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욱이 기세를 강하게 드러내자 대룡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영욱의 피를 마셨다. 영욱으로서는 한 바가지나 뽑아주었지만 대룡에겐 너무나 적어서 한 방울에 지나지 않았다.
-어때?
-이, 이건?
-어떤지 물었잖아.
-좋아요. 아주 좋아요. 하지만 양이 턱없이 부족해요.
-내가 빈혈로 쓰러지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래? 지금은 안 돼.
-그럼 언제 뽑아주실 겁니까?
-헌혈의 경우로 보자면 보통 두 달은 지나야 해.
영욱은 다시 순순히 피를 뽑아줄 것처럼 굴었다. 다만 시간을 충분히 벌어두기로 했다. 물론 공짜로 뽑아줄 리는 없다.
- 하지만 주인님은 일반인이 아니라 드림헌터잖아요. 그런데도 그렇게나 오래 기다려야 해요?
-제아무리 드림헌터라도 먹는 게 있어야 피를 만들 수 있지 않겠어? 내가 너처럼 환수라도 되는 줄 알아?
-그렇다면 제 피를 실컷 드시고 영양보충을 하시는 게 어떻겠어요?
-그렇게라도 해야 피가 빨리 만들어지겠지. 그것도 결빙의 기운이 듬뿍 담긴 피가 말이야.
-얼마든지 드십시오. 어서요.
-몸에 좋은 게 좀 더 없을까?
피야 이미 충분히 마셨지만 더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자신의 피를 빼주어야 하는 것이니 녀석의 피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더 영양가 높은 것이 있을 것 같았다.
-대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숨겨둔 다른 정수 없어?
-아쉽지만 그게 전붑니다.
그게 전부일 리는 없지만 쉽게 내줄 리도 없다. 그렇다고 영욱으로서는 마냥 포기할 수도 없어서 일단 떼를 써보기로 했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지만 실제로는 대룡이 훨씬 더 강하니 협박이나 명령이 아니라 떼를 써야 하는 것이다.
-혹시 영단이나 내단 같은 것은 없어?
-아직 그런 수준이 아니라서 줄 게 없군요.
-뭐야? 그런 것도 있기는 하다는 말이야?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넘겨짚은 건가요?
-그래. 아직까지 그런 환수를 잡을 수준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런데 네 표정을 보니까 뭔가 숨기는 게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영단과 내단이란 단어는 대룡을 보면서 저절로 떠오른 단어였다. 그러니 대룡의 생각을 어느 정도 읽는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정말로 제 생각을 읽는 모양이군요.
-내가 너하고 농담할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아.
-좋습니다. 원하신다면 제 진액津液을 뽑아드릴 수는 있습니다.
-진액이라고?
-진액이 좀 더 진해지면 구슬처럼 생긴 내단을 형성하는데 진액이라도 괜찮다면 조금 나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떼를 쓴 보람이 있어서 자그마한 수확이 생겼다. 하지만 영욱은 시큰둥한 표정을 고수했다.
-그럼 영단은 뭐야?
-내단이 오랜 세월을 묵으면 영단이 됩니다.
-차이가 뭐야?
-내단은 글자 그대로 몸속에서 머무르는 것이고, 영단靈丹도 마찬가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밖으로 나와서 적을 공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게 있을 리 없지요.
-좋아. 진액이라도 넉넉히 나눠 줘. 내가 마다할 줄 알았겠지만 어림도 없지.
시큰둥한 표정을 고수한 이유는 바로 진액이라도 넉넉히 얻으려는 얕은 수작이었다. 통할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뇨. 하지만 냄새가 무척 고약한 편이니까 토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할 겁니다.
-몸에 좋은 거라면 뭐든지 먹을 수 있어. 아토피에 좋다고 해서 태아의 오줌은 물론이고 내 오줌까지도 받아 마셨는데 뭔들 못 먹겠어?
-그런 각오라면 드실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여기 있습니다.
-상당히 불쾌한 냄새군. 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갈색의 진득한 액체가 바로 진액이었다. 큰소리를 뻥뻥 쳤지만 역겨운 냄새가 사방으로 진동했다.
꿀꺽꿀꺽.
욱.
*대룡의 산수 실력
-저런! 아까운 것을 토하시면 안 됩니다.
꿀꺽. 꺼억.
-큰일 날 뻔했군.
-정말로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 아까운 것을…….
