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6/71)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소희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보기보다는 사려가 깊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영리하기도 했다. 사실 영욱으로서는 사둔 땅을 실질적으로 이용할 계획은 전혀 없기 때문에 소희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사부 진중권이 그토록 찾고 싶어 하는 산이라면 그저 사부의 산이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기계체조를 수련하기에 조건이 아주 좋은 명당자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기계체조를 수련하면 얻는 기운이 있으니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그 산의 주인이 곧 영욱이 될 테니 기계체조의 성취가 앞으로 일취월장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

기다리고 기다리던 화리 일행은 여태까지 어디서 꾸물거리고 있었는지 이제야 겨우 도착했다. 영욱으로서는 황금 누치들을 막 치우고 난 다음이라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그런데 화리는 도착과 동시에 영욱을 향해서 짜증부터 내기 시작했다. 뒷북이지만 나름대로는 영욱의 안위를 걱정했던 듯했다.

"왜 여기서 죽치고 있는 거야? 강에 온 김에 천렵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대왕대봉을 피하려면 물속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별 수 있냐? 너는 벌을 어떻게 피하는 지도 모르지?"

"그런데 대왕대봉은 어디에 있어?"

"돌아갔어."

"흥! 웃기고 있네. 피의 페스티벌 장소에 나타난 환수는 페스티벌이 끝날 때까지 절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내가 모를 것 같아?"

"돌아가셨다니까 자꾸만 말 시킬래?"

처음에 했던 말은 자기가 왔던 세상으로 되돌아갔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화리의 반박에 할 말이 없어진 영욱은 교묘하게 말을 비틀어서 처음부터 진실을 밝힌 척했다. 

"죽었다고? 또 네가 죽였어?"

"내가 아니면 누가 죽이냐? 그럼 그 녀석이 그냥 자살이라도 했을 것 같아?"

"그런 괴물을 대체 무슨 수로 죽였다는 거야? 어떻게?"

"그건 비밀이야. 너는 영업상의 비밀도 몰라?"

"좋아. 그러면 대왕대봉의 사체는 어디 있어?"

"죽는 순간 수백만 마리의 대봉 환수들로 분리된 다음 강물에 빠졌어. 그리고 순식간에 다 떠내려갔어. 지금이라도 잘 찾아보면 몇 마리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거야. 아니면 바다로 가보든가."

영욱은 화리를 놀려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봉 사체는 물론이고 황금 누치까지도 화리에게 넘겨서 백오 가죽처럼 5대 5로 이익을 나눈다면 아마도 영욱으로서도 큰돈을 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큰돈을 벌게 될 테니 그게 배가 아파서 선뜻 내주지가 싫었다. 사실 워낙 큰 금액이라서 그냥 먹고 튈 확률이 더 컸다. 무엇보다 이제는 돈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화리와 거래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교두보로 사용할 땅을 더 사는 것도 이제 어느 정도는 했으니 시들해졌다.

"설마 그걸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사실은 주우려고 했는데 누치들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다 삼켜버렸어."

"누치라고? 그럼 걔들이라도 잡았어야지."

"걔들이 우리 손에 잡힐 만큼 느린 줄 알아? 그것도 물속에 있는데 내가 무슨 수로 잡아?"

"그래서 황금 누치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거야?"

안타까워서 팔짝팔짝 뛰는 시늉을 하던 화리가 갑자기 황금 누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미 다 알고 왔다는 소리였다. 그래서 대봉의 사체가 없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쉽게 믿어주었던 것이다.

"네가 황금 누치인 줄 어떻게 알았어?"

"흥! 보부상 제임스가 너로부터 헐값에 구입했다고 동네방네 자랑하더라. 대체 얼마에 판매한 거야?"

"제임스가 가격에 대해선 이야기 안 해?"

"만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가격에 대한 이야기를 해?"

"제임스가 나로부터 헐값에 구입했다고 자랑했다며?"

"상인들의 채팅 사이트에 녀석이 올린 글과 황금 누치의 사진을 보았다는 거지. 대체 얼마에 넘긴 거냐고?"

영욱은 자신이 국제적으로 개망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살벌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름대로는 힘껏 받는다고 받았는데 그것이 놀림을 당할 정도로 헐값이라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참치 최고가의 두 배를 받은 것으로는 어림도 없는 듯했다.

"이미 끝난 거래니까 신경 꺼. 이제 와서 너에게까지 바보 취급당하고 싶진 않으니까."

"경고해 두겠는데 판매는 제발 나한테 맡겨. 5대 5로 이익을 나누기로 약속했잖아."

"나는 솔직히 네가 더 신뢰가 안 가. 내가 그 녀석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지만 만일 너와 먼저 거래했다면 그 금액도 못 받았을 게 분명해. 내가 가격을 이야기하면 터무니없는 견적을 남발해서 초를 치려고 들 게 분명해. 이미 거래가 끝난 것이니까 얼마를 못 부르겠어?"

"그래도 한 마리에 8골드는 너무했다. 소매가가 대체 얼만 줄이나 알고서 한 짓이야?"

화리는 거래 가격도 이미 알고 있었다. 영욱이 거짓말을 하면 한방 먹여줄 생각이었던 듯했다.

"몰라."

"25골드야. 그러니 너와 내가 5대 5로 나눠도 12.5골드씩이나 되는데 멍청한 너 때문에 내가 정말 울화병으로 돌아가시겠다. 설마 수백 마리나 되는 것을 몽땅 다 팔아넘긴 것은 아니겠지?"

"당연히 다 넘겼지. 그러지 않으면 고객 블랙리스트에 올린다는 데 내가 무슨 수로 거부해?"

"그거 그냥 하는 소리야.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전에도 속고 또 속다니 너 혹시 바보 아냐?"

"그 녀석들을 땅에 묻어 놓고 거래했는데도 그 상황에서도 설마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황제가 부럽지 않던 영욱이지만 진실을 알고 나니 창피해서 도저히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는 한다고 했는데도 여전히 상인들의 상술을 당해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듣고 보니 25골드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봐야 겨우 참치 여섯 마리 가격밖에 안 된다.

"상인이지만 사퍼모어 중상급의 환수사냥꾼들이기도 하지. 설마 그들이 힘이 없어서 땅속에 묻혀 있었겠어? 그것도 보부상이 얼마나 강한 자들인지 몰라서 그래? 지금 나하고 장난치자는 거야?"

"그럼 일부러 묻혀준 거란 말이야?"

