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들도 마찬가집니다. 주인님."
임금을 주지 않겠다고 해도 끝까지 노예를 자처하니 영욱은 못이기는 척하고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영욱도 최근 박상태의 표정 변화를 잘 알기 때문이다.
"좋아. 상당히 난감하지만 일단 여러분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시험을 하도록 하겠다."
"예. 주인님."
"나이가 많은 자들도 있겠지만 그건 잊어버리고 앞으로는 나를 선배라고 불러라."
"예. 선배님."
"주변에 흩어져 있는 바위들을 각자 한 자리에 모은다. 가장 많이 모은 자만 노예로 삼을 테니까 최선을 다하도록 해라. 시작!"
우르르.
일종의 선착순이었다. 다만 달리기가 아니라 바위 나르기지만.
영욱은 꼭 자신의 손으로 두들겨 패지 않아도 얼마든지 순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군대에서 교관과 유격 조교가 그렇게도 무서웠던 이유가 비단 구타 때문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웃는 얼굴로 지시하는 얼차려와 선착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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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바위를 전투적으로 모으고 있는 녀석들을 쳐다보면서 상태에게 말을 걸었다.
"네 친구들이냐?"
"아닙니다. 저보다는 훨씬 더 잘 나가던 자들이었는데 아마도 저를 기억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래? 지금은 너보다도 약해보이는 것 같은데?"
"그게 다 선배님의 덕분입니다."
"네가 끼고 있는 반지 아이템과 백족 아머들을 다 벗어도 네가 더 강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선배님 덕분이라는 말입니다. 잘 아시면서 왜 자꾸……. 혹시?"
영욱의 거듭되는 칭찬에 상태는 영욱이 뭔가를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맞아. 혹시 남는 눈알 없어?"
"그래 주신다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없는 눈알이라도 만들어서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농담도 잘 하는군. 아쉬운 대로 두 개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
"예. 제 3의 눈이 자꾸 강해지는 모양입니다."
상태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두 눈알을 뽑아주었다. 금방 재생될 뿐 아니라 부대끼는 기운이 줄어들어서 더 강해질 수 있으니 눈알이 빠지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실룩거리며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더 강해진 지금까지도 오로지 영욱이 아니면 덜어주기가 힘든 기운임을 알기에 더 고마워하는 것이었다.
"그래. 네 덕분에 정말 유용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어. 고마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제는 저보다도 훨씬 더 멀리 보시니까 원래부터 가지고 계시던 능력이 발현된 것이라고 봐야할 겁니다."
"말만이라도 고마워. 그런데 혹시 쟤들 이름 알아?"
"예. 압니다. 달려오는 순서대로 강기수, 김정수, 김홍곤입니다."
"쟤들도 사퍼모어 급인가?"
영욱은 박상태의 눈알 두 개를 소화시키기 위해서 얼른 기계체조와 활인심방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대화는 계속되었다.
"전에는 프레시맨이었는데 지금은 살짝 경계에 걸친 상태인 것 같습니다. 선배님."
"전에는 사퍼모어 하면 우와 했는데 지금은 우러러볼 정도로 느껴지지는 않는군."
"그야 주인님의 실력이 더 높아져서 그런 겁니다."
"네가 보기에 나는 어느 정도야?"
"솔직히 판단하기가 좀 애매한데 사퍼모어 중에서도 중간 정도는 가지 않을까요?"
영욱도 자신의 경지를 짐작하기가 어려웠지만 박상태도 영욱의 정확한 경지를 짐작해내지는 못했다. 일반적인 드림헌터들이 성장하는 방식과는 많이 다른 방법으로 성장했기 때문인 듯했다.
"아직도 강력한 초능력이 없어서 애매하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초능력들을 가지셨긴 한데 다들 강력한 것들은 아니라서 경지를 정하기가 조금 애매합니다. 게다가 기계체조의 경지와 드림헌터의 경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니까요."
"그런가? 아무튼 쟤들 정도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을 것 같긴 해."
"그야 당연하지요."
"그런데 쟤들의 초능력은 뭐야?"
영욱은 정면으로 대드는 대룡도 혼내준 적이 있으니 새로운 노예들의 하극상을 전혀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게 부담스러울 정도라면 처음부터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까.
사력을 다해서 바위를 나르고 있는 녀석들을 보니 진정으로 자신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 듯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비로소 세 녀석들이 가진 초능력이 궁금해진 것이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강기수가 바람, 김정수가 물 그리고 김홍곤이 염동력에 관한 초능력을 가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들을 거두면 도움이 될까?"
"예. 실전에는 제법 강한 편입니다. 게다가 다들 자발적인 결정이니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노예가 되겠다는 결정을 자발적으로 내린다는 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어. 너는 어때?"
"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역할이 있기 마련이고 특히 누구나가 리더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잘 나서 주인님께 삼고초려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차선책으로 노예라도 자청할 수밖에요."
박상태가 생각하는 노예와 주인의 의미는 병사와 대장의 관계에 가까웠다. 그것도 그냥 기사가 아니라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기사에 가까웠다. 영욱 역시 서로에게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이자 부하를 원하기에 주인이 아니라 선배라고 부르게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여자들이 몸을 사리지 않는 것도 같은 이친가?"
