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8/71)

-다들 전투준비!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했어요?

-왜 쓸데없다고 생각하지? 덕분에 탈출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생겼는데 말이지.

-당장 쪼여죽게 생겼는데 그런 말이 나와요?

-어차피 싸우지 않고서는 탈출이 불가능해. 그러니 요행이나 노리지 말고 어서 싸울 준비나 해.

처음에 바위 밑으로 숨어들 때보다도 오히려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영욱은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승부를 걸기로 했다. 그리고 백오들이 아직까지 몫을 나누지 못해서 살려둔 서른 명의 드림헌터들을 깨울 수만 있다면 꼭 질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이야. 포크 소환! 윈드밀 스핀!

자신들을 덮고 있던 바위들이 거의 치워질 무렵 영욱은 포크를 소환했다. 그리고 빠르게 운전석에 탑승하고는 응용 동작의 윈드밀 초식을 실시했다. 

원래는 어깨와 목뒤의 등을 땅바닥에 대고 빙글빙글 도는 동작이지만 영욱은 포크의 기계 삽을 이용해서 바위를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대포알을 연상케 하는 강력한 바위 공격이 백오들을 향해서 발사되었다.

까악. 깍.

바위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려서 떨어뜨린 백오 환수들이지만 포클레인의 빠른 회전력과 강력한 힘으로 던진 바위를 받아내지는 못했다.

그리고 날아오른 백오들이 워낙 많은 상황이라서 바위 대포알 하나에 두세 마리의 백오들이 격추 당해서 땅으로 추락하는 즐거운 상황이 벌어졌다.

-소희야. 블라인드!

-블라인드!

그러한 대포알마저도 피해서 사람들을 노리고 날아들던 백오들은 소희의 블라인드 초능력에 당해서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어버렸다. 

-상태야. 뭐해?

-예. 선배님.

상태는 거인으로 변해서 자신의 덩치보다는 훨씬 작은 백오들의 밟거나 날개를 꺾어버렸다. 시력을 잃고 추락한 백오들이 상태의 괴력에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어차피 잘 죽지 않는 녀석들이니까 피를 빨도록 해.

영욱은 자신과 노예들의 장점을 전투에 활용하기로 했다. 포크가 던진 바위와 박상태에 의해서 날개가 부러지거나 목이 비틀어진 백오들에게서 나온 피를 얼른 염동력으로 모아서 자신이 삼키거나 일행들에게 제공했다.

어차피 한두 마리도 아니고, 잘 죽지도 않는 환수들이니 굳이 끝을 봐서 마릿수를 줄이기보다는 작은 이득이라도 먼저 취하기로 것이다. 그래야 지대공地對空의 전투 상황이라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도 못하는 노예 둘과 은영까지도 활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 선배님.

은영은 자존심이 상해서 대답을 기피했지만 김호진과 윤승언은 희희낙락했다. 하지만 피를 빠는 의미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열심히 기운을 흡수해서 백오들의 힘을 줄이는 한편 영욱에게 기운을 전달하기 위한 일거양득의 작전임을.

따지고 보면 도시락 역할이나 하라는 소리였지만 그래도 위험한 전면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훨씬 안전했다. 이들은 박상태와 영욱의 보호를 받으면서 열심히 백오의 피를 삼키고 소화시키는 작업에 주력했다. 소화를 돕기 위한 활인심방의 구결 암송과 기계체조의 동작을 천천히 반복하면서.

-소희야. 블라인드!

-블라인드!

-윈드밀 스핀! 원드밀 스핀!

영욱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하늘 위로 바위와 돌들을 빠르게 쏘아 올렸다. 늘 쓸 만한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어서 고민하던 영욱으로서는 아쉬운 대로 원거리 공격 무기가 생긴 것을 기뻐했다. 

아직도 결정타 수준은 아니지만 당장 상대해야 할 백오 환수들에게는 상당한 데미지를 줄 수 있어서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분당 60회전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돌면서 잔상으로 만들어진 수족을 여섯 개나 만들어냈다.

그 여섯 개의 수족이 모두 바위를 던져대니 날아가는 바위의 숫자는 분당 360개에 달했다. 그러니 백오들로서는 피하기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영욱은 사파이어 귀걸이의 증폭 능력이 두 배가 아니라 무려 세 배 가까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날아갈 것처럼 기뻤다. 그것은 엉터리 주문이 기대보다 효과가 더 크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젠 숙달이 되어서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이 주효했다.

게다가 귀걸이의 위치를 상상하면서 증폭 주문을 외우고 공격 주문을 외우는 작업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든 주문과 공격이 귀걸이 아이템을 거친 다음 밖으로 나갔으니 증폭률이 무려 세 배 가까이나 올라간 것이다.

염동력을 발휘해서 피를 모으는 작업 역시 사파이어 귀걸이 아이템을 거쳐서 이루어졌다. 그래야만 넓은 지역에 걸쳐서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들을 모을 수가 있고, 피들이 자신들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려는 힘 또한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욱의 짐작대로 소화 흡수에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노예들과 은영의 뱃속에 들어간 백오들의 피는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백족의 껍질로 몸을 가린 덕분이었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어느덧 던질 바위와 돌이 다 사라졌기 때문이다. 던졌는데 중력에 의해 다시 떨어진 바위들이 사방에 산재하고 있으니 몇 개 정도는 주워서 던질 수도 있겠지만 예전과 같이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공격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좌충우돌! 헤드 스핀! 원드밀 스핀! 잔상수족!