토했으면 그냥 두지 않을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영욱이 그 정도를 견디지 못하고 토해낼 리가 없다. 토할 뻔했던 게 아니라 대룡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장난을 친 것이었다.
-벌써부터 힘이 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오늘 두 번이나 피를 뽑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무릴 것 같군.
-그럼 내일은 가능할 것 같습니까?
-아냐. 네 진액이 아무리 좋아도 일주일은 지나야 하지 않겠어?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여덟 배나 빨리 뽑는 것인데…….
기분으로는 당장 한 바가지를 뽑아주어도 끄떡없을 것 같지만 한 바가지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최대한 채혈採血 주기를 늦추기로 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이면 생계형 헌혈보다도 더 빡센 일정이다.
-드림헌터는 보통사람들보다 최소한 열 배 이상 강합니다. 게다가 주인님은 상당한 수준의 드림헌터인데 그런 말이 나옵니까? 게다가 제 진액까지 드시고서도 그런 말을 하다니 너무 뻔뻔한 것 아닙니까?
-아직 프레시맨을 벗어나지도 못했는데 상당하다는 말을 들으니 좀 부담스러운데?
-어지간한 사퍼모어 급보다 강한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사퍼모어 급이라면 상당한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는데 네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아? 그런 수준이라면 네가 굳이 빙정을 줄 이유도 없잖아.
변명삼아 시작한 말이지만 영욱 자신이 생각해도 좀 이상했다. 거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희승 교수나 학과장은 물론 조커 괴물만큼의 초능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아니, 5%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주인님은 좀 특이한 경우 같습니다. 그렇지만 보통 드림헌터들보다 두 배 정도는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다면 벌써 제 뱃속에 있을 테니까요.
-그럼 내가 보통 사람들의 스무 배 쯤 강하다는 거야?
-주인님의 현실 세계에서는 그 정도가 아니겠지만 2QB 세상에서는 족히 스무 배는 될 겁니다.
-좋아. 그렇다면 6일 후에 뽑지 뭐.
조혈 기능도 보통 사람들보다 스무 배로 강하다고 가정하면 3일 만에 채혈이 가능하다. 하지만 주인인 영욱으로서는 암탉 역할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게다가 대룡의 산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보고 싶기도 했다.
-이틀 후로 하죠.
-감히 주인의 피를 노예 마음대로 뽑아?
-이런 식이라면 제 충성을 기대하긴 힘들 겁니다.
-충성 따위는 바라지도 않아. 꺼져 버려!
-좋아요. 사흘 후로 하죠. 그러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감히 노예 주제에 충성으로 흥정을 걸어? 충성은 노예의 기본 의무 아냐? 좀 더 맞고 싶어?
-때릴 자신이 있으면 때려보십시오. 그냥 맞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ULM 올가미에 걸린 상태가 아니니까 영욱이 대룡을 이긴다는 보장은 거의 없다. 그 사실을 대룡도 알고 영욱도 알기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왕이라고 해서 신하의 충성을 무조건 기대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영욱은 싸움 대신에 흥정을 택했다.
-좋아. 닷새 후에 뽑아주도록 하지.
-죄송합니다. 주인님. 나흘 후에 피를 뽑아주신다면 제 진액을 한 번 더 제공해드리겠습니다.
-진즉 그렇게 나올 일이지. 좋아. 그렇게 하자.
-고맙습니다. 주인님.
-나도 이익이니까 고마워할 필요까지는 없어.
계산으로는 사흘 간격인데 나흘 간격에다 진액을 두 번 먹을 수 있으니 영욱으로서는 흡족한 거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영욱의 조혈 기능이 정말로 보통 사람들의 스무 배가 된다는 보장은 전혀 없으니 누가 이익을 본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아무튼 대룡의 산수 실력은 꽝인 듯했다. 수십 명의 드림헌터들을 삼켰지만 그 중에서 수학을 할 줄 아는 자는 거의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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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액을 한 번 더 얻어 마신 영욱은 일행들과 만나기로 약속한 대룡산의 아래로 향했다. 일부러 혼자서 터덜거리며 걸어갔다.
