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71)

영욱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은영과 소희의 반응은 화리와 비슷했다. 일단 발언할 기회가 주어지자 그녀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실 제 블라인드 초능력이 없었다면 영욱 씨가 제아무리 민첩해도 녀석을 잡아채지는 못했을 거예요. 그렇다고 꼭 몫을 나눠달라는 소리는 아니지만…….

-맞아. 나도 몽구스가 잠드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해. 물론 가장 큰 일이야 오빠가 해낸 것이지만…….

-너도 들었지? 팀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다면 정확한 배분이 가장 중요해.

-그러니까 몽구스의 가죽을 나누어야 한다는 말인가? 소희 네가 대답해 봐.

-꼭 그런 것은 아니라도 적절한 배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은영 너는?

-오빠에게 갚아야할 빚도 있으니까 나눠주면 나야 좋지.

사냥에 성공했다는 말의 의미는 몽구스 환수로부터 그들의 목숨을 살려준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그녀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게다가 대룡의 진액까지 제공하면서 몽구스 환수의 기운을 배가 터질 정도로 흡수하게 해주었는데도 몫을 요구하니 영욱으로서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은영과 소희의 주장이 무조건 틀린 것만은 아니라서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게 바로 화리가 노린 점이었다.

-좋아. 팔 것은 아니지만 대략 30골드라니까 소희와 은영에게 각각 5골드를 주고 대룡과 내가 5골드씩을 가지기로 하지. 그리고 박상태에게 4골드, 김호진과 윤승언에게 각각 3골드씩을 주기로 하지. 이 분배 방법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입을 다물어. 

-그 정도면 만족해요.

-오빠, 나도 만족해. 내가 진 빚에서 5골드 까. 호호호!

-저도요. 호호호!

전리품에 대한 분배를 해봐야 이미 진 빚 때문에 가져갈 골드는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만족스러워했다. 영욱과 화리만 빼고.

-이제 됐어?

-그러지 말고 내게 팔아. 35골드 줄 테니까.

-너 지금 장난치자는 거야? 너 때문에 분배를 다시 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40골드로 올리기 전에 어서 팔아.

-나도 이 상황이 더러워서라도 팔아버리고 싶지만 이미 교감이 이루어진 가죽을 어떻게 팔아?

영욱은 분쟁을 조장하는 화리를 슬쩍 비웃으면서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냥 내버려두면 100골드에 팔겠다고 할 것이고, 액수가 커질수록 영욱의 입장만 곤란하게 될 것이니 어쩔 수 없이 밝히는 사실이기도 했다.

-피를 묻히지도 않았는데 교감이 이루어졌다고? 누굴 지금 바보로 아는 거야?

-피가 아니라 그 속에 함유된 기운이 바로 교감을 이루게 하는 열쇠야. 아직도 모르겠어?

-아직 환수 가죽과 교감해보지도 못했으니까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잖아.

-충고 하나 해 주지. 너처럼 가죽을 구입해서는 절대로 교감에 이르지 못해.

-직접 사냥해야 가능하다는 말인가?

-맞아. 그것도 사냥 아이템의 도움 없이 잡아야 환수 가죽의 입장에서도 수긍首肯할 수 있는 거지. 수긍이 무슨 뜻인지 알지? 옳다고 인정하는 거.

약간 비아냥거리긴 했지만 아주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주었는데도 화리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것은 그녀가 아이템의 도움 없이 환수를 사냥할 능력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없기 때문이다.

-젠장! 하긴 뭐, 상인이 가죽과 교감해서 뭐하겠어? 그래봐야 팔아먹지도 못하는 걸.

-교감이 이루어지면 맞춤옷이나 자기 피부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서 아주 좋지. 어때, 잘 어울리지?

-흥! 네 피부나 마찬가지니까 그렇겠지. 자랑하지 마.

-감히 내 밥그릇을 건드렸으니까 약이라도 계속 올려야겠다. 꼽냐?