어쩔 수가 없으니 영욱은 바위가 있는 곳으로 빠르게 이동한 다음 먼저 헤드 스핀으로 회전력을 올린 다음 윈드밀 스핀으로 초강력 대포를 발사해야만 했다. 그러고 난 다음 잔상수족의 초식으로 다음 바위가 있는 곳까지 재빠르게 이동해야만 했다.

영욱의 바위 대포 공격이 상당히 위력적이긴 했지만 하늘을 날아다니는 백오들의 숫자는 여전히 수천 마리가 훨씬 넘었다. 그러니 겨우 10초에 하나 쏘는 것으로는 백오들을 제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공격 속도가 확연하게 줄어들자 영리한 백오 환수들은 영욱 대신 은영과 노예들부터 노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영욱에게 기운을 전달해주는 도시락들임을 알아차린 듯했다.

-소희야! 블라인드.

-블라인드!

-염동력 속박! 잔상각!

쾅!

백오 환수들이 마치 독수리가 병아리를 채 가는 것처럼 빠르게 달려들었지만 진소희와 영욱의 콤비 공격에 눈이 멀고는 포크의 기계 삽에 얻어맞아야만 했다. 

캑.

어지간한 물소보다도 더 큰 백오였지만 결과는 기절이나 사망이었다. 

자신의 몸무게만큼이나 무거운 바위를 날카로운 발톱으로 삶은 감자 찍듯이 찍어서 날아오르는 괴력과 강한 발톱을 가졌지만 ULM 실드 코팅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기계 삽과 정면으로 부딪친 백오들의 발톱이 죄다 부러지고 기역자로 꺾여버릴 정도로.

-윈드밀 스핀!

게다가 영욱은 백오들이 투하시키는 바위를 받아 내고는 오히려 그 바위를 역으로 발사하기까지도 했다.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바위를 받아내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역시 더 빠른 회전이 관건이다.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행동이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도전했고, 다행스럽게도 별다른 실수 없이 캐치볼과 대포알 발사를 연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특히 영욱은 주된 공격 목표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욱의 부엉이 울음소리는 무모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그 부엉이 울음소리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백오들이 아니라 의외로 기절해 있던 서른 명의 드림헌터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삼족백오에 대한 지독한 공포를 영욱이 내지른 부엉이 울음소리로 극복하고는 죽음과도 같던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이 다시 전투에 동참하는 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렸지만 자신들을 깨운 영욱의 인상적인 전투를 한참이나 지켜본 다음이라서 그런지 일단 움직이기 시작하자 예전보다도 더 광폭하고 맹렬하기 그지없었다.

"파이어 레인!"

"기가 썬더!"

"락 스톰!"

그들은 자신의 모든 힘을 짜내서 오로지 영욱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있는 백오들에게 큰 거 한 방씩을 먹여주었다. 물론 주문은 매우 거창하지만 마법이 아니라 그보다는 위력이 훨씬 떨어지는 초능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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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어!"

영욱은 드림헌터들의 가세에 쾌재를 부른 것이 아니라 락 스톰이 아군의 실수로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에 환호했다. 수십 개의 바위가 쏟아졌는데 그 정도라면 분풀이할 정도의 실탄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영욱을 겹겹이 둘러싸고 공격할 기회를 노리던 백오들은 다시 쏟아지는 공격에 아연실색했다. 방심하고 있다가 당하기도 많이 당했지만 더 두려운 것은 이제 영욱이 다수의 바위들을 확보했다는 사실이었다.

"맛 좀 봐라! 윈드밀 스핀! 원드밀 스핀!"

영욱은 지름 2미터에 달하는 바위들을 새총으로 발사하는 공깃돌처럼 가볍게 날리기 시작했다. 한 개의 바위는 서너 마리의 백오들을 가격하고서야 비로소 지상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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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세가 이 지경이 되자 백오들은 하늘높이 날아오르더니 다시 삼족백오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뭐해? 어서 바위를 가져와."

"예. 선배님."

영욱이 노예들을 닦달하자 다른 드림헌터들도 힘을 모아서 주변에 널린 바위들을 영욱에게로 모아주었다. 백오들이 삼족백오로 변신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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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맛 좀 봐라! 윈드밀 스핀! 원드밀 스핀!"

영욱은 드림헌터들과 박상태가 던져주는 바위를 거대한 형태를 갖추려는 삼족백오에게로 무차별 발사하기 시작했다. 그 공격에 녀석의 거대한 머리통이 날아가고, 날개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재차 날아갔지만 빌딩보다 큰 삼족백오는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어서 바위를 가져와. 저 모습은 그저 페이크에 지나지 않으니까 겁먹지 말고."

"예. 선배님."

영욱의 말처럼 뭉친 백오 떼가 오히려 더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었다. 이젠 바위 하나에 열 마리에 달하는 백오들이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고 있었다.

"맛 좀 봐라! 헤드 스핀! 원드밀 스핀!"

영욱은 자신의 판단을 믿고서 기계체조 응용동작인 여러 가지 스핀들을 번갈아가며 열심히 되풀이했다. 헤드 스핀에서 윈드밀 스핀으로 이어지는 빠른 회전력이 바위의 엄청난 발사속도를 만들어냈고, 게다가 이제는 목표를 향해서 아주 정확하게 발사되었다.

수십 차례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결국은 삼족백오가 완성되었다. 하지만 그 크기는 보잘 것 없었다. 또한 완성되고도 여전히 영욱의 바위 공격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백오 떼는 한군데로 똘똘 뭉치려다가 결국은 전멸당하고 말았다. 삼족백오는 그저 페이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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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껍질 벗겨! 얼른!"