"저 여자 분들이야 노예를 청하는 게 아니라 선배님을 치마폭으로 굴복시키겠다는 거 아닙니까?"
"네가 보기에도 그렇지?"
"예. 다들 생긴 걸로 보자면 그럴 자격이 충분하지만 선배님에게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둘의 이야기는 하이에나와 같은 여자들에 대해서 화제를 바꾸었다. 다들 영욱이 상태의 눈알 두 개를 삼키고 열심히 소화시키는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침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들도 처음에는 그저 막연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정도였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고 보니 감각이 예민해지고 감각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이 생존과 사냥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왜? 내가 고자라도 된다는 소리야?"
"그럴 리가요. 하하!"
"그럼 무슨 뜻으로 한 소린데?"
"매진邁進하는 바가 있으니 여자가 여자로 보이지 않을 거라는 의미로 한 소립니다. 게다가 예쁜 여자도 하나일 때나 빛을 발하는 법이지요."
"예쁜 여자가 많으니 오히려 그녀들이 먼저 무릎을 꿇을 가능성이 높다는 건가?"
"예. 다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인님을 붙드는 것이 곧 자신들의 자존심을 세우는 길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박상태도 나름 여자에 대한 생리를 잘 파악하고 있는지 가치관이 뚜렷했다. 영욱도 상태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겨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은 어차피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튼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상황이군. 하하하!"
"당연하죠. 그럴 만큼의 능력이 있으니까요. 이제 노예 여섯 명을 거느리게 된 선배님이시니까 하녀도 서넛 정도는 거느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가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저 여자들이 알게 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그녀들도 지금쯤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주인님을 노예로 삼으려는 시도는 이미 실패로 끝났으니까요. 물론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저처럼 무릎을 꿇고 하녀를 자청하게 될 겁니다. 하하!"
영욱이 쉽게 동의하자 박상태는 좀 더 화끈한 이야기를 했다. 박상태는 강기수 등이 자발적으로 노예를 자청한 것에 대해서 의미를 크게 두는 듯했다. 마치 영욱에게 숨겨져 있던 군주의 자질이 드디어 발현되었다는 듯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남자에게 오히려 더 큰 매력을 느낀다는 건가? 하지만 나는 결코 나쁜 남자가 아냐."
"여자들이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경우인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강한 유전자를 원하는 생물이고, 저 여자들 역시 그런 목적으로 선배님의 주위를 맴돌고 있습니다."
"아부하는 것인 줄은 알지만 마음에 쏙 드는 말이군. 가슴이 다 후련해. 아무튼 내가 저 여자들의 노예가 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건 확실하게 보증할 수 있어."
"저도 그럴 거라고 확신합니다. 선배님."
박상태는 세 여자들이 영욱의 앞에 무릎을 꿇고 노예 되기를 자청하는 상황이 곧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찌감치 노예가 되지 않으면 서열에서 밀리게 될 테니 바보가 아니라면 빨리 서두르는 게 좋을 거라고 여겼다.
*새로운 인연
한참 동안 화리와 잡담을 즐기던 마법사 휼버린이 영욱에게로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영욱이 상태의 눈동자를 소화시키느라 몸을 이리저리 비틀면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으니 나름 도와주려고 알은체를 한 것이다.
"자네의 표정이 왜 그런가?"
"배가 아파서요. 저도 사냥이 아니라 상술이나 배울 걸 그랬나 싶습니다."
"하하하! 화리 양의 상술은 배운다고 해서 이룰 수 있는 경지가 아닐세."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버는 세상과는 당분간 담을 쌓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은 나쁘지 않지만 자급자족으로 살아남기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지. 그래서 상인들의 연합이라는 집단도 생겨난 것이겠지만."
영욱이 화리와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뜻을 완곡하게 표현하자 휼버린은 그게 이루기 힘든 희망사항임을 알려주었다. 담합을 하고 있으니 다른 상인과의 거래 역시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그래도 혼자서 살아볼 겁니다.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에는 복통이라는 알레르기 증상이 있어서 말이죠."
"괜히 나보고 눈을 흘기지는 말게. 나도 돈 아까운 줄을 아는 사람이야. 하지만 화리 양이 폭리를 취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배가 아픈 건 사실입니다."
"화리 양의 운이 나빴군. 하필이면 특이한 알레르기가 있는 공급자를 선택했고, 게다가 거래 현장까지도 들켰으니까 말이야."
휼버린도 화리를 통해서 영욱이 사냥한 가죽을 구입하기는 쉽지 않을 것임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 몰랐거나 알아도 보지 않았다면 이럴 일은 없겠지만 눈앞에서 수십 배의 차익이 발생했으니 빈대 한 마리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전혀 없었다.
"원래부터 그런 줄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팔지 말고 제가 다 소비하는 게 가장 큰 이익을 취하는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팔게 된 거지?"
"하도 팔라고 우겨대기에 불쌍해서 조금 거래하고는 내내 후회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런 일도 있었으니 두 번 다시 팔지 않을 생각인 거죠."
