 멈추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던 후유증이 이제야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치 멀미처럼 머리가 울렁울렁했던 것은 두 가지의 비슷하면서도 상이한 기억들이 제자리를 잡느라고 그런 듯했다.
"부하들이 나서서 벌써 다 잡았어요."
"자식들, 이젠 시키지 않아도 곧잘 하네. 기특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대장을 닮아서 욕심이 아주 많은 거겠죠. 자연보호 차원에서 몇 마리 정도는 살려줘도 될 것 같은데 악착같이 한 마리도 놓치지 않고 잡아들이네요."
"이미 알을 낳았으니까 할 일들은 다 한 것 같은데 뭘 그래?"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계곡까지 올라와서 산란한 이후 죽음을 맞이한다. 그것은 폭포를 거슬러 오르느라 가진 힘을 다 소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야 알들이 무사히 깨어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혹시 누치와 연어를 착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 놈이 그 놈이지. 아니, 그 년이 그 년인가? 아무튼 강치 녀석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신붓감들은 널리고 널렸대. 그러니 갈 길이 급한 우리가 자연 보호까지 신경 쓸 이유는 전혀 없어."
"강해져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여행을 떠나긴 했지만 너무 조급하게 구는 것 아닌가요?"
"그야 이번 여행이 마지막 여행이 되지 않기 위함이지. 내가 보기에는 너도 내 부하들처럼 좀 더 악착같이 굴어야할 필요성이 있어."
영욱에게 힌트를 주었던 사실을 구결을 알려준 것으로 간주해서 은영과 동등한 대우를 해주겠다고 했지만 지하 동공에서 한 번 어긋나더니 아직까지도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목적이 있는 영욱으로서도 소희와의 대화는 극도로 자제하고 늘 은영과 춤을 추는 것으로 기계 체조의 수련을 대체해 왔으니 이런 식의 이야기를 나눈 적은 거의 없었다. 아무튼 영욱은 이 대화가 마지막 대화가 될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소희의 분발을 촉구했다.
"대단한 환수들이 줄을 이어서 나타났지만 영욱 씨는 이미 그들의 약점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어렵지 않게 처리하시던데 뭐가 그렇게 두려운 거죠?"
"지금까지는 쉬웠지만 언제까지나 쉬울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너도 들었겠지만 피의 페스티벌이 끝나려면 내가 죽든지 나타나는 환수들이 다 죽든지 해야 한다잖아."
"제가 보기에는 화리가 겁을 주려는 의도로 지어낸 것일 가능성이 높아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보부상 녀석과도 거래하면서 유독 그녀만 지독하다 싶을 정도로 따돌렸으니까 말이죠."
"네 짐작이 맞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건 걔가 자초한 일이야. 내가 뒤끝이 끝장이라는 거 아직도 모르겠어?"
소희는 강치의 예언에 가까운 말을 듣지 못했으니 내일이라도 당장 영욱의 종말이 올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화리의 저주에 가까운 발언이라고 보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을 거슬러 오르기까지 했던 영욱으로서야 강치의 말에 더 큰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야기는 뒤끝에 관한 것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은영은 이미 용서해줬잖아요."
"아직도 신붓감이 정해지지 않았으니까 용서받았다고 보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 그런 일이 없었다면 무조건 은영이 나의 신부일 테니까 말이야."
"둘이서 밤마다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도 그런 말이 나와요?"
"요즘은 너도 함께 추잖아. 칼춤처럼 워낙 험악해서 우리가 간격을 의도적으로 띄우기는 하지만……."
"기계체조의 초식인 잔상무를 추면서 노골적으로 흐느적거리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너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와 은영은 안 그래. 잔상무는 흐느적거리면서 상대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게 바로 포인트라고 생각하니까."
이야기는 다시 잔상무의 요체에 대한 대화로 이어졌다. 춤이 아니라 기계체조의 초식인 만큼 살벌해야 한다는 게 소희가 가진 견해였고, 영욱은 더더욱 춤다워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니까 이미 용서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죠."
"그건 잔상무에 대한 내 취향일 뿐이야. 사실 나도 내 뒤끝이 싫어질 때가 많아."
"아빠 이야긴가요?"
"아냐. 이제는 사부님을 원망하지 않아."
"진 씨 아저씨라고 불러야 하는 것을 잘못 말한 게 아닌가요?"
