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71)

"병신아. 네가 지금 계좌이체 한 돈은 벌써 쓸모없는 땅을 구입하는 데 몽땅 다 쓰였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부모를 죽여도 네 돈은 다시 나오지 않아.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아봐야 5억이나 나올까 몰라. 그것도 아마 할머니의 이름으로 되어 있을 걸?"

영욱은 한전상의 협박에 대응해서 의연하다 못해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돈을 송금한 순간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리였다.

"땅을 샀다면 그것을 되팔면 되겠지."

"쓸모없는 산과 임야만을 골라서 구입하라고 했어. 너도 명색이 드림헌터인데 그 말이 무슨 의민지는 알겠지?"

"되파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군. 그렇다면 심장과 신장 등의 장기로 대체하는 수밖에."

"그래봐야 몇 푼이나 되겠어? 60살이 다 되어가는 노인네들인데."

영욱은 부모님의 장기 판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도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태연하게 반응했다. 사실상 녀석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송금했던 39억 7천만 원을 모두 되찾을 방법은 없다고 봐야 했다.

"네 녀석과 네 노예 녀석들의 장기도 있고, 네 여자들을 팔아넘길 수도 있으니 손해가 그리 클 것 같지는 않군."

"저 여자들은 내 여자가 아니다. 그리고 배경이 빵빵해서 건드리면 너는 틀림없이 죽는다. 참고해 둬."

"아무튼 너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그래. 언젠가는 나도 죽겠지. 그러니 죽기 전에 얼른 골드나 팔아야겠다. 또 거래할 사람 없나?"

영욱은 녀석을 그림자로 만들어놓고서 다시 거래를 시도했다. 한전상이 길길이 날뛰고는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영욱의 몸에서 397골드가 다 나올 때까지 영욱을 죽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다른 상인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니까.

"그래봐야 시세대로 쳐줄 상인은 아무도 없다."

한전상이 방해하려고 했지만 영욱에게도 생각이란 것이 있었다. 어차피 화리에게 시세의 80%에 넘길 생각이었으니 어느 정도의 절충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없다는 말이겠지. 좋아. 이미 10%를 벌었으니까 시세의 90%에 판매하기로 하지. 누구 없나?"

"좋아. 내가 10골드를 사겠다. 그 계좌번호로 9억을 이체할 테니까 먼저 10골드를 넘겨라."

"골드는 계좌이체가 확인되면 바로 준다. 10%나 깎아주는데 먼저 골드를 받겠다고 계속 우기는 건 아니겠지?"

"먼저 받고 나서 딴소리하면 정말로 내 손에 죽는다."

"너는 저 한전상 개새끼처럼 사기를 친 게 아니니까 당연히 준다."

영욱은 한전상에게 강한 증오심을 표출함으로써 자신은 파렴치한이 아님을 주장했다. 그런데 그게 통했다. 사실 한전상이 무리했다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으니 가능한 거래인 셈이다.

"이체했으니까 확인해 봐라."

"좋아. 여기 10골드다."

영욱은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계좌이체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골드를 건넸다.

"진품이 확실하군. 좋은 거래였다."

"나도. 그런데 겨우 9억 밖에 없는 거야?"

"겨우 9억이라니? 현금 동원력이 그 정도면 부자라는 걸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런가? 갑자기 화폐 개념이 흔들려서 말이야."

"내 생각에는 네 녀석이 쓸모없는 땅을 사두겠다는 게 아주 현명한 판단인 것 같다. 돈은 안 되겠지만 너무 쉽게 번 돈이라 흥청망청 쓰다보면 몸만 망가지고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되니까 그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통성명조차 하지도 않았지만 첫 환전 거래를 마친 상인은 영욱의 판단에 대한 평가를 아주 후하게 내려 주었다.

"내 생각이 바로 그 생각이야. 저런 똥파리들도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고 말이야."

"너 때문에 강원도의 땅값이 들썩거리게 생겼군. 아무튼 다음에도 또 거래하기로 하자."

"그러지. 또 거래하고 싶은 사람 없나?"

"나도 10골드 거래하기로 하지. 9억을 이체했으니까 확인해봐."

"네가 김진명인가?"

"맞아."

"들어왔군. 자, 여기."

"진품이 확실하군. 좋은 거래였다. 또 보자."

겨우 10%만 할인해 주어도 골드를 현금으로 환전해 주려는 상인들은 많았다. 영욱은 화리가 여태까지 자신을 얼마나 봉으로 여겼는지를 몸으로 느끼면서 비릿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조심해서 가. 노리는 자들이 많으니까."

"걱정해줘서 고맙지만 우리도 너처럼 확실한 안전장치가 있어서 뺏길 염려는 없지. 그럼 이만."

"또 거래할 사람 없나?"

"좋아. 같은 조건으로 100골드를 내게 넘겨라."

"당근이지. 먼저 계좌이체부터 해."

"확인해봐라. 90억 보냈다."

"이재벌인가? 이름 한 번 멋지군. 자, 여기 100골드다."

"진품이군. 좋은 거래였다. 또 보자."

