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서를 쓰고 공증을 받은 상황도 아니고 결혼식을 치르고 혼인신고를 한 상황도 아니니 은영의 부친이 취할 행동으로서는 지극히 적절하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은영은 입장이 달라서 그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소희 언니가 진짜 구결을 알려주면 어떡해요?"
-단언컨대 이미 파문시킨 제자의 협박에 놀아날 사형이 아니다.
"하지만 소희 언니가 독단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잖아요."
-소희가 진짜 구결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좋아요. 그러면 시키는 대로 하겠어요."
-고생스럽더라도 조금만 더 참아.
"전 괜찮아요. 이젠 오빠를 제 손에 넣을 자신도 있고요.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그래.
전화 통화의 결과는 진짜에 가까운 가짜 구결을 전해주는 것으로 나고 말았다. 하지만 전화를 끊는 은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은영의 부친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화상 통화는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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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소희도 서둘러서 진중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저예요."
-소희구나. 이 밤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니?
"아뇨. 그냥 잘 지내시나 궁금해서 연락드린 거예요."
-난 잘 지내고 있다.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바쁠 텐데 연락하지 마.
"그럼 쉬세요."
-오냐. 내 딸아.
득환과 술을 마시고 있던 진중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준화를 끊었다. 평소에는 애교도 전혀 없는 딸인데 아닌 밤중에 전화를 준 것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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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과의 전화를 끊은 소희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이 대체 몇 신줄 알고 전화한 거야?
"지금 미국에 있는 거 아냐? 한국은 밤이니까 그곳은 낮이겠지. 설마 낮잠이나 퍼질러 자고 있는 거야? 어떤 계집이랑 밤새도록 논 거야?"
-물 좋은 우리나라를 두고 내가 왜 미국을 가? 그리고 이제는 내 사생활에 신경 쓰지도 마. 네가 그 놈이랑 있는 줄 모를 것 같아?
"그럼 한국이야?"
-당연하지. 처음부터 나가지도 않았어.
경태는 재벌 수준의 재력에다 국정원의 비호까지 받고 있으니 경찰의 수사 따위는 처음부터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친 데는 괜찮아?"
-하마터면 진짜로 고자 될 뻔했다. 아무리 내가 싫어졌다지만 그렇게 세게 차는 게 어디 있어?
"살살 찼으면 경태 씨는 꼼짝없이 영욱 씨의 노예가 되었을 거야. 몰라서 그래?"
-아니까 꾹 참고 있는 거야. 그래, 그 놈이랑 잘 되어가는 거야?
"부끄러운 줄도 전혀 모르는 경쟁자가 있어서 아직은 좀 그래. 아직까지도 나를 경계하는 눈치기도 하고."
소희는 영욱의 요구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기 전에 경태와의 관계부터 먼저 확인해보는 치밀함을 보였다. 경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의 행동을 아직까지도 색안경을 끼고서 보지 않을 거라는 그녀의 생각이 맞아떨어지자 그녀 특유의 자신감을 회복했다.
-그냥 집어치우고 서울로 올라와.
"지금까지 고생한 게 아까워서라도 그럴 수는 없어."
-누가 너를 말려? 난 졸려서 자야겠다. 아무튼 여행에서 돌아오면 바로 전화해.
"알았어. 잘 자."
소희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여자의 교성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 여자를 밝히는 경태가 몸을 전혀 허락하지도 않는 자기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면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과 통화하면서도 연신 다른 여자와 노닥거리는 것을 묵인할 정도로 자비롭지는 못한 성격이다. 소희는 여차하면 경태와 영욱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겠다던 생각을 이제는 접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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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가 현실 세상으로 나갔다가 돌아오자 화리와 대룡 가죽 판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영욱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래, 알아봤어?
-응. 아빠가 기꺼이 허락하셨어.
-소희 너는?
-저희 아빠도 허락하셨어요.
-좋아. 그럼 누구부터 말할래?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진짜일 테니까 기대되는군.
영욱은 두 여자의 속내를 짐작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느물거렸다. 그리고 들어보면 진짜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는 강력한 자신심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여긴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아?
-그럴 줄 알고 대룡을 시켜서 이곳 지하에 연무장을 파라고 했으니까 곧 완성될 거야.
-대룡이 마치 오빠의 노예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 거짓말 진짜야?
