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너도 있고, 호그질라, 몽구스, 삼백족, 삼족백오, 대왕대봉 등이지.
-대왕대봉은 저 인간이 혼자서 잡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어디서 감히 뻥을 쳐?
-내가 주인님께 드린 정화가 큰 도움이 되었을 테니까 그게 그거야.
대룡도 잠시 공격을 멈추고 협상에 들어갔다. 보호막이 사라졌으니 이미 이긴 싸움이라고 본 것이다. 영욱도 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나 충전을 계속했다.
-다들 비리비리한 녀석들이긴 하지만 제법 많이 잡긴 했군. 그런데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잘 봐! 주인님의 몸에는 그 녀석들의 가죽들이 모두 있어. 그것도 교감이 이루어진 형태지. 대왕대봉에게는 가죽이 없으니까 예외지만.
-저, 정말이네.
금강누치는 헤드 스핀을 계속하고 있는 영욱을 자세히 보더니 대룡의 말이 사실임을 곧바로 인정했다. 조금 전까지는 싸우느라고 정신없이 바빠서 몰랐지만 이야기를 듣고도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너도 가죽이 될래? 아니면 노예가 될래?
-내게 가죽이 어디 있다고 그래? 비늘이면 모를까.
-그럼 비늘을 제공하겠다는 소리야?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그게 아니라 난 아직 죽기가 싫다는 소리야.
-그럼 노예가 되겠다는 소리군.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후자가 낫겠지.
-잘 생각했어. 하지만 절차가 좀 더 필요한 것은 너도 잘 알고 있지?
-무, 무슨 절차?
-좀 더 맞아야 진심으로 항복할 테니까 그게 바로 절차지. 나도 다 겪었던 과정이니까 괜찮아.
주인이 될 영욱이 개입할 필요도 없이 항복에 관한 협상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대룡은 박상태처럼 선임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설마 죽이진 않는 거지?
-당연하지. 겨우 비늘 밖에 얻지 못하는데 왜 죽여?
퍽. 퍽.
협상이 끝나자 노예를 맞이하려는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대룡은 굵고 긴 자신의 몸을 채찍처럼 휘둘러서 금강누치를 가격하기 시작했다.
-악! 사, 살려주세요.
-아직 한참 멀었어. 내 경험으로는 일주일 정도는 두들겨 맞아야 진심으로 항복할 마음이 생기던데 너는 그 당시의 나보다 훨씬 강하니 한 달 정도는 맞아야 할 거야.
-이렇게 아픈데 어떻게 일주일 이상을 맞아? 제발 살려줘.
-내가 무슨 권한으로 너를 살려줘? 내 노예가 되는 게 아니라 주인님의 노예가 되는 거니까 착각하지 마.
-주인님, 살려주세요.
-이제 막 쌀을 안쳤는데 벌써 밥이 될 리 없잖아. 그러니 좀 참아.
영욱도 스핀을 계속하면서 작은 바위를 소환해서 발사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구타가 시작되었으니 멀뚱멀뚱 지켜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금강누치가 벌써부터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선처를 호소했지만 아직도 한참 멀었다는 사실은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아파요. 정말 아프단 말이에요.
-아프겠지. 그동안 단단한 보호막으로 가리고 다녔으니 얼마나 속살이 여리겠어. 하지만 앞으로는 맷집이 필요한 순간도 올 테니 훈련이라고 생각해.
-정말 아파요. 악!
-보호막 때문에 멀쩡한 환수를 오히려 형편없는 약골로 만들어버렸군.
녀석의 반응은 단단한 껍질이 깨진 소라를 연상케 했다.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녀석의 반응에 영욱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얘들아! 너희들도 쳐라!"
"악!"
구경하고 있던 백오기사단이 영욱의 명령에 의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은영과 소희에게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용감하게 가세하더니 금강누치에게 잔상무의 쓴 맛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퍽. 퍽!
-아파요. 제발 살려주세요. 주인님.
