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이미 불가능하니까 몸으로라도 때우라고 했어.
-그럼 가정부라도 하겠다는 거야?
몸을 던지는 것과 때우는 것의 차이는 몸의 가치와 깊은 관련이 있다. 처녀는 몸을 던지고 아줌마는 몸으로 때울 가능성이 큰 것처럼.
-당연하지. 오빠가 원한다면 요리사도 마다하지 않을 거야.
-음식이나 음료수에 약을 탈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너에게 요리를 맡겨?
-맞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호호호!
매혹 초능력이 높은 경지에 오르면 그 매혹의 성분을 모아서 치명적인 미약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아직은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방법이 있음을 깨달은 은영은 좋아서 웃음을 참지 못했다.
-젠장!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야?
-오빠가 알려주지 않더라도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내용이야. 매혹 초능력의 원조는 나라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마. 호호호!
-수련에 집중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한가해?
-지금 눈이 뱅뱅 돌 정도로 회전하고 있는 거 안 보여? 그리고 이 정도의 멀티태스킹은 충분해. 여자는 원래 산만한 존재거든.
-하지만 소희는 집중하고 있잖아. 적어도 쟤한테 처지면 안 되는 거 아냐?
이번에는 영욱이 소희를 끼워 넣어서 은영의 집착을 건드리고자 했다. 하지만 영욱의 뜻대로 그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솔직히 내가 소희 언니를 이기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어. 우리 언니들 정도는 되어야 겨우 대적이 가능할 정돈데 무슨 수로 이겨?
-그럼 소희에게 나를 포기한 거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렇다면 내가 소희 언니를 이기면 나랑 결혼이라도 해줄 거야?
-적어도 너보다 못한 소희와 결혼하는 일은 없겠지.
-대답이 너무 애매하잖아. 그러니 나는 그냥 포기할래.
-그래. 잘 생각했다. 너처럼 예쁘고 기계체조 수준도 엄청나게 높은 애가 뭐가 부족해서 나 같은 놈이랑 엮이려고 하니?
요즘 들어서 영욱은 자신의 미래가 평탄하지 않을 것임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반백신감의 거울을 본 탓이기도 하지만 특히 요즘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대부분 결말이 좋지 않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에 이런 자기비하성의 말이 나오는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빙빙 도는 경우는 술에 만취했을 때처럼 제정신이 아닐 때뿐이니까.
-갑자기 웬 칭찬이야? 이래 놓고 갑자기 나를 내치려는 것은 아니겠지?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적어도 속한 적이 있어야 내침이라도 당할 수 있는 거야. 알아? 그리고 내가 쫓아낸다고 해서 네가 쫓겨날 사람이야?
-하긴 지금까지 오빠에게서 얻어낸 것만 해도 기대 이상이야.
-고마운 줄은 알긴 아는군.
-당연히 고맙지. 아무튼 예전처럼 굳이 오빠와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은 상대적으로 덜 들어. 하지만 지금처럼 꼭 붙어 다니면 얻어먹을 게 앞으로도 많을 것 같으니까 당분간은 아기 코알라처럼 붙어 다닐 생각이야. 그러니 절대로 나를 내치지마. 알겠지?
-휴! 이제야 겨우 철이 들었군.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야.
데리고 다녀주는 정도는 별로 큰 부담이 되지 않으니 영욱으로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결론도 결론이지만 점점 더 강도를 더하는 은영의 애교와 콧소리를 견뎌내기가 그리 수월치 않았기 때문에 한숨이 절로 난 것이다.
-난 다시 집중할래. 그러니 이제부터는 소희 언니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 그래야 공평하니까.
-나도 집중해야 한다는 거 몰라?
-그럼 이야기를 짧게 끊고 집중해. 그럼 수고해. 호빠.
-호빠? 호구 오빠?
-맞아. 호호호!
영욱이 내ㅤㅉㅗㅈ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은영은 자신감을 회복하고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영욱이 없는 장소에서는 영욱을 호빠라고 부르길 즐기는 여자였는데 이제는 면전에 대놓고 그럴 정도로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그것은 이제 영욱에 대한 집착을 어느 정도 털어냈다는 의미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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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이야기를 그리 즐겁게 나눠요?
-너도 듣고 있었잖아.
-엿듣고 있는 줄을 어떻게 알았어요?
