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 시작!"
"광역 블라인드! 광역 블라인드!"
우당탕탕.
부상과 체력 소모가 거의 없으니 평가전은 쉬지 않고 치러졌다. 물론 유사 마나로 인한 소희의 늘어난 블라인드 능력을 체크하는 게 주된 목적이었다.
아무튼 여덟 번의 대결이 거의 동시에 펼쳐졌고, 새로운 순서가 정해졌다. 절반 정도의 순서가 바뀌었고, 다르게 이야기하자면 제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자들도 무려 절반이나 되었다. 박상태 역시 선임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아주 간단하게 고수할 수 있었다.
부상자가 하나도 생기지 않고 공정하게 서열을 정할 수 있으니 소희의 마법에 가까워진 블라인드 초능력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물론 소희는 헤드 스핀과 원드밀 스핀 동작을 오가며 계속해서 유나를 생산해야만 했다.
아무튼 소희의 블라인드 초능력은 예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해졌다. 발휘할 수 있는 횟수로 보자면 세 배 쯤 늘어났지만 위력 또한 두 배 정도는 늘어난 데다 이제는 광역 초능력까지도 가능해졌으니 산술적인 계산으로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중간에 계속해서 유나를 보충할 수도 있으니 마법의 위력이 초능력에 비해서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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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력 측정 및 서열 다시 매기기가 짧은 시간 내에 부상자 하나도 없이 끝났다. 영욱은 다소 감동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소모된 유나를 보충하기 위해서 열심히 헤드 스핀을 돌고 있는 소희에게 말을 걸었다. 영욱 역시 추가적인 씨 마나 생산을 위해서 헤드 스핀을 돌고 있는 상태였다.
-정말 대단한데?
-고마워요. 이게 모두 영욱 씨 덕분이에요.
-고마우면 앞으로 밥값이나 잘해.
-당연하죠. 맡겨 두세요.
-이건 노파심 삼아서 하는 말인데 은영에게 뒤처지기 싫으면 너도 열심히 돌아야할 거야.
영욱은 소희를 너무 많이 칭찬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자 슬쩍 은영과 비교함으로써 그녀의 노고를 애써 폄하하려고 했다.
-알고 있어요. 쟤는 은근히 독한 구석이 있어서 꽤나 오래 버티려고 할 텐데 큰일이에요.
-둘 다 만만치 않지만 나보다는 덜 독할 걸?
-이젠 그렇지도 않다는 걸 보여드리겠어요.
-말로만?
-흥! 행동으로 끝까지 보여드리겠어요.
소모된 유나가 거의 다 보충되어서 스핀 속도를 서서히 줄이던 소희는 다시 속도를 내서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영욱의 도발에 끝까지 응전하겠다는 다부진 의사 표시였다.
-좋아. 누가 끝까지 버티는지 내기하자고.
-지면 뭘 내놓으실 건데요?
-내가 질 리는 없지만 씨 마나를 한 방울 더 주기로 하지. 대신에 네가 지게 되면 뭘 줄 건데?
-원 포인트 레슨을 해드리겠어요.
-레슨이라니? 내 경시 동작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잘 하고 있는 편이지만 아직까지는 어설픈 점이 많다고 봐야죠.
-그렇다면 꼭 이겨서 레슨을 받도록 하지.
둘은 내기까지 걸면서 투지를 불태웠다. 물론 지금 돌고 있는 헤드 스핀으로 모든 승부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태도는 달랐다.
-흥! 누가 이길지 어떻게 알아요?
-무조건 내가 이긴 거야. 조금 치사한 행동이지만 내가 대봉 환수 체액을 건네주지 않으면 무엇으로 유사 마나를 만들래?
-누군 손이 없는 줄 알아요?
-그럼 잘 해보라고.
-염려 붙들어 매세요.
말은 그렇게 얄밉게 했지만 소희에게 먹을 것을 아끼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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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과 두 여자가 헤드 스핀 동작으로 회전 경쟁을 벌인 지도 벌써 24시간이나 지났다.