영욱은 자신이 잡은 백오에 대한 주장을 확실하게 했다. 영욱이 쏘아올린 바위에 맞아 죽은 백오들은 확연하게 표시가 났기 때문에 다른 드림헌터들은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존경심이 줄줄 흐르는 표정으로 도축작업을 돕기도 했다.

-대룡 소환!

-어? 여기는?

-얼른 먹어치워. 얼른!

-아, 알았어요. 주인님.

싸울 때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대룡의 소환이 백오의 사체 처리를 위해서 뜬금없이 이루어졌다. 물론 전투 중에 소환했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겠지만.

사실 백오 사체들의 처리는 대룡이 강해지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백오들이 삼킨 드림헌터들의 아이템들이었다.

그냥 두면 백오의 배를 갈라서 챙길지도 모르니 일단 대룡으로 하여금 삼키게 한 것이다. 대룡이 다 토해낸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그게 영욱에게는 훨씬 더 이익이기 때문이다. 왜냐면 대룡이 자신에게 마법서를 구해주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그럴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백오들의 사체 처리가 막 끝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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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마법사가 다시 나타나서 근처에 있던 드림헌터들에게 백오를 내놓으라고 닦달하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다 처리했단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마법사님."

"겨우 마흔 명이 그 많던 백오 떼를 해치웠다고? 나보고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소리야?"

"사실은 서른네 명입니다. 저들 여섯 명은 구경만 하고 있었으니까요."

돕기는커녕 구경하느라 방해가 되었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화리와 한극상 등이다. 

"누구냐? 마법의 위력에 가까운 바위 폭풍 초능력을 발휘한 자가?"

"락 스톰 초능력을 가진 자는 저입니다만 그것이 백오 떼를 처리한 것은 아닙니다요. 마법사님."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이냐?"

"예쁜 여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저 젊은이입니다."

"지금 나하고 장난치자는 건가? 아직 사퍼모어도 아닌 것 같은데 저런 애송이 녀석이 대체 무슨 초능력을 발휘했다는 거야?"

"포클레인을 소환하더니 갑자기 로봇으로 변신을 했습니다."

락 스톰 초능력을 사용했던 남자는 남자 마법사에게 굽실거리면서 경과보고를 이어갔다. 영욱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애써 등을 돌린 채로 화리와의 대화에 몰두하는 척했다.

"그래서?"

"마치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것처럼 땅바닥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바위들을 하늘 위로 빠르게 쏘아 올렸습니다. 그 바위 대포에 의해서 백오들이 모조리 전멸당한 겁니다."

"그렇다면 죽은 백오들은 어디에 있나?"

"저 사람이 소환한 대룡이 다 먹어치웠습니다."

"토룡이 아니고?"

"예. 분명히 대룡이었습니다."

"그래, 알겠다."

필요한 사전 정보를 모두 입수한 남자 마법사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영욱에게로 다가갔다. 도저히 납득하기가 힘든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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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유화리가 결국 짜증을 내면서 영욱을 종용했다.

"좀 팔라니까?"

"안 팔아. 같이 싸운 드림헌터들에게 열 장씩 나눠주느라고 겨우 이백 장 밖에 되지 않아. 그러니 너한테 팔 게 어디 있어?"

잡은 백오들의 숫자는 무려 삼천을 넘었지만 바위 대포의 위력에 의해 손상되어서 쓸 만한 가죽들은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2QB 세상이라면 그럴 리가 없겠지만 현실 세상이라서 회복력이 현저하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백 장이라고 해도 혼자서 다 걸칠 것은 아니잖아?"

"당연하지 하지만 내가 지금 걸치고 있는 것만 해도 열 장이 넘어. 그러니 백족 껍질을 판 것처럼 곧 후회하게 될 게 분명해."

"좋아. 그럼 내가 걸칠 거라도 좀 팔아."

"그건 저 드림헌터들에게 가서 사. 훨씬 더 싸게 살 수 있을 테니까."

"네가 나누어주는 백오의 기운이 없으면 더 이상 맞춤형 가죽이 아니잖아."

영욱과 화리는 남자 마법사가 다가오는 것에는 개의치 않고 열심히 흥정에만 몰입하고 있었다. 영욱도 전혀 팔지 않겠다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가격을 제대로 받겠다는 의도로 열심히 튕기고 있는 중이었다.

"좋아. 가죽 한 장에 현금으로 1억이다."

"그러지 말고 1억 줄 테니까 열 장만 줘. 응?"

"내가 미쳤어? 이게 얼마나 가볍고 포근하고 얇은 줄이나 알아? 네가 이 느낌을 전혀 모르니까 그런 망언을 쏟아낼 수 있는 거야."

"좋아. 5억 줄 테니까 열 장 줘."

"그 금액엔 절대로 안 팔아. 내 느낌으로는 하늘을 날아오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넌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자꾸만 할래? 더러워서 안 사!"

"내가 안 팔아!"

가격 협상은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었다. 열 장에 1억이 시세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음 나타난 환수 가죽의 시세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게 이상하지만 화리의 주장에 의하면 그게 시세표에 적힌 내용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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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협상이 결렬되자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은영과 소희가 얼른 끼어들었다. 그녀들도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남자 마법사를 유령 취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빠, 나는 살 거야."

"저도요."

"너희 둘은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는 애들이니까 당연히 구입하겠지. 아무튼 한 장에 1억이다. 알겠지?"

"당연히 갚을 테니까 달아둬."

"저도 영욱 씨처럼 열 장만 입어볼게요."

사실 함께 싸웠고, 소희의 경우에는 블라인드 초능력으로 큰 공을 세웠으니 구입이 아니라 제 몫을 배당받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 말만 이렇게 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배당을 받은 중이다.