-통과 의례니까 이빨을 악물고 견뎌. 명색이 수컷인데 암컷처럼 촐싹거리지 말고.
-이러다가 정말 죽을 것 같아요.
-겨우 그 정도의 매를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약해빠진 녀석을 내 노예로 들이고 싶지는 않거든.
매타작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영욱은 구타보다는 혹시나 모를 금강누치의 돌발적인 반항을 경계하면서 녀석의 기운을 빼앗는데 주력했다.
김호진 역시 금강누치의 기운을 빼앗아서 영욱에게로 넘겨주었다. 물론 녀석의 힘을 빼놓는 게 주된 목적이지만 혹시라도 녀석의 단단한 보호막이 생겨날지도 모른다는 터무니없는 기대감도 없지는 않았다.
대봉 환수의 기운도 흡수했지만 대왕대봉의 보호막은 생겨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대봉 환수가 가지고 있는 기운이 아니라 합체한 대왕대봉만이 발현할 수 있는 힘이라서 그런 듯했다.
하지만 금강누치의 경우에는 합체한 것이 아니니까 어쩌면 보호막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녀석이 몰매를 맞느라고 혼미昏迷해진 틈을 타서 열심히 기운을 훔치는 것이다.
물론 환수를 사냥하고 그 기운을 흡수한다고 해서 무조건 초능력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아주 적은 확률로나 겨우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 녀석의 경우에는 죽어서도 가죽을 남기지 않는 녀석이니까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영욱의 기대와는 달리 그동안 영욱이 흡수했던 잡다한 기운들 중의 하나가 될 뿐이었다. 물론 기운을 많이 소진한 금강누치 녀석이 빨리 항복하고 노예가 되는 데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녀석은 사라졌다가 영욱의 왼쪽에서 소환되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주인님.
-그야 두고 보면 알겠지.
-이미 노예가 된 저를 못 믿는다는 말입니까?
-대룡도 항복해놓고 죽도록 몇 번 더 맞았어. 충성스러운 노예가 하루아침에 되는 건 줄 알았다면 지금이라도 꿈 깨. 진실이야 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겠지만.
소환을 통해서 노예가 된 걸 확인했지만 영욱은 구타를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대룡을 통해서 환수와 환수사냥꾼의 미묘한 차이점을 이미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몇 번의 항복을 더 받아낼 참이었다. 물론 그 전에 대화를 조금만 더 진행해보기로 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다릅니다.
-빨리 기운을 회복해서 다시 보호막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지? 그치?
-그건 그렇습니다. 보호막이 없으니 좀 추워서…….
-나도 네가 보호막을 다시 만드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어. 네가 자랑하는 보호막이 별 거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제 보호막을 무시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주인님이라도 보호막을 깨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영욱이 녀석의 자존심을 살살 건드리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말만 그저 주인님일 뿐이고 여차하면 한 입에 삼켜버릴 수도 있다는 듯이 입을 크게 벌리며 시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녀석의 입은 어지간한 동굴처럼 컸다.
-이젠 아냐.
-노예라고 무시하시는 모양인데 좀 섭섭합니다.
-물고기 대가리 아니랄까봐 벌써 고통에 대해서 까먹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계급장 떼고 한판 붙을까?
-그건 일대일로 싸우자는 소리로 들립니다만…….
금강누치는 영욱의 계속되는 도발에 정면으로 맞섰다. 자신감으로 보자면 이제 곧 보호막을 다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당연하지. 하찮은 노예를 교육시키는데 매번 부하들의 도움을 받을 순 없잖아.
-제 보호막은 깨진 게 아니라 기운이 빠져서 일시적으로 사라진 것이니까 무시하지 마십시오.
-보호막이 다시 생긴다면 나 정도는 얼마든지 자신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당연하지요. 아무리 주인이라도 거들먹거리는 것은 사절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노예인 네가 주인인 나한테 거들먹거리는 것 같은데 잘못 본 건가?
