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어, 정말 오묘한 맛이다. 비린내와 지린내와 노린내 중에서 어떤 게 더 우위라고 할 수도 없이 고약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구나.
-누가 마시라고 했어요?
-그런데 또 다른 오묘한 향도 있어. 이동하다가 땅속에서 좋은 거라도 주워 먹었어?
영욱은 토할 것처럼 괴로운 표정이 아니라 맛을 음미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땅속에서 자라는 버섯이나 다람쥐들이 묻어놓은 도토리도 가끔 주워 먹긴 하지만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것들입니다.
-그럼 호그질라 녀석의 기운을 통째로 흡수해서 그런가 보군.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렇다면 너를 더 잘 먹이면 진액이 향기롭게 변하는 날도 오겠군.
-아주 좋은 마음가짐이십니다요. 주인님.
-뭘! 서로 피와 진액을 주고받는 사이니까 이 정도는 배려해야 정상이겠지.
서로가 서로를 도시락으로 여기는 중이니 주고받을 수 있는 대화였다. 알을 낳는 암탉과 알을 낳는 오리가 서로의 알을 주고받는 것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화통해서 좋습니다.
-뭐하고 있어? 어서 가서 멧돼지들을 먹어치우지 않고? 껍질을 벗긴 녀석들이라서 상할 우려가 있단 말이야.
-그렇죠. 뭔가 좀 허전했는데 바로 그걸 잊고 있었군요. 그럼 먼저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나보다 빠르다는 보장이라도 있어?
보다 나은 진액을 마시기 위해서 영욱은 대룡의 식사부터 챙겼다. 하지만 공짜로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제가 빠르죠.
-그럼 시합이라도 할까?
-그냥이야 무슨 재미로 하겠어요?
-그렇다면 피 한 바가지와 내단 하나가 어떨까?
둘은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피와 내단을 걸고 내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야 재미있다는 논리였다.
-좋습니다.
-내가 더 좋지. 출발!
-주인님! 이건 반칙입니다.
영욱이 포크를 소환해서 먼저 달려가자 바로 그 뒤를 대룡이 따라가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부정출발쯤이야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막상 내기가 걸리자 영욱의 이동 속도가 예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룡의 진액과 호그질라의 피와 정수들을 취해서 강해진 것과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었다.
-무슨 소리야? 내가 포크를 소환해서 시동 걸고 출발하는데 무려 2초나 걸렸는데 그 동안 너도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을 거 아냐.
-하지만 출발 신호를 그렇게 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우주선 발사하는 것처럼 대단한 일도 아니잖아. 겨우 내단 하나가 아까워서 그래?
-누가 진다고 했습니까?
-너 흥분하니까 또 남자 목소리다. 평소에는 예쁜 여자 목소리인데…….
대룡이 영욱을 추월하려고 하자 영욱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약을 올려서 승부를 뒤집어보려는 것이다. 원래는 꼭꼭 숨겨두려고 했던 비밀이지만 굳이 감출 것도 없을 것 같아서 알려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게 뭐가 문젭니까? 자웅동첸데.
-큰 문제지. 네 감정 변화를 상대가 알 수 있잖아.
-감정 변화가 문제될 정도로 강적이라면 대화를 나눌 일이 없을 겁니다.
-뭐야? 그렇다면 나는 강적도 아니었다는 소리야?
-솔직히 올가미에 걸리기 전에는 맛있는 간식거리로 생각했었죠.
그런데 약이 오르는 것은 오히려 영욱이었다. 대룡은 노련한 말솜씨로 영욱을 놀리며 페이스를 흩트리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게 아니라 처음부터 나를 파트너로 생각했었지? 다만 네가 노예가 아니라 나를 노예로 삼으려고 했겠지만 말이야. 내 말 맞지?
-제 말 한 마디에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능력이 제한되는 주인님의 현실 세상에서 제가 보낸 토룡 둘을 처리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맛있게 잡아드신 걸 보고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말투가 다시 여자로 돌아갔군. 아무튼 너도 참 대단하다. 한 번 정하면 쉽게 무를 수도 없는 파트너를 그렇게 간단하게 정하다니 말이야.
이번에는 칭찬으로 대룡의 페이스를 흩트리려고 했다. 하지만 둘은 거의 같은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좋은 파트너는 고르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생각이야. 앞으로도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어요. 하지만 내기는 어디까지나 내기죠.
-누가 뭐래? 잔상무!
영욱은 자신의 최고 초식 잔상무를 펼칠 수 있는 극성으로 시전했다.