-알고 있었다기보다 너에게 그 정도의 능력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냥 넘겨짚은 것이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은영과 소희가 그토록 차례를 잘 지킬 수 있는 이유는 서로의 텔레파시를 엿들을 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테니.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영욱 씨의 가치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무슨 능력이 있겠어요?
-너도 이미 들었을 테니까 나한테서 배울 것 다 배우고 얻어낼 것 다 얻어내고 나면 배경태를 찾아가서 다시 사귀도록 해. 미국으로 치료하러 갔다니까 고자가 되지는 않았을 거야.
-저도 그럴 참이에요. 하지만 그때까지 걔가 저를 기다려줄 지는 의문이에요.
갑자기 배경태가 언급되자 잠시 움찔했던 소희는 금방 평온한 안색으로 돌아왔다. 그게 쇼였다는 것을 영욱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굳이 변명하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내 곁에서 머물겠다는 거야? 누구 혼삿길 막을 일 있어?
-은영과 제가 납득할 정도로 예쁘고 착한 여자가 나타나면 미련 없이 물러나 드리죠.
-그 말은 나를 끝까지 총각귀신으로 만들겠다는 소리와도 같은 말이군. 사람의 탈을 쓰고서 어떻게 너희 둘보다 예쁠 수 있어?
-요즘 말솜씨도 제법 많이 늘었어요. 좋아요. 아주 좋아요. 호호호!
서로 간에 거리를 어느 정도 두니 대화를 나누기가 오히려 더 편해졌다. 두 사람은 마치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유나는 많이 늘었어?
-유나라니요?
-유사 마나라고 하니까 짝퉁 느낌이 나기에 내가 참한 이름을 붙여 주었지. 유나도 아주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
-호호호! 영욱 씨가 개발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불러도 불러드리지요. 아무튼 유나가 나쁘지 않을 만큼 생겨나고 있어요. 덤으로 경시 동작의 수련도 잘 되고 있고요.
-열심히 해. 내 예감으로는 강자들이 줄을 지어서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 같으니까 그들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이를 악물고 노력해야 할 거야.
소희에게 하는 말이지만 영욱 자신에게 하는 혼잣말이기도 했다. 어쩌면 반백신감의 기운도 흡수한 덕분에 약간의 예지 능력이 생겼을 지도 모를 일이다.
-피의 페스티벌 때문인가요?
-맞아. 환수사냥꾼이든 환수든 간에 일단 누구라도 피를 흘리게 되면 그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야. 이미 피의 페스티벌이 시작되었어.
-그래도 이제는 싸우다가 죽어도 원통하지는 않을 것 같네요.
-사부님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하고 있네. 아니지, 꼭 살아서 진 씨 아저씨에게 손자라도 안겨 드려야지, 그 따위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도 마.
-호호호! 아빠가 그 말을 들었으면 정말 좋아하셨을 거예요.
-웃기지 마! 날 파문시킨 사람은 바로 아저씨야. 내가 먼저 떠난 게 아니라니까?
정색을 하면서 아니라고 말했지만 이제 진중권을 떠올리면 서운한 감정보다는 그립다는 감정이 더 크게 느껴졌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파문당하긴 했지만 자신의 사부는 영원히 진중권 하나뿐임을 잘 알고 있었다.
-파문 이야기를 꺼내면 영욱 씨가 깜짝 놀라서 저랑 결혼하겠다고 할 줄 알았겠죠.
-가까운 사람끼리는 절대로 내뱉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어. 예를 들자면 이혼하자는 말이나 헤어지자는 말이나 꺼지라는 말 등이지.
-하지만 영욱 씨는 툭하면 저희들에게 꺼지라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가까운 사이도,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는 소리지.
-그래도 아직은 완전히 정리된 사이가 아니니까 앞으로는 그런 극단적인 말은 삼가주세요.
-그러지. 하지만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어. 풍요 속의 빈곤이라더니 딱 내가 그 꼴이네. 바다에서 목말라 죽는 심정을 이제는 알 것 같아.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운 사이니 이젠 꺼지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영욱은 두 여자가 이제는 자신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니 오히려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이제 그만 노여움을 거두세요. 그리고 영욱 씨의 신붓감을 우리 둘 중에서 택하지 않더라도 원망하지는 않을 테니까 지금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너도 이제야 철이 드는 모양이군.
-고생을 해 보니 제가 아빠에게 얼마나 철없는 딸이었는지를 알 것 같아요. 정말 제 자신이 후회스러워요.