작은 거래가 순조롭게 이어지자 큰 거래도 봇물 터지듯이 이어졌다. 워낙 환전 금액 자체가 크니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골드를 찾는 사람에게는 수수료를 붙이거나 환전 비율을 달리할 수도 있을 것이니 이중으로 이익을 볼 게 분명했다. 외환 매입율과 매도율이 판이하게 다르듯이.

영욱이 350골드를 처분했을 무렵 한전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같은 비율로 계산해준다면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겠다."

그것은 영욱의 골드가 모두 사라지기 전에 본전이라도 찾겠다는 소리였다.

"좋아. 돈을 먼저 송금해라."

"무슨 소리야? 이미 39억 7천만 원을 송금했잖아."

"그건 위약금이라서 내가 이미 접수한 거야."

"그런 식으로 삼키려 들면 틀림없이 소화불량에 걸릴 테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내놔."

"그 돈 때문에 다른 상인들에게 10%나 할인해준 것이니까 돌려줄 수는 없다."

"어차피 그게 정상적인 환전 비율이다. 아무튼 나도 40골드만 내놓으면 없었던 일로 해주지."

영욱도 녀석의 돈을 떼먹고 뒤통수가 간지러운 것보다는 새로운 조건으로 거래를 마치기로 했다. 녀석 덕분에 화리에게 넘기는 것보다는 큰 이익을 보고 있으니 끝까지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좋아. 대신 40골드를 받고 싶으면 3천만 원 더 보내라. 그래야 계산이 맞잖아."

"그러지. 이체했으니까 확인해봐."

"한전상, 들어왔군. 자, 여기."

"지독한 놈. 어디 잘 먹고 잘 사는 지 두고 보자고."

영욱이 40골드를 건네자 한전상은 기다렸다는 듯이 악담을 퍼부었다.

"남의 전리품이나 골드를 노리는 네놈이 지독한 놈이지 내가 왜 지독해?"

"아무튼 피의 축제 첫날부터 개망신을 당했군. 다시는 네 놈과 거래를 하면 내가 성을 간다."

"곧 환 씨로 갈게 될 거야. 내가 보기보다는 사냥 솜씨가 좋은 편이거든."

"그래도 네 녀석과는 일없다. 썩 꺼져!"

한전상이 계속해서 악다구니를 늘어놓았지만 영욱의 말솜씨도 만만치 않아서 본전도 찾지 못했다. 영욱은 보부상 제임스를 겪어본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느꼈다. 한전상 역시 그게 협상의 일종이었지 그냥 날로 먹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제임스를 통해서 배웠기 때문이다.

2QB 세상이나 드림헌터들끼리의 거래는 협박과 협상이 같은 말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나마도 지켜진다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봐야 했다.

@

사냥꾼들과 상인들이 사납게 으르렁거리긴 했지만 아무튼 거래는 무사히 끝났다. 영욱의 토룡피를 강탈하려고 해도 교감을 통해서 이미 귀속된 물건이라서 어쩔 수 없었고, 골드 역시 토룡피 사이의 공간에 보관하는 지라 그냥 빼앗을 수는 없었다.

또한 골드를 팔아서 모은 현찰 역시 실시간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주변에 있는 상인들에게 슬쩍슬쩍 보여주었으니 영욱의 통장 속에 든 현찰을 노리는 녀석은 없을 것이다.

영욱이 골드를 무사히 팔아치우고 나자 화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돈을 들여가면서 상인들을 잔뜩 불러 모은 보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보나마나 결정적인 순간에 개입해서 그녀도 가격을 후려칠 심산이었는데 그 험악한 상인들을 오히려 협박하기까지 하면서 좋은 비율로 환전을 마쳤으니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너는 표정이 왜 그래?"

"골드를 다 처분해버리면 대체 어쩌자는 거야?"

"내 골드를 내가 처분하는데 네가 왜 지랄이야?"

"골드가 있어야 마법서를 구입할 거 아냐."

"마법서는 당분간 잊기로 했어."

"그렇게 쉽게 포기할 걸 왜 그렇게 설쳐 댔어? 나하고 반반씩 투자해서 구입하자며?"

"포기한 게 아니라 피의 페스티벌 기간 동안에는 골드를 가지고 있기가 버거울 것 같아서 그래. 다들 눈이 벌겋게 변해서 다들 내 주머니를 노리는데 내가 미쳤어?"

토룡피 속으로 들어간 골드를 꺼내게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영욱 일행이나 가족을 인질로 잡고서 협박하면 눈뜨고 다 빼앗길 게 자명하다. 

아직은 골드를 지킬 힘이 부족하니 영욱으로서는 버는 족족 몽땅 탕진蕩盡해 버리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남들이 볼 때는 탕진이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교두보 마련이니까 그리 나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힘이 약해서 그런 잡상인들에게 당한 거라고 보지는 않아."

"네가 충고한 대로 꾹 참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지금 와서 왜 딴소리를 하고 지랄이야?"

"쌍욕을 마구 해 놓고서는 그게 참은 거야?"

