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71)

"나도 정조 개념은 철저한 편이라서, 미안."

"누가 뭐래? 사실 나도 그 일에 대해서는 반성하고 있어? 그땐 너만 보면 왜 그렇게 껄떡거리기만 했는지 나 자신도 잘 모르겠어."

"이젠 전혀 아니던데? 혹시 애완견 강아지처럼 거세라도 한 거야?"

"얘가 말하는 본새 좀 봐라. 내가 미쳤어? 그 좋은 걸 잘라버리게."

"흥! 개과천선改過遷善한 줄 알았더니 그런 것은 아니었구나."

"개과천선하면 그걸 잘라야 해? 네가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아무튼 내가 우리 언니에게 가자고 했을 때 함께 갔어야 했어."

은영은 단지 영욱의 주머니에서 복채를 뜯어내기 위해서 자신의 언니에게 가자고 한 게 아님을 주장했다. 그게 일종의 안배였다는 뉘앙스조차 풍겼다.

"네 언니를 만나면 뭐가 달라지는데? 알량한 기계체조를 가르쳐준다는 빌미로 평생 동안 네 수발을 들게 만들려는 거 아니었어?"

"비슷하지만 소희 언니와는 달리 나를 취할 수도 있고, 비참하게 파문당하지는 않았겠지."

"내가 파문당한 건 소희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야.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이런 불편한 진실을 알고 나서도 너를 사랑했을 리 없을 테니까."

"그래도 나와 헤어질 일은 없었을 테니까 결혼을 거부할 일도 없을 거잖아. 오빠는 절대로 나를 벗어날 수 없어."

영욱이 진실을 알게 되었더라도 중간에 헤어지지만 않았다면 은영의 말대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자를 울릴 수 있는 남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영 때문에 모든 게 다 변해버렸다.

"먼저 절교 선언을 한 건 바로 너였어. 이렇게 다시 매달릴 걸 왜 그랬어?"

"우리 아빠의 제자가 아니라 하필이면 경쟁자인 진중권 아저씨의 제자가 되었으니까 그럴 수밖에."

"얘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진 씨 아저씨의 제자가 된 건 너에게 버림을 받고 나서 한참 뒤에 일어난 일이야."

"정식으로 진중권 아저씨의 제자가 된 것은 그때겠지만 오빠가 야간 알바를 뛰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아저씨의 제자가 된 거나 마찬가지였어."

은영은 다소 억지스러운 주장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영욱은 짜증이 나서 폭발 직전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말을 끊고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왜 수많은 남자들을 놔두고 오빠를 택한 건지? 그리고 박상태를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말이야."

"그게 내가 포클레인을 몰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야?"

"당연하잖아. 기계체조를 제대로 완성하려면 포클레인을 몰아야 하니까."

박상태와 영욱의 공통점이라면 같은 공병 부대 출신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서 은영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영욱은 이제야 겨우 알게 되었다.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시작된 만남이었으니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건 그렇다 쳐. 그런데 사형제끼리 무슨 원수라도 졌어?"

"그 이야기를 하자면 길어. 하지만 사형제야말로 가장 큰 경쟁자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당대에서 서로의 우열이 결정되지 않았던 모양이군. 그래서 제자들을 통해서나마 우열을 가리고 싶었을 거고. 내 말이 맞지?"

영욱으로서도 대충 짐작이 가는 이야기였다. 삼류 영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그런 이야기가 자신을 중심으로 벌어졌다는 게 좀 우습기는 하지만.

"맞아. 우리 언니들과 사귀는 남자들은 모두 울 아빠의 제자가 되었고, 벌써 15%의 경지를 넘어섰어. 오빠만 진중권 아저씨에게 가지 않았다면 승부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지."

"제자는 한 명만 들이는 게 아닌가?"

"그건 나중의 일이야."

"그래서 진 씨 아저씨가 늘 불안해했던 거였군. 하지만 이제 내가 파문당했으니 다시 승부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렇지 않아. 오빠는 오빠가 저지른 일의 파급 효과를 아직도 잘 모르고 있어."

"내가 뭘 모른다는 거야?"

"거의 승부를 포기하고 있었던 아저씨가 다시 승부욕을 불태우게 된 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해?"

