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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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소설 (구:아지툰 소설) 에서 배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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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는?"

"대룡이 돌아가기 전에 혹시나 해서 파두라고 했는데 이럴 때 보면 내 선견지명이 보통이 아니란 말이야. 하하!"

"또 자뻑이야. 어서 안내해."

"따라와."

영욱은 으슥하고 음침한 곳으로 은영을 데리고 갔다. 남들이 보면 몰래 데이트라도 하려는 것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만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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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은 가로세로 각각 100미터에다 높이 2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지하 동공을 파놓고는 자기의 세상으로 돌아갔다. 

영욱이 백오들의 기운으로 만든 여러 개의 광구를 허공에 띄워서 지하 동공 내부를 밝히자 은영은 그 놀라운 광경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으슥한 지하에서 둘만의 밀회密會를 즐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혼자 얼굴을 붉히고 있던 기억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녀도 나름 무술을 수련하는 지라 다른 생각이 들 리 없었다.

"우와! 장난이 아닌데?"

"대룡으로서야 장난이겠지."

"농담이라면 사절이야.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 경시 동작의 초식은 따로 없어. 기본 동작부터 심화 동작까지를 다소 거만한 포즈로 실시하는 것처럼 보일 거야. 그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초식이라고도 불러."

"그래서 경시輕視 동작이라는 거야?"

"잔소리 말고 듣기나 해. 기본 동작은 몸의 축 자체가 전후좌우로의 회전이라면 응용 동작은 수직 축을 중심으로 회전 하는 동작이 요체야. 심화 동작에서도 여러 가지 각도의 회전을 보이지만 경시 동작의 회전축은 xyz축이 아니야."

은영은 모처럼 진지하면서도 단순 명료하게 기계체조의 각 동작들이 가지는 핵심적인 원리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훔쳐 배운 것은 구결과 초식들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차원의 시간 축이라도 되냐?"

"맞아. 시간 축이라고도 볼 수 있지."

"얘가 지금 제정신이야?"

"제정신인지 아닌지는 일단 내 시범이나 보고 나서 말해."

"그러지."

은영은 평소와는 달리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기계체조 경시 동작 천상천하 유야독존 초식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기본 동작부터 응용 동작을 거쳐서 심화 동작의 초식들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녀는 그게 경시 동작이라고 주장했지만 영욱의 눈에는 별로 다르게 보이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아직 은영으로서도 미숙한 수준이고 영욱 역시 경시 동작을 알아보기에는 수준이 너무나도 낮아서 벌어지는 문제였다. 무엇이든지 간에 아는 만큼 보이는 거니까.

은영은 초식들을 여러 번 반복한 다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어때? 이제 알 것 같아?"

"솔직히 뭐가 뭔지 모르겠어. 잔상의 수가 더 늘어난 것 외에는 대체 뭐가 다르다는 거지?"

"잔상의 수가 몇 개로 보이는데?"

"세 개 혹은 네 개."

"보기는 제대로 보았네. 하지만 그건 순차적으로 생겨나는 잔상이 아냐."

은영은 헛수고는 겨우 면했다는 표정으로 잔상에 대한 설명이 돌입했다.

"그래서 시간 축을 이용했다는 말을 하려는 거야?"

"그렇게 주장하고 싶지만 아직 내 수준이 얕아서 제대로는 아냐."

잔상이면서 곧 실체이기도 하지만 심화 동작까지는 회전하는 방향으로만 순차적인 잔상이 생긴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잔상이 생겨나는 데에는 일정한 순서가 정해져 있고, 생겨나는 잔상의 위치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소리다.

반면에 경시 동작에서는 뒤에서 순차적으로 따라오는 잔상뿐 아니라 앞에서도 불쑥 잔상이 생겨날 수도 있으며 잔상의 숫자 역시 하나라도 더 많아진다는 소리였다. 그것은 평소의 은영이 세 개의 잔상을 만들기도 버거웠다는 것으로 잘 알 수가 있다.

"혹시 2QB 세상과 현실 세계의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이용한 거야?"

