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격이 강해질수록 대룡의 껍질에 더 많은 타격을 줄 수 있었다. 그래봐야 체액 몇 방울 흐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볼 수가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고통을 삭이느라 속으로 끙끙 앓던 대룡이 예상치도 않던 엉뚱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 그만하자.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겨우 피 한 방울 구경했는데 그만하자니?
-살려줄 테니까 이제 그만하자고.
-움쩍달싹도 못하면서 살려준다는 말이 나와?
-지금 상태로는 몸을 빼내기가 쉽지 않지만 넉넉잡아 일주일만 굶으면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럼 일주일 동안 마음 놓고 네 피를 충분히 마실 수 있겠군.
너무 솔직한 건지 아니면 바보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룡은 바위틈에서 당장 빠져나올 수는 없음을 인정했다. 아니면 아직도 자신감이 넘쳐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 다음에는 네 목숨을 내놓아야할 텐데?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달아나는 게 어때?
-내 생각에는 일주일 동안 부지런히 달아난다고 해도 너를 피할 수는 없을 것 같거든. 그리고 달아날 생각도 없고 말이야.
-정말 지독한 녀석이군. 살 수 있는 기회를 주는데도 기어코 죽음을 택하겠다는 말이냐?
-내 생각에는 도망가지 않는 게 살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아. 일주일동안 네 녀석의 피를 빨면 나는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겠지. 그리고 너는 약해질 거고. 안 그래?
영욱은 대룡의 피를 빠는데 재미를 붙였다. 겨우 몇 방울씩이지만 마셔보니 토룡의 피는 피도 아니었다. 그 강렬한 기운이 영욱에게 더 큰 힘을 주어서 공격은 점점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 정도의 손실은 사냥 한 번이면 충분히 채울 수 있다.
-사냥으로 회복할 기회는 없을 것이다. 왜냐면 내가 따라다니면서 네 사냥을 방해할 테니까.
-과, 과연 그게 가능할까?
-땅속의 움직임을 읽는 게 가능하니까 네가 어디에 숨든지 어디로 이동하든지 따라갈 수가 있다. 그러니 사냥 방해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봐야겠지. 안 그래? 넌 이제 좆 된 거야.
영욱은 대룡이 죽을 때까지 진드기처럼 물고 늘어질 생각임을 밝혔다. 진드기처럼 몸에 붙어 있을 수는 없지만 따라 다니면서 훼방을 놓는 것은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계획이었다. 대룡도 몸을 부르르 떠는 걸 보니 영욱의 집요함이 섬뜩한 듯했다.
-네 굼벵이 같은 걸음으로 가능할까? 지금처럼 행운이 또 다시 올 것 같아?
-내가 운이 좀 많은 편이긴 하지. 그리고 그저 생겨난 행운이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든 행운이라는 게 더 중요하지. 넌 앞으로 골치 꽤나 아플 거다. 오히려 죽는 게 더 낫다고 여기게 될 거야.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영욱은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서 공격과 대화를 동시에 함께 할 수 있었다. 대룡과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고 해서 공격을 멈추어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손위의 어른도 아니고 가르침을 주는 사부도 아니니까…….
그리고 이제는 제법 여러 방울씩 흘러나오는 대룡의 피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양이 많아지자 녀석의 피 역시 녀석에게로 돌아가기 위해서 요동을 쳤다. 하지만 영욱이 입고 있는 토룡 가죽의 도움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소화 흡수를 진행할 수 있었다.
토룡의 가죽이 물리력과 마법 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욱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강력한 결계 역할도 한다는 것을 알 길은 없었다. 일단 토룡에게 삼켜지면 영혼조차도 빠져나갈 수도 없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다.
영욱의 몸에 걸치고 있는 토룡 가죽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내자 대룡의 피를 마시는 속도를 좀 더 낼 수 있었다. 그것은 공격 속도를 좀 더 높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피를 소화시키다니 놀랍군.
-다 네 덕분이지.
-너를 잡으라고 보냈던 두 녀석의 모든 것을 취한 모양이군.
-운이 좋았지.
-운이 좋다는 게 이 정도의 위력일 줄은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도 같군. 바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닌데 하필이면 가장 강한 금속 고리에 끼일 게 뭐야? 결국 네 운이 좋다는 것은 내 운이 나쁘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도 이제 알겠어.
영욱에게 대놓고 피를 빨리던 대룡이 또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조금이라도 덜 얻어맞기 위해서 일부러 피를 뽑아 준다는 느낌이 들고 있던 차에 지청구도 아니고 하소연도 아닌 소리를 늘어놓았다.
-가장 강한 금속이라니? 그게 뭐야?
-그런 게 있어.
-이름이 뭐냐고?
-이름은 나도 잘 몰라.
영욱은 대룡을 움쩍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게 자신의 운과 기지가 아니라 가장 강한 금속이라는 사실을 알고 화들짝 놀랐다.
즉시 제 3의 눈을 동원해서 살펴보니 대룡의 머리 부분을 손오공의 머리띠처럼 조이고 있는 정체모를 금속 고리가 느껴졌다.
전기장으로 살피는 것이니 금속의 전도성이 워낙 좋아서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냥 핑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가늘었다.
-내가 보기에는 거의 다 박살난 것 같은데 변명하는 거 아냐?
-이게 보여?
-병신아. 땅속을 볼 수 있다고 했잖아.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인간치고는 제법이군. 그게 오히려 더 올가미가 된 거야. 그러니까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지. 내 껍질과 힘도 어지간히 강한 편인데 말이야.
-다이아몬드 칼로도 쉽게 자를 수 없을 정도니까 질기기도 하고 강한 편인 것은 확실해. 네가 보낸 토룡 녀석들의 가죽에 비하면 적어도 스무 배 이상은 강한 것 같아.
칭찬이 아니라 탐욕을 드러낸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토룡피가 아니라 대룡피를 몸에 두르고 싶다는 어처구니없는 욕심이었다. 하지만 대룡은 영욱의 지나친 욕심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정도까지는 아냐. 네가 사는 세상이라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그런가? 아무튼 나로서는 운이 좋은 편이었지. 그런 녀석들도 감당하기가 쉽지는 않았으니까 말이야.
-피를 순순히 내줄 테니까 그만 좀 찔러라.
-아프냐?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따끔거려서 신경이 거슬리기는 해.
이미 순순히 내주고 있었던 상황이지만 대룡은 애써 강한 척했다. 하지만 영욱은 이미 눈치 채고 있을 뿐 아니라 공격도 중단하지 않았다.
