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1/71)

-원망 같은 건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거야. 그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거든. 화구! 화구! 화구! 잔상권! 잔상각! 잔상무!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계속해서 이어지는 영욱의 공격에 결국 대룡이 화를 내면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대룡은 그제야 자신이 영욱의 능력을 폄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화구! 화구! 화구! 잔상권! 잔상각! 잔상무!

-주, 주인님! 잘못했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영욱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패기만 했다. 늘어난 화정 덕분에 화구의 위력도 매우 강해졌고, 기계체조 심화 동작 역시 부드러워진 만큼 더욱더 강력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을 대룡이 움쩍달싹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영욱은 대룡을 소환할 때 ULM올가미 속에다 소환했던 것이다. 머리가 올가미에 낀 대룡은 그저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영욱은 여차하면 대룡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리 쉽게 죽어주지는 않겠지만 한 달이 걸리더라도 때려죽일 생각이었다. 이제는 올가미의 크기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으니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이 지나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주인님, 잘못했어요. 제발 때리지 마세요.

영욱은 아무런 대꾸 없이 때린 곳만 골라가면서 때렸다. 화구로 지지고 때리고 뜯고 꼬집고 비틀었다. 위력 또한 장난이 아니어서 포크의 기계 삽이 닿는 곳마다 살이 푹푹 패였다. 곧 재생되기는 했지만 예전의 공격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욱은 지금 대룡의 피와 체액을 흡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울러 백족의 기운도……. 좋은 말로 해서 내놓지 않으니 강제로 자신의 몫을 챙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때릴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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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기계체조 수련을 하고 있던 진소희와 은영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벌써 일주일짼데 정말 징그럽지 않아?

-그러게. 오빠의 뒤끝이 장난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집요할 줄은 나도 몰랐어.

-대룡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강한 환수들은 노예가 되더라도 그런 식으로 뺀질거리는 게 보통인데 영욱 씨는 그런 사실이 용납되지 않나봐.

-확실히 오빠는 배신에 대한 노이로제가 있는 것 같아. 나 때문인가?

은영은 자발적으로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했다. 진소희가 사제司祭는 아니지만 집요하기 이를 데 없는 영욱의 행동으로 인해서 민망하고 무안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도 없지는 않겠지만 오히려 수련 중인 것 같아. 처음에는 어설펐던 잔상무 초식도 이제는 상당히 유연해졌잖아. 

-그건 나도 알아. 포클레인을 타고서 저런 동작을 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야. 요즘은 나도 포클레인이나 몰아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중이야.

-사실은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언니도?

-그러지 않고서는 더 이상 기계체조를 숙달시키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영욱 씨를 보고서야 들었어. 아빠가 귀에 못이 앉도록 말할 때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던 게 후회스러워.

진소희 역시 자진해서 고해성사를 늘어놓았다. 기사가 모는 차가 아니라면 외제차도 타지 않겠다는 그녀로서는 있을 수 없는 변화인 셈이다. 그만큼 일주일 동안 영욱이 보여주고 있는 행동이 인상적이라는 소리였다.

-오빠가 지금 전력을 다하는 중일까?

-아냐. 기계체조는 전력을 다하는 중이지만 힘은 절반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아.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일주일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심지어 잠시도 쉬지 않은 채 공격을 이어갈 수 있겠어?

-그렇다면 대룡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지?

-아냐. 확실하게 죽이려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힘을 어느 정도 빼고 공격한다면서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와?

-힘을 빼고 하는 공격이지만 힘을 최대한으로 주고 하는 공격의 80%에 달하는 위력을 보이니까 하는 말이지.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공격하는 걸 보면 모르겠어?

-단거리 질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라는 말인가?

지루할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구타에 대한 둘의 견해가 약간은 달랐지만 은영은 진소희의 주장을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냥 마라톤이 아니라 쉬지도 않고 자지도 않은 채로 300km 이상 달린다는 울트라마라톤이겠지. 저대로 계속 된다면 결국 대룡도 죽게 될 거야. 다만 언제 죽느냐가 문제지. 

-아무튼 싸움 구경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해. 하지만 저렇게 지독하게 연습을 하니 기량이 빨리 느는 거겠지?

-맞아. 열심히 하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어. 

-나도 기계체조 연습이나 좀 더 해야겠어.

-그래. 나도.

자칭 진짜 구결을 가지고 있는 자신들보다 영욱의 기계체조 성취가 더 높아질 것 같은 불안감이 두 사람을 다시 훈련으로 몰아넣었다.

