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눈앞의 몇 골드보다 전투력 강화가 훨씬 더 중요해. 어설픈 늑대가죽이지만 내 노예들의 방어력을 조금이라도 더 올려줄 테니까 말이야. 그래도 환수라서 나쁘지는 않을 것 같지 않아?
노예들에게 선심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가격을 올리려는 얄팍한 수작일 뿐이었다. 노예들에게 선심을 쓰게 되더라도 1억은 꼭 받을 생각이었다. 1골드를 준다는 데도 팔지 않은 것이니 1억을 받더라도 선심을 쓰는 것이 될 것이다.
-팔지 마. 누가 뭐래? 하지만 네 노예들과 네가 걸칠 수 있는 한계가 금방 올 테니까 그 시세 이하의 가격으로도 처분하길 원할 때가 분명히 오고 말거야.
-그럼 그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지 뭐.
-대체 얼마를 받겠다는 거야?
-2골드는 받아야겠지.
-터무니없는 요구야.
-싫으면 사지 마.
-좋아. 그럼 2골드를 줄 테니까 한 장만 넘겨.
영욱이 너무나도 강경하게 나가자 결국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하지만 화리는 전혀 뜻밖의 거래를 요구했다.
-터무니없는 가격이라며?
-그래도 나는 한 장 사서 걸쳐야겠어. 이곳은 너무 추워서 말이야.
-별로 추운 날씨도 아닌데 괜히 엄살을 부리고 난리야? 그리고 옷을 그렇게 야하게 입으니까 그런 거잖아.
-남의 패션이야 상관할 거 없잖아. 안 그래?
화리의 옷차림 역시 눈에 띄게 화려해지고 노출되는 부분이 많아졌다. 그녀 역시 미모에는 자신이 있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추위에 시달리는 듯했다.
-좋아. 2골드 줘.
-제일 허접한 것 말고 다 보여줘. 좀 나은 걸로 고르게.
-그게 그거야. 마음대로 골라.
일단 마패와 비슷한 1골드 두 개를 받은 영욱은 석 장의 늑대 가죽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그런데 왜 석 장 뿐이야?
-나머지 두 장은 우두머리 녀석들의 것이라서 그 가격에는 안 팔아.
-정말이야? 설마 우두머리 늑대 한 쌍의 가죽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네.
-너 왜 그렇게 눈을 크게 떠?
화리의 표정 변화가 눈에 띨 정도로 컸기도 하지만 영욱은 제 3의 눈까지 동원해서 화리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중요한 내용이 있다는 사실을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몰라서 물어? 현실 세계와 2QB 세상에서 잡은 같은 존재의 두 가죽이 합쳐지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가 생긴다는 걸 몰라?
-몰라. 알았다면 팔았을 리도 없을 거고.
-3골드씩 쳐줄 테니까 둘 다 넘겨.
-좋아. 까짓것 또 잡으면 되겠지.
화리는 늑대 가죽 석 장을 모두 돌려주며 우두머리 암수의 가죽만을 원했다. 영욱도 화리가 말하는 내용을 대충 알 것 같지만 3골드라는 소리에 벌써 눈이 뒤집어져버렸다.
겨우 늑대 환수 가죽 두 장에 무려 6억을 벌게 되는 것이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노예들의 전력 강화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화리는 얼른 암행어사의 마패와 비슷한 크기의 골드를 하나 더 건네주었다.
-왜 1골드만 주는 거야?
-새겨진 숫자를 봐. 아라비아 숫자도 못 읽어?
영욱이 살펴보니 크기도 똑같고 무게도 똑같은데 숫자만 4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게 4골드짜리라고? 그냥 1골드짜리로 네 개 줘.
-촌놈 같으니라고……. 옜다.
크기는 똑같은데 이번에는 1이라는 숫자가 새겨진 골드 네 개를 건네주었다. 영욱은 처음으로 번 6골드를 만지며 희희낙락했다. 6억이면 장가갈 밑천은 마련한 셈이었다. 신부가 진소희만 아니라면 충분한 금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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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인데 너도 가죽 필요해?
-예. 선배님. 하지만…….
-외상으로 달아두지 뭐.
-고맙습니다. 선배님.
영욱은 판매가 불발된 늑대 가죽 세 장을 박상태와 노예들에게 강매하다시피 했다. 당장 지불할 돈은 없으니 나중에 벌어서 갚으라고 했다.
내키지는 않지만 더 이상 주인의 눈 밖에 날 수는 없으니 다들 눈물을 머금고 늑대 가죽 한 장씩을 받아들었다. 시세가 그렇다지만 사실 자신들도 사냥에 힘을 보탰으니 1억을 내놓으라는 요구는 지나친 요구였다.
-뭐해? 걸치지 않고?
-예. 선배님.