-네 피가 목적이 아니라는 걸 잘 알잖아.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알지. 하지만 그 작은 상처를 재생시키는 정도로는 네 기대만큼 힘이 빠지지 않아.
-티끌 모아 태산이지. 일주일 동안 쉬지 않고 소모시키면 너도 꽤나 피곤할 걸?
-대신 너에 대한 나의 악감정도 더 많이 쌓이겠지.
-어차피 지금에 와서 친해질 가능성은 없잖아. 내가 너라고 해도 살려 두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네 목숨을 마치 남의 목숨처럼 이야기하는군.
대룡은 말을 걸어서 영욱의 집중을 방해하려고 했지만 영욱은 이 또한 훈련으로 받아들였다. 증폭 주문과 구결을 외우는 것쯤은 별 것도 아니었다.
-애지중지한다고 해서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 그러니 굳이 끼고 돌면서 애착을 가질 이유도 없지.
-좋아. 거래는 불발이니까 부지런히 파먹도록 해라. 나도 이곳을 빠르게 탈출해서 너를 죽일 때까지 쫓을 테니까.
-그래. 그게 지금 우리가 나누어야할 이야기야.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유치한 그 주문 좀 그만 외울 수 없겠어?
-이게 없으면 위력이 떨어져서 말이야. 미안.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미안할 것까지야 없지. 그런 사연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을 테니까.
-증폭용 아이템이라고 하나 큰맘 먹고 샀는데 기능이 후져서 그래.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그런 아이템이라면 내 뱃속에 많지. 하나 줄까?
-준다면 입을 닥치고서 조용히 공격해주도록 하지.
-좋아. 골라봐.
대룡은 영욱이 낸 상처를 통해서 수십 개의 반지와 귀걸이 그리고 팔찌 아이템들을 내보냈다.
아마도 그가 삼킨 드림헌터들이 끼고 있었던 아이템들인 듯했다. 물론 영욱이 좋아서 그런 아이템들을 내보내주는 것은 아니었다. 한 대라도 덜 얻어맞기 위한 얄팍한 몸부림일 뿐이다. 물론 나중에 다 회수할 요량이라서 아끼지 않는 면도 있었다.
-이제 그만 내보내. 비싼 아이템이 상할까봐서 공격을 할 수가 없잖아.
-어차피 하나밖에 끼지 못한다고 알고 있어. 그러니 이왕이면 여러 개 중에서 쓸 만한 것으로 골라봐.
-하나 밖에 못 낀다고?
-당연하잖아. 이게 고스톱인 줄 알아?
-뭐야? 너도 고스톱을 알아?
아이템을 하나밖에 낄 수 없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지만 화리가 피박, 광박, 흔들기가 중복 적용되지 않는다는 소리가 그런 뜻임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반지 아이템을 팔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룡이 고스톱을 안다는 사실이 영욱으로서는 충격이었다. 아마도 삼킨 드림헌터들의 기억을 흡수해서 생겨난 지식인 듯했다. 고스톱을 쳐 보았을 것 같지는 않고.
-짬밥이 얼만데 그까짓 걸 모를 리 없지.
-하나만 낄 수 있다고 해도 남는 것은 내다 팔아도 되니까 나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그럴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너무 낮춰본 거야.
-이제 그만 줘도 된다니까 그래. 그러다가 증폭 효율이 큰 것이 내게 넘어오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도 시끄러운 네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
-많이도 잡아먹었군.
대룡의 기대대로 영욱은 잠시 동안 공격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상처를 통해서 아이템들이 꾸역꾸역 빠져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곳을 공격할 수는 있지만 대룡이 하나라도 더 토해내도록 잠시 기다려 주기로 했다.
-당연하지. 그게 강해지는 방법들 중의 하나니까.
-내가 아는 사람을 보니까 닥치는 대로 삼키는 것도 한계가 있던데 너는 어때?
-맞아. 하지만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닌데 흡수 효율이 급격하게 떨어져서 거의 한계에 이르렀지.
-그럼 나 같은 것은 삼켜봐야 아무런 효과도 느끼지 못하겠네.
-아마도. 하지만 너는 괘씸죄 때문에 공격한 거야.
대룡은 매가 두려워서 아이템으로 피하고 있는 주제에 영욱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다. 괘씸죄는 결코 용서할 받을 수 없는 최고의 죄라는 걸 영욱도 알고 있다. 하지만 대룡도 벌써 매 맞는 고통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것은 아이템이 더 이상 빠져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네가 먼저 눈사태를 일으켜서 나를 공격하고도 그런 말이 나와?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아야! 아프잖아. 그것은 내 영역을 침입했으니까 그런 거지.
-많은 생물들이 함께 살아가는 산인데 소유권을 주장하면 좀 곤란하지 않나?
-산은 가장 강한 존재의 것이야. 그게 바로 2QB 세상의 룰이야.
-나는 몰랐지. 그러니까 그런 거야. 하지만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아니까 어쩔 수 없겠지.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영욱은 다시 공격을 재개했다. 기다린다고 더 나올 아이템은 없는 듯했다.
-젠장!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너무 담담한 거 아냐? 그리고 제발 좀 그만 때려라.
-아프기나 한 거야? 그런데 이 많은 반지, 귀걸이, 팔찌 중에서 딱 하나만 착용할 수 있다는 건가?
-응. 자세한 건 나도 모르지만 내가 삼킨 녀석들 중에서 두 개를 낀 녀석은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아마도 그럴 거야.
대룡은 고통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애써 담담한 척했다. 하지만 영욱은 자신의 공격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격이 꼭 강하지 않아도 한 곳에 집중하면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도 대룡으로서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바늘에 찔리는 고통이 더 큰 것처럼.
-아무튼 잘 쓰도록 하겠어.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이봐! 하나만 고르고 나머지는 돌려줘야지.
대룡은 매를 조금이라도 덜 얻어맞기 위해서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했다. 영욱이 남은 아이템들을 내다판다고 했을 때 그럴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콧방귀를 끼었던 기억은 벌써 잊어버린 듯했다. 그 만큼 영욱의 공격이 고통스러운 듯했다.
-싫어. 혹시라도 살아남으면 팔아먹어야 하니까 돌려줄 수 없어. 그리고 너도 어차피 남의 것을 빼앗은 거잖아.
-완전히 날강도였군.
-어차피 이판사판이잖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처진데 네 눈치를 볼 이유가 어디 있어?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이건 약속이 틀리잖아. 아이템을 바꿔 끼고서도 고함을 왜 질러?