대룡은 약 1km 뒤의 땅속에서 영욱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대룡은 느릿느릿하게 걷는 영욱의 걸음에 보조를 맞추기가 힘든지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영욱의 피를 한 바가지나 마셨으니 10km를 떨어져도 기척을 읽을 수는 있지만 평소 이동 속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나름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영욱은 영욱대로 대룡의 피와 진액으로부터 흡수한 기운들을 할인심방으로 정리하느라고 최대한으로 천천히 걸었다. 흡수된 기운들이 온몸에 흩어져 있으면 큰 도움이 되지 않으니 귀찮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활인심방을 이용해서 머릿속으로 옮기는 작업이 필수적이었다.
그 작업을 위해서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나노캡슐들을 총동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결국 심장이 튼튼해야 혈액은 물론이고 모든 기의 순환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활인심방은 비록 좌식도인법이지만 마음만 차분하게 가라앉히면 지금처럼 천천히 움직이면서도 운용이 가능했다. 심지어 기계체조의 초식과도 함께 사용할 수 있으니 동공動功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물론 아직은 서툴러서 그 효율이 크게 떨어지는 탓에 천천히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작은창자로부터 흡수된 기운들이 주로 복강 내부에서 진하게 분포하고 있다가 활인심방의 도인법에 따라서 하나의 큰 덩어리를 이루기 시작했다. 전에는 기운이 미약해서 그 흐름을 잘 느낄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 기운이 아주 강렬해서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흘러나온 한 줄기의 기운이 뱃속의 기운들을 불러 모아서 큰 덩어리를 이루었다. 영욱이 깜짝 놀란 것은 혹시 그곳이 단전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기운들은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더니 배꼽 근처를 경유해서 항문 근처로 내려갔다. 그러더니 두 덩어리로 나뉘어져서 각각 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다리의 안쪽 부분을 통해서 뒤꿈치까지 내려간 두 덩어리의 기운들은 엄지발가락을 거쳐서 다리의 바깥쪽 부분을 통해서 생식기 근처까지 올라왔다.
그 언저리에서 두 덩어리의 기운이 다시 뭉치더니 요추와 흉추 근처의 혈관을 타고 경추까지 오르더니 다시 두 덩어리의 기운으로 나뉘어서 팔로 향했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의 끝을 찍고 돌아온 기운들은 뒷목에서 다시 하나로 뭉쳐서 머릿속으로 돌아갔다. 그러한 순환이 계속해서 반복되는데, 머릿속에서 나온 기운의 양과 진하기가 돌아오는 기운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물을 펌프질하기 위해서 먼저 붓는 물을 마중물이라고 부르는데 머릿속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바로 그런 마중물 역할을 하는 듯했다. 그것은 낚시할 때 사용하는 미끼와도 다를 바가 없었다.
머릿속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기운의 양과 진하기가 달라진 것 말고도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기운들 역시 혈액처럼 화정과 빙정 그리고 토정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 영향을 받은 기운들이 위력을 얼마나 더 발휘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겨우 시작점에 선 영욱으로서는 변화가 좋은 조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기계체조에는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화구의 위력과 얼음 실드의 두께가 커지고 강해지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여겨졌다. 뿐만 아니라 토정의 영향으로 실드도 더 진득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실험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위력의 변화가 있으면 대룡이 피를 더 자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니 마음을 꾹 눌러서 참고 또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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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장소에 도착하니 언제나처럼 은영이 제일 먼저 달려와서 영욱을 맞았다. 애교만큼은 그녀를 따라올 여자가 아무도 없었다.
-오빠! 살아있었던 거야?
-당연하지. 내가 그깟 지렁이 따위에게 당할 것 같아?
-그깟 지렁이가 아니던데?
-지렁이가 지렁이지 그럼 용이야?
영욱은 일부러 기고만장해서 우쭐거렸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하러 오지도 않은 일행들을 비꼬는 것이었다. 물론 대룡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려는 의도 또한 있었다. 사실 지렁이니까 지렁이라고 부르는 것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용도 그런 용은 드물 것 같던데…….
-현실 세계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곳은 2QB 세계야. 그까짓 녀석이 용은 무슨 얼어 죽을 용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다면…….
-그보다 더 센 녀석들이 널리고 널렸다는 말이야.
일행들은 영욱이 천신만고 끝에 겨우 살아서 돌아온 것 같은데 큰소리를 뻥뻥 쳐대니 종잡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건 토룡의 경우처럼 어부지리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까 더더욱 헷갈리는 듯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길 기대했지만 영욱으로서는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보고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거야?