"너를 통해서 가르쳐줄 것은 다 가르쳐 주셨는데 그런 싸가지 없는 소리를 고집할 수는 없지. 물론 아직도 사부님의 면전에서는 부를 자신이 없어. 그리고 내가 파면된 것도 돌이킬 수는 없고."
영욱은 소희의 짓궂은 확인 사살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만류귀종이나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기계체조를 극성으로 배웠으니까 진중권을 원망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 대화가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아서이기도 하다.
"갑자기 착한 척하는 걸 보니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거죠? 그렇죠?"
"역시 소희 너를 속이느니 차라리 귀신을 속이는 게 더 쉬울 거야. 하지만 이 이야기는 너에게만 하려는 게 아니니까 큰소리로 해야겠어. 다들 잘 들어라."
"예. 대장님."
"나는 타깃이라서 이곳 피의 페스티벌 지역을 벗어날 수가 없다. 하지만 너희들은 다르다. 그러니 지금 당장 강원도 땅을 벗어나도록 해라. 이건 명령이다."
영욱은 전격적으로 부하들에게 탈출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부하들은 선뜻 명령대로 움직이지는 못했다.
"대장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힘을 합쳐도 이길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강한 환수들이 끝없이 몰려올 것이다. 어쩌면 주니어나 시니어와 마주치게 될 지도 모른다. 모두가 나를 노리고 오는 자들이지. 그러니 너희들은 이곳을 떠나라."
"그렇다면 저희들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너희들이 적어준 계좌로 각각 1억씩을 송금했다. 그러니 밀린 월급 따위는 걱정하지도 말고 어서 떠나라."
영욱은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만이 그들을 떠나보낼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저희들은 절대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제발 그 명령을 철회하여 주십시오."
"시끄럽게 앵앵거리지 말고 어서 떠나라. 배신감 같은 것은 느끼지도 않을 테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각자의 판단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남겠습니다."
"같이 죽고 싶다면 그러든지."
영욱은 박상태의 잔류를 굳이 만류하지는 않았다. 하나 정도는 데리고 있은 같이 죽게 될 테니 조금이라도 덜 외로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희들도 남겠습니다."
"지금이 달아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중에라도 언제든지 달아나도 되니까 마음대로 해. 그리고 너희 둘은 무조건 떠나."
영욱은 부하들의 잔류를 묵인하는 대신 은영과 소희에게는 떠나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채 떠날 여자들이 아니었다.
"싫어. 난 오빠와 생사를 같이 할 거야."
"저도 혼자서 달아나진 않을 거예요."
"어서 가. 홀아비로 늙어가는 네 아빠를 생각해야지. 그리고 은영 너도 함께 가."
"대체 어떤 강적이 오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조용한 바벨탑 알지?"
"그걸 모르는 드림헌터가 어디 있어요?"
"그게 이리로 오고 있다고 하더라."
영욱의 폭탄과도 같은 말에 박상태를 포함한 노예들은 물론이고 소희와 은영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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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은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이곳에 거물이 출현했다는 소린데……."
"너도 그런 걸 알아?"
"오빤 내가 바본 줄 알았어? 그런데 누가 그런 말을 해?"
"그렇다면 나만 바보였구나. 나는 조금 전에 강치 녀석에게 들어서 알게 된 것인데."
"바보면 어때? 사냥만 잘하면 되지."
은영은 썰렁한 농담으로 경직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지만 다들 반응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그 거물이 바로 영욱 씨라는 건가요?"
"잘못 알고서 찾아오는 것이겠지만 내가 타깃인 것은 확실해."
"처음으로 도시 밖을 벗어난 영욱 씨가 타깃이라니 믿어지지가 않는군요. 그것도 현실 시간으로는 겨우 며칠 밖에 되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나도 돌아가실 지경이야. 영양가가 아주 풍부한 박상태도 있고, 색다른 맛이 있는 반백신감과 허풍선장도 있는데 말이야."
영욱이 뒤늦게 썰렁한 대답으로 은영의 농담에 장단을 맞추었지만 역시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다들 사색이 되어 있었다.
"오빠! 혹시 대룡을 노예로 삼은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그 비리비리한 녀석을 노예로 삼은 게 뭐가 대수라고 관련씩이나 있겠어?"
"이젠 제법 용처럼 보이던데 비리비리하다니……."