-넌 다른 사람에게 기운을 나눠줄 수도 있잖아. 그런데 꼭 잡는 환수마다 가죽을 다 챙겨야겠어?

-응. 그게 가장 오래 사는 길이니까.

-방어력이 높아지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오래 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는데?

-너도 나중에 교감해 보면 알게 될 거야. 사람들이 왜 교감, 교감,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지를.

상인인 화리로서야 팔기를 원하지만 영욱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백족의 껍질들처럼 언젠가는 더 이상 겹쳐 입을 수 없는 순간이 오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머의 기능보다 훨씬 중요한 기능이 있으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그러니 팔 이유가 없다.

-좀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

-세상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도 존재하는 법이지.

영욱은 잉여 기운을 자신과 교감을 이룬 환수 가죽에 보관할 수도 있고, 언제든지 가져다 쓸 수도 있다는 말을 아꼈다. 쉽게 믿을 것 같지도 않지만 굳이 알려줄 이유가 없는 비밀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기능이 다른 사람에게도 제공되는 지에 의문이기도 했다. 

자신의 경우라면 활인심방의 효용으로 기운을 다루는 일에 익숙하니까 가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들도 그런 비기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게 서로 교감을 이룬 환수 가죽이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기능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백우산

길고 길었던 몽구스 환수 사냥이 끝나자 영욱 일행은 등골산을 벗어난 후에 두촌면 일대에서 비박하기로 했다. 평평한 지역이지만 영욱은 일행들에게 각자의 비트를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번에는 영욱도 직접 자신의 비트를 팠다. 이런 일도 훈련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비트를 파본 경험이 전혀 없는 은영과 진소희도 불평하지 않고 영욱의 지시를 따랐다. 

대신 서두르지 않고 일단 박상태와 영욱의 비트를 꼼꼼하게 관찰한 후에 참조해서 땅을 파고 나뭇가지와 짚을 덮어서 지붕을 만들었다.

유화리 일행도 자신들이 사용할 대형 텐트를 치느라고 부산을 떨어댔다. 유화리는 여자들의 비트에 꼽사리 낄 자리가 마땅치 않자 텐트 속에 작은 텐트를 하나 더 쳐서 자신만의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다들 고생 많았다. 이제 현실 세상으로 돌아가자.

-정말 고생 많았어.

-맞아. 2QB 세상에서 열흘 가까이 머물러 보기는 처음이야.

-그게 다 오빠 덕분이지.

-겨우 하루도 머물지 못하고 돌아가면 언제 강해져? 그래봐야 현실 시간으로는 얼마 차이 나지도 않아.

-하여튼 오빠는 정말 지독해.

-도서관에서 공부도 이렇게 하셨어요?

-당연하지. 그렇지 않았으면 두 달이나 밀린 공부를 어떻게 따라잡을 수 있었겠어?

-하지만 사냥과는 달리 공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 않나요? 사냥이야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 상관없지만 공부는 해봐야 헛수고 아닌가요?

소희는 좋은 분위기를 틈타서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의문 사항을 질문했다.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했지. 그리고 백 번쯤 읽으면 꼭 그렇지도 않아.

-같은 책을 백 번이나 읽어요? 

-이백 번 읽은 책도 많아. 이 세상에서 가장 풍족한 것은 바로 시간이니까.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으면 지겹지 않아요?

-되새김질의 즐거움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군. 읽을 때마다 느낌이 늘 새롭지. 

모든 책을 다 반복해서 읽을 수는 없겠지만 잘 쓴 책들은 반복해서 볼수록 더 감칠맛이 난다. 영욱은 2QB 도서관에서 편안하게 책 읽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독서에서도 통용되는 모양이군요.

-맞아. 이번 횡단 여행이 무사히 끝나고 나면 천 번씩 읽을 계획이야. 그래야 종이학이 살아있는 학이 되어서 날아오르지 않겠어?

-정말 지독해요.

-내가 가진 재능들 중에서 가장 쓸 만한 게 바로 노력이야. 그러니 지독하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열심히 하는 수밖에.