백우 가죽의 경우에도 가격만 맞았다면 역시 팔았을 게 분명하니 두 번 다시 팔지 않겠다는 영욱의 결심은 방금 전에 확실하게 결정된 것이다.
"화리 양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던데?"
"그야 지켜보시면 알게 될 일이죠."
"둘 사이에 무슨 계약이 있다고 말한 것 같던데?"
"예전에 제가 마법서 한 권을 사서 둘이 함께 나눠보자고 했더니 그러자고 하면서 자기가 물건을 구입할 때 20%를 할인해 달라는 조건을 걸더군요. 그러면 자기가 가짜 마법서를 구입하지 않게 도와준다면서 말이죠."
영욱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자신이 화리에게 사기 당했던 이야기를 일부 해주었다. 그런데 휼버린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었다.
"둘이 나눠볼 수 있는 마법서는 그리 흔치 않지만 구할 수만 있다면 그게 더 이익이 아닌가? 그게 진정한 마법서인 셈이니까 말이야."
"예?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죠. 하지만 나중에 듣자니 그 마법서라는 게 그냥 삼키는 일회용 캡슐이라고 하던데요?"
"그건 귀차니즘에 시달리는 고객들을 위한 제품인데 요즘 와서는 그게 대부분인 세상이 되어버렸지."
"그렇다면 진짜 책처럼 생긴 마법서도 존재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러니까 화리 양이 그런 제의에 동의했겠지. 정직한 상인들은 우리 마법사들처럼 거짓말을 하지는 않네. 특히 계약에서는 더 그렇다네."
화리를 변호하는 휼버린의 말을 듣고 영욱은 잠시 혼란 상태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묘하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건데 화리가 그런 계약을 한 바가 있었음을 휼버린에게 고백하고는 도움을 청했던 듯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책으로 된 마법서를 사주겠다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런 것이 있다는 휼버린의 말을 듣고는 둘이 입을 맞추어서 영욱과 화리 사이의 계약 파기는 일방적인 영욱의 착각 때문이라는 식으로 몰아가려는 듯했다.
"그래도 그런 식의 가격으로는 거래하지 않을 겁니다."
"자네도 따지고 보면 원가가 거의 들지도 않은 공짜 사냥을 한 게 아닌가? 상인들도 공짜와 다름없는 가격으로 원자재를 구매하지만 팔지 못한다면 큰 손해를 입는 것이니 화리 양도 운이 좋은 것이고, 자네도 운이 좋은 것이야. 물론 다들 실력들도 좋지만."
"듣고 보니 꽤나 그럴 듯하게 들리는군요. 그러니까 사냥꾼은 상인에게 사냥의 대상이나 다름없다는 소리죠?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죠?"
"맞아. 상인들은 우리 마법사들에게 물주나 다름없지. 그리고 우리 마법사들은 또 누군가에게 물주 역할을 하게 되지. 세상은 어차피 그렇게 돌아가는 거니까 까칠하게 굴 필요는 없을 거야."
휼버린의 논리는 꽤나 그럴 듯했다. 실제로 거액을 지불하고 사면서도 흡족하게 느끼니 이 순간을 위해서 급조된 논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영욱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먹이사슬이 그렇다는 거군요. 아무튼 저는 제가 사냥한 전리품으로 남이 폭리를 취하는 꼴은 못 봅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냥 태워버리고 말 겁니다."
영욱은 개성상인 임상욱의 흉내도 마다하지 않을 기세였다.
"남자 성격치고는 집요한 구석이 있군 그래."
"남자가 대범해야 한다는 논리는 여자들이 만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거래에 여자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아무튼 나는 자네가 달라는 대로 다 주었네. 그러니까 날 원망하지는 말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앞으로는 그런 가격으로 저와 거래하시지는 못할 겁니다. 당연히 덤도 없고요."
상태의 눈알 흡수가 얼추 끝나자 영욱의 표정도 다시 밝아졌다. 하지만 화리와의 거래는 결코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물론 휼버린과의 거래에는 전혀 문제가 없음도 분명하게 고지했다.
"그러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왔어."
"예? 이미 덤으로 드린 것이 아깝다는 소리는 아닌데요?"
"그게 아니라 마법사들은 공짜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 그래서 자네에게 내가 읽던 책을 하나 주려고 해."
"혹시 마법과 관련된 책인가요?"
"당연하지. 이걸 자네에게 주겠네."
"이건 비몽사몽 투 아닙니까?"
영욱인 혹시 휼버린이 공부했던 마법서를 주려나 하고 기대했다가 그게 아님을 알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땅바닥에 집어던질 정도로 실망스러운 책은 아니었다.
"맞네. 영어로 적혀있는데도 쉽게 아는군."
"명색이 대학생인데 Not dream, also resemble dream2도 해석하지 못할 줄 알았어요?"
"원래는 between asleep and awake라고 해야 하는 건데 제목이 좀 그렇지?"
"그런가요? 아무튼 이 책은 이은석 교수님이 쓴 책 맞죠?"
