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71)

-네가 오히려 불어넣으면 되잖아. 

영욱도 서로가 카운터펀치를 노려야 하는 상황임을 받아들였다. 뒤로 미루거나 피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대룡도 영욱의 이러한 주장이 꽤나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만일 제 힘이 부족하면 저는 죽어요. 주인님도 죽게 될 거고요.

-좋아. 피를 한 바가지 더 뽑아 줄 테니까 힘을 내서 녀석을 죽여 버려.

-좋아요.

영욱은 아까운 피 한 바가지를 자발적으로 뽑아서 대룡에게 건네주었다. 죽는 것보다는 빈혈에 시달리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약간의 응용력을 발휘한 피여서 심각한 빈혈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홀짝.

-뭐죠? 

-뭐가?

-건더기는 왜 없어요?

-적혈구와 백혈구가 왜 필요해? 네가 필요한 것은 혈장 속에 포함된 차가운 기운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왠지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잔소리 말고 녀석의 주둥이를 물어서 질식시켜 버려.

-예.

영욱은 나름 꾀를 냈다. 주로 수분으로 이루어진 혈장 성분은 소화 흡수를 통해서 빠르게 보충할 수 있지만 혈구는 골수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니 빠르게 보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차피 대룡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영욱이 순화시킨 빙결의 기운이니 혈장만 뽑아서 줘도 충분했다. 2% 부족하다는 소리는 그저 개소리일 뿐이다.

@

화르륵.

대룡이 호그질라의 코를 물어서 질식시키려고 하자 호그질라도 기다렸다는 듯이 강한 불길을 뿜어냈다.

푸아악.

대룡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바람을 세차게 뿜어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호그질라를 돌돌 말아서 조이고 있는 대룡의 압승이었다. 그렇다고 불길이 전혀 새어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 뜨거. 혓바닥 다 데었네.

-너도 혓바닥이 있었어?

-말이 그렇다는 거죠. 내가 뭐랬어요? 이 새끼가 카운터 공격을 노리고 있었던 게 맞죠?

-내가 보기에는 피 한 바가지를 얻어먹지 않았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영욱은 또 자신이 대룡에게 속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갈비뼈가 으스러지기 직전까지 조이고 있는데 호그질라가 뿜어낼 불이 강할 리가 없는 것이다. 

-매사는 불여튼튼이죠. 입심에 밀리는 순간 불고기가 될 텐데 보약을 미리 먹어두는 것은 상식이죠.

-대체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잡아먹었기에 그렇게 입담이 좋냐?

-내 새끼들이 얼추 백만 마리 이상 그 인간들에게 잡혀갔어요. 그러니까 서른 명도 채 안 되는 녀석들을 삼킨 내가 훨씬 더 손해죠.

-네가 삼킨 인간들의 영혼은 어떻게 되었어?

-몰라서 묻는 건가요?

-당연하지.

-몰라도 정말 너무 모르는군요. 걔들의 영혼이 바로 내단의 핵이 되는 겁니다. 이 무식한 주인아.

영욱은 대룡에게 속아서 피를 자발적으로 헌납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무식한 놈 취급까지 당했다. 천적이라는 호그질라를 압도하는 녀석이니 힘뿐만이 아니라 지능도 아주 뛰어나고 아는 것도 많았다. 그러니 영욱으로서는 저능아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 내단이라니?

-세 개나 삼키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그건 정수라며?

-그게 그거죠. 다만 정수가 특정 기운을 오랜 시간 더 흡수해야 내단이라고 불릴 수 있는 거지만…….

정수와 내단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게 삼켜진 자들의 영혼이 소멸 대신 택한 길이라는 사실이다. 영욱은 충격적인 사실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소멸했다는 거네?

-정수가 죽은 것 같아요?

-그런 건 아니지만 살아있는 영혼은 아니잖아.

-모든 영혼들이 꼭 인간의 영혼처럼 사는 것은 아닙니다. 불꽃도 살아있는 불꽃이 있고, 죽은 불꽃이 있는 것처럼 다들 특색에 맞게 살고 있어요. 그러니 주인님이 우려하는 소멸 같은 것은 없어요.

-네가 바로 그 영혼들이기도 하다는 소리군.

대룡의 자세한 설명에 소멸은 없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자에게 먹힌 사슴은 소멸하는 게 아니라 사자의 일부로서 다시 초원을 질주하게 된다는 소리였다.

-맞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농담도 할 수 있는 거죠.