"일단 소희 너부터 한 장씩 걸쳐봐. 욕심내지 말고."

"예."

영욱은 은영보다 소희에게 먼저 백오 가죽을 건네주었다. 그것은 그녀의 공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다. 소희는 무려 여섯 장을 걸칠 수 있었다. 백오 깃털 가죽 역시 맞춤형이 되면 얇은 티셔츠를 입은 것처럼 몸에 착 맞게 줄어드는데 그것은 열 장을 겹쳐 입어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세 장이면 끝일 줄 알았는데 여섯 장이라니 그동안 수련을 많이 했군."

"당연하죠. 영욱 씨를 이기는 그날까지 수련은 계속될 거예요."

"네가 무찔러야할 자가 우주대마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넘어야할 벽 정도는 된다고 봐야겠죠."

"오빠! 이젠 내 차례야."

"누가 뭐래? 너도 얼른 걸쳐!"

소희의 멋진 몸매 감상을 방해 받은 영욱은 다소 까칠하게 반응했다.

"나도 언니에게처럼 좀 친절하게 대할 수 없어?"

"외상이나 다는 주제에 친절까지 바래? 좋아, 한 장에 2억 준다면 백화점 수준으로 친절하게 대해주지."

"그냥 하던 대로 해. 아무리 외상이지만 두 배로 줄 수는 없으니까."

"그럼 빨리 입기나 해."

"던지고 난리야. 치."

은영도 무려 다섯 장이나 껴입는 기염을 토했다. 그녀 역시 특별 훈련의 효과를 크게 본 듯했다.

"정말 날아갈 것만 같아."

"그냥 농담을 한 게 아니라니까."

"정말이에요. 몸무게가 상당히 줄어든 것 같아요."

"그뿐만이 아니라 날갯짓을 한다고 상상하면 더 가벼워져. 그리고 거꾸로 날갯짓을 한다고 상상하면 몸무게가 더 늘어나니까 실험해 봐."

영욱은 두 여자의 귀에다 조용한 목소리로 맞춤형 백오 가죽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그런다고 해서 남자 마법사가 못 알아듣지는 않겠지만.

"어머! 정말이네요."

"소희 너는 날씬해서 서른 장만 겹쳐 입으면 진짜 날아갈 수도 있을 거야. 그럴 것 같지?"

"예."

"오빠, 나는?"

"너는 최소한 마흔 장은 겹쳐 입어야 하지 않을까?"

영욱은 눈을 일부러 게슴츠레하게 뜨고 은영의 몸매를 훑었다. 실루엣을 따라서 고개를 좌우로 요동치면서 몸무게가 많이 나감을 강조했다.

"내가 어디가 뚱뚱하다고 그래?"

"네 가슴 크기만 해도 어지간한 여자들의 몸무게는 되겠다. 안 그래?"

"호호호! 오빠가 그런 농담도 할 줄 알아?"

"왜? 내가 언제까지나 숙맥일 줄 알았어?"

"그래봐야 하나도 야하지 않아."

농담 삼아서 하는 말이지만 그 말에는 뼈가 들어있었다. 실제로 백오 가죽 한 장이 1kg 정도의 몸무게를 줄여주거나 늘려줄 수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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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알은체를 하지 않자 결국 남자 마법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눈치를 살피며 주위를 배회하기가 지겨웠던 것이다.

"잠시 실례하겠네."

"무슨 일이시죠?"

"먼저 내 소개부터 하겠네. 나는 동북아시아 지역을 관리하는 마법사 휼버린 디에고라고 하네."

"오! 말로만 듣던 마법사시로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박영욱이라고 하고, 얘는 진소희, 얘는 최은영 그리고 쟤는 유화리입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영욱은 갑자기 호들갑을 떨면서 남자 마법사를 반겼다. 여태까지는 유령 취급을 하더니 태도를 정반대로 바꾸어서 여자들까지도 소개하는 성의를 보였다. 놀란 은영 등도 영욱의 강권에 못 이겨서 배꼽인사를 해야만 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가장 예쁜 레이디들이 여기에 다 모여 있었군요. 호호호!"

"그런데 어제 다녀가시지 않았습니까?"

"어제도 여기에 있었던가? 못 본 것 같은데?"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다 기억하신다는 말씀인가요?"

"자네야 빠뜨릴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예쁜 숙녀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남자도 아니지. 안 그래?"

마법사라서 기억력이 아주 좋은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사실이 금방 밝혀졌다. 물론 너스레인지 진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랬었군요. 어제도 있긴 했지만 바위 밑에 깔려있어서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그랬었군. 어제 채취한 샘플이 조금 부족해서 다시 왔는데 자네가 다 싹쓸이를 해 버렸다고 하기에 이렇게 찾아왔네."

"남은 것은 가죽뿐인데 괜찮겠습니까?"

"어쩔 수 없지. 그거라도 가져가야 상부 마탑에서 개지랄을 덜 하지 않겠어?"

갈색 꼬부랑 머리에 전형적인 외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남자 마법사는 한국말을 아주 잘했다. 욕까지 유창하게 하는 걸 보니 통역 마법의 도움을 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마탑도 상부 하부가 따로 있습니까?"

"그냥 나보다 상전이라는 의미지. 아파트에 불과한 내 숙소를 파견 마탑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일종의 상징적인 의미야."

"마법사가 곧 마탑이다. 그런 뜻인가요?"

"잘 아는군."

"몇 장이나 드릴까요?"

"공짜로?"

