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욱은 화리로부터 회수한 백족 껍질들을 한 장씩 겹쳐 입기 시작했다. 걸친 껍질들은 먼저 자리를 잡고 있는 백족 껍질 바깥쪽으로 이동해서 영욱의 몸에 딱 맞게 줄어들었다.
호그질라 가죽과 몽구스 가죽이 바깥을 막고 있었지만 물리적인 법칙을 깡그리 무시하고서 안으로 이동하는 놀라운 재주를 보여주었다. 알고 보면 껍질과 껍질 사이에 물건을 수납하는 것과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놀라는 이유는 이곳이 2QB 세상이 아니라 현실 세계라는 데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두 세상이 겹쳐져서 환수가 출현 가능한 지역이니 그런 일이 벌어져도 신기할 것도 없는 셈이다.
아무튼 그러한 묘기가 열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께는 거의 변하지도 않았다.
-박상태.
-예. 선배님.
-너도 한두 장 정도는 더 걸칠 수 있을 거야.
-해보겠습니다. 선배님.
박상태도 무난하게 한 장을 더 걸칠 수 있었다. 그동안 열심히 수련했다는 방증이다.
-한 장 더 걸쳐볼래?
-예. 선배님.
놀랍게도 또 걸치는 것이 가능했다. 사실 영욱이 열 장이나 더 걸쳤으니 겨우 두 장 더 걸친 것을 가지고 놀랄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석 장도 겨우 걸친 게 불과 어제의 일이니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2QB 세상에서 벌어진 일이고, 그쪽의 시간으로는 열흘 이상 흘렀지만.
-한 장 더 걸쳐봐.
-예. 선배님.
아쉽지만 두 장 째가 마지막이었다. 그것은 백족의 기운을 더 삼킨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니다.
-너희들도 한 장씩 걸쳐봐.
-예. 선배님.
영욱은 자신의 노예들을 차례로 챙기기 시작했다. 현실 세상이니까 부리가 아주 날카로운 백오와 싸우려면 노예들의 아머부터 확실하게 챙겨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
그 모습을 보더니 화리가 불평을 토로했다. 좁아 죽겠는데 자꾸만 움직이니 짜증이 나지 않을 리가 없다.
-좁은 곳에서 꼭 이래야겠어?
-큰 싸움을 앞두고 무장시키는 게 뭐가 어때서? 너도 놀지 말고 겹쳐 입거나 네 부하들이라도 무장시켜.
그 말을 들은 화리도 지렁이 아이스크림 속에 든 백족의 기운을 삼키고 백족 껍질을 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극상과 부하들에게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현실 세상에서 그런 게 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너는 아직도 이곳이 현실 세계라고 생각해?
-겹친 곳이긴 하지만 엄연히 보자면 현실 세상이지.
-나타난 환수 녀석들이 좋아할 소리만 골라서 하는군. 아무튼 나는 바쁘니까 다음에 놀자.
-또 잘난 척하고 지랄이야.
영욱은 지금 이곳 백우산이 현실 세계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의 윈드밀 스핀 동작에 의해서 땅굴이 뚫리는 속도가 도저히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다.
@
-한 장씩 더 걸쳐봐.
-예. 선배님.
김호진과 윤승언도 두 장을 더 걸칠 수 있었다. 대단한 발전이긴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
영욱이 자신의 노예들을 챙기고 나자 이번에는 은영과 소희가 손을 내밀었다.
-우린 왜 안 줘?
-한 개에 1골드야.
-알고 있으니까 달아둬.
-좋아. 그럼 걸쳐 봐.
진소희와 은영도 두 개씩을 더 걸칠 수 있었다. 어쩌면 더 걸칠 수도 있겠지만 갚아야할 골드가 부담스러운지 더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전에는 외상이라면 소도 잡아먹을 것처럼 굴었지만 이제는 결국 갚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런지 그렇게 환장하지는 않았다.
그 사이에 유화리와 한극상 등도 하나씩을 걸쳐 입었다. 맞춤형이고 아주 얇아져서 겉으로는 걸친 표시도 나지 않았지만 방어력 상승에는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트랜스파워
팍. 팍.
백오들은 더 이상 사냥할 대상이 없어지자 영욱 일행이 숨어있는 곳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결국 영욱의 판단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녀석들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정말로 우리가 숨은 곳을 알고 있었군요.
-교활하고 영리한 놈들이니까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먹을 것이 바닥나면 챙겨먹으려고 했겠지.
-그런데 정말로 땅을 잘 파요.
-그러게.
-불과 몇 초 후면 이곳까지 도착할 것 같아요.
-젠장. 저 녀석들은 2QB 세상이나 다를 바가 없는 능력을 발휘하잖아.
땅을 파는 게 아니라 대룡처럼 아예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영욱으로서도 다급한 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도달했어요.
영욱이 파고 들어온 땅굴을 넓혀서 파고드는 게 아니라 아예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드는 상황이라서 누구라도 사정을 다 알 수 있었다. 밝은 빛이 환하게 들어왔으니까.
까옥!
이윽고 백오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가장 바깥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영욱이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영욱은 기계체조 심화 동작의 초식으로 백오들의 날카로운 부리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퍽. 퍽.
"젠장! 팔이 부러지는 것처럼 아파. 부리가 왜 저렇게 강한 거야?"
ULM 실드를 치고 여러 가지 환수 가죽으로 열 겹 이상 도배했지만 백오들의 날카로운 부리를 당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는 아니었고, 팔과 다리가 떨어져나가는 일도 발생하지는 않았다.
까옥! 까옥!
전면에 선 영욱이 제법 버티기 시작하자 백오들의 일제 공격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공격함으로써 손이 두 개뿐인 영욱이 방어하지 못하게 하려는 지능적인 술수였다.
"젠장! 포크만 있다면 이따위 조류들쯤이야 아무 것도 아닌데. 응?"
결국 피하지 못하고 머리와 귀를 쪼인 영욱이 아쉬워서 해본 소리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앙증스러운 사이즈의 미니 포크가 영욱의 앞에 소환되었다. 2QB 세상에서나 가능한 줄 알았던 소환이 이곳 페스티벌 지역에서도 가능했던 것이다.
까옥! 까옥!