영욱이 다그치자 노예들은 어쩔 수 없이 네 다리의 끝부분 좁은 곳만 잘라내고 그 가죽을 통째로 걸쳐 입었다. 사냥한 늑대들의 크기가 인간보다도 커서 별다른 가공 절차 없이 외투삼아 입어도 충분했다.
그것은 영욱이 늑대들의 가죽 벗기기가 귀찮아서 앞다리와 뒷다리 부분에는 칼집을 내지 않고 그냥 양말을 뒤집어 벗기는 것처럼 통째로 벗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마워할 필요까지야 있나. 너희들이 잡은 것이니까 당연히 몫을 나눠야지.
영욱은 가죽 값으로 1억씩을 요구하면서도 뻔뻔스럽게 굴었다. 그것은 비록 거래가 불발되기는 했지만 2억짜리라서 1억씩이나 깎아주었다는 의미였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앞으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가 되도록 하자.
-예. 선배님.
도움이 되지 않으면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리겠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박상태를 포함한 세 노예들은 갑작스럽게 변해버린 주인의 성격과 횡포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사람의 뒤끝이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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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이 여섯 개의 골드로 저글링을 하며 즐거워하자 진소희와 은영이 다시 다가왔다.
-우리들의 몫은 왜 안 나눠주는 거죠?
-그야 내 부하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 늑대들은 함께 잡았잖아요.
-다음에 잡으면 줄게. 주고 싶어도 나눠줄 가죽이 없어.
-그럼 골드로 주세요.
-옜다. 먹고 떨어져라. 공평하게 반으로 나눠.
사실 진소희의 블라인드 초능력이 늑대 사냥에 큰 도움이 되었으니 몫을 나눠주지 않을 수도 없었다.
-겨우 1골드가 뭐예요?
-늑대가죽 한 장의 시세가 1골드니까 당연한 거 아냐? 설마 두 마리를 잡았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한 마리에 3골드에 파는 걸 봤는데 이건 너무하잖아요.
-그건 내가 잡은 우두머리 늑대의 가죽이야. 그것도 현실에서의 가죽 판매와 관련되어서 받은 특별한 가격이야. 욕심 부릴 걸 부려야지.
-그래도 2골드씩 주세요. 그래야 공평하잖아요.
진소희는 골드에 대해서 무서운 집착을 보였다.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킨 바 있는 영욱은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좋아.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 될 거야.
-오빠, 난 1골드만 할래.
-그래?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앞으로 같이 사냥할 일은 없을 거야. 숨긴 힘을 다 드러낸다고 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말이야.
은영이 애교를 떨어보았지만 오히려 영욱의 타박만 듣게 되었다. 2골드를 빼앗아 가는 년이나 1골드를 빼앗아 가는 년이나 영욱의 입장에서는 다를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욱의 타박에 은영의 표정이 돌변하고 말았다. 항상 헤실헤실 웃고는 있지만 배알이 전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항변이라도 하는 듯했다.
-아직까지는 그렇게까지 큰소리 칠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내가 그렇게 약하게 보여?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숨겨둔 실력이 있어서 나보다 강하다고 치자. 하지만 가진 실력을 끝까지 꼭꼭 숨겨놓고 있을 텐데 무슨 도움이 되겠어?
-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실력을 숨기지는 않을 거 아냐?
-그 놀라운 실력을 달아나는 데에나 사용하겠지.
여태까지 두 번이나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보지 않아도 비디오였고, 듣지 않아도 오디오였다.
아직까지는 목숨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도망치는 능력 하나는 발군인 듯했다. 그리고 매혹 초능력으로 쫓아오는 환수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오빠를 버려두고 달아날 일은 없어.
-과연 그럴까?
-맹세할 수도 있어.
-앞으로 얼마나 강한 드림헌터와 환수 들이 꼬이게 될지를 모르니까 하는 소리겠지?
-오빠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일이 벌어지겠어? 오빠가 주인공이라도 된다는 상상이라면 꿈 깨.
-요즘 같아서는 세상을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말이야.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돼.
-만일 내가 오빠를 버려두고 달아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오빠를 깨끗하게 포기할게.
-소희 너는?
-저도요.
-대답 한 번 간단하군.
-길게 대답할 가치도 없으니까요.
영욱은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환수들의 도발을 유도하는데 재주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재주가 아니라 재수가 없는 것이 될 확률이 높겠지만.
아무튼 두 여자는 흥분해서 지키기 어려운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영욱이 달아나는 방향으로 무조건 함께 달아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호그질라
-출발!
대충이나마 거래와 정산이 끝나자 일행은 다시 길을 떠났다.
2QB 세상이라서 밤이라도 그리 어둡지는 않지만 가리산을 넘어서 등골산 정상 부근까지 가야 하니 서둘러야만 했다. 물론 산이 워낙 크다 보니 오늘 안에 도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리산의 초입부터 길이 끊길 정도로 잡초와 잡목들이 무성했다. 말로만 듣던 가리산과는 사뭇 다른 것 같지만 그렇다고 강원도 횡단 여행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박상태!