-그래도 너한테는 배경태가 가장 잘 어울려. 너도 죽을 때까지 된장녀를 벗어날 수는 없을 거고 말이야.
-제 버릇 개 못준다고 아마도 지병持病처럼 도지기는 하겠죠. 하지만 이젠 적어도 100% 된장녀는 아닐 거예요.
-아무튼 이 여행이 끝날 때까지는 잘 지내보자고. 언제 끝이 날지는 모르겠지만.
-잘 부탁해요.
영욱은 황금 누치를 퍼 올리는 작업이 끝나자마자 또 다시 불청객이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소희와의 대화를 서둘러서 끝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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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객은 바로 예전에 영욱과 거래한 적이 있었던 그 보부상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너는 바로 제임스가 아닌가?"
"맞아. 얼굴이 조금 다를 텐데도 바로 알아보는군."
"얼굴이야 얼마든지 바꿀 수 있겠지만 눈동자는 바꾸기가 힘들지. 그런데 여기는 웬일이야?"
"지구가 넓다고는 하지만 피의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이 그리 흔한 줄 알아?"
"그렇겠지. 하지만 동계올림픽이 열리는 시기도 아닌데 이곳까지 날아오다니 정말 놀랍군."
"왕복 비행기 티켓 비용 정도야 얼마든지 챙길 자신이 있으니까 염려 마."
영욱은 제임스의 등장을 보고서 피의 페스티벌이 지엽적이고 우연히 발생하는 해프닝이 아니라 아주 대단한 사건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제임스가 이곳에 나타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 여긴 무슨 일이야?"
"그야 당연히 황금 누치를 사러왔지 무엇하러 왔겠어? 많이 잡은 걸 보니 역시 사냥 실력이 제법이군."
"안 팔아."
"저렇게 많은데 왜 안 팔아?"
"나 혼자 먹을 것으로도 부족해. 많기는 뭐가 많다고 그래."
영욱은 무조건 팔지 않겠다면서 배짱을 튕겼다. 특히 제임스와의 거래는 만족스럽지 못했던 기억이 있어서 상대가 무안할 정도로 냉정하게 말했다.
"저대로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썩어버릴 텐데?"
"이 엄동설한에 썩기는 개뿔이 썩어? 얼려두면 몇 달은 끄떡없을 테니까 다른 곳에 가서 알아봐."
"잘 아는 사이에 이렇게 박절하게 굴 거야?"
"너와 내 사이가 과연 좋은 사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어서 다른 곳에나 가 봐."
"그러지 말고 몇 마리라도 팔아라. 맛이라도 좀 보게. 마리당 10달러면 어때?"
영욱이 공격할 것처럼 으르렁거렸지만 닳고 닳은 보부상 제임스는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강하게 나오는 것이 무조건 손해라는 것을 잘 아는 듯했다.
"10달러? 지금 장난 쳐? 좋아. 마리당 10골드라면 몇 마리 정도는 팔기로 하지. 네 말처럼 맛이라도 보게 말이야."
"마리당 10골드라고?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응. 당연히 제정신이지. 한 마리에 족히 30kg은 나가겠는데 그걸로 개 사료를 만들어도 200달러는 족히 받겠다. 그러니 제정신이 아닌 놈은 바로 너야."
"그래? 듣고 보니까 네 말도 일리가 있군. 그럼 200달러를 주지."
"농담도 잘 하는군. 환수 가격이 언제부터 썩은 정어리 값으로 변했냐?"
영욱은 말로 해서는 제임스를 도저히 쫓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하기로 작전을 바꾸었다. 사실 환수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렇게 터무니없는 가격도 아니다.
"저게 무슨 환수야?"
"변종 환수니까 환수라고 봐야겠지. 안 그래?"
"그래봐야 겨우 함량 10%짜리도 안 되는데 자꾸 우길래? 마리당 250달러 줄 테니까 몽땅 넘겨."
"흥! 화리에게 넘겨도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이 받겠다. 그러니 좋게 말할 때 꺼져."
"감히 보부상을 이렇게 홀대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꺼지라는 영욱의 도발에 여태까지는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하고 있던 제임스가 발끈하고 말았다. 묘한 어감이 그의 귀를 자극했던 모양이다.
"너하고 나하고의 개인적인 거래에 보부상이 왜 튀어나와? 그리고 어디다 대고 협박이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내가 납득할 거 아냐?"