"나도 몰라. 하지만 수련하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어. 그런 순간들이 모여서 경시 동작을 만들어내는 거야."

"진짜 구결이 없다면 불가능하겠군."

"솔직히 나도 진짜 구결은 없어. 있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가르쳐줄 수는 없고."

"대체 시집올 생각이 있기나 한 거야?"

영욱으로서도 답답해서 해보는 소리였다. 여태까지는 쳐다보기만 하면 어느 정도 흉내를 낼 수 있었는데 경시 동작은 눈이 빠지도록 노려보았지만 알아보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가르쳐줄 테니까 정말 나하고 결혼할 거야?"

"아서라! 그게 진짜 구결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하는 말이야. 아무튼 다 보여줬으니까 이제 꺼지라는 소리는 두 번 다시 하지 마. 알겠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테니까 다시 해 봐."

"흐응! 나 정말 힘들단 말이야."

"콧소리 내지 말고 빨리 해! 꺼지고 싶지 않으면."

"아, 알았어."

영욱은 은영이 탈진할 때까지 경시 동작을 반복하게 했다. 그리고는 제 3의 눈까지 동원해서 살피고 또 살폈다. 잔상이 실체보다 먼저 진행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목표 지점까지의 도달 시간이 단축됨을 의미한다. 기계체조에서는 잔상이 곧 실체이기도 하니까 가능한 이야기다.

그리고 잔상의 숫자가 가지는 의미 또한 크다. 영욱의 입장에서는 발사할 수 있는 바위의 숫자가 크게 늘어남을 뜻하는 것이니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오빠! 나 정말 힘들단 말이야."

"쫓겨나기 싫으면 제대로 보여줘야지. 구결도 가르쳐주지 못하면서 그것도 못해?"

"내 실력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걸 어떡해?"

"조금씩이지만 실력이 계속해서 늘고 있으니까 좀 더 집중해 봐."

은영의 실력이 눈에 보일 정도로 늘고 있다는 말은 사실이다. 은영으로서는 영욱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이야?"

"그리고 예전에는 몰랐는데 네 몸매가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다. 끝내주는데?"

"뭐야? 지금까지 내 몸매만 감상하고 있었다는 거야?"

"그런 건 아니지만 유심히 보니까 보일 수밖에. 솔직히 말하자면 네가 하는 기계체조가 진소희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다."

영욱은 평소에는 전혀 하지도 않던 립 서비스까지 동원해 가면서 은영을 독려했다. 재채기가 나올 것처럼 콧구멍이 간질거리는 순간인데 이 대목에서 그만 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담도 아니다. 

"정말이야?"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그건 아니지만 잘 믿어지지가 않아서 그래."

"뭐랄까? 네 기계체조 동작에는 교태嬌態가 살짝 묻어있는 것 같아. 그래서 그게 치명적인 공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그게 바로 너만이 할 수 있는 기계체조인 것 같아."

"그렇다면 나의 매혹 초능력이 기계 체조 초식에도 스며들었나 보지. 하지만 오빠 하나도 유혹하지 못하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어?"

"아무튼 보기는 좋아. 얼른!"

"알았어."

심화 동작이나 응용 동작은 몇 번 보지 않아도 따라하는 게 가능했는데 경시 동작은 정말이지 어림도 없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보다 보니 대충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확실히 알 것 같더라도 하루아침에 재현할 수는 없는 것이니 습득할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그래서 은영을 독촉해서 보고 또 보려는 것이었다. 영욱의 집요한 요구에 은영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경시 동작을 반복했다. 

사실 은영으로서도 자신의 경시 동작이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못 이기는 척하고 영욱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기도 했다. 영욱의 시선이 자신의 몸매에 머무르는 것을 즐기기도 하고.

"오빠! 더는 못해."

"수고했어. 푹 쉬고 나중에 또 부탁해."

"더는 못한다니까."

"네 실력이 쑥쑥 느는 게 내 눈에도 보여. 너도 어차피 해야 하는 수련이니까 제발 그렇게 좀 해 줘. 부탁이야."