-비록 다구리를 당해서 얼떨결에 노예가 되긴 했지만 허접한 환수사냥꾼 따위에게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예라고 해서 모두가 말을 잘 들을 거라는 환상은 이제 버려야할 겁니다. 하하!
보호막이 다시 만들어진 순간 금강누치도 자존심을 다시 회복했다. 영욱도 이 순간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반가운 기색을 숨지기 않았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아주 잠깐 진심으로 항복할 마음이 들긴 했겠지만 그건 너무 아파서 일시적으로 생긴 감정이지 않겠어?
-잘 아시는군요. 보호막이 다시 재생되었으니 그럼 한판 붙어볼까요? 계급장 떼고…….
-당연하지. 하지만 그전에 너의 이름부터 지어주기로 하지. 금강누치는 너무 기니까 줄여서 그냥 강치로 하자. 강치 소환!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강치는 사라졌다가 다시 영욱의 옆에서 소환되었다. 그런데 그의 목에는 영욱이 만든 ULM 올가미가 걸려있었다.
-강치는 물개와 비슷한 동물이지. 그러니 개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너도 알다시피 주인을 모르고 달려드는 개에게 목걸이를 채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잖아. 몽둥이질도 당연하고 말이야.
-하하하! 이까짓 장난감으로 저를 구속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게 그래도 꽤 단단해. 아까 네 보호막과 부딪쳐도 멀쩡했던 것이니 쉽게 벗겨낼 수는 없을 걸?
-이 정도쯤이야 간단하게…….
-그럼 벗겨봐. 나는 그동안 손맛이나 즐길 테니까. 잔상각! 잔상권! 잔상무!
녀석의 보호막이 강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부딪쳤을 때나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이다. 그리니 질기고 질긴 ULM 올무를 벗겨내는 일이 쉬울 리 없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고만 있을 영욱도 아니었다. 영욱은 포크를 타고서 공격을 재개했다.
-아악! 아프잖아요.
-아프라고 때렸으니까 당연히 아프겠지. 그런데 너, 남자 아니었어?
-남자 맞아요.
-그런데 왜 말투가 그 모양이야?
-알들을 수정시키느라고 애를 썼더니 그런가 봐요.
-그렇다면 너도 감성돔처럼 살아가면서 성전환이 일어나는 모양이구나. 아무튼 덜 맞아 보겠다고 그런 거라면 잘못 생각한 거야. 나는 암컷이라도 봐주지 않으니까.
아직까지는 온전한 보호막이 아닌지 영욱의 공격에 숭숭 뚫렸다가 다시 생겨나기를 반복했다. 아직까지는 보호막이 허접한 면도 있지만 사실은 영욱이 녀석을 고정시켜 놓고서 팬 곳을 또 패기에 가능한 것이다.
-아파요. 주인님, 제발 이 올가미 좀 풀어주세요.
-조금 전까지 거들먹거리면서 나 같은 것쯤은 한주먹거리도 안된다더니 웬 엄살?
-잘못했어요. 맞아보니 주인님의 실력을 알 수 있네요. 살려주세요.
-아직 멀었어. 시작하면 최소한 삼박 사일 정도를 패니까 기대해도 좋아.
-아악! 잘못했어요. 주인님.
퍽. 퍽.
강치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싹싹 빌었지만 영욱의 구타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강치의 몸에서 강력한 보호막이 생겨나더니 ULM으로 만든 올가미가 맥없이 터져나가고 말았다.
-호호호! 이제부터는 제 차롑니다. 주인님. 각오하세요.
-기대할게. 강치 소환!
-악! 이게 무슨 짓이에요?
-물고기를 잡으려면 역시 낚시가 제격이지. 하하하!
영욱은 ULM으로 올무 대신 낚싯바늘을 만들어서 녀석의 입에 걸어버렸다. 노예라서 소환 위치 조정이 영욱의 마음대로 가능하니 그런 작업을 하는 것은 아주 간단했다.