"250달러에 몽땅 넘기라는 게 너 같으면 납득이 된다고 생각해? 단 한 마리도 그렇게 넘길 생각이 없는데."
"겨우 누치 따위로 그 정도 받으면 잘 받는 거지, 뭘 더 바래?"
"겨우 누치가 아니라 황금 누치니까 더 받기를 바라는 거다. 누치였다면 잡지도 않는다. 그러니 넌 꺼져."
"보부상 연합 아시아태평양 지역 책임자인 나를 무시했으니 너를 거래자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리겠다."
둘은 협상 대신 유치한 언쟁을 이어나갔고, 영욱은 꺼지라는 도발을 남발했다. 제임스가 이상할 정도로 그 말을 싫어하니 일부러 더 사용한 것인데 결국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보기보다는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보부상 전체와도 거래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까 마음대로 해라."
"흥! 우리 보부상을 적대시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얘들아! 저 녀석을 사로잡아라."
처음에는 예전처럼 뻥을 치는 줄 알았는데 제임스가 갑자기 공격 명령을 내리더니 그가 가장 먼저 달려들었다. 아마도 나머지 스물아홉 명이 영욱과 전혀 상관없든지 보부상의 실력 행사니까 아는 사이라고 해도 도와주지는 못할 거라고 오판한 듯했다.
하지만 영욱은 제임스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내면서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흥! 웃기지도 않는 녀석들이군. 다들 공격하지 않고 뭐해?"
"악!"
"감히 우리 보부상의 일에 개입하다니 죽고 싶으냐?"
"흥! 다들 내 부하들이라서 죽더라도 개입할 수밖에 없다. 너희들은 이제 죽었다. 선제공격을 펼쳤으니까 정당방위라고 변명할 수도 없을 거다. 죄다 죽여 버려!"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가서 네 엄마한테도 일러줘라! 병신아."
으악! 아야!
제임스를 포함해서 열 명에 달하는 보부상들이 가진 힘도 만만치는 않았지만 요즘 들어서 잔뜩 물이 오른 영욱의 부하들을 당할 수는 없었다.
가뜩이나 3대 1의 싸움인데다가 은영과 소희까지도 적극 가세하자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아랫도리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래도 악착같이 버텨보긴 했지만 결국은 몰매를 맞아야 했다.
"묻어버려."
"악!"
영욱은 백오기사단에게 녀석들을 산 채로 생매장하라고 지시했다. 살려둬서 득 될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목을 바로 꺾어버릴 수는 없어서 내린 지시였다.
팬티까지 홀딱 벗긴 다음 머리만 내놓은 채로 땅속에 묻어버리면 환수들이 나타나서 얼씨구나 하면서 먹어치울 게 분명했다.
만일에 이 일이 문제가 되더라도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고 하니 당연히 구조팀을 파견해서 구해줄 거라고 믿었다고 변명하면 직접적인 살인죄는 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영욱의 지시는 순식간에 이행되어서 제임스를 포함한 열 명의 보부상들은 순식간에 홀딱 벗겨지고 손과 발은 단단히 묶이고 머리만 내놓은 채로 땅속에 파묻혀 있게 되었다. 이 추운 엄동설한에.
개개인의 수준은 사퍼모어 급이지만 괴력을 지니거나 순간 이동을 할 수 있는 초능력자는 없는 듯했다. 대부분 상술에만 특화되어 있어서 그런지 탈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제발 살려줘."
"누가 죽인다고 했어? 살려두었다가 나중에 2QB 세상이 다시 열리면 노예로 팔아먹을 건데 왜 죽여?"
"흥! 보부상을 노예로 구입할 만큼이나 간 큰 노예상인들은 없다."
"그래도 헐값에 넘기면 사가지 않을까?"
"그래도 없다."
머리만 내놓은 채로 땅속에 묻힌 제임스와 영욱은 유치한 설전을 또 다시 이어갔다. 아무리 겁을 주려고 해도 제임스의 입담이 만만치 않아서 번번이 실패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내가 노예로 부리면 되겠네. 죽을 때까지 나를 위해서 일하게 해 주마."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살려주시면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않겠습니다."
"그럼 배로 접근한 후에 헬기 타고 돌아다닐 거라는 소린가? 돈 많군."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임스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영욱의 노예가 벌써 27명이나 되는 것을 보니 자신을 노예로 부리겠다는 말이 더 이상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듯했다.
"여기서 너의 입을 막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죽어. 그러니 너를 곱게 보내줄 수는 없어. 사실 너도 그렇게 하려고 했잖아. 안 그래?"