잔상무의 '무'는 무舞이 아니라 무無가 되었다. 잔상마저도 사라질 정도로 다리를 빠르게 놀려서 멧돼지들을 사냥했던 장소에 간발의 차이로 먼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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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겼다. 내단 줘.
-이건 반칙이에요.
-거리가 얼마나 먼데 아직까지도 반칙 타령이야? 그 정도도 추월 못 해?
-더 빨리 달릴 수 있는데도 딱 그만큼만 달린 줄 알고 있어요.
영욱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시늉에도 불구하고 대룡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포크의 달리기 실력이 이미 자신의 이동 속도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말도 안 돼. 내가 왜 그래야하지?
-다음에 또 우려먹으려는 심보인 줄 알고 있어요.
-쳇! 너무 영악해서 곤란하잖아. 그런데 왜 화난 목소리가 아니지?
-주인님이 강할수록 저는 더 좋으니까요. 그래, 어떤 내단을 드릴까요?
-혹시 토정 없어?
-흙의 정수는 저도 부족해서 드릴 게 없고, 흙 기운을 많이 내포한 내단은 있어요.
흙속에서 사는 녀석이니 가장 많은 것이 바로 토정일 것이다. 그런데도 부족하다면 간직하고 있는 화정이나 빙정이 아주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무튼 영욱으로서는 아직도 내단과 정수가 헷갈려서 대룡이 주겠다는 게 뭔지 쉽게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뭐가 다르지?
-이미 아시잖아요. 그리고 좀 더 자세한 것은 직접 느껴보시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자, 여기요.
-아무튼 고마워.
-천만의 말씀입니다. 내기는 내기니까요.
꿀꺽.
내단과 정수의 차이는 크지 않았다. 토정이 고운 흙으로 빚은 진흙 경단이라고 한다면 흙의 성질을 가진 내단은 거친 입자가 포함된 흙덩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운 흙은 고운 흙대로 쓸모가 있고, 거친 흙은 거친 흙대로 쓸모가 따로 있는 법이다. 영욱은 화정과 빙정을 싸고 있는 토정 위에 흙의 내단을 헐어서 덧씌웠다. 다른 정수나 내단과는 달리 흙의 진득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반죽에서 조금씩 떼어내는 것도 별 무리가 없었다.
부착에는 별 무리가 없지만 열기와 냉기가 혈관에 덜 전달되도록 덧붙여 바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덧바르는 작업은 염동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 빙정이나 화정과 혈관 사이의 두께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언제라도 화력 조절이 가능한 밸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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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비록 미량이지만 일정량까지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자신의 정신력처럼 정수와 내단들도 소모한 기운들을 자체적으로 생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바로 정수와 내단이 살아있는 존재라는 증거였다. 또한 그것은 또한 산소와 포도당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독서를 통한 새로운 지식과 희로애락은 물론이고 애오욕까지도 망라하는 풍부한 감정과 작은 깨달음들에도 반응한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평소라면 모르겠지만 정수와 내단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같이 죽고 같이 산다는 동료의식까지도…….
'좋아! 다들 잘 해보자고.'
영욱은 자신의 몸속에 자리를 잡은 각종 정수들과 내단들에게 말을 걸었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움찔 놀라는 것을 느낄 수는 있었다.
'각자의 할 일은 잘 알겠지? 필요할 때는 힘을 내놓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속으로 품어서 자신의 힘을 키우는 거야. 앞으로 잘 부탁해.'
움찔. 움찔.
영욱은 대부분의 정수들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물론 기가 죽어서 움찔거린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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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룡은 껍질을 벗기고 남은 수십 마리의 멧돼지들을 게걸스럽게 삼키고, 영욱은 멧돼지 껍질들 때문에 도주했다가 다시 돌아온 일행들에게로 다가갔다.
이번에는 박상태가 먼저 영욱을 맞았다. 약속을 어긴 은영과 진소희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으니 눈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또 살아계셨군요.
-당연하지. 그런데 표정들이 왜 그래?
-대룡이 선배님을 공격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놀랐습니다.
-쟤는 너처럼 우리 편이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대단하십니다. 선배님.
-그냥 또 운이 좋았을 뿐이야. 다들 놀지 말고 가서 껍질이나 벗겨.
-예. 주인님.
다소 완곡한 표현이지만 대룡도 박상태처럼 자신의 노예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엿듣고 있는 세 여자를 향한 뼈 있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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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를 슬슬 보고 있던 은영이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근질거리는 입을 주체하기가 힘든 듯했다.