-이미 버릇이 돼서 미안. 그런데 그냥 하는 것보다는 역시 고함을 지르는 게 더 나은데?
영욱은 마음속으로 공격 주문을 외운 것과 소리친 것과의 효과 비교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더구나 대룡이 기겁하는 걸 보니 더더욱 멈출 수는 없었다. 대룡은 의외로 여린 면이 있는 환수였다.
-웃기지 마. 고급 아이템은 유치하게 소리 따위는 지르지 않아.
-너한테 먹힌 드림헌터들 중에 고급 아이템을 착용한 자가 있었는지 어떻게 확신해?
-당연히 있지. 토벌대 대장들을 여러 명 삼켰거든.
-그래? 하지만 별 차이가 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영욱은 반지를 계속 바꿔가면서 증폭 위력의 차이를 느끼려 했다. 하지만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바보야. 피를 묻혀서 네가 주인임을 인식시켜야 하는데 그냥 하니까 그런 거잖아.
-그런 거였어? 진즉 이야기해줄 것이지.
-아이템을 살 때 그 정도 이야기는 들었을 거 아냐? 산 거 맞아?
-샀는데 듣지는 못했어. 아마 내가 지불하는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영욱은 열손가락에 모두 반지를 끼고는 반지마다 피를 한 방울씩 묻힌 다음 하나씩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한 반지에만 신경을 집중할 수 있으니 여러 개를 끼고 하는 실험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는 다들 고만고만했다. 결국 화리로부터 구입했던 반지의 성능이 예상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라는 사실만 밝혀졌다. 싸구려라는 소리를 듣고 무시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는데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반지들은 내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어. 이젠 팔찌를 실험해봐야지.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제발 그 소리 좀 작게 지르면 안 되겠니? 네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아.
-진동에 워낙 민감하니까 그런 모양이구나. 친구라면 배려해주겠지만 적이니까 오히려 더 큰소리를 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영욱은 대룡이 고함 소리에 왜 그렇게 짜증을 내는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아무튼 팔찌 다섯 개를 실험해보아도 별로 다른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귀걸이를 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좀 나은 녀석이 하나 걸렸다.
-남자 녀석들이 귀걸이 끼는 걸 밥맛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찾았냐?
-응. 이 사파이어 귀걸이가 제일 낫군. 어때?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데 효과는 비슷하지?
-응. 조금 더 아픈 것 같지만 도진개진인 것 같군.
-보기는 좀 그렇지만 이걸로 해야겠군.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으악! 소리는 안 지르기로 했잖아.
잠시 조용하던 영욱이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공격하자 대룡이 기함을 했다.
-차이가 얼마나 나는 지 보려고…….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아야! 차이가 많이 나니까 제발 소리 좀 지르지 마.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하지만 목소리 크기는 조금 줄여주도록 하지.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많이 아파?
-너무 아파. 내가 미쳤지. 이렇게 아플 줄 모르고 아이템들을 무더기로 넘겨주다니…….
대룡은 영욱의 성격이 진상 중의 진상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듯했다. 진상이 아니더라도 적의 기분을 맞춰줄 리 없다는 사실 역시 깜빡하고 있었다.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제발 좀 때리지 마. 아파 죽겠단 말이야.
-제발 좀 죽어주면 안 될까? 사실 때리는 나도 힘들어서 죽겠어.
-살려주면 주인으로 모실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한 노예는 싫어.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대룡의 입에서 신기한 제의가 나왔지만 영욱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환수를 노예로 삼을 수 있다는 것도 의문이지만 어차피 상대가 진짜 항복할 때까지 패야 효력이 있기 때문에 좀 더 패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악! 그럼 친구하자.
-그것 역시 부담스러워. 그리고 친구에게 배신당하면 무척 슬플 테니까 친구는 안 사귀기로 했어.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악! 그럼 어떻게 하면 나를 찌르지 않겠어?
-너는 나를 죽여야 조금이나마 체면이 설 것이고, 나는 너에게 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으니 네가 그곳에서 탈출하는 그 순간까지 힘을 빼놓기 위해서 너를 찌를 수밖에 없어. 그러니까 날 원망하지는 마.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아프다니까!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나를 우습게 봐?
-그래. 그게 바로 너답다.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하나도 안 아프다. 더 찔러봐.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영욱은 옥타브octave를 최대한으로 높여서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이젠 더 얻어먹을 것도 없고, 특별히 나눌 이야기도 없으니까 찌르는 일에 집중했다. 물론 피는 열심히 빨고 있는 중이었다.
현실 세계에서도 합금으로 만든 금속 중에는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강한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영욱은 자신의 손으로 만져보고 느낄 수 있는 것만 소환할 수 있으니 코팅 실드의 다이아몬드 함량을 높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대룡을 움쩍달싹도 못하게 잡고 있다는 금속의 조각을 만져보면서 그 정체를 짐작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냥 만져보는 것만으로는 효과적인 소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2QB 세상의 물건은 현실로, 현실의 물건은 2QB 세상으로만 소환이 가능하다. 토룡 가죽과 같은 특별한 소유물이 아니라면…….
'골드나 귀한 물건은 이동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저 정체모를 금속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영욱은 나중을 대비해서 몇 조각 챙겨두기로 했다. 제 3의 눈을 동원하면 그 금속 조각을 찾는 것이 아주 쉬웠다. 그리고 확인하는 방법도 아주 간단했다. 포크의 잔상각으로 밟아도 깨지지 않고 오히려 기계 삽을 망가뜨리는 것만 찾으면 되니까.
그 정도의 딴 짓을 할 여유는 있었다. 게다가 사파이어 귀걸이 아이템의 사용에 익숙해질수록 증폭률은 점점 더 커져갔다. 물론 그래봐야 겨우 두 배가 조금 넘는 정도인 듯했다. 화리 말대로 세 배까지 증폭되는 아이템은 그리 흔하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이왕이면 조금이라도 무기를 닮거나 날카로운 부분이 있는 것으로 찾았지만 거의 대부분이 조약돌이나 몽돌처럼 닳고 달아있었다.
'제일 강하다는 금속이 닳아? 그럴 리가 없지. 그렇다면 낮은 온도에서도 녹는 액체금속인가?'
물체간의 강한 충돌은 필연적으로 열을 발생시킨다. 불꽃이 튀는 것도 예사다. 말이 마구간을 걷어차면 편자와 시멘트 벽 사이에서 놀랄 정도로 많은 불똥이 튄다. 그리고 성냥 한 갑 정도는 동시에 태운 것 같은 황 냄새가 진동한다.
