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71)

영욱은 자신의 피를 뽑아서 걸치고 있는 호그질라 가죽에 발랐다. 이제 피를 뽑는 것은 소변을 보는 것만큼 쉬워서 상인의 말을 확인해보는 것이 아주 간단했다. 

-응. 그렇게.

-반응이 좀 더 확실하게 오긴 하네. 음! 나쁘진 않네. 또 내 피를 노리는 놈이 하나 더 늘어났으니 그저 좋아할 일만은 아니겠지만…….  

영욱이 피를 묻혀버리자 상인의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괜한 이야기를 했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다음이었다.

-젠장. 이미 너에게 귀속된 가죽이니까 거래는 물 건너갔군. 혹시 다른 것은 팔 게 없나? 가격은 잘 쳐줄 테니까 내놓아 봐.

-없어. 하지만 곧 생길 것 같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봐.

-뭐야? 이 기운은?

-나도 모르지. 대룡을 닮은 거대한 환수인데 발이 수백 개나 달려있으니 지네 환수인가?

대룡의 기운 때문인지 드림헌터와 상인들이 무더기로 몰려 있으니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청하지 않은 손님이 또 찾아들었다.

-그렇다면 백족百足인가 보군. 이 가리산의 터줏대감은 백족이지.

볏짚을 높이 쌓아놓은 노적가리에는 추위를 피해서 겨울을 나는 곤충들이 많이 모여들고, 당연히 이들을 노리는 지네 역시 많다. 가리칡도 많은 곳이지만 지네 또한 많은 곳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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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백족의 기운을 느끼지 못한 드림헌터들과 미세하게 느끼기 시작한 상인들이 신경을 집중하는 동안 영욱은 대룡과 텔레파시를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봐. 대룡. 백족 맞아?

-백족 맞습니다. 하지만 저 녀석의 다리는 삼백 개도 넘을 것 같군요.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까 백족 중에서도 제법 강한 녀석인 모양이군. 그렇다면 또 너보다 강한 녀석이겠군.

-제 기척을 느끼고서 사냥하러 오는 녀석이니까 당연하죠.

-시간이 없으니 짧게 브리핑 해 봐.

-강력한 독을 쓰는 녀석인데 물리면 저도 죽고 주인님도 죽어요. 

아주 짧은 설명에 의하며 현실 세계의 지네와 특성은 비슷한데 그보다는 아주 많이 크고, 매우 강한 듯했다.

-그게 다야? 약점은?

-키틴질이 워낙 두꺼워서 상처를 낼 수도 없고, 숨관이 수백 개나 되어서 질식시키는 것도 불가능해요. 제가 알고 있는 약점은 없어요. 

-불에 타지도 않을까?

-예.

-그럼 도망칠까?

-그러는 편이 나을 듯해요.

-그럼 도망쳐.

영욱은 또다시 싸움 대신에 도주를 택했다. 뚜렷한 대책도 없이 부딪쳐보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했다. 그렇다고 마냥 달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영욱이 포크를 타고서 갑자기 달아나기 시작하자 다들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후 영욱의 뒤를 따르는 백족의 기운이 느껴지자 겨우 상황을 짐작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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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 역시 자신의 뒤를 쫓는 백족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영욱이 아니라 대룡이 목표겠지만 현재로선 같이 달아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역시 우리를 쫓아오는군.

-당연하죠. 제가 사냥 목표니까요.

-저 녀석도 제법 빠른데?

-당연하죠. 그래야 저를 잡아먹을 수 있으니까요.

대룡도 이제는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대답했다. 자기보다 강한 녀석에게 쫓기고는 있지만 긴장감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여자 목소리를 낸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넌 이제 죽은 목숨이네?

-주인님께서 저를 어떻게든 보호해줄 테니까 별로 걱정스럽지도 않아요.

-팔자가 아주 좋군.

-그게 노예의 장점이죠. 모든 고민은 주인에게 맡기고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거죠.

-언제는 파트너라며?

-파트너라도 우열이 있는 법이죠. 주인님이 갑이에요. 호호호!

