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욱이 그렇게 판단한 근거는 휼버린이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토록 돈을 좋아한다면 지금 이 순간도 영욱과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노예 서른 명 정도가 생긴다고 해도 큰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예상인에게 팔아봐야 푼돈일 뿐이고.
"내가 400골드도 아낌없이 쓰는 걸 보았을 텐데 그런 말이 나와?"
"그 정도로는 마법 하나도 배울 수 없다면서요."
"제법 예리한 구석이 있군. 좋아, 말해주지. 그러니까 나는 부자들을 위해서 마법을 창조하던 초창기 멤버라고 봐야겠지. 아무튼 마법이 만들어진 후로는 토사구팽까지는 아니지만 이렇게 한직으로 밀려나고 말았지."
"정말 대단한 분이셨군요."
"돈의 위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건 자네도 곧 알게 될 거야."
휼버린의 말투에서 다분히 냉소적인 느낌이 들었던 이유가 바로 그 자신은 아직도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돈의 위력을 그렇게 강조하지만 그 말이 영욱에게는 다분히 역설적으로 들렸다.
"돈의 위력에 관한 이야기라면 별로 알고 싶지 않은 내용이군요. 죄송하지만 잠시 실례해야겠습니다."
둘의 진지한 이야기는 전혀 예상치도 않던 소환에 의해서 중단되어야 했다. 벌써부터 노예들이 생겨나서 영욱의 옆으로 소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게. 생각보다는 훨씬 더 간단하게 노예들이 탄생하는군."
"저도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들 따라와."
"예. 주인님."
영욱은 자신의 왼쪽 곁에 나타난 노예들을 거느리고 이미 노예가 된 자신들의 노예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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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하는 동안에도 연신 영욱의 왼편으로 소환되는 노예들이 줄을 이었다.
영욱이 박상태와 새로 노예가 된 강기수 등이 있는 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단 여섯 명만을 남기고 모두 노예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너희들은 뭐야?"
"예? 저희들은……."
"생각이 없으면 어서 꺼져!"
"예? 예."
후다닥.
영욱의 위협에 아직도 노예가 되지 못한 여섯 명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눈빛을 교환하더니 갑자기 달아나기 시작했다. 천천히 가도 잡아먹지는 않을 텐데 노예가 되지 못한 것이 뭐가 그렇게 죄스러운지 머리를 잔뜩 숙이고는 쓸쓸하게 사라져갔다.
*백오기사단 탄생
"이제부터 구호는 악이다. 박상태, 기준."
"기준!"
"3열 횡대로 헤쳐 모여!"
"악!"
우르르.
박상태까지 포함해서 총 27명이니까 아홉 명씩 나누기 위해서 3열로 세웠다. 군기가 바짝 들어서인지 다들 동작이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잘 들어라."
"악!"
"이제 자신의 나이 따위는 잊어버려라. 내 노예가 된 이상 예우해줄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악!"
"선임은 당분간 박상태가 맡는다."
"악!"
"하지만 더 강한 자가 생기면 그가 바로 선임이다. 알겠나?"
"악!"
"그리고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를 대장이라 부른다. 알겠나?"
영욱은 서른 명에 가까워진 노예들을 노예가 아니라 부하로 취급하기로 했다. 그게 이들이 자신의 노예를 자처한 진정한 이유임을 알기 때문이다.
사실 영욱도 군대 시절 내무반장을 해본 경험이 있으니 이럴 때일수록 단호하고 확실한 원리원칙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교통정리를 하는 것이다.
"악!"
"따라서 너희들은 내 노예가 아니라 내 병사들이다. 목표는 기사로 키우는 거지만 아직은 다들 약해 빠졌으니 그냥 솔져로 만족해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드림 솔져겠지. 다들 알겠나?"
"악!"
"너희들이 자유 의지로 선택한 직업이니까 죽을 때까지 전역은 없다. 대신에 급료는 아주 적은 액수지만 챙겨주도록 하겠다. 다들 선임에게 자신들의 계좌번호를 찍어주든지 혹은 적어서 제출하기 바란다."
노예가 아니라 병사니까 당장 대우부터 달리 해야만 했다. 직업군인에게 월급을 주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악!"
"그리고 이제부터 이름은 없다. 1열은 1분대, 2열은 2분대, 3열은 3분대다. 왼쪽에서부터 앉으면서 번호!"