-금방 탄로 날 텐데 거짓말을 왜 해? 그런데 소희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영욱은 짓궂게도 대룡에 대한 소희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현실 세상에 다녀온 소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걸로 보아서는 진짜 구결을 말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미리 자극해 두려는 의도도 있었다.
-지하에 정말 대룡이 있는 것 같아요.
-당연하지. 지금 땅을 넓히는 중이니까.
-맙소사! 그렇다면 대룡을 노예로 삼은 게 사실이었군요.
-뭐야? 오빠, 농담이 아니었어?
두 여자 모두 땅속에서 작업 중인 대룡의 기감이 느껴지는지 가뜩이나 큰 눈들이 화등잔만큼이나 커졌다.
-너는 아직도 내가 그렇게 실없는 놈으로 보이니?
-그, 그게 아니라 환수를 노예로 만든다는 게 쉽게 믿을 수는 없는 일이잖아.
-세상을 네 기준으로만 보면서 살지 마. 그러다가는 숲 전체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죽게 될 테니까.
-언젠가 아빠도 그런 말씀을 하시긴 했지만 정말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오빠, 정말 대단해.
-얘가 또 사람 홀리는 초능력을 쓰는구나. 그 매혹 초능력이 내게는 통하지도 않겠지만 그러다 버릇이 되어서 남에게도 남발하다가는 오히려 봉변을 당할 수도 있을 거야.
영욱은 야한 포즈를 잡고 있는 은영의 이마에 거침없이 꿀밤을 때리면서 일침을 가했다. 전에는 지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이미 경험한 일이니 모를 리 없다.
-아,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앞으로 열심히 갈고 닦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쩝! 대룡을 이길 정도니까 내 초능력이 통하지 않는 게 오히려 당연하겠지. 아무튼 화리 언니와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정답게 나누었어?
-토룡 가죽과 늑대 가죽을 헐값에 넘기라고 계속 헛소리를 하잖아.
-그래서 넘겼어?
-내가 미쳤어? 200골드를 준다고 해도 싫다고 했어.
전과 달라진 점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전날 2QB세상에서 잡은 우두머리 늑대 암수의 가죽을 화리에게 넘기지 않은 것도 바로 그것이다.
현실 세상에서 변종 늑대 환수 가죽을 넘긴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이상 남 좋은 일은 시키지 않을 생각이기 때문이다.
-맙소사! 200골드라면 200억이잖아.
-환전 수수료를 빼고 나면 대충 180억 정도는 되겠지.
-그 많은 돈을 달라고 했던 거야?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물건이니까.
200골드란 늑대 환수 가죽만이 아니라 토룡 가죽까지 포함해서 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은영에게는 일부러 구분해서 설명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두 여자에게 진짜 구결을 내놓으라는 압박이기도 했다.
-그래서 뭐래?
-짜증을 막 부리기에 그냥 무시하고 있는 중이었어. 그런데 넌 표정이 왜 그래?
-우리도 사냥에 기여했잖아. 우리 몫은 왜 안 나눠줘?
-소희라면 몰라도 네가 무슨 기여를 했다는 거야?
-미끼 역할을 했잖아.
-그래서 네 몫을 나눠달라는 소리야?
-당연하지.
-좋아. 늑대 가죽을 한 장을 줄 테니까 팔아먹든지 입든지 마음대로 해. 소희 너도 한 장 받아.
가격에 대해서 뻥을 친 부작용이 이런 식으로 나타났지만 실제 가격이 크지도 않고 매혹 초능력으로 미끼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니 별로 아깝지도 않았다.
-고마워요.
-오빠, 고마워.
-별 소리를 다하네. 팔더라도 5골드 이하로는 절대 팔지 마. 내 말 명심해!
-아깐 200골드라며?
-대장 수컷과 암컷의 가죽의 가격이 200골드야. 그건 내가 잡은 거니까 꿈도 꾸지 마.
-흥! 누가 뭐래?
사실 5골드만 받아도 5억이나 되니 더 욕심낼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은영과 소희는 목돈을 손에 쥐는 상상을 하느라 눈동자가 반쯤 풀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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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만 따라와.
영욱은 다시 들러붙으려는 화리를 경계하며 얼른 지하 동공의 입구로 향했다.
-다 같이 들어가는 거야?
-안은 충분히 넓으니까 굳이 따로 들어갈 필요가 없어.