"칼질은 안 했잖아. 그러니 참은 거지."

"아무튼 우리 사이의 거래는 계속 80%의 가격으로 이루어질 거야."

"그래야겠지. 하지만 당분간은 너와는 거래할 물건은 없을 것 같아."

영욱은 화리의 억지 주장에 교묘한 언변으로 대응했다. 거래 조건이란 거래가 일어날 때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쿼터제가 아닌 이상.

"그건 계약위반이잖아."

"마법서를 구입할 대금이나 그런 FTA 협상 같은 할인요율을 적용하는 것이지, 모든 거래를 그렇게 하라고? 지금까지만 해도 엄청난 손해를 봤는데 내가 미쳤어?"

"아무튼 나와의 거래는 시세의 80%에 이루어져야 해."

전량을 거래하겠다는 계약은 하지 않았으니 화리도 계속해서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사실 예전 거래를 무르자고 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욱이 쌍욕을 하면서 달려들면 자신만 곤란해질 게 분명할 테니.

"누가 뭐래? 당분간 너와 거래할 일은 없으니까 나중에 거래할 때나 그렇게 해."

"너 혹시 딴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딴생각도 하고 있지. 마법서를 싸게 구할 기회가 생기면 당연히 구입할 거야. 속을 확률도 있겠지만 가격에 그만큼 매력이 있을 테니까 말이야."

"허풍선장虛風扇長과 반백신감 같은 허접들에게도 당하면서 그런 말이 나와?"

"안신조 그 새끼의 별호가 허풍선장이야?"

"맞아. 겨우 사퍼모어 초입의 상인에게 개 맞듯이 두들겨 맞다니 이해할 수가 없어. 그들은 정상적인 사냥꾼도 아닌데 말이야."

화리는 영욱이 두들겨 맞고 나면 모든 거래를 자신에게 의존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결과가 전혀 반대로 나와 버렸으니 투덜거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한 영욱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건드려서 아직까지는 혼자서 거래하기에는 이르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려고 했다.

"네가 참으라고 해서 참은 거잖아. 내가 그깟 녀석들에게 질 것 같아?"

"기가 죽을 대로 죽어서 비참한 표정으로 얻어터지던데 그런 말이 나와?"

"당연히 실감나게 맞아주었지. 설마 내 기가 완전히 꺾였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꼬리를 확실하게 만 것 같던데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무튼 좀 더 굵직한 녀석들도 많을 테니까 앞으로도 그런 꼴을 자주 보게 될 거야."

하지만 영욱은 전혀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앞으로 꼭 필요한 맷집을 키우는 작업이었는데 부끄러울 리가 없는 것이다.

"여자들이 보는 앞인데 쪽팔리지도 않아?"

"내 여자도 아닌데 뭐가 어때서?"

"너나 네 노예들이나 하는 짓거리가 똑같다."

"당연하지. 주인의 뜻을 잘 헤아리는 게 노예들의 본분이니까 당연히 닮아야지."

"잘들 논다."

"씨발!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지랄이야. 다들 출발하자."

환전과 맷집 키우기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영욱은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출발했다. 화리는 영욱의 지나가는 욕지거리에 놀라서 얼른 입을 다물고 말았다.

@

득환은 영욱의 문자를 받고난 직후 강원도 일대에서 부동산 거래 중계를 하고 있는 친구들과 산이나 임야를 가진 친구들을 진중권과의 술자리로 죄다 불러 모았다.

"아침부터 웬 술이야?"

"어젯밤부터 계속해서 마신 술이니까 아침술은 아니다. 아무튼 한 잔씩들 받아."

"해장술 좋지."

다들 자유로운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직업을 가질 필요가 없는 부자들이니 아침술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의 통장 잔고를 확인해보던 득환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라! 이 새끼가 정말로 돈을 보내왔네."

"누가?"

"내 큰아들 녀석이 산이나 임야를 사달라고 돈을 부친다더니 정말로 부쳤네."

"얼만데?"

"39억 7천만 원."

득환은 친구들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했다. 자신이 평생 번 돈보다 훨씬 큰돈을 영욱이 벌써 벌었으니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게 당연했다.

"그렇다면 내 산의 일부를 사."

"싸게 준다면야 사야지. 이미 이야기했지만 길이 없는 맹지나 지형이 험한 절벽 근처라도 상관없어."

"네 아들이 사겠다는 데 당연히 싸게 줘야지."

"좋아. 당장 법무사 불러."

"이거 정말 섭섭하네. 옆에 앉아 있는 법무사는 뒀다 뭐하게?"

"경식이 네가 언제 법무사 자격증도 땄냐?"

"좀 됐다. 아무튼 둘 다 서류 준비해서 넘겨."

"알았어. 마누라 보고 가져오라고 하면 돼."

"나도."

상당히 큰 거래임에도 불구하고 득환과 득환의 친구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술자리였다. 다들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이리저리 전화질만 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래는 잘도 이루어졌다.

@

술을 마시던 득환이 휴대폰을 보더니 또 반색을 했다.

"또 돈이 들어왔네."

"이번에는 얼만데?"