"겉보기로는 그렇지만 아직은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해."
"아무튼 환수사냥꾼이 환수를 노예로 거느린 경우는 드무니까 그러한 사실 자체가 환수들의 관심을 끌었을 수도 있어.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는 거지."
"강치 녀석도 그랬지만 환수는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녀석들이야. 게다가 네 말처럼 주위의 이목을 끌기도 한다면 부작용이 너무 많잖아. 그러니 아무도 환수를 노예로 삼지 않았을 거야. 아무튼 간에 너희 둘은 떠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동안 늘 자신이 타깃에 된 이유가 뭔지를 고민했던 영욱으로서도 답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니 은영과 소희가 이 짧은 시간에 그걸 알아낼 리 없다.
그나마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이 환수사냥꾼들을 뭉치게 했다는 것이지만 아직도 거느린 노예의 숫자가 27명에 불과하니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런 이유로 타깃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더더구나 환수지왕이라는 어처구니없는 타이틀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싫다니까 자꾸 그래? 이번에 달아나면 영원히 오빠 곁에 머물 수 없을 것 같아서 죽더라도 오빠 옆에 찰싹 붙어서 죽을래."
"저도 떠나지 않겠어요. 저 혼자만 떠났는데 다들 죽지는 않고 대박이라도 나면 억울할 테니까요."
"그런 심보라면 남아도 좋아. 하지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언제든지 달아나도 비웃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한다고 약속해줘."
"약속할게. 하지만 판단은 내가 내릴 거니까 오빠는 두 번 다시 강요하지 마."
"저도 은영과 같은 생각이에요."
두 여자마저도 떼어내는 데 실패했지만 영욱의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이제는 전투 중에 믿고 등을 맞길 수 있는 전우가 된 듯해서다.
"그건 알아서들 해. 자, 그럼 지금부터 즐거운 배급 시간이다. 다들 줄을 서. 전리품들을 나눠줄 테니까."
"야호! 신난다. 내가 이래서 못 떠난다니까. 호호호!"
"나도 그래. 영욱 씨는 계산이 확실해서 너무 좋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후부터 영욱은 획득한 전리품의 배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다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 성과물을 넉넉히 나누어줄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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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리가 다시 찾아와서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하나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고 있지만 아직도 상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내게도 물건을 좀 팔아 줘. 제발 부탁이야."
"보다시피 우리끼리 먹을 것도 부족해."
"한 마리에 얼마짜린 줄 알면서도 그냥 다 먹어치우겠다는 거야?"
"이렇게 몸에 좋은 걸 왜 팔아? 돈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했잖아."
시세라는 것도 잘 알고 있고, 화리에게 당하지도 않았으니 돈을 더 벌어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판매 숫자를 줄임으로써 그러지는 않았다. 그 이상의 돈이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이제부터는 나도 너와 끝까지 함께 다닐 테니까 제발 날 좀 도와줘."
"네가 재벌 후계자가 되는 걸 내가 왜 도와야하지?"
"나도 너에게 힘을 보탤게. 제발 부탁이야."
"상인이면 상인답게 행동해. 그런 식으로 질질 짠다고 해서 거래가 이루어지지는 않아."
"내가 후계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어. 그러니 제발 도와줘."
재벌의 후계자들 중 하나인 화리는 상행을 통해서 큰돈을 벌어야만 진정한 후계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빈정이 상했을 텐데도 영욱의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영욱의 전리품을 독식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후계자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으니까.
"그게 대체 무슨 이윤데 내가 너를 도와야 하지?"
"네가 내 마음을 가져갔으니까."
"억지도 그 정도면 고단수다. 은영과 소희 중에서 고르는 것만 해도 머리가 뻐개질 것 같으니까 너는 좀 빠져. 하여튼 여자들이란 예외 없이 몸뚱이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들어. 너는 그것마저도 하지 않았지만."
"나도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었어. 그러니 제발 나 좀 도와줘. 응?"
자칭 여자 전문가라는 강치의 말처럼 세 여자 모두가 영욱에게 마음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물론 그게 사랑은 아니겠지만 세 여자 모두가 영욱의 돈 버는 재주 때문에 따라다녔던 것이었다.
"오빠! 화리 언니의 사정도 딱한 것 같던데 좀 팔지 그래?"