"한 장이라면 공짜로 드리겠습니다. 마법사라는 귀한 존재를 보여주신 기념으로."

영욱은 상대가 마법사라고 해도 별로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상대는 그냥 다 넘겨 달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영욱에게 거래는 거래였다.

"마법사를 좋아하는 모양이군. 일단 그 한 장은 잘 받겠네. 하지만 백 장 정도를 더 구입하고 싶군."

"장 당 1억씩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달러로 환산하면 10만 달러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법사는 영욱이 요구하는 엄청난 금액에 깜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럴 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건가?"

"제가 선물로 드리는 가죽을 걸쳐보시면 그 가치를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러지."

"이건 백오의 기운입니다. 이것을 삼키면 맞춤형 가죽옷이 될 겁니다."

"그래? 그런 기능도 있었나?"

"일단 드셔보시면 압니다."

마법사는 독극물이 든 지렁이일 지도 모르는데 별로 두려워하지도 않고 삼켜버렸다. 자신감으로 미루어보아 해독에 관한 마법이라도 가지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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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오의 기운이 흡수되자 백오의 가죽이 휼버린 마법사의 몸에 맞게 착 달라붙었다. 

"음. 환수 가죽에게 이런 맞춤 기능이 있다는 건 솔직히 처음 알게 된 사실이야. 이 백오 환수 가죽만 그런 건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마법사님께서 모르신다니 솔직히 의외군요."

"그냥 휼버린이라고 부르게.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이 사실을 아는 마법사는 드물 것 같은데?"

"맞춤형이 되기 위해서는 해당 환수의 기운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좀 의외군요."

"솔직히 우리야 이런 아머 따위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지. 아이템 만들기에도 바빠서 철야하기가 일쑤니까 말이야."

휼버린은 다소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고 몸에 꼭 맞지만 마법사란 원래 로브처럼 헐렁한 옷을 더 즐기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욱은 이 마법사의 관심을 확실하게 끌어낼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가진 능력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수십 장을 겹쳐 입을 수도 있습니다."

"뭐라고? 그렇다면 몇 장을 더 입어볼 기회를 주게."

"한 장을 더 공짜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음, 2kg에 해당하는 양력이 발생하다니 놀랍군. 환수 가죽들이 이 정도의 기능을 제공한다면 아이템을 개발하기도 훨씬 더 수월할 것 같군."

그저 기분만 가벼워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확인한 휼버린 마법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새로운 아이템 개발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사람을 날아다니게 만드는 아이템 말입니까?"

"이 백오 가죽들은 그런 용도로 사용하면 도움이 될 것 같군. 그리고 무거운 아머의 무게를 줄여주는 용도로도 활용이 가능할 것 같고 말이야."

"그렇다면 10만 달러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당연하지. 단, 백오의 기운도 함께 제공되어야 할 것이야."

완성된 아이템 하나만 만들어 팔아도 족히 100골드는 받을 수 있을 테니까 휼버린은 재료비를 아끼지 않았다.

"그것도 당연한 요구이십니다. 하하!"

"100장을 판매하겠다고 했으니까 천만 달러를 자네 통장에 송금해주면 되겠군."

"여기, 돈을 부쳐야할 통장 계좌 번호입니다."

"지금 당장 송금하겠네."

거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영욱이 백오 가죽과 함께 건넨 백오의 기운을 담은 지렁이들은 대룡이 2QB 세상으로 돌아가기 전에 낳아주고 간 것이다.

@

"혹시 원하는 사냥 아이템은 없나?"

영욱이 큰돈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는 마법사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기 전에 호객 행위를 자처했다. 그게 가장 많이 남기는 길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욱이 사냥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짐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박득환의 통장으로 송금된 돈 역시 벌써 산이나 임야의 구매 대금으로 빠져나갔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마법서를 사려고 돈을 모으는 중입니다만 아직은 요원합니다."

100장의 백오 가죽을 팔아서 무려 천만 달러를 벌고도 마법서를 사기에는 아직도 요원했다. 최하 1,000장을 팔아야만 가능한 금액이기 때문이다.

"마법에 관심이 있나?"

"예. 재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배워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네의 재능 여부를 알아봐주도록 하지. 원래는 돈을 받은 것이지만 자네도 백오 가죽을 두 장이나 선물로 주었으니 나도 공짜로 해줌세."

"고맙습니다. 그런데 마법사의 자질을 알아보는 게 정말로 가능합니까?"

"당연하지. 내 임무 중의 하나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예비 마법사의 발굴이니까 나보다도 잘 아는 마법사는 없다고 봐야지."

"그렇군요."

영욱은 제아무리 마법이지만 보통 사람의 미래도 알기가 어려운데 마법사의 자질을 알아본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가 않았다. 만일 마나 친화력으로 그런 결론을 내리는 거라면 마법사는 머리가 좋아야 한다는 공식이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잠시 가만히 있게나. 마나 스캔!"

"……."

"안타깝지만 마법사로 대성하기는 어려울 것 같군. 그렇다고 전혀 재능이 없는 것 같지도 않고……. 사실 스캔 결과가 애매하게 나왔어."

"절망적인 말씀은 아니군요. 혹시 마법서를 팔아먹으려고 하시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하하하! 벌써 들킨 것 같군. 하지만 전혀 가망성이 없는 정도는 아냐."

영욱의 예상대로 마나 친화력을 체크하고서 내린 결론인 듯했다. 마법사들은 정신력이나 특정 기운을 마나라는 효과적인 특수 기운으로 전환해서 사용하는데 그걸 마나 친화력으로서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듯했다.