"저는 그저 무력시위를 통해서 가격만 조금 깎을 생각이었습니다."
말은 존댓말로 바뀌었지만 제임스의 언변은 여전히 막강했다. 선제공격을 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냥 시위에 불과했다는 변명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도 죽이지는 말고 혼만 조금 내줘야겠군."
"좋은 말로 할 때 어서 나를 꺼내라."
제임스는 죽이지 않겠다는 영욱의 말에 금방 기가 살아나서는 허세를 부렸다.
"웃기고 있네. 나타나면 산천초목이 벌벌 떤다는 그 유명한 보부상인데 설마 얼어 죽기야 하겠어?"
"말이 다르잖아. 우리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서?"
"네 말대로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니까 금방 구조대를 보내지 않겠어? 그것도 귀찮으면 그냥 119에 신고만 해도 구조대가 금방 달려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제임스가 다시 반말지거리를 하면서 영욱을 협박하려고 들자 영욱도 얼른 실드를 쳤다. 얼어 죽게 되면 늦게 출동한 보부상 탓이라는 일종의 책임 전가였다.
김호진은 녀석들이 절망한 틈을 노려서 기운을 살살 빼내서 영욱에게 보냈는데 그 기운의 대부분이 협박과 궤변에 특화된 기운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투기나 공포감을 심어주는 피어와 비슷한 것이어서 상대를 효과적으로 주눅 들게 만들거나 기죽게 만들었다. 그런 기운을 빼앗아서 흡수했으니 영욱의 말이 점점 더 능글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사실과 다릅니다. 이곳을 인공위성으로 볼 수 있긴 하지만 두 세계가 겹쳐진 탓에 시간의 흐름 자체가 확연하게 다르니 구조대가 도착할 때쯤이면 저희들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어있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렇다면 또 뻥을 쳐서 나를 위협한 거였네. 그렇지?"
"사, 살려주십시오."
"상인이니까 네가 더 잘 알 거야. 이런 상황에서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거래만 무사히 끝내면 중간 과정은 아무리 험악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마리당 10골드에 사라."
머리만 내놓고 땅속에 묻힌 제임스와 그를 같은 높이에서 바라보면서 헤드 스핀을 돌고 있는 영욱 사이에서 다시 흥정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둘 다 징그러운 인간들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래도 그건 좀 곤란합니다. 상인이 손해를 보면서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가격은 제가 상인 자격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거래입니다."
"너희들의 목숨 가격이 포함되어 있는데도 비싸다는 거야?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계산 방식이군."
"얼핏 보아도 족히 1,000마리 이상 되는 것 같은데, 저희들 목숨 값이 그리 될 리가 없지요."
"누가 다 판다고 했어? 1마리만 팔아도 거래는 이루어진 거잖아."
"그 말씀은 거래하기 싫다는 소리로 들립니다만."
"당연하지. 너 때문에 이미 블랙리스트에 올랐는데 이제 와서 골드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영욱은 눈을 지그시 삼으며 세상 다 산 것 같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거래할 생각이 전혀 없으니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실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보부상들로부터 빼앗은 기운들을 소화시키느라 속이 부대껴서 그런 것이다.
"그것도 뻥이었습니다."
"하는 말마다 뻥이었군. 그렇다면 손해를 본다는 말도 뻥이겠군."
"그건 뻥이 아닙니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한 마리에 10억짜리 물고기가 어디 있습니까?"
"말 한 번 잘했다. 참치 한 마리가 무려 4억에 거래된 적도 있는데 환수 황금 누치가 왜 10억이 안 돼?"
영욱은 제임스의 말끝을 붙들고 자신이 책정한 가격에 대해서 정당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참치 한 마리가 4억에 거래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정말로 그 가격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래도 환수인데 참치보다 비싸야 하는 건 당연하잖아. 안 그래?"
"좋습니다. 그렇다면 5골드를 쳐드리겠습니다."
"9골드."
"6골드를 드리겠습니다."
"8골드."
"7골드로 하죠. 대신에 가진 골드가 부족해서 전량을 다 구매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명분과 논쟁에서 밀린 제임스가 가격을 조금씩 올리면서 최후통첩을 해왔다. 하지만 엄살을 떠는 것과는 달리 대부분을 다 넘겨 달라는 소리였다.