-이까짓 낚싯바늘로 저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에요. 에잇! 아야!
-힘을 주면 더 아플 거야. 하하하!
-치, 치사하게 이럴 거예요? 이게 어떻게 정당한 대결이에요?
-네 주둥이 안쪽에는 보호막이 둘러싸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 다른 자들은 알아봐야 그림의 떡이겠지만 주인인 나는 너를 마음대로 소환할 수 있으니까 낚싯바늘을 거는 것쯤이야 장난이지. 넌 이제 죽었다. 하하하!
-아, 아파죽겠어요. 제발 살려주세요. 주인님.
-아냐. 넌 좀 더 맞아야 해. 맛 좀 봐라.
영욱은 강치의 입에 ULM 낚싯바늘을 걸어서 꼼짝하지 못하게 만든 후 잔상각으로 자근자근 짓밟아 주었다.
쾅! 쾅! 쾅!
비록 잔상각이 녀석의 강력한 보호막을 뚫지는 못하지만 상당한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기에 하는 공격이었다.
-아파요. 제발 살려주세요.
-넌 맷집을 키워야 앞으로 경쟁력이 있어. 그러니 훈련이라고 생각해.
물론 훈련은 영욱으로서도 하고 있는 중이었다. ULM보다 더 강한 보호막을 밟는 중이니 고도의 집중력을 보이지 않는다면 오히려 잔상각이 부서질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
-아악! 살려주세요.
영욱의 일방적인 구타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두 번째 바벨탑의 위치
-수고했어.
-우리를 속여 넘기려고 했지만 속은 것은 바로 저 녀석이지. 호호호!
-이젠 혼자서 처리가 가능할 것 같으니 일단 돌아가 있어.
-그럴게. 필요하면 또 불러.
-당연하지.
영욱은 상당히 거들먹거리는 대룡을 2QB 세상으로 돌려보내고는 낚싯바늘에 걸린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강치의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받아서 마셨다. 생선 비린내가 진동했지만 그 속에 함유된 기운만큼은 어느 환수의 체액이나 피보다도 진했다.
머리털이 바짝 설 것 같은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흡혈귀처럼 녀석의 피를 빠는 이유는 분명했다. 빠른 속도로 소모되는 유나와 그 재료인 기운들을 보충하려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나 보호막과 비슷한 것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기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욱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환수사냥꾼의 피나 기운을 완벽하게 소화 흡수하면 함량 미달이긴 하지만 다양한 초능력들이 생겨나곤 했기 때문에 환수의 능력 또한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미련이다.
'피나 체액이 아니라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거지?'
하지만 도저히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어쩌면 자신이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하는 부위에 그런 초능력의 결정들이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비명을 지르면서도 계속 영욱을 주시하고 있는 강치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영욱은 열심히 피를 빠는 모습을 들켜서 민망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직도 강치가 자신을 멸시하는 것 같은 시선을 보낸다는 생각이 들어서 발끈했다.
"이 새끼가 감히 누굴 비웃어? 눈알을 뽑아버리겠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영욱은 잔상권으로 강치의 눈알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깡! 깡!
눈의 보호막이 덮인 부분이라서 포크의 기계 삽이 녀석의 눈알을 파내지는 못했지만 영욱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강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영욱의 공격을 피하고자 했지만 낚싯바늘에 걸려 있어서 효과적으로 피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창피함과 분노로 인해서 눈이 돌아간 영욱의 공격이 아주 집요해서 피하기가 쉽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비웃음을 띄고 있던 강치의 눈알이 어느 순간부터 공포로 가득 찼다. 이제 곧 보호막이 뚫릴 것 같기 때문이다. 적어도 눈알을 뽑아낼 때까지는 영욱의 무자비한 공격이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눈깔을 뽑아버릴 거다. 개새끼!"