영욱은 마법사가 마나 스캔이라는 마법을 걸 때 자신의 몸속을 헤집고 다닌 기운이 바로 마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박상태로부터 받은 잡다한 기운들 중의 하나였기에 그 정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박상태에게 영혼의 일부를 물어뜯긴 희생자들 중에서 마나 친화력이 뛰어난 자가 있었던 듯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꽤 여러 명이었던 듯했다. 그러니 영욱에게까지 국물이 튄 것이다.

원래 영욱에게는 마나 친화력이 전혀 없는데 영욱의 몸에서 소량이나마 마나가 발견되었으니 판정하기가 애매했을 것이다. 아무튼 영욱으로서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마법사가 되는데 그렇게 뛰어난 지능은 필요하지 않은 듯했고, 마나 친화력은 박상태로부터 관련된 기운을 빼앗아서 조금이나마 더 키울 수 있을 테니까 이제는 마법서만 구입하면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재능이 전혀 없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노력은 누구보다도 더 많이 할 수 있으니까 꼭 돈을 모아서 마법서를 구입할 생각입니다. 최소한 읽어보기는 해야 미련이 남지 않을 테니까요."

"꼭 그런 날이 오기를 빌겠네. 그리고 돈이 마련되면 내게 연락을 하게."

휼버린은 영욱에게 자신의 전화번호가 인쇄된 금박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렇다면 휼버린 씨께서도 마법서를 판매하신다는 말인가요?"

"넓은 지역을 나 혼자서 관리하다 보니 그런 잡무도 가끔씩 담당해야 한다네. 하하!"

"그렇다면 최소한 사기 당할 일은 없겠군요."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아니더라도 마법사는 절대로 사기를 치지 않아."

"마법서를 사는 과정에서 가끔이지만 그런 일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 아니었군요."

영욱은 똥 씹은 표정으로 변하는 화리의 얼굴을 곁눈질로 쳐다보면서 비아냥거렸다. 이제 마법서 공동구매는 물 건너갔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것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뒤통수를 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은 아깝지만 오히려 속이 후련한 구석도 없지는 않았다.

"명예를 존중하는 마법사들이 하는 일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나? 겨우 푼돈이나 벌겠다고 그런 치사한 짓을 해?"

"1억 달러가 푼돈이란 말입니까?"

"마법 공부는 시쳇말로 돈 먹는 하마라고 표현할 수 있지. 최소한 조 단위는 투자해야 겨우 마법 실험다운 실험이 가능하니까 말이야.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마법 실험 없이 서클을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마법 아이템의 값이 그렇게 비싼 거였군요."

"맞아. 그리고 아이템 판매로 얻는 수익 역시 연구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푼돈일 뿐이야."

휼버린의 입에서는 그야말로 돈지랄에 대한 설명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그의 말이 풍기는 뉘앙스에 의하면 마법사들 역시 골드나 돈을 버는 최종 종착지는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돈은 마법 실험 재료를 파는 자들이 벌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게 무엇이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연구비의 일부를 대는 목적으로 아이템을 만든다는 말입니까?"

"당연하지. 나야 실패할 확률이 별로 없지만 하급 마법사들이야 그렇지도 않으니 재료비를 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공장에서 찍어내는 게 아니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당연하지. 그리고 마법사들은 자신이 한 번 만든 아이템을 두 번 다시 만들지는 않아. 늘 새로운 마법을 익혀서 새로운 아이템 제작에 도전하게 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마법사분들이 배운 마법의 성취가 아이템에 고스란히 담긴다는 소리로군요."

"맞아. 일종의 작품인 셈이지. 화가가 그림을 그리거나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 듯이."

휼버린은 자기 자랑을 겸해서 마법사들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그는 영욱의 상술과 환수 사냥 능력으로 보건대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의 고객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마법서와 아이템의 가격에 대해서 미리 이렇게 연막을 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욱의 관심사는 이미 다른 곳에 가있었다.

"그렇다면 겉으로는 허접하게 보이는 아이템 중에서도 실제로는 대단한 진품이 숨어있을 수도 있겠군요."

"맞아. 그런데 어떻게 그런 짐작을 해낸 거지?"

"그야 짐작이지요. 지금은 아주 높은 경지에 올라간 마법사라도 처음에는 아주 허접한 아이템 제작부터 도전했을 테니까 말이죠. 하지만 그런 분이 만든 아이템이 다른 마법사들이 만든 것과 같을 리 없잖아요."

"맞아. 짐작을 제대로 했군."

"그리고 원래 진짜 좋은 것은 그것을 보거나 이용하는 사람의 수준이 높아야 이해할 수 있거나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눈이 허접하면 아이템도 허접하게 보이는 거죠. 하하하!"

"제법 똑똑한 친구군. 자네 말대로 초보자들이 이용하기가 쉬운 아이템들은 대부분 저급한 것들이야. 반면에 초보자들이 이용하면 증폭 배율이 별로 크지 않는데 전문가들이 이용하면 엄청난 배율로 증폭이 가능한 아이템이야말로 고급 아이템인 셈이지."

휼버린은 영욱의 지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장비가 초보자용 장비보다 훨씬 더 조작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영욱으로서는 그런 짐작이 어려울 리 없었다. 영욱의 입장에서는 장비나 아이템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제어할 수 있느냐? 휘둘리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다면 성능이 조금씩 변화하는 아이템은 어떻습니까?"

"그게 바로 고급 아이템일 가능성이 높지. 자네 말처럼 성능이 변화하는 게 아니라 그걸 사용하는 사람의 실력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봐야겠지."

"그런 게 있긴 있었군요."