훈련을 하고 있는 사람은 비단 두 여자뿐만이 아니었다. 박상태와 두 노예들은 물론이고 유화리와 한극상 등도 자신이 가진 무술들을 갈고 닦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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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제발 살려주세요. 다시는 개기지 않겠어요.

벌써 수천 번도 더 되풀이되는 대룡의 통사정이었다. 그래봐야 영욱은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대룡으로서는 끈질기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런데 모처럼 영욱도 입을 열어서 대꾸했다.

-아직도 멀었어. 겨우 이 정도 위력의 공격이라면 앞으로 한 달 이상 더 버틸 수 있잖아. 그때까지 버텨내면 살려주기로 하지. 화구! 화구! 화구! 잔상권! 잔상각! 잔상무!

-악! 너무 아파요. 제발 살려주세요. 이런 고통을 한 달이나 더 견딜 수는 없어요.

-한 달 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견디게 될 거야. 화구! 화구! 화구! 잔상권! 잔상각! 잔상무!

-아파요. 저 죽어요. 제발!

-마음대로 죽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야. 딱 죽지 않을 만큼은 치유해줄 테니까. 

영욱은 병 주고 약도 줄 생각이었다. 노예를 만들 때 가장 효과적일 수 있는 치유 초능력을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물론 당장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대룡은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 말의 의미를 대번에 알아들은 것이다.

-맙소사! 치유 초능력까지 가지고 있어요?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내가 가진 다른 초능력들처럼 별로 대단한 위력은 아냐. 그저 잡다한 능력일 뿐이지. 하지만 너를 죽지 못하게 할 정도는 되지. 화구! 화구! 화구! 잔상권! 잔상각! 잔상무!

-끄어어. 제발 살려주세요. 살려주신다면 제가 마법서를 구해드리겠어요. 정말이에요.

-네 뱃속에 있는 거라면 내가 알아서 챙길 테니까 염려 마. 아직도 잔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군.

영욱은 대룡이 마법서를 제공하겠다는 뜻밖의 제의에 깜짝 놀라서 잠시 공격을 멈추었다.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고 한 템포 느리게 공격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솔깃한 제안이었기 때문이다.

-잘못했어요. 주인님. 제발 용서해주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네가 뭘 잘못했는데?

-주인님의 명령을 거역한 죄가 커요.

-그게 다야?

-주인님의 힘을 과소평가하고 무시했어요.

-맞아보니 어때?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제발 때리지 마세요. 흑!

이번에는 대룡이 고해성사를 했다. 뿐만 아니라 엉엉 울면서 영욱의 용서를 구했다.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잖아. 지금도 올가미만 벗어날 수 있다면 나 같이 허접한 인간은 한 입에 꿀꺽 삼킬 수 있을 것 같지? 그렇지?

-아뇨. 그랬다간 장에 구멍이 나고, 소화불량에 걸려서 죽을 것 같아요. 

-지금 나를 불량식품 취급하는 거야?

-아니에요. 정말 죄송해요. 살려만 주신다면 충성을 다하겠어요.

-겨우 이 정도로 알아들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맛보기는 보여주었으니까 앞으로는 까불지 마.

대룡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충성 맹세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일주일 동안 두들겨 팬 효과가 전혀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영욱도 대충 이쯤에서 일단락하기로 했다.

-고마워요. 주인님.

-그리고 네 뱃속에 있는 게 모두 네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 소화시키지도 못하는 것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고 해서 힘이 생겨?

그것은 각종 정수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걸 끄집어낼 때까지 두들겨 팼으면 좋겠지만 영욱도 이제는 거의 한계 상태라서 아쉬운 마음에 하는 소리였다. 

아직은 다 내놓으라고 해도 내놓을 것 같지도 않고, 설령 다 내놓는다 해도 처치곤란이라서 그냥 다짐만 받아두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소화시킬 수 있는 때가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때? 두들겨 맞으니까 어느 정도 소화된 것 같지 않아?

식체食滯에 걸린 사람의 등을 두들겨 주는 것에 빗대서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아주 조금이지만 달라진 것 같군요. 

-그러니까 좀 더 맞아야겠지?

-아, 아니에요. 제발 살려주세요.

-화구! 화구! 화구! 잔상권! 잔상각! 잔상무!

대룡의 빈정거리는 듯한 어투에 감정이 상한 영욱은 다시 공격을 재개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영욱의 구타가 대룡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는데 고맙다고 인사는 못할망정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으니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영욱은 공격 강도를 최대한으로 높여서 구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더 힘을 뺀 것처럼 보였다. 마치 장난치는 것처럼 그저 툭툭 건드리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대룡은 비명조차도 지르지 못하고 자지러졌다. 두들겨 맞는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도 했지만 몸속에 매달아두었던 각종 정수들로부터 새어나오는 기운들을 추스르기 바빴기 때문이다. 