영욱은 백오 환수들이 괴물체의 출현에 깜짝 놀라는 틈을 이용해서 미니 포크에 탑승하고는 힘차게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잔상수족 등의 심화 동작을 펼치며 백오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백오들은 벌써 저만치 물러나서 포크의 공격에 당한 녀석은 하나도 없었다.
"뭐야? 저 새끼들, 정말 새 맞아?"
영욱은 포크를 소환하고도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기함할 일도 아니라는 걸 곧 깨닫게 되었다.
쾅! 쾅!
영욱이 포크를 소환하자 백오들은 직접 공격하는 대신에 커다란 바위와 돌 들을 하늘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냥 떨어뜨리는 게 아니라 있는 힘을 대해서 수직 강하를 펼치다가 미사일처럼 발사하는 공격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영욱은 포크의 소환을 해제하고 얼른 굴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럴 만한 공간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일단 출근 시간 지하철을 타는 것처럼 힘으로 밀고 들어갔다.
쿵! 쾅! 쿵! 쾅!
수백 마리에 이르는 백오들의 무차별 바위 투하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아예 바윗돌로 영욱 일행을 산 채로 묻어버리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영욱이 숨은 곳은 곧 너드랑 지역처럼 변해버렸다.
-맙소사! 얘들은 작정하고서 하는 짓 같아요.
-포크를 정면으로 감당할 자신은 없는 모양이지. 하지만 강한 날개를 이용한 바위 폭격이라니 정말로 기가 막히는군.
-이제 어쩌죠?
-어쩌겠어? 살고 싶다면 가만히 엎드려 있어야지.
-이대로 있다가는 바위산에 갇힌 손오공 신세가 되고 말 것 같은데요?
-탈출을 시도할 때는 하더라도 지금은 한낮이라서 곤란해.
영욱은 백오 환수들의 부리에 쪼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고 판단했다. 땅을 파는 일이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너무 좁아서 숨이 막혀요.
-맞아. 누구 발이야. 내 코에 들이댄 발이?
은영은 자신의 얼굴에 들이댄 발을 밀어내며 불평을 토로했다. 발의 주인이 모르쇠로 일관하자 결국 꼬집어 버렸다.
-아야! 꼬집지 마.
-좀 치워주면 안 될까? 아무리 오빠지만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지 않아?
-치울 공간이 있어야 치우지. 조금만 참아.
백우산의 너드랑 지대에 있던 바위들로는 부족해서 옆에 있는 백암산 너드랑 지대의 그 많은 바위들도 다 가져다 퍼부은 듯했다. 아예 거대한 돌산을 만들어서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영욱을 묻어버리려는 행동이었다.
영욱은 제 3의 눈으로 주변의 땅속을 살폈다. 하지만 아쉽게도 완전히 바위로 포위된 형국이라는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이다.
탈출하려면 수천 개 이상 쌓아둔 바위 무덤을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흙 속에 매장된 것이 아니라서 공기는 잘 통하니 숨은 쉴 수가 있다는 것이다.
-좁아서 그러는데 앞쪽의 흙이라도 좀 더 파낼 수 없어요?
영욱이 나중을 대비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어처구니가 없어진 소희가 시비를 걸었다. 확장 공사를 하라는 소리는 그저 시비를 걸기 위한 트집일 뿐이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사방팔방이 온통 바위로 막혀있어. 도저히 뚫고 나갈 방법은 없으니까 너도 잠이나 자둬.
-그럼 이제 우린 죽은 거네요?
-그럴 확률이 더 높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땅속으로 숨어든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계획이었군요.
-가만히 있었으면 들키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너 때문에 들켰잖아.
그 짧은 사이에 선잠이 들었다가 소희 때문에 잡쳐버린 영욱이 짜증을 내면서 대꾸했다.
-그 정도의 작은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녀석들이 처음부터 몰랐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일부는 들켜도 일부는 살아남을 수 있었겠지.
-그렇게라도 혼자 살아남아야겠어요?
-모두가 성인들인데 내가 책임져야할 이유라도 있어? 왜 나한테 따지는 거야?
-그만들 해. 지금이 싸울 상황이야?
둘의 언쟁을 듣다 못한 은영이 중재에 나섰다. 사실은 소희와 영욱의 싸움이 마치 오래 사귄 연인들의 다툼 같이 들려서 얼른 개입한 것이었다.
-영욱 씨 때문에 땅 속에 파묻어놓은 도시락 신세가 되었는데 따지지도 못해?
-그래도 내 덕분에 몇 시간이라도 더 목숨을 연장한다는 거 몰라서 그래?
-녀석들에게 들킨 것을 내 탓으로 돌리니까 하는 말이죠.
-그게 사실이잖아.
-그럼 그게 사실인지 쟤들에게 물어볼까요?
은영이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유치한 책임공방론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영리한 녀석들이긴 해도 텔레파시를 교환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누구에게 물어봐? 제발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해.
-오빠가 참아. 언니도 나처럼 이 상황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무섭다고 왜 나를 갈구고 그래? 그리고 무서워한다고 살아날 길이 열리지도 않아. 오히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는데 자꾸만 짜증을 부리잖아.
-발 하나를 언니의 얼굴에 들이밀면 그런 생각이 안 들 거야. 발 고린내 때문에. 호호호!
상황이 두렵기도 하겠지만 소희에게는 폐쇄공포증이 있는 듯했다. 은영의 말을 듣고서야 그런 생각이 든 영욱은 자신이 참기로 했다.
-너는 은근히 즐기는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느낀 건가?
-맞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즐기기로 했어. 호호호!
-탈출할 곳이 있는지 찾아볼 테니까 제발 좀 조용히 해줄래? 둘 다.
-알았어. 잘 부탁해. 오빠.
할 말을 마친 영욱은 발 하나를 소희의 얼굴 쪽으로 디밀었다.
-뭐, 뭐예요?
-내 발이 아냐.
-혹시 변태 아니에요?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어.
-영욱 씨의 발이 아니라면서요?
-잘 알면서 자꾸 따질래? 조금만 참아.
-제발 발 좀 씻고 다녀요.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어? 아무튼 조금만 참아.
영욱은 은영의 충고대로 소희의 자신의 발 고린내로 소희의 입을 막기로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큰 효과가 있어서 조용해졌다.
@
영욱은 다시 제 3의 눈을 동원해서 탈출할 길이 없는지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탈출로는 없었다.