자존심이 상한 영욱은 이성의 끈을 살짝 놓은 채로 했던 말을 반복하며 집요한 공격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임스와 보부상들의 기운을 흡수한 후부터 생긴 일종의 부작용이지만 지금으로서는 마치 광전사가 된 것처럼 영욱의 공격력이 평소의 두세 배에 이를 정도로 강력해졌다.
또한 평소에는 잘 되지 않던 경시 동작이 두 번의 공격 중에서 한 번에 이를 정도로 자주 성공하기까지 했다. 그러자 공격과 임팩트 타이밍이 갑자기 달라져버리는 사태에 직면한 강치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대면서 필사적으로 기계 삽을 회피했다.
아직 겉으로는 보호막이 멀쩡하지만 강치는 눈 부위를 공격당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낚싯바늘에 걸린 주둥이 부위에서 다량의 피와 체액이 스프링클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욱은 염동력을 최대한으로 동원해서 한 방울의 피와 체액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물론 강치의 눈알을 노리는 공격은 이와 별개로 집요하게 이어졌다.
쾅! 쾅!
때린 곳을 또 때리고 또 때리는 집중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지자 그 무엇으로도 깰 수 없을 것 같던 보호막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쩌저적.
-사, 살려주세요. 주인님. 제가 잘못했어요.
-웃기고 있네. 시건방진 눈알을 뽑아내서 너를 장님으로 만들어주마.
-제발 눈알만은 뽑지 말아주세요. 부탁이에요.
-지랄하고 있네. 시건방진 눈알을 뽑아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내가 성을 갈고 말겠다.
-끄아악.
결국 투명한 눈꺼풀처럼 강치의 눈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이 깨어지자 포크의 기계 삽이 어렵지 않게 수박 크기의 눈알 하나를 뽑아내고 말았다. 영욱은 거의 습관적으로 뽑아낸 눈알을 삼켜버리고는 나머지 눈알을 뽑아내기 위해서 공격을 재개했다.
꿀꺽.
수박보다 훨씬 더 큰 눈알이 영욱의 작은 입으로 사라지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물리적인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는 현상이 눈앞에서 벌어졌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다른 눈알을 뽑아내려는 기계 삽의 움직임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만큼 기계 삽의 움직임이 빠르고 현란했기 때문이다.
-역시 상태의 눈알처럼 영양가가 풍부한 기운들이 뭉쳐있는 것이었어. 아주 좋았어!
한 개의 눈알을 뽑아냄으로서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도 살짝 벗어났지만 영욱은 계속해서 새로 깨달은 광전사 상태를 유지하고는 경시 동작을 이어갔다. 이젠 잔상무뿐만이 아니라 잔상권과 잔상각까지도 경시 동작이 가능했다.
까까까강!
거의 동시에 다섯 곳을 두들기거나 한 곳을 다섯 번이나 두들기자 강치의 남은 눈알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영욱이 이렇게 미치광이인 줄도 모르고 겁도 없이 도발했으니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었다.
물론 뽑힌 눈알이야 얼마든지 재생시킬 수 있겠지만 보호막이 깨진 부분이니까 재생이 완료되자마자 순식간에 다시 뽑혀져 나갈 것이다.
강치는 대룡이 영욱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이유를 이제야 겨우 알 것 같았다.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대룡이 찍소리도 못하고 영욱의 지시를 따른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공포보다 더한 공포를 이미 맛보았고,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통증보다 더한 통증을 느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강치는 저항을 포기하고 말았다. 순식간에 보호막이 깨지고 오른쪽 눈알이 뽑혀나가는 순간 강치의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있었다.
-화, 환수지왕이시여!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환수지왕 트림하는 소리하고 있네. 네 눈에는 내가 환수로 보여?
-왕이시여! 환수와 환수사냥꾼의 끝은 다르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아부치고는 나쁘지 않군. 그리고 이제는 그 시건방진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지.
공격을 멈춘 것은 녀석의 아부가 듣기 좋아서가 아니라 삼킨 눈알들을 이제는 소화시키고 흡수해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왕이시여! 고맙습니다.