"9억이야."

"그럼 내가 그 돈에 적당한 임야를 소개해줄게."

"좋아. 서류 준비해서 당장 거래하자."

"가격도 그렇지만 어떻게 지번도 물어보지 않아?"

"앞으로도 400억 가까이 사야 하는데 일일이 어떻게 확인해?"

"그럼 내 손님이 팔아달라는 산도 구입하면 되겠다."

"또 9억 들어왔다. 이 새끼! 진짜 부자였구나."

득환은 입금 확인이 되는 족족 산과 임야를 샀다. 물론 통짜 산이 아니라 산의 일부다. 그것도 험한 곳으로만 골라서.

"헷갈리니까 일단 계약서부터 써. 선금, 중도금 필요 없이 이 자리에서 바로 완납할 테니까 그렇게 작성해. 중개 수수료는 나와 반씩 나눈다. 알겠지?"

"당연하지. 우린 저쪽 것만 먹어도 충분해."

득환의 친구들은 그동안 골치를 썩이던 산과 임야 들을 처분하게 되어서 희희낙락했다. 물론 친구 사이니까 시세보다 비싸게 판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같이 어울려서 술을 마시던 진중권은 그러한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면서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복을 제 발로 걷어찼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

땅 구입이 모두 완료되자 득환은 영욱에게 간단한 문자를 날렸다.

-총 40개 필지에 350만 평이다. 돈 더 없냐?

-더 벌면 바로 부칠게요. 근데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그건 알 거 없고, 구입한 땅들의 지번을 찍어줄 테니 부동산 정보 홈페이지에서 소유권 이전 여부와 위치를 확인해 봐. 

-넵. 빨라서 좋군요.

-나도 용돈이 생기는 일인데 미루면 바보지.

서기관이나 부이사관으로 퇴직한 후에 법무사 사무실을 열 계획인 득환은 이미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구전을 챙긴 것은 부동산 중개 수수료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래도 막걸리 값으로는 넘칠 정도로 많으니 싫어할 리가 없다. 

-잘 하셨어요. 그리고 진 씨 아저씨랑 꼭 붙어 있도록 하세요.

-당연하지. 돈 떨어질 때까지 술 마실 거다.

-출근은 안 해요?

-1년간 휴식년이다.

-좋은 직장이군요.

-당연하지. 국방대학원 쪽은 꽉 잡고 있으니까 대출은 문제없어.

-또 연락드릴게요.

-돈도 좋지만 몸조심 해.

-넵.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될 것을 또 수십 통의 문자 교환으로 대체했다. 둘 다 고집불통이라서 당분간 통화할 일은 없을 것이다.

@

영욱은 백우산 정상 근처에서 강력한 기운의 출현을 느끼고 그 쪽을 주목했다. 일행이 가고 있는 방향이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산꼭대기 쪽에서 뭔가 나타난 것 같은데?"

"재수 없는 환수겠지."

"환수가 왜 재수 없어?"

"그게 아니라 그 환수가 재수 없다는 소리야. 드림헌터들이 우글거리는 곳인데 힘이나 제대로 써보겠어?"

화리는 방금 나타난 환수가 영욱이 아니라 다른 드림헌터들의 전리품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자꾸만 툴툴거렸다. 거리가 떨어져 있으니 영욱이 처리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현실 세상에서는 드림헌터가 불리하다고 하지 않았나?"

"사냥 아이템은 현실에서도 잘 작동해. 그러니까 오히려 더 유리하다고 봐야겠지."

"환수들이 제 힘을 다 발휘하지는 못하니 그렇게 되겠군. 어쨌든 마법사들이 돈 벌기에는 딱 좋은 상황이 되어버렸네. 그러나 사냥꾼들이 모든 사냥 아이템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 거잖아. 여태까지는 출현한 적이 없었던 새로운 환수가 출현할 수도 있고 말이야."

"그런 경우에는 마법사들이 직접 사냥 아이템을 팔기 위해서 출장을 나오기도 하지. 신종 환수라면 아이템을 만들기 위해서 샘플이라도 채취할 거고 말이야."

화리는 영욱의 무식함을 꾸짖는 차원에서 상당한 정보를 방출했다. 아직 영욱으로서는 홀로서기를 시도하기에는 이르다는 일종의 압박이었다.

"미치고 돌아가시겠군. 재주는 드림헌터들이 부리고 돈은 마법사가 챙기는 격이군."

"웃기고 있네. 너처럼 사냥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는 녀석이야말로 마법사들에게는 눈의 가시겠지. 누가 대체 곰이라는 거야?"

"내가 아이템을 구입할 골드가 어디 있어?"

영욱은 골드가 썩어나는 한이 있더라도 아이템을 구입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진 구조가 워낙 박해서 남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많던 골드를 몽땅 환전해서 쓸모없는 땅이나 산 주제에 그런 말이 나와?"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이곳 백우산과 백암산 사이에도 내 땅이 있더라."

"넓이가 얼마나 되는데?"

"두 곳을 합치면 대략 삼만 평 조금 넘어."