"아, 알았어. 대신에 먹을 것을 좀 나눠줘."

영욱이 칭찬과 아부를 곁들여서 거듭 부탁하자 은영도 거절하지는 못했다. 대신에 본능적으로 대가를 요구했다. 대가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공짜로는 절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힌 것이다.

"먹을 것이라면 육포 말인가?"

"백오 고기도 좀 챙겨 두지 않았어?"

"눈치는 정말 빠르구나. 하지만 노린내는 늑대 고기와 막상막하더라. 괜찮겠어?"

"그래도 겉보기는 백조 같아서 이왕이며 백오 고기로 먹을래."

"자, 가져가. 불로 바짝 구우면 냄새가 조금이나마 덜할 거야."

"고마워, 오빠."

"아냐. 모처럼 제대로 수고했는데 이것밖에 주지 못해서 내가 더 미안해."

영욱은 은영에게 백오 환수의 육포를 듬뿍 나누어 주었다. 

오물오물. 쩝! 쩝!

은영은 경시 동작을 수십 차례나 반복하느라고 배가 몹시 고팠는지 노린내가 진동하는 육포를 굽지도 않고 그냥 씹어 삼키면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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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심방, 고치삼십육, 좌충우돌!"

영욱은 은영을 내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경시 동작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시 동작에 적합한 구결을 찾기 위해서 이리저리 구결의 조합을 바꿔보기로 했다.

"활인심방, 고치삼십육, 양수포곤륜!"

자신에게 시범을 보이는 동안에도 은영의 실력이 가파르게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현실 세계와 2QB 세상이 겹쳐진 지금이야말로 경시 동작의 수련에 있어서 최적기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배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처럼 일단 조금이라도 몸으로 느낄 수만 있다면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배우는 것이 그렇게 쉽다면 사부 진중권도 처음부터 경시 동작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욱은 아무리 시도해도 경시 동작의 기역자도 흉내 낼 수가 없었다. 

사실 은영을 조금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없지는 않았는데 전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확실하게 깨달았다. 전투력이야 자신이 앞설 수도 있겠지만 기계 체조의 경지만큼은 백열전구 앞에 반딧불보다도 못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물론 진짜 구결이 없다는 사실도 한몫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구결이 있다고 해도 쉽게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영욱은 식음을 전폐하는 것은 물론이고 잠마저 잊고서 경시 동작의 수련에 매달렸다. 수련이라기보다는 어설픈 감이라도 느끼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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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며칠이 흘러갔지만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오랜 반복에 의해서 기본 동작과 응용 동작 그리고 심화 동작의 숙달과 진전은 조금이나마 있었다.

영욱은 졸음이 몰려드는 것을 참으면서 경시 동작의 수련에 매달렸다. 잠깐 자고 일어나면 훨씬 더 나은 컨디션에서 수련할 수도 있겠지만 코끝을 간질이면서도 결코 잡히지 않는 이 묘한 느낌을 잊어버릴 것 같아서 미친 듯이 수련에만 매달렸다. 

그러나 인간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제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영욱이라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급기야 영욱은 수련 중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기계체조의 수련을 반복했다. 마치 졸음운전을 하는 것처럼.

"어?"

그러다가 영욱은 어느 순간 느낌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생체전기의 흐름이 온통 뒤죽박죽으로 섞여버린 듯했지만 그게 결코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이제야 기대하고도 기대하던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 것이다. 아니, 다른 시간의 흐름이 공존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잠이 든다고 해서 2QB 세상으로 갈 수는 없는 상태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갈 수는 있는 듯했다. 아마도 진중권의 사부나 그의 사부 김승주도 꾸벅꾸벅 졸면서 수련을 하다가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 것을 느끼고는 그것을 이용해서 만들고 발전시킨 초식이 경시동작인 듯했다.

살짝 느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졸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깨어날 수도 없으니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눈을 깜박이는 것으로 조는 효과를 대체해 보려고 했다. 