"당연하잖아. 대들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벌벌 싸는 것처럼 굴면 확실하게 의심을 피할 수 있으니까 어르고 뺨치는 저들의 단골 메뉴라고 봐야지. 몸에 흙을 묻히는 것 정도는 목숨을 걸고 환수를 사냥한 사냥꾼들에 대한 상인의 기본적인 예의 아니겠어?"

"젠장!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시비를 걸어놓고는 일부러 져준 거란 말이군."

"그걸 이제 알았어? 정말로 내가 너 때문에 돌아가시겠다. 멍청하면 내 말이라도 경청하든가, 내 말이 듣기 싫으면 똑똑하게 행동하든가 해야지."

화리의 모욕적인 말에 영욱은 순간적으로 귀싸대기를 한 대 갈겨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를 패는 짓만은 결사적으로 참아냈다. 그 사실이 알려지면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어머니 이 여사에게 맞아죽을 테니까.

"말조심해. 사실 모든 것은 네 잘못이야. 얼른 이곳으로 왔으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 아냐. 여태까지 대봉 사체나 주우러 다녔던 주제에 그런 말이 나와?"

"그럼 그 아까운 걸 남들이 주워가게 버려둬야 해?"

"그럼 그걸로 충분한 돈을 벌었을 테니까 원통할 것도 없겠네."

"그냥 몸보신용으로 주운 거지, 누가 징그러운 대봉 사체를 사간다고 그래?"

"그럼 상인이라는 작자가 돈도 안 되는 걸 주우려고 꾸물거리다가 이렇게 늦었다는 말이야? 그게 아니라 내가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서 이리로 오는 걸 포기하고 있었는데 제임스의 글을 보고서야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겠지. 안 그래?"

영욱도 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으니 화리의 행동을 추정하며 비아냥거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줄 참이었다.

"누가 그래?"

"누가 그러지 않아도 다 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돈도 못 벌어. 내 말 명심해."

"솔직히 말해서 네가 보호막을 형성하는 환수마저도 이길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그러니 다음에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나는 너를 따라가지 않아. 그게 상인으로서의 내 판단이야."

"그렇다면 너는 틀림없이 울화병으로 죽게 될 거야.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도착할 때쯤이면 언제나 지금처럼 남은 게 전혀 없을 테니까."

"어쩌다가 우리 사이가 이렇게 된 거니?"

영욱의 입에서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니 화리로서는 황당한 듯했다. 평소의 영욱이라면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걸 믿고서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토룡 껍질의 시세가 어쩌고저쩌고 거짓말을 할 때부터 너와 나의 사이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는 겨우 황금 누치 한 마리의 소매가격이 25골드라고? 지금 나하고 장난치자는 거야? 내가 토룡 껍질을 황금 누치 100마리와 바꿀 것 같아?"

"도매 시세는 마리당 10달러야. 내가 가격에 대해서 거짓말했다고 생각해?"

"그래서 내가 그 도매 시세라는 게 싫다는 거야. 대체 누가 정한 건데 나에게만 일방적으로 헐값을 강요하는 거야?"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서 정해지는 게 가격이야. 그것도 몰라?"

"웃기지 마. 상인들끼리 작당해서 환수사냥꾼의 피를 빨아놓고도 그런 말이 나와?"

이왕 멍청이 소리까지 들었으니 영욱은 갈 때까지 가기로 했다. 자신을 포함하여 환수사냥꾼들을 가지고 노는 상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아직도 당하는 처지에 불과하지만 마음만은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다 큰 어른들끼리의 흥정으로 이루어지는 거래고 가격이야. 그리고 네가 환수사냥꾼들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지 마."

"내가 환수사냥꾼들의 대변인이 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어? 적어도 스물일곱 명의 환수사냥꾼을 거느린 사람으로서 말할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해."

"그래봐야 어차피 제값을 받지는 못해. 상인이 그냥 되는 건 줄 알아? 나도 처음에는……."

"그래. 꼴에 상인이라면서 사기 당한 게 자랑이다. 그러니까 나도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자체적으로 소모하겠다는 거잖아. 제발 내 일에 신경 좀 꺼줘."

슬슬 약을 올리다가 적당량은 팔 생각도 있었는데 멍청이 소리를 듣고 나니 그럴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뿐만이 아니라 화리와 말을 섞는 것조차도 짜증이 났다.

"그럼 제임스에게는 왜 팔았어?"

"땅 살 돈이 필요하니까 팔았지. 500마리에 4억 달러나 받았으니까 나로서는 적게 받은 것도 아니고."

"그럼 나한테 팔았어야지. 그러면 6억 2,500만 달러는 받을 수 있었잖아."

"네 말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지나간 이야기야 누군들 못해? 나 같으면 10억 달러도 가능하다고 하겠다."

"그럼 네가 장사라도 해보겠다는 거야?"

"시세가 10달러라는 걸 무려 8골드나 받았으면 대단한 향상이라고 생각하는데 넌 아닌가?"

가격이 적당하다고도 생각했지만 제임스 등의 보부상들을 땅속에 파묻었으니 거래하지 않으면 일이 커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거래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녀석들이 일부러 묻혀주었다면 영욱이 속은 게 분명했다. 영욱은 창피해서라도 그 이야기는 쏙 빼놓고 뒷북을 치는 화리에게 공격의 포화를 높였다.

"나와 거래했으면 12.5골드니까 하는 말이잖아."

"뒷북은 사절이야.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돈도 필요하지 않으니 거래할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 210골드와 백우 가죽 서른 장이나 어서 돌려줘."

"나를 기다리던 눈치였는데 정말 이런 식으로 까칠하게 나올 거야?"

"내가 왜 너를 기다려? 웃기고 있네."

늦게 왔으니 영욱이 주었던 백우 가죽들은 이미 다 팔아치운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슬쩍 다른 이야기로 돌려버리는 화리를 보며 영욱은 더 이상 거래하면 할수록 자신만 바보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여자인 화리를 땅속에 묻어버릴 수는 없으니 그냥 깨끗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그 돈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워낙 큰 거래를 하고 보니 별로 아깝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밉상으로 느껴지지도 않아서 그냥 참기로 했다. 아무튼 화리 덕분에 황금 누치의 실제 거래 가격을 알게 되었으니 팔지 않고 남은 것은 제값을 받을 수 있거나 그 가격을 제대로 느끼면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왜 자꾸 상류 쪽을 쳐다본 거야?"

"새로운 환수가 나타나서 쳐다본 거니까 착각하지 마."

"그럼 여기서 뭐하고 있어? 어서 이동하지 않고."

"환수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그리고 지금은 급한 통화를 해야 하니까 잠시 실례."