아직까지도 화리가 나타나지 않을 걸 보니 영욱과 백오기사단은 물론이고 은영과 소희마저도 무사하지 못한 걸로 여기는 듯했다. 어쩌면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처음 전투가 벌어졌던 그 자리에서 영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곳에서 영욱이 잡았던 대봉 환수의 사체를 챙기느라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남을 여자가 분명했다. 얄밉기 그지없지만 그래도 은근히 기다려졌다.
그것은 화리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영욱으로서는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이기 때문이다. 은영과 소희 역시 여자가 아니라 마찬가지의 개념이다. 세 여자는 영욱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들을 많이 알고 있으니까 유능한 가정교사인 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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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컬러가 휼버린의 사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킬러, 어때?"
"내가 킬러라고 부르지 말랬지."
"실수야. 컬러. 하하하!"
"휼버린, 너 까불다가 정말 혼난다."
"알았어. 하도 입에 익어서 실수였어. 실수! 악!"
휼버린은 컬러에게 옆구리를 꼬집히고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그게 웃다가 흘리는 눈물인지 아파서 흘리는 눈물인지는 구별하기가 어려웠다. 둘은 아주 오래된 친구 사이였던 것이다. 킬러가 그녀의 진짜 세컨드 네임이라는 사실도 그래서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 녀석은 정말 놀라워."
"도대체 뭐가 고위 마법사 컬러를 깜짝 놀라게 만든 거야?"
"귀걸이 아이템에 달려있는 사파이어가 미량의 마나를 생산해 준다고는 하지만 한두 번 사용하면 적어도 한 시간 이상을 충전해야 하는데 그 녀석은 어찌된 일인지 계속해서 소환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어."
"그렇다면 정신력이나 기운을 마나로 전환할 수 있는 거겠지. 꼭 마법사들만 그럴 수 있다는 법은 없으니까."
휼버린은 영욱이 수련하고 있는 기계체조를 염두에 두고 그렇게 추정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마법에 대한 재능은 거의 없는데 유사 마나를 생산하다니 놀랐다는 말이야."
"그야 우리 마법사들의 기준으로 검사한 것이니까 진실을 100%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야겠지."
"네 생각처럼 기계 체조를 익히고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과한 것 같아."
"그렇다면 그 녀석을 연구해보면 새로운 마나 생산 방법을 발견할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녀석의 귀걸이 아이템에는 입력되어 있지도 않은 메뉴인 자갈을 소환했다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야. 물론 100% 마법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초능력이라고 보기에는 소환 효율이 너무 좋았어."
두 마법사의 입에서는 영욱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쏟아졌다. 여차하면 영욱을 잡아다가 실험실의 청개구리처럼 해부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신기한 구석이 많은 녀석이니까 내가 너를 부른 거 아니겠어?"
"처음에는 녀석을 우리 둘의 공동제자로 삼자고 하기에 웃음만 나왔는데 지금은 그렇지도 않아."
"아직까지도 진중권을 사부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우리 둘만의 제자로 삼기는 어려울 거야."
"기계체조야 이미 다 배운 것 같던데 무슨 문제야? 하지만 그 녀석이 과연 우리의 계획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되고 안 되고는 하늘에 맡기고 우리는 노력이라도 해 봐야지. 안 그래?"
"마법사들 중에서는 우리가 좀 강한 편이지만 주니어와 시니어들은 대체 어떻게 상대하려고 그래?"
둘의 이야기는 이제 영욱이 아니라 앞으로의 계획으로 넘어갔다. 영욱을 잡아다가 해부하려는 게 아니라 나중에 거사를 일으킬 때 영욱을 선봉에 세우려는 것이 두 마법사의 생각인 듯했다.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공동제자로 삼으려는 계획까지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각개격파라는 훌륭한 작전이 있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이 살기 위해서 뭉칠 리 없으니까."
"네가 그들의 위치를 대부분 파악하고 있으니까 시도 자체는 불가능하지 않겠지. 하지만 한 녀석 한 녀석이 모두 감당불가의 강적이라는 사실이 문제지."