-그래. 자기들끼리 순서를 매기면 겨우 우리 정도 수준이나 될까 몰라?
-그럼 오빠가 이겼다는 말이야?
-당연하지. 내가 그런 허약한 녀석에게 당할 줄 알았다면 그건 오산이야.
-그럼 가죽은 어디에 있어?
-녀석의 가죽을 벗기려고 하는데 갑자기 땅속으로 달아나버렸어. 완전히 숨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내가 깜빡 속았지 뭐야.
영욱은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진소희와 유화리 그리고 은영을 놀려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진소희와 유화리의 얼굴이 마치 똥을 씹은 것처럼 변했다.
같은 일행이라고 하면서 뒤로 돌아보지도 않고 달아난 것에 대해서 비꼬는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영은 마치 자신이 놓친 것처럼 아까워했다. 그런 면에서는 확실히 그녀가 고단수였다.
-아깝다.
-네가 왜 아까워? 내가 아깝지.
-그 큰 가죽을 오빠 혼자 어떻게 다 뒤집어 써?
-혼자 써도 부족해.
-남자가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아?
신축력이 아주 좋아서 혼자 걸쳐도 부족할 정도로 쪼그라든다는 것을 모르니까 하는 소리였다. 토룡피 두 장을 영욱 걸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심지어 사냥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은영이 아는 사실은 대룡피가 아주 강력한 아머라는 사실뿐이다.
-네가 내 애인이라면 비키니를 만들 정도는 나눠줄 수도 있겠지만 이젠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안 그래?
-내가 그렇게 싹싹 빌었는데도 자꾸만 이럴 거야?
-한 번 돌아선 마음이 네 말 한마디에 그렇게 쉽게 돌아설 것 같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으니까 자꾸 헛소리하면 너만 돌려보낼 거야. 알겠어?
-아, 알았어.
영욱이 강한 기세를 드러내자 은영이 찔끔해서 물러났다. 이제는 영욱의 기세가 아주 강해져서 견디기가 쉽지 않은 듯했다. 그보다 뺨이라도 한 대 맞으면 자신만 억울하니까 물러나는 게 현명한 판단이다.
영욱은 폭력 아닌 폭력을 행사한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겉으로는 냉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은영이 자신에게 돌아오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그녀의 애교에 애간장이 다 녹아나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입고 있는 토룡피도 훌러덩 벗어주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참았던 터였다. 그런데 기세를 올려서 그녀를 쫓아내고 나니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뭐야? 이제 보니까 초능력으로 나를 유혹한 거였잖아.'
영욱은 자신이 기세를 드러내기 전과 드러낸 후의 변화를 가지고 은영이 자신의 몸에 매혹 초능력을 걸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가진 초능력이 그런 계통이고, 그녀의 애교는 그냥 교태가 아니라 일종의 필살기일 수도 있음을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영욱은 은영의 초능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가슴이 벌렁거리며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을 초능력으로 유혹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분노하기보다는 여전히 예쁘게 보인다는 점도 매혹 초능력의 위력이 어마어마함을 알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참는 것이라면 영욱의 전매특허와도 같은 것이다. 고통과 가려움 그리고 은영을 안고 싶은 욕망마저도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보아하니 은영은 혼전순결을 외치면서 철통방어에 목숨을 걸던 예전과 달리 작전을 바꾸어서 영욱이 자신을 집적거리게 만든 다음 그 책임을 물으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영욱은 이제 그런 사랑보다는 정신적인 사랑을 더 갈망하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의 완전한 분리가 있을 수는 없지만 2QB 세상을 알고 난 후부터는 분리하는 게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었다.
게다가 활인심방의 구결과 운용은 욕망으로 활활 타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에도 큰 효험이 있었다. 공부를 하는데 가장 큰 적은 여자이기도 하니까 너무나도 당연한 효용이다.
무엇보다 예쁜 여자가 은영 혼자만이 아니라는 게 큰 몫을 했다. 더 예쁜 여자도 있는데 굳이 은영을 덮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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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이 떨어져 나가자 진소희가 다가왔다. 그 순서는 이상할 정도로 잘 지켜지고 있었다. 떨어져 있을 때는 똥 씹은 표정을 짓더니 지금은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도 은영에게 한 수 배운 듯했다.
-살아오셨군요.
-당연한 거 아냐? 왜? 내가 죽지 않아서 이상한 거야?