"재벌의 딸이 뭐가 부족해서 사정이 딱하다는 거야? 차라리 예쁘니까 팔라고 하는 게 낫겠다."
"그래. 예쁘니까 좀 팔아라. 남자가 꼭 뒤끝을 표현해야겠어?"
"그래, 날 아주 좀스러운 놈으로 만들어 버려라."
"오빠가 하는 게 좀 그렇잖아."
은영이 의외로 화리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서로 경쟁자라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관용을 베푸는 걸 보니 그녀도 이제는 굳이 영욱과 맺어지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인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유혹해도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으니 포기한 것이든지.
"그건 얘가 매번 날로 먹으려고 드니까 그러는 거잖아."
"내가 보기에는 오빠도 너무 좋은 가격을 받으려고 고집하는 것 같아. 상인들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을 테니까 속는 줄 알면서도 대충 적당한 가격에 팔아주고 좀 그래."
"네 몫을 그렇게 팔도록 해. 나는 나 혼자 먹기도 부족하니까."
"곧 죽을 지도 모르는데 인심이나 후하게 쓰고 죽는 게 어때?"
"그럴까? 하지만 정말 팔 게 없어. 혹시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팔기로 하지 뭐."
영욱은 화리를 놀려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의 표정 변화를 살펴가며 애를 끓이게 했다.
"팔 게 왜 없어. 토룡 가죽 사이에 끼워둔 것만 해도 한 트럭은 될 텐데."
결국 화리는 영욱의 무성의한 대답에 발끈하고 말았다. 사실 영욱의 팔 게 없다는 소리는 전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욱이 감추고 있는 아이템도 일이십 개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너는 오늘만 살고 말 거야? 내일도 오늘처럼 사냥이 잘 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좋아. 환수 가죽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아이템들은 왜 들고 있는 건데? 그렇다고 부하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아닌데 왜 끝까지 안 팔겠다는 거야?"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나눠줄 거야."
"그게 대체 언젠데? 네 말처럼 바벨탑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나눠주지 않는다면 대체 언제 나눠준다는 거야?"
"나는 부하들이라고 해서 공짜로 퍼주는 사람은 아냐. 그러니까 조금 더 강해지고 충성스러워지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지. 사실 내가 아이템을 이미 나누어 주었다면 저들이 남겠다고 했을 지가 의문스러워."
영욱은 지금이라도 노예들이 떠날 마음이 들도록 정나미가 뚝뚝 떨어지는 말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사실 여태까지 아이템을 나눠주지 않은 것은 그 아이템에 대한 의존성을 키울 우려가 있기에 뒤로 미뤄두었던 것이다. 떠난다고 해도 나눠주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아까워서 나눠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자들도 많고.
"그럼 저들이 겨우 그것 때문에 떠나지 않았다는 거야? 고작 30골드 정도에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해?"
"30억이 뉘 집 개 이름이야? 분명한 것은 나도 잘 모르지만 만일 아이템을 나눠주었다면 떠나는 자들도 분명히 생겼을 거야. 그러니 전부는 아니겠지만 상당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할 수밖에."
"그래서야 네 말처럼 전투에서 등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신뢰는 그저 말과 마음만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야. 그리고 비싼 아이템은 훈장의 역할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화리가 신랄하게 꼬집었지만 영욱은 콧방귀만 낄 뿐이었다. 자기가 죽는다고 노예들까지 함께 죽어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지만 떠나는 그들에게 노잣돈으로 쓰라고 아이템을 나눠줄 정도로 인심이 후한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템을 나눠줬다면 떠나는 자들도 분명히 생겼을 거라 여겼다.
"그럼 나중에 상으로 나눠주겠다는 거야?"
"나눠주는 게 아니라 자격이 되는 자들에게만 그 자격의 증표로 수여할 거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내 기사임을 증명하는 표식이 되는 셈이지."
"요즘 세상에 무슨 기사야?"
"마법사도 있는데 기사가 왜 없겠어? 그리고 백오기사단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당연히 기사지. 물론 아직은 자격미달이라서 기사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지만 다들 열심히 수련하고 있으니 곧 이름값을 하게 될 거야."
휼버린을 호위하던 자들이 바로 기사들이었다. 그러니 기사가 없을 리 없고, 영욱이 기사단을 선호하는 이유도 휼버린과 비슷한 맥락에서다.