"누구라도 아킬레스건은 있게 마련이야. 여태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대왕대봉의 약점도 금방 파악해내는 그 녀석이 있으니까 잘 될 거야."
"그렇다면 녀석에게 마법은 어떻게 가르칠 거야?"
"너를 부르기 전에 녀석의 귀걸이 아이템 속에 마법서 몇 권을 넣어두었어. 물론 당장이 아니라 마법을 수련하기에 적당한 순간이 오면 저절로 작동하도록 손을 봐두었어."
사파이어 귀걸이 아이템에 마법을 장착한 사람은 헬렌 컬러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휼버린은 컬러가 도착하기 전에 영욱을 제자로 만들기 위한 조치들를 이미 취해두었던 것이다.
"그랬어?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도 못했는데 그 동안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마법서 판매만 벌써 10년째인데 그 정도도 하지 못하면 어떻게 고위 마법사라 할 수 있겠어?"
"마법서 몇 권이라면 대체 뭘 넣어준 거지?"
"그야 기초, 기본, 응용, 심화, 경시 마법서인데 기본적인 것부터 복잡한 마법까지 다 들어있는 마법서들만 골라서 넣었지."
영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크나큰 기연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게 기연이 될지 생체 실험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녀석에게 너무 기대가 큰 거 아냐?"
"터득한다고 하더라도 마나 보유량이 받쳐주지 못하면 어차피 큰 힘을 쓰지는 못해. 그리고 제조 원가야 몇 푼 하지도 않으니 손해 볼 것도 없어."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기술료가 얼마나 비싼 것인데 왜 원가가 없다고 말하는 거지?"
"그건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우리들의 작전이 성공하면 녀석이 우리 대신 싸워줄 테니까 그 정도의 지출은 해야지. 안 그래?"
"그건 그래. 아무튼 잘 주시하도록 해.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고."
"어딜 가려고?"
헬렌 컬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자 휼버린은 진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아직도 수다를 더 떨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봉 환수의 진액을 뽑아서 내다팔아야 실험 비용이 나올 거 아냐. 이번 실험을 성공해야만 강력한 마법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고."
"하지만 그건 팔지 말고 그냥 우리 둘이 흡수하자. 혹시 강력한 보호막이라도 생겨날지 어떻게 알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꽝일 확률이 99% 이상인데 차라리 골드가 낫지 않겠어?"
"나이도 있는데 골드 타령은 이제 그만하고 우리들의 몸부터 챙기자니까 그래."
"그럼 절반은 주고 갈 테니까 너는 흡수해. 나는 골드로 바꿔서 실험을 계속할 테니까."
"그러든지."
"아무튼 환수 사냥에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녀석이라서 앞으로도 얻어먹을 것은 많겠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럼 또 연락할게."
휼버린과 헬렌 컬러는 마치 오래 사귄 애인처럼 잠시 동안 진한 스킨십을 교환하면서 아쉬움을 나누다가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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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 소희 그리고 영욱의 회전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세 사람이 거의 비슷할 정도로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욱의 경우에는 염동력을 이용해서 기운을 반대로 돌리고 있으니까 실제로는 두 배쯤 빠르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영욱이 지금 유사 마나로 바꾸고 있는 기운은 비단 대봉 환수의 기운만이 아니다. 백우와 백족 환수의 기운은 물론이고 대룡의 기운과 몽구스 환수의 기운도 섞여 있었다. 그리고 토정과 화정 그리고 빙정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그러한 기운들을 띠게 된 기운들도 온통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그런데 그게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여러 가지의 기운들이 섞이니 훨씬 더 유연해지는구나. 그래서 상대 속도가 더 빨라질 수 있으니 나는 더 좋지. 게다가 유사 마나로부터 씨 마나도 조금이나마 더 많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서 더욱 좋다.'
영욱은 너무 좋아서 입이 저절로 벌어지려는 것을 꾹 참고 있었다. 특히 박상태로부터 건네받은 다양한 기운들은 기운들이 서로 뭉쳐서 단단한 덩어리를 이루거나 끈적거리는 성질로 변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지해 주었다.