"하나!"
"둘!"
"아홉 번호 끝."
"일어섯!"
"악!"
"분대 번호와 자신이 외친 번호가 바로 자신의 이름이 된다. 알겠나?"
"악!"
"그리고 그 번호는 한 달에 한 번씩 대련을 통해서 강한 자가 빠른 번호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1번이 분대장이 된다. 그리고 분대간의 대결을 통해서 가장 강한 분대가 1분대가 될 것이다. 알겠나?"
"악!"
"지금은 비록 세 개의 분대지만 나중에는 중대가 되고, 대대가 될 것이다. 그러니 같은 분대 소속의 동료들과 서로 경쟁하면서도 협조하는 방법을 동시에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악!"
"그 번호의 순서가 바로 월급의 액수 순서가 될 것이니 경쟁이 싫은 자는 대충 해도 된다."
"……."
영욱은 아주 간단한 룰로 자신의 부하들을 정리해버렸다. 아무래도 군대식으로 운영하는 게 편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름보다는 숫자가 더 관리하기 편할 것 같아서였다.
단순히 명령을 내리는 것만이 아니라 적절한 시기에 소환까지 해야 하니 모든 게 영욱 자신의 편의를 위주로 진행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선임이 되거나 분대장이 되거나 활약이 두드러지는 병사는 자연스럽게 본래의 이름을 획득하게 될 테니까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래도 이름을 가진 병사가 등 뒤에 숫자를 달고 있는 병사보다는 강하겠지만 처음부터 이름을 부여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박상태!"
"악!"
"후임들에게 활인심방의 구결과 기계체조의 기본동작을 빠른 시간 내에 가르쳐라."
"악!"
"다들 짐작하겠지만 배우는 구결과 기계체조의 동작은 절대 유출 금지다. 그리고 숙달된 정도를 보고 순서를 다시 정할 테니까 다들 열심히 해라."
"악!"
"그리고 내 드림 솔져가 된 기념으로 각자에게 맞춤형 백오 가죽 석 장씩을 나눠주겠다. 번호가 낮은 순서대로 내 앞으로 나온다. 실시!"
"악!"
총 200장 중에서 자신이 벌써 열 장을 껴입었고, 은영과 진소희에게 열한 장이 나갔다. 휼버린에게 두 장을 서비스로 주었고, 100장을 팔았다.
노예들이 다시 300장의 가죽을 반납했으니 총 377장인데 일단은 석 장씩만 나눠주기로 했다. 물론 더 껴입을 수 있는 부하들도 많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경쟁과 포상을 통해서만 주어질 것이다.
백오의 기운이 없는 넉 장에 대해서는 영욱이 몸속의 기운을 쥐어 짜내야 했지만 그 정도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선임 박상태, 앞으로!"
"악!"
물론 선임을 맡은 박상태에게는 한 장을 더 지급했다. 지금으로서는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솔져라는 걸 알려주려는 의도 또한 없지 않았다. 다들 이름을 되찾기 위해서 열심히 하라는 의미였다.
"마지막으로 이 부대의 명칭은 백오기사단이다. 아직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지만 모두 진정한 기사가 되어서 나의 수족이 되어주기 바란다. 이상."
"악!"
맞춤형 백오 가죽을 하사받은 드림솔져들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목숨을 구제받은 인연으로 노예를 자청했는데 결국은 버젓한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이다.
상인인 화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영욱도 돈을 꽤나 잘 버는 것을 이미 지켜보았으니 월급이 체납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강해질 수 있는 활인심방의 구결과 기계체조도 가르쳐 준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총 82장을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니, 이제 195장의 백오 가죽이 남았다. 영욱은 그것을 토룡피와 토룡피 사이의 공간에다 보관하기로 했다. 다행히 배가 조금 볼록 나온 정도로 보이는 것 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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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처리하고 휼버린에게로 돌아오니 휼버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간단하군."
"뭐가 간단하다는 거죠?"
"한국 사람들은 다들 군대를 다녀오니까 누구라도 지휘관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소리야."
"학회장 노릇도 꽤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겨우 27명을 다루지 못할 리 없죠. 게다가 내 노예들인데 어려울 리가 없잖아요."
영욱은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넘겼다. 하지만 이제는 먹여 살려야할 식구가 늘었으니 책임감 때문에 어깨가 무거웠다. 앞으로는 돈이 생기더라도 환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산이나 임야를 마음대로 구입하기는 어려울 같아서 그리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다.