영리한 백오 환수들이 크기가 다른 바위들을 사용해서 탈출할 수 있는 빈틈이 전혀 없도록 차곡차곡 쌓았기 때문이다. 마치 석축 전문가들이 성벽을 쌓은 것처럼 머리 하나 들어갈 틈도 없었다.
-예술이군. 예술이야.
-뭐가요?
-완전 피라미드 저리 가라야. 탈출할 구멍은 어디에도 없어. 그리고 숨구멍을 남겨둔 것마저도 백오들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것 같아.
-우리가 죽어서 부패하지 않도록 말인가요?
-맞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아.
영욱은 이 돌무덤이 처음부터 의도된 공격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아래쪽이나 옆도 그래요?
-내가 전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위로 막힌 곳으로 파고들었으니까 당연히 그럴 수밖에.
-그럼 우린 죽는 건가요?
-지금으로서는 그럴 확률이 가장 높다고 봐야겠지.
-지금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요.
고린내를 풍겨서 잠시 침묵시켜 두었던 소희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긴, 그렇게 예쁘니 죽고 싶을 리가 없을 것이다.
-당면한 문제를 남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게 가장 좋은 문제 해결의 자세야. 다들 이번 기회에 활인심방이나 수련하도록 해.
-예. 선배님.
-지금이 한가롭게 수련이나 할 때예요?
-응. 달리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걸 해도 좋아. 똥 싸는 것만 빼고.
-그럼 잠이나 잘래요. 제발 발 좀 가만히 있지 못해요?
-마음대로 하셔.
영욱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려서 의도적으로 냄새를 더 피우자 소희도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
매우 불편한 자세지만 영욱은 개의치 않고 활인심방을 수련하기로 했다. 그런데 장소가 땅속이라서 그런지 토정에 해당하는 기운이 대량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물론 활인심방의 효용만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이미 영욱의 몸속에 자리 잡고 있는 토정들이 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다. 토정뿐만이 아니라 빙정 역시 땅속의 차가운 기운을 힘차게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좌우명천고.'
두두두둥.
양손 검지로 뒷머리를 두드리니 그 소리가 마치 큰북 치는 소리를 상회할 정도로 우렁차게 들렸다. 그 소리는 단지 소리로만 그치지 않고 기운의 흡수와 순환을 돕고, 영욱의 심신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어지간한 불로는 돌들을 용암처럼 녹이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하면 쉽게 깰 수는 있을 것 같네. 특히 물을 흘려 넣어서 얼리면 더 잘 깨어지겠지. 그것도 바위 전체를 다 깨겠다는 것은 아니니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군.'
마음이 차분해지자 나름 해법에 가까운 방법들이 떠올랐다. 하루 이틀 만에 끝날 굴착 공사는 아니겠지만 그냥 넋을 놓고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빙구氷球! 빙구! 화구! 화구!
활인심방을 계속 수련하면서 탈출 작업도 병행하기로 했다. 축축한 수분을 염동력으로 모아서 얼리고 녹이는 작업을 반복했다. 화구 때문에 대량의 산소가 필요했지만 다행스럽게 그 정도는 염동력을 이용해서 공급이 가능했다.
영욱은 바위와 바위 사이에 나있는 그나마 비교적 넓은 틈을 이용해서 넓히는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나긴 작업의 시작이었다.
@
-오빠,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 같은데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어?
시간이 제법 흐르고 나서야 깊은 잠이 들었던 은영이 깨어나서 말을 걸었다.
-언제 일어난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코를 예쁘게 골고 있더니.
-화구 덕분에 따뜻해져서 푹 잘 잤어. 그런데 지금 몇 시나 된 거야?
-오후 4시 반쯤 되었을 거야. 이곳은 깊은 산중이니까 이제 곧 해가 질 거야.
-백오 환수들은 지금 뭐하고 있어?
-하루 종일 근처에 숨어 있는 드림헌터들과 상인들을 찾아내서 집요하게 공격하더니 지금은 다들 한 곳으로 모여서 밤을 보낼 준비를 하는 것 같아.
영욱은 묻는 족족 바깥의 상황을 중계방송 하듯이 알려주었다. 제 3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가 제법 넓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어디서?
-바로 이 돌 무덤 위에서.
-돌무덤을 꽤나 높이 쌓아올린 모양이지?
-어지간한 왕릉은 저리 가라고 할 높이니까 작은 산이라고 봐도 될 거야.
-그럼 어떻게 다 뚫어?
-어차피 위로 뚫고 올라갈 생각은 아니니까 상관없잖아.
-오빠 말처럼 여기서 탈출해도 녀석들을 처리하지 못하면 똑같은 일을 당하게 될 텐데? 그것도 운이 좋아야 겨우 빈대떡 신세를 면할 수 있겠지?
-듣고 보니 그럴 듯하네. 알았어. 이제부터는 위로 파도록 해야겠어. 빙구氷球! 빙구! 화구! 화구!
영욱은 은영의 날카로운 지적을 반영해서 뚫는 방향을 바꾸었다.
-그걸로 바위가 부서지겠어?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하는 짓이니까 너는 신경 끄고 잠이나 더 자. 심심해서 이러는 줄 알아?
-오빤 배 안 고파?
은영은 배가 고파서 더 이상 잠도 오지 않는 듯했다. 그녀의 배에서 밥 달라고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영욱의 귀에도 들렸다.
-나도 배가 고프지만 먹으면 화장실 생각이 날 것 같아서 참는 중이야. 그리고 독가스라도 분출하게 되면 정말 미안하잖아. 하하!
-워낙 다급해서 등산 배낭도 다 팽개치고 도망쳤는데 먹을 게 있기는 해?
-멧돼지 육포와 늑대고기 육포는 조금 가지고 있어. 하지만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먹어야겠지.
-알았어. 그런데 오빠 생각으로는 우리가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은영은 배가 무척 고프지만 노린내가 지독한 멧돼지와 늑대 육포를 먹을 정도로 고픈 것은 아닌 듯했다.
-여긴 2QB 세상과 중첩된 곳이니까 굶더라도 한 달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는 속도도 다르다는 말이야?
-아마도 그런 것 같아. 그러니 너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소환해서 사용해. 이를테면 베개나 마스크나 모포 같은 것 말이야.
-방금 시도해 봤는데 실패했어. 진짜로 소환이 가능하기나 한 거야?
-내가 포크를 소환한 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빙구氷球! 빙구! 화구! 화구!