-오빠! 정말 놀라워.
-뭐가 그렇게 놀라워?
-그 무시무시한 호그질라의 추격을 뿌리치고 돌아온 게 당연히 놀랍지.
-호그질라를 사냥해서 잡아먹었다고 해도 여전히 믿지 않겠지만 이제는 대룡의 껍질을 땅속에 보관해두었다는 말이 사실임을 알겠지?
-살아있긴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네. 쩝.
호그질라 이야기는 일부러 패스하는 걸 보니 여전히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도망가지 않고 맞서 싸웠을 거라는 판단일 것이다.
-괜히 입맛 다시지 마. 네가 아무리 애원해도 살아있는 녀석의 껍질을 벗겨줄 수는 없으니까.
-애인이라면 줄 수도 있는데 애인이 아니라서 그런 거지? 그렇지?
-아무리 애인이라도 파트너의 껍질을 함부로 벗겨줄 수는 없지. 게다가 넌 애인도 아니잖아.
-어차피 오빠는 나를 벗어날 수 없어. 그건 우리들의 운명이라고 했어.
다시 한 번 버려두고 도망가면 영욱을 포기하겠다는 맹세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그 자리를 너는 내 운명이라는 억지주장으로 채우려고 들었다. 하지만 듣다보니 은영도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 듯했다.
-누가 그런 말을 해? 또 네 언니가 했다는 것은 아니겠지?
-맞아. 언니가 그랬어.
-네 언니는 제법 신통한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너는 왜 그 모양이니?
-나도 내 눈을 뽑아버리고 싶어. 왜 그런 속단을 내렸는지 모르겠어.
-네 눈이 아니라 아둔한 네 머리를 탓해야 해. 그러니까 책 좀 읽으라고 했잖아.
-내 학점이 어때서 저능아 취급을 하는 거야?
학점이야 은영도 제법 높다. 알다시피 그녀의 필기노트 덕분에 무사히 학점을 이수한 영욱이었다. 하지만 영욱이 말하려는 것은 학점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학점이 아니라 광범위한 영역에 대한 독서량을 말하는 거야.
-그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돼?
-당장은 아니겠지만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놈도 있더군.
그놈이 바로 대룡이다. 영욱 역시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2QB 세상의 도서관을 이용해서 많은 책들을 읽었다. 그게 지금 영욱의 경쟁력이 되고 있었다.
-참고하겠어.
-얼마든지.
이야기는 의외로 진지하게 끝나고 말았다. 은영은 여전히 호그질라를 잡았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영욱의 이야기를 다소곳이 들어주는 시늉은 했다. 붙어 있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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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을 내치지 않으니 눈치를 보던 진소희도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녀는 호그질라를 잡았다는 영욱의 말을 믿는 듯했다.
-또 한 건 하셨군요.
-이 정도야 별 것도 아니지.
-많이 강해지긴 했지만 아직도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자꾸만 운이 따르는 모양이군요.
-원래 운이 가장 중요한 거야. 특히 싸움에서는 운보다 더 중요한 게 없어.
영욱은 일부러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라는 확신 하에서.
-그래도 실력이 더 중요하죠.
-웃기지 마. 어느 세상이라도 운칠기삼의 논리대로 돌아가는 법이야.
-그러다가 운이 등을 돌리면 어떡하려고 그러죠?
-그러니까 운이 따르는 동안 부단한 수련을 통해서 좀 더 강해지고, 또 기초를 착실하게 다져서 다가올 불운을 견뎌내야겠지. 가을이 지나면 추운 겨울이 오겠지만 참고 견디다 보면 따뜻한 봄이 오지 않겠어?
실력을 쌓는 데에도 운이 따른다면 기연을 거듭 만나서 어느새 강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 해도 기본적인 전투력이 있으니 어려움을 헤치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지독한 불운이 닥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그렇다.
-낙천적이라서 좋군요.
-원래부터 성격이 그래. 비관적이라고 해서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아무튼 대단해요. 정말 멋져요.
-아부는 사절이야. 너라면 틀림없이 칭찬에 대한 대가를 원할 테니까.
진소희의 갑작스러운 변신에 영욱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쫓겨나지 않으려고 전략을 바꾼 모양인데 아마도 그게 주효한 듯했다. 물론 이렇게만 대해준다면 영욱으로서도 쫓아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물론 무슨 속셈인가 싶기도 했다.
-그냥 칭찬도 못해요?
-갑자기 노선을 180도로 바꾸니까 그렇지.