"백오기사단이라는 새로운 세력의 탄생을 내 눈으로 보게 되다니 영광스럽기까지 해."
"그렇게 띄워줄 필요는 없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이름 하나는 거창하게 짓는 편이라서 말이지요."
"여태까지는 강력한 환수가 나타난 적이 없었지만 앞으로는 모르는 일이니까 띄워줄 필요가 있어."
"그렇다면 혹시 이곳에 다른 강력한 환수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어서 머무시는 거였어요?"
"겸사겸사 아니겠어? 이미 말했듯이 마법사란 직업이 그리 한가하지는 않거든."
"그렇다면 당분간은 같이 다녀야겠군요."
휼버린이 백오기사단의 탄생을 띄워준 것은 자신과의 조합이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였다. 기사들이 지켜주는 마법사는 그 역량을 몇 배 이상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욱도 그런 의미에서 휼버린이 당분간 자신과 동행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아마도 그래야 할 거야. 그리고 당분간은 2QB 세상에 갈 수 없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잠을 자도 2QB 세상으로 갈 수가 없었던 거군요."
"당연하지. 여긴 두 세상이 서로 겹쳐진 장소니까 따로 갈 곳도 없는 셈이지."
"그럼 시간의 흐름은 어떻게 됩니까?"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환수가 출몰했을 때는 2QB 세상의 시간처럼 빠르게 흐르고, 그러지 않을 때는 현실 세계의 속도로 흐르지."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아무튼 잠시 눈이라도 좀 붙여 두어야겠어요. 나름 신경을 썼더니 졸리네요."
남들이 잘 때에도 오로지 굴착 공사에만 매달렸던 영욱으로서는 백오 환수와의 싸움까지 치르고 나니 더 이상 견딜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부하들이 활인심방과 기계체조의 기초를 수련하는 동안 잠시나마 졸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휼버린이 잠을 자기 위해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는 영욱을 붙들었다.
"내가 잠시 숙면을 취하게 해줄 테니까 나와 이야기나 계속 나누세."
"마법인가요?"
"당연하지. 마법사가 설마 허접한 초능력을 쓰겠나?"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외군."
"예? 뭐가요?"
"푹 재워놓고 해코지를 할 수도 있지 않는가? 물건을 훔쳐서 달아날 수도 있고."
"그럴 생각이 있다면 강제로라도 재웠겠죠."
영욱은 콧방귀를 끼면서 말이 되지도 않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살려서 오래오래 털어먹을 대상이 있고, 당장 죽여서 껍질을 벗겨야할 대상이 있는데 영욱은 전자前者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 상대의 동의를 받지 않고도 강제로 재울 정도로 강한 마법은 아니라서 그래."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믿겠습니다."
"마법사란 존재는 호기심이 아주 강하지. 그러니 자네의 몸을 해부할 지도 모르는데 정말 괜찮겠어?"
"마법으로 제 몸속을 들여다볼 수도 있을 텐데 뭐하러 피 튀기게 왜 칼을 들이댑니까? 그리고 이미 들여다보시지 않았습니까?"
"하하하! 겁이 없는 거야? 아니면 몰라도 너무 몰라서 용감한 거야?"
"원래 무식한 놈이 용감한 법이죠. 그래도 제 병사들이 좋은 직장을 잃었다고 복수할 지도 모르니까 조심해서 다뤄주세요. 하하하!"
영욱은 배낭에서 침낭을 꺼낸 후 바닥에 가지런히 깔고서 그 위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휼버린을 올려다보면서 이제 수면 마법을 걸라고 눈짓을 보냈다.
"하하하! 말로는 도저히 못 당하겠군. 나 휼버린 디에고는 마나의 힘을 빌어서 수면 마법으로 박영욱 그대를 재우고자 한다. 동의하는가?"
"예. 나 박영욱은 휼버린 디에고 님의 수면 마법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좋았어. 아주 잘하는군. 슬립!"
드르렁. 쿨!
"코도 아주 잘 고는군."
드르렁. 쿨!
영욱은 모처럼 꿈도 꾸지 않은 채로 숙면熟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겨우 3분 남짓이었다.
"아함! 잘 잤다."
"개운한가?"
"예. 정말로 개운하네요. 대체 얼마 동안이나 잠들었던 거죠?"