영욱은 열심히 바위를 깨면서도 은영의 말을 잘 받아주었다. 얼마 전이라면 집중력 떨어진다고 말도 붙이지 못하게 할 상황인데도 지금은 자상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친절하게 대했다. 그것은 은영에게 뭔가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오빠는 가능한데 나는 왜 안 되는 거지?
-능력이야 둘 다 고만고만하니까 굳이 이유를 대자면 네가 아직도 덜 절박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리 오래 못 버티니까 가능하다면 빨리 뚫어야 해.
-그렇다면 너도 내게 힘을 보태줘야 해.
영욱은 은영의 반응을 살피며 협조를 요청했다.
-내가 그런 힘이 있어야 보태주지.
-네 기운을 내게 전해주면 되잖아.
-그게 가능해?
-김호진의 트랜스파워 초능력이면 가능해.
결국 영욱이 노리던 것은 바로 은영이 가진 기운이었다. 자신의 힘만으로 도저히 뚫을 수 있는 바위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초능력으로는 자신의 정신력만 전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어?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많이 발전해서 정신력은 물론이고 자신의 기운도 전해줄 수 있어. 그리고 남의 것을 가져다가 전달해줄 수도 있고.
-그걸 오빠가 어떻게 알아?
-내 노예의 상태 변화를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어?
-그게 느껴져?
-응. 노예는 마치 내 몸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
호진의 보잘 것 없던 초능력이 진화를 거듭해서 제법 쓸 만한 것으로 거듭난 데에는 영욱의 공이 컸다. 아까운 진액을 먹이고 환수의 피를 마음껏 마시게 한 효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영이 관심을 가진 부분은 그런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녀도 요즘 들어서 노예를 부려볼 욕심이 생긴 듯했다. 병력 증강의 개념보다는 하녀로 부리겠다는 것이지만.
-그렇다면 쟤들의 시야도 공유할 수 있어?
-응. 대충은. 하지만 아직은 내 눈이 더 밝으니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아.
-그래서 능력 있는 노예들은 비싼 값에 거래되는 거였구나. 이런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박상태를 내 노예로 삼아버리는 건데 그랬어.
-이젠 이미 끝난 일이니까 다른 녀석이나 알아봐.
영욱도 은영이 박상태를 협박해서 자신을 괴롭히게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박상태를 노예로 삼을 정도로 강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자신의 노예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박상태가 훨씬 더 강하니 이미 물 건너간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야겠지. 아무튼 네 기운을 내게 넘겨준다는 내용에 동의했으니까 거부하지는 마.
-알았어. 나도 이번 기회에 살 좀 빼기로 하지 뭐.
-호진아. 들었지?
-예. 선배님.
-아주 조금씩만 전해줘. 그럼 부탁해.
-예. 선배님.
영욱이 다정다감하게 대한 보람이 있어서 은영의 기운을 빼앗아 쓸 수 있게 되었다. 본인이 흔쾌히 동의하니 영욱은 아직도 환수 가죽들 사이에 저장해둔 기운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은영의 기운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힘을 빼놓아야 시끄러운 목소리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빙구! 빙구! 화구! 화구!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달받은 은영의 기운 대신 자신의 기운으로 초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은영의 기운은 기계체조를 통해서 모은 것이라 그냥 소모하기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영의 기운은 활인심방으로 한두 번 더 정화시켜서 자신의 머릿속에다 저장하기로 했다.
-오빠, 나 힘들어. 이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제발 그만해.
-겨우 그 정도로 포기해? 몸 안의 기운을 빠르게 빼내는 연습도 해야 실력이 가파르게 늘어난다는 걸 몰라?
-그래? 그렇다면 조금 더 참아 볼게.
-잘 생각했어.
참아야 실력이 늘어난다는 소리에 은영은 다시 참기로 했다. 하지만 그 결심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오빠!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
-그래도 조금만 더 참아 봐. 지금 잘 하고 있는 중이야.
-여기서 토하면 역겨운 냄새가 날 텐데 괜찮겠어?
-젠장! 그렇다면 이번에는 진소희 네 차례다.
영욱은 은영이 정말 토할 것 같아 보여서 어쩔 수 없이 트랜스파워 작업을 중지시켰다. 하지만 닭 대신 꿩을 투입하는 걸 잊지 않았다.
사실 처음으로 기운을 제공하기로 한 은영이 순순히 협조했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동의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예. 탈출로를 만드는 일이니까 협조해야겠죠.
-당연하지. 빙구! 빙구! 화구! 화구!
이번에도 역시 진소희의 기운만 챙기고 자신의 기운으로 초능력을 발휘했다. 사실 빙정과 화정의 기운으로 얼음과 불을 만드는 게 더 효율적이니까 나쁜 선택은 아니다. 게다가 진소희의 기운 역시 기계체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영욱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빙구! 빙구! 화구! 화구! 토마스 스핀! 헤드 스핀!
영욱은 이제 지구의 중심 방향이 아니라 벽이나 중력을 거스르는 지구 중심의 반대 방향으로도 응용 동작의 초식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실전 훈련을 통해서 실력이 가파르게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은영과 진소희로부터 빼앗은 기운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후두두둑.
얼리는 작업과 가열하는 작업의 반복은 물론이고 물이 얼면서 부피가 팽창하는 원리가 가미되어서 약화된 바위의 일부가 영욱의 토마스 스핀과 헤드 스핀에 의해서 조금씩 떨어져 나왔다. 기계체조의 응용 동작은 확실히 천공 작업에는 탁월한 위력을 발휘했다.
-빙구! 빙구! 화구! 화구! 윈드밀 스핀! 헤드 스핀! 탑락!
영욱은 초능력과 각종 스핀 동작으로 바위틈을 뚫었고, 부서진 부분을 탑락으로 치웠다. 탑락 동작은 춤을 출 때 주변의 사람들을 밀쳐서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는 작업인데 땅을 파는 데에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저 공간만을 확보하는 게 아니라 공간 자체를 장악하는 게 바로 탑락의 효용이었다. 그 공간 속에 들어온 돌들이 맥을 추지 못하고 으스러져 나가는 게 일종의 영역 선포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이제는 저도 못 견디겠어요.
-겨우 그 정도로 엄살을 떨어?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정말 토할 것 같아요. 좁은 공간인데 토해도 괜찮아요?