-솔직히 책잡힌 것도 있는데 계속 거만하게 굴 수는 없잖아요. 아무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또 이야기해요.
-그러든지.
상대의 약점은 노출시키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해주는 것이 더 효과가 좋았다. 그래서 더 설설 기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출시키는 순간 단단한 딱지가 앉아서 별로 아파하지도 않게 되니 이처럼 매사에는 취급상의 주의가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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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순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키는 여자들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유화리였다. 그녀 역시 영욱이 호그질라를 사냥했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올 수는 없으니까.
-호그질라 가죽은 어디 있지?
-그걸 왜 네가 탐내?
-내게 팔아. 20골드 줄게.
-미안하지만 그건 2,000골드를 준다고 해도 사양하겠어.
-20골드가 정가야. 왜 자꾸 더 받으려고 하는 거야?
어디서 정한 정가正價인지는 모르겠지만 화리는 자꾸 정가를 들먹이면서 날로 먹으려고 들었다. 20억이 결코 적은 돈은 아니지만 호그질라의 모습과 힘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정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름드리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괴물의 가격이 단돈 20골드라는 게 영욱으로서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 가격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팔려고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정가라는 것도 존재하는 거야. 나는 팔 생각이 전혀 없다니까 왜 자꾸 그래?
-나야 네가 사냥한 환수의 가죽을 사려고 따라왔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그렇다면 다른 멧돼지 가죽들이나 가져가.
-걔들은 환수 축에도 끼지 못하는 그냥 맹수들이야.
-사기 싫으면 말고.
-그게 아니라 열 장에 1골드가 정가라는 소리야.
화리의 이야기는 모두 가격을 후려치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쳤어? 겨우 그 가격에 팔게?
-환수가 아니면 어차피 현실 세상으로는 가지고 갈 수 없는 물건이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잊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상인들에게 팔아치우고 2QB 세상을 벗어나라는 소리잖아. 그런데 이 험한 산속에 상인들이 어디 있어?
-그러니까 내게 팔라는 거잖아.
-내 말은 화리 너도 나와 입장이 마찬가지라는 소리야.
구입한 물건이라고 해서 부피도 없고, 무게도 없는 것은 아니니까 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차나 수레가 있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포크를 이용할 수도 있는 영욱보다도 조건이 더 나빴다. 숨겨둔 한 수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 보자면 그렇다.
-과연 같은 입장이라고 생각해?
-네 표정을 보니 뭔가 특별한 운송 수단이라도 있는 모양이군.
-그러지 못한다면 늘 산속을 헤매고 다닐 수는 없잖아.
-그 능력을 이용해서 내 가죽을 헐값에 구입한 다음 상인들에게 비싸게 되팔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맞아?
-빙고! 하지만 마진을 많이 붙이는 건 아냐. 박리다매가 바로 내 신조니까. 호호호!
-사냥보다는 장사에 더 큰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군.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너를 따라다닐 이유가 없겠지.
-그런데 너희들끼리 다녀도 저런 것들이 나타나?
화리를 살짝 칭찬했던 이유는 바로 이 질문을 하기 위함이었다. 운이 좋아서 처리하기는 했지만 너무 강한 녀석들이 줄을 지어서 나타나니 특별한 경험인지 보편적인 현상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었다.
-좀 센 녀석들이 연달아서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어차피 만만하게 보이는 놈들은 하나도 없는 곳이야.
-그 호그질라가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면 너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었다는 표정이군.
화리의 반응을 보아하니 영욱이 경험했던 두 환수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고 대단한 것도 없는 녀석들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리 일행이 사력을 다해서 달아난 것이 약간 이치에 맞지 않지만 두 환수에 대한 평가만큼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했다. 그러니 겨우 20골드짜리라고 단언하는 것이다.
-어차피 세상은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지.
-골드를 던지면 환수들이 스스로 목숨을 내놓기라도 한다는 거야?
-적절한 비유야. 사실 그럴만한 사냥 아이템들이 있지. 무척 비싸고 일회용이긴 하지만.
-일시적으로 헌터의 능력을 10배 이상 증폭시켜 주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런 것은 없지만 환수의 초능력을 무력화시킬 만한 포획용 아이템들은 많이 존재하지.
실력은 개뿔이면서도 환수 무서운 줄 모르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달아난 것도 비싼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기 위함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훨씬 더 자유로울 것 같은 2QB 세상마저도 자본주의의 논리가 철저하게 지배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까 그 호그질라도 잡을 수 있어?
-당연히 잡을 수 있지.
-그런데 왜 그냥 도망쳤어?