그랬더니 효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을 깜빡이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어서 그다지 효율적이지는 못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눈은 감고 대신에 제 3의 눈을 동원하는 것인데 그것 역시도 그다지 뾰족하지는 않았다. 갖은 시도를 거듭할수록 경시 동작의 습득이 하루아침에 가능할 리가 없다는 사실만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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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려고 애를 쓰다 보니 오히려 졸음이 확 달아나버려서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애석하지만 시간이 뒤섞인 느낌은 다시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지하 동공으로 살금살금 내려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 3의 눈으로 살펴보니 바로 은영이었다.

"어서 와!"

"어떻게 알았어? 오빤 정말 귀도 밝아. 그런데 아직도 연습이야?"

"아무리 연습해도 도저히 감이 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잖아."

"그렇다면 내가 혹시 방해한 거 아냐?"

"그러지 않아도 너를 부를 참이었어."

"왜? 설마 또 시키려는 것은 아니겠지?"

영욱은 벌써 눈치를 채고 사색이 되어버린 은영을 보면서 하얗게 웃었다.

"왜 아니겠어?"

"그보다 오빠는 좀 쉬어야 해. 벌써 며칠짼 줄 알아?"

"얼마나 지났는데?"

"나흘이야."

"그래? 어쩐지 배가 무지무지 고프더라. 그럼 난 육포를 뜯어먹을 테니까 너는 거기서 시범을 보여 봐."

지지직. 우걱우걱.

영욱은 백오 육포를 잔뜩 꺼내서 발화 초능력으로 불을 일으켜 살짝 구운 다음 게걸스럽게 뜯어먹기 시작했다. 그저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만 먹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볼이 미어터지도록 많은 육포를 입에 넣고서 그냥 삼키다시피 했다.

"그게 춤이라도 되는 줄 알아? 누구는 음식을 먹으면서 구경하고 누구는 시범을 보이게."

"그래도 술 마시는 건 아니잖아. 얼른!"

"아, 알았어."

영욱이 절망하는 것을 몰래 구경하려고 지하공동으로 내려왔던 은영은 또다시 무희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사실 어지간한 춤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우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쩝쩝.

영욱은 백오 고기 육포를 연신 씹어 삼키면서도 병든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런데 졸면서 보니 은영의 동작이 훨씬 더 잘 보였다. 

'그래서 비몽사몽이라는 건가?'

영욱은 이은석 교수의 책 제목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다가왔다. 

2QB 세상도 아니고 현실 세상도 아닌 비몽사몽의 세계, 2QB 세상이면서 현실 세상이기도 한 비몽사몽의 세계, 그것이 바로 지금 영욱이 숨을 쉬고 있는 이 세상의 실체라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니 기계체조 역시 두 세계를 오락가락하면서 펼쳐야만 진수를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욱이 병든 병아리처럼 졸고 있는 것을 발견한 은영은 표정이 야릇하게 변하더니 펼치고 있던 기계체조를 슬그머니 중단했다. 영욱이 피곤에 절어서 드디어 잠이 들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오산이었다.

"뭐, 해? 계속, 하지 않, 고?"

"졸면서 무슨 소리야?"

"졸, 아야 더 잘 보, 인다는 거 너, 도 잘 알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할 거면 나 정말 화낸다."

"내가 지금 농담하는 줄 알아? 경시 동작을 계속 보여주지 않을 거라면 당장 꺼져!"

"아, 알았어. 하면 되잖아."

졸려서 말도 더듬거리며 간신히 뱉어내던 영욱이 갑자기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은영은 놀라서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혼찌검이 나고서야 다시 경시 동작의 시연에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아빠의 경시 동작을 구경하다가 졸면서 입문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떠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결도 없는 영욱이 그걸 벌써 깨달았을 리 없는데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니까 다시금 고개가 좌우로 돌아갔다. 아직 깨닫지는 못했을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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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꾸벅꾸벅 졸면서도 육포를 쉬지 않고 씹어 삼켰다. 그러면서도 은영의 춤을 정말 맛있게 감상했다. 하지만 은영의 경지도 아직은 얕디얕아서 큰 깨달음을 줄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다.