-냄새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예쁜 여자로서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관두기로 하지. 하지만 자신이 가진 기운의 10%도 뽑아낼 수 없다면 그건 좀 문제가 있다는 사실만 알아둬.
은영에게는 친절하게 굴었지만 소희에게는 아주 까칠하게 대했다. 혀를 끌끌 차지는 않았지만 한심하다는 투로 충고까지 했다.
-제가 그 기운을 어떻게 모았는지 알고서 하는 말인가요?
-당연히 알지. 그리고 소모된 기운들이 빠르게 보충된다는 것도 잘 알아.
-소모적인 기운이 아니라는 건가요?
-그렇다면 경지를 어떻게 높여? 훈련할 때마다 닳아버리는 게 기운인데.
영욱은
'너, 바보 아냐?'
라는 말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삼켰다. 까칠하게 구는 것과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결과를 불러온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운의 자체적인 생산 능력이 경지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거군요.
-맞아. 소모적인 기운이 아니라 소모된 기운을 빠르게 보충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경지인 셈이지. 그런데 그런 것도 몰랐어?
-아까운 기운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펑펑 써본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영욱 씨는 어떻게 알게 되었어요? 아빠가 말씀해주시던가요?
-아냐. 우연히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기운을 완전히 소진할 정도로 환수들과 싸운 적이 많았으니까 자연스럽게 몸으로 알게 된 거지. 아무튼 기운을 의미 없이 탕진하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는 대단한 훈련을 하는 거니까 그렇게 알아.
까칠하게 말하던 분위기를 조금 부드럽게 바꾸자 소희도 대번에 태도를 바꾸었다.
-그렇다면 조금 더 나눠드릴게요.
-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거라면 70% 이상 빼내야 할 거야. 물론 일천한 내 경험에 의한 계산이니까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되면 정말 토할 지도 몰라요.
-그걸 견디는 게 바로 훈련의 목적이야. 기운을 빠르게 소모하고 빠르게 다시 채우는 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니까.
-제법 설득력 있는 설명이네요. 그럼 한 번 견뎌보기로 하겠어요.
-그래. 그 정도의 마음가짐은 되어야 강해질 수 있는 거야. 은영이는 아직도 멀었어.
-당연히 내 기운도 가져가. 그런 줄 알았다면 엄살 부리지도 않았어.
적절한 밀당과 격장지계가 통해서 두 여자 모두 경쟁적으로 기운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그녀들이 오랜 세월 동안 기계체조로 모은 기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순해서 영욱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여차하면 골드를 주고서라도 구입할 용의가 있는데 자발적으로 그것도 서로 경쟁적으로 내놓으니 영욱은 찢어지는 미소를 감추기가 힘이 들었다.
-호진아. 동시에 두 가지 작업도 가능해?
-예. 선배님. 두 분 다 가까이 있고, 옮기는 양이 워낙 적어서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부탁해. 다만 토하지 않도록 속도 조절을 잘해. 강원대 퀸카들이 체면 구기지 않게 말이야.
-예. 선배님.
모처럼 만에 듣게 되는 영욱의 립 서비스에 은영은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소희 역시 찬밥 취급만 받다가 모처럼 퀸카 소리를 들으니 한동안 실종되었던 자존심이 돌아온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다.
-빙구! 빙구! 화구! 화구! 윈드밀 스핀! 헤드 스핀! 탑락!
영욱은 은영과 진소희의 기운을 동시에 흡수하는 한편 응용동작의 수련에도 박차를 가했다. 자신이 가공한 다음 보관한다고 해서 자신의 기운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소희와의 대화를 통해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
우엑! 우엑!
은영과 진소희가 기를 쓰면서 버티려고 했지만 결국은 토하고 말았다. 두 여자 모두 빠른 정신력의 소모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영욱은 토사물을 얼른 한쪽 구석으로 치우고 이번에는 박상태를 쳐다보았다. 어느 정도 구멍을 뚫은 덕분에 그 정도의 여유 공간이 생겼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다음은 네 차례다.
-예. 얼마든지 가져다 쓰십시오. 선배님.
-말로만 큰소리치는 거라면 누구라도 다 할 수 있어.
-끝까지 버텨보겠습니다. 선배님.
박상태가 동원할 수 있는 힘은 이제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200명이 넘는 영혼을 뜯어먹어서 흡수한 잡다한 기운들을 아직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기계체조와 활인심방의 도움으로 상당한 진전을 보았다.
그 성취가 박상태의 목소리에도 자신감으로 듬뿍 묻어났다. 최근에 영욱이 가파른 성취를 보이지 못했다면 추월하고도 남을 정도로 강해졌다.
-남자의 자존심을 보여주기 바란다. 호진아, 시작해.
-예. 선배님.
박상태의 기운은 아직도 다양했다. 그나마 활인심방으로 순화시킨 기운이라는 점과 기계체조로 모은 기운들이 다양한 기운들을 적당히 소화시켰다는 점에서도 아주 독특했다.
영욱은 박상태로부터 건네받은 잡다한 기운들을 종류별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빙구! 빙구! 화구! 화구! 윈드밀 스핀! 헤드 스핀! 탑락!
바위를 뚫는 데 소모되는 기운과 정신력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면서 박상태의 기운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제 3의 눈과 관련된 전기를 띤 기운도 있고, 근력 강화와 관련된 기운도 있고, 큰 덩치로 변신하게 만드는 기운도 있군. 이 정도만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정말 대단하구나.'
그 외에도 서너 가지 정도 눈에 띄는 기운들도 있었지만 너무나 양이 적어서 일단 좀 더 모은 후에 다시 판단하기로 했다.
@
해가 완전히 지자 백오 떼들은 영욱 일행을 덮어버린 돌무덤 위에서 안전하게 밤을 보낼 준비를 했다. 날카로운 부리로 몸의 하얀 깃털을 다듬고 적당하게 평평한 자리를 고르는 게 그들의 잠자리 준비였다.
까마귀는 야간 시력이 아주 약한 걸로 알려져 있다. 그들의 몸 색깔이 검게 진화한 것도 소희가 대답했던 것처럼 천적인 올빼미나 부엉이로부터 밤을 무사히 보내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영욱이 아닌 다른 드림헌터들도 상대가 흰 까마귀이긴 하지만 야간 시력은 형편없을 것이고, 그런 돌연변이들일수록 더 빨리 도태되는 게 자연의 이치라고 판단한 듯했다.