갑자기 영욱을 주인으로 인정하게 된 것에는 호그질라의 가죽과의 교감이 어느 정도는 작용한 것 같았다. 

호그질라가 대룡에 의해서 죽었다기보다는 영욱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피를 묻히지도 않은 상태에서도 교감이 가능했다는 것을 대룡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피를 묻혀서 귀속시키기까지 했으니 영욱을 존중하는 것이다.

-예전에도 저 녀석에게 쫓겨 본 적이 있었어?

-대룡이 되고 나서는 처음이지만 토룡 시절에 여러 번 쫓겨 다녔어요.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그냥 죽으라고 도망치니까 포기하던데요. 물론 쉽지는 않았어요.

-그렇다면 장기전에는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소리군.

자신에게 모든 책임이 주어졌으니 영욱은 백족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아직 본 적도 없으니 대룡을 통한 정보 수집부터 시작했다.

-원래 은밀하게 움직이는 녀석들이니까 그럴 거예요.

-그에 반해서 너와 나는 얼마든지 오랫동안 달아날 수 있으니 죽을 염려는 없겠군.

-그런데 이 녀석은 아주 빨라요. 대룡인 나를 먹이로 삼으려는 녀석이니까 그전의 백족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 같아요. 어쩌죠?

백족이 아니라 무려 삼백족이니까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사기 떨어지게 그런 재수 없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너를 그저 덩치 큰 토룡으로 착각할 수도 있잖아.

-그렇다면 다행이겠지만 아닐 확률이 높아요. 저를 추격하는 태도가 여유만만이거든요.

-그래? 그렇다면 진짜 여유인지 장난 좀 쳐보자.

-무슨 장난을 치려고요?

-흙으로 숨관을 막아버리면 숨이 차지 않겠어?

영욱은 백족으로도 불리는 지네의 호흡이 수백 개의 숨관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장난을 쳐보기로 했다.

-그 정도야 코를 푸는 것보다 간단하게 뚫어낼 걸요?

-너도 리벳이 뭔지는 알아?

-알죠. 설마 흙으로 리벳을 만들려는 건가요? 하지만 리벳 모양이라도 흙은 흙이 아닐까요?

-하지만 불로 구우면 단단하게 변하겠지.

-도자기가 잘 깨지긴 하지만 흙보다는 훨씬 단단하겠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던져도 깨지지 않는 도자기도 있어. 

영욱에게는 토정과 흙의 기운을 담은 내단이 있고, 일곱 개의 화정이 있으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는 빠르게 추격하고 있는 백족의 숨관을 막고 열을 가해서 도자기 모양의 리벳을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충격에 강한 도자기 리벳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있는 줄이야 알지만 주인님이 만들 수 있어요?

-고밀도 결정화공법을 사용하면 만들 수 있어. 물론 수업시간에 만져본 적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해.

-주인님의 전공이 뭐기에 그런 걸 다 만져 본 거죠?

-신소재공학이야. 신소재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어지간한 소재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이 기본이지.

-아주 좋은 전공을 가졌군요.

-당연하지.

영욱은 염동력과 토정의 도움으로 흙을 뭉쳐서 열심히 추격하고 있는 백족의 숨관 하나를 막아보았다. 하지만 예상대로 실패였다.

-젠장. 콧바람이 왜 이렇게 세?

-그러게요. 숨관이 허파에 비해서는 다소 원시적인 호흡 형태이기는 하지만 저 녀석의 숨관은 어지간한 드림헌터들의 허파보다도 나은 것 같아요.

-그래봐야 구멍을 열고 닫을 수는 없잖아. 그러니 변하는 것은 없어.

-하지만 워낙 세찬 기류가 흘러서 리벳을 만들 시간도 없고, 그걸 굳힐 시간도 없을 걸요?

두어 번의 실패가 거듭되자 대룡의 반응도 회의적으로 변했다. 그만큼 황당한 시도였기 때문이다.

-호흡이란 내뱉고 들이쉬는 것이야. 그러니 중간에 흐름이 끊어지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지.