박상태나 대부분의 환수사냥꾼들은 기운들 간의 성질이 다르고, 서로 밀어내는 성질 때문에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순치와 소화가 가능한 영욱의 경우에는 전반적인 성질을 유연하게 만드는데 크게 기여해서 지금 회전에서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다양하고 많은 종류의 기운들을 품고 있을수록 더 효과적이라는 소리기도 했다. 물론 제어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영욱이 생각을 하다 보니 마법사들은 이미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 당시로서는 허접하기 짝이 없는 박상태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상태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해졌으니 그 이유가 영욱에게 있을 거라 여기고서 접근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처지를 바꾸어서 생각하는 것이 역지사지易地思之다. 영욱 역시 휼버린이나 헬렌 킬러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런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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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태! 김호진을 데려와. 그리고 너도.
-악!
영욱은 둘을 불러들여서 박상태의 기운을 좀 더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이번에는 김호진의 기운도 필요했다.
-상태야.
-예. 대장님.
-네 기운을 좀 더 나눠줘야겠다.
-얼마든지 가져다 쓰십시오.
-대신 너에게도 활성화된 씨 마나를 조금 나눠주도록 할 테니 나처럼 스핀 동작을 연습하도록 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걸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
-이 은혜를 죽어도 잊지 않겠습니다. 선배님. 아니, 대장님.
박상태도 씨 마나가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 넙죽 절을 하면서 횡설수설하기까지 했다. 사실 그의 몸에 있었던 기운이니까 모를 리가 없다. 다만 활성화된 기운으로 돌려받고, 다루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렇게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선배라고 불러도 좋다. 그리고 은혜를 절대로 잊으면 안 된다. 약속할 수 있겠지?
-당연히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다짐을 받는 겁니까?
-활성화된 씨 마나를 나눠주게 되면 네가 나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 같아서 그래. 왜냐면 네 몸에는 비활성 상태의 씨 마나가 많이 들어있으니까 말이야.
영욱이나 은영 그리고 소희처럼 경시 동작의 빠른 스핀이 아니고서는 비활성 상태의 씨 마나가 쉽게 활성화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이미 활성화된 씨 마나가 주어진다면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것은 마치 숯에 불을 쉽게 붙을 수 있게 만드는 착화제와도 같은 개념이다.
영욱은 이미 잘 알고 있기에 상태에게 미리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것은 그 대가로 상태의 몸속에 있는 비활성 상태의 씨 마나를 상당량 가져가겠다는 통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상태는 영욱의 그러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서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활성화된 씨 마나를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네가 나보다 더 강해지면 그때는 나를 주인으로 받들지 못하겠다는 소리냐?
영욱은 상태의 엉뚱한 반응을 보면서 슬슬 장난을 쳤다. 씨 마나만 많다고 해서 더 강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왕보다 강한 신하의 말로末路는 늘 토사구팽이라는 것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선배님으로부터 버림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자식! 나를 감동시킬 생각이라면 대충 그 정도만 해 둬. 아무튼 너에게 씨 마나를 심어줄 계획이다. 그래야 내게도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주인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저의 모든 것은 주인님의 것입니다.
-선배라고 불러.
-예. 선배님.
상태는 반백신감이 자신의 거울로 보여준 영욱의 미래를 100% 맹신하는 듯했다. 그러니 주인이 아니라 왕을 모시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상태의 몸에 있는 씨 마나를 고스란히 남겨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상태의 말처럼 부하가 왕보다 강해지면 좋은 결과가 나오기 힘드니까 그런 사고는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게 영욱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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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진아, 왜 불렀는지 알겠지?
-악!
-상태의 몸에서 다양한 기운을 뽑아서 내게 보내도록 해라. 특히 이 기운을 중심으로 말이야.
-악!
-너도 스핀 동작이 가능하겠지?
-악! 겨우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습니다.
-좋아. 네 기운도 섞어서 같이 보내. 대신 나도 너에게 선물을 줄 테니까.