자지러진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묘한 쾌감이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두들겨 맞다보니 은근히 매 맞는 고통에서 묘한 쾌락이 느껴지기도 했던 것이다. 

영욱의 무시무시한 매 타작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발끈하기도 했지만 일종의 마지막 스퍼트라고 생각하고서 패기 시작했는데, 대룡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체액과 피의 품질이 갑자기 좋아진 것이 혹독한 매타작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몸에 좋은 기운을 조금이라도 더 탐하려다 보니 도리깨 대신 매로 타작하는 시간이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었다. 공격의 강도 또한 비교할 수도 없이 강해졌다. 그러다보니 그 튼튼하던 대룡의 몸도 만신창이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것은 영욱의 공격력이 재생 능력과 재생 속도를 훨씬 더 넘어섰다는 걸 의미했다. 한 달 이상을 더 패도 멀쩡할 것 같던 대룡은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거의 빈사상태에 빠졌다. 

-치유! 치유! 치유!

-제, 제발 살려주세요. 너무 아파요. 주인님.

-부실한 녀석 같으니, 가벼운 공격 몇 번도 받아내지 못할 정도로 허약하면서 그렇게 거만하게 굴어?

영욱은 자신의 최고 공격력이 이렇게 강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신도 깜짝 놀랐다. 물론 전과는 상황이 확연하게 달라진 부분도 있지만 이제야 제대로 대룡을 응징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뻐서 방방 떴다.

-제가 하늘 높은 줄을 몰랐습니다. 제발 용서해주세요. 주인님.

-내게 두 번의 용서는 없다. 그렇지만 배신자는 영원히 보지 않는다는 철칙을 깨고 딱 이번 한 번만 살려두기로 하겠다. 그러니 앞으로는 똑바로 해. 알겠나? 화구! 화구! 화구! 

-예. 주인님.

영욱이 ULM올가미를 강력해진 화구로 녹여서 풀어주자 대룡은 지체 없이 지렁이 백 마리를 출산(?)했다. 거의 생똥을 싸는 듯한 분위기였다.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백족의 기운이에요.

-백족의 기운을 내포한 지렁이라는 말이냐?

-예. 주인님. 아까운 기운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려면 이 방법이 제일 좋아요.

-그럴 듯한 방법이군. 결빙! 결빙! 결빙!

영욱은 지렁이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마치 아이스크림처럼 얼려버렸다. 어차피 언젠가는 사람들에게 먹힐 것이니 지렁이들이 오랜 시간 동안 불안에 떨지 않도록 나름 배려한 것이기도 했다.

-제 아이들의 고통을 덜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주인님.

-뭐 잊은 거 없어?

-예? 뭘 잊어요?

-살려주면 마법서를 구해준다며? 내놔!

-그, 그건 일단 살아남기 위해서 거짓말을 한 거였어요. 하지만 제가 맹세코 구해드리겠어요. 정말이에요.

대룡은 영욱이 다시 매질을 시작할까봐 자지러지듯이 외쳤다. 이젠 ULM올가미가 없으니 대항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그랬다가는 정말로 죽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무슨 방법으로? 네가 가진 게 없다면 마법서를 삼켰을 것 같은 환수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거야?

-마법서를 삼킨 환수는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걔들이 삼킨 자들 중에는 마법사도 있을 거고, 당연히 마법서도 있지 않아?

-마법서는 책의 형태로 제공되지 않아요. 그런 식이라면 돌려 보거나 필사본이 퍼져나가기 때문으로 알고 있어요.

-그럼 어떤 형탠데?

-알약의 형태라고 들었어요. 삼키면 마법에 대한 내용이 머릿속으로 가서 자리를 잡는데 그걸 읽을 수는 있어도 그 내용을 누설하거나 필사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폭파된다고 하더군요.

대룡은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는 영욱을 위해서 자신이 아는 마법서에 관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그런 안전장치가 있지 않고서야 마법서의 가격이 그런 고가로 유지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럼 죽는 거야?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마법에 대한 기억만 소멸된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한 권을 사서 둘이 나눠볼 수는 없다는 말인가?

-예.

-읽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수도 없고?

-예.

-정말 치밀한 녀석들이군.

마법사들은 정말 치밀하고, 영욱은 정말 멍청한 녀석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한 권을 사서 둘이서 나눠보겠다는 어처구니없는 궁리를 하고, 그 이유로 물건 가격을 과하게 깎아주었으니 대룡이 협조했을 리 없는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히려 화를 내면서 일주일하고도 몇 시간 동안 두들겨 팼으니 영욱으로서도 민망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대룡도 자초지종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으니 영욱을 원망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또한 자신이 힘으로도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을 거고, 여차하면 땅속에 숨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벌어진 일이다.