"정확하게 172초니까 채 3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야."
"그런데도 마치 열일곱 시간은 잔 것처럼 개운하군요. 꿈도 꾸지 않았고요."
병사들이 안도하는 표정을 보니 170초가 170분처럼 느껴진 듯했다. 영욱이야 휼버린을 믿지만 닳고 닳은 영욱의 노예들은 기본적으로 마법사란 존재를 믿지 않는 듯했다.
"수면 마법으로 잠들면 당연히 꿈도 꿀 수 없어. 물론 지금 여기서는 원래부터 꿈을 꿀 수가 없지만."
"정말이지 효율적이고도 강력한 마법이군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효율적이긴 해도 강력하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예. 제가 보았던 어떤 마법보다도 더 강력한 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구경한 마법이 거의 없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만. 하하!"
"전투 중에 상대가 잠들어주기만 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상대의 동의를 받아내야 한다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잖아."
영욱이 수면 마법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일수록 휼버린은 고개를 더 강하게 갸웃거렸다. 특히 강력하다는 말에 대해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아군에게만 사용할 테니까 상대방의 동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보게."
"적을 직접 공격하고 무력화시키고 괴롭히는 것만이 효과적인 마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평소에 아군의 피로를 풀어주고 잠자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서 훈련 시간을 늘여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공격력 강화 마법이라고 볼 수 있겠죠."
"흠! 그건 제법 그럴 듯하게 들리는군."
휼버린은 영욱이 제시한 발상의 전환에 깜짝 놀란 듯했다. 자신의 피로를 풀기 위한 용도로 가끔씩 사용한 적은 있지만 늘 혼자였기에 그게 그리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욱처럼 거느린 병사가 서른 명 가까이 된다면 엄청난 효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강력한 마법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의 동의를 구한 덕분에 정신력 아니, 마나의 소모도 훨씬 줄어들 게 아닙니까?"
"당연하지. 저항하는 상대를 억지로 재우기 위해서는 열 배에서 스무 배에 달하는 마나가 소모되지. 그나마도 실패할 확률이 높지만."
"그러니까 아주 효율적이라는 겁니다. 불과 5%나 10%의 마나로 그렇게 달콤한 잠을 선사할 수 있으니까 말이죠. 그것은 한 번의 마법을 쓸 마나로 최고 20명까지도 재울 수 있다는 말이니까 완전 부럽습니다."
"그러니까 내 제자가 되라고 하지 않았나. 그까짓 수면 마법쯤이야 쉽게 배울 수 있을 텐데 말이야."
휼버린은 다시 한 번 영욱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욱이 수면 마법에 애착을 보이는 이유에 대한 짐작은 휼버린의 착각이었다. 영욱이 수면 마법을 부러워한 것은 사실이지만 휼버린의 제자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수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 아이템을 구입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도에서 한 말이었다.
"솔직히 마음이 흔들립니다. 하지만 진 씨 아저씨를 두고 다른 사부를 모실 생각은 아직 들지 않습니다."
"진중권이 부럽기는 이번이 처음이군."
"그분을 다시 사부로 모실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부러워하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더 부러운 거야. 제자치고는 상당히 까다로운 성격이긴 하지만 가치 판단이 바르고 지조도 있고 무엇보다 끈기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냥 진 씨 아저씨가 시키는 대로 할 걸 그랬다는 후회도 가끔씩 듭니다. 사실 그렇게 무리한 지시는 아니었는데 말이죠."
영욱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은영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희를 힐끔 쳐다보면서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이 정도로 쉽게 돈을 벌 수 있을 줄 알았다면 당연히 진중권의 지시에 따라서 소희와 결혼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든다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지 않는가?"
"그럴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진 씨 아저씨의 마음에 입은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죠. 그리고 저도 아직까지는 그런 식의 결혼을 원치 않고요."
"자네는 아직까지도 결혼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군."
"제가 잘못된 건가요?"
"아냐. 자네가 옳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환상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까 서로 간에 코드가 맞지 않을 걸세."
"아무래도 좀 그런 편이죠. 저는 아직도 사랑이나 존경 그리고 신뢰 같은 감정이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편이니까요. 적어도 돈보다는 말이죠."