"이봐! 숙녀와 이야기 중에 자리를 뜨다니 이건 너무하잖아."

화리는 재벌 후계자 중의 하나라면서 금전 사정은 그다지 좋지 않은 듯했다. 그러니까 영욱에게 지불해야할 골드를 자꾸 미루고 거래에서 무리한다고 느낄 정도로 심하게 가격을 후려치는 것이다. 

그녀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영욱은 숙녀와 상인 사이에서 자꾸 헷갈리는 화리를 내버려두고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소희가 통화 중인 것을 보고 잠시 전화하는 것을 미루었다. 걸어봐야 통화 중일 테니까.

@

소희는 오늘따라 더 심해진 귀의 가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진중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내 딸 소희냐? 그곳은 춥지 않아?"

"예. 아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대체 무슨 환수를 사냥했던 거냐?"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보다 지금 영욱 씨의 아버님과 함께 계시죠?"

"응. 그건 왜?"

"좀 바꿔주세요."

"그래? 알았다."

진중권은 자신보다 박득환을 찾는 소희의 태도에 의아해 하면서도 자신의 스마트폰을 득환에게로 건네주었다. 

@

"여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진소희라고 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실례를 범했어요."

"나는 전혀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할 말이 뭐냐?"

"영욱 씨가 이왕이면 저희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땅을 구입하라고 해서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전화를 드렸어요."

"어차피 넘쳐나는 돈이니까 그러지 뭐. 더 필요한 것은 없냐?"

득환은 진중권과 이미 그렇게 하기로 입을 맞추었다는 소리는 쏙 빼놓고서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는 어조로 대답했다.

"저희 아버지 명의로 영구 무상 임대 계약서도 필요해요."

"어차피 땅을 이용할 것은 아니니까 그러지 뭐. 그런데 우리 영욱이랑 잘 되고 있냐?"

"아, 아직은 좀 그래요. 하지만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될 거 같아요."

"내가 응원해주마. 파이팅!"

"고, 고맙습니다. 그만 끊을 게요."

"그래. 또 전화해."

"네."

목소리에서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이 줄줄 흐르는 걸 보니 은영을 예비 며느리로 생각했던 득환이 이제는 소희를 예비 며느리로 확정지은 게 분명했다. 더구나 소희의 전화 통화는 그러한 득환의 마음을 더욱 굳게 만드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고 말았다.

@

영욱은 통화 대신 또 다시 문자를 택했다.

-접니다. 땅을 사기 전에 첨부된 계좌번호로 각각 일억 원씩 송금해 주세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그러지. 방금 전에 소희와 통화했다. 그게 사실이냐?

-예. 번거롭겠지만 그렇게 해주세요.

-이미 그럴 생각이었다. 

-진 씨 아저씨가 부탁하던가요?

-그걸 꼭 물어봐야겠니? 네가 큰돈을 버느라고 나름 고충이 있었겠지만 사부의 은혜를 잊으면 사람이 아니다. 내 말 새겨서 들어.

-알고 있습니다. 

-말로만?

-그럼 깡술만 드시지 말고 그럴 듯한 안주도 시켜서 같이 드세요.

-네 돈으로?

-예.

-그렇게 하마. 

-꼭 그렇게 하세요. 진 씨 아저씨는 두부김치를 좋아하니까 참조하시고요.

-나도 두부김치 엄청 좋아한다. 알고나 있었냐?

-그럼 같이 드시면 되겠네요. 두 접시를 시켜서 한 접시씩 드시든지.

-그럼 수고해라.

-땅은 다 구입했어요?

-돈 부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닦달이냐? 하지만 염려 말거라. 대금을 달러로 지불한다니까 더 좋아하네.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이제 더 이상의 땅 구입은 없을 겁니다.

-앞으로는 돈 벌 일이 없다는 거냐? 사냥 안 해?

-해도 팔지 않고 자체적으로 소모할 겁니다. 팔더라도 부하들 월급 주는데 써야 하고요.

-네가 준 그 명단이 네 노예들이냐?

-예. 하지만 직업 군인이고 부하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다. 그럼 수고해라.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문자질이나 하고.

-네.

전화 한 통화면 될 일을 또다시 수십 건의 문자 교환으로 해결하고 말았다.

*끝나지 않는 피의 페스티벌

챙!

득환이 서툰 솜씨로 문자질을 마치고는 다시 술잔을 들자 진중권도 얼른 자신의 술잔을 부딪치면서 입을 열었다. 소희와의 대화는 대충 엿들었지만 문자의 내용을 알 수는 없으니 궁금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무슨 일입니까? 사돈."

"소희와 영욱 모두 사돈이 원하는 땅을 사드리라고 하더군요. 이미 우리끼리 입을 맞춘 내용이지만 명의는 영욱의 것으로 하고, 사돈께 영구 무상 임대 계약서를 써드리라는 걸 보니 이제야 겨우 철이 좀 드나봅니다."

"원래부터 듬직했습니다. 사돈만큼은 못하지만 술친구로도 꽤나 쓸 만했고요. 별로 해준 것도 없이 받기만 하려니 눈물이 앞을 가리는군요."

"해준 게 왜 없습니까? 그 녀석이 지금 누구 덕분에 잘 나가는 환수사냥꾼이 되었는데 그런 말을 하십니까? 혹시 술에 취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사돈!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십니까? 겨우 이 정도로 취할 술이라면 당장이라도 끊어버리고 말 겁니다. 거, 건배!"

"건배! 그래야 사돈답지요. 하하하!"

눈물을 글썽이려던 진중권은 술에 취했냐는 소리에 깜짝 놀라서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하늘이 내린 술꾼으로서 남에게 취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가장 창피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문자질을 끝내고 돌아서는 영욱 앞에 화리가 무릎을 꿇었다.

"지금 무슨 짓이야?"

"내가 잘못했어."

"네가 잘못한 게 어디 한두 가지라야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알아듣지 않겠어? 대체 뭘 잘못했는데?"

"전부 다 잘못했어."

영욱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화리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화리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용서라도 해달라는 거야?"

"제발 나를 내치지는 마."

"너 혼자 살아보겠다고 도망친 적은 많았지만 내가 언제 너를 내친 적이 있었나?"

"앞으로도 같은 방향으로 도망치지는 못할 거야. 하지만 곧 뒤따라가기는 할게."

"함께 싸울 동료가 아니라면 따라올 필요도 없어."

영욱은 또 자신이 화리의 페이스에 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얼핏 들어서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여자의 눈물과 과장된 행동은 항상 뭔가를 노리고 하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난 상인이야. 나보고 너와 함께 싸우라고 강요하는 것은 무리야."