-그냥 주인이라고 불러. 내 가슴에 괜한 바람이나 불어넣지 말고.
-예. 주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환수지왕께서 나타나셨으니 곧 이곳에 바벨탑이 나타날 것입니다.
영욱은 빠르게 스핀을 돌기 시작하면서 강치와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직도 낚싯바늘을 뽑아주지 않아서 강치는 여전히 땅바닥에 누워있는 물고기 신세를 면치 못했다.
-두 번째 조용한 바벨탑?
-예. 주인님.
-탑에 발이라도 달렸나? 탑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나?
-허공에 쌓은 탑이라서 정해진 장소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다만 환수지왕이나 드림헌터들의 왕이라는 시니어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나타난다고 들었습니다.
-왜? 바벨탑이 그러한 왕들의 거처라도 된다는 말인가?
강치는 낚싯바늘을 뽑아달라는 애원을 일단 뒤로 미룬 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미주알고주알 보고하기 시작했다. 영욱도 열심히 활인심방의 구결을 외우는 한편 헤드 스핀과 윈드밀 스핀을 오가며 삼킨 눈알의 소화 흡수에 주력하고 있었다.
-왕께서는 바벨탑을 밟고 신들이 거주하는 영역까지 올라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격만 있다고 끝까지 오를 수는 없을 텐데?
-예. 그렇습니다. 바벨탑은 총 999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한 층을 오르기 위해서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거나 각 층을 지키는 수문장과 겨루어서 이겨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데?
-제가 삼킨 환수사냥꾼들 중에 바벨탑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탈출한 자들이 있어서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강치의 입에서는 아주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탈출가능성 제로로 알려져 있던 바벨탑도 소문과는 달리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고? 그곳으로 팔려 가면 아무도 탈출할 수 없다더니 빠삐용 같은 자도 있었군.
-아주 가끔이지만 그 속에서 기연을 만나 바벨탑의 외벽에 구멍을 뚫을 정도로 강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봐야 뛰어내려서 자살하는 방법밖에는 달리 선택할 게 없지만 운이 좋으면 바다나 강으로 뛰어내려서 살아남기도 합니다.
-그래서 네 밥이 되었던 거였군.
-예. 주인님.
-네 생각으로는 내가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을 것 같아?
영욱은 여전히 스핀을 돌면서도 바벨탑에서 탈출한 노예를 여럿이나 삼켰다는 강치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가진 힘에 비해서 너무나도 부실한 전투 운영 능력을 보자면 강치가 그런 식으로 갑자기 힘을 키운 게 사실일 거라 생각되었다.
그러니 잘 다루지도 못하는 극강의 보호막이라는 초능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다른 초능력을 더 가지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느낌마저 가지게 하는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절망하실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방법이라도 있나?
-주인님께서 사용하시는 그 무술이 경지에 이르면 약 1% 정도의 작은 확률이지만 꼭대기까지 오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목숨이겠군. 이제 겨우 20%를 넘어선 수준이니까 말이야.
영욱은 기계체조가 해법이라는 소리를 듣고서도 별로 반갑지 않았다. 사부의 가르침도 없이 그것도 짝퉁 구결로 경지를 끝까지 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것도 당장 바벨탑이 오고 있다면 경지를 올릴 수 있는 시간이 있을 리 없다.
-편법이긴 하지만 제게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
-저에게는 시간을 거슬러 오를 수 있는 잔재주가 있습니다. 물고기가 높은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의 시간을 벌 수는 있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강치가 또 다른 초능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영욱의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비록 강치의 밥이 되긴 했지만 바벨탑에서 탈출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강했을 지가 짐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을 하나도 아니고 여럿을 삼켰으니 고작 보호막 초능력 하나만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고 여겼는데 그 짐작이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제 입속으로 걸어서 들어오십시오.
-설마 복수하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 정도의 미물微物을 극복하지 못하면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바벨탑이 주인님의 무덤이 될 것이 분명해요. 호호호!
-아직도 덜 맞았군.