"맞아. 내가 자네에게 주려고 책의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해 두었어. 물론 마법이지. 하지만 중간 중간에 잘못 번역된 부분도 더러 있긴 하겠지만 읽기에 불편하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열심히 읽도록 하게. 기초가 튼튼해야 마법도 잘 배울 수 있을 테니까."
"정말 고맙습니다."
"나도 빚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라서 오히려 홀가분하네. 하하하!"
휼버린은 겨우 20달러짜리 책 한 권을 던져주고는 생색을 있는 대로 냈다. 하지만 영욱도 꼭 구해보고 싶었던 책인지라 고깝다는 감정을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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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마법 같은 세상, 그러나 마법은 없다. _7
2. 초능력과 마법에 대한 비교 고찰. _41
3. 마법 창조에 대한 제언. _71
4. 마법 언어에 대한 제언. _151
5. 간단한 마법 소개와 기본적인 주문들. _201
6. 미래의 마법사들에게 당부하는 말. _407
영욱은 책을 펼쳐서 목차만 얼른 읽어보고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책을 덮었다. 원래는 영어로 쓰인 책이지만 그 아랫줄에 완벽하게 한글로 번역되어 있어서 영어는 오히려 눈에 띄지도 않았다.
더 읽고 싶었지만 이제는 선착순을 시킨 강기수 등을 살피러 가야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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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강기수 등의 앞에 나타나서 사나운 어조로 나무라기 시작했다.
"뭐야? 아직도 그것밖에 못했어?"
"죄, 죄송합니다. 선배님."
"정말로 내 노예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한 거야?"
"제발 저희들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래? 그렇다면 바위를 딱 100개만 모아라. 가장 먼저 모은 자만 내 노예로 삼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그럼, 시작해!"
"예. 선배님!"
강기수와 김정수와 김홍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하며 바위를 향해서 달려갔다.
하지만 우렁찬 목소리와는 달리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제아무리 사퍼모어에 이른 드림헌터라지만 포클레인으로 옮겨야 할 정도로 큰 바위 100개를 옮기는 게 쉬울 리 없다. 무엇보다 그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패주면 좋겠는데 그럴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 역시 노예가 되려면 완전히 굴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시름은 더욱더 커졌다.
특히 친구들에게 먼저 이 제안을 했던 강기수는 노예가 되는 것도 생각보다는 훨씬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서 절망하고 또 절망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이 영욱의 왼쪽 옆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화색을 금치 못했다.
"서, 선배님!"
"어라? 벌써 노예가 되었네? 이거 진짜 맞아?"
"예. 선배님! 고맙습니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뭐가 이렇게 간단해? 너 혹시 이상한 아이템이라도 동원한 거 아냐?"
"노예가 되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그런 아이템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욱이 의심의 눈길을 버리지 않자 강기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따지고 들었다.
"이 새끼 봐라! 벌써부터 주인에게 따지는 거야? 야! 박상태!"
"즉시 시정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선배님."
"데려가서 반쯤 죽여 놔."
"예. 선배님!"
강기수가 예상보다는 너무나도 쉽게 노예가 된 상황이라서 영욱도 강기수도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영욱의 마음대로 이리저리 소환이 가능하니 노예가 된 것만은 확실했다.
박상태에게 넘긴 이유는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진 박상태를 위로하려는 의미였다. 그러니 새로 생긴 졸병들에게 군기라도 잡아야 덜 억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강기수는 좀 더 혼이 나야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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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김정수와 김홍곤도 영욱의 옆으로 소환되었다. 강기수가 먼저 노예가 되어버리자 자신들은 이대로 내쳐질 줄 알고서 절망하다가 얼떨결에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노예가 되지 못하는데 왜 절망하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평소에 약간 우습게보던 기수에게 밀렸다는 점에서 절망감을 느낀 것이다.
아무튼 신입 세 노예들은 사람들이 아주 다양한 각도에서 행복할 수도 있고, 또는 절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써 직접 보여주었다.
"하나만 받겠다고 했는데 너희들은 왜 내 노예가 된 거야?"
"제발 저희들도 노예로 받아주십시오. 주인님."
"나는 선착순에서 이긴 한 명만 받기로 했다. 강한 자만이 나의 노예가 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누가 너희들 마음대로 내 노예가 되라고 했어?"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선배님."
하지만 노예가 된 것으로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영욱의 억지도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박상태라는 고달픈 시집살이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박상태!"
"예. 선배님."
"정신교육을 똑바로 시켜놓도록 해. 내 등골을 빼먹을 작정으로 노예가 된 것들이라면 아예 죽여 버려!"
"예. 선배님."
박상태는 흡족한 미소를 베어 물면서 김정수와 김홍곤도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개 끌듯이 질질 끄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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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시절 박상태는 후임들에게 저승사자로 통했다. 그만큼 갈구기를 즐겼다는 이야기다.
그런 그에게 군기반장을 맡겼으니 새로운 노예들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장님 삼 년, 총 구 년에 이르는 신입 노예 교육 기간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사, 상태야."
"지금 누구의 이름을 부른 거야? 노예라고 다 같은 노예인 줄 알아?"
"아, 아냐."