"누가 앞에서 싸우래? 뒤에서 응원할 수도 있잖아."

"또 도시락으로 사용하겠다는 거야?"

"그게 싫다면 앞에서 싸우든지."

"알았어. 이제부터는 그렇게 할게."

화리는 스스로 꿇었던 무릎을 스스로 펴고 일어나면서 새침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나름 히든카드로 사용했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말이야 쉽지."

"나도 한다면 하는 여자야."

"그런 말은 해보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영욱은 화리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사실 은영과 소희도 달아날 확률이 많은데 화리가 그럴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불신의 시선을 느낀 화리는 아깝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서 입을 열었다.

"그럴게. 그리고 정보가 있어."

"공짜야?"

"원래는 비싼 정보지만 사과하는 의미로 이번에는 그냥 공개할게."

"얼마나 비싼 정본지 어디 한 번 들어보기나 할까?"

"이번 피의 페스티벌은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소문을 들었어."

"보통 석 달 정도면 끝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모양이야."

영욱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바로 정보라는 걸 화리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원하는 게 전혀 없다면 벌써 골드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든지 경우에 따라서는 공격이라도 했을 것이다. 거느린 노예의 숫자만 해도 27명에 달하니 화리로서는 대적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적절한 시기에 이런 식으로 정보를 공개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정보를 비싼 값에 팔면 더 좋겠지만 처한 상황이 좋지 않아서 이번에는 무료로 공개한 것이다.

"그럼 영원히 겹쳐진 세상으로 존재한다는 거야?"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최소한 1년 정도는 이대로 지속될 건가봐. 문제는 그게 아니라 수십 수백 종의 환수들이 쏟아져 나올 거고."

"젠장! 그렇다면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없나?"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 지역을 벗어나기만 하면 돼. 하지만 넌 안 돼."

"왜 나만 안 된다는 거야? 지금 농담해?"

  

"네가 타깃이니까 네가 죽든지 네가 쏟아지는 환수들을 다 죽여야 피의 페스티벌이 끝날 거야."

정보치고는 상당히 섬뜩한 정보였다. 사실인지 이제 환수 사냥을 피하려는 영욱을 다시 사냥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럼 나는 다른 곳으로 이동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거야?"

"응. 지구 반대편으로 도망가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왜 내가 타깃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환수들의 입장에서는 너를 잡아먹으면 상당히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네가 아직도 약한 상태인 지금 얼른 처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하는 것일 수도 있고."

"전자도 그렇지만 후자는 특히 말이 안 되는 소리야. 내가 나중에 강자가 된다는 걸 환수들이 어떻게 안단 말이야? 그리고 갑자기 공적이 된 이유가 뭐지?"

영욱은 강하게 부정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수긍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나타난 환수들이 죄다 자신을 노린 것은 사실이니까.

"나도 몰라. 하지만 네가 처음으로 환수사냥꾼들의 조직을 만들어서 그들의 비위를 긁었거나 대룡을 굴복시켜서 노예로 만들었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

"그걸 그들이 어떻게 알아?"

"강력한 힘을 가진 환수들에게는 노예가 존재해. 노예들 중에는 환수도 있겠지만 환수사냥꾼들 중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환수의 노예가 된 자들이 더러 있지."

영욱은 대룡과 스물일곱 명의 환수사냥꾼 노예를 거느린 경험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환수라고 해서 모를 리 없다.

"정보가 샜단 말이지?"

"워낙 좁은 바닥이니까 네 일거수일투족까지도 다 꿰고 있다고 봐야겠지."

"갈수록 태산이군. 먹고 살 만큼은 벌었으니까 은퇴하려고 했는데 그럴 수도 없게 되었잖아."

"네가 운동선수야?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벌써 은퇴를 하게?"

"요 며칠 동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으니까 하는 말이야. 정점頂點을 찍고 나면 누구나 추락을 맛보게 되는 법이니까 이왕이면 그전에 은퇴하는 게 현명하잖아."

거액을 들여서 쓸모없는 산과 임야를 사 모으는데 벌써 은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땅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편하게 환수 사냥이나 하려던 영욱의 계획은 수포가 되었으니까 하는 말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은퇴는 곧 죽음이야. 설마 몰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남의 걱정일랑 접어두고 네 걱정이나 해. 매번 그렇게 달아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달아나면 남는 게 있을 것 같아?"

"난 상인이라니까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상인이니까 더욱더 사냥의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그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는 죽어도 상인으로 대성할 수가 없어."

"상인을 갑자기 종군기자 취급하는 거야? 뭐야?"

영욱은 왠지 불안하던 느낌이 결국 현실이 되어버리자 두려움 대신에 기분이 몹시 나빠졌다. 그래서 만만한 화리에게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말 한 번 잘했다. 퓰리처상을 받을 정도로 성공하려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재벌 가문의 후계자라니 그 정도는 성에 차지도 않겠지만……. 그리고 제발 무조건 싼 값에 사서 비싼 값에 팔겠다는 사기꾼 같은 마인드는 버리란 말이야."

"사냥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거나 심지어 환수사냥꾼의 목숨을 구해주기라도 하면 거래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소린가? 영업을 발로 뛰라는 이야기라면 사절이야."

"머리는 이제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가슴은 아직까지도 내키지 않지? 제 버릇 개 줄 수 있겠어? 그럼 그렇게 오래오래 살아라. 내가 먼저 저승에 가서 기다릴 테니까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다가 오라고."

"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런 말을 듣기 싫으면 나보고 제발 물건을 팔라고 보채지 말든가. 쳐다만 봐도 얄미워서 죽겠는데 너 같으면 거래하고 싶겠어?"

말하다 보니 짜증의 정도를 넘어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화를 내게 되었다. 제임스와 보부상들의 기운을 흡수한 부작용도 있겠지만 영욱으로서는 속에 있던 말을 내뱉은 거라서 그런지 일종의 카타라시스를 느끼며 가슴이 후련해졌다.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얌체 짓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냐?"

"네가 나한테 한 짓을 아직도 모른다는 말이지? 또 말해 줘?"

"그, 그건 그냥 상인들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보편적인 상술일 뿐이야."

"난 보편적인 걸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 아직도 그걸 모르겠어?"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자꾸 어딜 쳐다보는 거야? 내가 그렇게 우스워?"

"응. 우스워."

영욱이 웃는 이유는 화리를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 지금 화리의 울 것 같은 표정과 반응 때문이었다.

"이젠 정말 인격적인 모욕도 서슴지 않을 거야?"