-농담은 아닌 것 같던데? 그래, 무식한 주인이라서 미안하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무식한 법이죠. 하지만 주인님은 누구보다도 빨리 적응하고 있으니까 무식하다는 말은 정말 농담입니다. 하하!

대룡의 말은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만큼 노회하다는 소리고, 그것은 많은 영혼들을 흡수한 결과물이라는 소리기도 하다. 그런 걸 보면 삼켜진 영혼이 소멸당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 새끼 아직도 죽지 않았어?

-죽은 것 같지만 워낙 죽은 척을 잘 하는 놈이라서…….

-진짜로 죽으면 다리를 하늘로 향하게 된다고 하던데 사실이야?

-그렇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강력한 환수라면 서로 텔레파시가 가능한 거 아니었어?

-그야 녀석들이 삼킨 드림헌터의 영혼에 따라서 가능할 수도 있고, 불가능할 수도 있죠.

-그런가? 아무튼 이 녀석은 벙어리처럼 말을 걸지 않으니까 조용해서 좋군.

-그 말은 제가 시끄럽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지렁이가 원래 자웅동체인 줄은 알지만 가끔 너는 여자처럼 수다스러울 때가 있어.

-그야 당연하죠. 여자의 영혼도 있고, 남자의 영혼도 있으니까요.

-어쩐지…….

영욱은 상대해야할 여자가 넷으로 늘어난 것 같아서 잠시 흠칫했다. 물론 녀석이 기분 좋을 때는 여자 목소리를 낸다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여자의 영혼 때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니까.

-아무래도 이 녀석이 죽은 것 같은데요?

-혹시 모르니까 주둥이는 계속 꽉 물고 있어.

-뭐하시게요?

-살아있을 때 껍질을 벗겨내야지.

-무슨 차이가 있나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살아있는 상태에서 껍질을 벗기니까 가죽 상태가 더 좋은 것 같더라고. 아마도 살아있으니까 재생 작용이 왕성하게 일어나서 가죽이 더 생생한 게 아닐까 싶어.

-그럴듯한 추정이군요.

영욱은 새로 획득한 ULM을 좀 더 강력해진 화구로 녹인 다음 기계 삽의 끝부분을 코팅했다. 그리고 그것을 칼 삼아 호그질라의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꽉 잡아. 이 녀석이 움직이잖아.

-살아있는 녀석의 껍질을 벗기는데 왜 안 움직이겠어요?

-역시 죽은 척하고 있었던 거였군. 하마터면 속을 뻔했네.

-속긴 왜 속아요? 어디 주인님이 속을 인간인가요?

-잔소리 말고 다리나 감아. 그리고 주둥이나 잘 물고 있어. 너도 죽기는 싫을 테니까.

-알고 있어요.

영욱은 호그질라의 항문에서 출발해서 비교적 가죽이 약한 배 부분을 일직선으로 잘라나갔다. 어마어마한 속도록 재생이 이루어졌지만 영욱은 더 빨랐다. 

잔상수족을 총동원해서 다시 붙으려고 하는 가죽의 절단면을 넓게 벌리니 호그질라가 죽은 척하기를 포기하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영욱은 박피 작업을 계속해 나갔다. 이 괴물 녀석들에게서 챙길 수 있는 것은 피와 가죽뿐이었다. 다른 내단이나 불의 정수도 있겠지만 그게 사람의 영혼이 쪼그라들어서 만들어진 것이라니 썩 내키지 않았다.

껍질을 제외한 부분은 모두 대룡의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러니 영욱은 박피하는 부분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모아서 입으로 삼켰다. 

-더럽게 넓네.

열심히 소화 흡수 작업을 하는 한편 부지런히 껍질을 벗겨나갔다.

*좁고 깊음의 위험성

영욱의 박피 작업이 끝난 즈음 견디다 못한 호그질라의 숨이 끊어졌다. 그러자 대룡이 거대한 녀석을 한 입에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 주변에 팽개쳐놓은 내장들도 깨끗하게 삼켜버렸다.

영욱은 포크의 소환을 잠시 해제하고는 몸으로 기계체조를 시전하면서 활인심방의 구결을 외웠다. 앉은 상태로 활인심방을 돌려도 되지만 지금처럼 과식한 경우에는 몸을 슬슬 움직여 주는 것이 기운을 머릿속으로 이동시키는 데 오히려 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소모된 영욱의 정신력은 휴식을 취하면 다시 채워지겠지만 남의 것을 소화 흡수해서 사용하는 기운들은 그렇지도 않았다. 마치 현금처럼 소모하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지금처럼 사냥을 통해서 소모한 것보다 더 많이 흡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이 솟아나는 정신력의 샘물 역시 재료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뇌세포의 활동 결과인 셈이니 산소와 포도당은 물론이고 많은 량의 독서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는 것 따위의 영양분들이 필요했다.