-호그질라 포획 아이템의 가격이 23골드야. 사용하는 순간 3골드가 적자야. 그러니까 3골드를 번다는 심정으로 열심히 도망치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젠장! 무슨 아이템이기에 그렇게 비싸? 그것도 겨우 일회용인데 말이야.
하지만 그 비용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큰 것 같았다. 그것은 이미 돈을 버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소리였다. 그 아이템을 만든 사람이나 집단이 바로 대부분의 골드를 다 끌어 쥐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게 있어. 영업비밀이라서 더 이상 알려주는 것은 곤란하니까 그렇게만 알아.
-거대한 실드 아냐? 녀석을 질식사를 시킬 수 있을 정도로 큰 실드 말이야.
-호그질라가 가만히 있어준다면 그것도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지. 그렇지만 접시물이 훨씬 더 경제적이지 않겠어? 코만 박으면 익사할 테니까.
-그렇다면 미사일의 위력을 능가하는 거대한 창인가?
-그런 걸로는 안 된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핵폭탄이 떨어지면 모를까.
-몰라. 왜 안 돼?
영욱은 순진한 척하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영욱이 2QB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부끄러워할 것도 없었다.
-그야 당연히 피해버릴 테니까. 환수들의 반응 속도가 얼마나 빠른데 그런 걸 맞아준대? 다리가 부러지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지.
-궁금해서 미쳐버리겠네. 그럼 대체 뭐야?
-죽어도 못 가르쳐 주니까 그렇게 알아.
-그럼 강력한 소이탄인가?
-네가 노예로 거느린 대룡이라면 통할 지도 모르겠지만 콧구멍으로 강력한 불을 내뿜는 호그질라가 소이탄을 두려워할 리 없지.
-그것도 알고 있었던 거야?
역시 화리는 모르는 게 없었다. 그녀는 각 환수들의 필살기와 약점마저도 훤히 꿰고 있었다. 영욱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대룡이 네 노예가 된 거? 아니면 호그질라가 콧구멍으로 불을 내뿜는 거?
-둘 다.
-당연하지. 대룡이 바로 네 옆에서 소환되었으니까 노예라는 걸 알 수 있었고, 호그질라의 주특기가 코로 불 뿜기라는 건 환수 사냥꾼이라면 상식에 해당하는 내용이야.
-그렇다면 호그질라의 가격이 20골드라는 것도 상식이겠구나.
-당연하지.
영욱은 EMP 폭탄까지 생각했다가 문득 돼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내었다. 시골에 가면 돼지가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펜스가 있다.
*보부상
-이제 대충 알겠다. 호그질라를 잡는 그 아이템이 무엇인지 말이야.
-말해 봐. 대답해줄 수는 없지만 맞추면 맞았다고 해줄 테니까.
-강력한 번개 같은 것일 거야. 그렇지?
-그, 그걸 어떻게 알았지?
-현실 세상에서도 돼지는 전기에 아주 약해. 가정용 전기 따위로 어쩔 수 없겠지만 번개 정도라면 호그질라도 별 수 없겠지.
칠전팔기의 도전으로 결국은 정답을 맞히고 말았다. 물론 정답을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의 생체 전기로는 절대로 감전感電시킬 수 없을 테니까.
-내 예상보다는 훨씬 더 대단한 지식을 가진 녀석이었군. 아무튼 우리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겠지?
-게다가 그 빠르고 강한 녀석의 선제공격을 피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겠지. 아이템이 아무리 좋아도 사용할 기회가 없다면 말짱 꽝일 테니까 말이야.
-그야 당연하지.
-아무튼 너와 거래할 생각은 아직 없으니까 그렇게 알아.
-버티면 버틸수록 더 손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거야.
-나는 아주 운이 좋은 사람이란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모르긴 해도 머지않아서 이 멧돼지 가죽들을 처리할 방법이 생길 거야.
영욱은 그냥 낙천적으로 생각했다. 비트에 보관했던 늑대 가죽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점에 착안着眼해서 멧돼지 가죽들을 가지고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정말로 운이 좋으면 산에서 다른 상인들을 마주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흥정이 붙으면 가격은 올라갈 게 분명했다. 적어도 가죽 열 장을 주고 1골드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냥 불태워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물론 1골드가 현실 세상의 돈으로 1억이라니 한 장에 무려 천만 원이나 하는 고가의 가죽이다. 그런데도 왠지 싸구려 취급을 당한다는 느낌이 들었고, 평가절하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멧돼지 가죽은 왠지 다를 거라는 막연한 기대도 없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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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의 그러한 바람은 금방 이루어졌다. 상인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상당한 숫자의 드림헌터들이 접근하고 있었다.