-마법사란 존재가 원래 그렇다고 들었어요.

-화리도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

-예. 그 정도는 상식이니까요.

-그래서 나의 명령을 무시한 거였어?

-그렇게 느끼셨나요? 무시한 건 아니지만 명령을 거부한 건 제가 분수를 모르고 한 행동이었어요. 하지만 주인님께서 사기당하는 모습이 아름다울 리는 없죠.

-그럼 말을 해줄 생각은 않고 명령부터 무시해?

-그럴 틈이나 있었나요? 어쨌든 저 덕분에 아까운 백족 껍질을 헐값에 넘기지 않게 될 테니까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에요.

대룡은 자신이 전혀 생각도 없이 저질렀던 명령 불복종은 아니라고 은근히 항변했다. 대룡은 영욱이 백족 껍질을 팔지 않을 것이라 여겼지만 영욱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지금도 모르고 있다면 당하겠지만 이제는 알고 있으니 거래는 180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래는 그대로 계속될 거야. 그리고 최후에 속는 사람은 화리가 될 거고.

-그렇다면 먼저 꿀꺽 하실 생각인가요?

-나를 속이려고 했으니까 그 정도의 대가는 치러야 하지 않겠어?

-그렇군요. 속고도 그냥 넘어갈 정도로 대범한 분은 아니신데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아직도 몸이 근질근질해? 좀 더 주물러 줄까?

-아, 아뇨. 사랑합니다. 주인님.

영욱은 가볍게 손만 올렸을 뿐인데 대룡은 그 큰 덩치가 무색할 정도로 자지러졌다. 얼마나 맞기 싫은지 긴 몸을 말아서 하트 모양을 만들기까지 했다. 영욱의 혼찌검이 이미 뼈에 새겨진 것이다. 지렁이에게 뼈가 있을 리는 없지만. 

-그 덩치로 애교가 어울린다고 생각해?

-조금 더 줄일까요?

-그래. 20미터까지만 줄여 봐.

-그 정도까지는 무린데요.

-무리를 해야 발전이 있는 거야.

말은 그렇지만 두들겨 패기 좋게 덩치를 줄이라는 의미가 더 컸다. 대룡의 덩치가 너무 크면 때리는 것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알겠어요. 숨쉬기가 조금 힘들지만 참아야겠지요.

-너무 편하게 살려고 하지 마. 그런 면에서는 저 여자들에게 배워야 할 거야.

-여자들이야 몸매 유지를 위해서 애를 쓰는 게 당연하지만 저는 그렇지도 않은데요?

여자들이 날씬한 몸매 유지를 위해서 코르셋을 입고 꽉 조이면 숨을 쉬기조차도 어렵다. 대룡이 크기를 줄인 것을 바로 코르셋을 꽉 조인 것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자 대룡으로서는 자신이 자웅동체임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내 앞에서는 무조건 여자 행세만 해. 징그럽게 남자 목소리를 내는 순간 또 다시 매타작을 경험하게 될 테니까. 아니면 절반을 잘라버리든지.

-네. 주인님. 사랑해요.

영욱의 협박에 20미터 길이로 줄어든 대룡이 다시 하트 모양을 만들면서 애교를 떨어야 했다. 물론 간드러지는 여자 목소리로.

-그런데 너는 대체 무슨 수로 마법서를 구해주겠다고 한 거야?

-그, 그건 제가 가진 아이템이나 정수를 팔아서라도 마련해드리겠다는 의미였어요. 

-그래? 그렇다면 기대하겠어.

-무, 문제없어요. 꼭 구해드릴 테니까.

처음에는 아이템이나 정수를 내놓는 게 아니라 직접 마법서를 구해주겠다고 했으니 뭔가 방법이 있는 듯했다. 영욱으로서는 대룡이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숨기는 게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하지만 영욱 자신도 목숨보다 소중한 게 있을 수 있다는 생각하는 사람이고, 대룡이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마법서를 구해주기만 하면 상관없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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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을 훌쩍 넘기는 기나긴 매 타작이 끝나자 이번에는 화리가 제일 먼저 다가왔다. 소희와 은영은 순서가 바뀐 것에 대해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녀가 아직 거래를 끝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방해하지는 않았다.

-이제 끝난 거야?

-미안! 좀 오래 걸렸지? 별 것도 없지만 덩치가 워낙 크니까 제법 오래 버티네. 자, 여기.