"아직도 내가 네 친구로 보여? 그리고 혀가 왜 그렇게 짧아?"
"아닙니다. 상태 님."
"상태 님은 무슨 상태 님이야? 그냥 형이라고 불러. 알겠나?"
"예. 형님."
"선배님께서는 마음이 여리신 분이라 앞으로 너희들의 군기 교육을 내게 전담하셨다. 이미 아는 놈은 알겠지만 내가 사람 갈구는 데는 좀 소질이 있는 편이다. 그러니 잘 해라. 알겠지?"
"예. 형님."
얼차려는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강기수 등은 게거품을 물고서 각종 얼차려들을 순차적으로 소화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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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보는 눈이 많으니 대충 이 정도만 하지만 마지막으로 딱 한마디만 더 하겠다. 선배님의 눈 밖에 나는 순간 죽음보다도 더한 뒤끝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무조건 잘해라.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알겠습니다."
"선배님에 비하면 나 같은 건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단 한 대도 맞지 않고 노예가 되는데 성공한 너희들이 알기에는 무리겠지만."
상태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면서 협박을 이어갔다. 누구는 죽도록 맞고서야 간신히 노예가 되는데 성공했는데 이들은 선착순 조금 돌다가 너무나도 쉽게 노예가 되었으니 억울하지 않을 리 없다.
"최선을 다해서 모시겠습니다."
"만일 나에게까지 피해가 미치면 어떻게 될지 알겠지?"
"예. 형님."
"갈아서 마셔 버린다. 왜? 내 말이 농담처럼 들려?"
"아, 아닙니다."
"좋아. 지금부터 소화력을 키워주는 체조를 가르쳐 주겠다. 그 체조를 배워 보면 내가 갈아 마신다는 말을 농담으로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김호진, 너는 김정수를 가르치고, 윤승언, 너는 김홍곤을 가르쳐라. 나는 강기수 이 새끼를 가르칠 테니까."
"예. 형님."
박상태는 군기 잡는 일 대신에 곧바로 기계체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게 더 혹독한 얼차려가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태권도의 다리 찢기 정도는 아픔도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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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 휼버린이 떠나자 화리는 살아남은 환수사냥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백오 가죽의 구입에 열을 올렸다. 영욱이 그들의 몫으로 열 장씩 나누어준 것을 보았으니까 내버려둘 수가 없는 것이다.
"백오 가죽을 제게 파세요."
"얼마를 줄 건데?"
"열 장에 1골드가 정가지만 여러분의 노고를 생각해서 특별히 2골드를 드리겠어요."
"웃기고 있네. 한 장에 1억을 받는 사람도 있는데 너무 후려치는 거 아냐?"
환수 사냥꾼들은 화리가 마법사 휼버린에게 무려 40골드나 받고 팔았던 사실은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지만 다들 잘 알고 있기에 영욱처럼 까칠하게 굴었다.
"그건 맞춤형이지만 여러분들의 물건은 그렇지도 않잖습니까?"
"그야 상인이 어떻게든 해서 팔겠지. 안 그래?"
"저라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맞춤형으로 만들어줄 테니까 한 장에 1골드를 내놔."
"그, 그렇게 만들어 오신다면 당연히 1골드에 드리죠."
화리는 환수사냥꾼들이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에 몹시 당황스러워했다. 상인에게 이렇게 배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영욱을 빼고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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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의 도움으로 살아난 서른 명의 환수 사냥꾼들 중에서 이미 노예가 되어버린 세 명을 제외한 스물일곱 명이 모조리 영욱에게로 몰려들었다.
"뭡니까?"
"백오 기운인가 하는 것을 조금만 나누어 주십시오."
"연세도 지긋하신 것 같은데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백오 기운이 필요할 줄은 몰라서 제 노예인 대룡에게 이미 다 주어버린 걸요."
"그럼 다시 소환하면 되지 않습니까?"
"2QB 세상의 존재를 현실 세계로 소환해서 좋을 게 뭐 있겠습니까? 힘도 많이 들고요."
어렵지 않게 소환할 수 있다고 해도 대룡을 불러들일 영욱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가를 받지도 않고 백오의 기운을 낭비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었더니 보따리를 내놓으라고 하는 격인 듯해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백오 가죽들을 돌려드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들의 목숨을 구해주셔서 뭔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던 참인데 헐값에 넘기느니 돌려드리는 게 나을 듯합니다. 가지고 계시다가 나중에라도 제값을 받으시도록 하십시오."
"주신다면 사양하지는 않겠습니다."
스물일곱 명의 드림헌터들은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자신들의 몫으로 분배받은 백오 가죽들을 몽땅 내놓았다. 그러고도 쉽게 자리를 떠나지는 못했다.
"다른 용건이라도 있으신지요?"
"강기수처럼 우리들도 거두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들은 부모형제들이 모두 코마 상태라고 해서 허락한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가정이 있고, 자녀들과 부인이 있을 텐데 굳이 왜 남의 종살이를 하려는 겁니까?"
"마법사들과 상인들은 그들만의 조직을 가지고 있어서 이권을 누리기도 하고, 최소한 억울한 일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환수사냥꾼들은 기껏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해봐야 납득하기 힘든 시세라는 명목 하에 늘 사냥 아이템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에 물건을 넘겨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요?"