"좋아. 말이 나왔으니까 물어보자. 마법서는 대체 언제 살 거야?"
"마법서는 이제 필요 없어."
"왜? 포기했어?"
"그런 건 아니지만 마법서를 사서 마법을 배우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어."
마법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영욱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것과는 별개로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꾹 참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싫으면 관둬.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아직도 모르겠어? 나와 거래하고 싶으면 같이 싸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상인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지 않아?"
"나를 보면 모르겠어? 환수사냥꾼과 상인의 구분은 이제 없어. 그러니 나로부터 뭔가를 사서 되팔고 싶다면 네가 사냥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어야 해. 그게 아니라면 뒤에서 몸으로 지원이라도 하든지. 그 잘난 몸뚱이를 사려봐야 금강누치처럼 몰래 접근해오는 환수에게 걸리면 그냥 그길로 끝이야."
"디텍트 아이템이 물속에서 접근하는 환수를 감지하지 못하는 줄은 나도 몰랐지.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아."
화리는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서 구입한 물건이라 그런지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디텍트 아이템에 대한 의존심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영욱은 물건을 파는 대신 이러한 화리의 선입견을 깨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아직까지도 아이템 타령이군. 지금도 전혀 느껴지지 않지? 그렇지?"
"대체 뭐가 접근한다는 거야?"
화리는 이미 당했던 적이 있으니 화들짝 놀라면서 주변을 살피더니 짜증을 잔뜩 냈다. 자신의 감각으로는 접근하는 게 없다는 소리였다.
"내가 여기 있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이번에도 물속이야?"
"원래는 물가에서 사는 놈인 것 같은데 접근은 물을 통해서 하는군. 금강누치가 나타난 다음이니까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 않아?"
"그렇다면 금강누치의 천적이란 말이군."
"이제야 짐작이 가는 모양이군."
이 녀석 역시 영욱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지 몰래 접근하는 것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두꺼운 얼음을 뚫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길이가 무려 20미터에 달하는 검은 수달 모습을 한 환수였다.
"맙소사! 저렇게 큰 수달이라니."
"수달이 아니라 수달 환수니까 저렇게 클 수가 있겠지. 저것도 덩치를 줄인 상태일 테니까 원래의 크기는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네. 그리고 어둠보다 짙은 검은 색이라니 가죽이 아주 예술인데?"
영욱은 수달 환수의 가죽이 자기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마치 귀한 소장품을 챙기게 되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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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녀석이 금강누치를 먹어치운 건가?
-그 녀석이 나를 삼키기에 어쩔 수가 없었어.
-아무래도 상관없어. 네 녀석의 몸속에 금강누치의 기운이 고스란히 남아있으니까.
-수달 주제에 꿈도 야무지군.
-그야 수달이니까 금강누치를 잡아먹을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예상대로 말이 통하는 녀석이었다. 그냥 말이 통하는 정도가 아니라 농담까지도 통할 정도로 위트가 넘치는 녀석이었다.
-내가 금강누치로 보여?
-환수사냥꾼다운 호기군. 그래봐야 마찬가지겠지만.
-큰소리를 쳐대는 걸 보니 수달의 천적이 사람이라는 걸 잘 모르는 모양이군.
-너희 세계에서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우리 세계에서는 다르다.
-여긴 너희 세계와 우리 세계가 합쳐진 곳이니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대되는군. 자, 덤벼라!
-가소로운 녀석이 큰소리만 뻥뻥 치는군. 좋아, 너를 맛있게 뜯어먹어주지.
할 말을 마친 블랙수달은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영욱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날카로운 이빨로 영욱의 머리를 물어왔다.
-흥! 어딜.
영욱도 얼른 포크를 소환해서 빛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블랙수달이 어디에서 나타나더라도 영욱의 감각을 속이지는 못했다. 그리고 아무리 빨라도 영욱의 숙련된 경시 동작 잔상무를 앞지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영욱도 예상치 못했던 변수가 있었다.
우지직.
ULM으로 코팅된 기계 삽이 블랙수달의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에 의해 마치 수수깡처럼 부러져나간 것이었다. 전체가 ULM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얄팍한 코팅으로는 어림도 없는 듯했다.