영욱은 100개의 백족 껍질과 백족 기운을 담은 지렁이 아이스크림을 화리 앞에다 던졌다.

-꺅! 이게 뭐야? 지, 지렁이 얼린 거잖아.

-그냥 지렁이가 아니니까 잘 느껴봐.

-이게 백족의 기운이야? 하지만 징그러워서 어떻게 팔라는 거야?

-보기에는 좀 징그럽겠지만 기운을 보존하는 데는 최고급 캡슐이나 다름없지. 

-보존 효과가 얼마나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모습으로는 못 팔아. 

화리의 불평에도 일리一理는 있지만 그건 영욱의 몫이 아니라 그녀의 몫이었다. 원재료를 그럴 듯하게 가공해서 팔아야하는 것은 당연히 상인의 몫이다. 그럴 자신이 없으면 구입하지를 말든지.

-그럼 적당한 용기를 구해서 다시 포장하든지 해. 햄버거 속에 고기 대신 끼워주든지.

영욱은 화리의 불평이 가격을 깎으려는 수작인 줄 알았지만 그냥 점잖게 충고하기로 했다. 

사실 화리로서는 영욱이 대룡으로부터 마법서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게 아닐까하고 걱정하는 중이라서 일부러 영욱을 자극해서 반응을 유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건 곤란해.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춘다고 해도 이 비릿한 냄새는 어떡할 거야?

-그걸 처리하는 게 바로 네 몫이야.

-그건 그렇지만 이 정도의 악취는 무리야.

-그럼 거래하기 싫다는 말이야? 싫으면 사지 마.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관두자고. 나도 싫다는 사람에게 강매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우리 사이의 계약을 파기하자는 말이야?

-모양과 냄새를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고 해도 한 푼도 깎아줄 수가 없으니 거래하든지 말든지 네가 택해.

기회를 주었는데도 자꾸만 가격을 깎으려들자 영욱은 어쩔 수없이 극약처방을 내리고 말았다. 좋게 말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게 인간이라는 걸 요즘 와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환수도 마찬가지지만.

-무슨 사람이 매번 그렇게 극단적으로 행동해?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말은 가격 절충이 필요하다는 소린데 그걸 꼭 내 입으로 설명해야겠어?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나로서는 백족 기운을 완벽하게 보관할 수 있는 제품을 제공한 것이니까 나머지는 네 몫이야. 게다가 잘 가공해서 판매할 자신이 없다면 사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다만 가격은 한 푼도 깎아줄 수가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내가 원한 건 바로 내다팔 수 있는 상품이었어.

-내가 네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백족 기운을 나눠주라는 말은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이것도 아냐. 

-그러니까 상인인 네가 결정하라는 거야. 그리고 나는 원래부터 이 거래를 원치 않았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영욱도 마지막 순간에 마법서를 꿀꺽 삼킬 계획이긴 하지만 너무 많은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거래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 굳이 이 거래를 성사시켜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대룡이 마법서를 구해줄 수도 있으니 이제는 서둘러서 골드를 모아야할 필요도 없고. 

-알았어. 80골드야. 받아. 

-맞네.

-50개만 더 팔아. 아직도 충분한 재고가 있잖아.

-나 혼자 쓰기에도 모자란다고 했잖아. 생각 같아서는 그 100장도 팔고 싶지 않지만 이미 말이 나온 거라서 겨우 약속을 지킨 것이야.

영욱이 한 푼도 깎아주지 않을 것임을 깨달은 화리는 영욱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빛과 같은 속도로 후다닥 거래를 마쳤다.

거래가 무사히 끝나자 영욱은 무려 397골드나 가진 재벌이 되었다. 하지만 영욱은 길고 길었던 이 거래 과정에서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한 것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걸치고 있는 토룡피 두 장과 백족 껍질 열 장 그리고 호그질라의 가죽이 단순히 아머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련의 성과로 이제 백족 껍질을 열 장 정도는 더 걸칠 수 있을 것 같지만 지켜보는 눈이 있으니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겨우 대여섯 장 걸치고 있는 화리와 진소희 등을 자극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영욱은 자신에게 기대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비단 정수들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았다. 구타가 이어지는 일주일 동안 대룡의 피와 진액을 갈취해서 흡수한 기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그것은 제아무리 기계체조와 활인심방의 효용이 뛰어나다고 해도 이미 소화 흡수의 한계를 넘어선 양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러 아머들의 존재가 그런 불가능을 극복하고 소화 흡수를 가능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영욱의 넘쳐나는 기운들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물론 그들로서는 그것이 바로 그들의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영욱으로서도 언제든지 다시 가져다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것은 가죽이 호랑이의 몸에서 가장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처럼 환수들의 몸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부분은 껍질이었다. 질기고 단단한 껍질이 있어야 비로소 험한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갈 수가 있고, 적의 공격으로부터도 버텨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니 환수에게 가장 중요한 부위는 정말로 껍질이 되어버렸다. 껍질이 바로 가장 중요한 정수인 셈이다. 그게 영욱이 새롭게 알아낸 환수에 관한 비밀이었다. 