언제나 그랬지만 언쟁이 벌어지면 늘 은영의 승리로 끝나곤 했었다. 그것은 영욱이 양보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은영의 주장에는 빈틈이 없었기 때문인데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이미 끝난 일인데 넌 왜 다시 돌아온 거야? 그리고 네 형부들과는 경쟁이 되지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없는 줄 알아? 사실은 깨끗하게 포기하려고 했는데 소희 언니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 자존심을 굽히기로 한 거야. 소희 언니가 사귀던 남자친구의 배경이 제법 빵빵해서 오빠랑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줄 알았거든."

"그게 다야?"

영욱은 그게 전부가 아님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영욱이 드림헌터로서의 성장 가능성보다 더 큰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용도 지금 은영의 이야기를 듣다가 겨우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잘 알면서 뭘 물어?"

"잘 알지만 네 입으로 들어야겠어."

"오빤 너무 잔인해. 하지만 말하라면 할게."

"분위기 그만 잡고 얼른 말해."

"오빠 때문에 진중권 아저씨의 경지가 두 단계나 올라가서 무려 24%가 된 게 가장 큰 이유지. 아빠가 그 사실을 알고는 날더러 무조건 오빠와 다시 사귀라고 하셨어. 이제 됐어? 속이 시원해?"

"나도 대충 그럴 줄 알았지. 하지만 내게 그런 특이한 능력이 있다고 잘못 판단하신 거야. 나 자신도 전혀 모르는 능력인데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냐?"

"꽝일지도 모르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니까 어쩔 수 없어. 아빠도 24%의 경지에서 멈추신 지가 꽤나 오래되셨거든."

다들 나름대로는 절박한 사정이 있고, 특히 은영은 장기판의 말처럼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언니나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있는 중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가 가증스럽다기보다는 오히려 가련하게 여겨졌다. 

그러니 자신과 사귀면서도 사랑을 싹틔우고 키워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영욱도 정략결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자신이 바로 태풍의 핵이었음을 알게 되자 허탈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인기가 많은데 정작 본인인 나만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군. 너는 그렇다 쳐. 그런데 소희는 왜 따라나선 거야?"

"오빠 때문에 배경태가 미국으로 도망쳤잖아. 그러니 꿩 대신 닭이라도 취하겠다는 거겠지."

"너도 눈으로 직접 보고 촬영까지 했으니까 잘 알 거 아냐. 배경태를 고자로 만든 건 내가 아냐."

"소희 언니로서는 믿었던 배경태가 겨우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어서 화가 났기 때문이지. 그 환상을 깬 게 바로 오빠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내가 환상을 깨는데 도움을 줬으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냐?"

"오빠는 아직도 여자의 마음을 몰라. 여자는 죽을 때까지 환상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족속들이야. 그냥 속물근성만 있는 줄 알았어?"

듣고 보니 두 여자 모두 딱히 나무랄 수도 없게 되었다. 저마다의 사정이 있고, 여자라는 생물은 그 특이성이 따로 있다고 주장하니 따질 수도 없게 되었다. 사실 영욱이 들어봐도 그저 억지주장을 늘어놓는 것으로만 들리지는 않았다.

"아무튼 너희 둘에게 질렸다. 나만 바보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정말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도 않는다."

"지금이야 오빠도 제법이지만 그땐 정말 핏덩어리에 불과했으니 알 수도 없었지. 물론 아직도 한참 멀었지만……."

"얘가 정말 말을 해도……. 나한테 핏덩어리라는 표현까지 써야 해? 그리고 아직도 멀었다면서 왜 나한테 의존하려는 거지?"

"벌써 말했잖아. 내가 아니라 우리 아빠가 오빠를 간절하게 원하신다고……. 그리고 오빠는 가진 실력보다 실전에 더 강한 타입이거든. 보통 사람들은 간이 오그라들어서 가진 실력의 절반도 발휘하기 힘든데 말이야. 그래도 핏덩어리 수준인 것은 사실이지. 아무튼 따라나선 덕분에 늑대의 피도 실컷 마시고 지렁이도 배불러 얻어먹었잖아. 덤으로 상태의 눈알도 하나 얻어먹었고 말이야. 의존할 만하니까 하는 거야. 우리가 바본 줄 알아?"