-얼마나 넓기에 그런 말을 해?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거야. 상태야! 입구 잘 지켜. 아무도 들이지 말도록 해. 알겠지?
-예. 선배님.
대충이나마 거래와 정산이 끝나자 영욱은 지하에 마련된 동공으로 두 여자를 데리고 들어갔다.
원래대로라면 가리산을 넘어서 등골산 정상 부근까지 가기 위해서 출발을 서두를 시각이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곳에서 머물며 기계체조를 수련하려는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진짜 구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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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의 장담대로 지하 동공의 크기는 천 평도 훨씬 넘었다. 게다가 화정의 기운으로 광구를 여러 개 만들어 두어서 환한 대낮처럼 밝았다. 영욱은 입이 쩍 벌어진 두 여자를 향해서 으스대며 입을 열었다. 자신의 노예인 대룡의 강력한 힘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에 충분히 자랑할 만했다.
-누구부터 알려줄래?
-내가 먼저 알려줄게.
-그럼 소희 너는 저쪽 구석으로 가 있어.
-예.
소희는 은영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후 100미터쯤 떨어진 구석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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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따로 부른 것도 아니고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아닌 상황을 꼬집어서 말한 것이다. 소리는 들리지 않겠지만 표정 변화나 영욱의 반응 등을 살필 수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당연하지. 네가 엉터리 구결을 말하면 소희도 바로 따라서 거짓말을 할 테니까.
-내가 그깟 구결 때문에 오빠를 놓칠 것 같아?
-큰소리를 뻥뻥 치는 걸 보니 가짜 구결을 알려주려는 거 아냐? 그깟 구결이라니?
-아냐. 난 오빠와 꼭 결혼해야 하는데 내가 미쳤어?
-좋아. 그럼 말해봐.
-귀를 대봐.
-어차피 텔레파신데 귓속말이 무슨 소용이야?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아. 그리고 딱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들어.
소곤소곤.
은영은 영욱의 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구결을 읊어주었다. 구결은 몇 자 되지도 않았지만 영욱의 귀에 입김을 불어 넣느라고 그러는지 중간 중간 쉬어가면서 꽤나 오랫동안 뜸을 들인 후에야 구결 전수를 끝냈다.
-역시 그랬었군.
-놀라지 않는 거야?
-전에 소희가 비슷한 말을 언급한 적이 있어서 별로 놀랍지도 않아.
-실망했지?
-아냐. 100% 진짜는 아니겠지만 90% 쯤은 되는 것 같네. 이 정도면 신경 많이 썼네. 하지만 넌 탈락이야.
영욱은 허탈한 표정으로 소희가 가르쳐준 구결에 대해서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가짜를 들이댔으니 결혼은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였다.
-아, 아냐. 90%짜리는 그것과 달라.
-하여튼 100%짜리는 아닌 게 확실해. 사실 그런 요구를 했지만 진짜 구결을 내놓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도 않고 있었어. 사실 나하고 결혼하는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진짜를 내놓겠어? 그것도 선불로 말이야. 그리고 내가 먹고 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야.
-오빠가 내 사정을 이해해주니 고마워. 하여튼 90%짜리 이상이라는 것만 알아둬.
-알았어. 너는 저리 가고 소희를 이곳으로 보내.
-그럴 것 없이 오빠가 직접 저리로 가면 안 돼?
-그러지.
은영은 영욱의 냉정한 평가에 다리가 풀려버렸다. 반신반의 할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그렇게 단호하게 가짜라고 단언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결국 영욱으로부터 간택揀擇 당하지 못한 셈이니 다리에 힘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이렇게 실망한 표정을 소희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영욱을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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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다가가자 소희도 비상한 관심을 보이며 반응했다.
-은영이 진짜 구결을 내놓았어요?
-뭔가를 내놓긴 했는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분할 자신이 있다고 했잖아요.
-수련해보면 알 수 있다는 소리였지.
영욱은 은영이 알려준 구결이 가짜라는 사실을 일단 숨겼다. 밝혀봐야 득 될 일이 전혀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말 수련해 본다고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응. 당연하지.
-저는 영욱 씨의 가능성을 믿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이 경쟁을 포기하겠다는 거야?
-예.
소희는 이미 어느 정도 눈치를 챈 듯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배짱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너도 가짜를 내놓고 진짜인 척하면 되잖아.