그래서 다들 밤을 이용해서 총공격을 감행하려고 들었다. 어두워지자 곳곳에 은신해서 숨어있던 드림헌터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은폐 아이템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잖아."
"그러게 말이야. 그나마 1골드밖에 하지 않아서 다행이지 뭐야."
"이젠 밤이 되었으니까 전세는 역전되었다고 봐야겠지. 날개가 있다고 해도 날지 못하니 우리 손에 죽었다고 봐도 좋을 거야."
"그래도 워낙 덩치가 크고 부리가 날카로우니 조심해야 해."
"그러니까 다 같이 달려들자는 거잖아. 어차피 백오들의 숫자는 아주 많으니까 말이야."
수백 명의 환수사냥꾼들과 상인들이 이를 갈며 하루 종일 기다렸던 백오 환수 사냥을 시작했다.
@
"공격!"
타다당! 탕!
임시대장 보직을 맡은 반백신감 배신혁이 총공격 명령을 내리자 각자 엽총을 쏘거나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불화살이 더 효과적이겠지만 혹시 녀석들에게 시야視野를 제공할 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그냥 화살로 대체했다.
딱히 정해진 공격 아이템이 없는 녀석들이니 일단은 보편적인 공격의 패턴을 취하기로 했다. 그리고 육박전에 자신이 있는 드림헌터들은 산처럼 높은 돌무덤에서 굴러 떨어지는 백오를 처리하기로 했다.
번쩍!
그런데 이변異變이 발생하고 말았다. 수천 마리에 이르는 백오들이 일제히 입을 벌려서 하얀 빛이 나는 발광체를 토해놓은 것이다. 그것이 풍선처럼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조명탄처럼 사방을 밝게 비추기 시작했다.
백오들의 야간 시력이 까마귀처럼 약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어둠을 극복했던 것이다.
"속았다! 모두 후퇴하라!"
"어떤 새끼가 함부로 명령을 내리느냐? 대장은 바로 나다. 그래도 낮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으니까 도망가지 말고 맞서 싸워라!"
"알겠다. 싸우자!"
"나도 싸운다."
명령 체계에 약간의 혼선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반백신감 배신혁은 노련한 솜씨로 환수사냥꾼들과 상인들을 지휘했다. 사실 의외의 상황에 직면하고서 잠시나마 당황했지만 백오들도 낮처럼 빨리 날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게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챙! 챙!
그렇지만 싸움은 의외로 팽팽하게 이어졌다. 백오들의 숫자가 워낙 많았고, 여차하면 하늘로 날아올라서 피할 수 있기 때문에 결정타를 맞을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엽총을 정통으로 맞아도 죽지는 않으니 회복할 시간이 필요한 백오는 하늘 높이 날아올라서 잠시 시간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조금씩이나마 드림헌터들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뀌어갔다. 그것은 눈에 띌 정도로 큰 활약을 펼치는 마법사 덕분이었다.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르지만 그의 주변에는 백오들이 추풍낙엽처럼 쌓여갔다.
그는 바인딩 마법과 중력 마법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백오의 추락을 유도했고, 일단 추락하기만 하면 대기하고 있던 그의 기사들이 백오의 날개를 잘라내어서 포획 작업을 완료했다.
@
환수사냥꾼들도 마법사의 가세 사실을 깨닫고는 쾌재를 불렀다. 신종 환수가 출현하면 아이템 판매나 샘플 채취를 위해서 마법사들이 출장 나온다는 소리를 들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마법사를 보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다들 곁눈질로 쳐다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저 사람들이 마법사야?"
"마법사는 한 명뿐이고 나머지 네 명은 기사야. 보면 몰라?"
"저들은 왜 우리를 돕는 거지? 드림헌터들의 사냥에는 개입하지 않는 게 이 바닥의 불문율이잖아."
"처음 출현하는 환수는 포획해서 마탑에 실험용으로 가져가지. 아무튼 이 백오 환수도 처음 나타난 종류인가 봐."
무시한 놈도 있는 반면 유식한 놈도 있기 마련이라서 모든 환수사냥꾼들이 진실을 알게 되는 데에는 불과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아무튼 도움을 주니까 좀 낫군."
"그래봐야 저들은 금방 돌아가 버릴 거야. 목적은 샘플 채취일 뿐이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법사와 기사들은 샘플 채취를 완료하고는 순간 이동으로 사라졌다.
@
-사방이 소란스러운데 뭐죠?
얼굴에서 구토의 흔적을 깨끗이 지운 소희가 이제야 바깥 상황 변화를 인식하고는 물었다.
-들려? 그렇다면 감각이 상당히 예민해진 것인데?
-조금 귀가 더 밝아진 것 같긴 하지만 워낙 시끄러워서 그런가 봐요.
-훈련의 성과가 이렇게 바로 나타나니 나로서도 덜 미안하네. 아무튼 축하해. 대충 알겠지만 드림헌터들과 백오 떼가 크게 한판 붙었어. 나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영욱은 소희의 감각 확장이 바로 기운을 억지로 빼낸 훈련의 성과라고 강조하면서 비위를 슬슬 맞추었다. 물론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영욱이 조금이나마 바위를 뚫었기 때문에 잘 들리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한 것 같네요? 밤인데도 싸움이 팽팽한 것 같으니…….
-그러게. 영악한 백오 녀석들이 밤의 어두움을 빛의 정수로 극복한 것 같아. 밤을 대낮처럼 밝히고서 싸움을 벌이고 있어.
-그런 것도 있어요?
-말은 거창하지만 조그만 조명탄 같은 거야. 그런데 허공에 계속 떠있을 수 있고 지속 시간이 꽤나 길어. 어쩌면 밤새도록 어둠을 밝힐 수도 있을 것 같아.
영욱 역시 박상태로부터 얻은 기운으로 인해서 좀 더 확장된 제 3의 눈으로 마치 직접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바깥 상황을 전달할 우 있었다.
다들 빛도 없는 곳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갇혀있는 일행들을 위로하려는 의미도 없지는 않았다. 폐쇄공포증은 없더라도 이코노믹 증후군은 누구나 다 있으니까.
-어느 쪽이 이길 것 같아요?
-아직은 팽팽하지만 마탑에서 파견된 마법사가 몇 마리를 사냥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 같아.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희소식이네요.