-아무튼 저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꾸는 가장 긴 꿈이었어요.

-앞으로는 매일 밤 긴 꿈을 꾸게 될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하니까 다들 마음 단단하게 먹으라고. 그럼 잘 자.

-예. 영욱 씨도 잘 주무세요.

-오빠, 잘 자.

다들 흡족한 표정으로 잠이 들었다.

@

부스럭.

현실 세상에서 잠이 깬 영욱은 서둘러서 시계부터 보았다. 이제 겨우 새벽 두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한 시간이나 걸렸군."

보통은 몇 분에서 일이십 분 이내인 것에 비하면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열흘 동안 머물렀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변환 비율이 꼭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몇 분의 열 배라도 꼭 한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고 일이십 분의 열 배는 한 시간을 훨씬 넘으니까.

위이이잉.

현실 세계의 등골산 동쪽 사면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차갑고 사나운 겨울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화정을 열두 개나 품고 있는 영욱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못했다.

영욱은 얼른 비트를 빠져나가서 새로 배운 응용 동작들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이 까먹기 때문에 복습을 하려면 지금이 바로 최적의 기회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바닥이 얼어있어서 자칫 위험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응용동작을 연습하기는 아주 좋았다. 대부분이 스핀 동작과 비슷하니까 적당히 미끄러운 곳이라야 회전하기가 좋다.

토마스 스핀은 손을 교대로 짚으며 몸과 다리를 허공에 띄우고서 회전하는 기술이다. 몸이 길고 팔이 짧은 영욱의 아버지 득환이라면 매우 어려운 동작이겠지만 영욱은 리치가 키보다 훨씬 길어서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현실 세계라서 못해낼 이유는 전혀 없었다.

초식은 아니지만 중간에 감초처럼 들어가는 동작이 클리켓인데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몸과 다리를 허공에 둔 채로 헤엄치듯이 빙빙 도는 동작이다. 물구나무를 선 형태가 아니라 지면과 몸이 평행하게 수영을 하는 것처럼 엎드린 형태다.

이 역시 그리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이미 기초 동작에서 어느 정도 연습했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진중권도 영욱의 기초가 어느 정도 된다고 보았으니까 과감하게 응용 동작을 패스하고 심화 동작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윈드밀 스핀은 등 부분의 어깨를 축으로 다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빙빙 도는 동작이다. 윈드밀이 바람개비나 풍차를 뜻하는 말이니 상상이 가고도 남는 동작이다.

영욱은 자신이 브레이크댄스에도 꽤나 소질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기계체조는 춤처럼 보기 좋을 정도로 회전하는 것은 아니다. 팽이가 도는 것처럼 팽팽 돌아야 드릴처럼 뚫고 들어가는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물론 경지에 오르면 여러 개의 잔상이 남아서 다시 춤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시도하는 영욱으로서는 어설픈 비보이보다도 못했다. 

헤드스핀 역시 초식의 이름은 아니지만 중간에 거쳐 가는 중간 동작이다. 춤에서는 이 동작이 꽃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전투 중에 가장 중요한 머리를 들이밀 수는 없으니 역할이 축소된 듯했다.

동작은 윈드밀 스핀에서 헤드 스핀으로, 다시 헤드 스핀에서 윈드밀 스핀으로, 원드밀 스핀에서 클리켓으로 물 흐르듯이 이어졌다.

마지막 초식인 탑락 풋워크는 팔을 흔들고 스텝을 앞뒤로 밟으면서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는 동작이다. 하지만 기계체조 응용 동작에서는 그야말로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는 초식인 셈이다. 

진소희는 그 공간 안에 들어온 적은 물론이고 나무와 돌마저도 일시간 힘을 잃어버린다고 설명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아주 조금 그런 느낌이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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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잠을 자는 대신 수련에 열중하자 박상태와 노예들은 물론이고 미녀라서 잠을 많이 자야 하는 진소희와 은영마저도 자신들의 비트 속에서 기어 나왔다. 