-그건 제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미 힌트를 드리기도 했고요.
-좋아. 너는 그걸 가르쳐준 걸로 하지.
-저는 기권 의사를 표시했는데 끝까지 은영과 저를 대결 구도로 몰아가려는 저의가 뭐죠?
-화리는 왜 빼?
-거래도 해주지 않는데 계속 붙어 있겠어요?
-상인이 대룡보다 훨씬 더 끈질기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모양이군.
영욱이 세 여자를 함께 데리고 가려는 것은 당연히 그녀들이 가진 기운 때문이다. 도시락으로 사용할 계획이니 너무나도 당연한 결론이다. 게다가 그녀들의 초능력을 일부나마 훔쳐 배울 수도 있으니 내칠 이유가 전혀 없다.
-아무튼 저는 더 이상 내놓을 구결이 없어요.
-그건 이미 끝난 이야기야. 그럼 이제부터 수련이나 하자고.
-저는 수련할 기분이 아니라서 이만 실례하겠어요.
-그러든지.
처음부터 영욱은 진짜 구결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단지 달라진 자신의 마음을 두 여자들에게 알려주고는 수련이나 할 참이었다. 그래야 그녀들의 기운을 더 많이 얻어먹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왕이면 셋이서 함께 수련할 생각이었는데 소희는 싫다니 어쩔 수 없었다.
기분이 좋지 않음을 핑계로 댔지만 실상은 그녀의 수준이 영욱보다 훨씬 높아서 같이 수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영욱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지 않았다면 그게 정확한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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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언니는 왜 나가?
-기분 나빠서 수련하기 싫다네.
-그럼 나도 나갈래.
-너도 수련하기 싫어?
-나도 이곳에서 기계체조를 수련해야할 정도로까지 절실하지는 않아. 그리고 수련할 만한 수준도 아냐.
은영도 비슷한 이유로 뒤로 빼자 영욱이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미 배운 지 오랜데 굳이 같이 수련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경시 동작을 가르쳐 달라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을 테니까 염려 말고 수련해.
-오, 오빠! 내가 경시 동작을 어떻게 안다고 그런 말을 해?
정곡을 찌르는 영욱의 말에 은영은 자지러지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기본 동작도 겨우 흉내 내는 척하는 중인데 영욱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으니 기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은영은 자신이 완벽하게 영욱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음을 깨닫고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눈은 고수라고 말했지.
-좋아. 그럼 고수 이야기 좀 들어보기로 해. 내가 어떻게 경시 동작을 안다는 거야?
-네가 기본 동작을 흉내 내던 중에 잔상의 숫자가 갑자기 서너 개로 늘어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 내숭을 떨고 있어.
-저, 정말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 곧 어려운 시기가 닥쳐올 테니 너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경지를 올려놓도록 해. 구결을 요구한 것은 장난에 가까운 짓이고 나와 함께 수련하자는 게 나의 진심이야.
-오빠도 우리 언니처럼 미래를 보는 초능력이 있는 것 같아.
모든 것을 다 털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영욱이 다가올 미래에 관해서 그녀의 둘째 언니가 했음직한 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은영은 별로 생소하다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도 있을 수 있음을 이미 잘 알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내 옆에 꼭 붙어있을 여자가 아직 누군지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경시 동작으로 잔상무를 아주 매력적으로 추는 여자라는 사실이야. 이 정도의 정보라면 너도 대충 짐작이 가지?
-그렇다면 나는 아닐 거야. 그게 얼마나 어려운 초식인데 춤처럼 보여?
-그 춤에서 사람을 매혹시키는 기운이 줄줄 흘러나오는데도 네가 아니라는 거야?
-아, 알았어. 일단 함께 연습해 주긴 할게.
-내 연습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네 연습이나 해. 그게 싫으면 올라가고.
-알았다니까.
은영은 쉽사리 영욱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자기가 영욱의 옆에 꼭 붙어있을 여자라는 언급까지 들었으니 도저히 떠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모처럼 단 둘이 한 공간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떠나야할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영욱의 시선이 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갑자기 가슴이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부정하긴 했지만 잔상무에서 매혹의 기운이 줄줄 흘러나올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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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그런 은영을 가만히 내버려두고는 수련을 시작했다. 은영이 알려준 구결은 놀랍게도 영욱이 만든 구결과 거의 흡사한 것이었다. 그러니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속으로는 펄쩍 뛸 듯이 놀랐었다.