"좋아. 가격은 7골드로 해. 하지만 딱 한 마리만 팔 거야."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적어도 절반 정도는 넘겨주셔야 거래라고 볼 수 있지요."
"마리당 7골드라면 10마리, 8골드라면 100마리까지 넘겨주지."
"8골드에 500마리를 넘겨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제임스의 속을 훤히 꿰고 있는 영욱을 당할 수는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영욱은 정말 팔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래를 해야만 했다.
"500마리가 들어가는 크기의 마법 주머니를 선물로 준다면 500마리를 그 가격에 넘겨주기로 하지."
"그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요구입니다. 마법 주머니 하나의 가격이 1,000골드가 넘는데 어떻게 선물로 드립니까?"
"그럼 5마리를 더 얹어주지. 대신에 달러로 지불해."
"그렇다면 덤을 10마리 얹어주십시오."
"좋아. 1골드가 10만 달러, 500마리에 4,000골드니까 4억 달러군. 이 계좌로 바로 송금해. 그리고 마법 주머니도 당장 내놓고."
영욱은 일단 제임스만 땅에서 꺼내주고는 신속하게 거래를 진행했다. 제임스 역시 거래 조건이 나쁘지는 않은지 안색이 밝았다.
"마법 주머니,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4억 달러 계좌 이체도 방금 완료했습니다."
"나도 확인했어."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한국의 외환법상 외국으로부터 2만 달러 이상을 송금 받으실 경우 계좌 개설 은행의 외환계에서 간단한 소명 자료를 작성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하지만 이 정도의 거액인 경우는 보다 더 자세한 자료를 필요로 하는데 그것은 우리 보부상 조직에서 해결해드리겠습니다. 투자 목적으로 송금한 것으로 처리되겠지만 세금은 어느 정도 부담하셔야할 겁니다."
"그러지. 일처리를 깨끗하게 해주는 대가로 5마리를 덤으로 주지. 그리고 상태가 좋은 놈으로 골라갈 권리도 함께 주겠다."
영욱은 귀찮은 세무 관계에서 해방된 사실이 기뻐서 인심을 팍팍 썼다. 그 정도면 천문학적인 수입을 올린 셈이니 1달러짜리 팁을 지불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진즉부터 이런 식으로 거래했으면 서로 얼마나 좋아?"
"앞으로는 그럴게. 정말 고마워. 하하하!"
거래가 끝나자 제임스의 말투가 다시 확 바뀌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그로서는 상당히 좋은 조건에 황금 누치를 구입한 듯했다. 하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일 수도 있으니 영욱으로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상태야."
"예. 대장님."
"다른 녀석들도 꺼내줘라. 정확하게 515마리를 챙겨 가는지 확인하고, 나머지는 이 마법 주머니에 챙기도록 해."
"예. 대장님."
거액의 외화 송금 사실까지도 간단하게 처리할 정도라면 보부상 조직이 영욱의 상상보다는 훨씬 더 강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고 있다는 말도 사실인 듯했다.
만일 제임스 등을 죽이는 식으로 처리했다면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게 틀림없다. 아무튼 거래가 잘 끝나게 되었으니 영욱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영욱에게는 환수보다 처리가 훨씬 더 까다로운 게 바로 사람이었다. 하지만 4,300억에 달하는 거액을 한꺼번에 벌었으니 마음을 졸인 것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사실 너무나도 큰돈이라서 얼떨떨하긴 하지만 능력 있는 아버지 득환이라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2013년 전국 땅값의 실제 거래가 총액이 무려 9,000조에 달한다. 그러니 지금 영욱이 벌벌 떠는 이 큰돈도 따지고 보면 0.048%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거래인 셈이다. 물론 쓸모없는 산과 임야를 주로 사게 될 것이니 면적으로는 1% 이상 될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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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으로 4억 달러의 입금 사실을 실시간으로 확인한 득환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이 새끼, 정말, 어디 가서 은행이라도 턴 거 아냐?"
"사돈, 무슨 일입니까?"
"제 통장에 4억 달러가 입금되었네요. 아마도 외환은행을 턴 것 같습니다. 사돈."
"예? 4억 원이 아니라 4억 달러라고요?"
"예. 이 자식이 이젠 아주 국제적으로 노는 모양입니다. 하하!"
"돈을 번 것도 놀랍지만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해서 그렇게 큰돈을 벌 수 있었는지가 궁금하군요."
"저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지만 사돈께서는 대충이라도 짐작이 가는 표정입니다만."