-숨관마다 모두 그 리듬이 다른데 무슨 수로 그 순간을 찾아내요?

-호흡을 일치시키면 불가능할 것도 없어.

하지만 영욱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쉬울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벌써 포기할 리가 없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제 3의 눈을 동원해서 자신을 쫓는 백족의 호흡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숨관과 호흡을 일치시켰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숨이 멈춘 순간이 아주 짧았지만 그 틈을 이용해서 숨관의 두께보다 조금 더 큰 흙을 끼워 넣고 양쪽에서 압력을 가해서 양쪽 방향으로 빠지지 않도록 못의 머리 모양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화정의 힘을 동원해서 순간적으로 아주 높은 열을 가했다. 그러자 영욱이 원하던 리벳 모양의 도자기가 만들어져 버렸다.

만일 백족의 발이 닿는다면 이까짓 도자기 리벳이야 간단하게 제거할 수 있겠지만 다리의 구조상 그게 불가능했다. 하지만 숨관의 수가 워낙 많으니 겨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영욱은 도망치면서 연신 도자기 리벳을 만들어냈다. 2QB 세상이라서 뭐든지 소환이 가능하지만 그것을 백족의 숨관에 꽉 맞추어서 소환할 수는 없다. 그러니 지금처럼 염동력과 열과 압력을 가해서 2차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게다가 키틴질의 두께가 무려 1미터에 달하지만 숨관의 지름은 겨우 10센티라서 강한 도자기 리벳을 만들기에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도자기를 구워본 경험도 없고, 잠깐 동안 가하는 열로 정상적인 강도를 가진 도자기가 구워질 리도 없었다. 또한 가마처럼 열을 가하는 것도 아니니 균일하게 구워지지도 않았다.

그 부실한 작업의 결과는 곧바로 도자기 리벳의 균열과 파괴로 나타났다. 만들어내는 숫자와 백족이 달리는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자체적으로 붕괴되는 도자기 리벳의 숫자가 얼추 비슷했다.

하지만 영욱도 이미 각오했던 일인지라 깨져나가는 불량품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좀 더 단단한 도자기 리벳이 만들 수 있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리벳에 열을 가하는 방법은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서 이제는 진흙으로 덩어리를 빚을 때 미리 화정과 빙정의 기운을 섞음으로써 해결했다. 

영욱이 감싸고 있는 토정의 기운을 흩트려놓아서 불을 일으키면 자체적인 열기로 흙을 용암처럼 녹였다가 다시 빙정의 도움으로 굳혔다.

또한 높은 열은 백족의 키틴질에도 미세한 손상을 주어서 재생 반응을 유발시켰다. 진흙 리벳과 맞물려서 일어나는 재생작용은 표면을 거칠게 만들어서 리벳이 더 잘 고정되게 만드는 효과가 생겨났다.

영욱은 다리의 수만큼이나 많은 숨관에 일일이 도자기 리벳을 만들었다. 깨어져 나간 것이 더 많으니 곱하기 3에서 4만큼이나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토정의 기운과 화정의 기운이 있을 리 없지만 대부분을 회수함으로써 백족을 처리하기도 전에 모든 기운이 고갈되는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일단 전투가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소모된 기운들이 생겨날 테니까 큰 문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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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 백족 녀석의 걸음이 느려지기 시작하는데요?

-당연하지. 대부분의 숨관이 막혔으니까 숨이 가빠서라도 제대로 뛸 수 있겠어?

-처음에는 애들 소꿉놀이 같더니 이젠 제법 그럴 듯한 구조물이 만들어졌어요.

-처음에는 나도 서툴러서 그런 거고,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투자해서 만드는데 발전이 없을 수는 없지. 이제 저 녀석을 처리하기로 하자.

도망가랴 도자기 리벳들을 만들랴 힘의 대부분을 소모한 영욱은 승부를 결정짓기로 마음먹었다.

-좀 더 숨이 막히기를 기다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쟤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가만히 있겠어? 제 몸을 바위에 부딪쳐서라도 숨관을 막고 있는 도자기 리벳들을 부수려고 들 거야.