아마도 대룡과 부딪치면서 발생한 열로 살짝 녹았다가 빠르게 다시 굳으면서 대룡의 몸을 옥죄는 고리가 만들어진 듯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대룡을 패던 일까지 잠시 중단하고 실험을 해보았다.
-화구! 화구! 화구!
화구 여섯 개가 집중되자 이름 모를 금속이 마치 납처럼 쉽게 녹기 시작했다. 수은처럼 상온에서 액체인 것은 아니지만 느낌상 채 500℃이 되지도 않았는데 한순간에 녹아버리는 듯했다. 대신에 굳는 것도 아주 빨랐다.
영욱은 얼른 포크의 기계 삽 끝에 이름 모를 액체금속으로 코팅했다. 이번에는 실드 코팅이 아니라 진짜 코팅이었다. 서두르느라 몇 방울 다른 곳에 튀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열에는 약하지만 오히려 열에 약한 그 성질 때문에 더욱더 쓸모가 있을 것 같은 액체로 쉽게 변하는 금속을 발견한 것이다. 새로운 무기의 발견에 영욱은 날아갈 것 같았다.
얼른 얼음 실드를 씌워서 굳힌 다음 새로 코팅한 신병기의 위력 시험에 들어갔다.
퍽. 퍽.
-아악! 제발 살려주세요.
-갑자기 왜 그래? 덩치가 아깝지도 않아?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아파요. 정말 강한 금속이라서 그런지 정말 아파요. 제발 때리지 마세요.
-웃기지 마. 겨우 얇은 도금鍍金을 입혔을 뿐이야. 겨우 그 정도로 강해봐야 얼마나 강해지겠어?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아아아! 그래도 정말 아픕니다. 주인님.
가장 강한 금속의 코팅 효과는 놀라웠다. 대룡은 큰 몸을 부르르 떨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그리고 주인님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영욱은 대룡이 자신의 얼음 코팅 초능력에 더 놀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직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네 주인이라는 거야?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주인님.
-내가 죽을 때까지? 아니면 네가 죽을 때까지?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아파요! 수명이 만 년인 제가 더 오래 살 테니까 주인님이 죽을 때까지로 하죠.
-내가 죽을 때 너도 같이 죽는 걸로 하자. 싫음 말고.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그, 그리 하겠습니다. 주인님.
영욱이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내걸어도 대룡은 그렇게 한다고 했다. 공수표를 남발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만큼 고통이 크다는 소리였다. 가장 강한 금속 코팅의 위력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네가 내 노예가 된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지?
-노예는 항상 주인님의 뜻에 의해서 소환과 되돌림이 가능합니다.
-그건 나도 아는데 너는 2QB의 존재인데 어떻게 소환해?
-저를 주인님의 옆으로 불러주시면 제가 노예가 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바로 같은 세계에서의 소환입니다.
-그건 내가 거느리고 있는 노예들과도 비슷한 면이 있군.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대룡의 대답에서 약간의 짜증기가 느껴지자 영욱은 사정없이 고함을 지르면서 공격을 재개했다. 사실 아직까지는 노예가 되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노예
-아파요! 이미 노예가 되었는데 왜 자꾸 때려요?
-지금 주인에게 개기는 거야?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사, 살려주십시오. 주인님!
-아무튼 노예는 똑같은 노예라는 소린가?
-그렇습니다. 환수나 드림헌터나 똑같은 룰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시면 됩니다.
몇 대 더 맞더니 대룡의 목소리에서 짜증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최대한 공손한 목소리로 2QB 세상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주인에게 지식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그럼 너도 노예상인에게 내다팔면 되겠구나. 그런데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
-제발 그것만은 말아주십시오.
-왜?
-죽을 때까지 탑 쌓는 일만 하다가 숨을 거두게 될 테니까요. 그리고 팔아봐야 몇 푼 받지도 못할 겁니다.
-그래도 덩치가 있는데 설마?
영욱은 대룡이 매 맞는 것보다 노예상인을 더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으로서 괴롭히기로 작전을 바꾸었다. 가장 강한 금속 코팅이 위력적이긴 하나 결론적으로 보자면 바늘로 고문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일 년을 찔러도 대룡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는 많이 먹어야 하니까 일꾼으로는 완전 부적격입니다. 그래서…….
-뭐야? 그럼 백 골드도 못 받는다는 거야?
-죄송합니다만 시세가 10골드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야? 이 세상에 너 같은 대룡이 얼마나 많기에 시세가 그 따위로 형성되어 있는 거야?
대룡의 가격이 10골드라는 소리에 영욱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토룡피 한 장 가격도 그보다는 더 비싼데 그걸 믿을 영욱이 아니었다. 대룡은 노예상인에게 팔려가지 않으려고 억지를 쓰고 있었다.
-저처럼 대룡이 이른 녀석들은 많지 않지만 드림헌터들은 토룡과 대룡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토룡 중에서 저만큼 큰 녀석의 가격인 셈이죠.
-무슨 차이가 있는데?
-대룡은 혼자서도 새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대룡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자웅동체 중에서도 대룡만이 자가 수정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제발 팔지 말라는 소리였다. 새끼를 낳아 길러도 10골드 이상은 벌게 해줄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영욱은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자신과 은영이 먹어치운 지렁이들이 바로 대룡의 새끼들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흥분해서 현실 세계에까지 토룡들을 파견했던 것이다.
영욱도 대룡을 팔아치우는 것보다는 대룡이 낳는 지렁이로 영양보충을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알 낳는 암탉 취급이지만 그것도 노예로 삼을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알이 아니고 새끼를 낳아?
-예. 토룡은 알을 낳고 대룡은 뱃속에서 알을 부화시킨 후에 새끼를 낳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자웅동체 중에서 최고봉이라는 소린가?
-예. 맞습니다. 힘도 서너 배쯤 강하고요.
-아무튼 제값을 받는다고 해도 20골드 정도밖에 못 받는다는 말이지?
노예로 만들지도 못한 상태에서 노예로 거느릴지 팔아버릴지를 고민하는 웃지도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룡 역시 노예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로 여기고 팔려가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영욱을 설득하고 있었다.
-예. 그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은 내가 걸친 토룡피 한 장에 20골드를 주겠다던데?
-아마도 그럴 겁니다. 소매가격은 그 정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너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일에 능통한 것 같던데? 고스톱도 그렇고 말이야.
영욱은 박상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대룡이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는 박상태가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전혀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말았다.