영욱은 지금 이런 말을 하면서도 기계체조의 구결을 얻는 것과 휼버린의 제자가 되는 것의 효과에 대해서 저울질하고 있었다. 다만 둘 중의 하나를 택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감정 때문인 셈이다.
"그럴 수도 있겠지. 인간이 마나를 만들어낸 이유가 바로 오래 살고 싶고, 모든 것을 혼자서 다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라는 감정에서 출발한 것이니까 자네가 말하는 사랑이나 존경 그리고 신뢰 같은 감정이 제 2세대의 마나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보장도 없지."
"휼버린 님은 마나가 만들어지는 것을 직접 보셨나요?"
"보았지. 그리고 직접 개입하기도 했지."
"그렇다면 마나가 대체 뭐죠?"
"그것은 당연히 비밀이네. 입을 여는 순간 내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마나홀이 붕괴되고 말 테니까 절대로 알려줄 수 없네. 하지만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힌트 정도는 줄 수가 있지."
마법사들이 여러 종류의 기운이나 정신력을 가공해서 만든 마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서 전혀 새로운 타입의 기운이다. 그것이 대단히 강력하고 위력적이고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어떻게 만드는지는 마법사들만이 알고 있다.
마나 친화력이 있는 사람들이 마나심법이라는 특수한 방법을 사용해서 오랜 시간 동안 수련을 하면 몸속에서 마나가 생겨나는데 그것을 효과적이고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 심장을 풍선처럼 둘러싼 마나홀이라는 것을 인공적으로 만들게 된다.
그런데 마나 전반에 대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그 마나홀에다 안전장치를 해둔 듯했다.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둘러서 말하는 것은 상관없는 걸 보니 아마도 발설해서는 안 되는 금기어라도 있는 듯했다.
"그렇군요. 제가 무리한 질문을 했군요."
"코카콜라의 제조 비율을 물어본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지. 하지만 그것은 질문 금지 사항이 아니라 제조사에서 답변해줄 수 없는 사항일 뿐이니까 자네가 잘못한 것은 없어. 그 질문 역시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펩시콜라도 있으니까 유사 마나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확실히 자네와는 이야기하는 재미가 있어. 어떤 게 유사 마나일 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마나가 꼭 하나로 정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지."
휼버린은 영욱의 번쩍이는 기지에 감탄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중요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 가감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다면 마법에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가공된 기운이나 정신력의 일종이라는 말씀이군요."
"당연하지. 자네가 수련하는 기계체조 역시 정신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무술이 아닌가."
"그런가요? 저는 기계체조가 무술이라는 말은 오늘에야 처음 들었습니다."
"진중권의 사부 김승주가 매우 걸출한 인물이긴 하지만 제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해 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대대로 전승되어 오던 무술을 개량한 것이라는 말인가요?"
"맞아. 요즘은 무공이라는 표현을 거의 쓰지 않는 세상이니까 무술이라고 표현해도 큰 무리는 없을 거야. 자네 사부 진중권이라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지만."
제자를 맞이하더라도 초식만 전수할 뿐이고 결혼을 전제로 비로소 구결을 전수하는 고리타분한 관행을 보자면 휼버린의 주장이 옳을 확률이 높았다.
영욱도 그제야 기계체조의 뿌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납득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활인심방과도 잘 어울렸던 것이다.
"적어도 기계체조보다는 그럴 듯하게 들리는군요."
"기계체조가 어때서? 미래에 대박을 칠 것 같은 뉘앙스를 물씬 풍기지 않아?"
"로봇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꽤나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래에서 유래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역사는 되풀이하는 법이지. 자네는 우리 인간들이 전혀 없던 마법을 창조한 것이라고 생각하나? 마나 역시 마찬가지고."
"저는 마법사들이 창조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도 있었다는 말씀인가요?"
휼버린의 수다는 끝없이 이어졌다. 영욱은 노예들의 훈련 모습을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휼버린의 말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했다.
휼버린의 말이 대부분 진실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역사나 세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들이라서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마법에도 로봇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지. 바로 골렘이나 티타네스 같은 존재들이지. 혹시 들어본 적이 있나?"
"티탄이라 함은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거인들이 아닙니까?"
"티타네스가 티탄의 복수형이라는 것도 아는 걸 보니 잘 알고 있구먼."
"천공의 신 우라노스와 대지의 여신 가이아가 낳은 자식들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라노스의 손자가 바로 제우스지. 하지만 제우스가 거인이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네."