영욱이 계속해서 조니까 춤을 추고 있던 은영도 어느덧 전염되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졸면서도 계속해서 춤을 추어나갔다. 자연스럽게 몸에서 힘이 빠지고 움직이는 속도가 계속해서 바뀌니 그게 기계체조라기보다는 춤사위에 더 가까워졌다. 

은영의 춤 동작은 한없이 느려졌다가 어느새 번개처럼 빨라지고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가기를 불규칙적으로 반복했다. 

얼쑤!

영욱은 흥에 겨워서 자신도 모르게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은영과 영욱은 꾸벅꾸벅 졸면서도 잘도 춤을 추었다. 둘은 아주 가끔씩 서로를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춤을 추고 또 추었다.

어느 순간 춤을 추는 영욱의 손이 네 개로 늘어나 있었다. 발 또한 세 개에서 네 개를 오가고 있었다. 비로소 경시 동작에 입문한 것이다. 

둘은 누가 손이 더 많은지 경쟁하듯이 손사래를 치면서 춤을 추고 또 추었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두 사람의 춤사위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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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졸면서 춤을 추던 은영이 눈을 번쩍 뜨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영욱이 계속해서 씹고 있는 육포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빠! 나도 배고파."

"그럼 춤을 추면서 먹어."

"이제 좀 그만하면 안 될까? 잠깐 사이에 꽤 많이 배운 것 같은데."

은영은 불평을 토로하면서도 영욱이 건네준 육포를 입에 가득 넣고서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춤 또한 멈추지를 않았다.

"아직은 어림도 없어."

"잘하는데 뭘 그래? 이젠 나보다 훨씬 나아."

"웃기고 있네. 너보다 나아지려면 최소한 몇 년은 더 지나야할 거야."

"어라? 이젠 아부도 할 줄 아네?"

"아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야. 네가 얼마나 많이 늘었는지 오히려 네가 잘 몰라서 그래."

영욱은 이제 은영에게 꺼지라는 말을 감히 내뱉지는 못했다. 그만큼 은영의 경시 동작이 경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의 경시 동작에는 매혹 초능력이 스며있어서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에 내치고 싶은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런가? 나도 느낌상 조금 나아진 것 같긴 해. 이게 다 오빠 덕분이야. 고마워."

"그렇게 생각한다면 화끈하게 딱 한 시간만 더 추고 끝내자. 어때?"

"좋아."

영욱은 졸지 않은 상태에서도 경시 동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은영과 함께 여운餘韻을 즐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게 쉬울 리 없었다. 

반면에 은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육포를 오물오물 씹으면서도 잔상이 서너 개씩을 오가는 기염을 토했다. 그야말로 이제는 물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대봉 환수

두 사람이 다정하게 지하 동공에서 올라오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화리가 눈에 쌍심지를 켜면서 물었다.

"땅속에서 대체 뭐했어? 그것도 청춘남녀가 말이야."

"잤어."

"지금 나하고 야한 농담이나 하자는 거야?"

"오해하지 말고 들어. 그냥 잤다니까."

"닷새 동안이나 자?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화리는 춤을 같이 춘 여파로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의 사이를 집요하게 의심하고 있었다. 사실 예전의 영욱이라면 은영을 덮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니 화리의 의심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왜 말이 안 돼? 그동안 제대로 자지도 못했으니까 몰아서 잘 수도 있잖아."

"하지만 수많은 부하들은 팽개쳐 두고서 그게 대장이라는 사람이 할 도리야?"

"다들 잘 하고 있는데 뭘 그래?"

대장인 영욱이 없어도 훈련은 더 잘 진행되고 있었다. 없는 게 오히려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자칫 서운할 수도 있지만 공기처럼 진짜 중요한 것은 평소에는 굳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영욱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박상태가 좀 집요한 면이 있긴 하더라."

"원래부터 맡은 일은 꽤 잘 하는 편이야. 사람들과의 화합이 잘 되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은 그렇지도 않은 것 같던데?"