-듣고 보니까 그렇겠군요. 그럼 어떤 식으로 공격할 건가요?

-녀석의 독니만 제거할 수 있으면 네 힘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당연하죠. 독니만 없다면 녀석을 돌돌 말아서 질식시킬 수 있을 겁니다.

남은 문제는 백족의 무시무시한 독니였다. 사실상 독니를 무력화시킨다는 게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일 공산이 컸다. 하지만 영욱은 그 일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그래. 네가 주의를 끌어주면 내가 녀석의 독니들을 뽑아버릴게. 숨관을 막은 도가니 리벳을 부수려고 발광할 때가 바로 공격 타이밍이야. 

-알겠어요.

영욱의 명령에 의해서 도주 대신 전투를 하게 된 대룡은 독니가 있는 백족의 머리 부분을 피해서 꼬리 쪽부터 공략하려고 들었다. 그러한 대룡을 쫓아서 백족도 원을 그리면서 빙빙 돌게 되었다.

길이와 크기가 비슷하니 200미터짜리의 거대한 환수 두 마리가 지름 50미터의 원을 그리면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지름이 200미터 쯤 되는 원을 그려야 정상이겠지만 대룡이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하니 그렇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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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상각! 잔상무!

근처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영욱은 백족의 머리에 올라타고는 3미터도 넘는 흉측한 독니 두 개를 기계 삽으로 공격했다. 

우지직. 쉬쉿!

강력한 ULM으로 두껍게 코팅된 기계 삽으로도 쉽게 백족의 독니들을 부러뜨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몇 차례 가격하자 영욱의 뜻을 이룰 수 있었다. 백족의 키틴질이 두껍고 강하다고는 하지만 ULM의 강도와 거듭되는 기계 삽의 완력을 당해내지는 못했다. 

사실 독니는 그 자체가 강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품고 있는 독이 강한 것이니 포크의 완력이 통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속이 비어있으니 물리적으로는 그렇게 강할 수가 없었다.

환수의 몸은 엄청난 재생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다른 부위와는 달라서 부러진 독니는 쉽게 재생되지 못했다. 그 틈을 노려서 대룡이 백족을 칭칭 감고 조이기 시작했다. 

원래는 백족에게 당하는 입장이지만 이빨 빠진 녀석이라서 상황은 정반대로 역전되었다. 게다가 호그질라를 통째로 삼킨 효험도 컸다.

우지직.

백족의 두껍고 강한 키틴질 껍질들이 대룡의 조이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영욱은 균열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백족의 체액들을 삼키기 시작했다. 전리품으로 가죽을 벗길 수도 없는 녀석이니 챙길 것이라고는 오로지 혈액 섞인 체액뿐이었다.

-대룡아. 얘는 왜 가죽 없지?

-그게 무슨 소리예요? 딱딱하긴 하지만 얘도 껍질이 있잖아요.

그냥 아쉬워서 해본 소리였는데 전혀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무식한 놈 취급을 당하긴 했지만 수확이 있다는 소리에 영욱은 날아갈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벗겨?

-제가 체액과 내장을 빨아먹으면 적당한 크기로 줄어들 겁니다. 그때 챙기시면 갑주나 방패로 쓸 만한 백족 껍질들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나는 그냥 꽝인 줄 알았더니 그런 것도 아니었구나.

-적어도 2QB 세상에서는 꽝이 없어요. 호호호!

기분이 좋기는 대룡 또한 마찬가지였다. 영욱의 기지奇智와 용기 덕분에 뜻하지 않은 수확을 걷었으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노예라도 정승판서의 노예는 사는 것 자체가 틀리다는 걸 이제야 만끽하고 있었다.

-너 지금 기분이 무척 좋은 모양이구나.

-또 포식하게 생겼으니까 기분 나쁠 리 없죠. 그것도 천적으로 말이죠.

-대체 네 천적들은 왜 이렇게 많아?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을 보면 모르겠어요? 

-그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개나 소나 지렁이를 만만하게 보고 잡아먹으려고 하는 게 바로 제가 처한 현실이라는 거죠.