-예. 선배님.
-네가 거인으로 변해서 길을 뚫어.
-예. 선배님.
박상태는 키가 10미터에 이르는 거인으로 변한 다음 자신의 키와 비슷한 거대한 낫을 소환해서는 길을 막고 있는 풀과 나무를 베어내며 길을 뚫기 시작했다. 이른바 사신의 낫으로 불리는 낫이었다.
기척을 내지 않고 이동하려면 그럴 이유가 전혀 없지만 이제는 미끼 노릇을 해야 하니 굳이 기척을 감추어야할 까닭이 없었다.
슥. 슥. 우지직. 뚝.
박상태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낫을 빠르게 놀려서 풀을 베고 키 작은 관목을 밟아서 부러뜨리며 길을 열었다. 영욱이 포크를 타고 따라오기 좋도록 상당히 넓은 길을 내야만 했다. 그러니 쉽지 않은 일이 분명했다.
하지만 시골 출신이라서 그런지 낫질 실력이 상당해서 예초기로 베는 것보다 빠르고 정확했다.
-그게 네 무기로 잘 어울린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앞으로는 사신이라고 불러야겠어. 하하하!
-하하하!
영욱은 오늘 안에 가리산을 넘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포크를 타고서 이동하며 요란한 소리를 내서 주위의 시선을 끄는 것이었다. 그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사냥하기 위함인데 피라미는 쫓아버리고, 월척만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어지간한 녀석들은 거대화된 상태의 낫질과 포크가 내는 진동과 굉음에 놀라서 달아났지만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거나 실제로 강력한 힘을 가진 환수들도 존재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환수들은 바로 멧돼지 환수 떼였다. 이미 현실 세상에서도 조우한 적이 있었던 바로 그 녀석들이었다. 그리고 영욱으로서도 이 녀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숫자도 많고 덩치도 아주 컸다. 코끼리를 능가하는 덩치였으니 적어도 20톤은 족히 되는 듯했다.
쿵쿵쿵쿵.
이 녀석들은 달리 말을 할 필요로 느끼지 않는 듯했다. 텔레파시를 사용할 줄 아는 환수는 아직 없다는 소리였다. 거의 일백 마리에 이르는 멧돼지들이 진형을 갖추어서 영욱 일행을 짓밟으려고 짓쳐들었다.
-너, 오늘 잘 걸렸다.
영욱은 멧돼지들 중에서 거의 30톤은 될 것 같은 수컷 멧돼지를 보면서 반색했다. 만만하게 보여서가 아니라 두 세계에서 녀석의 피와 고기를 취할 수 있다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가 있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녀석의 덩치가 놀라울 정도로 거대했지만 영욱에게도 포크가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보통의 포크가 아니었다. 기계체조의 경지도 올랐지만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강한 ULM으로 부분적이나마 도금을 했으니 공격력의 수직 상승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욱은 잔상수족의 초식으로 거대한 로봇처럼 변하더니 이제는 상당히 익숙해진 잔상권과 잔상각을 동원해서 달려드는 수컷 멧돼지를 오히려 공격하기 시작했다.
-잔상권! 잔상각!
마음속으로 새로운 구결과 귀걸이 아이템을 느끼면서 증폭 주문을 동시에 외우고, 입으로는 공격 초식을 큰소리로 외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쾅! 우지직.
둘이 정면으로 부딪치는가 싶었는데 실제로 부딪친 것은 아니었다.
포크가 살짝 피하면서 자세를 낮추더니 멧돼지의 다리를 돌려차기로 훑어버렸다. 멧돼지의 다리와 포크의 잔상각이 부딪치는 소리가 굉음을 내더니 결국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꿀?
등이 땅바닥으로 향하도록 뒤집어져 널브러진 수컷 멧돼지는 부러진 자신의 앞다리를 올려다보면서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코끼리 다리를 능가하고 강철의 강도를 뛰어넘는 그의 다리가 이렇게 맥없이 부러져나갈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죽은 돼지처럼 네 다리를 하늘로 향해 누운 채로 움쩍달싹할 수도 없었다.
물론 영욱으로서도 엄청난 충돌의 여파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대룡마저도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ULM로 단단히 코팅한 기계 삽이었지만 충돌의 충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물론 기계 삽이 부러지거나 크게 망가지지는 않았지만 부딪치지도 않은 포크의 차체에서도 찌그러진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을 자체 복구하느라고 상당한 정신력의 소모가 발생했다.