"등 뒤에서 환수가 몰래 접근하고 있는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데도 네가 사퍼모어가 맞긴 해? 끼고 있는 아이템이 아깝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망을 치는 것도 상대의 접근을 알아차릴 때나 가능한 거야. 가늘고 오래 사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줄 알아? 네 말대로 약육강식의 세상인데 말이야."

영욱은 화리가 끼고 있는 아이템이 짝퉁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상인이라면 위험을 미리 알려주는 경보 아이템이 있을 것 같은데 이 순간은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상인이라서 싸우지 않겠다는 걸 자꾸만 몰아붙일래?"

"상인은 목숨이 서너 개라도 되냐? 내 부하들은 다들 눈치를 채고 전투 준비를 하는데 너만 아무 것도 모른 채 소란을 떨고 있잖아. 그럼 접근하는 환수의 공격 목표는 누가 될까?"

"자꾸만 헛소리를 할래? 위험을 알려주는 경보 마법 아이템이 녹색을 나타내고 있어. 그러니 반경 100미터까지는 안전하다는 소리지. 그런데 자꾸만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해서 사람을 바보로 만들 거야?"

"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니까 그 마법 아이템이 물속을 탐지하지 못하는 싸구려인 모양이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건 땅속에서 접근하는 위험도 감지하는 고급 경보 아이템이야. 그러니 물속을 탐지하지 못할 리가 없어."

"또 누구에게 속아서 샀군. 내 말이 거짓이라고 여긴다면 10초만 그곳에서 머물러 봐. 그럼 알게 될 테니까."

영욱은 그 말을 남기고 홍천강에서 신속하게 물러나기 시작했다. 백오기사단은 말할 것도 없고 은영과 소희도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이동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화리는 더더욱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흥! 내가 머물지 못할 줄 알았다면 그건 오산이야. 십, 구, 팔, 칠, 육, 오, 사, 삼, 이, 일! 봐, 아무 일도 없잖아."

우지직.

꺄아악.

화리는 30센티미터 두께로 꽝꽝 얼어붙은 얼음이 마치 살얼음처럼 깨져서 비명을 지른 것이 아니라 영욱이 소환한 포크의 기계 삽이 자신을 향해서 빠르게 짓쳐들었기 때문이다.

화리는 심화 동작 잔상권에 의해서 뭉개지기 직전에 탈출용 마법 아이템의 도움으로 짧은 거리의 공간 이동에 성공했다. 하지만 잔상권이 노린 것은 화리가 아니라 얼음 속에서 긴 수염을 뻗어서 화리를 노리던 금강누치였다.

쾅!

금강누치는 금강錦江에 사는 누치를 의미하는 금강 누치가 아니라 몸이 금강석金剛石처럼 단단한 누치 환수를 의미했다. 물론 2QB 세상에서 살다가 영욱을 노리고 이곳으로 넘어온 녀석이다. 아니나 다를까 잔상권과 충돌한 녀석의 수염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젠장! 이번에는 어마어마하게 단단한 녀석이다. 다들 강에서 멀리 떨어져."

영욱은 ULM으로 코팅되어 있는 기계 삽이 오히려 찌그러지기까지 하자 큰소리로 부하들에게 금강누치가 휘두르는 수염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잉어 과에 속하는 누치는 수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금강누치의 수염은 무려 10미터를 넘었고, 강하면서도 유연해서 마치 채찍을 보는 듯했다.  

상대가 만만치 않음을 느낀 영욱은 부하들과 함께 신속하게 뒤로 물러났다. 괜히 강한 상대와 싸워서 죽음을 자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이지만 물속에서 사는 녀석이니까 밖으로 기어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물론 강력한 환수니까 혹시 밖으로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영욱에게는 그게 유리할 테니 피하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추후에 벌어진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쳤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아?"

"맞아요. 공기가 녀석의 몸에 닿는 순간 물로 변해버리는 것 같아요."

눈으로 보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길이가 무려 10미터에 달하는 금강누치 환수가 물 밖에서도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던 것이다. 새처럼 하늘 높이 올라가기도 하고, 급강하를 하기도 하니 영욱이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활인심방, 고치, 삼십육, 원드밀 스핀, 자갈 소환!"

영욱은 강변의 자갈밭에 누워서 대왕대봉을 상대로 큰 재미를 보았던 그 공격을 다시 한 번 시도했다.

따다다당.

하지만 자갈은 모두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튕겨 나오고 말았다. 소멸되지 않는다는 점만 조금 다를 뿐이지 이 녀석도 엄청나게 튼튼한 보호막을 지니고 있었다.

"다들 달아나!"

영욱은 또다시 도주를 택했다. 보나마나 자신을 쫓아올 테니까 일단은 도망치면서 보호막을 깰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보기로 했다. 

"오빠! 살려줘!"

그러나 상황은 영욱의 예상을 가볍게 벗어나버렸다. 금강 누치는 영욱 대신 손쉬운 다른 사냥감을 택했던 것이다. 가장 만만하게 보여서인지 아니면 매력적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영이 첫 번째 공격 목표가 되었고, 그녀는 영욱을 향해 도망치면서 찢어지는 소리를 질러댔다.

"젠장! 이 새낀 수컷인가? 여자를 왜 밝혀?"

난처한 입장에 처한 영욱은 악을 쓰면서 녀석을 막아섰다. 잔상권과 잔상각을 최고로 강하게 구사하면서 녀석의 위험한 수염들을 걷어내는데 주력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녀석으로부터 의념이 흘러들어왔다.

-그래, 수컷이다. 네 녀석이 내 신붓감들을 죄다 죽였으니 너도 네 여자들부터 잃게 될 것이다.

-어라? 말을 할 줄 아는 놈이었네. 아무튼 물고기 주제에 하늘을 날다니 너무하는 거 아냐?

-너 혹시 바보 아냐? 물고기가 물속에서만 사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미친 거야?

-맞아. 2QB 세상이란 뭐든지 가능한 곳이지. 그 세상에서 온 네 녀석이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일 것이고.

영욱은 고정 관념이 무너지는 소리를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지렁이가 땅속을 뚫으면서 자동차처럼 빨리 달릴 수 있는데 물고기가 하늘을 날지 못할 리 없는 것이다.

-바보!

-그 대신 지금은 살짝 무리하고 있겠군. 

-잘 아는군. 그래서 네 녀석을 쫓지 않고 네 애인을 쫓은 거지. 물론 결과는 네 녀석을 죽이게 되는 거니까 나쁘지 않지.