은영이 뱉는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사실 은영과 진소희는 영욱을 따라나섬으로써 상당히 많은 것을 얻었다. 그것은 영욱 역시도 마찬가지니까 무조건 나쁜 관계라고 볼 수만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떡하지? 모든 것을 네 입으로 다 털어놓았으니 말이야."

"어차피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우리 둘을 따돌릴 생각이었잖아. 그래서 이제부터는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야.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줄 수 있으니까 말만 해."

"전에는 말로만 때우려고 하더니 이젠 몸으로 때울 기세군."

"당연하지. 오빠의 책임감을 잘 아니까 언제라도 내가 필요하면 말만 해."

은영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몸으로 부딪쳐왔다. 아버지의 뜻이라고는 하지만 그녀도 영욱을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삼파전

은영이 육탄공격도 마다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곁눈질을 지켜보고 있는데 사고가 생길 리 없다. 게다가 영욱이 그런 상황을 원할 리 없었다.

"하지만 너는 안 돼."

"왜 안 돼? 나한테만 너무 잔인하게 구는 거 아냐?"

"나는 같은 여자로부터 두 번 차이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야.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그런 이유라면 안심하고 나와 다시 시작해도 돼. 오빠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았으니까 두 번 다시 배신할 일은 없어. 약속할 수도 있어."

"가능성은 그저 가능성일 뿐이야. 그리고 두 번 다시 사부를 모시는 일은 없을 테니까 너와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어. 그러니 제발 이쯤하자."

영욱은 자신을 삼키려고 쫓아오던 토룡들보다 몸으로 부딪쳐오는 지금의 은영이 더 무서웠다. 지금 그녀에게 붙들린다면 두 번 다시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영욱의 말이 점점 더 발악에 가까워지자 은영도 영욱을 껴안으려는 동작을 멈췄다.

"천천히 생각해 봐. 지금이야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어차피 혼자서는 힘을 쓸 수가 없는 세상이야. 특히 드림헌터에게는 독불장군이 있을 수 없어."

"웃기지 마. 아군들이 필요하다면 내 노예들을 키워서 함께 강해질 수도 있어."

"제대로 된 구결도 없이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 정말로 활인심방의 구결이 기계체조에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활인심방의 진짜 구결을 너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헤어지기 전이라면 당연히 그랬겠지만 지금은 절대로 아냐."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하지만 영욱이 지금 말하려는 것은 구결을 외우는 것만으로는 턱도 없다는 소리였다. 구결을 음미하는 것과 기계체조 초식과의 조합이 더 중요하니까.

"오빠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내가 정말 성급했다는 생각이 들어. 하지만 그렇게 과대 포장을 한다고 해서 진짜 구결을 얻을 수 있고,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아냐. 심지어 진중권 아저씨가 가진 구결도 진짜는 아니니까 말이야."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오빠가 알긴 뭘 알아?"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구결과 주문 들이 있고, 그 중에는 효과가 크고 좋은 것이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쓰레기라는 걸 말이야."

어차피 세상사가 다 그렇다고 생각되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정보들로 넘쳐나는데 그 중에서 진짜 옥석을 가리는 게 쉬울 리 없다. 또한 나에게는 옥석이지만 남에게도 옥석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불편하지만 그게 바로 이 세상의 진리이다.

"잘 아네."

"그래. 잘 알고 있으니까 너의 도움은 필요치 않아. 시쳇말로 무소의 뿔처럼 나 혼자서 갈 테니까."

"그건 불교에서 말하는 용맹정진이라는 단어처럼 고된 수행을 해야 한다는 의미지 독불장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잖아."

"나도 잘 알고 있어. 내 말도 바로 그런 뜻으로 한 소리야. 누굴 지금 바보로 알아?"

영욱이 2QB 도서관에서 읽은 책은 비단 소설뿐만이 아니었다. 불교 경전을 쉽게 풀이해서 설명한 책들도 여러 권 읽었는데, 이 불교에서 말하는 용맹정진은 몹시 고된 수행을 한다는 뜻이다. 구체적인 의미로는 눕지 않고 오랫동안 앉거나 서서 참선이나 염불 등을 하는 수행을 의미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 역시 최초의 불교의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구절인데,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묵묵히, 부단히 그리고 홀로 정진하라는 뜻을 담은 말이다.