영욱은 잔상무 초식을 극성으로 발휘해서 블랙수달의 이빨과 발톱으로부터 간신히 벗어났다. 만일 금강누치로부터 얻은 보호막의 도움이 없었다면 기계 삽이 완전히 부러져 나갔을 게 분명했다. 그리되면 수리가 아니라 재생을 시켜야 하니 기운과 유나의 소모가 커졌을 것이다.
-제법 몸놀림이 빠르구나. 그래봐야 소용없겠지만.
-금강누치를 잡아먹을 정도로 발톱과 이빨이 강력하구나.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너야말로 얄팍한 춤 따위로 피할 곳은 없을 것이다. 수중세상!
블랙수달의 요상한 주문에 주변의 공기가 물처럼 변해버렸다. 영욱은 그 범위가 녀석을 중심으로 반경 100미터에 달한다는 사실을 제 3의 눈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상당히 넓은 공간이라서 쉽게 빠져나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뭐, 뭐야? 이 얄팍한 사술邪術은?
-사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공기의 밀도가 물과 비슷하다는 것 말고는 큰 불편이 없을 테니까 잘 한 번 버텨보라고. 아참,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겠군.
-완전히 물귀신 작전이군.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내 움직임을 제한하기는 어렵다고 봐야겠지.
-문제는 그게 아니라 내 움직임이 더 빨라지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이지.
그저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블랙수달의 움직임은 더욱더 빨라졌다. 영욱은 기를 쓰면서 피하려고 했지만 이미 속도 면에서는 블랙수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영욱은 어쩔 수 없이 히든카드를 꺼내야만 했다.
-그렇군. 물 만난 수달이 따로 없군. 블링크!
-어쭈! 마법도 쓸 줄 아는 놈이었군.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몇 가지 배워두었지.
영욱은 타임 워프를 한 이후 마법도 익혔다. 타임 슬립이라면 더 좋았겠지만 금강누치의 초능력은 고작 타임 워프에 불과했다.
타임 슬립이란 시간을 미끄러지듯이 통과한다고 해서 쓰이는 말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 리프도 아니고, 시간을 거슬러서 올라가는 타임 워프도 아닌 타임 슬립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마음대로 오가는 것인데 제아무리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 관대한 2QB 세상이라고 해도 그게 가능할 리는 없다.
아무튼 타임 워프 후 영욱은 잔상무를 익히던 도중에 사파이이 귀걸이 아이템 속에 들어있던 마법서의 봉인이 해제되었음을 느끼고, 헬렌 컬러가 아이템 속에 넣어둔 것이라고 짐작했다. 사실은 휼버린의 작품이지만 영욱으로서는 그게 그거다.
하지만 워낙 짧은 시간이라서 겨우 두 가지의 마법 밖에는 익히지 못했다. 그 중 하나가 단거리 공간 이동 마법인 블링크였다. 사실 아무리 시간을 아껴 쓴다고 해도 마법을 익히기에는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블링크 마법만큼은 잔상무와 상당히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비록 제한된 공간에서만 가능하지만 경시 동작의 잔상무는 시간의 축까지 포함하고 있는 무술이니 그 공간의 범위를 조금 넓힌 곳까지 공간을 격하고 이동할 수 있는 블링크를 비교적 쉽게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직은 실용적인 수준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다. 유나의 소모도 워낙 극심하고, 블링크 마법으로 이동함과 동시에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단순한 위기 탈출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을 블랙수달도 금방 알아차렸다.
-탈출 기술일 뿐이군. 만일 크로스카운터로 그 마법을 사용했다면 나도 좀 위험했을 텐데 말이야.
-잘 아는군. 워낙 배운 기간이 짧아서 말이야.
영욱은 블랙수달의 말을 듣고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공격 순간에 그에게도 빈틈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빈틈이 어디일까? 자세히 살펴보니 이빨과 발톱이 너무나도 강력해서 보호막을 종잇장 찢듯이 하지만 그 외의 부분도 그리 강한 것은 아닌 듯했다. 물론 영욱이 만들어낸 보호막이 아직은 많이 허접해서 종이 갑옷 취급을 당하는 중이었다.
-금강누치를 잡아먹을 정도는 된다고 인정해주지. 하지만 나와 비교하자면 한참 멀었다.
-젠장! 강한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나 정도는 강한 축에 끼지도 않아. 네가 2QB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그러니까 미치겠다는 거 아냐.