-이봐! 우리 싸우지 말고 말로 해결하자.

-내 신부들을 몽땅 살려서 돌려준다면 오늘 하루 정도는 살려둘 수도 있지. 하지만 이미 다 죽어버렸으니까 당연히 협상은 없다.

금강누치는 은영 대신 영욱에게로 천천히 날아오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수염 채찍을 하늘이 가득 찰 정도로 현란하게 휘두르면서.

-조금만 기다려 봐. 전부 다 돌려줄 수는 없지만 절반 정도는 가능하다. 그러니 오늘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우리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네 녀석이 내 신부들을 모조리 물 밖으로 걷어내는 걸 이 이 두 눈으로 분명히 보았는데 어디서 거짓말을 하려는 거냐?

-한심하군. 네 신부들이 보통 물고기들이라고 생각해? 물밖에 나가서 겨우 10분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약해빠진 신부들에게 너의 그 강력하고 우수한 유전자가 가득 찬 정액을 뿌릴 생각이었나?

-흥! 아부한다고 해서 너를 살려주진 않아.

영욱의 파격적인 아부와 칭찬에 금강누치도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네 신부들의 절반을 확실하게 살려서 돌려주겠다. 그러니 우리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싫다. 네 녀석이 괘씸해서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좋아. 홀아비로 늙어죽고 싶다면 나를 죽이든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는 있지만 금강누치 환수가 영욱을 노린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것은 그도 영욱이 삼킨 환수들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다.

-내 신부들이 멸종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당연히 또 몰려오겠지. 하지만 이번 피의 페스티벌 기간은 아닐 테지.

-맞아. 다음에는 네가 없을 테니까 방해받지 않고 자손을 퍼뜨릴 수 있게 될 거다.

-그런데 어쩌지? 이미 절반을 강탈해간 보부상이 있는데.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야?

-고기 맛을 본 그 녀석이라면 꼭 내가 잡은 황금 누치만을 사려고 들지는 않을 거라서 하는 말이야. 

-너도 그 녀석에게 강탈당했다는 말인가?

-겉으로는 거래를 빙자했지만 거의 공짜로 넘겨주다시피 했으니 강탈당한 셈이지.

-그래도 너를 죽이겠다는 내 마음은 변치 않는다.

영욱보다 훨씬 더 강한 보부상이 자신의 신부들을 노리고 있다는 소리에 기가 죽어서인지 아니면 무리하게 하늘을 나느라고 힘이 빠져서인지는 몰라도 금강누치의 목소리 크기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러지 말고 잘 생각해 봐. 절반의 신부들이 낳은 알만이라도 부화시키면 너를 쏙 빼닮은 금강누치들이 늘어날 거잖아. 그리되면 어지간한 환수사냥꾼이나 보부상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고 말이야.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신경 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죽여야겠다.

-나를 죽이고 네 신부들을 구출할 생각이라면 그건 오산이다. 설마 내가 네 신부들이 들어있는 마법주머니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야 죽여 놓고 천천히 뒤져보면 알게 될 일이지.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녀석이군. 좋아, 그렇다면 내가 제대로 상대해주지. 하지만 쉽지는 않을 거다.

결국 영욱은 협상을 포기하고 수비일변도의 몸놀림에서 공격적인 몸놀림으로 바꾸었다. 사실 처음부터 협상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으니 그냥 시간을 끌기 위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 목적 달성은 한 셈이다. 그리고 이제는 금강누치의 채찍 공격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도 한몫했다. 그리고 공략 방법도 약간이나마 마련해 두었다.

"활인심방, 고치, 삼십육, 잔상무!"

영욱은 경시 동작으로 잔상무 초식을 시전하려고 했다. 그게 하고자 한다고 해서 쉽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99%의 심화 동작에 1% 정도의 경시 동작이 드문드문 섞이는 수준은 가능했다.

-뭐야? 그 춤은?

-닥쳐! 협상은 이미 결렬되었으니까 더 이상 말 섞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감히 내게 버릇없는 말을 하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그렇게 죽기를 원한다면 죽여주지.

-웃기고 있네. 적어도 내가 원하지 않는 순간에 죽어줄 수는 없으니 그렇게 알아라.

-이게 무슨 짓이냐? 치사하게.

영욱은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황금 누치 서너 마리를 자신과 금강누치 사이에 소환했다. 그리고 배를 압박해서 수백만 개에 이르는 알들을 짜냈다. 그러니 금강누치가 자신의 수염 채찍에 반 토막이 나버린 암컷 황금 누치를 보고서 기함을 하는 것이다. 멀쩡히 살아 있는 신부를 자신의 수염으로 죽였으니 황당하기도 했을 거고.

-네가 너무나도 쉽게 포기해버린 네 신부들이다. 목숨을 버려가면서도 나를 돕는 걸 보니 아마도 너에게 크게 실망한 모양이구나. 하하하!

-이 비열한 놈 같으니, 그녀들이 죽은 건 네 놈의 농간이잖아.

-내가 반 토막을 낸 것도 아닌데 대체 무슨 억지를 부리려는 거야?

-이런다고 네 놈이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다.

-죽더라도 네 신부들이 모두 죽고 난 다음이겠지. 그리고 혹시 내가 죽더라도 내 부하들이 너를 막아설 것이다. 그러면 쏟아진 알들을 수정시킬 기회는 없을 것이다. 강물에 쓸려서 모조리 떠내려간 다음일 테니.

-웃기고 있네. 수정시키는 작업이야 지금 싸우는 동안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젠장! 나를 무시하다니, 싸움에만 집중하란 말이다.

영욱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실상은 금강누치가 쏟아진 알들에게 정액을 뿌려서 수정시키는 것을 보면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는 자존심이 상한 흉내를 확실하게 내면서.

-네 녀석 정도는 수염 하나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너는 헛수고만 한 거다.

-겨우 몇 마리 수정시킨 걸 가지고 자랑이냐. 좋아. 얼마나 정력이 좋은지 어디 구경이나 해보자.

영욱은 누치를 열 마리 단위로 던져 넣으며 잔상무를 계속해서 추어나갔다. 마법주머니에서 황금 누치를 꺼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반면 금강누치가 자신의 신부들을 죽이지 않으려는 노력은 상당히 어려웠다.

수염 채찍으로 반 토막을 내지 않는 일이야 그리 어려울 리 없지만 자신의 강력한 보호막에 닿아도 안 되는 상황이니 일일이 피해야만 했다. 그리고 수염 채찍을 동원해서 안전하게 물로 돌려보내는 일도 해야 했고, 알들이 방출되는 것에 맞춰서 정액도 뿌려줘야 했다.