심장이나 간보다 껍질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게 얼핏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사람들도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인데 다들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여자들의 몸매나 외모가 바로 그 껍질의 일종인데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은 다들 인정하고, 칭송하기도 하면서 심장보다 껍질이 더 중요하다는 진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약한 심장과 예쁜 얼굴을 택할 것인가, 강한 심장과 추악한 외모를 택할 것인가를 여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다면 대부분 전자를 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게 바로 심장보다 껍질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증거다.

특히 진소희나 은영이 걸친 껍질은 거의 치명적인 수준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니 그게 그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인 셈이다.

아무튼 기나긴 구타 과정을 통해서 영욱이 걸치고 있는 세 종류의 껍질들 모두가 영욱을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게 되는 부수입을 얻게 되었다. 

세 껍질 모두가 영욱에게 사냥당한 존재들인데다가 대룡의 기운을 마구 퍼다 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아직 껍질이 벗겨지지 않아서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대룡을 응징하는데 자발적으로 나서서 힘을 보탰던 것이다. 

평소의 영욱이라면 그렇게 많은 정신력과 기운을 소모하는 상황에서 일주일 이상 버텼을 리가 없다. 도중에 깨달음을 얻어서 경지가 오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진 힘 자체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거나 기계체조의 경지가 무려 서너 단계 이상 올랐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껍질들이 도와줄 수 있는 기능이 바로 질긴 보호막으로서의 역할과 기운의 원활한 저장과 수급 기능이기 때문이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정도만 도와주어도 영욱으로서는 날개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100미터 달리기를 하던 속도 그대로 300킬로미터 울트라마라톤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니까 실제 공격 속도의 차이는 무려 서너 배에 이른다. 

그게 바로 영욱의 달라진 점이었고, 골드를 벌어서 큰 부자가 된 것보다 더 즐거운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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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의 거래를 이끌어내지 못한 유화리가 어두운 표정으로 자신의 부하들에게로 이동하자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은영이 쪼르르 달려왔다.

-오빠! 정말 오빠 맞아?

-왜? 네 언니처럼 내 몸에 신이라도 내린 줄 알아?

-그 이상이었어. 그러고도 오히려 더 펄펄 하잖아. 정말 멋져.

영욱은 몸을 비비꼬면서 얼굴이 빨갛게 변해버리는 은영을 보면서 기함을 했다. 몽롱한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너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내가 무슨 상상을 했다고 그래? 그리고 이왕이면 힘 좋은 남편이 좋은 거 아냐?

-누가 네 남편이라는 거야? 꿈도 꾸지 마.

-오빠는 내 운명이야. 그것은 칠박팔일의 지구력으로도 벗어날 수 없어.

은영은 영욱이 떼어내도 진드기처럼 들러붙으며 어쭙잖은 운명론을 또 들먹였다. 운명은 바뀔 수도 있고, 자신의 운명 또한 이미 바뀐 지 오래라는 사실은 모르는 채로.

-웃기지 마. 너는 네 운명일 뿐 내 운명은 아니니까 그쯤 해둬.

-좋아. 그 얘긴 다음에 하기로 해. 그런데 우리 여기에서 계속 머무를 거야?

-응.

-왜?

-이곳 등골산을 지배하는 환수를 아직 만나지 못했으니까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이미 등골산 아래까지 내려왔으니 이미 끝난 상황일수도 있다. 하지만 영욱의 육감이 강력한 존재의 접근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러니 길을 가다가 기습당하는 것보다는 일주일이나 머무른 익숙한 이곳에서 싸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오빠가 일주일 동안 대룡을 두들겨 패느라고 그 난리를 쳤는데 도망가지 않고 아직도 남아있을까?

-영악한 놈이라면 우리들의 힘이 빠지기를 노리고 있었을 거야. 그러니까 곧 나타나겠지.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노린다는 말이야? 그런데 오빠도 펄펄하지만 대룡도 힘이 더 넘치는 것 같던데? 마치 추궁과혈推宮過穴이라도 받은 것처럼 말이야.

-헐! 너도 그런 말을 할 줄 알아?

-집안의 내력이 있는데 아는 게 당연하지. 그리고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도 모를 리가 없잖아.