죄다 천적이라는 말이었다. 간단하게 생각해봐도 지렁이의 천적은 늘리고 늘렸다. 각종 새 종류와 두더지는 물론이고 지네와 심지어 개미들까지도 지렁이를 노리니 동네북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것은 이름에 용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너와 파트너라니 내 앞길도 험난하겠군.

-이거 왜 이러세요? 낚시 미끼로서는 지렁이가 최고라는 사실을 잘 아시잖아요. 게다가 벌써 두 건이나 했으니 이 정도면 제 가치를 증명하고도 남지 않겠어요?

-맞아. 너 때문에 내가 제 명에 못 죽겠다. 아무튼 고맙다.

영욱이 백족의 남아있는 숨관들을 마저 막아버리니 그토록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던 녀석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실 큰 위용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허무하게 죽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정상적으로 싸워서는 결코 이기지 못할 상대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룡은 자신의 몸 크기를 조금 줄여서 백족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체액과 살들을 몽땅 파먹기 시작했다. 잠시 후 대룡의 말처럼 껍질들이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각각의 체절들이 가로 세로 각각 1미터에 높이 5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가 되었다.

-각 체절마다 분리되어서 마치 거북 껍질 같이 변했군.

-300개까지는 안되겠지만 290개는 족히 되겠군요. 

-맞아. 거의 삼백족인데 상대를 잘못 고르는 바람에 진짜 삼백족이 되지는 못하고 죽었군.

-진짜 삼백족이라도 우리를 당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런데 들고 가시기가 마땅찮을 텐데 제가 따로 챙겨놓을까요?

-고맙기는 하지만 네가 손이 어디 있다고 들어준다는 거야?

영욱은 체절 하나를 이리저리 만져보고 살펴보기 시작했다. 전리품이라고 챙기긴 하는데 용처用處가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몸통용 갑주로 사용하면 될 것 같긴 한데 영락없는 거북이 꼴을 면치 못할 것 같았다.

-제 뱃속에 보관할 만한 곳이 있어요.

-보관해준다면 나야 고맙지.

-당연히 그래야죠. 호호호!

-그런 식으로 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줄 알고 있어.

영욱은 백족 껍질의 운반 및 보관 문제가 일단 해결되자 본론을 꺼냈다. 백족으로부터 획득한 정수의 배분에 관한 이야기였다.

*맞춤형 아머

-슬쩍 넘어가려는 게 아니라 독의 정수 스무 개가 전부예요. 설마 그게 필요하다는 건 아니겠지요?

-당연히 필요하지. 내 놔.

-설마 스무 개를 다 달라는 것은 아니겠죠?

-하나만 줘 봐. 감당이 되면 열 개까지 달라고 할 거고, 그게 아니면 하나로 끝이겠지.

-그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시군요.

-함께 싸웠으니까 반씩 나누는 게 당연하지만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한 물건이니까 어쩔 수 없지.

-여기요.

꿀꺽.

영욱은 독서를 통해서 지네 독의 성분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로 통증을 일으키는 것은 고농도의 세로토닌 때문이다. 영욱은 행복호르몬이라고도 불리는 세로토닌이 농도를 달리하면 독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다. 

또한 조루가 세로토닌 부족이라는 의학상식도 알고 있으니 획득한 독정을 잘 다룰 수만 있다면 부실한 친구들을 상대로 용돈벌이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내용은 비아그라와 쌍벽을 이루는 조루치료제 디폭세틴 성분이 조루의 원인인 세로토닌의 빠른 고갈을 막아주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관계하는 시간을 최대 4배까지 늦춰주고, 사정 조절 능력을 향상시켜서 성관계 만족도를 79%까지 향상시킨다는 놀라운 약도 알고 보면 지네독의 성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당장 사용할 일이 없는 영욱으로서는 토정의 기운과 흙의 내단 기운으로 감싸서 지네독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갈무리만 하고 말았다.

-어때요?

-아직은 몰라.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게 잘 간수하세요. 

-나도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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