휼버린은 영욱이 착용하고 있는 사파이어 귀걸이 아이템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남자인 영욱이 피어싱을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채로운 시선을 보냈다. 

사실 영욱은 아토피에 좋다는 어느 한의사의 말을 듣고 눈물을 머금고 뚫어둔 것인데 그게 귀걸이 아이템을 착용하는 것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준 것이었다.

"당연하지. 자네가 귀에 걸고 있는 그 사파이어 귀걸이도 겉으로는 평범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상당히 좋은 아이템이지."

"그렇습니까? 저로서는 반가운 소식이군요."

"게다가 그걸 만든 여마법사가 지금은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갔으니 혹시라도 그녀를 만날 기회가 있다면 튜닝을 부탁하는 것도 가능할 거야. 마법사들이란 귀찮고 사소한 일을 질색하는 편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작품이니까 거절하지는 않을 걸세."

"대박이군요. 그 마법사님의 성함이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헬렌 컬러야. 세상에서 몇 안 되는 고위 마법사들 중의 한 사람이지. 보아하니 그녀가 아주 젊은 시절에 만든 작품 같아 보이는군."

영욱은 그 여자 고위 마법사가 헬렌 켈러와 이름이 비슷한 이름을 가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법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시각장애자와 청각장애자 들처럼 보거나 들을 수 없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가 운이 좋았군요. 그게 아니면 눈이 좋았든지."

"그렇다면 여러 개의 아이템들 중에서 그것을 골랐다는 말인가?"

"예. 열여섯 개의 아이템들 중에서 이게 제일 마음에 들더군요. 그래서 남자가 창피를 무릅쓰고 귀걸이 아이템을 착용하게 되었습니다."

"키도 크고 인물도 좋은 편이라서 잘 어울리는데 뭘 그래."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영욱은 휼버린의 시선이 자꾸 자신의 귀에 머무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얼른 인사를 하고는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런데 휼버린이 다급하게 영욱을 막아섰다.

"잠깐만! 혹시 다른 종류의 가죽은 없나?"

"저에게는 없지만 화리에게 몇 장 정도의 여유는 있을 겁니다."

"화리 양은 상인이신가?"

"예. 백족 껍질이 있는데 아마도 몇 장 정도는 판매할 수 있을 겁니다."

영욱은 휼버린을 화리에게 떠넘기고서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대신 붙들린 화리는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백족 껍질의 일부를 팔기로 했다. 마법사인 휼버린의 눈에 거슬렸다가는 나중에 공격 아이템을 구입할 때 곤란하게 될 테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화리양, 그것도 맞춤형인가?"

"예. 영욱이 잡은 환수라서 그래요."

"그렇다면 또 그 지렁이를 먹어야 하는 건가?"

휼버린은 화리가 백족 껍질과 함께 꺼내는 지렁이를 보고서 기함을 했다. 영욱도 지렁이를 건네주었지만 그런 일이 또다시 반복되니 그리 즐거울 리 없다.

"예. 얼려두긴 했지만 셔벗처럼 맛있는 것은 아니죠. 좀 그런가요?"

"아닐세. 마법사는 마나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먹을 수 있는 존재지. 이건 비밀이지만 사람의 심장을 먹는 자들도 존재하니까 판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야. 하하하!"

"서, 설마 마법사님께서 그렇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당연하지. 그래, 이건 얼마짜린가?"

먹는다는 말인지 아니라는 말인지 모호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아무튼 흥정은 계속되었다.

"영욱에게서 10개당 8골드에 구입했어요."

화리는 판매 희망 가격을 제시하는 대신에 구입한 파격적으로 원가를 공개했다. 마법사라는 존재에게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에 선처를 바란다는 식의 고단수의 협상 기술을 사용한 것이다.

"그럼 다섯 개이니까 40골드를 주면 되겠군. 상인들의 마진폭은 보통 원가의 아홉 배니까."

"그렇게 쳐주신다면 정말 고마워요. 호호호!"

"고맙기야 내가 더 고맙지. 내가 언제 이런 맞춤옷을 입어보겠나? 하하하!"

휼버린은 상당히 비싼 가격을 지불하겠다고 선언하고도 표정이 아주 밝았다. 그 가격 이상의 효용을 지닌 물건임을 확신하는 듯했다. 그는 백족의 기운이 담긴 지렁이 샤베트를 먹고 백족의 껍질들을 하나씩 걸치기 시작했다. 옆에서 눈치를 보던 화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때요?"

"좋아. 아주 좋아. 무려 다섯 장을 입어도 티셔츠 한 장을 껴입은 것보다 얇고 가볍군. 그러나 상당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어."

백족 껍질 다섯 장이 40골드에 거래가 이루어지자 영욱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휼버린과 화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가격 구조라면 자신은 무려 800골드에 해당하는 8,000만 달러를 받아야 했는데 겨우 1,000만 달러밖에 받지 못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이미 거래가 끝났으니 뒤집을 수는 없겠지만 화리의 상술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사기와 협박만이 아니라 상대의 자존심을 이용할 줄도 알았던 것이다. 게다가 둘의 거래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알기에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한 수 배우기로 했다.

"그런데 왜 절 쳐다보시는 거죠?"

"조금만 더 팔게. 보아하니 좀 더 겹쳐 입을 수도 있는 것 같은데?"

"재고가 있긴 하지만 제 부하들을 무장시킬 용도로 비싸게 구입한 거라서……."

"그렇다면 열 개에 400골드를 주지."

화리가 판매를 망설이자 휼버린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가격을 몇 배로 올려서 제시했다. 그로서는 맞춤형 백족 껍질이 마음에 꼭 드는 듯했다. 