휼버린의 이야기는 이제 신화神話로까지 이어졌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에 대해서는 영욱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신화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존했던 역사라고 주장하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진짜 거인이 아니라 일종의 탑승형 로봇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우라노스는 거인이 아니라 파일럿에 불과했고 말이죠."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지만 마법사들이 바라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는 바로 그래. 제우스가 크로노스의 아들이고, 크로노스가 우라노스의 아들이 확실하다면 말이야."
"아주 흥미로운 주장이군요. 그래서 기계체조를 할 줄 아는 저를 제자로 삼고 싶은 것이기도 하고요?"
"자네의 포클레인이 어떻게 움직이면서 백오들을 물리쳤는지 보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겠지. 다만 직접 보지 못하고 흐릿한 위성사진들을 통해서 보았기 때문에 내가 제자 영입에 덜 적극적일 수도 있겠지."
거창하게 신화까지 동원된 이유는 휼버린이 영욱에게 관심을 가지는데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마법사들 역시 탑승형 로봇이나 티탄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별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실탄으로 사용할 바위들이 많이 모여 있는 상황이라서 좀 더 강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게다가 제 부하들이 바위 모으는 일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요."
"브레이크 댄스의 토마스 스핀과 비슷한 동작으로 바위를 마치 기관총처럼 쏘아댈 줄은 정말 꿈에도 예상치 못했네. 게다가 백오들이 엄청난 속도로 떨어뜨리는 바위를 받아서 다시 공격하는 것은 보면서도 믿어지지가 않았네. 아마 백오들로서도 기가 막혔을 거야."
"바위가 아주 빠른 속도로 떨어졌지만 토마스 스핀의 회전 속도보다는 조금이라도 느렸기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리고 그래야 공격 속도가 조금이라도 더 빠를 것 같아서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 인상적이었어. 정말 대단해."
"하하하! 칭찬은 고맙지만 이제 그만 하시죠. 최근 들어서, 그것도 진소희 양으로부터 대충 배운 거라서 아직도 많이 시원찮습니다. 그리고 걔네들에게나 통하는 어설픈 공격이라는 사실도 잘 압니다."
영욱은 휼버린의 거듭되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나름 아찔한 순간들을 여러 차례 넘기면서 이루어낸 성과지만 마법사 휼버린에게 이 정도로까지 칭찬을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칭찬 속에 날카로운 칼날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서둘러서 자리를 정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휼버린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6권에서 계속됩니다.
*경시 동작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지. 당장은 별 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나중에는 정말 강력한 공격이 될 테니까 말이야. 솔직히 나는 자네에게 반했어."
"그런 마법이 있다는 겁니까?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연구를 하시겠다는 겁니까?"
"후자에 가깝지. 왜냐면 드림헌터들 중에서 로봇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는 기계를 소환한 경우가 아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진 씨 아저씨를 잘 알고 계신다면서요?"
"그라면 내 앞에서 그 멋진 모습을 보여줄 리가 없지."
"그렇다면 제가 경솔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지는 않아. 숨긴다고 해서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야."
"적어도 크로스 카운터에 해당하는 기술은 아니라는 소린가요?"
기계체조에서도 응용 동작일 뿐이니 최고의 초식일 리는 없다. 다만 응용하기에 따라서 땅을 효과적으로 파고 들어갈 수도 있고, 막강한 화력과 연사 속도를 지닌 대공포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응용 동작의 장점인 셈이다.
"맞아. 그리고 이제는 장소의 제한을 받는 기술도 아니지."
"그건 무슨 의미죠?"
"이제 자네 부하들 중에는 바위 폭풍을 만들 수 있는 자도 있으니까 말일세. 비록 초능력으로 만들어낸 바위지만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걸 쏘면 되지 않겠나."
"그렇다면 마법으로 바위를 만들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인가요?"
"그게 아니라 오히려 더 금방 사라지지."
"그렇군요. 그래야 에너지 소비 면에서는 훨씬 더 효율적이겠군요. 제 입장에서는 아니겠지만요."
"자네 입장에서도 마법이 한결 더 유리하지. 공격을 끝낸 후에도 굳이 바위가 남아있을 필요는 없지 않나? 그리고 일일이 주우러 가는 것보다는 다시 만들어내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일 테니까 말이야."