"님께서 마법사님과 나누시던 말씀 중에서 자급자족의 꿈을 꾸신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는데 그러자면 우리 드림헌터들도 뭉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들 수준 높은 드림헌터들이니 영욱과 휼버린의 대화를 듣지 못했을 리 없다. 게다가 강기수 등이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고자 했는데 그리 큰 고통 없이 노예로 받아들여지자 이러한 결심을 하게 된 듯했다.
"제 노예가 되는 게 뭉치는 것과 어떻게 같습니까?"
"드림헌터들 간에 평등이란 말은 그저 개소리일 뿐입니다. 만일 주니어나 시니어 급의 드림헌터가 그런 말을 듣는다면 신성모독이라고 여기면서 그 말을 한 자를 찢어죽일 게 분명합니다. 그러니 약한 우리들이 노예가 되는 게 뭐가 문젭니까?"
"제가 여러분들의 주인이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들 보셨던 것처럼 반백신감과 허풍선장에게도 두들겨 맞던 약해빠진 드림헌터일 뿐이니까요."
영욱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의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이다.
"사, 삼족백오를 혼자의 힘으로 처리하시는 걸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건 마법사라고 해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니 그럴 자격은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저희들의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주인 되실 자격이 되고도 넘칩니다."
"안면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저를 아세요?"
"죄, 죄송합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반백신감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고 있는 배신혁이라고 합니다. 그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더니 바로 그 꼴이었다. 하지만 신감을 가지고 있으니 들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반백신감, 너만은 내 노예로 거두고 싶구나. 괜찮겠지?"
"무, 물론입니다. 하지만 다른 자들도 받아주시는 게 어떨까요? 저기 허풍선장 안신조도 있습니다."
영욱의 얼굴에서 비릿한 미소가 더욱더 짙어지자 반백신감 배신혁은 얼른 물귀신 작전을 구사했다.
"그래? 그렇다면 고려해봐야겠군. 나를 동네북처럼 두들기더니 이번에는 신감神鑑에 뭐가 비치기에 이렇게 노예를 자청하는 거야?"
"여전히 주인님의 어머님만 비칩니다. 사실 그것은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소리기도 합니다."
"엄마를 무서워하는데 더 두려운 게 없다는 게 말이 돼?"
"어머니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큼 무서운 것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신감을 보았던 오랜 경험에 의하면 그게 정답입니다."
"이상한 논리군. 아무튼 너는 오늘 죽었다. 다만, 내 노예가 되고난 후에 혼내주기로 하지. 상태야!"
노예는 곧 병력이다. 이렇게 많은 자들이 자원하는데 영욱이 싫을 리가 없다. 하지만 노예로 삼는 것이니 '어서 오십시오' 하면서 반갑게 맞을 수는 없는 일이라서 표정관리를 해야만 했고, 진짜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 선착순이라는 일정한 요식행위를 거쳐야만 했다.
"예. 선배님."
"이 자들에게 한 시간 동안 바위를 모으게 해라. 그 개수를 헤아려서 가장 많이 모은 순서로 딱 세 명만 내게 데려오도록 해라."
"예. 선배님."
똥줄이 타지 않으면 쉽게 노예가 될 리 없으니 결코 쉽지 않은 조건을 내걸었다. 배신혁은 노예가 되기도 힘든 세상이라고 마음속으로 불평했지만 이미 대부분이 노예로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사실을 신감을 통해서 알고 있기에 불안하지는 않았다.
신감은 거울에 비친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자의 얼굴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가끔씩은 그 사람의 가까운 미래 모습을 비추기도 한다. 그게 진정한 신감의 효용인 셈이다.
신감에 비친 영욱의 뒤에는 수십 명의 노예가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는데 그 속에 분명히 자신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정보가 없다면 환수사냥꾼들을 설득해서 노예를 자청할 리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신감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기를 청하지 않으면 나중에 개 맞듯이 두들겨 맞고서 노예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미 영욱에게 찍혔다는 이유로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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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태는 추가로 스물일곱 명이나 더 노예가 되기를 자원하자 입이 귀에 걸렸다. 하지만 예쁘게 어루만져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숫자가 많을수록 더 가혹하게 다루어야 군기가 잡힌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이를 악물고 이들의 전면으로 나섰다.
"지금 어딜 쳐다보나? 뒤로 취침!"
우르르.
"기상! 동작들 보지? 앞으로 취침!"
우르르.
박상태의 말은 염동력을 훨씬 상회하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들 빨간 모자를 쓴 유격조교 이상으로 상태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다들 바위를 이곳으로 가져오기로 한다. 들고 오든지 지고 오든지 끌고 오든지 던지든지 여러분들의 자유지만 옮긴 숫자만큼은 확실하게 본 조교에게 확인받도록 한다. 알겠나?"
"예."
"구호는 악으로 통일한다. 알겠나?"
"악!"
"목소리에 섞인 짜증 봐라. 우리 선배님이 싫은 자는 당장 떠나도 좋다."