"그런가? 그렇다면 서로를 위해서도 다행이지."

"아무튼 닷새 동안이나 잤다니 얼굴은 좋아 보인다."

사파이어 귀걸이 아이템을 자신의 귀에서 떼어낸 후 심한 상실감과 번민煩悶에 시달렸던 영욱은 그 지독하기 짝이 없는 의존성依存性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신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졌다. 

게다가 졸다 얼떨결에 기계체조 경시 동작에 입문했으니 얼굴이 좋아 보이지 않을 리 없다. 뿐만 아니라 은영의 가치를 새로 발견했으니 미소가 떠나지 않는 것도 얼굴이 좋아 보이는 것에 한몫했을 것이다.

"당연하지. 미남이 되기 위해서는 숙면이 필수적인 요소니까. 하하하!"

"그 따위 썰렁한 농담이나 들어줄 기분은 아니니까 그쯤 해 둬. 아무튼 백오 가죽이나 좀 팔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팔 물건이 있어야 팔지."

"너한테는 안 팔아."

영욱은 화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호한 어조로 거절했다. 그 좋던 표정이 어느새 싸늘하게 변해있었다.

"그렇게 흥분할 일이 아니잖아. 마진의 절반을 떼어줄 테니 팔아."

"싫어."

화리가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지만 영욱은 여전히 속사포처럼 거절의 말부터 내뱉었다. 물론 끝까지 거래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조건을 조금이라도 더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함이었다.

"이 정도의 조건이면 한 장에 최소한 5골드는 벌 수 있는데 왜 싫다는 거야?"

"재료를 내가 대는 거니까 5대 5는 싫어. 6대 4로 나눈다면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하지. 물론 내가 6이야."

"말도 안 돼! 내가 파는데 물건의 원가가 차지하는 비율이 최종 판매 가격의 20%나 될 거라고 주장하는 거야?"

"그럼 5.5대 4.5로 하지. 싫으면 말고."

"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상인인 나와 똑같이 벌겠다는 거지? 그게 바로 도둑놈 심보라는 거야."

화리는 영욱이 5대 5라는 조건에는 얼른 동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혼을 빼놓는 것은 물론이고 재료비까지 확실하게 챙기려 들자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발끈했다. 

"내가 왜 아무 것도 안 해? 내가 백오의 가죽은 물론이고 백오의 기운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네가 그 가격을 어떻게 받아?"

"그래도 그 가격까지는 아니다."

"이미 팔았던 것도 소급해서 적용하자는 소리가 목구멍으로 올라오려고 하는데 꾹 참고 있다는 것만 알아둬."

"내 입장에서야 차라리 그게 나아. 모조리 소급해서 적용해 줄 테니까 5대 5로 해."

상인으로서의 탁월한 계산 능력이 아니더라도 앞으로 사냥할 환수가 훨씬 더 많을 테니까 소급 적용이라는 무리수도 기꺼이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화리로서는 상인인 자신이 물주에 가까운 영욱보다 적은 배당을 받는다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듯했다. 

"그건 내 자존심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하지만 네가 어느 정도 성의를 보이니까 그렇게 하기로 하지. 좋아. 몇 장이나 필요해?"

"다 내놔."

"웃기고 있네. 그렇게는 못해."

"좋아. 얼마나 가지고 있어?"

"총 195장이 있지만 100장 이상 내줄 수는 없어. 나도 쓸 곳이 있으니까."

"기다리는 고객의 숫자만 벌써 133명이다. 두 장이나 석 장 걸치기를 원하는 고객들이 대부분인데 겨우 100장으로는 턱도 없어."

"그럼 가격을 더 올려. 사겠다는 사람들이 100명 이하로 줄어들게 만들면 되잖아."

영욱은 5대 5의 계약이지만 자신이 여전히 갑의 위치임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손님이 몰리는 지금은 공급을 수요에 맞출 게 아니라 수요를 공급에 맞출 타이밍임을 지적하기도 했다.

"헐! 네가 벌써 그런 것도 알아?"