-악!
-그럼 시작해.
-예. 대장님.
이제 호진은 아주 익숙한 솜씨로 씨 마나를 포함한 박상태의 다양한 기운에다 자신의 기운을 조금 섞어서 영욱에게로 보냈다.
영욱도 이제는 유나로 전환시킬 수도 있고 그 유나를 에너지원으로 섞어서 사용할 수 있으니까 염동력이나 트랜스파워 초능력도 상당히 강력하게 구사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앞으로는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트랜스파워 초능력을 제대로 배우겠다는 게 영욱의 생각이었다.
물론 혼자만 강해지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가지고는 목숨 보전하기도 어려운 세상이니까 자신의 노예들도 함께 강해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사냥한 대봉 환수들을 다 먹어치우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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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상태의 다양한 기운들을 받아들이자 영욱의 몸속에 존재하는 기운들이 더욱더 유연해졌다. 유연해진 기운은 몸의 중심의 회전에 영향을 덜 받게 되니 그것은 곧 상대적인 회전 속도의 증가를 의미했다.
게다가 점점 더 강력해지는 염동력으로 빠르게 반대 방향으로 움직일 수가 있으니 상대적인 회전 속도는 가파르게 빨라졌다. 회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기운들이 유나로 변하는 속도 역시 빨라졌다.
마치 삶은 콩을 맷돌로 갈 때처럼 빨리 돌릴수록 생산되는 콩물이 많아지듯이 생산되는 유사 마나의 양도 늘어나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많은 기운들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기운은 역시 기계 체조로 쌓은 기운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추정이지만 은영과 소희가 큰 어려움 없이 유나를 생산하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는 확인이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상태와 호진의 경우에는 쉽게 유나를 만들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것이 추정이 아니라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반대로 영욱이 유달리 유나를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보아서 활인심방 역시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젠 유나를 저장할 장소가 필요하겠군. 적어도 머릿속은 아닌 듯한데…….'
영욱은 전환된 유나의 양이 늘어나자 유나의 저장에 대한 생각을 떠올렸다. 강력하고 활성화된 기운이라 다른 기운들처럼 혈관을 따라 흐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화약을 지고 다니는 것처럼 자체 폭발의 위험성이 있을 것 같아서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그래서 여분의 다른 기운들을 보관하고 있는 가죽들과 가죽들 사이를 제 1의 후보지로 떠올렸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약간의 유나를 흡수시키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진득한 기운이 아니라서 그런지 머물러 있으려고 하지를 않았던 것이다.
'빠른 회전으로 생겨난 것이니 동적인 성향이 그대로 남아있구나. 그렇다면 보관 역시 빠르게 회전하는 상태로 보관해야 한다는 소린데……'
지금처럼 스핀을 하고 있는 상태라면 가능한 이야기지만 평소의 몸속에 강력한 회전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가 존재할 리 없다.
'모터가 달린 기계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곳이 있을 리 없잖아. 포크에는 스타트 모터가 달려 있지만 그걸 내 몸속에 소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노 모터를 이용하는 수밖에 없겠군.'
영욱은 생체전기를 이용해서 회전할 수 있는 나노 수준의 모터를 떠올렸다. 물론 실제로도 이미 개발되어 있는 것이지만 그 원천 기술을 영욱이 알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할 것 같지 않은 것은 바로 생체 전기의 전압이 예전보다 크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공학도인 영욱으로서는 전기가 있다면 모터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전기로 전자석을 만들 수도 있고, 모터를 만드는 것은 기본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이 가슴 속에 가지고 있는 마나홀이라는 것도 그런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되었다.
'아냐. 그보다는 더 간단할 필요가 있어.'
영욱은 유사 마나의 회전을 공짜에 가까운 혈류의 움직임에 편승시킬 궁리를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전신 순환을 시키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그 자체가 회전도 아닌 셈이니까 심장 내부의 순환을 되풀이 하든지 폐순환만 되풀이하게 만들면 될 것 같았다. 그것은 그나마 회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회전할 수 있도록 혈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길은 아니지만 유나가 혈액처럼 100%의 물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니까 적당한 지점에서 경로만 살짝 바꾸어주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쉽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심장 내부의 순환은 너무 압력이 강해서 곤란하군. 그렇다면…….'