자존심을 자극하는 소리에 영욱은 또 다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입속으로 유인한 다음 그냥 삼켜버리겠다는 소리만은 아니겠지만 그럴 생각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
-내가 환수지왕이라는 증거라도 있어? 왕이라는 호칭을 들으면 내가 좋아서 미쳐 날뛰며 정신줄을 놓을 줄 알았지? 너 이제 죽었다.
-사, 살려주세요. 거짓말이 아닙니다. 컥!
까까까강! 까까까깡!
영욱은 이제 제법 익숙해진 솜씨로 경시 동작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화를 내면 광전사처럼 강해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경시 동작에 익숙해진 만큼 더 빠르고 강력하게 강치를 두들겨 팰 수 있었다. 그러면서 생각에 깊이 빠져 들었다.
허공에 쌓은 탑, 조용한 두 번째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는 영욱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제물이 될 만한 자들을 찾아서 자체적으로 이동하기까지 한다니 그야말로 기절할 노릇이었다.
강치의 말이 100% 진실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는 거짓이 아닐 것이다. 화리도 영욱 자신이 이곳에서 피의 페스티벌이 벌어지게 만든 원인제공자이고 타깃이라고 했으니 만일 바벨탑이 나타난다면 자신을 잡아가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사퍼모어 초입에 들어선 자신을 환수지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거나 100% 과장임이 틀림없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기계 체조의 경지가 100% 혹은 120%는 되어야만 바벨탑의 정상으로 오를 확률이 1%라고 했으니 겨우 20%의 경지인 자신으로서는 무조건 죽는다는 소리였다.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자면 강치의 입으로 걸어 들어가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죽을 정도로 수련해서 기계체조의 경지를 올려야만 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열심히 수련한다고 한들 100%나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현실 세계와 2QB 세상의 시간 흐름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는 것은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하지만 금강누치가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폭포를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 역시 거슬러 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치가 가진 고유 능력이 아니라 빈사 상태에 빠진 바벨탑의 탈출자들을 삼키고서 얻은 초능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세상이 겹쳐있는 지금이야말로 그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그러한 생각은 급기야 평소라면 2QB 세상에서 수련하거나 독서한 것의 일부만을 가져올 수 있지만 지금이라면 거의 100%에 가까운 성과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좋아! 한 번 죽지 두 번 죽나.'
영욱은 잔상수족의 초식으로 자신의 몸을 두 개로 나누었다. 예전에는 팔다리만 여러 개의 잔상을 만들 수 있었지만 기계체조의 경지가 20%를 넘어서니 온전한 형태의 잔상을 두 개로 만드는 것도 가능해졌다.
잔상 하나는 포크를 조종해서 열심히 강치를 두들겨 패고, 다른 잔상 하나는 곡소리를 내고 있는 강치의 거대한 입을 통해서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어?
영욱이 쩍 벌어진 강치의 목구멍을 조심스럽게 통과하자 놀랍게도 기억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기억속의 모든 것들이 동영상을 뒤로 돌리는 것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강치가 뒷걸음질로 물러나고, 쓰러졌던 대왕대봉이 몸을 일으키더니 어느새 날갯짓을 해서 왔던 곳으로 사라져갔다.
백오들이 나타났다가 거꾸로 날갯짓을 해댔고, 몽구스 환수와 호그질라 환수 역시 모습을 보였다가 뒷걸음질로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화면이 정지해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경험했던 장면들이 정상적인 속도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젠장! 겨우 2QB 세상에서 대룡을 노예로 거둔 직후로 거슬러 올라왔군. 그렇다면 몇 발자국 거슬러 오르지도 못한 거잖아.'
-오빠! 살아있었던 거야?
전처럼 은영이 달려와서 가식적인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이제는 이러한 모습도 귀엽게 느껴졌다. 약간의 과거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가진 힘은 과거의 자신이 아니듯이 감정 또한 과거의 감정이 아니었다.