-그럴 리가 있나요? 하지만 부상도 전혀 입지 않으시고 너무나 멀쩡해서 좀 그래요.
-그런 녀석은 내 상대가 아니라는데 못 믿겠어?
-그런데 왜 달아나셨어요?
믿지 못하겠다는 소리였다. 그게 당연한 판단이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영욱이 열 명이라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분명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큰소리를 쳐대니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다만 따돌리고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대단하니까 참고 들어주는 듯했다.
-그게 바로 내가 싸우는 방식이야. 장소를 넓게 써야 유리한 싸움을 이끌어낼 수 있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이긴 건지 겨우 떼놓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단하세요.
-너도 쟤처럼 대룡 가죽이 필요해?
-주신다면 고맙게 받겠어요.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기도 하지만 영욱이 큰소리를 치는 것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니까 눈을 크게 뜨고서 쳐다보았다. 하지만 영욱에게 대룡피가 있을 리 없었다. 있다고 해도 나눠줄 생각은 없겠지만.
-지불할 돈은 있어?
-울 아빠가 짠돌이라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이세요?
-미안하지만 공짜로 나눠줄 수는 없어. 그리고 네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부모의 등골이나 파먹으려는 거야?
-학생이 공부나 열심히 하는 게 효도지 무슨 돈벌이를 해요? 날 더러 몸이라도 팔란 말이에요?
-남들은 알바도 잘만 뛰더라. 네 미모면 어디든지 환영할 텐데 배경태와 외제차를 타고 놀러 다니느라고 바빠서 그럴 시간이나 있었겠어?
결국 이야기가 그런 쪽으로 흘러갔다. 영욱은 진소희가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하려는 것은 물론이고 남자라면 무조건 물주로 여기는 못된 버릇을 꼬집었다.
그런데 예전과는 달리 진소희도 부끄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는 영욱이 툭하면 주장하는 된장녀 혐오론을 어느 정도는 이해한 듯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버릴 수 있는 버릇은 아니겠지만.
-몸 팔 생각은 없으니 끽해야 통닭집 알바 정도는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겨우 그 정도로 대룡피 살 돈을 어떻게 벌 수 있겠어요?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게 아냐. 어떻게 번 돈이냐가 중요한 것이지.
-듣기에는 꽤나 그럴 듯하지만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소리군요. 그리고 돈의 이력이 뭐가 그리 중요해요?
-내게는 중요해.
가지고 있지도 않은 대룡피로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게 우습지만 마음에만 든다면 10원에도 팔 수 있고, 공짜로도 팔 수 있다는 게 영욱의 마음이다.
현실적이고 속물근성 그 자체인 줄 알았던 진소희에게도 의외로 그렇지 않은 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하는 소리기도 했다.
-아무튼 자존심 상해서라도 돈을 지불하고 살 생각은 없어요.
-그럼 몸이라도 지불할 건가?
-나를 그런 싸구려 여자로 보지 마세요. 제 몸은 오직 결혼할 사람에게만 허락할 겁니다.
-평생 동안 네 허영심을 채워줄 수 있는 남자를 찾아야겠군. 배경태 같이 능력 있는 재벌 2세들 말이지.
-당연하죠.
결국 자존심이 상한 진소희는 원래의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영욱의 비위를 맞추려는 것보다 차라리 그편이 더 잘 어울렸다.
-잘 찾아봐. 직계는 드물겠지만 방계까지 포함한다면 재벌 2세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니까.
-대룡피도 없으면서 큰소리만 뻥뻥 치는군요.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 있어?
-확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없는 게 분명해요. 있다면 지금 걸치고 있는 토룡피보다 더 좋은 것을 걸치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내가 토룡피를 걸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제법인데?
찢어진 겉옷이지만 나름 잘 여몄기 때문에 모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영욱은 진소희가 자신의 상상 이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 정도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런 말도 되지 않는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있는 거예요.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비싼 값에 팔려고 숨겨두었을 수도 있잖아.
-비싼 값에 팔아서 뭐하시게요?
-나도 부자가 될 거야.
-부자가 되면 뭐하실 건데요? 미리 말하지만 소고기나 구워먹겠다는 대답은 사절이에요.
-마음이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아이들을 열 명쯤 낳고 행복하게 살 거야.