휼버린의 마법 예찬은 끝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적어도 초능력에 비하면 여러모로 효과적이라는 논지로 마법의 유용성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듣고 보니까 그렇군요. 바위를 더 많이 만드는 데에도 도움이 될 테고 말이죠."
"이왕이면 자네의 포클레인 기계 삽 안에다 바로 바위를 만들어내는 게 더 좋지 않을까? 그러면 바위를 장전하는 동작을 생략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멋진 지적이군요. 그러고 보니 저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당연하지. 하지만 에너지 효율과 소환 가능한 속도가 문제겠지. 그리고 소환되는 바위의 비중 또한 진짜 바위와 큰 차이를 보일 수도 있으니 위력 면에서도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고."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마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휼버린은 집요하게 초능력의 비효율적인 면을 파헤쳐서 마법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정신력으로 뭐든지 만들어낼 수도 있고 무슨 일이든지 할 수도 있는 초능력이 싸구려 기술로 치부되는 경우는 그것이 효과적으로 정비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마법 앞에서일 뿐이다.
사실상 영욱 역시 바위의 소환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 바위가 진짜 단단한 바위가 되기는 힘들다는 점을 알기에 휼버린의 지적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 내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지. 마법이야 살다보면 허접한 것들이라도 얼렁뚱땅 배우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일세."
"허접한 마법으로는 안 된다는 주장이시군요."
"못 믿겠다는 표정일세."
"사실 마법사라는 존재를 처음 보았으니까 비교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래서 샘플이라도 달라는 말인가?"
"마법에도 샘플이 있습니까?"
"굳이 예를 들자면 마법 아이템 같은 것들도 일종의 샘플인 셈이지."
휼버린은 말로 유혹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드디어 아이템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영욱으로서도 오늘의 금기어라고 여겨서 꾹 참아온 단어가 바로 아이템인데 결국 휼버린의 입에서 먼저 나오게 된 것이다.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고, 먼저 말하면 지는 것이 바로 오늘의 게임 룰인 셈이다.
"그렇다면 제가 땡잡은 것이군요."
"누가 준다고 했어? 땡을 잡게? 그런데 삼팔광땡이야? 장땡이야?"
"이제 보니 동양화에도 일가견이 있으셨군요. 하지만 샘플이니까 겨우 일땡 정도가 아닐까요?"
"문제는 상대가 가진 패겠지만 일단 땡이라는 것만 해도 대단한 것 아닌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걸 샘플로 요구해?"
"샘플이 크고 화려할수록 거래의 크기 역시 더 커지겠죠."
"좋아. 그 귀걸이 아이템을 벗어서 나를 주게."
"예? 이, 이건……."
"나에게 넘기라는 게 아니라 그 아이템에다 암석 소환에 대한 마법을 새겨 주겠다는 소리야."
"죄, 죄송합니다."
영욱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떨면서 귀걸이 아이템을 건네주었다. 휼버린이 가지고 튈지는 모르겠지만 운이 좋으면 암석 소환 마법을 얻게 될 수도 있으니 모험을 시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헬렌 컬러가 만든 아이템이 아니라면 어림도 없는 작업이니까 운 좋은 줄 알아."
"어, 어디로 가시게요?"
"이 사람아! 마법진도 없는데 여기서 마법 부여 작업을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내 연구실에 다녀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게."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나도 몰라. 작업이 끝나봐야 알겠지."
"다, 다녀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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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휼버린이 제 자리에서 지워지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자 영욱은 눈뜨고 사기 당한 게 아닐까하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고위 마법사인 휼버린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신의 사파이어 귀걸이 아이템이 몇 안 되는 고위 마법사 헬렌 컬러의 작품이라면 그 희소성에 대한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차하면 먹튀를 감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점점 더 들기 시작했다. 그의 연구비에 보탤 만큼 큰돈이 주어진다면 제아무리 자존심 강한 마법사라도 한 번 쯤은 눈을 질끈 감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템의 도움을 받다가 그게 사라져버리니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만일 휼버린이 돌아오기 전에 강력한 환수가 나타난다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도 들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아이템들도 가지고 있지만 마치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오로지 사파이어 귀걸이 아이템만이 떠올랐다.
한동안 불안에 떨던 영욱은 습관적으로 실시한 활인심방의 도움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새로운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출력을 두세 배로 올려주는 마법 아이템의 위력이 대단하긴 하지만 휼버린의 표현에 의하면 그것은 일종의 샘플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냐! 언제부터 남의 도움을 바랬다고 이런 생각을 가져. 이건 잘못된 생각이야.'