-화리야. 전방 1km 앞에서 드림헌터 열 명이 접근한다.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뭐가 문제라는 거야?
-드림헌터들이니까 우리를 사냥하려고 들 수도 있잖아. 그러니 피해가든지 미리 싸울 준비를 하든지 해야지.
-환수 사냥 중인 드림헌터끼리는 싸우지 않아. 괜히 환수 쫓을 일이라도 있어?
영욱의 걱정에 대해서 화리는 콧방귀를 끼면서 무시했다.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에 발끈한 영욱이 입을 열었다.
-한극상 아저씨와 나는 싸웠잖아.
-그건 그냥 힘겨루기 정도였지, 전면전까지는 아니었잖아.
-그렇다면 안심하고 지나쳐도 된다는 소리야?
-그래.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마. 하지만 피해갈 필요는 없어. 오히려 그게 저들의 관심을 끌 수 있으니까.
-상당히 강한 자들인데 괜찮겠어?
영욱의 걱정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했다. 사람의 숫자는 같지만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게다가 오지합졸로 이루어진 자신의 팀과는 달리 저들은 한 팀이었다.
-어느 정도인데?
-너희들보다 서너 배는 더 강한 것 같아.
-그렇다면 사퍼모어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자들인 모양인데 여긴 웬일이지?
-뭐야? 저 정도로 강한데 여전히 사퍼모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거야?
화리가 느끼는 것과 영욱이 느끼는 것의 차이는 컸다. 둘이 서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두 일행이 좀 더 가까이 접근하자 이제야 상대의 기세를 제대로 읽은 화리가 콧방귀를 끼었다. 멀어서 약간 모호했던 기운이 가까워지자 명백해진 것이다.
-나도 아직까지 주니어를 본 적은 없어. 그런데 별 거 아닌 애들을 보고 웬 긴장이야?
-뭐라고? 저 기운이 별 거 아니라고?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저들은 보부상이야.
-보부상이라고? 그 말에서 조선시대의 필이 물씬 묻어나는군.
-현장에서 물건을 매입하는 장사치들이지. 너 같은 자들에겐 편리한 점이 있겠지만 대신에 가격을 후려치는 자들이니까 조심해.
-어차피 마음에 드는 가격이 아니라면 팔 생각은 없어.
영욱은 보부상들 중에서 특히 한 녀석의 기세가 장난이 아님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리의 반응은 그저 시큰둥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화리가 가진 힘이 녀석을 능가하든지 녀석의 기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자신보다 늦게 녀석들의 접근을 알아차렸으니 화리가 녀석들의 힘을 오판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영욱이 가지고 있는 제 3의 눈 때문에 감지 범위만 넓을 수도 있으니 100%의 확률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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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에? 초면에 웬 반말?
-어린 녀석이 겁이 없구나. 죽고 싶어?
-아, 아닙니다. 말씀을 편하게 낮추셔도 됩니다.
상대의 무례한 언행에 불쾌감을 표현하던 영욱은 보부상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녀석에게 얼른 고개를 조아리며 굴복의 뜻을 전했다.
그것은 일순간 상대의 기세가 두 배 이상으로 증폭되었기 때문이다. 액면의 기세도 부담스러울 정도인데 그게 전부가 아니라면 괜히 자존심 하나 세우려고 분쟁을 일으켜서 좋을 일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진즉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굴 것이지……. 아무튼 그 멧돼지 가죽들을 내게 넘겨.
-어, 얼마를 주시겠습니까?
-시세는 열 장에 1골드지만 먼저 품질부터 보고 이야기하기로 하지.
-예. 살펴보십시오.
영욱은 공손한 태도로 견지하면서 멧돼지 가죽들을 보여주었다.
-오! 사냥감이 살아있을 때 박피 작업을 완료했군. 피도 거의 대부분 다 제거했고, 가죽이 상한 곳도 거의 없는 상품上品이군. 네 솜씨냐?
-예. 어르신.
-어린 녀석의 실력이 제법인데? 이 정도면 다섯 장에 1골드를 쳐줄 수 있어. 총 서른다섯 장이니까 7골드군. 자! 받아라.
-헤헤! 이왕이면 1골드짜리로 일곱 개를 주시면 안 될까요?
무시무시한 기운을 풍기는 상인이 숫자 7이 새겨진 골드를 건네주자 영욱은 간사한 웃음을 웃으며 1골드짜리로의 교환을 요구했다.