"한 번 보면 아는 거지 상술이라는 게 뭐 대단한 거라도 되는 것처럼 굴 거야?"

"하지만 벌써 닷새 동안 기다린 사람들도 많아. 이제 와서 정해둔 가격을 올리는 것은 무리야."

"왜 안 돼? 그리고 어차피 나를 기다린 것은 아니니까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다른 환수의 출현을 기다리면서 겸사겸사 기다린 거잖아. 안 그래?"

영욱은 예전보다 훨씬 더 예민해진 제 3의 눈에 뭔가가 느껴지는 것을 깨닫고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화리는 아직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이젠 그런 것도 알아?"

"이젠 100장도 못 주겠다. 그러니 너도 30장만 팔아."

"왜 또 그래?"

"내 부하들을 무장시키기에도 부족할 것 같아서 그래."

"부하들에게 월급은 안 줄 거야?"

"일단 살아남아야 월급도 줄 수 있는 거야."

영욱은 새로 나타나려고 하는 환수의 기세가 보통이 아님을 느낀 터라 극단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이윤지는 몰라도 상당한 기운을 가진 환수가 줄을 지어서 나타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나중에 이야기하자. 물건도 나중에 팔기로 하고. 다들 집합!"

"악!"

"그동안 열심히 훈련한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백오 가죽을 몇 장씩 더 지급하기로 하겠다. 번호 순서대로 내게로 온다. 실시!"

"악!"

영욱은 자신의 노예들에게 백오 가죽을 한 장씩 더 나눠주고, 백오의 기운도 함께 나눠주었다. 한 바퀴를 더 돌아서 두 장씩을 나눠주고, 다시 세 바퀴째가 되자 착용이 가능한 병사와 불가능한 병사로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영욱은 부하들에게 총 70장을 나누어주고 자신도 넉 장을 더 착용할 수 있었다. 진소희와 은영도 각각 석 장씩을 더 걸쳐 입었지만 여전히 날씬한 몸매를 과시했다. 맞춤형 가죽의 놀라운 효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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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팔 게 없어."

"80장을 소모했으니까 아직도 115장이 남아 있잖아."

"며칠만 지나면 모두 다 착용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이제는 안 팔아."

영욱은 반출 가능한 숫자를 점점 줄이다가 급기야 하나도 팔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질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들 보라고 하는 일종의 쇼였다. 몇 장을 겹쳐 입어도 표시가 거의 나지 않음을 보여준 것도 일종의 쇼인 셈이다.

"조금 전에 서른 장은 준다고 했잖아."

"좋아. 서른 장만 가져가. 다 큰 애가 징징거리니까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화리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영욱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백오 가죽 서른 장을 꺼내주었다. 살아남으면 부하들에게 월급을 줘야 하고, 죽으면 위로금이라도 줘야 하니까 화리와의 거래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는 입장이니까 팔지 않을 수도 없었다. 

아무튼 짜고 치는 고스톱을 통해서 반출량은 최소화시키고 가격은 최대로 올리고자 했다.

"백오 기운은?"

"이미 가죽에다 불어 넣었으니까 그냥 입으면 돼."

"환수가 나타날 것처럼 분위기가 수상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일단 판매할 서른 장의 백오 가죽을 챙긴 화리는 물건의 판매를 잠시 뒤로 미루고 일단 분위기부터 파악하고자 했다. 이제야 그녀도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 것이다.

"벌써 나타났어."

"그런데 왜 이렇게 조용하냐고?"

"큰 벌 떼 같은데 아마도 천적인 백오의 기운을 느낀 모양이야."

산 위쪽에서 수백만 마리도 넘는 큰 벌 즉, 대봉 떼가 나타났는데 의외로 차분하게 한곳에 뭉쳐서 주변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봉 환수들이 상당한 수준의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까마귀가 벌을 잡아먹어? 게다가 천적씩이나 돼?"

"흥! 까마귀는 원래 못 먹는 게 없는 새야. 너도 보았겠지만 까마귀 환수는 사람도 잡아먹잖아."