그러나 영욱이 던져대는 황금 누치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자 금강누치는 여러 가지 일에 정신없이 몰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반면에 영욱은 좀 더 나은 조건으로 싸움에 임할 수 있었다. 애써 잡은 황금 누치들이 아깝긴 하지만 금강누치를 처리하지 못하면 어차피 살아 돌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 아끼지 않고 마구 뿌려댔다. 

그 숫자가 늘어날수록 영욱에 대한 공격의 집중력도 떨어지고 금강누치가 다른 일에 쏟아야할 정력의 소모량이 늘어났다. 물론 영욱도 해야 할 일도 하나 늘긴 했다. 그것은 바로 수정된 알들을 염동력으로 챙겨야 하는 것이다. 

수정된 알에서 느껴지는 상당한 량의 생명력이 영욱의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여차하면 다시 인질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빠르게 소모되는 유나를 보충하는 용도로 수정란들을 연신 삼키는 작업도 잊지 않았다. 물론 금강누치는 당면한 일들만으로도 정신이 없어서 그러한 영욱의 행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달리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김호진은 백오기사단의 기운을 뽑아서 영욱에게로 전달하기 시작했다. 기운을 제공하는 사람들 중에는 당연히 은영과 소희도 있었다.

백오기사단과 두 여자들은 영욱이 염동력으로 보내주는 황금누치 수정란들을 연신 삼키면서 부족한 기운을 보충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금강누치의 정액에 의해 수정된 알들은 충분한 영양가가 있었다.

"활인심방. 고치, 삼십육, 원드밀 스핀, 좀 더 작은 바위 소환!"

영욱은 유나를 생산하기 위해서 다시 회전을 시작했다. 사실 금강누치가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는 이상 굳이 기계 삽과 수염 채찍을 부딪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갈들과 함께 황금 누치들까지 포탄처럼 발사되기 시작하자 금강누치는 기함을 했다.

-비겁한 놈!

-지금 목숨을 걸고서 싸우고 있는데 정당함과 비겁함이 어디 있어?

-내가 네 여자들을 이런 식으로 취급한다면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까?

-네 신부들을 살려서 곱게 돌려준다고 했는데도 거절한 놈은 바로 너야. 그러니 황금 누치들의 참사에는 네 놈의 책임이 더 커.

-터무니없는 조건을 걸기에 거절한 것뿐이다.

-터무니없다니? 살려달라는 게 터무니없는 조건이라면 대체 뭐가 터무니가 있는 조건이냐?

-네 녀석이 내 신부들을 포획한 순간 이미 협상의 여지는 사라졌다.

둘은 수염 채찍과 기계 삽으로 부딪치는 대신 말로써 열심히 부딪쳤다. 영욱은 자갈과 황금 누치를 발사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금강누치는 이를 처리하고 정액까지 뿌리느라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럼 불평하지 말고 나를 죽이는 데나 집중하라고. 알겠어?

-흥! 네 녀석이 삶을 연장시키기 위해서 던질 수 있는 내 신부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 그러니 네 목숨도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아둬.

-인간이야 어차피 시한부의 삶을 살다가는 존재지. 그러니 그런 위협쯤이야 별로 두렵지도 않아.

-눈앞에서 네 여자들이 죽어가는 꼴을 보면서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기로 하자.

-이런 말을 하면 실망스럽겠지만 저 여자들은 내 여자가 아니다. 네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인간은 단 한 명의 여자와 해로偕老하는 존재다. 너와는 다르지.

-겨우 한 여자를 거느리는 존재라니 실망스럽군. 아무튼 여자들의 마음이야 내가 전문가라고 할 수 있지. 저 여자들 모두가 너를 신랑감으로 여기고 있으니 너도 나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다.

물고기 주제에 별의별 소리를 다했다. 물론 영욱에게 정신적인 압박을 주겠다는 의도로 뱉은 말이겠지만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세 여자의 표정이 확 바뀌는 걸 보니 엉터리 전문가는 아닌 듯했다.

-내가 죽으면 어차피 다 소용없는 것인데 무슨 고통이 있겠니? 아무튼 너는 네 신부들이나 잘 챙겨라.

-아직도 남았냐?

-절반이니까 500마리가 조금 넘지. 이제 300마리쯤 던졌으니 아직 200마리의 여유는 있다.

-인간치고는 제법 오래 힘을 쓰는구나.

-이 정도야 밤새도록 힘을 쓸 수도 있지. 

-겨우 그 정도의 위력으로는 밤새도록 공격해봐야 어림도 없다.  

-흥! 네 녀석의 보호막도 제법이긴 하지만 대왕대봉 녀석의 보호막처럼 결국은 뚫리고 말 것이다.

영욱은 아직도 이 금강누치의 보호막을 뚫을 방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녀석의 말대로 견제용으로 던지고 있는 황금 누치가 떨어지면 끝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 대목에서 대왕대봉을 들먹인 것은 녀석의 반응을 보기 위함이었다. 혹시 쓸모 있는 정보라도 뱉을지 모르니까.

-네 녀석이 대왕대봉을 해치운 녀석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나를 그와 동급으로 본다면 오산이다.

-대왕대봉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그걸 어떻게 알았지?

-그 녀석과는 친구 사이라서 서로의 기운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지.

-환수들끼리도 우정이 존재한다니 놀랍군.

영욱은 대왕대봉의 이야기를 꺼낸 보람을 느꼈다. 악착같이 자기를 잡아먹겠다고 달려드는 데에는 신붓감 포획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우정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공동 사냥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그렇다고 봐야겠지.

-대왕대봉이 사냥감을 물로 내쫓으면 네 녀석이 물속에서 협공하는 방식이겠군. 그래서 동업자를 없앤 나를 기어이 죽이겠다는 것이군.

-건사해야할 자식들이 많으니 아무래도 손쉬운 사냥을 선호하는 편이지. 그런 의미에서 너는 더 이상 숨을 쉴 자격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대왕대봉의 역할을 해주면 될 거 아닌가? 뭘 그렇게 세상을 팍팍하게 살려고 해?

영욱은 이제 황금 누치의 재고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라서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남발했다. 그 말을 해놓고 자신도 우스워서 피식 웃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다급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하하! 살고 싶어서 별의별 공약空約을 다 거는군. 한줌도 되지 않는 네 녀석들이 무슨 수로 몰이사냥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그것도 환수들이라면 누구나 꺼리는 물속으로 말이야.

-몰이사냥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미끼가 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적어도 피의 페스티벌 기간 동안은 너처럼 나를 노리는 환수들이 많이 나타날 거 아냐?