그러니 새로운 소식통을 노예로 거느릴 수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가진 무력도 두 말할 나위도 없고. 하지만 문제는 녀석을 노예로 삼는 게 아니라 일주일 후에 잡혀 먹히는 것을 고민해야할 처지였다.
-삼킨 자들의 기억을 일부나마 공유할 수 있어서 잡다한 지식은 많이 있는 편입니다.
-그런데 너, 내 옆으로 소환되지 않는데?
-그, 그럴 리가요. 다, 다시 한 번 소환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역시 안 돼. 내가 노예를 만든 경험이 좀 있는데 죽기 직전까지 맞아야 겨우 노예가 되더라. 그러니 좀 더 맞자.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퍽. 퍽.
-아구구! 나 죽네.
서툰 목수가 연장 나무란다는 말은 옛말이다. 지금은 그야말로 장비 싸움이다. 사람들의 병원 역시 최신장비를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서열이 갈린다.
영욱은 이름 모를 액체금속으로 도금한 기계 삽이 열을 받지 않도록 살얼음 실드를 입혀서 대룡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말 대단한 환수인 줄 알았더니 이제는 땅만 파면 나타나는 지렁이처럼 흔해빠진 환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졌다.
너무나도 쉽게 항복하고 노예가 되겠다고 자처하는 걸 보면 약해빠진 녀석임이 분명했다. 영욱으로서는 그나마도 쉽게 거느릴 수 없는 입장이지만.
그런 녀석에게 쫓겨서 목숨이 오락가락했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게 바로 2QB 세상에서의 영욱의 현주소였다. 그런 하찮은 녀석마저도 마음대로 다룰 수 없는 실력이 바로 영욱의 경지였다.
물론 대룡의 공격력은 만만치 않지만 약점이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는 게 문제였다. 불의 초능력을 사용하는 어지간한 드림헌터라면 영욱보다도 훨씬 강한 공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의 화력으로 공격해도 대룡이 거북해할 테니까 어지간한 팀에서는 대룡을 사냥하지는 못하더라도 두려워할 정도는 아닐 것 같았다.
불을 두려워하는 대룡 녀석이 영욱의 화염 초능력보다는 오히려 얼음 초능력을 보고서 화들짝 놀라며 항복했던 이유는 바로 영욱으로부터 보호를 받기 위함일 것 같았다. 비록 노예로 사는 한이 있더라도 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던 듯했다.
인간의 수명이야 아주 짧으니까 노예 생활도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짧은 기간 동안 보호를 받으면서 더 강해지거나 운이 좋으면 얼음 초능력을 일부나마 습득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 듯했다.
물론 영욱이 같이 죽자는 조건을 걸어두었지만 그게 지켜질 리가 없다. 주인과 노예 사이에서 절대적으로 지켜지는 조건은 소환과 역소환뿐이다. 물론 그게 가장 무서운 조건이기는 하다. 최악의 경우에는 벼랑 위에다 자신의 노예를 소환할 수도 있으니까.
영욱은 대룡을 패면서도 별로 흥이 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강한 환수를 노예로 거느려야 기분도 좋은 것이지 박상태처럼 비실비실한 녀석을 노예로 거느리는 것이 기분 좋을 리 없다.
게다가 진짜로 노예가 될 때까지 흔하디흔하고 비루한 녀석을 패고 또 패야한다는 사실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는 작업을 게을리 하거나 매의 위력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왜냐면 일주일 안에 그 작업을 완성하지 못하면 다시 쫓겨야할 테니까.
그런 마음가짐이니 오히려 타격이 점점 더 살아나기 시작해서 매를 맞는 대룡은 뼈에 사무치는 아픔에 진저리를 쳐댔다. 물론 대룡에게는 뼈가 없다.
얼음으로 냉각 처리한 ULM(unknown liquid metal) 도금과 기계체조 숙련도의 증가와 사파이어 귀걸이의 증폭 효율 증가는 잔상권과 잔상각의 파괴력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켜 주었다.
이제는 매를 맞고 피를 철철 흘리는 대룡이 고통에 바들바들 떨면서 한시라도 빨리 영욱의 진정한 노예가 될 수 있기를 빌고 또 빌었다.
영욱은 염동력으로 대룡의 피를 받아 마시면서 활인심방과 기계체조로서 소화시키고 흡수했다. 무념무상의 경지에 빠져서 열심히 패고, 열심히 피를 빨았다.
대룡은 매 맞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바위틈에서 갑자기 사라지더니 영욱의 오른쪽 옆에서 다시 나타났다. 드디어 진정한 노예가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옥죄던 ULM 고리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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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이제야 겨우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장장 열 시간에 걸친 고문 아닌 고문이 이제야 끝났기 때문이다.
-결말이 뭐 이렇게 싱거워?
-옛말에도 시래풍송등왕각時來風送燈王閣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인님.
이 말은 때를 잘 만나면 순풍을 만나서 하룻밤 만에도 700리 이상 떨어진 등왕각에까지도 갈 수 있다는 말로 행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지렁이가 문자를 쓰다니 놀랍기 짝이 없지만 대룡이 삼킨 사람의 지식일 것이니 그저 그러려니 했다.
-너도 내 지독한 운에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예. 주인님. 저와 만난 후로도 계속해서 행운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내가 운이 좀 좋은 편이긴 하지…….
불운이 되었어야 할 대룡이 자신의 노예가 되었으니 할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다가도 언제 운이 나빠질지 모른다는 걸 영욱은 잘 알고 있다.
배경태와 그의 졸개들로부터 거의 한 달 동안이나 줄기차게 얻어맞은 것은 지독한 악운의 연속이라고 볼 수 있다. 실력이 조금이나마 늘어난다는 재미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지만, 매일 매일이 지옥과도 같았다.
영욱은 최근 들어서 유난히 행운이 잦았으니까 이제 곧 강력한 불운이 닥쳐올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두렵지는 않았다.
은영이 자신을 떠나간 것과 사부 진중권으로부터 파문당한 것 그리고 박상태, 배경태, 이희승 교수, 학과장 그리고 대룡으로부터 공격당한 게 악운이라면 행운은 아토피가 좀 더 호전되고, 기계체조와 활인심방 덕분에 몸과 마음이 튼튼해진 것이다.