2QB 세상에서 수련한 것을 복습을 통해서 체득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을 그들도 영욱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저마다 배운 기계체조 초식들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기초 동작이든 기본 동작이든 심화 동작이든 부끄러워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열흘 동안 머리로 익힌 것을 이제는 몸으로 익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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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두가 동참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화리였다.

"미쳤어? 제발 잠 좀 자자!"

"너나 주무세요. 누가 말려?"

"미친놈처럼 달밤에 체조한다고 달라질 게 뭐가 있어?"

"당연히 달라지지. 무엇보다 살을 빼는 데는 아주 효과가 좋지."

영욱은 헤드 스핀을 빙빙 돌면서도 친절하게 대답했다. 일부러 그녀의 텐트 앞을 훈련 장소로 택한 것은 그녀의 수면을 방해하기 위함이었다. 그야말로 뒤끝 작렬인 셈이다.

"대체 내 몸에서 어디가 뚱뚱하다는 거야?"

"중부 지방이 조금 뭉친 거 아냐?"

"내 허리가 몇인데 그런 말을 하는 거야?"

"26인치 정도 되려나? 하지만 소희와 은영은 25인치 정도니까 하는 말이지."

영욱은 자로 재어 보지도 않고 여자들의 허리 사이즈를 정확하게 읊어댔다. 전투력의 수직 상승은 거리와 길이의 계측 분야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했다. 그래야 적의 공격을 최소한의 동작으로 회피하거나 다시 공격하는 게 가능해지니까. 

"쟤들은 타고난 애들이야. 그러니 임산부처럼 나왔던 배가 순식간에 개미처럼 잘록해질 수 있는 거지."

"타고난 게 어디 있어? 춤을 저렇게 춰 대니까 뱃살이 남아나지 않는 거지."

"하지만 내일 산행은 어쩌려고 이러는 거야?"

"이미 충분히 잤잖아."

"너는 그럴지 모르겠지만 난 아냐. 그러니 제발 잠 좀 자자."

"가서 자! 누가 말려?"

영욱이 화리가 잠을 자지 못하게 방해하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잠을 잘 수 없게 만들면 어지간한 부탁을 다 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여섯 명이 부스럭거리는 데 잠이 오겠어?"

"너, 나이트클럽 생각나서 그러는 거지?"

"아, 아냐."

"솔직하게 말해 봐. 춤추고 싶지?"

"솔직히 너를 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이 조금은 들어."

그것은 영욱의 응용 동작이 이제는 제법 브레이크댄스처럼 보인다는 소리였다.

"그럼 너도 춰. 음악 틀어줘?"

"내가 브레이크댄스를 어떻게 춰?"

"그럼 아무 춤이나 추든가. 막춤도 좋고."

"남들은 모두 수련하는데 내가 미쳤어? 달밤에 막춤이나 추게."

"그럼 주무시든가."

"그런데 웬 일이야? 나하고 다 놀아주게?"

화리도 영욱에게 뭔가 용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 일을 해결하기 전에는 재워주지 않을 테니까 얼른 처리하려고 했다.

"골드를 현금으로 좀 바꿀까 하고."

"현금으로 뭐하게?"

"땅이나 좀 사려고."

"무슨 땅?"

"산이나 임야."

"왜?"

"아무래도 내 땅이라면 힘을 발휘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

하룻밤 사이에 397골드가 생겼으니 그야말로 졸부가 된 셈이다. 영욱은 그 돈을 들고 있으면 파리가 끓을 것 같아서 마법서가 아닌 땅부터 사기로 했다. 그러자면 일단 환전부터 해야만 했다. 그게 바로 현실 세상의 화리에게 바라는 부분이었다.

"그건 겨우 현실 세계의 권리일 뿐이야. 그것도 아주 일시적인 권리일 뿐이고."

"하지만 몽구스 환수를 보면서 꼭 그럴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현실의 일이 2QB 세상의 일에도 의외로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야?"

"당연하지. 산의 이름만 해도 똑같잖아. 크기만 조금 다를 뿐이지."

"마법서는 안 사?"