-당연하지. 내가 그깟 지렁이 따위에게 당할 것 같아?
-그깟 지렁이가 아니던데?
-지렁이가 지렁이지 그럼 용이야? 나중에 용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용도 그런 용은 드물 것 같던데…….
-현실 세계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곳은 2QB 세계야. 그까짓 녀석이 용은 무슨 얼어 죽을 용이야?
타임 워프처럼 혼자서 시간을 거슬러 온 것이니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려고 똑같은 대사와 태도를 견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대룡이 화룡이 된 것도 보았고, 대룡보다 훨씬 센 녀석들도 부지기수로 보았으니 똑같이 내뱉는 영욱의 말이지만 왠지 힘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다면…….
-그보다 더 센 녀석들이 널리고 널렸다는 말이야.
-그럼 우린 죽은 목숨이겠네?
-그래.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떠나기 전에 기계체조를 완성해야 해.
그러나 영욱은 언제까지나 똑같은 대사를 반복할 수 없다는 것도 금방 깨달았다. 자신은 지금 기계체조를 완성하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금강누치의 입속으로 걸어 들어왔기 때문이다.
기적적으로 약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데 성공했지만 남아 있는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서둘러야만 했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진짜 구결도 없는 오빠가 무슨 수로?
-그러니까 네 도움이 필요한 거지. 좋아. 내가 아주 파격적인 제안을 하나 하지.
-그게 뭔데?
-너희 두 사람 중에서 나에게 진짜 구결을 제공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평생 데리고 살아주지.
영욱은 결혼을 미끼로 두 사람으로부터 진짜 구결을 요구했다. 예전과는 정반대의 태도에 두 여자가 깜짝 놀랐지만 진담이라고 쉽게 믿어지지는 않는 듯했다.
-오빠, 그 말이 정말이야?
-영욱 씨!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두 여자는 잠시 동안 정적이 흐른 후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농담 같지만 그 진위를 도저히 확인해보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욱의 태도가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는 다르다는 점도 한몫했다.
-내가 결혼을 걸고 농담할 사람이야? 다만 진짜 구결이라야 해. 가짜는 사절이니까.
-하지만 나도 진짜 구결을 모르는데 어떻게 진짜 구결을 알려줘?
-저도 마찬가지예요.
-미리 연막이나 칠 궁리는 집어치우고 잘 생각해 봐. 농담 아니니까.
-그렇다면 아빠에게 전화해 볼게.
-저도요.
영욱이 전화하라는 제스처를 취해주자 그 의미를 알아차린 두 여자들도 화들짝 놀라서 반응했다.
-나를 속일 생각이라면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도는 금방 구별할 수 있으니까.
-그럼 다녀올게.
-저도요.
두 여자의 눈에는 영욱이 천신만고 끝에 겨우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은데 대룡을 잡았다고 큰소리를 뻥뻥 쳐대니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뜬금없이 결혼을 조건으로 걸고 진짜 구결을 요구하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 둘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어쩔 수 없이 현실 세계로 나가서 각자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
잠에서 깨어난 은영은 한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빠에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빠, 어쩌죠?"
-네가 보기에는 그 녀석이 대룡을 이겼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아? 아니면 뻥인 것 같아?
"솔직히 증거가 없으니 오빠의 말을 전부 믿어줄 수는 없지만 그런 녀석을 떼놓고 도망쳐온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봐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진짜 구결을 요구하는 거겠죠."
-너도 잘 알겠지만 대룡은 집요해서 떼놓고 도망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은영의 아버지도 대룡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영욱의 말이 사실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그렇다면 오빠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그 정도라면 진짜 구결을 가르쳐줘도 되지 않을까요?"
-그건 안 돼. 너와 결혼할 자격은 되는 것 같지만 소희와 경쟁한다는 것이 불쾌해서 싫어. 게다가 선불은 아무래도 좀 곤란하지.
"그러다가 오빠를 또 놓치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90%짜리를 알려주도록 해라. 그 녀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구별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