물론 영욱은 지금 게걸스럽게 멧돼지의 피를 빨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는 피 빨기에 아주 능해져서 먹은 피의 양와 거의 비슷한 양의 오줌을 동시에 배출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물론 그 많은 오줌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도록 배설하자마자 염동력을 동원해서 땅속으로 버려졌다. 몸에 묻지 않게 하려면 정교함을 요하는 작업이지만 그 정도는 이미 달인의 경지에 이른 영욱이었다.
현실 세상에서의 복수를 자신의 본무대인 2QB 세상에서 하고자 했던 수컷 멧돼지는 살아있는 채로 피를 빨리고, 껍질이 벗겨졌다.
힘이 천하장사라는 수컷멧돼지 환수도 등을 땅바닥에 대고 있는 자세에서는 그저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영욱은 멧돼지의 마운트를 잘 점한 상태에서 자신이 필요한 것을 모두 챙길 수 있었다. 등심과 안심은 물론이고 갈빗살까지도 챙겼다. 해체하고 남은 부분이야 뒤를 따르는 대룡의 입가심거리가 될 것이다.
우두머리 수컷 멧돼지가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알몸이 되자 다른 멧돼지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무려 일백 마리가 넘는다는 생각 때문인지 지금이라도 달아나야 한다는 판단은 하지도 않았다.
퍽. 꾸엑.
영욱은 닥치는 대로 멧돼지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는 뒤집어 버렸다. 그리고 정신없이 피를 빨고 가죽을 취했다. 2QB 세상이 정글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으로서는 영욱의 세상이었다.
수십 마리의 멧돼지들이 영욱을 향해 돌진했지만 그들이 포크의 다리라고 생각하고서 들이받은 것은 그저 잔상일 뿐이었다.
마치 투우사의 망토처럼 들이받았다고 생각한 순간 포크의 다리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10미터 높이에서 강하게 내리꽂히며 멧돼지들의 허리를 작신 분질러 놓았다.
뚱뚱해서 찾기도 힘든 허리를 어떻게 찾은 것인지 밟았다하면 요추 3번과 4번 사이를 으스러뜨려서 하반신을 전혀 쓰지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물론 환수들이니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는 상처겠지만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다. 포크가 아주 능숙한 솜씨로 뒤집어 놓고는 피를 뽑고 가죽을 벗겨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아있어도 산 게 아니었다.
-잔상지수! 잔상수족!
영욱은 잔상지수가 세 개가 되도록 빠른 속도로 멧돼지들의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잔상의 다리 두 개까지 포함하면 무려 다섯 개의 잔상이 생겨난 셈이다. 하지만 영욱은 그러한 성취를 의식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은영과 진소희도 숨겨둔 실력을 드러내서 놀라운 속도로 멧돼지들을 제압하고는 껍질을 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화리 일행들 역시 숙련된 사냥 팀답게 놀라운 솜씨로 멧돼지를 처리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영욱은 한 마리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박상태를 위시하여 김호진과 윤승언도 모처럼만에 밥값을 하고 있었다. 박상태는 멧돼지 한 마리를 겨우 처리하는 정도였지만 나머지 두 녀석도 서로 협력해서 멧돼지 한 마리를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은 되었다.
그러니 영욱의 일행 전체가 처리하는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얼핏 보아도 세 노예들의 몸놀림이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에 늑대 가죽 한 장 걸친 것뿐인데 정신적으로는 꽤나 큰 위안이 되는지 멧돼지들의 엄니를 두려워하지도 않고 적극적인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1억이라는 돈이 크기는 크군. 당장 돈값을 하는 걸 보니 말이야.
영욱이 말을 걸어보았지만 대답하는 노예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싸움에 몰입해 있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멧돼지 무리에서 호그질라 수준에 이르는 녀석은 영욱이 처리한 수컷 멧돼지뿐이었다. 그래서 일행들의 사냥은 이삭줍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행들의 착각일 뿐이었다.
꾸르르르.
잠시 후 지축이 흔들리는 포효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체고가 10미터에 이르고 체장이 15미터가 넘는 거대한 호그질라를 닮은 멧돼지 환수가 나타났다. 이게 진짜였다.
엄니의 길이만 해도 무려 5미터가 넘는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몹시 분노한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도 영욱 일행이 처리한 멧돼지들의 왕이라도 되는 듯했다. 영욱은 자신과 대룡이 노리던 기회가 왔음을 깨달았다.
-대룡 소환!
-맙소사! 이 대목에서 저를 부르면 어쩌자는 겁니까? 주인님.
호그질라를 본 대룡은 얼른 땅을 파고 들어가며 오히려 영욱을 질책했다. 그것은 둘이 달려들어서 이길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더 상회한다는 소리였다.
한편으로는 대룡이 영욱의 곁으로 소환되는 모습을 본 영욱의 일행도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것은 영욱이 대룡을 잡았다는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대룡마저도 땅으로 숨게 만드는 호그질라가 자신들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특히 다시는 영욱을 두고 달아나지 않기로 약속한 진소희와 은영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뭐야? 너도 저 녀석을 못 이겨?