-그런 셈이지. 저렇게 기발한 방식을 사용해서 어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니 우리가 이길 가망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영욱은 새대가리라고 무시했던 백오 환수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신의 오만을 반성하고 있었다. 여태까지 처리했던 환수들은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자만하고 있었다는 게 드러났으니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반성하고 넘어가려는 것이었다.
만일 환수사냥꾼들이 먼저 일을 벌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야습을 시도했을 것이고, 그 싸움의 결과는 100% 몰살이 되었을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만일 싸우게 된다면 제 블라인드 초능력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당연하지. 워낙 빠르니까 1초만 보이지 않아도 추락을 면하기 힘들 테니까. 문제는 몇 마리나 가능하냐는 것에 달려있지만.
-몽구스 환수의 피로 포식했더니 이제는 꽤 많이 가능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아무튼 우리가 이 돌무덤을 탈출하려면 아직도 멀었으니까 지금부터 흥분하지는 마.
-탈출이 가능하긴 한 거예요?
-당연하지. 다들 도와주니까 길어야 일주일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뭐야? 나를 왜 쳐다봐?
갑자기 영욱의 시선을 느낀 화리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너희들의 기운도 좀 보태. 매번 날로 먹으려고 들지 말고 말이야.
-누가 날로 먹었다고 그래? 이미 백족 껍질로써 대가를 치렀잖아.
-그건 여기에 숨게 해준 대가이고, 지금 말하는 대가는 탈출에 관한 거야. 어차피 밖으로 나가면 같이 싸우지는 않을 테니까 그건 바라지도 않아.
-다들 토할 정도로 기운을 뽑아내면 어떻게 달아나라고 그래?
은영과 소희는 물론이고 조금 전까지 기운을 나눠주던 박상태도 구토 직전의 상황에 이른 사실을 알고 있기에 하는 소리다.
-그럼 여기서 굶어죽든가. 너희들이 기운을 보태지 않으면 열흘도 훨씬 더 걸릴 테니까 알아서 해.
-차라리 같이 굶어 죽는 게 낫겠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비상식량이 있어서 절대로 굶어 죽진 않아.
-누군 비상식량이 없는 줄 알아?
-좋아. 이 좁은 곳이 똥으로 가득 찰 때까지 한 번 살아보자. 마음대로 해.
영욱은 화리를 아주 강하게 압박했다. 밀폐된 좁은 공간이라는 특수성을 지적하면서 특유의 거친 입담을 과시했다. 똥이라는 소리에 화리의 얼굴이 똥색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배가 살살 아파오는 중이니 빨리 탈출하지 않으면 낭패를 겪게 될 것이다.
-보, 보태면 되잖아.
-잘 생각했어. 그럼 너부터 먼저 부탁해.
-아, 알았어.
-호진아.
-예. 선배님.
진소희와 최은영 그리고 박상태를 대상으로 뽑아내는 연습을 충분히 했던 김호진은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화리의 기운을 듬뿍 빼내서 영욱에게로 건네주었다.
그로서는 자신의 기운을 뽑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즐거운 듯했다. 물론 가장 즐거운 사람은 영욱이었다.
@
'역시 화구를 만드는 기운은 화정과는 다소 다른 면이 존재하는구나.'
화구는 불덩어리를 압축시킨 것이라기보다는 폭탄에 가까운 면이 더 많았다. 대량의 산소를 함께 공급해서 불완전 연소를 없애는 점도 영욱으로서는 반갑기 그지없었다.
화리로부터 건네받은 기운은 곧바로 화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빙구! 빙구! 화구! 화구! 윈드밀 스핀! 헤드 스핀! 탑락!
주문은 똑같았지만 결과는 상당히 달라졌다. 화구의 폭발력이 강해져서 부서져 나가는 바위들의 양이 서너 배는 늘어버렸다.
-우와! 역시 화리의 기운이야.
-마음에 들어?
-당연하지. 네가 도와주니까 이제는 삼사 일만 열심히 뚫으면 탈출할 수도 있겠다.
-그래? 그렇다면 마음껏 가져다 써.
의외로 단순한 면이 있는 화리는 영욱의 칭찬에 속아서 토할 때까지 기운을 빨려야 했다.
덕분에 영욱도 화구의 위력을 상당히 키울 수 있었다. 이제는 연습을 통해서 화정의 기운과 다른 기운을 어떻게 섞어야 하는 지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욱이 가지고 있는 나노캡슐에서는 물을 전기적으로 분해해서 산소를 발생시킨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가연성可燃性을 가진 수소도 함께 발생하게 되는데 전에는 그것을 그냥 폐기처분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압축시켜서 화구의 부재료로 사용했다.
물론 산소 역시 화구의 주된 부재료가 되었다. 나노캡슐이 화구의 위력 증대에 큰 도움이 될 줄은 영욱으로서도 전혀 짐작하지 못했던 일이다.
@
다음 차례는 한극상이었다.
-한극상 아저씨의 기운도 정말 대단해요.
-그래? 마음껏 가져다 써. 어차피 한 잠 자고 나면 다시 채워지는 것이니까.
-그래도 힘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이 정도를 못 견디면 남자도 아니지. 그런데 말이야.
-말씀하세요.
-비상식량이 있다던데 그게 뭐지? 혹시 소주도 있나?
한극상이 큰소리를 뻥뻥 친 것은 역시 바라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마치 헌혈 후에 초코파이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요구였다. 실제로 초코파이는 물론이고, 이온 음료, 햄버거 교환권도 준다.
-당연히 있죠. 그리고 늑대고기 육포와 멧돼지 고기 육포도 있는데 좀 드릴까요?
-주면 고맙지. 배가 출출해서 말이야.
-일단 트랜스파워 작업이 끝나는 대로 드릴게요.
-그 정도야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 하하하!
단순하고 무식하고 지랄 같은 성격을 가진 한극상을 다루기는 아주 쉬웠다. 아부와 먹을 것으로 유혹하자 간과 쓸개를 다 내어줄 것처럼 굴었다.
@
'이게 바로 나를 옥죄려 했던 속박 초능력에 동원되었던 기운이군. 이제 보니까 별 거 아니네. 염동력의 또 다른 변형이었잖아.'
움직이게 하거나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기운의 정체는 전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같을 수도 있다. 적어도 한극상의 기운은 영욱의 염동력과 매우 흡사했다. 거듭되는 횡재에 영욱은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빙구! 빙구! 화구! 화구! 윈드밀 스핀! 헤드 스핀! 탑락!