2QB 세상 역시 그냥 생겨나는 것은 없다는 게 또 하나의 진리인 셈이다. 뭐든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고, 대가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영욱이 소모했던 기운들이 전부 소멸된 것은 아니다. 영욱의 내부에 있던 기운들이 영욱의 몸 밖으로 나갔을 뿐이지 그 총량은 변하지 않았다. 에너지 총량 불변의 원칙이 이곳에서도 적용되는 셈이다.

영욱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활인심방의 구결을 외우고 기계체조의 동작을 취하는 것은 이미 자신의 기운이었던 녀석들을 다시 취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영욱의 머릿속에서 머문 적이 있었던 기운들은 호흡으로 흡수만 해도 자신들이 알아서 머릿속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게 자신들이 머물러야할 곳인 줄 아는 듯했다.

-좋아. 아주 좋았어.

영욱은 자신도 모르게 쾌재를 불렀다. 소모한 기운들을 모두 수거할 수는 없었지만 상당량의 기운이 자발적으로 머릿속으로 되돌아오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만일 전투 중에도 이러한 것이 가능하다면 훨씬 더 긴 시간을 싸울 수 있고, 좀 더 폭발적인 힘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작은 깨달음을 얻는 순간 영욱은 자신의 몸에서 전기가 찌르르 흐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하! 이제는 별 것도 아닌 걸로 기계체조의 경지가 올라가는군. 좋았어.

시야를 몸속에서 바깥으로 넓힌 것이 사소한 깨달음일 리는 없다. 그러니 영욱이 스스로 만든 기계체조와 활인심방의 한계가 깨어지면서 한 단계씩의 벽을 허물고 나아갈 수 있었다.

그래봐야 아직도 자신의 정확한 경지를 알 길은 없다. 옛 사부는 10퍼센트의 경지에만 이르러도 자신의 경지를 알 수 있다고 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욱은 그런 숫자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 숫자가 늘어날 때마다 즐거워해주는 사부가 없으니 굳이 숫자를 들먹일 이유도 없고, 자신을 숫자 속에 가둬둘 이유도 전혀 없었다.

사실 호그질라의 항문에 기계 삽을 꽂은 채로 매달려 있으려고 애를 쓰는 동안 잔상무 초식의 진전도 어느 정도 있었다. 

마치 암벽타기처럼 손과 발을 이용해서 거꾸로 매달리고 기어 오르다보니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잔상무의 동작에 숙달된 것이다. 그것은 경지가 한꺼번에 서너 단계 이상 오른 것보다도 더한 경사였다.

영욱은 몸으로 잔상수족부터 잔상무까지의 심화 동작들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는 잔상무의 동작이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긴 했지만 그래도 흉내조차 내지 못하던 것과 비교하면 괄목상대刮目相對하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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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의 동작을 유심히 바라보던 대룡이 입을 열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으로 보아 영욱의 전투력이 기대 이상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제가 보기엔 그냥 맨손체조를 하는 것 같은데 기계체조라니요? 그보다 춤에 더 가까운 거 아닌가요?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건가요?

-기계란 어차피 인간이나 곤충의 동작과 구조를 모방해서 만들어 진 것이야. 그러니까 기계체조의 경지가 어느 정도 올라가면 부드러워져서 맨손체조처럼 보이는 거지.

-하지만 기계체조는 평행봉이나 도마를 이용해서 하는 체조를 말하는 게 아닌가요?

영욱의 주장에 대룡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그로서는 이미 기계체조가 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서 더 혼란스러운 듯했다.

-맞아. 그리고 기계를 타고서 하는 체조이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굳이 도마를 이용해서 점프력을 더해야할 이유가 없잖아. 그러니 맨손체조와 기계체조의 차이가 있을 리 없지.

-제법 그럴 듯한 설명이군요. 내 주인이 다른 드림헌터들처럼 무식한 놈이 아니라는 게 정말 다행이에요.

-내가 아는 드림헌터들 중에는 대학교수들도 여럿 있던데 무식하다는 말이 왜 나와?