-멧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 지렁이인 거 몰라요?
-알아. 하지만 덩치의 크기가 천적의 개념을 뒤집는다는 것도 알아.
-저 녀석의 본래 크기는 저보다 서너 배는 더 커요.
-맙소사! 그럼 저 녀석이 바로 변신이 가능한 환수란 말이냐?
영욱도 이제야 겨우 분위기를 파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존심 강한 대룡이 꼬리를 말 리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예. 우리가 오히려 녀석의 트릭에 딱 걸려든 거예요.
-뭐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지 않고?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요.
-너는 본래부터 다리가 없거든. 하나도 웃기지 않으니까 얼른 도망이나 가.
-도망쳐봐야 녀석을 따돌릴 수는 없어요.
대룡은 호그질라의 기세에 눌려서 절망적으로 외쳤다. 영욱도 공포스럽기는 마찬가지지만 다리가 풀리지는 않았다. 사실 포크를 조종하는 데에는 다리가 필요하지 않으니 풀려도 큰 상관은 없었다.
-땅속으로 깊이 도망가면 되잖아.
-그래봐야 금방 파고 들어와요.
-먹힐 땐 먹히더라도 싸워보기는 해. 너는 토룡도 아니고 대룡이잖아. 그리고 저 녀석이 네가 두려워하는 불의 초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아닐 텐데 뭐가 문제야?
-불의 초능력을 사용하는 게 맞아요.
영욱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니 대룡이 이렇게 맥없이 구는 것이다.
-그, 그래? 하지만 이제는 너에게도 빙결의 초능력이 있잖아.
-겨우 피 한 방울에 무슨 초능력씩이나 생겨요?
-한 방울이 아니라 무려 한 바가지였어.
-저에게는 겨우 한 방울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어쩌자고?
-한 바가지만 더 주시면 혹시 견뎌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결국 영욱의 피를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대룡의 엄살과는 달리 호그질라도 대룡의 기세를 느끼고는 선뜻 달려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대룡은 그 틈을 이용해서 영욱의 피 같은 피를 빼앗으려는 분명했다.
영욱은 대룡의 집요함에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녀석을 달래지 못하면 자신이 당해야 하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처하고 말았다.
-지금 이 험악한 싸움을 앞두고서 내 피를 달라고? 이제 보니까 처음부터 내 피를 노린 거였잖아.
-싸워도 제가 싸웁니다. 어차피 주인님의 얄팍한 공격력으로는 녀석의 두꺼운 가죽과 지방을 뚫지 못합니다. 안타깝지만 녀석을 옭아맬 수 있는 크기의 올가미는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그럼 도망가면 되지. 너는 여기에 있어.
영욱은 달아나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대룡에게 피를 내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한 번 내주기 시작하면 지금이 문제가 아니라 다음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러니 절대로 내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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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뭣들 해? 달아나! 어서!
영욱은 자신이 사냥했던 멧돼지 가죽들을 얼른 챙겨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서른 장이 넘다보니 부피가 제법 되었지만 틈틈이 포크의 운전석 빈 공간과 자신이 입고 있는 토룡 가죽들 사이에 쟁여 넣어둔 덕분에 챙기는 데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리고 죽은 멧돼지 환수의 가죽은 보통 멧돼지의 크기로 줄어들기 때문에 그리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흩어져서 달아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도망은 산개散開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일부는 죽더라도 일행 전체의 희생을 조금이나마 줄이자는 취지였다. 다시 합류하는 장소를 굳이 말하지는 않았지만 살아남으면 등골산 정상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진소희와 은영은 영욱의 눈치를 보더니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길만이 생존 확률을 높이는 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영욱과의 약속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영욱은 호그질라가 대룡 때문에라도 자신들을 쫓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일행들 중에서도 특히 자신만을 노리고 맹렬하게 추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뭐야? 또 나야?
멧돼지들을 학살하고 가죽을 가장 많이 챙겼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어쩌면 대룡을 부담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대룡 소환!
-왜 자꾸 절 부르시는 겁니까?
-싸워. 날 위해서 싸우란 말이다.
-겨우 피 한 방울을 아끼는 주인을 위해서 말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대룡은 영욱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도주를 방해하기조차 했다. 그러니 아무리 잔상수족과 잔상각을 동원해도 달아나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영욱은 어쩔 수 없이 피를 뽑아주기로 했다.
-좋아. 피를 줄 테니까 어서 싸워.
-피부터 주십시오.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서 준다니까.
-제가 녀석을 잠시나마 막고 있을 테니까 어서 뽑아요. 어서!
-젠장!
결국은 영욱은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피를 또 한 바가지나 뽑아야 했다. 대룡의 산수 실력은 형편없지만 잔머리는 수준 이상이었다. 영욱은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도시락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홀짝.