영욱은 생애 첫 부동산 취득 사실을 자랑하고 싶어서 안달을 부렸다. 물론 화리의 약을 올리기 위함이다.

"오늘 그곳에서 비박할 거야?"

"당연하지. 내 땅이니까."

"환수 사냥에는 관심 없고?"

"당연하지. 잡아봐야 빼앗기다시피 팔아야 할 텐데 아까운 목숨을 왜 걸어?"

현실 세계에서의 죽음은 그야말로 죽음으로 이어지니까 하는 소리였다. 2QB 세상에서도 환수에게 잡혀 먹히면 결과는 비슷하지만 그래도 급소 시스템이라도 없으니 가진 힘을 다 소진이라도 해보고 죽는 것이니 그나마 덜 억울하다는 논리였다.

"자신 없다는 소리는 아니고?"

"당연히 자신도 없지. 포크라도 있다면 모르겠지만 빈 몸으로 환수를 어떻게 당해내?"

"그렇다면 네 포클레인의 소환을 가능하게 하는 아이템이라도 하나 장만해."

"그런 것도 있어?"

"마법사가 현실 세상의 사람이라고 한 걸 벌써 잊었어?"

"헐! 대박이다. 그런데 그건 얼만데?"

영욱은 그런 생활 마법도 가능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부피가 작다면 토룡피 사이에 넣어서 다녀도 되겠지만 그걸 가능하게 하는 마법주머니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 100골드 정도 할 거다."

"너무 비싼 거 아냐?"

"다른 것처럼 일회용 아이템은 아니니까 결코 비싼 것은 아냐."

"싸건 비싸건 어차피 구입할 골드가 없으니까 소용없는 일이야."

영욱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환수 사냥은 2QB 세상에서 주력할 것이니 현실 세계에서 사용할 아이템에 100골드나 투자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정수를 팔면 돈이 될 텐데?"

"팔 정수가 어디 있다고 그래? 지금도 부족해서 아쉬워 죽겠는데."

"대룡이 가지고 있는 정수들이 많잖아. 좀 빼앗아도 될 텐데 뭘 망설여?"

"농부아사農夫餓死라도 침궐종자枕厥種子라고 했어. 당장 돈이 궁하다고 해서 미래의 희망을 팔아먹을 순 없지. 그나저나 너는 왜 백족 껍질을 판매하지 않는 거지?"

"그건 내 직원들에게나 사용할 거야. 가뜩이나 부족한데 팔 게 어디 있어."

화리 역시 영욱처럼 좋은 것은 되팔지 않고 자신의 힘을 키우는데 사용할 생각인 듯했다. 그녀 역시 침궐종자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너는 환수 사냥하는 거 구경하러 안 가?"

"사람이 많은 곳은 싫어."

"그렇게 가리는 것이 많아서 사업은 언제 하냐?"

"솔직히 너 하나만 잘 물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네."

"내 등골을 빼먹을 생각이라면 사절이야."

"서로 상부상조하자는 거지, 일방적으로 바라지는 않아."

"앞으로는 그러길 바랄게."

영욱은 뼈있는 말을 뱉으며 화리의 반성을 촉구했다. 눈앞의 이익을 쫓다가는 아무 것도 팔지 않을 테니까 단단히 각오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화리 역시 이제는 대등한 거래 파트너로 인정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날로 먹을 수 있는 시기는 이미 지났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영욱은 환수의 기운들이 하늘 위에서도 느껴져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하늘을 날아다니는 환수도 있어?"

"당연하지. 왜? 설마 그런 환수가 나타난 거야?"

"백우가 흰 깃털이라는 뜻이니 그럴 수밖에."

"그럼 학이나 백로라는 말인가?"

영욱은 제 3의 눈을 동원해서 하늘을 뒤덮은 채로 날아다니는 환수의 정체를 짐작해내는 데 주력했다.

"아냐. 까마귀 같은데 색깔만 흰 녀석이야. 그렇다면 기형인가?"

"맙소사! 백오白烏 떼란 말이야?"

중국에서 상서로운 징조를 뜻한다는 상상 속의 흰 까마귀가 바로 백오다. 

진나라 시황제가 인질로 삼았던 연나라 태자 단丹에게 까마귀 머리가 하얗게 되고, 말의 이마에서 뿔이 나면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실제로 그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백오 환수도 존재하고 유니콘 환수도 존재하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닌 셈이다.

문제는 백오가 아주 크고 숫자도 수백 마리를 훨씬 넘는다는 것이었다. 까마귀는 맹금류에 속하는 새라서 부리가 독수리만큼이나 강하고 날카롭다. 그런데 백오 환수니까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할 것이다.

그 강력한 녀석들이 오히려 환수사냥꾼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숫자가 워낙 많으니 녀석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사냥용 아이템이 있을 리 없었다. 있다고 해도 너무 비싸서 도저히 사용할 엄두가 나지도 않을 것이다.

환수사냥꾼들과 상인들은 백오 환수의 공격을 피해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날개 달린 백오보다 빠를 리 없으니 연신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

영욱 일행도 이제는 안전한 상황이 아니었다.