영욱의 환전 목적이 진짜로 땅을 구입하는 것임을 알게 된 화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시급한 것이 아닌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야지. 하지만 당장 급한 것은 내 아지트부터 마련하는 것이야."

"점 찍어둔 산이라도 있어?"

"여태까지는 돈이 전혀 없었는데 무슨 점을 찍어 둬. 지금부터라도 알아봐야지."

"하지만 겨우 몇 백억으로 산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부족하다면 골드를 더 모아야겠지. 하지만 험하고 쓸모없는 산만 골라서 살 생각이니까 그렇게 큰돈이 들지는 않을 거야."

"그런 산이 어디 있어? 상대적으로 조금 싸다고 해도 여전히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할 거야. 평당 십만 원이라고 쳐도 백만 평이면 무려 천억이 필요해."

"골드만 조금 더 열심히 모으면 그 정도면 살 수 있겠네."

평당 오천 원이나 만 원이라면 좋겠지만 요즘 그런 땅은 거의 드물다. 그보다는 평당 오십만 원을 호가하는 땅들이 더 많다. 그러니 화리의 말처럼 평균 잡아서 십만 원은 쳐야 하는 것이다. 

영욱은 397골드가 꽤 많은 돈인 줄 알았는데 산을 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소리를 듣고 약간은 의기소침해졌다. 하룻밤의 수입으로 너무 큰 꿈을 꾼 게 분명했다.

"여의도의 면적만 해도 250만 평이 넘어. 그런데 여의도보다 작은 산은 그리 흔치 않아. 예를 들어 관악산만 해도 582만 평이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최소한 오천억 정도는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인가?"

"나도 몰라. 흔하게 이루어지는 거래가 아니라서 정해진 가격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산을 통째로 팔겠다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고."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조금씩 사서 모으다보면 큰 산이 될 수도 있겠지."

"굳이 산을 통째로 다 살 필요는 없잖아?"

"그래도 되고."

영욱은 화리의 권유대로 산을 통째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산에 있는 임야의 일부를 사는 것으로 하향 조정해야만 했다. 돈을 조 단위로 가지고 있어야 산 몇 개를 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니 어쩔 수가 없었다.

"곧 땅 부자가 되겠네. 아무튼 필요한 만큼 현금으로 교환해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살 곳이 있는 지나 알아봐."

"그래."

영욱이 잠을 재우지 않은 보람이 있어서 환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녀로서도 20%나 싸게 구입하는 중이니 그 정도의 편의를 마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마법서 공동 구입이라는 희대의 사기극까지 준비하는 중이니 영욱이 그렇게 아양을 떨지 않아도 협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다.

물론 영욱으로서도 임야의 구입이 시급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돈에 눈독을 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전에 부동산으로 바꾸어 버리려는 것이다. 

그것도 살 때에는 돈이 들어도 쉽게 되팔 수 없는 오지의 산에 있는 쓸모없는 임야를 구입해야 눈독 들이는 사람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판단했다. 눈독을 들이는 사람이란 다름 아닌 은영과 소희다.

그리고 자신의 땅에서 싸운다면 자신의 영역처럼 아무래도 유리한 면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악수를 통해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해야할 이유가 없다. 

산마다 존재하는 대피소들처럼 산마다 조금씩이나마 자신의 땅을 장만해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자신들이 판 비트 또한 그런 개념으로 작용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자신의 땅이 가지는 위력은 상당할 것으로 짐작되었다. 영욱은 재벌들이 2QB 세상에서도 큰 위력을 발휘하는 이유가 단지 골드 때문인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2QB 세상은 별개의 세상이되 별개의 세상이 아닌 이유가 바로 그런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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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훈련하다 보니 어느새 동쪽 하늘 위로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영욱은 훈련을 멈추고 꺼두었던 스마트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저 영욱이에요."

-알아. 내 전화기도 전화번호 대신에 네 이름이 뜨는 스마트폰이야. 그런데 이 꼭두새벽에 무슨 일이야? 