물론 100%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서 다른 부분도 있는데 그것은 활인심방이 아니라 그것의 원조인 '활인심'을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길게 늘여서 암송한다는 점도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화알이인시임, 폐에모옥, 며엉시임좌아, 자안사앙무우!'
영욱은 아예 대놓고 잔상무를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도 경시 동작으로 펼쳤다. 비록 불발되긴 했지만 이미 결혼을 조건으로 거래한 사이니까 은영의 눈치를 볼 이유가 전혀 없고, 무엇보다 한가하게 놀고 있을 시간도 없기 때문이었다.
-오, 오빠!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닥치고 너도 수련이나 해. 내가 진짜 구결을 언급했는데 이 정도의 실력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넌 아직도 날 과소평가하고 있는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오빠의 잔상무가 너무나도 매혹적이라서 그래.
-너도 만만치 않으니까 어서 수련이나 해. 내 춤의 매력에 넘어가서 발이나 닦는 시녀로 전락하기 싫으면 그냥 구경이나 해도 상관없겠지만.
-그럴 순 없지.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오빠의 부인이 되고 말 거니까.
은영은 이제야 함께 수련하자고 한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것은 자신의 매혹 초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고, 정말로 조만간 닥쳐올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 대비해서 실력을 쌓자는 소리임을.
더 이상 숨길 것이 없어진 은영은 본격적인 수련에 앞서서 스트레칭 동작으로 가볍게 몸부터 풀기 시작했다.
-좋았어. 열심히 수련해. 기계체조의 경지가 적어도 50%는 되어야 할 테니까.
-맙소사! 그게 목표야?
-아니, 난 100%가 목표야. 그러니 너는 절반이라도 해야지. 안 그래?
-오빤 꿈도 커. 하지만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아. 벌써 25%는 넘어선 것 같으니 그저 꿈은 아닐 거야.
-20%가 아니고?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 아빠보다도 훨씬 나아 보여. 그러니 적어도 25% 이상인 게 확실해.
은영의 눈은 비교적 정확하다. 그러니 영욱의 경지가 25% 이상이라는 말은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은영이나 그런 말을 듣는 영욱이나 그 경지가 그리 높다는 느낌이 들지도 않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것은 50%나 100%에 도달하겠다는 말이 터무니없이 들리지 않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었다.
-이제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그런 말을 하다니 너도 거짓말하는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아무튼 이제부터는 집중해야 하니까 말 시키지 마.
-알았어, 오빠. 나도 열심히 할게.
영욱과 은영은 서로를 마주 보면서 함께 경시 동작 잔상무를 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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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오빠가 소희 언니의 심화 동작을 몰래 훔쳐서 배우던 것은 뭐였지? 진중권 아저씨가 벌써 다 가르친 건가? 그런데 왜 파문을 시켜? 아무튼 경시 동작까지도 저렇게 잘하니 나는 완전 대박을 터뜨린 거야. 아무튼 울 언니는 정말 족집게야.'
은영은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표정으로 잔상무를 추었다. 하지만 구결 자체가 '활인심'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곧 마음의 안정을 찾고서 은은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는 그야말로 뇌쇄적惱殺的인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도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으니 상당한 경지에 오른 잔상무를 경시 동작으로 펼쳤다. 기계 체조 수준으로는 아직도 겨우 15% 정도에 불과하지만 매혹 초능력이 결합된 그녀의 춤은 그야말로 상대의 뇌를 뭉개버릴 것 같은 아찔함을 느끼게 했다.
영욱은 은영의 매혹 초능력이 그녀의 기계체조 수준을 두세 배는 족히 올려놓는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잔상권이나 잔상각 초식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 자체가 춤과도 같은 잔상무는 확실하게 달라졌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진짜 구결이 아니라 바로 저것이었군. 진정한 매혹 초능력은 사람을 홀리는 저급한 짓거리가 아니라 증폭 능력이 있는 마법 아이템처럼 사기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사실을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보람이 있구나.'
영욱은 은영과 어울려서 본격적으로 잔상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녀의 잔상무를 조금이라도 더 배우는 것만이 일부 초식에서나마 100%의 경지에 오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연히 주어진 이 기회를 십분 활용하기로 했다.