사실 가볍고 방어력이 강한 아머의 필요성은 마법사들이 오히려 더 느끼고 있다. 공격력은 매우 강하지만 방어력은 상대적으로 형편없는 게 마법사들의 보편적인 고민이기 때문이다. 

물론 방어 마법을 사용하면 어지간한 공격도 다 막아낼 수 있지만 늘 그 상태로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맞춤형 속옷처럼 입고 다닐 수 있는 백족 껍질은 최고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머나! 그 가격이라면 당연히 드려야지요. 그리고 덤으로 하나를 더 드리겠어요."

"어이쿠! 덤까지. 정말 고마워."

휼버린은 큰돈을 지불하고도 겨우 덤 하나에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만큼 화리의 상술이 뛰어남을 의미했다. 그녀는 마법사들에게 몇 백 골드란 그저 껌 값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휼버린은 추가로 구입한 열한 개를 그 자리에서 모두 껴입는 기염을 토했다. 영욱도 스무 장이나 껴입고 있으니 열여섯 개를 껴입은 게 별로 이상할 것도 없지만 화리는 깜짝 놀라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그 역시 상술이긴 하지만 마법사는 화리의 그러한 시선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다.

"총 열여섯 장을 껴입은 것인데도 여전히 티셔츠 한 장 입은 느낌이야. 명품 맞춤복이 좋은 줄을 알았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저도 상인이지만 이런 물건은 처음 만져보았어요. 어쩌면 영욱만이 공급 가능한 물건일지도 모르니까 일단 마법사님만 알고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흠! 상부 마탑에는 보고하지 말라는 말인가?"

"예. 당분간은 우리들의 배를 채우기도 힘들 것 같아서 말이죠."

"내 몫을 챙겨주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당연하지요. 제가 책임지고 챙겨드리겠어요. 호호호!"

"그럼 화리 양만 믿겠네. 하하하!"

휼버린은 아직도 백족 껍질 몇 장을 더 얻고 싶은지 화리에게 친한 척을 했지만 화리는 상인답게 더 이상 덤을 준다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 입단속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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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둘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영욱은 속으로 열불이 났다. 자신은 제쳐두고 둘이서 앞으로 자신이 사냥할 환수 가죽을 흥정하고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상술의 차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은 고작 1골드를 받았는데 화리는 열 배에서 쉰 배까지도 받아내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사람이 번다는 말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꼴이 보기 싫어서 자신이 모두 소화시키겠다고 했는데 새로 노예를 거느리는 일은 생각대로 쉽지만은 않았다. 사실 그럴 기회조차도 없었으니 당분간 병력을 늘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꿈이라고 봐야만 했다. 

영욱이 매우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환수사냥꾼 세 명이 다가와서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말씀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이시죠?"

"저, 저희들도 데리고 다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할 리 없다. 세 사람은 영욱의 노예가 되기를 간청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영욱은 다소 생뚱맞은 소리에 놀라서 진의부터 파악하고자 했다. 물론 농담 따먹기를 하러 온 것 같지는 않았다.

"노예상인에게 팔지만 않겠다고 약속하신다면 저희들을 노예로 삼아달라는 말입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 거죠?"

"사실 예전의 박상태를 압니다. 그리고 지금은 몇 배로 강해졌다는 것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삼족백오에게 죽었을 목숨을 살려주신 분이시니 저희들을 거둘 자격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제가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노예를 자처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거북하군요. 상태는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상황이라서 어쩔 수 없이 거두게 된 거지만."

영욱은 상태와는 상황이 다름을 지적하면서 세 사람의 의도를 경계했다. 이미 노예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이런 상황이 아직도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세나 무협 소설 속의 세상이 아니니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노예를 자처하는 세상은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달리 노리는 것이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런 사이였는데도 저렇게 챙겨주시니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겠다는 저희들은 더 챙겨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노예 따위에게 무엇인가를 챙겨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공동운명체가 되었으니 가장 기본적인 것을 조금 나눠준 것뿐입니다. 더 챙겨주기를 바라고 오셨다면 잘못 생각하신 겁니다."

영욱은 노예를 모시고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말로만 그렇게 해주겠다고 공수표를 발행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런 식으로 거짓말을 하면 이들을 쉽게 노예로 거느릴 수는 있겠지만 마음마저도 승복하는 진정한 노예는 결코 될 수 없을 테니까.

"아, 아닙니다. 저희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저 거두어만 주십시오."

"다들 부모형제가 있을 텐데 금치산자나 가축과 다를 바 없는 노예가 되어서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러니 어서들 돌아가세요."

"저희들은 고아들이나 다름없습니다. 가족들 모두가 환수 사냥에 나섰다가 오히려 당해서 죽거나 살아있으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옆에서 환자들을 잘 돌보아야 할 거 아닙니까?"

"사냥을 해서 돈을 버는 게 식물인간인 가족들을 돕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시겠지만 병원비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영욱은 이들이 자신과 휼버린과의 거래를 보고서 결심을 굳힌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비록 화리만큼은 못하지만 순식간에 천만 달러를 벌었으니 자신들이 노예가 되면 상당한 몸값이나 임금을 지불할 것으로 기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영욱은 남의 일만은 아니라서 가슴이 아프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책임져야할 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뭔가 잘못 생각하셨군요. 저는 제 노예들에게 공짜로 베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이템을 외상으로 준 것이라서 나중에는 모두 돈으로 돌려받을 겁니다."

"저는 예전부터 박상태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밝은 표정을 본 적은 없습니다. 저렇게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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