-이제야 힘이 좀 나는군요. 피가 아주 좋습니다. 주인님.
-잔소리 말고 싸워.
-저도 싸울 테니까 주인님도 힘을 좀 보태주세요. 갑니다.
-좋아.
퐁. 우지직.
대룡이 땅속에서 빠르게 솟아오르며 호그질라의 배를 공격했다. 하지만 호그질라는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몸의 크기를 세 배 이상 키우더니 가볍게 피하면서 오히려 대룡의 몸통을 물고 늘어졌다.
호그질라의 변신 전과 후는 크기와 힘과 움직이는 속도의 차원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룡의 크기도 워낙 커서 대룡을 문 호그질라도 하늘 높이 솟구쳤다.
본래의 모습으로 변신한 호그질라도 대단하긴 했지만 대룡이 더 대단했다. 자신을 물고 있는 호그질라 녀석을 달고도 무려 50미터나 치솟았으니까.
-살려주세요. 주인님.
-징징거리지 말고 땅바닥에 패대기를 쳐. 설마 콩나물처럼 그렇게 서있을 것은 아니지?
-너무 아파요.
-엄살 부리지 말고 어서!
대룡은 엄살을 부리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걸 보니 처음부터 아예 그럴 작정으로 물려주었던 듯했다.
-맛 좀 봐라. 날개도 없이 추락하면 꽤나 아플 거다.
쿵. 우지직.
대룡이 엄청난 속도로 떨어지면서 호그질라를 땅바닥에 패대기쳤지만 호그질라는 별로 아픈 기색이 아니었다. 그 녀석의 두툼한 비계는 그 정도의 충격 정도는 죄다 흡수해 버렸다.
-맙소사! 이게 아닌데.
그제야 대룡도 질겁했지만 호그질라는 대룡을 물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더 시도해.
-안돼요. 이동 속도가 떨어져서 이제는 들어 올리는 게 불가능합니다.
-그럼 후퇴했다가 다시 밀어 올려.
-그래봐야 절반도 올라가기 힘듭니다.
-그럼 절반이라도 올려봐. 어서!
-예.
대룡은 마치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호그질라를 떼어내지 못했다. 영욱의 말대로 잠시 후진했다가 다시 힘차게 하늘 위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대룡 자신의 말처럼 채 30미터도 오르지 못했다.
-녀석을 나에게로 패대기를 쳐. 알겠지?
-이 녀석에게 깔리면 주인님은 죽어요.
-내 목숨은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좋아요. 갑니다.
영욱은 대룡이 녀석을 패대기치는 모습에서 약간의 힌트를 얻었다.
워낙 무거운 녀석이 물고 늘어지는지라 패대기를 쳐도 녀석의 엉덩이부터 땅바닥에 먼저 떨어졌다. 그래서 가장 예민한 부분에다가 포크의 기계 삽을 꽂아주려는 것이었다. 물론 ULM으로 코팅한 기계 삽의 강도를 믿고서 벌이는 일이다.
-지금이야! 잔상각!
영욱은 거대한 호그질라의 똥구멍에 잔상으로 만든 다리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기계 삽을 구부려서 녀석의 직장直腸 내부에다 박아 넣고는 얼른 사타구니 속으로 숨어들었다. 거대한 엉덩이에 깔릴 수는 없으니 죽자고 매달렸다.
쿠엉!
예상치도 않았던 엄청난 고통을 느낀 녀석은 대룡을 물고 있던 입을 벌려서 항문에다 기계 삽을 꽂은 채로 매달려있는 포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풍선처럼 부푼 몸으로는 자신의 똥구멍은커녕 배조차도 핥을 수 없었다. 당연히 포크를 떼어낼 수도 없었다. 녀석은 직접 떼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자 엉덩이를 땅바닥에 깔고 미끄럼을 타기 시작했다.
-미친놈. 내가 당해줄 것 같으냐?
영욱은 얼른 녀석의 엉덩이 윗부분으로 이동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 삽은 여전히 녀석의 대장을 후벼 파고 있었다.
물론 후벼 파고자 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녀석으로부터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떨어지는 순간 녀석의 엄청난 분노를 몸으로 감당해야할 테니까.
-역시 주인님의 머리는 알아줘야 합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넌 뭐해? 냄새가 나서 돌아버리겠는데 불구경이나 하고 있을 거야?
-아닙니다. 갑니다요.
퐁. 우지직.
대룡이 다시 땅속에서 빠르게 솟아오르며 녀석의 배를 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호그질라가 대룡을 살짝 피하며 덥석 물어버렸다. 신체 구조상 항문에 달라붙은 영욱을 어찌할 수는 없으니 만만한 대룡이라도 작살내려는 심보였다.
-아이고 아야! 주인님, 저 죽어요.
-바보야. 또 물리면 어떡해?