또한 아이템에 의존하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이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 그 상실감 때문에 오히려 더 실력 발휘를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이라도 다루지 못하고 그 아이템에 휘둘리면 그 결과가 좋지 못하다. 그것은 초급자가 고급자용 장비를 착용하는 것과도 같은 경우다.
생각이 깊어지니 어쩌면 마법사들이 아이템마다 그런 안전장치를 해 두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도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드림헌터들의 힘을 두세 배 전후로 강하게 만들어 주는 아이템들을 마음 놓고 풀 리가 없다.
권총을 국민들에게 파는 나라에서는 그 권총을 제압할 수 있는 자동소총을 경찰이나 군인들에게 지급하기 마련인 것처럼 마법사들의 경우라면 간단하게 아이템을 무력화시키는 마법이나 장치가 처음부터 존재할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원래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으니 잃어버린다고 해도 그리 애석할 것도 없다는 생각을 억지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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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심방의 도움으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자 불안감을 떨쳐내고서 바위 소환 연습을 시작했다. 휼버린의 말처럼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 원하는 타이밍에, 원하는 크기와 정상에 가까운 비중을 가진 바위를 소환하기는 결코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포클레인 기사인 영욱은 바위와 아주 친했다. 그러니 소환하는 게 어려울 리는 없었다. 문제는 소환되는 타이밍과 바위의 비중이었다. 그것은 소환으로 나타난 것이 100% 바위일 리가 없으니 발생하는 문제였다.
겉으로는 바위인데 실제로는 푸석돌이었다. 심지어 물에 뜰 정도로 속이 빈 푸석돌이니 큰 위력을 발휘할 리가 없었다. 페이크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젠장! 쉬운 일이 하나도 없군 그래."
"보기에는 훨씬 더 위력적인데 왜 짜증을 내고 그래?"
속이 빈 바위니까 총알처럼 빠르고 멀리 날아가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일정 거리를 벗어난 바위는 소환이 해제되었기 때문에 그 위력이 확인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은영으로서는 영욱의 발악에 가까운 짜증을 의아스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야."
"오빤 욕심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이젠 부하가 스물일곱 명이나 생겼으니까 욕심이 많아야 해. 그래야 저 녀석들과 딸린 식구들까지 먹여 살릴 거 아냐. 이제는 나도 너처럼 속물근성이 필요한 순간이야."
"나는 왜 빼?"
"너도 내 노예나 할래?"
"그, 그건 좀 아니다. 그냥 마누라 시켜주면 어디가 덧나?"
은영은 노예나 되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더니 잠시 후 펄펄 뛰면서 마누라 자리를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쳤다. 영욱도 대놓고 고함을 지르는 은영에게 더 큰 목소리로 사형 선고를 내렸다.
"결혼할 생각도 없지만 적어도 너는 아니다."
"내가 왜 아닌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스물일곱 명의 부하들보다도 더 많이 써댈 테니까."
"흥! 내가 소희 언니라도 되는 줄 알아?"
"너도 못지않다는 거 잘 알고 있어. 그리고 소희는 배경태라도 물어서 이미 명품 세트들을 갖추고 있으니까 더 사줄 필요가 없지만 너는 그것도 아니잖아."
"흥! 있는 사람이 더하다는 거 몰라서 그래? 명품 있다고 명품을 안 사? 명품이 하나밖에 없는 건 줄 알아?"
"그래도 있는 것은 더 이상 안 살 테니 하나라도 적게 살 거 아냐."
"점점 더 비싸진다는 거 몰라? 그러니 내게 제일 싼 명품을 사주는 게 오히려 싸게 먹혀."
"그런 거 사줄 여유 없으니까 꺼져!"
둘은 유치한 언쟁을 이어가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휼버린과 이야기할 때는 제법 진중하고 번뜩이는 기지도 가끔씩 보였던 영욱이지만 은영과 이야기만 나누면 초등학생처럼 유치찬란한 단어를 남발했다.
"툭하면 꺼지래."
"용건 있어?"
"경시 동작 안 배울 거야?"
"그럴까?"
경시 동작을 가르쳐준다고 하니 영욱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분위기는 갑자기 화기애애해졌다. 영욱도 이제는 속물이 다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