"얼른 바위 뒤에 숨은 다음 비트를 파고 들어가. 시력이 워낙 좋은 녀석들이라서 움직이는 것은 뭐든지 다 관찰할 테니까 눈에 띄지 않게 잘 숨어."

"예. 선배님."

영욱의 숨으라는 명령에 다들 일사불란하게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훨씬 더 강한 사퍼모어 급의 드림헌터들도 백오의 공격을 받고는 빈사 상태에 이르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영욱의 일행이 땅속으로 숨은 후에도 일방적인 학살은 계속되었다. 사람보다 훨씬 큰 백오는 아주 빠르게 날아다니면서 놀라운 공격력을 보여주었다. 

슬쩍 스치기만 해도 살점이 서너 근씩 떨어져 나가고 제대로 쪼이면 팔다리가 하나씩은 떨어져 나가니 제아무리 재생 능력을 갖춘 드림헌터라고 해도 중과부적이었다. 

게다가 불로 지지고 얼려도 끄떡없었고, 엽총에 명중되어도 오히려 간지러워했다. 

심지어 드림헌터들을 낚아챈 다음 하늘 높이 올라가서 떨어뜨리기도 했다. 결과는 참혹한 파편만 남기고 혈병血餠이 되는 길 뿐이었다.

-영욱 씨! 큰일 났어요.

-뭐야? 현실 세계에서도 텔레파시가 가능해?

-거리가 가까우면 불가능할 것도 없죠.

-내 옆에 비트를 파고 든 게 바로 너였어?

영욱은 진소희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볼멘소리를 내었다. 물론 정말 싫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안전할 테니까요.

-날 너무 믿지 마. 그런데 뭐가 큰일이라는 거야?

-앞으로 세 달 동안은 이대로 숨어 있어야 할 테니까 큰일이라는 거죠.

피의 페스티벌이 삼 개월 동안 이어진다는 사실을 소희도 잘 알고 있었다. 만일 백오 환수들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굶어 죽게 될 것이니 정말 큰일인 셈이다. 하지만 형기는 그렇게 절망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는 않을 거야.

-금방 되돌아간다는 말인가요?

-그렇지도 않을 거야.

-그럼 대체 뭐죠?

-까마귀가 왜 까마귀가 된 줄 알아?

영욱은 대답 대신 뜬금없이 선문답 같은 질문을 던졌다.

-몸 색깔이 까매서 까마귀라고 하지 않나요? 쟤들은 돌연변이겠지만.

-맞아. 까마귀는 밤이 두려워서 까만색으로 진화한 거야. 밤의 제왕인 올빼미나 부엉이로부터 잘 숨기 위해서지.

-하지만 쟤들은 하얀색에다가 두려워할 올빼미나 부엉이 환수가 있을 리 없잖아요.

-우리가 있잖아. 그리고 하얀색 까마귀는 실패작이야. 그러니까 사냥하기가 더 쉬울 거야.

영욱은 다른 환수 대신 백오 환수가 나타난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다면 벌써 다른 환수 사냥꾼들 차지가 되었을 테니까. 

실제로 밤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자신도 사냥할 수 있는 기회는 있을 거라고 여겼다.

-피해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요?

-어디까지 도망갈 건데? 날개 달린 저 녀석들이 우리보다 늦을 것 같아?

-그렇다면 숨어 있는 게 낫지 않을까요?

소희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백오와 싸워서는 승산이 전혀 없다고 여기는 듯했다. 오죽하면 석 달 동안 숨어 있자는 소리를 하겠는가.

-그러자면 네 말대로 석 달 동안 땅속에서 살아야 해. 나야 전혀 상관없지만 넌 축축하고 춥지 않을까? 그리고 뭘 먹고 살 거야? 너는 지렁이도 못 먹잖아.

-저도 화정이라는 거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화정 하나만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이 아냐. 화력 조절을 위해서는 토정도 있어야 하고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서는 빙정도 있어야 해.

-제게 무료로 제공하실 의향은 없나요?

영욱에게 화정이 있는 걸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의 끝은 결국 그 소리였다. 목적이 있으니 바로 옆에 비트를 파고 숨어든 것이다.

-없어.

-그럼 할 수 없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온기를 조금이라도 느끼려면 영욱 씨와 같이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소희는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적극 활용해서 영욱이 있는 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잔상권 초식을 발휘해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땅을 헤집고 영욱에게로 다가왔다.

-그만 두지 못해? 그러다가 얼기설기 덮어둔 지붕이 무너지는 수가 있어. 아직도 대낮인데 백오 환수들에게 들켜서 죽고 싶어?

-그래도 얼어 죽는 것보다 나아요. 침낭을 펼칠 공간도 없어서 정말 얼어 죽겠어요.

진소희는 영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다가왔다. 땅속에서 몹시 불편한 자세로 땅굴을 판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잔상권의 놀라운 위력과 함께 불과 1미터 옆에 시작된 일이니 터널은 순식간에 개통되고 말았다.