영욱은 이 기회에 대룡이 말끝마다 무식이라는 단어를 달고 사는 이유를 알아보고 싶었다. 정신력이 강해야 하니 무식한 것보다는 아무래도 유식한 게 더 낫겠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게 심했기 때문이다.

-교수라는 직함은 그 전공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고,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의미지 인간 자체가 유식하다는 것은 아니죠.

-그야 그럴 수밖에 없지.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모든 부분을 다 파고들어갈 시간이 없으니까. 몇몇 천재들을 제외하고는 그야말로 허덕거리다가 조금 알 만하면 벌써 죽을 때가 임박해 있지.

-그게 바로 현대 사회의 함정입니다. 넓게 보지도 못하는 인간이 깊이 파고 들어가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르고 박사 학위를 남발하지요.

-멋진 지적이군. 특히 네 입에서 현대 사회에 관한 문제점을 듣게 되다니 내 귀가 아주 즐거워.

-즐겁다니 다행입니다만 자신의 연구 결과가 인간과 세상 전체에 얼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지도 모르고 무작정 파고들기만 하는 인간들이 바로 악성종양과도 같은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영욱은 환수 대룡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잔상무 초식을 집중적으로 반복하는 중인데 이런 이야기가 오히려 집중에 도움이 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영양가 있는 이야기였다. 

-그게 핵무기를 말하는 거라면 나도 동의할 수 있어.

-그뿐만이 아니죠. 박사가 꼭 물리학 분야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이 다 그렇다는 소린가?

-당연하죠.

-기자 출신의 드림헌터라도 삼킨 거야?

-예. 둘이나 삼켰습니다만 그 두 녀석의 의견은 아닙니다. 100% 제 의견도 아니지만…….

이런 녀석의 산수 실력을 엉터리라고 평가했으니 사기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욱은 자신이 당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자를 둘이나 삼켰다는데 어떻게 당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호그질라 녀석은 다 소화시킨 거야?

-녀석의 내단만 빼고는 대충 다 처리했어요.

-몇 개나 되는데?

-화정이 무려 열 개나 되네요.

-그렇게 많아?

삼킨 드림헌터의 영혼들을 내단의 핵으로 삼아서 불의 기운을 흡수했을 것이다. 어쩌면 화산분화구에라도 뛰어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렇게 많을 수밖에.

-그러니까 그렇게 강한 불길을 뿜어낼 수 있었던 거겠죠.

-그런 이야기를 왜 하는 거야? 나는 가죽만 챙겨도 충분하다니까.

호그질라의 가죽 역시 다 벗기고 나니 보통 크기의 가죽으로 줄어들어서 충분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도 더 이상의 화정을 삼키는 것은 부담스럽기 때문에 하는 소리였다.

-이제 와서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겠지만 주인님께서 소화시키는 게 좋을 듯합니다.

-열 개는 나도 무리야. 게다가 빙정도 없잖아.

-빙정은 제가 두 개까지는 지원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토정 한 개와 빙정 두 개와 화정 다섯 개를 넘겨줘. 더는 무릴 것 같아.

영욱은 빙정 두 개를 준다는 소리에 어쩔 수 없이 화정 다섯 개를 떠맡기로 했다. 무리일 수도 있지만 고통이 따르더라도 강해질 수 있을 때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저도 무리니까 일단 주인님께서 보유하고 있는 게 좋을 겁니다.

-하지만 토정 하나로는 무릴 것 같은데?

-토정도 두 개를 드리겠습니다.

-좋아. 내가 한 번 겪어보기로 하지.

-여기 있습니다.

꿀꺽.

영욱은 열 개의 화정과 두 개의 빙정 그리고 두 개의 토정을 건네받고는 주저하지도 않고 삼켜버렸다.

-목구멍이 화끈거리는군.

-그나마 불에 대한 내성이 있어서 그 정도일 겁니다.

호그질라의 몸에서 나온 내단이나 정수가 겨우 화정 열 개뿐 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대룡의 몸속에도 상당수의 내단이나 정수가 존재하는 게 분명했다. 대룡도 버거운 상황이니까 넘기려 하는 것이다.

단어가 가지는 의미와는 달리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숫자가 많아진다면 위력은 점점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영욱은 화정과 빙정들을 적당한 혈관 근처에 위치시키고 토정의 기운으로 고정시켰다. 원칙적으로는 동맥에다 빙정을 부착시키고 정맥에다 화정을 부착시키는 것이 옳지만 화정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이다 보니 편법을 사용해서 양손과 양발로 나가는 동맥에도 화정을 위치시켰다.