몇 차례의 실패 끝에 폐순환에다 유나를 실어보니 꽤나 그럴 듯했다.
우심실이 수축하면 유나도 혈액과 함께 폐동맥을 통해서 허파로 이동한다. 그리고 산소를 잔뜩 머금은 피와 함께 좌심방으로 가게 되는데 이때 좌심방이 아니라 우심방으로 슬쩍 경로를 바꿔서 보내면 우심실로 내려간 다음 다시 폐동맥을 따라서 순환하게 된다. 비록 그 모습이 공처럼 입체적이긴 하지만 그것도 회전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이론적인 내용도 그렇지만 실제로도 혈액의 흐름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서 어렵지 않게 가능해졌다. 허파로 간 유나들이 가슴 속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커다란 하트 모양을 형성하면서 흩어졌다가 모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염동력으로 유나의 흐름을 일일이 조종해 주어야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유나들이 알아서 자동적으로 순환했다. 그게 자기들에게도 훨씬 편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이제는 영욱도 비록 짝퉁이지만 마나홀을 가지게 되었다. 짝퉁 마나홀의 존재는 유나를 상당량까지 비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것은 비전투 상황에서 충분히 모아둔 유나를 전투 상황에서 풍족하게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영욱은 이제 남부럽지 않은 유나 부자가 되었다. 아직 마법사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황금 누치와 누치 환수
'이건 뭐야?'
헤드 스핀과 윈드밀 스핀 그리고 토마스 스핀을 꾸준히 반복하고 있던 영욱은 얼음 밑으로 무엇인가 대거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더욱 강력해진 제 3의 눈을 작동시켜서 얼음 밑을 살피니 길이 1미터에 달하는 잉어와 비슷한 황금빛 물고기들이 마치 연어처럼 상류 방향으로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색깔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누치였다. 강원도에서 군대 생활을 했던 영욱이 모를 리 없는 물고기다.
-상태야. 누치의 색깔이 황금빛도 있나?
-아뇨. 밝은 은색입니다. 선배님.
-그래? 이곳 홍천강에 사는 누치는 아주 특별한 모양이구나.
-누치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크지는 않는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박상태도 제 3의 눈으로 누치의 이동을 확인한 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전히 헤드 스핀을 하고 있는 중이니 제법 실력이 늘었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다면 하류로 떠내려간 대봉의 사체와 진액이 녀석들을 저렇게 만들었을 지도 모르지.
-그럴 지도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상당히 몸에 좋을 것 같은데 잡을까요?
-그래봐야 환수만큼이야 하겠어? 너는 그냥 유나나 만들도록 해.
-예. 선배님.
대단히 많은 황금 누치들이 영욱 일행이 있는 얼음 아래를 통해서 상류로 올라갔지만 영욱은 군침을 삼키지 않았다. 그러다가 만일 누치 환수까지도 잡아먹을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환수의 체액과 사체를 노리는 녀석들이라면 이미 환수에 가까운 녀석일 가능성도 크다는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다양한 기운들이 필요한 영욱으로서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사냥감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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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얼른 포크를 소환해서 두꺼운 얼음을 깨고는 강바닥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윈드밀 스핀을 하면서 황금 누치 떼를 아예 기계 삽으로 퍼서 강가로 던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누치 떼가 영욱의 주위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스핀 중인 은영이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서 입을 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뭐가?
-그 황금 물고기들 말이야. 걔들이 왜 오빠 주위를 떠나지 않는 거지?
-대봉 사체와 체액을 떡밥으로 뿌렸더니 죽을 줄도 모르고 계속 몰려드네. 하하하!
영욱은 황금 누치들이 마치 모기떼처럼 달려드는 광경을 쳐다보면서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정황상으로 보아 환수의 기운에 어느 정도 반응을 보일 거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집요하고도 무모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다. 아무튼 낚시가 잘 되니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걔들도 2QB 세상에서 온 환수들이야?