-그보다는 너를 삼키는 것이 훨씬 더 영양가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 얼른 내 입속으로 들어오렴.

-그럼 다른 녀석들을 잡아먹고 나서 제일 마지막에 나도 삼키면 되잖아.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야.

-솔깃한 제안이긴 하지만 이제는 너무나도 많은 내 신부들이 죽었다. 그러니 원수인 너의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제는 던질 황금 누치도 다 떨어진 영욱은 마지막으로 격장지계를 사용하기로 했다.

-쯧쯧쯧! 이제 보니 한심한 녀석이었군.

-지금 날더러 한심하다고 했나?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네 친구 대왕대봉이 없으니 앞으로는 너의 사냥도 힘들어지겠지. 그리고 너를 노리는 다른 환수들로부터도 예전처럼 안전할 수 있을까? 게다가 네가 수정시킨 알들도 도둑들로부터 지켜야 하잖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네가 혼자의 힘으로 피의 페스티벌 기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보지는 않는다. 

-그래도 너와 타협하지는 않겠다.

-나의 노예가 되면 2QB 세상으로 살아서 돌아갈 수도 있는데, 어때?

영욱은 살려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오히려 노예가 되라는 강요를 남발했다. 어차피 이판사판이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영욱을 향해 달려들던 금강누치가 잠시 공격을 멈추기까지 했다. 

-환수가 인간의 노예가 되다니? 너 지금 나하고 농담하려는 거지?

-그래서 온 거 아니었나?

-정말 돌아버리겠네. 나는 그저 대왕대봉의 기운을 따라서 온 것이다.

금강누치의 반응을 보자면 인간이 환수를 노예로 삼았기 때문에 자신이 타깃이 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환수의 기운을 쫓는 다른 환수가 연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가능성이 높았다.

-노예가 되기 싫다면 죽어야지. 아무튼 보호막도 얼추 맛이 간 것 같으니 이제부터는 제대로 상대해주기로 하지. 

-흥! 이제는 던질 내 신붓감도 없는데 대체 무엇으로 상대할 거냐?

-대룡 소환!

영욱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대룡을 소환했다. 대룡이 나타나자 금강누치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뭐야? 정말로 환수를 노예로 부리는 녀석이었잖아.

-사실은 노예가 아니라 내 파트너야. 그러니 너도 저 녀석에게 삼켜지기 전에 또 다른 내 파트너가 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해 봐.

영욱의 히든카드는 의심할 것도 없이 대룡이었다. 대룡이야 죽든 말든 대룡과 함께 싸우는 게 가장 살아날 확률이 높으니까.

-놀랍기는 하지만 보호막도 없는 녀석이 어떻게 나를 삼켜? 위장에 나만큼이나 큰 구멍이 생길 텐데?

-물론 도저히 소화가 안 될 것 같은 그 보호막은 다 벗기고 나야 가능하겠지. 대룡, 공격해!

-알았어. 맡겨두라고.

화르륵!

영욱은 대룡이 또 꼬리를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예상과는 달리 대룡은 마치 자기가 진짜 용이라도 된 것처럼 입에서 불을 뿜기 시작했다. 이제야 화정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듯했다.

-우와! 제법인데?

-이 정도는 해야 대룡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안 그래?

대룡은 으스대면서 자신이 진정한 대룡으로 거듭 났음을 자랑했다. 

-그런데 저 녀석이 불에 약한 것은 어떻게 알았어?

-물에 사는 녀석이니까 당연히 불에 약하지.

-무슨 소리야? 물이 불보다 강한 거 아냐? 지금 우리 상황에선 아니라면 더 좋겠지만…….

영욱은 대룡의 선전에 농담을 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괄목상대刮目相對할 정도로 성장한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반드시 수극화水剋火인 것은 아니다. 물이 강하고 불이 약하면 불이 꺼지지만, 반대로 불이 강하고 물이 약하면 화마가 천지를 휩쓸게 되지. 천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크기와 힘이 천적 관계를 뒤집는다는 소리지.

-그럼 네가 저 녀석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군.

-당연하지. 너도 이제는 알겠지만 보호막을 가진 녀석들의 약점은 바로 전가의 보도와 같은 보호막이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사실이지. 그 소모가 더욱 빨라지도록 유도하기만 하면 끝이야.

-그런 줄 알았다면 진즉 부를 걸 그랬네.

-너 혼자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어. 

금강누치는 대룡과 영욱이 말로써 자신을 요리하려고 하자 우습지도 않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흥! 지렁이 주제에 큰소리를 뻥뻥 치다니 우습지도 않군. 그리고 둘이서 자화자찬이라니 눈 뜨고 보기가 역겹군.

-흥!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큰소리냐? 그리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했을 뿐이야.

-둘이라고 해서 내가 겁낼 줄 아느냐?

-네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다, 당연히 나는 떨지 않는다.

-그럼 좀 더 버텨보도록 해.

영욱은 금강누치의 보호막이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서 공격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영욱이 발사하는 자갈과 대룡이 뿜어내는 불길은 의외로 궁합이 잘 맞아서 이를 견뎌내야 하는 금강누치의 에너지 소모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채찍 수염이 길다고는 하지만 자갈 대포와 화염 브레스의 사거리보다는 훨씬 짧았다. 그러니 녀석이 집중 포화를 뚫고서 애써 접근하면 영욱과 대룡은 간단하게 몸을 피하면서 계속해서 원거리 공격으로 녀석의 기운을 소모시켰다. 

게다가 이제는 대룡과 영욱의 공격이 한 방향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니 쉽게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쥐새끼 같은 놈들!

-너 그러다가 뒈지게 맞는다.

-맞아. 주인님이 되실 분에게 쥐새끼가 뭐야?

-누가 저 녀석의 노예가 된대?

-그럼 뒈지도록 맞다가 그냥 뒈져버리든지…….

-죽는 한이 있어도 인간의 노예가 될 수는 없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지. 주인은 노예를 착취하는 존재라고 말이야.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어. 너도 보다시피 우리 주인님 덕분에 이젠 진정한 용이 되었잖아.

-웃기지 마. 불을 뿜긴 하지만 아직도 지렁이일 뿐이야.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용 느낌이 어느 정도는 나잖아. 안 그래?

-그럼 나도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위태위태하게 둘의 공격을 버티고 있던 보호막이 사라져버리자 금강누치도 매를 피하기 위해서 결국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사냥의 결과를 함께 나누는 주인님이시니까 강해지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뭘 사냥했는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