현실 세계에서는 무협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는 말이지만 2QB 세상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듯했다. 은영의 반응을 보아하니 무협 소설에서 얻은 지식은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네 눈에는 아직도 대룡의 힘이 넘쳐 보여?

-당연하지. 어? 아니잖아. 그런데 언제 크기가 저렇게 줄어든 거야?

-몸의 크기만 줄일 수 있다면 굳이 줄어들 이유가 없지.

-그럼 내뿜는 기운도 함께 조절할 수 있다는 말이야?

-당연하지. 축소 변신의 목적 중에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기세를 줄이거나 감추어서 적의 방심을 유도하는 것이니까. 좁은 곳에서 이동의 자유로움을 얻고, 평소의 에너지 소모를 줄이는 용도로도 사용되지만. 

고수가 평소에는 자신의 힘 일부를 감추는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생사를 건 싸움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일부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부분을 감출수록 더 유리하다. 문제는 기세를 증폭시키는 것보다 감추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이지만.

-오빠도 대단하지만 대룡도 정말 대단하다. 원래부터 변신할 줄 알았던 거야?

-아니. 지금이 제대로 된 첫 변신이야. 

-그렇다면 오빠의 추궁과혈 덕분이구나. 그렇지?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변신조차 하지 못하면 더 두들겨 맞아야할 테니까. 하하하!

-오빠! 나도 좀 때려줘. 제발 부탁이야.

영욱이 잘난 체를 했더니 은영으로부터 전혀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매 맞는 것도 불사할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원래부터 학대를 즐기는 성향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농담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었다. 물론 영욱이 예쁜 여자를 두들겨 팰 수는 없다.

-너는 일단 훈련부터 해야 해. 두들겨 맞는다고 해서 무조건 강해지는 건 줄 알아? 

-그 이유가 뭔데?

-몸속에 쌓인 게 있어야 격발되는 것도 있는 거야. 내가 없는 기운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야?

-그런 거였어? 그렇다면 오빠 혼자만 몸에 좋은 거 먹지 말고 나도 좀 나눠줘.

이제는 공짜로 나눠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으니 나눠주는 대신에 대가를 받아낼 생각이었다. 돈으로 달라고 하면 또 외상을 달려고 할 테니 뒤로 미룰 수 없는 것으로 대가를 요구해야만 했다. 하지만 영욱이 노리는 것은 은영이 알고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나눠줄 수는 있지만 공짜로는 안 돼.

-그럼 내 마음을 받아줘.

-웃기지 마.

-내가 가진 게 어디 있다고 그래?

-그럼 너도 소희처럼 기계체조 경시 동작을 내게 가르쳐줘.

-오빤 그걸 말이라고 해? 여자인 내가 경시 동작을 어떻게 배워? 우리 아빠는 제자들에게만 몰래 가르쳐준다고 했잖아.

영욱은 아니라고 펄쩍 뛰는 은영의 모습에서 오히려 그녀가 경시 동작을 알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리 되면 거래가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더라도 너의 그 뛰어난 눈썰미와 운동 신경이면 배우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솔직히 넌 욕심이 많아서 네 아빠가 가르쳐주지 않는다면 훔쳐서라도 배웠을 게 분명해.

-하, 하지만 구결도 없는 동작을 배워서 뭐하게?

실제로도 은영은 자신의 아빠가 수련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고 배웠다. 이제는 그녀도 영욱의 집요함을 잘 알고 있으니 아니라고 잡아뗄 수는 없었다.

-어차피 구결 없는 동작만으로 여기까지 왔어.

-그래도 경시 동작은 안 돼. 심화 동작과는 차원이 틀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그저 보여주기만 해.

-잔상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난해한 동작이니까 오빤 절대로 배울 수 없어.

-배우고 못 배우고는 내 소관이니까 너는 그저 시범이나 보이라니까.

-자, 잠시만 생각해 볼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결정을 뒤로 미루는 것은 경시 동작을 가르쳐줄 수는 없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은영에게 경시 동작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영욱은 좀 더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기로 했다.

-내 생각에는 네가 직접 네 아빠의 뒤를 잇는 게 나을 것 같아. 적어도 데릴사위들에게 목을 매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을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오빠.

-너에게는 아주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말이야. 물론 내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그럼 도와줄 거야? 

-당연하지. 네가 경시 동작만 가르쳐준다면.

도와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아이템도 좀 더 성능이 좋은 것으로 바꿔줄 수 있고, 아머도 충분히 제공할 수 있으니 사냥 과정을 통해서 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실력의 수직 상승까지도 가능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건 좀 곤란해. 오빠도 잘 알잖아.

-날로 먹을 생각이라면 너도 꺼져!