-그게 아니라 우리 세상의 존재들인데 대봉 환수의 사체와 체액을 먹고서 변종 환수가 된 것 같아.
-그게 어떻게 가능해? 그럼 우리도 변종 환수가 되겠네?
-그럴 일은 없을 것 같고, 보통은 같은 종류들끼리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 같던데 이 경우는 왜 이런지 나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잘 잡혀서 정말 좋다.
-우와! 오빠 정말 빠르다.
-내 포클레인 운전 솜씨야 단연 최고지.
-그게 운전이야? 경시 동작 중에서도 윈드밀 스핀 초식이지.
-스핀과 퍼내는 작업은 엄밀히 별개의 동작이라고 봐야해. 그러니까 이건 바위를 날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동작이라고 볼 수 있어.
영욱은 자신의 포클레인 운전 솜씨를 끝까지 자랑했다. 이젠 진중권과 겨루어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은영이 지적한 대로 경시 동작을 조금 변형시킨 동작이니까 여전히 윈드밀 스핀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한 표현임을 영욱도 잘 알고 있다.
-빠르게 움직이는 황금 누치들을 퍼내는 것이니 그리 간단하지는 않을 것 같네. 그런데 떡밥만으로 뭔가에 홀린 것 같은 효과가 나온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가 않아.
-그럼 내가 너처럼 매혹 초능력이라도 발휘했다는 소리야? 아니면 소희처럼 블라인드 초능력으로 얘들의 눈을 멀게 하기라도 했다는 거야?
-느낌으로는 염동력으로 물을 아주 빠르게 흘려보내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건가?
-젠장! 눈치가 귀신이군. 우리 식구가 무려 서른 명이야. 그것도 대식가들뿐이니 이렇게 기회가 있을 때 식량을 확보해야 하지 않겠어?
-누가 뭐래? 내 말은 오빠의 초능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건데 왜 갑자기 정색을 하고 난리야?
-누가 정색했다고 지랄이야?
떡밥을 마구 뿌리고 염동력도 사용했지만 은영의 매혹 초능력과 소희의 블라인드 초능력을 사용한 것도 사실이다. 황금 누치를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고 집중하다 보니 영욱은 자신도 모르게 도움이 될 만한 잡다한 초능력들을 죄다 동원해 버린 것이다.
하나하나를 살펴보자면 아직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수준의 초능력들이지만 그래도 유나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니 황금 누치를 홀려서 퍼내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는 상당한 위력을 발휘했다. 물론 여러 가지 초능력들끼리의 시너지 효과도 컸다.
아무튼 영욱으로서는 두 여자의 초능력을 도둑질한 것 같아서 매혹 초능력과 블라인드 초능력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고함을 버럭 지른 것이다.
홍천강에는 원래 누치들이 많이 산다. 떡메로 얼음을 내려쳐서 얼음 아래에서 졸고 있는 누치들을 기절시켜서 잡는 게 보통의 누치 잡는 방법이다. 하지만 영욱은 아예 포크의 커다란 기계 삽으로 퍼내는 걸 택했다.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작업했다. 그리고 잔상의 숫자가 무려 다섯 개나 되니 황금 누치들이 줄을 지어서 하늘을 날아 오른 다음 강가에 착륙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그 모습이 계속해서 이어지니 잘 만들어진 아치형의 다리처럼 보였다.
-오빠! 지금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거 아냐? 아니면 찔리는 거라도 있어?
-바쁜 사람에게 자꾸 시비 붙을 거야? 너는 지금 이게 쉬운 일로 보여? 집중을 흩트려서 실수하는 꼴을 보고 싶다는 거야? 그리고 내가 지금 지랄로도 부족해서 발광發狂까지 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아무튼 오빠는 놀라운 존재야.
-뭐가 또 불만이야?
-나보고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무니까 하는 말이야.