그 대답을 하려고 준비했다가 들켜버린 영욱은 머쓱한 표정으로 더 썰렁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부자가 되면 진소희와 결혼할 생각도 어느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이지 지금처럼 환수 가죽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등골 빠지게 일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애 낳을 생각 없으니까 꿈 깨세요. 여자가 무슨 암퇘지라도 되는 줄 알아요? 열 명이나 낳게…….
영욱의 시선이 진소희를 향하자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차린 진소희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내저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준다고 해도 영욱의 아이를 낳을 생각은 전혀 없다는 소리였다.
-너는 마음이 예쁘지 않아서 후보에서 탈락된 지 이미 오래야.
-거참 다행이군요. 하지만 마음이 예쁜 사람이 아직도 멸종되지나 않았을지 의문이군요.
-그래서 천년기념물千年記念物이라는 게 있잖아.
-혹시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을 잘못 말씀하신 게 아닌가요?
-천연기념물은 아직도 많으니까 천년기념물이 더 정확한 표현일 거야. 이미 천 년 전에 멸종한 천연기념물이라는 의미지. 하하하.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진소희에게 들켜버린 영욱은 썰렁한 농담으로 이 난국을 타개해보려고 애썼다. 된장녀라고 혐오하던 그녀에 대해서 그런 마음이 있을 줄은 자신도 몰랐으니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진중권과의 관계를 다시 복원하고 싶고, 기계체조의 진짜 구결을 전수받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경시 동작이라는 것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표출될 줄은 정말 몰랐던 것이다.
-멸종된 시기가 거의 공룡과 흡사한 수준이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결혼할 생각이 없다는 소리로 해석해도 무방하겠군요.
-집안의 대를 끊어놓을 생각은 없어. 하지만 된장녀 따위와 결혼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건 장담할 수 있어.
-아무튼 생환을 축하해요.
영욱의 속마음을 알게 된 진소희는 살짝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남자란 누구나 형편이 나아지면 예쁜 여자를 찾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영욱의 사냥 실력이 남다른 편이니 붙어 다니다 보면 찌꺼기도 제법 많이 얻어먹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친해질 수도 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그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또한 사냥에서 대박이 나면 그 돈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것도 맞아떨어진 것이다.
문제는 대룡을 사냥한 것 같지도 않은데도 벌써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약간 의아했지만 현실 세계에서 획득한 토룡피 두 장으로도 제법 큰돈을 만질 수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짐작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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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유화리가 다가왔다. 순서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지키는 여자들이었다. 서로를 방해하지도 않았고.
-두 여자들과 모두 다투는 걸 보니 일이 잘 풀리지 않았나 봐?
-일은 잘 풀렸어.
-그렇다면 진짜로 대룡을 사냥했다는 말인데 가죽은 어디에 숨겨둔 거지?
-저 땅속에.
영욱은 의외로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지만 진소희가 끝끝내 자신의 말을 믿지도 않고 오히려 무시하는 표정을 지은데 대한 일종의 시위였다. 지금 유화리와 나누는 이야기도 다 듣고 있을 테니까.
-그럼 내게 팔아. 20골드를 쳐줄 테니까.
-그게 적절한 시세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팔 생각이 없어.
-포개서 걸칠 것도 아니라면 팔지 않고 왜 파묻어두려는 거지?
-아직 어린 녀석이라서 조금 더 키운 다음에 가죽을 벗기려고 그런다.
영욱이 사냥에 성공했다고 믿는 유화리조차도 대룡을 노예로 거두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텔레파시가 통해야 하는데 그런 수준의 환수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영욱에게 당할 리 없고, 자존심이 워낙 강해서 죽었으면 죽었지 노예가 되지도 않고, 또 그런 높은 수준의 환수가 많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럼 살아있다는 거야?
-당연하지. 이미 가죽을 벗겼다면 땅속에 묻어둘 리가 없지.
-잠깐 사이에 기세가 많이 달라진 걸 보니까 그저 농담만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괴물을 길들였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군.
-환수들에게는 노예와 달리 길들인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건가?
-귀속시키는 상황이나 방법은 비슷하지만 종속되는 개념은 아니니까 귀속을 시키고 나서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상황은 180도로 달라지지. 그래서 길들인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지.
이게 겨우 영욱이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이해했지만 여전히 믿지는 못하는 듯했다. 다만 환수의 귀속歸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보는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어린 왕자의 길들이기와는 어떻게 다른 거야?
-얼추 비슷해. 서로 간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거니까.