-그, 그러니까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 시간을 좀 줘.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진소희에게 모든 기회를 다 빼앗기게 될 거야.

은영이 망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자신이 훔쳐 배운 것이야 그냥 넘어가더라도 가문의 비기를 남에게 함부로 유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을 잘 알기에 영욱은 당근 정책 대신에 채찍과 협박을 동원했다. 게다가 강력한 경쟁자인 진소희까지 언급해서 은영의 판단을 흐려놓았다.

-알았어. 가르쳐줄게. 하지만 나중에 적당한 장소가 나타나면.

-우리 둘만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거야?

-당연하잖아.

-좋아. 그런 공간은 아주 많으니까 기대하겠어.

대룡에게 명령해서 땅속에 적당한 공동空洞을 만들라고 명령하면 되니까 남들의 눈을 의식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등골산 환수를 기다리는 중이니까 잠시 뒤로 미루어야만 했다.

-오빠가 기대할 정도의 수준은 아냐.

-대충 할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꺼져!

-아냐! 최선을 다할게.

영욱도 이제는 은영의 꼼수가 훤하게 보였다. 영욱의 호통 소리에 살짝 흉내만 내려던 은영의 혼이 반쯤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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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이 쫓겨나듯이 물러나자 마지막 순서인 진소희가 만면에 미소를 가득 지으면서 다가왔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강해질 수가 있는 거죠?

-궁금하면 너도 대가를 내놔.

-좋아요. 저는 기계체조의 응용 동작을 가르쳐 드리겠어요.

-응용 동작이라니? 그런 것도 있었나?

-당연하죠. 기본 동작 다음에 응용 동작이 있고, 그 다음이 심화 동작인데 아빠가 마음이 급해서인지 그냥 넘어간 듯해요.

진소희는 은영과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는 듯이 화끈하게 반응했다. 게다가 영욱에게는 응용 동작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했다.

-그게 이제 와서 왜 나한테 필요하다는 거지? 심화 동작보다 하위의 동작인데도?

-은영에게서 제대로 배우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해요. 

-뭘 배워? 

-그야 경시 동작이지요.

-우리들의 이야기를 엿들은 거야?

-텔레파시를 엿들을 정도의 수준은 아직 아니에요.

-그런데도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은영의 표정 변화를 보면 듣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어요. 

세상의 모든 괴로움을 다 짊어진 듯한 표정을 지었으니 짐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런 식으로 협상하기로 미리 생각해두었을 지도 모르고.

-그런데도 너는 겨우 응용 동작으로 때우려는 거야?

-경시 동작의 기초가 되는 동작이 바로 응용 동작이에요. 그러니 꼭 필요할 거예요.

-확실한 거야?

-예. 저도 강해지고 싶어요. 적어도 은영에게 처치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어요. 그러니 금방 드러날 거짓말을 할 리가 없잖아요.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굳이 따라나선다고 했을 때에는 그녀로서도 뭔가 히든카드가 있었을 것이다. 심화 동작까지 거의 공짜로 보여주었으니 경시 동작 역시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은영도 알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니 차라리 응용 동작을 가르치는 것이 나을 거라고 판단한 듯했다. 

아무튼 진소희도 많이 달라졌다. 아직도 남에게 의존하려는 된장녀 버릇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무조건 내놓으라고 응석부리는 것은 아니니 이제 겨우 동반자의 관계에 들어섰다고도 볼 수 있다.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것 같군.

-정신을 차리게 해줘서 고마워요.

-나도 진 씨 아저씨로부터 받은 것이 많으니 그 정도는 해야지. 하지만 돈 떼먹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마.

백족 껍질 가격 6골드를 말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더 착용하게 될 테니까 거래는 계속된다는 사실을 미리 짚어두려는 것이다.

-갚을 테니까 걱정 마세요.

-너도 누구처럼 몸으로 갚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게 가장 빨리 갚는 방법인 줄은 알지만 영욱 씨가 원치 않는 방법인 줄도 잘 알고 있어요.

-은영보다는 네가 더 똑똑해. 아주 조금이지만.

-대신 애교가 많이 부족하죠. 저도 잘 알아요.

-결혼할 사이도 아닌데 애교를 왜 부려? 쟤는 원래부터 천성이 저래.

젊은 남녀가 나누기에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이야기들이 오갔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게 만든 원인은 진소희와 은영에게 있었다. 꽃뱀은 아니지만 거의 비슷한 행동을 한 것이 사실이니까.

-언제부터 배우실 건가요?

-당장이라도 배우고 싶지만 일단 우리를 노리는 환수부터 처리하고 나서…….

-또 환수가 우리를 노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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