"지금 몇 신데 그런 말을 하세요? 그리고 어디세요? 주무시던 중은 아닌 것 같은데?"

-네가 내 사생활을 간섭할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득환의 말투가 술에 취해서 혀가 꼬부라진 것은 물론이고 영욱에게 유달리 사납게 대하는 것을 보니 지금 누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지 대번에 짐작이 갔다.

"지금 진 씨 아저씨와 술을 드시고 계신 건가요?"

-그래. 너 없다고 해서 우리들의 우정이 변하지는 않아. 사돈이 되는 것도 변함없고.

"그 이야긴 이미 끝났잖아요."

-닭 대신 꿩이라고 너 대신 네 동생 영길을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넌 이제 아무 상관없으니까 신경 꺼.

영욱은 득환의 말에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지만 용건이 있으니 전화를 끊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자신을 꿩이라고 표현한 것이 예전과는 달리 대접이 많이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계체조도 모르는 영길을 왜요?"

-걔는 똑똑하니까 지금부터 배워도 너보다는 훨씬 더 나을 거다. 이건 내 말이 아니라 네 옛날 사부의 말이다.

"그 문제는 아버지의 말씀처럼 이미 끝난 일인데 자꾸만 까칠하게 구실 거예요?"

-내가 뭐라고 했기에? 그런데 이 새벽에 무슨 용건이냐?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중권이 듣고 있는데 땅을 사라는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제는 돈도 충분히 벌었는데도 여전히 소희를 싫어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으니 나중에 다시 전화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됐어요. 지금은 말씀드릴 기분이 아니니까 끊을 게요."

-끊어. 새벽에도 마음대로 전화하고 아버지와 통화 중에도 마음대로 끊는 게 바로 네 놈이니까. 고얀 놈 같으니라고.

"그런 게 아니잖아요."

-네 놈과 통화하면 술맛 떨어지니까 앞으로는 용건이 있으면 문자로 보내. 

영욱이 먼저 끊겠다는 소리에 마음이 상한 박득환이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더니 먼저 전화를 끊었다. 진중권의 앞이라서 다소 과장하는 부분도 없진 않겠지만 영욱의 행동이 꽤나 서운했던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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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운하기는 영욱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이 아저씨는? 자기 아들 편은 들지도 않고 왜 남의 편을 드는 거냐고."

영욱은 아무리 부모자식지간이지만 새벽에 전화를 건 자신의 무례는 생각지도 않고 방방 떴다. 다행히 깨어 있었기에 망정이지 자는 사람을 깨울 뻔했다는 것도 전혀 생각지 않았다. 

물론 영욱은 아침잠이 거의 없는 득환이 벌써 일어났을 시각임을 알고 있었다.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서 강원도에 대해서라면 빠삭하게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득환에게 구입할 수 있는 산이나 임야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려고 전화했다가 말도 붙여보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진중권과 박득환의 사이는 의외로 돈독해서 영욱이 파문당한 후에도 변함없이 교류가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영욱에 대한 미련도 있겠지만 동생 영길이라면 영욱보다 훨씬 더 빠른 성취를 보일 거라는 판단 때문일 가능성도 컸다. 

동생 영길이 아버지 득환의 뜻에 따라 현재 사귀고 있는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진소희를 약혼자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사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영길과 득환은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강원도에 있는 산이나 임야를 좀 알아봐주세요. 이왕이면 넓고 싼 곳으로요. 돈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물량은 걱정하지 말고 빨리 알아봐주세요.

결국 영욱은 득환에게 문자를 보냈다. 전국 일주를 하겠다는 꿈은 잠시 접고 일단 강원도라도 접수해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거점據點이나 교두보橋頭堡 마련은 필수였다.

-로또 맞았냐?

박득환이 득달같이 문자로 답장을 보냈다. 

-예.

-최근 당첨자 명단에는 네 이름이 없던데, 대체 몇 회에 당첨된 거냐?

-2QB 세상에서요.

-한 10억쯤 되냐?