영욱은 경시 동작의 잔상무와 블링크를 적절하게 섞어서 사용하면서 블랙수달 녀석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김호진이 트랜스파워 초능력으로 부하들과 두 여자의 기운을 보내주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화리와 한극상 등의 기운도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면 영욱은 죽을 것이고, 그것은 모두의 죽음으로 연결될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 듯했다.
물론 탈출용 아이템을 사용해서 달아나버리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그리 되면 영욱이라는 물주가 사라질 것이고, 요즘 들어서 부쩍 친해진 은영과 소희도 죽게 될 것이니 어쩔 수 없이 도시락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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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어! 뜨거운 불 맛 좀 봐라! 파이어볼!
영욱은 자신이 가진 화정의 기운에다 화리가 건네준 화구의 기운을 보태서 할 줄 아는 두 가지 마법 중의 나머지 하나인 화구마법을 완성할 수 있었다.
'활인심, 고치, 칠십이, 윈드밀 스핀!'
그리고 기계체조를 극성으로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갈이나 바위 대신 파이어볼이 마치 대포알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파이어볼을 그냥 날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속도가 느려서 약간의 궤도를 조정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이렇게 포크로 발사하는 것이다.
-살다가 이런 경우는 처음이군, 화력이 제법이긴 하다만 대부분 물에 생활하는 나에게 생뚱맞게 불 공격이라니 조금 우습지 않나?
-물에 젖지 않도록 기름칠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제법 아는 게 많군. 하지만 이런 식의 공격이면 네가 좋아하는 수달 가죽에 흠집이 생길 텐데.
-나는 굳이 최상품의 가죽을 원하는 것은 아니니까 조금쯤 타도 상관없어.
-뭐야? 심심해서 농담 좀 했더니 네 녀석의 반응이 정말로 기가 막히는군. 어떻게 내가 너한테 진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야 네 공격이 대단히 강하기는 하지만 피할 수가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반면에 너는 조금씩이나마 공격을 허용하고 있잖아.
둘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빠른 속도로 공수를 교환하면서도 설전 역시 치열하게 이어나갔다.
-그래봐야 딱 한 번만 걸리면 너는 끝이야.
-과연 그럴까? 걸려도 별 문제 없을 것 같긴 하지만 걸려주고 싶지는 않군. 하하하!
-약삭빠른 놈이구나.
-빠르기야 네 놈이 훨씬 더 빠르지. 문제는 앞다리가 너무 짧아서 나를 움켜쥐기가 힘들다는 것이겠지만.
-내 다리가 짧다고? 그렇다면 본체로 돌아가야겠군.
영욱의 숏다리 도발에 블랙수달의 힘과 크기가 서너 배는 더 커졌다. 따라서 다리 길이도 그 비율로 길어졌다. 이제는 얼추 100미터에 육박하는 엄청난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나도 커져라, 세져라, 파이어볼!
'활인심, 고치, 칠십이, 윈드밀 스핀!'
영욱도 어쩔 수 없이 아이템을 활성화시키는 주문과 함께 새로 만들어낸 구결을 사용했다. 녀석의 덩치가 커진 만큼 앞다리도 길어지고 강해졌으니 영욱으로서도 공격력을 더 높일 수밖에 없었다.
'고치삼십육'이 '고치칠십이'가 된 것은 이빨을 부딪치는 속도가 두 배 이상 빨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빨라진 만큼 기계체조의 위력을 더 강하게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퍼버벙!
-쥐새끼 같은 놈! 자꾸 피하기만 할 거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네 놈이랑 씨름이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젠장! 더 빨라지고 강해졌어.
-당연하지. 나도 너처럼
'커져라! 세져라!'
를 사용했으니까. 파이어볼! 아싸! 명중이다.
영욱은 노골적으로 주문을 외우며 블랙수달을 공격했다. 부하들이 듣고 있으니 약간 순화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그게 그거였다.
-흥! 그래봐야 이 정도의 공격으로는 하루 종일 성공해야할 거다. 그 동안 딱 한 번이라도 내 손에 잡히면 끝인 줄 알아라.
-당연히 알고 있지. 잡히지 않을 자신도 있고 말이야. 블링크!
-흥! 웃기고 있네. 잡았다! 하하하!
영욱이 블링크로 이동하는 패턴을 파악하고 있던 블랙수달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영욱이 나타날 곳으로 달려들었다.
-으악! 대룡 소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