외부로 발산되는 열 손실을 줄이는 것도 좋지만 손발이 너무 차지면 아무래도 작업이나 전투의 감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정의 과다로 인해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서라도 체온을 발산할 필요도 있었다.

화정으로 인해서 손발이 따뜻해지자 좀 더 부드러운 동작이 가능해졌다. 운동 전에 몸을 데우는 워밍업이 필요한 이유도 부상을 막고 좀 더 부드러운 동작을 하기 위함이다. 여름철에 부상이 적다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이다.

-느낌이 괜찮은데…….

영욱은 화정의 위치를 어깨와 고관절 부위로 옮겨서 팔과 다리 전체가 따뜻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허리 부위로 들어가는 동맥에도 화정을 위치시켰다. 결과론적으로 팔다리와 허리가 따뜻해져서 훨씬 더 부드러운 잔상무를 시전할 수 있었다. 

화정에서 새어나오는 온도 조절은 토정으로 감싸서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했다. 열기가 완전히 새어나오지 않게 하려면 하나의 화정에 하나의 토정이 필요하겠지만 적당히 온기가 새어나오게 하려면 하나의 토정으로 여러 개의 화정을 덧바를 수 있었다.

-갑자기 동작이 더 부드러워졌어요. 어떻게 된 일이죠?

-알면서 뭘 묻고 그래?

-굳이 흡수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요?

-화정들이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아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굳이 소멸시킬 이유가 없잖아?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든 거죠?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공존 내지는 공생이라는 개념이 대룡으로서는 의외로 어려운 듯했다. 그것은 자신이 삼킨 드림헌터들의 영혼을 개별적인 존재로는 전혀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였다.

-인간의 몸에서 살아가는 다른 생명들도 많아. 장 내부의 대장균과 유산균들도 있고, 피부에는 때를 갉아먹는 효모균들도 잔뜩 코팅되어 있지.

-숫자를 조절하고 통제할 수만 있다면 굳이 소멸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요?

-맞아. 숫자 조절은 물론이고 그 힘을 조절할 수도 있어야겠지. 그게 실패하는 순간 곧바로 주객이 뒤바뀌겠지만 말이야. 바로 너 같은 존재처럼.

-저는 그냥 노예니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노예가 매번 피를 요구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영욱은 자신의 예상보다는 훨씬 더 간단하게 다섯 개의 화정들을 제어하게 되자 다시 대룡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대룡으로서는 이러한 영욱의 특이한 발상을 아직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한 듯했다. 

-그게 싸움에도 도움이 되니까 그런 거죠.

-그래도 누가 노옌지 헷갈리게 하지 마.

-서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요? 제 피는 얼마든지 빠셔도 됩니다.

-진액은?

-먹기 거북할 텐데 또 드시려고요?

-뭐든지 처음이 힘든 거야. 그리고 몸에 아주 좋다는 것을 체험했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강해지기 위해서는 주지 않을 수도 없으니 서로가 서로의 피를 노리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영욱이 노리는 것은 대룡의 피가 아니라 진액이지만 어차피 그게 그거다.

-몸에 좋다니요? 어디에 특히 좋던가요?

-네가 그걸 몰라?

-예. 제 지식에는 없습니다.

-듣기로는 해열작용과 이뇨작용 그리고 구충작용과 해독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중에서 특히 이뇨작용의 도움을 받았지.

-그래서 오줌을 줄줄 흘리셨군요.

-그 많은 피를 마셨는데 먹은 게 몸 안에 다 남아있으면 어떡해? 누구 배 터져 죽는 거 보고 싶어?

이뇨작용이 별 거는 아니지만 대량으로 피를 삼켜야 하는 영욱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진액의 효용이 그런 것만 있을 리는 없다. 지렁이 진액의 효과를 농담 삼아 말한 것뿐이다.

-얼마든지 드십시오. 주인님이 강해질수록 제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니까요.

-너도 강해질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겠지. 솔직히 말해서 똑같이 싸우고도 네가 챙기는 게 더 많잖아.

-그야 제 덩치가 워낙 커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노예를 먹여 살리는 것이야말로 주인의 가장 큰 의무잖아요.

-노예를 굶겨 죽이는 주인도 많아. 아니면 잡아먹거나.

-사, 살려주십시오. 앞으로 제 밥은 제가 챙겨먹도록 하겠습니다.

두려워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영욱이 모처럼 주인 행세를 하려고 하니 대충이라도 맞추어주는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얼른 진액 줘.

-여기 있습니다.

꿀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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