영욱은 얼른 제 3의 눈을 이용해서 백오들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다들 현재의 사냥에 몰두하고는 있지만 느낌상으로는 알아차린 듯했다. 땅속에 있으니 모르는척하고 있다가 나중에 사냥감이 없어지면 파먹을 심산인 듯했다.

까마귀는 원래 땅도 잘 판다. 머리가 영리해서 도구를 이용할 줄도 아는 새다. 게다가 환수 백오의 부리는 어지간한 드릴보다도 날카롭고 삽보다도 훨씬 컸다.

-젠장! 너 때문에 들켰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쟤들이 땅속을 어떻게 본다고 그런 말을 해요?

-쟤들이 보통 까마귄 줄 알아? 아무튼 자리 좀 비켜봐. 

-예.

영욱은 소희에게서 배운 응용동작을 이용해서 아래로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회전할 만큼의 공간조차도 없으니 제대로 될 리 없지만 손끝에 ULM 실드를 두르고서 굴착 공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땅속까지 바짝 얼어있어서 진도가 쉽게 나가지는 않았다. 

-화구! 화구! 화구! 토마스 스핀! 헤드 스핀!

화구마저도 동원했으니 백오들도 알겠지만 어차피 이미 들킨 상황이니 가진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시작했다. 2QB 세상에서의 위력에 비하면 불과 2퍼센트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맨손과는 비교할 수 없는 효과가 있었다.

땅을 파고 내려가다가 큰 바위를 만나면 빙 둘러서 그 밑으로 파고들 계획이었다. 그래야 백오의 공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확률이 커지기 때문이다.

작업을 계속 이어가자 작업의 효율이 조금씩이나마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3퍼센트, 4퍼센트로 팍팍 늘어나는 것은 아니고, 겨우 2.1퍼센트, 2.2퍼센트 정도의 미미한 향상이었다.

-맞아. 내게도 증폭아이템도 있었지. 커져라! 세져라! 화구! 화구! 화구! 토마스 스핀! 헤드 스핀!

증폭 주문과 공격 주문은 물론이고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조합한 구결도 함께 외웠다. 어느 구결이 응용동작과 궁합이 잘 맞는지 알아보려는 의도도 있기 때문이다.

'활인심방, 좌우명천고, 토마스 스핀! 이게 제일 낫군.'

아무래도 동적인 움직임이다 보니 활인심방의 폐목명심좌, 악고정사신, 고치삼십육, 양수포곤륜, 좌우명천고 구결 중에서 좌우명천고와 궁합이 가장 잘 맞는 듯했다.

'맞아. 그래핀 실드도 있었지.'

그래도 여전히 굴착공사가 여의치 않자 영욱은 궁리 끝에 꼭 강한 물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전기전도성이 뛰어난 물질이 기계체조와 궁합이 더 잘 맞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그래핀과 ULM을 섞어서 실드로 소환해보려고 했지만 두 성분이 잘 섞이지 않았다.

'좋아, 그렇다면 따로따로 소환하지 뭐.'

먼저 ULM실드를 소환하고 그 밖에다 그래핀 실드를 소환해 보았다.

'별다른 차이는 없는 것 같은데?'

그래서 이번에는 그래핀 실드를 먼저 소환하고 그 밖에다 ULM실드를 소환했다. 그랬더니 느낌이 조금 달랐다.

찌릿찌릿!

'어? 이거 그런 대로 괜찮은데?'

전기전도성이 아주 좋은 그래핀 실드가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형태의 의미는 아주 컸다. 

특히 생체전기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계체조이니까 의미는 더 컸다. 다만 열 겹이 넘게 겹쳐 입은 환수 가죽들이 그 의미를 오히려 퇴색시킨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면 환수 가죽들 사이에도 한 겹씩 그래핀 실드를 쳐?'

그런 생각이 들자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이미 자신과 한 몸이 된 가죽들이지만 그 사이에 물건을 집어넣을 수도 있으니 실드를 치는 게 불가능할 리 없다. 다만 너무 타이트하게 붙어있는 상태라서 그리 쉽지는 않았다.

'좋았어!'

몇 차례 시도 끝에 결국은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서 효과는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뭐야? 그렇다면 ULM 실드와 함께 해야 효과가 크단 말인가?'

변수는 그리 많지 않으니 짐작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토룡피 안쪽에 두 겹의 실드를 치는 일이 그리 만만할 리가 없었다.

열심히 땅을 파면서 그래핀과 ULM 두 겹 실드를 치는 작업을 계속 시도했다. 그러던 와중에 결국 마음에 드는 수준의 실드가 완성되었다.

'좋았어.'

찌릿찌릿!