"그래도 벌은 좀 다르지 않아? 걔들도 날개가 있잖아."

"그건 네가 까마귀가 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아무튼 벌들이 나타나서 부하들에게 백오 가죽을 몇 장씩 더 나눠준 거야? 죽지 말라고?"

"그래. 어지간한 수박 크기의 큰 벌이고 독침도 무려 한 뼘이나 되는 놈들이야. 그러니까 한 방 쏘이면 바로 죽을 것 같아서 아깝지만 어쩔 수 없이 나눠준 거야."

영욱은 제 3의 눈으로 관찰한 정보를 화리에게도 아낌없이 알려주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비싼 값에 팔아버리지 부하들에게 나눠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내가 입을 것도 좀 나눠줘."

"겨우 85장 밖에 남지 않아서 짜증스러워 죽겠는데 너 줄 게 어디 있어?"

"그럼 팔아. 나한테는 1골드에 판다고 했지?"

"네가 싫다고 했잖아."

"판매해야할 물건을 내가 걸칠 수는 없으니까 제발 몇 장만 팔아."

"왜 못 걸쳐? 너, 돈 많잖아."

대봉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것만 해도 신경이 잔뜩 쓰이는데 옆에서 화리가 자꾸 칭얼거리자 영욱도 결국은 화를 버럭 내고 말았다. 지금 그녀와 놀아줄 타이밍이 아니라는 걸 저도 잘 알 텐데 집요하게 백오 가죽을 노리니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상품에 손을 대는 경우는 있을 수 없어. 그리고 동업자同業者끼리 정말 이럴 거야?"

"동업자는 무슨 동업자야? 그건 수익을 정당하게 나눌 때나 가능한 표현이야."

"이제부터는 반반씩 나누기로 했잖아."

"소급 적용하기로 한 것은 왜 그냥 슬쩍 넘어가는데?"

"좋아. 여태까지 네 물건을 팔아서 벌어들인 액수가 총 500골드야. 그중에서 내가 구입할 때 사용한 자금 80골드를 빼고 나면 420골드인데 절반은 210골드야. 나중에 줄 테니까 제발 열 장이라도 나눠줘."

"지금 내 210골드를 내놓으면 주지."

둘은 끝까지 유치한 언쟁을 이어갔다. 화리도 계약 조건이 바뀌고 새로운 거래가 시작된 이상 미수금 210골드의 지불을 미룰 이유가 전혀 없지만 영욱을 애먹이려고 외상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욱 역시 비슷한 이유로 백오 가죽을 내놓지 않았다.

"언제 벌들이 공격할 지도 모르는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주머니에서 끄집어내는 데에 시간이 걸려?"

"당연히 시간이 걸리지. 손이 그냥 쑥 들어가는 주머니인 줄 알았어?"

"그렇다면 마법 아이템이란 말인가? 아무튼 내 골드를 내놓지 않으면 더 이상의 거래는 없어."

외상값이라고 할 수 있는 210골드는 물론이고 백오 가죽 서른 장의 값도 받지 못했으니 영욱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몫을 후불로 받게 될 줄 알았다면 거액의 예치금을 걸라고 했어야 하는데 거래에 아직도 서툰 탓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은영과 소희에게는 관대하면서 나한테는 정말 왜 이래?"

화리가 슬쩍 다른 이야기로 넘겨서 영욱의 집중포화를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화리로서는 영욱이 소희에 이어서 이제는 은영에게도 다정한 시선을 보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더 이상 자신이 설 자리를 잃게 될까봐 꺼낸 이야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동안 저지른 죄는 생각지도 않고 영욱의 시선이 자신에게도 머물기를 기대하는 지나친 욕심일 뿐이다. 그것도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그냥 영욱이 자신에게 이유도 조건도 없이 그저 잘 대해주기를 바라는 개꿈일 뿐이다. 남자라면 누구나 예쁜 여자에게 이유 없이 관대하게 대하는 것처럼.

화리의 지나친 욕심이 결국은 영욱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정말 몰라서 그런 말을 해?"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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