두 사람은 여전히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이박삼일 동안 계속해서 마실 계획이었으니 아직도 함께 있을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마침 이야깃거리가 슬슬 떨어져가던 중이었는데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영욱을 안주삼아 씹으며 다시 술잔을 힘차게 부딪쳤다.
"드림헌터들에게 돈이 될 만한 거라면 환수 사냥뿐인데 대체 뭘 잡았기에 그리 큰돈을 벌었는지는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군요. 소희, 얘도 도통 전화를 하지 않으니 알 길이 없어서 답답하군요."
"요즘 젊은 사람들이 다 그렇지요. 그리고 산악 지역에는 아직도 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이 많으니 조금 더 기다려 보십시다."
"제가 너무 예뻐하기만 하고 버릇없이 키웠나 봅니다."
"그건 영욱 그 녀석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그쪽으로는 꽤나 소질이 있는 모양입니다."
"4억 달러라면 그냥 소질 정도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진중권은 박득환이 보여주는 스마트폰의 통장 내역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실 돌아가신 그 녀석의 조부께서도 사냥에는 일가견이 있으셨지요. 호랑이도 때려잡은 분이시랍니다. 하하하!"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런데 주먹이 얼마나 세기에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 올무에 걸린 산군을 나무하려고 들고 갔던 도끼로 때려잡았다고 하더군요. 올무가 끊어지기 직전이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하더군요. 하하하!"
"아무리 올무에 걸렸다지만 호랑이를 도끼로 때려잡았다니 정말 대단하신 분이셨군요. 영욱이 그 어르신의 재주를 물려받았나 봅니다."
"어릴 때부터 뭔가 좀 다른 아이였지요. 한 번 삐치면 두 번 다시 안볼 것처럼 구는, 성질머리가 아주 더러운 녀석이기도 했고요. 하하하!"
농담인지 진담인지 득환의 입에서는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말들이 많으니 술을 아무리 마셔도 술이 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대쪽 같은 성정을 가진 녀석에게 억지로 결혼을 강요했으니 그렇게 사달이 났던 거군요. 에휴!"
"결혼 문제는 제가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까 사돈께서는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녀석은 결코 부모와 사부의 뜻을 거스를 아이가 아닙니다."
"이젠 그냥 순리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게 나을 듯합니다.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녀석을 통제하려고 들면 오히려 부작용만 더 커질 것 같군요."
"아무튼 그 문제는 제게 맡겨 두십시오. 그리고 또 실례지만 제 친구 녀석들을 한 번 더 불러야겠군요."
"저야 대환영이지요. 술이야 여럿이 마실수록 더 맛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술잔은 비워야 맛이고, 통장도 비우는 맛이 아주 쏠쏠합니다. 하하! 그런데 사돈께서 혹시 찜해둔 땅이 있다면 이번 기회에 함게 구입하도록 합시다."
땅 가진 친구들을 다시 호출하고 난 득환이 목소리를 조금 낮추더니 진중권에게 색다른 권유를 했다. 땅을 산다는 소리에 진중권이 유독 노심초사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던 득환이 영욱을 대신해서 거금을 집행하는 와중에 편법을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 녀석은 어차피 제 땅들이 어딘지도 모를 텐데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하하!"
"그나저나 제 딸년이 정신을 차려야할 텐데 걱정이군요."
"아직도 같이 다니고 있으니까 곧 희소식이 날아올 겁니다. 자, 건배!"
"건배!"
진중권과 박득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또다시 술잔을 부딪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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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소희는 새끼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파면서 잔뜩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귀가 간지러운 걸 보니 누가 또 내 말을 하는 모양인데."
"보나마나 언니의 아빠가 술안주 삼아서 언니를 씹고 있겠지. 안 그래?"
"아마도 그럴 거야."
영욱도 귀를 파면서 동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 내 귀도 동시에 간지러운 걸 보니까 진 씨 아저씨와 우리 아버지가 아직도 함께 술을 마시고 있나 보다."
"설마 아직도 함께 술 마시고 있으려고요?"
"이박삼일 동안 마신다고 했으니까 현실 시간으로는 아직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몰라."
"그렇다면 두 분이 우리 둘을 안줏거리삼아서 씹는 게 분명하겠군요."
영욱과 소희는 모처럼 만에 의견 일치를 보고서 빙그레 웃었다.
"젠장! 큰돈을 보내 줘도 씹고 난리야."