그리고 포클레인을 다루는 솜씨가 일취월장日就月將해서 어디가도 얻어맞거나 밥 굶을 일은 없어졌다. 또 이제는 2QB 세상을 이용해서 돈을 벌 방법이 생겼다는 것이다. 물론 환수들이나 다른 드림헌터들에게 당해서 소멸당하거나 노예가 되지 않고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이라면 악연으로 시작한 인연들이 대부분 좋은 결과를 맺었다는 것이다. 진중권이나 은영과의 사이를 제외하면 박상태와 대룡은 우여곡절 끝에 노예로 거두어들였으니 이것은 전투력의 수직 상승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희승과 학과장 김진명과도 그리 나쁜 관계는 아니니까 최악의 결과는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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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구! 화구! 화구!
영욱은 대룡의 머리가 꽉 끼었던 구멍에다 열을 가한 다음 염동력으로 ULM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물론 주된 화력은 주변의 마른 나무들을 쑤셔 넣어서 태우는 것으로 주로 해결하고 화구는 그저 불쏘시개용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염동력으로 공기를 불어넣어서 파란 불꽃이 생기도록 나무를 태웠더니 상당히 넓은 동굴 내부가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채취할 수 있는 ULM은 별로 없었다.
겨우 올가미를 만들 정도의 ULM만 채취할 수 있었다. 액체로 치자면 겨우 1리터 정도 되는 양이었다. 무게로도 겨우 2kg 정도에 불과해서 비중이 20에 이르는 금이나 백금에 비하면 겨우 10%대에 불과했다.
그런 게 가장 강한 금속이라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이제야 대룡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룡, 너 나한테 거짓말한 거 있지?
-거, 거짓말이라뇨? 주인님.
-일단 ULM올가미에 걸리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잖아. 그렇지?
-다, 다른 토룡들이라면 빠져나올 수 없지만 저는 일주일 정도면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 다시 한 번 실험해볼까?
-저, 정말입니다.
-정말인지 아닌지는 실험해보면 알겠지. 화구! 화구! 화구!
-잘못했습니다. 주인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영욱이 화구와 염동력으로 ULM으로 올가미를 만들어서 대룡의 머리에 씌우려하자 녀석은 잡아떼던 것을 멈추고 이실직고 했다.
-일단 걸리면 너도 빠져 나오지 못하는 거였구나. 그렇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도 책을 어느 정도는 읽은 사람이야. 그 정도는 기본상식에 해당하지. 하하하!
토양에는 회충과 닮은 아주 작은 크기의 선충들이 살고 있다. 풀이나 나무의 뿌리를 먹어치워서 유기물의 순환을 돕는 것이 이들의 역할인데 작물을 먹어치우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농부들의 원성을 사기도 한다.
그래서 학자들이 선충 구제를 목적으로 연구를 해보니 이들을 올가미로 잡아서 먹고 사는 육식성 곰팡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곰팡이들은 끈적거리는 물질을 만들어 내서 선충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거나 강한 재질로 올가미와 같은 작은 루프를 만들어 움직이는 선충을 꼼짝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른바 올무다.
이렇게 하여 올가미에 걸린 선충은 굶어 죽게 되고, 그 후 육식성 곰팡이류는 선충의 사체를 자양분으로 삼아서 번식하게 된다.
대룡이 거대하긴 하지만 선충류의 모습과 흡사하고, 강한 재질이긴 하지만 겨우 올가미에 걸려서 꼼짝없이 당하는 걸 보니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대룡의 확답으로 그게 사실로 밝혀졌다.
'뭐야? 그렇다면 이 2QB 세상이 대체 얼마나 큰 곳이라는 거야?'
영욱은 웃다말고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 거대한 크기의 대룡조차도 이 세계의 지렁이가 아니라 눈에 보일까 말까하는 선충이라면 이 세계가 얼마나 넓고 클 지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현실 세상의 열 배 남짓 되는 나무들을 보고 그 정도의 비율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무가 아니라 키 작은 관목이거나 다년생 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대룡보다도 몇 백 배나 천 배쯤 큰 녀석들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영욱의 짐작이 옳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사실 2QB 세상의 산소 농도가 현실 세계보다는 아주 조금 진한 정도라서 그렇게 거대한 환수들의 존재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어지간한 것은 소환이 가능한 2QB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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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던 영욱은 결국 대룡을 통해서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보다 큰 녀석들이 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이 근처에는 별로 없습니다. 주인님.
-네가 아는 지식으로는 어때?
-무작정 덩치를 키우는 녀석은 오히려 하수라고 보시면 됩니다. 일정 경지에 오르면 몸의 크기는 마음대로 바꿀 수 있으니까요.
더 큰 녀석들이 얼마든지 존재하지만 의외로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필요한 경우에만 덩치를 키우고 평소에는 적당한 크기로 생활한다는 말인가?
-예. 주인님.
-너는 몸 크기를 줄일 수 없나?
-그럴 수 있다면 올가미에 걸릴 이유가 없겠지요.
-영원히 그런가? 아니면 좀 더 강해지면 줄일 수 있다는 건가?
-변신이 가능하려면 앞으로도 더 많이 강해져야 합니다. 주인님.
-그럼 환수들 사이에서의 네 수준이 덩치를 키울 수 있는 드림헌터보다도 아직 못하다는 건가?
-대충 그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과 환수는 엄연히 다른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묻는 거잖아.
-드림헌터의 거대화는 프레시맨들이 하는 뻥튀기와도 같은 유치한 수작이지만 환수들에게는 상당한 경지에 이른 녀석들이 몸을 축소시키고 있다가 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위력 자체가 다릅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은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도 일시적으로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 뻥튀기라기보다는 버서커 모드라고 해야겠지. 그런데 환수도 프레시맨의 뻥튀기를 할 수는 없어?
버서커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아주 특별한 전사다. 군신 오딘의 신통력을 받은 이들은 위급할 때에는 자기 자신을 잊고 곰이나 늑대와 같은 야수 상태가 되어 귀신처럼 싸우지만, 그 후에는 기운이 빠져 멍한 상태가 된다. 박상태의 거대화에는 다소 그런 면이 있다.
-만일 환수들도 거대화를 할 수 있다면 드림헌터들은 벌써 전멸당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가?
대룡의 설명을 듣고 나니 영욱이 우려했던 부분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 하지만 걱정이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원래 크기를 숨길 수 있는 강력한 환수들이 많다면 그 크기가 대체 얼마나 클지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알게 되는 순간 바로 죽게 될 테니까.
아무튼 영욱으로서는 미리 걱정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저 닥치는 대로 극복해나가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자신의 노예인 대룡을 끌고 다니면 더 강한 환수들의 이목을 끌 우려가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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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환 가능 거리가 얼마나 되지?
-설마 저를 떼놓고 가실 생각입니까?