-이 녀석의 귀가 워낙 예민해서 제 움직임을 다 읽고 있는데 어쩌라고요? 그래서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웃기고 있네.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달려든 줄 알고 있어.
-아무래도 피가 부족했나 봅니다.
-미친놈! 그 따위 소리가 나와?
-어떻게 해요? 또 패대기를 쳐요?
-누구 죽는 꼴 보고 싶어? 이왕 물린 것이니까 똬리를 틀어서 녀석을 조여 버려라. 어서! 그게 네 특기잖아.
영욱은 대룡이 아직도 엄살 부리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죽더라도 며칠 지나야 죽든지 하지 지금 당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러 물려준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어떻게 알았습니까?
-네가 보낸 토룡들도 꽈배기를 능가하는 엄청난 조이기 실력을 가졌던데 당연히 너는 그 이상이겠지? 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는 마라.
-좋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으라차차.
대룡은 나선螺線 모양으로 변하면서 자신의 목 부위를 물고 있는 호그질라의 머리부터 몸통까지 돌돌 말고는 강력하게 조이기 시작했다. 마포대교 다리 기둥보다도 더 튼튼한 호그질라의 네 다리만 빼놓고…….
하지만 호그질라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룡을 칭칭 감은 채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목표는 근처에 있는 커다란 바위지대였다. 바위에 비벼서 대룡을 떼어내려는 속셈이었다.
-뭐해? 더 쥐어짜지 않고?
-뭘 짜요?
-힘을 더 줘야 녀석의 내장이 밖으로 밀려나올 거 아냐?
-지금이 최고 출력이에요. 더 이상 줄 힘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최고 출력인지는 의문이지만 더 조인다고 해도 호그질라를 질식시키기는 힘들 것 같았다. 물론 영욱도 그것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다.
-바보야! 무작정 전체적으로 힘을 주지 말고 소젖을 짜듯이 순차적으로 짜 보라는 말이잖아.
-내가 소젖을 짜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요.
-네가 삼킨 사람들을 통해서 그런 기억은 가지고 있잖아.
-시도하고는 있는데 잘 되지는 않아요. 으갸갸갸.
-왜 고함을 지르고 지랄이야?
-녀석이 바위에 비벼서 나를 떼어내려고 하잖아요.
-지금 장난치는 거야? 저런 바위 정도는 우습잖아.
영욱은 바위에 긁히기라도 하면 큰일이 나니까 비벼지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했지만 대룡은 사정이 전혀 다른데도 비명을 지르니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을 놀리려고 그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건 보통 바위들이고 저건 달라요.
-또 ULM인가?
영욱은 제 3의 눈을 동원하고 나서야 바위에 ULM 성분이 미량이나마 섞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호그질라의 머리가 자신보다 더 좋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고리를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양은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이태리타월처럼 때를 벗기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이다.
-예. 발화 능력을 왜 사용하지 않나 했더니 머리가 아주 좋은 놈이에요.
-무조건 버텨. 그리고 계속해서 쥐어짜.
-누군 그러고 싶지 않나요? 아파죽겠으니까 어떻게든 좀 해봐요.
-계속 징징거리면 그냥 나 혼자서 도망쳐버린다.
영욱은 잔상권과 잔상각의 초식으로 호그질라의 내장을 밖으로 열심히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런 영욱이 행동을 멈추게 되면 호그질라의 모든 힘이 대룡에게 집중될 것이 자명했다.
영욱의 기계 삽에 의해서 뒤집어진 양말처럼 항문 밖으로 삐져나온 호그질라의 내장의 길이가 벌써 10미터를 넘어서고 있었다.
코가 썩어서 문드러질 것 같이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지만 영욱은 온 몸이 피와 똥으로 범벅이 되고도 그 작업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영욱은 항문을 통해서 내장이 탈장脫腸된 강아지를 본 적이 있었다. 그 탈장된 내장이 땅바닥에 쓸려서 고통이 커지자 강아지가 자신의 내장을 물어뜯는 악순환이 반복되어서 상태는 더욱더 처참했었다.
영욱은 이 더러운 작업이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호그질라 녀석의 내장을 조심스레 끄집어내고 있었다. 혹시라도 도중에 끊어지기라도 하면 금방 재생시켜버릴 테니까 똥이 아니라 황금으로 범벅된 물건을 다루듯이 했다.
내장이 땅바닥에 쓸리는 고통에 호그질라는 차라리 끊어버리려고 했지만 영욱이 오히려 치유 초능력을 써가며 내장들을 보호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도 호그질라의 돌진은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번 돌진은 긁어내는 방향이 아니라 정면충돌을 위한 것이었다.
쾅! 화르륵.