"부모님에게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은 실례예요."
"우리 아버지에게 한 말이야. 그러니 신경 꺼."
"말투가 갑자기 부랑자浮浪者처럼 변했어요. 나쁜 남자 흉내라면 저도 사절이에요."
"젠장! 나도 모르게 자꾸 상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까 제임스와 보부상 녀석들의 기운을 너무 많이 흡수했나봐."
영욱은 제임스 핑계를 대고 말았지만 사실 나쁜 남자 흉내를 내려다가 정곡을 찔린 것이다.
"이제는 트랜스파워 초능력도 곧잘 하시나 봐요."
"제대로 하는 것은 없어도 남의 능력을 일부나마 흉내 내는 것은 원래부터 가능했어. 그런데 부하들이 많아지니까 흉내 낼 일도 많아져서 흉내 내는 실력도 조금 늘었어."
부하들의 기운을 가져다 쓸 일이 많아졌으니 당연히 생기는 부수입인 셈이다. 부양의 의무가 생겼으니까 누리는 것도 있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제 블라인드 초능력은 어느 정도나 가능해요?"
"정확한 것은 아니겠지만 진짜에 비하면 대략 10% 정도도 안 될 거야. 그래도 이제는 유나가 넉넉하게 있으니 위력이 조금 더 강해지고 몇 번 더 사용할 수 있긴 하겠지만 아직은 초능력이랄 것도 아냐."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많으시니 정말 부러워요."
"대룡의 말에 의하면 하나를 깊이 파는 것보다 잡다한 것을 얕게 파는 것도 꽤 의미가 있다고 하더군. 나도 그 말을 믿고 싶긴 하지만 그 녀석이 백 가지 재주를 가진 사람이 밥 굶는다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야."
"오늘 번 돈만으로도 밥 굶을 일은 전혀 없을 것 같던데요?"
"뭐야? 또 네 몫을 요구하려는 거야?"
돈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가자 영욱은 다시 부랑자처럼 두 눈을 내리깔면서 소희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영욱 혼자서 황금 누치를 잡은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블라인드 초능력을 사용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어느 정도 로열티를 지불해야만 할 상황이었다.
"그건 아니지만 땅을 사두고 그냥 놀릴 거라면 우리 아빠에게 조금 빌려주셨으면 해서요."
"하하!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사용하시라고 해. 나는 명의만 내 것으로 되어 있으면 충분하니까."
"고마워요."
"혹시 마음에 드는 땅이 있으면 그곳을 구입하시라고 해."
소희가 자신의 몫을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흥분해서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으니 사과하는 차원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서 소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걸 보니 진중권이 사고 싶어 하던 땅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말해요? 누구에게요?"
"당연히 우리 아버지에게 말해야지. 네 몫이니까 명의만 내 걸로 하고, 진 씨 아저씨와 네 앞으로 영구 무상 임대하는 걸로 해서 계약서를 써달라고 해."
"그래도 되겠어요?"
"사실 네 몫을 나눠줘야 하는 게 정상이겠지만 당분간은 이렇게 가자. 응?"
"제 몫은 이미 씨 마나를 나눠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그런데도 이렇게 배려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경치 좋은 곳에 펜션이라도 지으실 거래?"
소희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자 영욱은 쑥스러워서 얼른 말을 돌리고 말았다.
"그게 아니라 돌아가신 사조님께서 수련하시던 산이 보증을 잘못 서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갔는데, 워낙 금액이 커서 아빠가 평생을 일해도 되찾지 못했어요."
"누구에게 보증을 서주었는지 대충 알 것 같군."
평생 자신이 창시한 기계체조만 수련했던 사람이 보증을 서주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 대상이 딸일 가능성이 높다.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제자로 삼지 않는 관행상 사조의 딸이 바로 진중권의 아내이고, 소희의 모친이었을 것이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겠지만.
부친의 산을 그런 식으로 해먹었다는 것은 그녀의 사치가 극도로 심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소희의 겉모습은 자기 엄마를 닮았지만 속은 다행히 절반 밖에 닮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을 건 없잖아. 아무튼 구입해야할 그 산의 이름도 확실하게 알려드려."
"예. 정말 고마워요."
"네 몫이니까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저를 동료로 인정해주시는 게 더 고마워요."
"흥! 이젠 아부도 제법 많이 늘었군."
"모두 은영의 덕분이죠. 호호호! 그럼 전화 통화 좀 하고 올게요."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