-그건 주택복권 당첨금이죠. 제가 당첨된 건 로ㅤㄸㅗㅂ니다.

-아! 그게 얼마냐고?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금액은 320억쯤 돼요.

-지금 꿈을 꾸는 중이냐? 잠꼬대하는 거 맞지?

-아뇨. 얼른 알아보세요. 급하니까.

-돈만 있으면 오늘 중에라도 다 살 수 있어.

강원도라면 꽉 잡고 있다는 박득환다운 자신감이었다. 친구 중에 잘나가는 부동산 중계업자나 실제로 산을 소유한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 그저 허풍을 떠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이왕이면 강원도 전역에 걸쳐서 골고루 사세요.

-사람 또 실없는 놈으로 만들지는 않을 거지?

-소희 일은 아빠 혼자서 헛물 켠 거였고, 돈은 정말 있어요. 현실 세계의 돈으로 바꿔야 하는 절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20%나 떼어 주기로 했으니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골드라는 걸 가지고 있는 거냐?

득환도 이제는 모르는 게 없었다. 아마도 진중권으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예. 400골드가 조금 못돼요.

-1골드가 1억 이상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사실이야?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 짧은 시간에 큰 부자가 됐네. 드림헌터가 좋기는 좋구나.

-위험한 만큼 수입도 짭짤하더군요.

-돈도 좋지만 몸조심해. 그리고 어디에 쓸지는 모르겠지만 땅을 알아보는 건 내게 맡겨둬. 그리고 돈을 부쳐주면 내가 구입까지 대행해주지.

-그러시죠. 통장번호나 찍어주세요.

-알았다. 나도 내 통장번호를 모르니까 네 엄마 이 여사에게 물어보고 보내줄게.

-예.

문자 수십 통이 오가고서야 한 통화만 하면 될 이야기들이 모두 끝났다. 

이야기만 끝난 게 아니라 땅의 구입도 거의 완료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들의 돈을 들고 튈 위인은 절대로 아니니까 돈만 보내주면 적당한 땅들을 구입해서 영욱 앞으로 등기까지 해주고도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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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술을 마시고 있던 진중권이 득환의 잦은 문자질에 관심을 보였다. 영욱은 이쯤이면 술자리가 파했을 거라고 생각하고서 문자를 보냈는데 두 사람은 2박3일 동안 술을 마실 계획임을 몰랐던 것이다.

"뭐랩니까?"

"한 400억 벌었다고 산이나 임야를 사달라네요. 이왕이면 싼 땅을 사랍니다."

"벌써 그렇게 큰돈을 벌었다니 정말 놀랍군요. 쩝! 그 정도일 줄 알았다면 파문시키지 말 걸 그랬습니다."

"그거야 소희와 결혼시키기 위해서 동원한 카드였잖습니까? 그 자식이 그렇게 뻗댈 줄은 몰랐지만."

"보기보다는 고집이 센 걸 간과했어요."

진중권은 그냥 안주거리삼아 해보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영욱이 착한 편이긴 하지만 똥고집이 있고, 한 번 틀어지면 죽어도 다시 돌아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득환에게 들어서야 겨우 알게 되었던 것이다. 

곁에 데리고 있으면서 천천히 회유했어야 하는데 하는 후회가 진중권을 10년 이상 늙게 만들어 버렸다. 싫다는 소희를 억지로 보내긴 했지만 영욱의 성질을 아니 쉽지는 않을 거라고 자포자기하고 있던 차였다.

물론 큰돈을 벌었다는 소리도 귀에 들어왔지만 그보다는 능력을 아주 잘 발휘한다는 의미로 해석했기에 더욱더 씁쓸한 것이다. 

"성질머리가 더럽긴 하죠. 그런데 왜 빌딩을 사지 않고 쓸모없는 땅을 사라는 거지요?"

"그것은 사냥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걸 겁니다. 제 땅에서 싸우는 게 훨씬 유리할 테니까요. 아주 영리한 놈입니다."