호그질라 아니, 호그질라를 닮은 환수는 충돌과 동시에 콧구멍으로 뜨거운 불길을 내뿜었다. 바위에 포함되어 있는 ULM을 녹여서 대룡을 옭아매거나 잘라낼 속셈이었다. 함량이 많지는 않지만 바위 깊숙이 파고 들어가면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안 돼!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영욱의 염동력이 작용해서 열에 녹아서 액체가 된 ULM들을 죄다 가로채버렸다. 죄다 가로챘다고는 하지만 양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영욱으로서는 아주 짭짤한 수입을 거둔 것이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더니 이렇게 귀한 ULM을 또 다시 얻게 된 것이었다.
영욱의 가로채기로 인해서 가장 곤란에 빠진 것은 바로 호그질라였다. 회심의 한 수가 통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는 대룡을 떼어낼 방법이 사라져버린 셈이다.
게다가 대룡이 순차적으로 몸을 쥐어짜니 항문을 통해서 자신의 내장들 대부분이 빠져나가 버렸다. 제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난 환수라고는 하지만 이래서는 출혈이 너무 큰 상황이었다.
바로 그렇다. 영욱은 똥과 피가 범벅이 된 상황이지만 아까운 피를 버려둘 수는 없어서 염동력으로 피를 긁어 모은 다음 삼켜서 소화 흡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물론 100퍼센트 피만 모을 수는 없었다.
-쳇! 돼지 똥까지 먹는 날이 올 줄이야.
-저는 늘 먹는데요. 통째로 삼키니까 똥오줌을 가릴 수는 없는 입장이라서…….
-나는 사람이야. 너하고 같은 줄 알아?
-어차피 물질이 아니라 영혼의 변형된 모습입니다. 그러니 너무 인상 쓰지 마세요.
-그래도 이건 정말 너무 구리다. 정말 네 진액은 비교할 수도 없어.
영욱은 그야말로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진액의 맛과 똥의 맛이 비교될 수 없는 것은 자명했다.
-구리고 비린 것이 몸에 더 좋다는 말도 모르세요? 참아요.
-입에 쓴 것이 약이라는 말은 알지만 그런 말은 처음인데?
-이곳 2QB 세상에서는 누구나 아는 진리 중의 하나죠.
-알았어. 어차피 오줌도 먹어봤는데 똥을 먹지 못할 이유는 없지.
실제로 피에 섞여서 영욱의 입으로 넘어간 똥은 극소량이었다. 그런데도 영욱은 견딜 수 없는 수준의 욕지기를 경험하고 있었다. 하지만 참고 또 참았다.
욕지기를 참지 못해서 토하게 되면 아까운 호그질라 피를 날리는 것도 되지만 포크를 계속해서 운용할 힘이 부족해질 게 자명했다. 그리되면 간신히 잡은 승기마저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제법 강해진 줄 알았는데 막상 목숨을 건 싸움에서 있는 힘을 다 쏟아 붓다보니 포크의 운용 시간이 겨우 10분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겨우 100미터를 달리고도 탈진할 정도로 힘들어하는 단거리 선수와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42km도 넘게 뛸 수 있는 속도가 있는가 하면 100미터를 달리는 것이 한계인 속도도 있는 법이다. 그러니 순간적으로 쏟아 붓는 힘의 양에 따라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천차만별이 되는 것이다.
그 부족한 힘을 똥 섞인 호그질라의 피에서 보충하고 있는 상황이니 한 번의 구토는 곧 탈진으로 직결되는 것도 전혀 이상할 리 없었다. 영욱은 살아남기 위해서 아주 더러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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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그질라의 히든카드가 사라졌지만 아직까지 상황이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녀석은 대룡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질긴 숨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었다.
영욱이 녀석의 내장을 꺼내서 고통을 가하고 대량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녀석의 생명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뭐해? 녀석의 숨통을 끊어놓지 않고?
-더 이상의 힘을 줄 수는 없어요. 저도 거의 한계상황에 이르렀어요.
-서, 설마 또 피를 달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겨우 주인님의 피 한 방울 먹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어요.
-겨우 한 방울이 아니라 한 바가지야.
-제겐 겨우 한 방울입니다.
둘의 유치한 실랑이가 다시 반복되고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영욱의 피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녀석의 코와 입을 물어서 숨을 쉬지 못하게 만들어. 사자가 물소를 사냥하는 방법도 몰라?
-녀석의 코에서 강한 불이 뿜어져 나온다는 사실을 잊었어요? 누굴 통구이로 만들 일이라도 있어요?
바위도 순간적으로 녹을 정도니 정면으로 불길을 맞으면 통구이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니 대룡으로서는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을 계속 뿜을 수 있다면 쟤가 이러고 있겠어? 네가 불에 약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야.
-트릭인 줄 모르겠어요? 카운터 공격을 노리는 얄팍한 수작에 넘어가고 싶어요?
-녀석은 제대로 숨을 내쉴 수가 없어.
-그런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