영욱은 끊임없이 바위틈을 뚫으면서 제공되는 기운에 부합한 초능력을 발휘해서 자신의 기운으로 만드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론 사파이어 귀걸이를 통한 증폭과 새로 만든 구결을 외우는 것도 까먹을 수가 없었다.
한극상이 제공한 기운 덕분에 보다 강력해진 염동력은 균열이 간 바위들을 흔들어서 균열의 크기를 키우거나 분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물론 물도 밀어 넣어서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했다.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물을 밀어 올려야 하는 상황이니까 당연히 염동력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극상의 기운은 소모적이니까 염동력 역시 다시 약해지겠지만 편법으로나마 높은 경지를 경험한 것이 영욱이 가진 염동력의 경지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삼족백오
영욱이 바위를 뚫은 작업에 혼신의 노력을 쏟고 있는 바로 그 순간 백오들과 드림헌터간의 싸움도 서서히 끝을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이제 싸움의 유불리는 보름달과 구름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었다. 구름 속에 숨었던 보름달이 밖으로 나오면 백오들이 유리해졌고, 반대로 구름 속에 숨어서 어두워지면 드림헌터들이 유리해졌다.
그런데 이러한 싸움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등골산이나 백암산 방면에서 달려온 드림헌터들이 하나둘씩 가세하기 시작하자 분위기가 슬슬 드림헌터들에게로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불리함을 느낀 백오들이 모두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하나의 거대한 백오로 합체하기 시작했다. 그 합체의 결과로 날개의 길이가 무려 3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백오가 탄생하고 말았다.
"삼족백오다. 모두 달아나!"
뭉쳐서 거대한 백오가 된 것도 놀랍지만 발이 두 개가 아니라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환수사냥꾼들이 비명을 질러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태양에서 산다는 세 발 달린 상상의 까마귀 환수가 현신하자 다들 혼비백산했다.
사실 삼족백오는 삼족오 중에서도 용맹하기로 이름난 환수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실물로 보기는 다들 처음인 듯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제 살 길을 찾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드림헌터들의 도주가 그리 간단하지는 않았다. 삼족백오는 날아다니는 게 아니라 공간과 공간 사이를 찢어버리면서 이동을 했다.
크아악! 꺅!
삼족백오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면서 순식간에 드림헌터들을 삼켜버렸다. 드림헌터들은 삼족백오의 억센 세 발에 포획당해 죽기도 하고 어지간한 건물 크기의 입에 삼켜져서는 이 세상을 하직했다.
@
영욱도 돌변해버린 상황을 알아차리고 하던 작업을 멈추었다.
-오빠, 왜 중단하는 거야?
-너 혹시 삼족백오라고 들어본 적 있어?
-난 몰라. 화리 언니는 알아?
-태양 속에서 산다는 삼족오들의 왕이지. 설마 그게 나타난 거야?
-사람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 중에 그런 말이 섞여 있으니까 확실할 거야.
영욱은 제 3의 눈으로 백오들이 뭉쳐서 거대한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진정한 삼족백오인지에 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 들었다. 정어리 떼처럼 페이크를 사용해서 삼족백오 흉내를 낸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 삼족백오라서 탈출을 포기한 거야?
-흥! 상대가 오족백오라도 탈출해야지.
-그런데 파는 걸 왜 멈추었어?
-그야 해가 떴으니까 이제는 조금 쉬려고.
-그 녀석에게 들킬까봐서 그래? 나한테만 솔직히 말해 봐.
은영은 예나 지금이나 영욱의 생각을 잘 알아차렸다.
-맞아. 녀석의 큰 발톱과 날카로운 부리로 파면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 채 10초도 걸리지 않을 테니까.
-아까 박상태가 거인으로 변신했으면 쉽게 뚫고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는 혼전 중이었으니까 어쩌면 탈출할 기회가 있었을 지도 모를 텐데.
-얘가 지금 자다가 책상다리 긁는 소리를 하고 있네. 백오들이 쌓은 이 돌무덤의 높이가 무려 100미터가 넘어. 그러니 제아무리 상태가 거인으로 변신해도 뚫는 건 무리야. 뚫기는커녕 압사당하기 딱 좋지.
-그, 그 정도야?
-응.
삼족백오와 박상태의 수준 차이를 깨달은 은영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포클레인 앞에서 삽질하는 수준보다도 못함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
영욱은 작업을 멈춘 김에 식사를 하기로 했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배가 고프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노린내가 진동하는 멧돼지 육포와 늑대 육포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사냥개 변종 환수 육포였다.
몇 개 가지고 있던 팩소주는 몽땅 한극상에게 줘버려서 남은 게 전혀 없었다. 물론 소주를 마실 만큼 한가한 상황도 아니긴 하지만.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드림헌터들을 삼켜버리거나 쫓아버린 삼족백오는 다시 돌무덤 위로 내려앉았다. 그런데 삼족백오의 모습이 아니라 다시 수천 마리의 백오로 다시 돌아간 상태였다. 그것은 바로 삼족백오 상태에서 포획했던 드림헌터들을 나누어먹기 위함이었다.
서른 명이 넘는 드림헌터와 상인들이 삼족백오에게 삼켜지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큰 부리 속으로 삼켜지는 순간 심정적으로 삶을 포기했기 때문에 기절해 버린 것이다. 아직까지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운명은 죽음을 피할 길이 없었다.
삼족백오가 페이크였음을 알게 되었으니 영욱은 기절해 있는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하지만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돌무덤을 뚫고 나가는 것도 며칠이나 더 걸릴 상황이니 당장으로서는 방법이 전혀 없었다.
-부엉! 부엉!
결국 고민 끝에 꾀를 낸 것이 바로 까마귀의 천적인 부엉이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텔레파시를 최대한으로 발현시켜서 크고 요란한 소리가 바깥으로 울려 퍼지도록 했다. 자신의 위치가 들키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왕이면 부엉이 중에서도 가장 큰 수리부엉이의 울음소리로 들리기를 기원했다.
몇 차례 부엉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었지만 고작 부엉이 울음소리에 놀랄 백오 환수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울음소리의 위치를 알아냈는지 돌무덤을 이루고 있는 바위들을 빠른 속도로 치우기 시작했다. 이른바 긁어서 부스럼을 만든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