-같이 다니는 것보다는 떨어져서 다니는 게 더 좋아. 괜히 더 강한 환수를 불러들일 이유가 없잖아.
-제가 그렇게 약하지는 않습니다만.
대룡은 자존심이 상한 듯했다. 하지만 그게 대룡의 현주소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대룡의 기분을 알 수 있는 것은 목소리 변화 때문이다. 자웅동체의 최고봉이라는 대룡은 마치 아수라백작처럼 자존심이 상하거나 전투적일 때는 남자의 목소리를 내고, 기분이 좋을 때는 여자 목소리를 냈다.
-누가 뭐래? 하지만 계속 이동해야 하니까 네 기척을 숨기기는 힘들잖아. 그러니 너보다 약한 놈은 멀리 달아날 것이고, 너를 이길 만한 환수들만 달려들 거라는 말이야. 내 말 뜻을 아직도 모르겠어?
-그렇다면 주인님께서 직접 미끼가 되어서 적당한 환수들을 유인한 다음 저를 소환해서 무찌르겠다는 말씀이군요. 난 또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할 뻔했군요. 호호호!
-네가 미끼가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훨씬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해. 다만 가능하다면 나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고, 만일 힘에 부치면 너를 히든카드로 사용되는 거지. 그래야 훈련이 될 테니까.
-그렇다면 떨어져서 이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에요. 호호호!
-그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면서 강해진다면 언젠가는 대놓고 돌아다닐 수 있는 날도 오겠지.
영욱은 그런 날이 올 거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다. 워낙 밑바닥에서 출발하는 것이니 가도 가도 끝없는 계단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소환이 가능 거리가 무제한이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대략 1km 정도는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네가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내 뒤를 따라오면 되겠네.
생각보다는 훨씬 짧아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덩치 차이 때문에 나란히 다닐 수는 없으니 그렇게 하기로 했다.
-만일 이동 중에 저보다 강한 환수가 나타나면 어쩌죠?
-당연히 달아나야지. 하지만 일단 1km의 도주거리는 벌 수 있잖아.
-그렇군요.
-그것뿐만이 아냐. 또 반대로 찢어져서 달아난 다음에 소환을 반복하면 몇 킬로미터까지도 벌 수 있겠군. 그리고 우리가 힘을 합쳐서 사냥할 수 있는 환수라면 사냥할 수도 있고 말이야.
-아주 좋은 생각이군요. 그렇게 하시죠.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주인님의 피가 조금 필요합니다.
소환 가능 거리는 짧은 편이지만 활용하기에 따라서 상당한 이점이 있을 것 같았다. 영욱이나 대룡을 노리고 접근하는 환수를 오히려 사냥할 수도 있고, 달아나는 것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물론 영욱이 아니라 대룡을 뒤쫓을 때나 가능하겠지만.
하지만 대룡은 영욱의 힘이 자신보다 그리 약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비록 자신은 실수로 ULM 올가미에 걸려서 항복하게 되었지만 그게 가능할 만큼 빠른 속도로 자신을 유인하고, 꽤나 까다롭기로 정평이 난 자신의 공격을 피해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영욱과 힘을 합치면 자신보다 두 배쯤 강한 환수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는 쾌재를 불렀다. 게다가 지금처럼 세상 물정에 어두운 영욱을 속여 먹을 수도 있다고 자신했다.
-한 방울?
-아뇨! 한 바가지 정도가 필요합니다.
-왜 내 피를 탐하는 거지?
-그래야 제가 주인님의 기척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럼 피를 두 바가지 제공하면 두 배의 거리도 소환이 가능하다는 건가?
하지만 영욱은 본능적으로 찝찝한 느낌이 들어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피를 한 바가지나 내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대룡의 목소리가 남자 톤이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소환 가능 거리의 증가는 오로지 주인님의 능력 향상에 달린 것인지라…….
-그렇다면 느낄 수 있는 거리는 어느 정도인데?
-최소 10km는 가능할 겁니다.
-네 놈이 10km 이상 떨어져 있는 게 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야? 소환도 불가능한 거린데.
-제가 따라갈 수는 있을 테니까 이동 중에 이산가족이 되는 것은 모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말해.
-뭐, 뭐가요?
-네 녀석이 당황하면 말을 더듬는다는 걸 잘 알고 있어. 지금 내 피를 탐하고 있는 거지? 그렇지?
녀석이 지금 남자 목소리를 낸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목소리의 변화 사실을 대룡 자신은 까마득히 모르는 것 같으니 두고두고 우려먹을 참이었다.
-사실입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요.
-나 같은 건 통째로 먹어봐야 언 발에 오줌 누기라고 하지 않았나?
-전체적으로는 그렇지만 주인님의 빙결 초능력은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여러 번 얻어먹으면 통째로 먹는 것보다 훨씬 많이 먹을 수 있습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는 게 더 이익이라는 걸 아는군. 하지만 그건 아직 나 혼자 사용하기도 모자라는 초능력이야.
주인과 노예 사이지만 둘은 똑같은 발상을 하고 있었다. 영욱이 대룡이 낳은 지렁이를 먹어치울 속셈인 것처럼 대룡은 영욱의 피를 주기적으로 빼먹을 참이었던 것이다. 기가 막힌 발상이지만 효과가 전혀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인인 영욱이 자신의 피를 쉽게 나눠줄 리 없었다. 응분의 대가를 지불한다면 모르겠지만.
-대신에 얼음의 정수精髓를 나눠드리겠습니다. 빙정氷晶이라고도 부르는 보물입니다.
-웃기고 있네. 그런 보물이 있는데도 불에 약해?
-삼키긴 했는데 제대로 흡수하지는 못해서 그렇습니다. 잘 아시잖습니까?
-그렇다면 네 몸이 얼어버려야 정상이 아닌가? 누굴 지금 바보로 알아?
영욱은 속임수로 자신의 피 같은 피를 한 바가지나 요구했던 대룡에게 사사건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하지만 영욱을 만만히 보다가 속셈을 들켜버렸으니 대룡으로서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화정, 즉 불의 정수도 가지고 있어서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그럼 몸의 한 쪽은 얼고 한 쪽은 타야 하는 거 아냐? 지금 나하고 장난해?
-다행스럽게도 둘을 담을 수 있는 흙의 정수도 있습니다. 물론 토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건 꽤나 그럴 듯하게 들리는군. 다른 정수는 없어?