"아닙니다."
"지금부터 바위를 옮긴다. 실시!"
"악!"
다들 군대는 다녀왔는지 분위기 파악은 빨랐다. 자청해서 노예가 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다시 벌어지고 있었지만 박상태는 그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굴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겨우 목숨 한 번 구해주었다고 이럴 리가 없지만 드림헌터들은 생각 자체가 달랐다. 이미 가짜 삼족백오에게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여생餘生은 노예가 되어서 주인을 위해서 살겠다는 생각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겠지만 분위기에 휩싸인 부분도 있고, 박상태의 호통소리에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바위를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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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줄로 알았던 휼버린이 영욱의 옆에서 홀연히 나타나더니 영욱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도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있을 것임을 미리 짐작하고서 투명화 마법으로 잠시 몸을 숨기고 있었던 듯했다.
"아주 신기한 광경이군."
"아까 가시지 않았습니까?"
"갔었지. 하지만 오고 가고는 내 마음이지, 안 그래? 노예가 되겠다고 줄을 서는 경우는 나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인데 놓칠 수는 없잖아."
"아무튼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자네가 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주었다는 게 사실인가?"
휼버린의 말에는 영욱이 그만큼 강해보이지는 않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아주 정확한 판단이다. 영욱이 그들을 살린 방법은 힘이 아니라 그저 수리부엉이 울음소리 흉내를 낸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어차피 저들 모두가 자네의 노예가 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으니 말일세."
"그러죠. 어제 휼버린 님께서 떠나고 난 후 백오 떼들이 어느 순간 하나로 뭉치더니 삼족백오로 변신했습니다. 그러자 팽팽하게 싸우고 있던 드림헌터들이 겁을 집어먹고는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들 중의 일부가 삼킴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은 그들을 토해놓고는 나누어 먹으려고 했겠지. 그건 나도 이곳의 상황을 찍은 위성사진을 보아서 잘 알고 있는 일이니 자네가 그들을 살린 이야기나 하게."
휼버린이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이야기하라고 독촉하는 것은 자신이 확인해본 동영상으로는 영욱이 그들을 살렸다는 이야기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투명마법으로 숨어있는 동안 위성 동영상들을 확인했으니 하는 말이다.
"땅속에서 그 상황을 느끼고 있던 제가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부엉이 소리를 크게 내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을 먹는 대신 바위들을 치워서 제가 있는 땅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그 장면도 보았네."
"그게 전붑니다. 보셨겠지만 깨어난 환수사냥꾼들과 열심히 힘을 합쳐서 백오 환수들을 전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의 부엉이 울음소리가 삼족백오의 피어에 의해서 가사 상태에 빠진 저들을 깨운 것이라는 말이군."
"예. 저도 잘 몰랐는데 다들 그렇다고 하더군요."
"텔레파시로 고함을 질렀으니까 CCTV로는 도저히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군."
휼버린은 그제야 납득이 가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영욱도 환수사냥꾼들이 가사 상태에 빠진 이유가 바로 삼족백오의 피어 때문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그들이 맥없이 잠에 빠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짝퉁 삼족백오라서 무시했는데 완전히 엉터리는 아닌 듯했다.
"아무튼 간에 꼭 그들을 깨우려고 했다기보다는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 해본 시도였는데 결론적으로는 도움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보다는 포클레인으로 바위를 기관총처럼 쏘아댄 자네를 보고서 감명했던 거겠지. 그리고 노예와 주인의 관계로 명명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아."
"그게 무슨 말이죠?"
"노예들은 자네 마음대로 강제 소환이 가능한 관계니까 가장 효율적일 때가 언제이겠나?"
휼버린은 환수사냥꾼들이 노예가 되기를 자처하는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했다. 하지만 마법사답게 바로 설명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통해서 알려주고자 했다. 마치 선문답처럼.
"그야 전투 중이겠죠. 불리한 곳에서 위험에 처한 병사들은 뒤로 빼고, 유리한 곳에 추가 병력을 더 투입해서 빠르게 정리하는 것은 전략의 기본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삼십육계와 화력의 집중이죠."
"잘 아는군. 포위와 탈출, 병력의 집중과 분산을 주인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으니 그저 주인과 노예의 관계만이 아니라 유능한 장수와 병사와의 관계라고 볼 수 있지."
"그러한 내용을 저들 모두가 다 안다는 건가요?"
"아는 사람은 이를 악물고서라도 자네의 노예가 될 것이고, 알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참지 못하고서 떨어져 나가겠지. 쯧쯧쯧!"
"누구를 향한 애도입니까?"
"그야 당연히 후자지."
휼버린은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먹구름을 올려다보면서 다가올 미래 역시 그리 밝지 않을 것임을 암시했다. 영욱의 노예가 되지 못할 자들에게 미리 애도를 표하는 것이니 그 의미는 아주 컸다.
"떨어져 나갈 사람들에게 불쌍한 표정을 짓는 이유가 뭡니까? 제 노예가 되는 것이 대단한 벼슬은 아닐 텐데 말이죠."