"그렇다면 재투자를 하는 거군요. 그래도 400억쯤 벌었으면 아버지의 낡은 차라도 좀 바꿔줄 일이지. 그리고 이렇게 서두를 이유도 없잖아요."

"아마도 그 돈을 노리는 파리 떼를 쫓기 위함일 겁니다."

"누가 감히 그 돈을 노려요?"

"은영이나 내 딸 소희가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냥에 따라나선 이유가 뭐겠어요?"

진중권은 자신의 딸 이름까지도 언급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제 어미를 쏙 빼닮은 소희의 속물근성은 진중권으로서도 도무지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다들 내 아들 영욱이 큰돈을 벌 줄 알고 있는데 나만 몰랐군요."

"기계체조의 성취가 남다르고 실전에서 발휘하는 순발력과 잔머리가 워낙 좋아서 사냥을 잘할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라면 기대의 수십 배도 훨씬 넘는 성과인 것 같습니다."

"일행들이 다 같이 힘을 모아서 협력한 덕분이겠지요. 그것마저도 녀석의 복이겠지만……. 아무튼 우리는 마시던 술이나 마십시다. 건배!"

"건배!"

진중권과 박득환은 다시 술잔을 부딪치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미 두 사람의 손을 떠난 일이니 굿이나 보고 술이나 마실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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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딱후딱 정리하고 얼른 출발하자."

문자질을 끝낸 영욱은 자신의 아침인 애견 사료를 뚝딱 먹어치우고 나서 일행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오늘 현실 세계에서 넘어야 할 산은 백우산이다.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과 내촌면의 경계에 솟구친 산으로, 겨울에 눈이 내린 모습이 마치 산이 날개를 펼친 새와 같다고 하여 백우산白羽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백우산은 홍천 7경으로 꼽히는 용소계곡龍沼溪谷을 품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뭣들 해? 오늘 가야할 길이 얼마나 먼 줄 알기나 해?"

"죄송합니다. 선배님."

여자들은 영욱의 히스테릭한 반응에 대꾸조차도 하지 않았다. 잘못 대꾸하면 날벼락이 자신들에게 떨어질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예인 박상태가 전전긍긍하면서 영욱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썼다.

일행들이 출발하자마자 영욱은 소희에게 다가가서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누구는 좋겠어."

"뭐가 좋아요?"

"연하의 남자랑 결혼하게 생겼으니까 말이야."

"갑자기 왜 저를 보고 그런 말을 하시죠?"

소희는 영욱이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을 비꼬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항의했다.

"너희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끝끝내 사돈 관계를 맺고 싶은 모양이니까 하는 소리지."

"그렇다면 동생 분과 저를 결혼시킬 계획이라는 말인가요?"

"그런가 봐."

"두 분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는 연하의 남자는 취급하지 않아요."

영욱이 흥분하는 이유를 알게 된 소희는 발그레 웃으며 자신의 취향을 들먹였다.

"그래도 생긴 것은 나보다도 훨씬 더 어른처럼 생겼어. 게다가 서울대생이고."

"하지만 꼬마신랑이 제대로 신랑 구실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은 꿈에도 없어요. 제가 뭐 조선시대를 살아가는 여인이라도 되는 줄 아세요?"

"네 아빠의 뜻이라잖아. 그리고 이번에도 거역할 자신은 없잖아. 안 그래?"

"아빠야 동생 분이 아니더라도 그 집 남자와 결혼만 시키면 싫어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우리 집에 남자라면 나와 영길이 뿐인데?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하고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했잖아."

영욱은 소희의 말뜻을 뒤늦게 알아듣고는 펄쩍 뛰었다.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지만 그런 말이 나올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해 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운 것이다.

"그래도 얼굴도 모르는 연하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해 보는 소리였어요. 어쩌다가 제 신세가 이렇게 되었는지 정말 기가 막히는 군요."

"너야 예쁜 공주로 태어났으니까 정략결혼은 당연하다고 봐야겠지. 하지만 우리 같은 머슴이 왜 공주와의 결혼 상댄지 정말 기막혀 죽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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