-없습니다. 정수가 무슨 눈깔사탕이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딱 필요한 만큼만 제공할 참인 듯했다. 날로 먹으려고 들다가 소중한 정수를 세 개씩이나 뺏기게 생겼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렇게 대단한 정수를 세 개씩이나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서 너는 너무 약한 거 아냐?
-말이 정수지 그렇게 강한 위력은 아닙니다. 주인님의 세상의 효력으로 치자면 겨우 10년 묵은 산삼 한 뿌리 정도라고 보시면 될 겁니다.
-내가 산삼을 먹어봤어야 비교를 할 수 있지. 하지만 10년이면 별 거 아닌 것은 아니겠구나. 어서 내놔.
-여기 있습니다.
눈깔사탕인 줄 아느냐고 따지더니 그 수준만 겨우 면한 것을 가지고 정수라고 우겼던 것이다. 하지만 영욱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실제로도 눈깔사탕 같은 것을 내 놓았다. 빨간 색과 파란 색과 황토 색 구슬 세 개였다.
-가진 거 전부 다 내놓아. 설마 세 개뿐이라고 우기진 않겠지? 그래야 금쪽같은 내 피를 한 바가지나 뽑아줄 수 있을 거 아냐?
-드, 드리겠습니다.
-뭐야? 지금 뭐라고 했어?
-뭐, 뭐라니요?
-너 지금 마음속으로 나를 도둑이라고 욕했지?
-아, 아닙니다.
-네 생각을 읽을 수 있으니까 거짓말하지 마.
농담이 아니라 대룡의 생각이 어느 정도는 느껴졌다. 세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욕설이나 강한 감정은 충분히 느끼고도 남았다. 주종 관계의 성립은 그저 입에 발린 계약만은 아닌 듯했다. 소환조차도 가능하니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죄, 죄송합니다. 그 정수들은 제가 오랜 세월을 투자해서 고생 끝에 모은 것인 지라…….
-그래서 내가 흡수한 다음 너에게 피로 돌려주겠다고 하잖아. 구슬이 서 말이면 뭐해? 꿰지도 못하는 걸…….
-여기 있습니다.
입을 통해서 다시 조그만 구슬 두 개를 더 토해낸 대룡의 얼굴에서는 삥 뜯긴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영욱은 뜻밖의 획득과 아울러서 거대한 지렁이의 얼굴에 표정이 나타난다는 게 그저 신기해서 그저 웃고만 있었다.
영욱은 구슬 모양의 정수 다섯 개를 차례대로 삼켜버렸다. 미약하기는 하지만 영욱도 결빙, 발화의 초능력을 가지고 있고, 혹시라도 상황이 급해지면 흙의 정수로 감싸면 될 테니까 크게 염려하지도 않았다.
억!
그런데 그게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다. 활인심방과 기계체조의 도움을 받아서 흡수하려고 했지만 그리 호락호락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영욱의 몸속에 흩어져있던 결빙의 기운과 발화 기운들을 흡수해서 덩치를 빠르게 불려갔다. 불의 정수 두 개가 합쳐져서 하나가 되고, 얼음의 정수 두 개가 합쳐져서 더 큰 하나가 된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거 뭐야?'
여태까지처럼 기운을 몸속에 흩어놓고 사용하는 것보다는 그런 식으로 한 곳에 뭉쳐서 사용하는 게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되면 대룡에게 나누어줄 수 없다는 게 문제지만 당장으로서는 통제가 불가능했다.
영욱은 세 가지의 정수들이 안정을 되찾도록 시간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자 녀석들은 영욱의 정수의 형태로 뱃속에서 자리를 잡았다.
화정은 뜨겁고 빙정은 몹시 차가웠지만 이미 그러한 기운에 대한 내성이 있어서인지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흙의 정수로 두 가지 정수들을 감싸지 않아도 되지만 그 대신 다른 냉각 수단과 가온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두 정수가 자리 잡은 곳이 얼어붙거나 화상을 입을 공산이 컸다.
'공랭식보다는 수랭식水冷式이 더 효과적이겠지…….'
영욱은 자신의 혈액을 화정과 빙정을 거쳐서 흐르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적절한 대처방안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혈액이 혈관을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대량 출혈을 의미하므로 빙정과 화정을 혈관에 밀착시킴으로써 그 효과를 유발시키도록 만드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서 두 정수를 염동력으로 이동시켜서 뱃속에서 가장 큰 복대동맥과 복대정맥에다가 토정을 접착제로 이용해서 밀착시켰다. 물론 토정은 찰흙 반죽처럼 자르거나 모양을 변형시키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위치를 잘못 잡았군.
-예? 뭐라고요?
-아냐. 혼잣말이야.
-녹일 수가 없는 거죠? 그런 거죠?
-잠시 기다려보라니까.
대룡이 뒤늦게 안달했지만 정수들은 이미 영욱의 것이었다. 자발적으로 내주긴 했지만 영욱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내린 결정인 듯했다. 하지만 영욱이 고전을 면치 못하니 아까운 정수들만 날린 격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 안달할 수밖에.
영욱은 복대동맥에 화정을 밀착시키고, 복대정맥에 빙정을 밀착시켰는데 그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금방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복대동맥을 흐르는 동맥피는 몸 전체로 퍼지는 피라서 열손실이 지나치게 많아졌고, 복대정맥을 지나는 정맥은 심장으로 향하는 혈관인데 피가 지나치게 차가워져서 심장에 부담이 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위치를 반대로 바꾸어 보았다.
-이제 좀 낫군.
그랬더니 훨씬 더 나아졌다. 피가 데워지고 냉각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화정과 빙정의 영향을 교대로 받는 혈액은 마치 자석에 노출된 쇠막대가 자성을 띠듯이 자체적으로 발화의 기운과 결빙의 기운을 띠기 시작했다.
-주인님도 그 정수들을 녹일 수는 없는 거죠? 그렇죠?
-기다려 보라는데 자꾸 칭얼거릴래?
-주인님, 그 정수들을 만드는데 천 년이 넘게 걸렸습니다. 그러니 그냥 삼킬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제발!
-맞고 싶어? 지금 열심히 녹이고 있는 거 안 보여?
-녹기는커녕 두 개의 정수가 각각 하나로 합쳐진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화정과 토정은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빙정만이라도 저에게 돌려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빙정에 대한 대룡의 집착은 집요했다. 여차하면 주인에게라도 달려들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쯤 되면 영욱도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일단 내 피부터 마셔보고 나서 이야기해.
-결빙의 기운이 없는 피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제발 제 빙정을 돌려주십시오.
-닥치고 마시기나 해.
-예. 주인님.
홀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