-가난뱅이 녀석들은 꼭 양이 많은 걸 좋아한다니까. 자, 여기 있어.
-헤헤헤! 고맙습니다.
영욱은 김진명 학과장이나 이희승 교수 앞에서도 취한 적이 없었던 굴복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헤프게 웃음을 남발하기까지 했다.
-네 노예들이냐?
-예. 그렇습니다.
-내게 팔아라. 저 녀석은 2골드, 나머지 두 녀석은 1골드씩 쳐줄 테니까.
-죄송합니다. 쟤들이 없으면 사냥이 힘들어서 팔 생각은 없습니다.
박상태와 김호진 등을 팔라고 하는 걸 보니 노예상인을 겸하는 자들인 듯했다. 그러니 이런 무시무시한 기세를 풍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욱은 내미는 1골드짜리 네 개를 마다하며 팔지 않겠다고 밝혔다.
박상태 등은 거의 사색이 되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또한 유화리도 개입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고, 은영과 진소희 역시 안절부절 못했다.
-웃기지 마. 저런 허접한 녀석들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런 말을 해?
-거듭 죄송합니다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주인이 팔 생각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그건 그렇고 호그질라의 가죽은 왜 안 꺼내는 거야?
-어, 없는데요?
-우리가 왜 이리로 온 줄 몰라서 물어?
-호, 호그질라 때문이라면 잘못 찾아오신 듯합니다.
영욱은 일단 오리발을 내밀기로 했다. 가격은 상인 마음대로 매길 것 같으니 거래하면 무조건 손해다 싶었기 때문이다. 상대의 기세가 아무리 강해도 이것만은 지키고 싶어서 꿋꿋하게 버텨내기로 했다.
-호그질라는 자신의 종족을 아주 사랑하는 환수야. 네가 수십 장의 멧돼지 가죽을 벗겼는데 호그질라가 그냥 보고 있었을 것 같아?
-이봐! 쟤가 없다고 하잖아. 네 말대로 허접한 헌터가 어떻게 호그질라를 잡을 수 있겠어?
영욱이 계속 저자세로 일관하기만 하자 보다 못한 한극상이 둘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화리는 끼어들지 말라고 눈치를 주었지만 한극상이 눈치 없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허접해도 아이템을 사용하면 호그질라를 사냥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 하는 말이야. 넌 왜 끼어들고 난리야?
-네 녀석들이 헐값에 강탈하려고 드니까 하는 말이잖아. 그리고 없는 걸 내놓으라고 하면 어떡해?
-거래와 상관없는 너는 빠져!
-우리 일행의 일인데 왜 빠져?
-상인이 언제부터 사냥꾼과 팀을 이루었다고 그래? 죽고 싶어?
둘은 비슷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몇 마디를 나누지 않아서 말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싸울 듯한 기세였다.
몇 배나 강해보이는 상대에게도 전혀 굴하지 않는 한극상을 보면서 영욱은 자신이 뭔가 잘못 판단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부상이 언제부터 산적 영업까지 하게 된 거지? 너희들이 이러고 다니는 걸 보부상연합에서는 알까?
-아마도 모를 거야. 아직까지는 신고하는 헌터가 없었으니까 말이야.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소리를 하려는 거군.
-거래가 항상 좋게 끝날 수는 없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저씨는 빠져요! 어르신! 저와 거래하시죠.
한극상의 개입으로 인해 험악한 싸움으로 번질 기미가 보이자 영욱이 얼른 다시 개입했다.
-하하하! 네 녀석이 가지고 있을 줄 알았지.
-호그질라의 가죽은 얼마를 쳐줄 수 있죠?
-그야 품질부터 봐야 가격을 매길 수 있겠지.
-멧돼지 가죽처럼 상품이라면 얼마나 줄 수 있죠?
영욱은 호그질라의 가죽을 꺼내지 않고 흥정을 계속했다. 상인 역시 먼저 꺼내보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호오! 호그질라도 산 채로 벗겨냈다는 말인가?
-예.
-중품의 시세는 20골드 정도인데 상품이라면 25골드까지도 줄 수 있지.
-상품과 중품의 가격 차이가 겨우 그것밖에 안 돼요? 그렇다면 애써 상품을 취할 이유가 없겠군요.
-안타깝지만 시세가 그래.
어디 가나 정가와 시세 타령이었다. 하지만 화리에 비해서 상품 가격을 쳐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지만 영욱은 그 금액으로는 팔 생각이 없었다.