실드가 외부의 충격이나 공격을 방어한다는 의미보다는 생체전기의 원활한 전달을 목표로 하는 것이니 위치는 토룡피 내부와 피부 바깥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ULM 실드는 절연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서 생체전기가 외부로 분산되는 것을 막아주는 효과를 보였다. 다만 환수가죽들과의 기운 교환도 방해하는 효과가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가장 내부에는 그래핀 실드, 환수 가죽의 바깥에 ULM 실드를 쳤더니 가장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

응용동작에 적당한 주문도 만들었고, 사파이어 귀걸이 증폭 아이템도 동원했고, 절삭력을 높이기 위해서 2종의 실드까지 제자리에 위치시키자 작업의 속도가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땅 파는 것은 영욱의 전문 분야다. 토룡 역시 땅 파는 데 있어서 전문가인지라 토룡피도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다. 게다가 파낸 흙을 토룡피 사이에 잠시 보관함으로써 굴이 다시 막히는 불상사를 막아주기도 했다.

5미터 정도 파고 내려가자 영욱이 기대하던 커다란 바위를 만날 수 있었다. 반 바퀴 빙 둘러서 바위의 아랫부분에 적당한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

-어서 이리로 도망쳐, 어서!

이제야 숨을 돌린 영욱이 제 3의 눈으로 바깥을 살펴보니 그 많던 드림헌터들의 행적이 묘연했다. 다들 죽지는 않았겠지만 영욱처럼 숨든지 피한 듯했다. 대부분 팔다리를 뜯어 먹혔으니 회복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배가 고픈 백오들은 만만한 먹잇감인 영욱 일행을 향해서 탐욕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영욱이 경계경보를 발령하자 은영과 박상태를 시작으로 두 노예들이 영욱의 비트를 통해서 빠르게 땅 밑으로 기어 내려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진소희는 이미 영욱의 곁에 도착해 있었다.

-넌 오지 마! 이미 꽉 찼어.

유화리도 자기 일행들을 이끌고 영욱이 파놓은 굴로 이동하려고 하자 핀잔을 주면서 오지 못하게 말렸다. 사실 그럴 만한 공간도 없었다.

-통로라도 좋아.

-통로는 아무런 소용도 없어.

-정말 치사하게 이럴 거야?

-너는 언제 나 도와준 적 있었냐? 오히려 위험에 빠뜨리기만 했지.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통로에 자리를 잡은 화리가 툴툴거리자 영욱도 결국 본심을 드러냈다. 엄연히 남인데 툭하면 한 자리를 걸치려고 드니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백오 떼가 나타난 것 역시 네가 저지른 일의 여파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이야?

-석 달 동안 축제가 벌어질 거라고 좋아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딴 소리야?

-내가 가진 사냥 아이템 중에는 해결책이 없어서 곤란하니까 하는 말이지. 아마도 다들 그럴 거야. 크기가 애매하고 숫자가 워낙 많아서 말이야.

-그렇다면 독벌이라도 나타났으면 어쩌려고 했어? 서툰 목수가 연장 나무란다더니……. 

화리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지만 영욱은 빈정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독벌들이라면 사냥 아이템이 이미 개발되어 있어. 어서 좀 자리를 만들어 보라니까.

-백족 껍질 열 장을 준다면 생각해 보기로 하지.

-그건 뭐하려고?

-그걸로 입구를 조금이라도 좁혀보려고.

-좋아. 열 장 여기 있어.

화라도 바위 밑이 아니면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는지 망설이지도 않고 백족 껍질을 내놓았다.

-좋아. 너는 안으로 들어가. 내가 입구에서 어떻게든 막아볼 테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백족 열 장으로 입구를 막을 생각이 아니라 일종의 대가를 요구한 것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순진한 화리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우리 일행들은 어떡하고?

-그럼 쉰 장을 더 내. 

-이제 보니까 도둑놈이 따로 없구나. 그게 얼만지 팔아먹은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그러니까 네 부하들은 각자 알아서 도망치라고 해. 너도 잘 알겠지만 좁아서 들어갈 데가 어디 있니? 바위가 내려앉을 수도 있어서 더 파낼 수도 없어.

48골드에 해당하는 금액이니까 도둑놈 심보가 맞긴 하지만 화리가 자신에게 가진 심보 역시 그 이상이라는 걸 알기에 영욱으로서는 전혀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조금 불편해도 다 들어올 수는 있겠는데?

-그 자세로 며칠을 버텨야할 지도 모르는데 그런 말이 나와? 운이 나쁘면 석 달을 버텨야 해.

-젠장. 땅 파는 재주가 이렇게 돈이 될 줄은 몰랐네. 좀 깎아줘.

-좋아. 마흔 장만 내. 더 이상은 못 깎아줘. 

-그게 돈으로 얼만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야?

-백족의 기운까지 줄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 따지자면 몇 푼 하지도 않잖아.

전투력보다 더 가파르게 상승한 것이 바로 협상력이었다. 영욱은 핵심을 찌르는 말로 화리의 가격 절충 시도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다. 나중에 백족 껍질만 따로 사서 쓰면 되니까 영욱의 주장이 틀리지도 않다.

-그리 따져도 삼억 이천이다. 억이 옆집 개 이름이야?

-싫으면 말고.

-서른 장. 

-좋아. 서른 장만 더 내.

-여기.

-다들 들어와. 어서!

화리의 명령에 한극상이 커다란 덩치를 디밀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출근 시간의 지하철보다는 덜 복잡하니 들어가고도 남았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