"저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전시戰時라고 볼 수 있지. 자신들을 지휘할 장수가 없는 병사들이 훨씬 더 빨리 죽게 될 테니까 어찌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나?"
"하지만 노예는 가축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저들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야. 자네 노예인 박상태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자들이기도 하지."
의외로 박상태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동북아시아를 담당한다는 마법사 휼버린조차도 알고 있는 것이니 박상태가 영욱의 예상보다는 훨씬 더 유명했던 듯했다. 그리고 휼버린의 기억력이 보통은 훨씬 넘는다는 의미도 되고.
"휼버린 님도 박상태를 압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 닥치는 대로 사람들의 영혼을 먹어치우던 자가 아니더냐. 다들 박상태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예상했지. 나 역시 마찬가지였어. 하지만 자네의 노예가 되고나서는 주화입마를 벗어난 것은 물론이고 몇 배로 강해졌지."
"별 걸 다 알고 계시는군요."
"이 바닥이 생각보다는 훨씬 좁은 편이지."
영욱은 휼버린의 대답에서 그가 진중권은 물론이고 자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에 대해서도 알고 계셨던가요?"
"당연하지. 기계체조를 창시한 김승주 옹에게 두 명의 제자가 있는데, 너는 그 중에서도 수제자인 진중권의 제자였지. 그런데 그의 외동딸 소희와의 결혼을 거절하다가 파문당하고 말았지. 솔직히 나는 아직도 기계체조가 그리 대단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데 그 바위 대포는 상당히 괜찮았어."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시더니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군요."
"이러한 상황 설명도 없이 내가 자네를 이미 알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어서 굳이 경계심을 가지게 할 이유는 없잖아. 안 그래?"
마탑은 국가정보원처럼 정보도 취급하는 곳인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빠삭하게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영욱 역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마탑에서 다 읽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사실 마법도 마법이지만 수백 개의 인공위성이 떠있고, 모든 것이 컴퓨터 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세상이니 굳이 알려고 들면 모를 이유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도 그렇군요."
"아무튼 오늘은 재미있는 구경을 많이 하는 것 같아."
"저도 그래요. 저들 중에서 몇 명이나 제 부하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마법이 배우고 싶다면 내 제자가 되는 게 어때?"
휼버린이 거창하게 설명을 해주고 영욱의 반응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살펴본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영욱은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갑작스럽게 맞이했지만 흔쾌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또 다시 이용만 당하다가 파문당할 가능성도 크겠지만 무엇보다 아직도 진중권과의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만 아직까지는 다른 사부를 모시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겠지. 만일 자네가 바로 승낙했다면 오히려 내 쪽에서 더 실망했을 거야."
"거듭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계체조와 마법이 전혀 다른 분야니까 두 사부를 모신다는 생각을 할 필요는 없어. 잘 생각해보고 내 제자가 되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해."
"하하하! 지금 와서야 드리는 말이지만 명함과 스마트폰을 가지고 다니는 마법사라니 정말 깨는군요."
휼버린이 엄지와 새끼손가락으로 전화를 거는 시늉을 하자 영욱은 바로 그 대목에서 빵 터지고 말았다. 제법 어울리긴 하지만 하연 수염이 세 뼘이나 되는 마법사가 취할 만한 동작은 아닌 듯해서였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텔레파시나 메시지 마법에 의존해? 안 그래?"
"그런데 만일 제가 제자가 되겠다고 한다면 내걸 조건이 있겠지요?"
"당연하지. 진중권 영감은 고작 막걸리 몇 통으로 족하겠지만 나는 맥주 체질이라서 말이야. 하하하!"
"그 정도야 오크통으로도 드릴 수 있겠지만 다른 앵벌이를 시킨다든지 그런 일은 없겠죠?"
"자네야 마법 수련하기에도 바쁠 테니까 앵벌이를 하더라도 자네의 노예들이 하겠지."
영욱의 날카로운 질문에 휼버린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갑작스럽게 영욱을 제자로 스카우트 하려는 이유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바로 많은 숫자의 노예들이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는 않았다.
"그랬었군요. 제 노예들의 숫자가 많아질 것 같으니까 그게 욕심이 난 거군요. 저는 제가 마법적인 재능이 조금이라도 있는 줄 착각할 뻔했네요."
"재능은 개뿔……. 아무튼 나에게 마법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단골 레퍼토리로 해주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가?"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요?"
"제일 먼저 돈이 조 단위로 있냐고 물어본다. 돈 없이 배울 수 있는 마법은 정말 몇 개 되지도 않으니까 말이야. 적어도 자네에게는 그 질문을 하지는 않았지 않는가. 안 그래?"
휼버린은 실망감을 금치 못하는 영욱에게 상상치도 못할 화폐 단위까지 동원하면서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주었다. 돈이 없는 대학생들은 대학원생으로 받아주지 않는 것과도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내용이었다.
"공부 잘하는 것과도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군요."
"맞아. 자네가 자랑하는 노력과 재능보다는 돈이 최고지. 바로 부자들이 마법을 만들었으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경쟁자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돈이 아주 많이 드는 방식으로 마법사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겠군요."
"잘 아는군."
"그런데 휼버린 님은 그렇게 부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