-그럼 노예가 아니라 오히려 친구가 되는 것에 가깝군.
-맞아. 노예처럼 내다팔 수 있는 권리는 있지만 친해지지 않는다면 무조건 복종을 기대하기 힘드니까.
-뭐가 그렇게 어려워?
몸으로 직접 경험했으니 어렵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화리의 대답에서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원했는데 오히려 더 골치 아픈 이야기만 듣게 되었으니 어렵다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노예상인에게 팔아버리는 방법 말고는 나흘에 한 번씩 피를 한 바가지씩이나 퍼주어야 하는 일을 모면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팔아도 몇 푼 하지도 않는다는 데 있었다.
-전혀 새로운 세상과 직접 만나는 것인데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아무튼 네 말이 도움이 된다.
-고마우면 대룡피를 나에게 넘겨.
-당장이라도 넘기고 싶지만 내가 생각하는 금액과 너무 맞지 않아서 그래.
-얼마를 받고 싶은데?
-200골드쯤 제시하면 그때는 심각하게 고려해 보기로 하지.
그 돈이면 200억이니까 고려해볼 것도 없이 팔아넘기겠지만 상대방의 가격 협상 의도를 사전에 분쇄하기 위해서 해보는 말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지만 대박의 꿈이야 누구나 꿀 수 있는 것이니 해서 안 되는 말은 결코 아니다.
-농담인 줄은 알지만 그 돈이면 훨씬 더 좋은 가죽도 여러 벌 구할 수 있어. 물론 네가 그런 사실을 몰라서 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아.
-그래? 어떤 가죽이 있는데?
-네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죽들이 다 있지. 심지어는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와이번 가죽도 있어. 물론 겨우 200골드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상상력이 그리 풍부하지는 않아. 그런데 설마 오크 가죽도 있다는 건 아니겠지?
영욱 입장에서는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농담은 오히려 화리가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농담에는 농담으로 받아치기로 했다. 화리에게는 오크 풀 뜯어먹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왜 없겠어? 사람들이 소설의 소재로 쓰는 것들이 모두 순수 창작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거야?
-별 게 다 있는 모양이구나. 아무튼 나는 팔지 않을 테니까 그런 가죽들이나 사. 무엇보다 헐값에는 절대로 팔지 않아.
화리의 대답이 매우 파격적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농담이 아닌 듯했다. 영욱은 아직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아직도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다시 깨달았다.
-그럼 다른 가죽이나 사지 뭐.
-갑자기 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거야? 다른 가죽이라니?
-늑대 가죽들은 팔아도 되잖아. 200골드 타령을 하지는 않아도 되니까.
화리도 영욱이 대룡을 사냥했다는 말을 100% 믿지는 않았던 듯했다. 그녀가 처음부터 노린 것은 다른 가죽이었다. 영욱이 무려 200골드나 부른 것은 마치 뻥카처럼 대룡피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영욱은 내심 허탈했지만 대룡을 자신의 옆에 소환해서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1km 이상 떨어져 있으니 소환이 된다는 보장도 없지만.
이대로 거짓말쟁이 취급을 당하기는 다소 억울했지만 아무튼 화리의 생각에 맞추어서 행동하기로 했다. 늑대 가죽들을 죽을 때까지 품에 끼고 다닐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어? 그게 보여?
-얘가 왜 이래? 네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늑대 다섯 마리를 사냥했다고 말이야.
-그 가죽이 아직도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그 난리를 겪고도 말이야.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분실했다면 네 표정이 그리 밝을 리는 없겠지.
알고 보니 소 뒷발질에 쥐를 잡은 격이었다. 영욱의 기분이 좋은 것을 파악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게 대룡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늑대 가죽과 관련된 것이니 화리는 헛다리 아닌 헛다리를 짚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영욱도 늑대 가죽의 시세를 안다면 표정이 훨씬 더 밝았을 것이다. 그러니 화리가 착각할 만도 했다.
-좋아. 얼마에 살래?
-가죽 한 장 당 1골드가 시세야.
-그 가격이라면 팔지 않겠어.
-1골드가 1억이라는 걸 잊었어?
-알아. 하지만 그 돈이라면 그냥 내 노예들에게 선심이나 쓰는 게 나을 것 같아.
-남자라서 그런지 현실감각이 정말로 많이 떨어지네. 5억이면 어지간한 외제차도 굴릴 수 있다는 거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