-제가 듣기로는 상품과 중품의 가격 차이는 무려 열 배라던데 잘못 알고 있는 건가요?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다니, 지금 제정신이냐?
-죄송하지만 그 가격에 호그질라의 가죽을 넘길 수는 없습니다.
열 배 차이라는 말은 영욱이 지어낸 말이다. 하지만 품질의 차이를 보면 그 정도는 받아도 충분할 것 같아서 해보는 소리였다. 물론 거래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한 소리였다.
-내 사전에 일단 거래가 시작된 이상 불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좋아. 26골드를 줄 테니까 어서 호그질라의 가죽을 넘겨.
-늑대 26마리만 잡으면 생기는 골드니까 팔지 않겠습니다. 저에게는 늑대 260마리를 잡는 게 호그질라를 잡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우니까 기념으로 간직해야겠습니다.
호그질라의 거대한 가죽 역시 박피 작업이 완료되자 토룡들의 가죽처럼 줄어들어버렸다. 상당한 신축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욱이 가죽 잠바 삼아서 걸쳐 입을 수 있었다. 물론 그 밖에 다른 옷을 입어서 지금 이 보부상에게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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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모양이구나. 죽고 싶으냐?
-간이 튀어나오는 게 아니라 무서워서 오줌이 새어나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무섭다고 징징거리는 어린 아이는 아니니까 꾹 참고 제 의견을 말하는 겁니다. 가격이 맞지 않아서 거래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아셨습니까?
-기어코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려고 하는구나. 너는 이제 죽었어.
-싸우자는 겁니까? 다들 반격하지 않고 뭣들 해? 대룡 소환!
설설 기던 영욱이 갑자기 배를 째자 보부상들의 분노는 더욱 컸다. 다짜고짜 영욱을 향해서 달려들자 영욱은 얼른 일행들 사이로 피하면서 싸움을 독려했다. 게다가 대룡까지도 불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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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보니까 제법 귀여운 면도 있었군. 대룡까지도 사로잡았다니 정말 놀라워.
-그럼 호그질라가 그냥 죽어준 줄 알았어?
-아이템을 사용하지 않고 잡았다면 완전히 허접은 아니겠군. 좋아. 네 녀석이 원하는 200골드를 쳐주기로 하지.
험악한 싸움이 벌어지기 직전에 상인은 갑자기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을 늘어놓았다. 포크를 소환해서 전투에 임하려던 영욱은 갑자기 허탈해졌다.
-싸우려다 말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이제는 싸움으로 해결할 상황이 아니니까 다시 거래로 돌아선 것이지. 나는 제임스라고 한다. 이 바닥에서는 꽤나 유명한 보부상이지.
-협박으로 유명한 모양이군.
-맞아. 협박 역시 흥정의 중요한 수단이거든.
-이제야 기세가 정상으로 돌아갔군. 기세를 증폭시키는 것도 아이템의 도움인가?
영욱은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싸우라는 명령에 박상태마저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극상이 겁 없이 덤빈 것도 그런 아이템의 존재를 알기 때문이었다.
-맞아. 너에게만 무려 다섯 배까지 증폭시켰는데도 끝내 싸울 결심을 하다니 정말 대단해.
-나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우리 일행들이 별로 겁을 내는 것 같지 않기에 내가 모르는 게 뭔가 있다고 생각했지. 아무튼 대단한 기세였어.
-200골드를 준다는데도 왜 시큰둥해? 거래 안 할 거야?
-호그질라의 가죽은 팔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러니 시큰둥할 수밖에.
200골드라는 큰돈을 줄 줄 알았다면 당연히 팔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팔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였기 때문에 이렇게 난감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팔고 팔지 않는 것은 네 마음이잖아. 그러니 다시 팔기로 마음을 고쳐먹으면 되는데 대체 뭐가 문제야?
-나는 내가 내뱉은 말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야.
-그러기에는 200골드가 너무 크지 않아?
-믿을지 모르겠지만 호그질라 가죽을 팔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는 순간 호그질라 가죽이 내게 힘을 실어준다는 느낌이 들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배신을 때릴 수는 없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영욱의 말을 들은 상인의 표정이 더 볼 만하게 변했다.
-상품의 환수 가죽이라면 그런 식의 교감이 가능할 수도 있지. 실제로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 적은 몇 번 되지도 않지만…….
-그런데 왜 고개를 갸웃거리는 거야? 뭐가 잘못된 건가?
-보통의 경우라면 피를 통해서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 같던데 너는 그런 절차가 생략된 것 같아서 말이야.
-피?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