둘은 마치 탱고를 추듯이 서로를 고혹적인 시선으로 마주 보면서 잔상무를 펼쳐나갔다. 이미 은영의 기운을 받아들인 적이 있는 영욱은 자신의 잔상무에다 매혹 초능력을 조금씩이나마 접목시킬 수 있었다.
영욱의 춤 솜씨가 잠깐 사이에 눈에 뜨일 정도로 늘자 은영은 더욱더 잔상무에 집중했다. 그녀의 성격상 남에게 뒤처지는 것을 죽어도 싫어하니 그야말로 선의의 경쟁이 된 셈이다. 그것은 상대가 영욱이라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잔상무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다는 그녀의 강렬한 의지가 그녀의 잔상무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끈적거림과 음탕하면서도 질펀한 유혹을 담고 있던 그녀의 춤이 어느 순간부터는 고고하고도 우아하며, 쳐다만 보아도 눈물을 방울방울 쏟아내게 만드는 진한 아픔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아!
영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탄성을 질렀다. 그녀의 춤이 또다시 진화하는 것을 보니 자신의 가슴이 너무나도 아파왔기 때문이다.
마치 사촌이 논을 산 것처럼 배가 아픈 게 아니라 그 춤 속에 담긴 한恨이 느껴져서다. 하지만 그녀가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한이 아니라 잔상무 자체가 가지고 있던 한일 것이다.
은영의 춤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니 마주 보면서 춤을 추고 있던 영욱의 춤도 조금씩 변해갔다. 하지만 애절하고 아픔을 간직한 춤이 아니라 오히려 꿋꿋하고 강건함을 내포한 춤에 가까웠다.
영욱은 은영이 자신의 어깨에 기대서 잠시나마 쉴 수 있도록 춤으로써 배려했다. 둘의 춤은 그렇게 밤새도록 어우러져갔다.
영욱은 악고정사신, 고치삼십육, 양수포곤륜, 좌우명천고 등의 구결을 새로운 구결에 조합해 보지도 못하고 아침을 맞이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래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도 못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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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과 은영이 밤을 꼬박 새우고 나서 지하 동공을 나서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희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말을 걸었다. 그녀는 은영도 자신을 따라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은 게 거북했던 것 같았다.
-적어도 서너 달 정도는 폐관해서 수련할 것처럼 굴더니 겨우 하룻밤으로 끝난 건가요?
-소희 네가 정말로 대단하다는 사실을 느낀 하룻밤이었어.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죠?
-너는 나이트클럽에서 경태와 밤을 새우는 게 일상이었잖아.
-다 지나간 이야기를 왜 갑자기 들추고 그래요?
영욱의 뜬금없는 소리에 소희는 쌍심지를 세우며 몹시 거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벌써 잊어버렸어야 할 이름인 경태가 요즘 들어서 너무 자주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은영과 함께 밤새도록 춤을 추었는데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아서 그래. 그러니 일주일에 서너 번씩 나이트를 뛰던 네가 존경스러울 수밖에.
-둘이서 댄스 배틀이라도 했어요? 수련은 하지도 않고 춤만 추다니요.
-수련이라고 해서 꼭 무식하게 고통을 참으며 반복 훈련만 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그리고 그렇게 훈련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
-그럼 밤새도록 춤을 추면 없던 실력이 갑자기 생겨나기라도 해요?
소희는 영욱이 자신을 비꼬기 위해서 춤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자신이 밤새도록 나이트를 전전한 것 역시 일종의 수련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영욱이 그 사실을 아는 듯한 표정을 지으니 깜짝 놀랄 수밖에.
-잘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해? 네가 그 정도라도 되는 게 바로 물 좋은 나이트클럽을 전전해서임을 잘 알고 있는데 어디서 감히 실드를 쳐?
-호호호! 실드라고요? 이젠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나이도 동갑이면서 누굴 감히 늙다리 취급하는 거야? 나는 그런 말도 모를 줄 알았어?
-아니에요. 갑자기 말투가 젊어진 것 같아서 약간 혼란스러워서 그랬어요.
-출발 5분 전! 다들 빠뜨린 것 없도록 잘 정리해!
-예. 선배님.
영욱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는 상태를 향해서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상태 역시 영욱의 갑자기 달라진 모습을 느끼고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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