적반하장을 능가하는 영욱의 대응이 은영의 입을 다물게 만들고 말았다. 평소라면 솔직하게 인정하든지 사과하고 말 일인데 이렇게 강하게 부정한다는 것은 정말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은영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매력 초능력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나 그렇겠지. 하지만 고수들은 다 아니까 오히려 더 반감을 살 수도 있음을 명심해. 나 같으면 책을 많이 읽거나 사색을 자주 해서 진짜 매력으로 승화시킬 텐데 너는 늘 외모와 교태에만 신경을 쓰니 그 대단한 매혹 초능력이 아깝다.
-나도 잘 알아. 하지만 요즘 책 읽을 시간이 어디 있어?
-그럼 명상이라도 하든가.
-아무튼 오빠도 좀 이상하다는 것만은 알아둬. 그게 뭔지 소희 언니는 벌써 아는 것 같은 눈치고 말이야.
은영은 영리하게도 소희를 끼워 넣었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빨리 항복하라는 의미였다.
-그래, 고백할게. 네 매력 초능력이랑 소희의 블라인드 초능력을 조금 훔쳐서 사용했다. 겨우 10%도 안 되는 짝퉁이지만 누치를 잡는 데는 꽤나 큰 도움이 되네. 하하!
-호호호! 어쩐지 과도한 반응을 보이더니 그랬었구나. 그래도 미안한 줄은 아는 모양이지?
-그래서 자발적으로 씨 마나를 나누어 주었잖아.
-우웅! 그래서 더 슬퍼. 사실 내가 좋아져서 선물로 주는 줄 알았거든.
은영은 콧소리까지 내면서 애교를 떨어댔다. 은영의 착각이지만 설명도 없이 귀중한 씨 마나를 나눠준 것은 오해하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그럼 소희도 좋아서 주었게? 그리고 상태와 호진도. 그렇게 나를 양성애자로 만들어 버리면 기분이 좋아?
-그래도 내가 처음이었잖아.
-너에게서 배운 경시 동작 덕분에 대왕대봉으로부터 살아났으니 그런 면도 없지는 않지. 하지만 동료 이상은 절대 아니니까 이상한 로맨스는 꿈도 꾸지 마.
-동료라고? 그래도 이제는 노예가 아니라 동료라니 그나마 다행이네.
은영은 계속해서 말꼬리를 잡으며 영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동안 쌀쌀맞게 굴기만 했던 영욱과는 조금 달라졌다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네가 남의 노예나 할 성격이야?
-예쁘니까 노예는 좀 그렇잖아.
-너보다 더 예쁜 애도 옆에 있잖아.
-몸매는 내가 더 예쁘다고 오빠 입으로 말했잖아.
-이제 보니 개그 프로를 너무 많이 봤잖아. 여기서 그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은영의 말투가 개그맨의 그것을 닮아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영욱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결국 은영도 장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말까지 멈춘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오빠는 남의 것을 훔쳐 배우는 데는 타고난 것 같아. 이런 사람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내가 직접 오빠에게 기계체조를 가르쳐야 했는데 정말 아깝다.
-네 둘째 언니는 그런 말을 안 했어?
-무조건 붙잡아야 한다는 말은 했는데 그런 추상적인 말로는 구체적인 것을 알 수 없잖아.
-또 그런 말 쓴다. 무조건이라고 붙잡으라고 했다면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는데 너 혹시 바보 아니니?
-그때는 오빠가 이 정도로 자신의 행동이나 말에 확실하게 책임지는 사람인 줄은 몰랐지.
영욱이 껄떡거리는 것을 딱 한 번만 눈감아 줬으면 이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은영 역시 후회막급後悔莫及인 듯했다.
-넌 대체 눈을 뒀다가 어디에 쓰는 거니? 그것도 예쁜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옛날에는 오빠가 이 정도로 멋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씨앗 상태일 때야 모든 게 부족할 수밖에 없지. 아름다운 나비도 예외 없이 징그러운 송충이 시절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
-아무튼 잘났어. 그리고 이젠 언니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를 거야.
-왜? 언니가 몸이라도 던지라고 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