"오빠는 확실히 변했어."

"모든 게 다 너 때문이지. 물론 이 변화가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네게 고맙다고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무슨 남자가 이렇게 뒤끝 작렬이야?"

"나를 장기판의 말처럼 보았다면 오산이야. 적어도 네 생각대로 움직여주지는 않을 테니까."

"이제는 내가 정말 여자로 보이지 않는 거야? 이래도?"

은영은 몹시 흥분해서 상의의 일부를 탈의하기까지 했지만 영욱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버럭 내기까지 했다.

"어설픈 미인계를 쓸 생각이라면 당장 여기서 꺼져. 어떻게 아직도 예전의 나라고 생각하는 거야?"

영욱의 고함소리에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둘에게로 집중되었다. 특히 은영에게로 집중되었다. 머쓱해진 은영은 얼른 옷차림을 고치며 다시 뜬금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마음대로 행동한 것은 사과할게. 하지만 나도 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다는 것만 알아둬. 난들 오빠와 헤어지고 싶었겠어?"

"그렇다면 네 아버지와 언니 때문이라는 말이군. 지금 내 앞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연극이라도 찍자는 거야?"

"제발 믿어줘. 사실 오빠가 나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아직 집안에서 정식으로 인정할 지는 미지수야."

"그렇다면 네 아버지도 진 씨 아저씨처럼 나를 이용해먹고 버리겠다는 소리야? 그리고 나의 자존심을 자극해서 어떻게 해볼 심산인 모양인데 어림도 없어."

"오빤 너무 많이 변했어. 나는 아직도 그대론데……. 흑흑!"

모든 게 통하지 않게 되자 은영은 여자의 최고 무기인 눈물을 동원했다. 하지만 영욱은 그저 시큰둥하기만 했다. 아니, 시큰둥한 척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은영이 그대로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자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의 가능성만을 사랑했을 뿐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그저 허상일 뿐이라는 걸 은영은 아직도 모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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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영은 울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머쓱해져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그녀가 물러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진소희가 다가왔다. 

"만나는 여자들마다 다 싸울 건가요?"

"왜? 너도 싸우고 싶어?"

"은영에게 모두 들었을 테니까 저는 싸울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왜 왔어? 나는 지금 혼자 있고 싶어."

"알아요. 그래도 한 마디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얼른 해 봐. 내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하지 말고."

"사실은 은영과 먼저 사귀던 분이라서 망설였어요."

영욱이 사납게 으르렁거렸지만 소희의 말은 전혀 의외의 내용이었다. 두 사람의 어긋난 첫 만남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관심이 전혀 없었다는 말은 아닌가?"

"예. 하지만 걔가 걷어찬 남자라는 사실이 문제였어요."

"너희들끼리도 대결 모드인가?"

"예. 어른들끼리 그러니 우리도 그럴 수밖에요."

"할 이야기라는 게 그게 다야?"

더 들어볼 것도 없는 유치한 내용이었다. 이유야 어쨌건 조건에 의해서 좌우된다면 영욱이 원하는 정신적인 사랑은 아니었다. 

"물론 배경태의 배경이 너무 커서 아까웠던 것도 사실이에요."

"나도 이제 여자 친구가 생기면 20억 정도는 쉽게 쓸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부자겠지?"

"20억이라고요? 짧은 시간 동안 그런 능력이 생기다니 정말로 놀랍군요. 하지만 걔는 일 년에 100억 정도는 충분히 뽑아 쓸 수 있는 남자 친구니까 사실 놓치기는 정말 아까웠어요."

소희는 영욱의 허풍에 반신반의하면서도 배경태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누가 뭐래? 하지만 너의 의지로 녀석을 고자로 만들어놓고는 왜 내 핑계를 대?"

"마무리야 그렇게 되었지만 그 녀석이 영욱 씨를 경쟁자로 의식해서 벌어진 일이니까요. 두어 번 부딪쳐 보고도 상대가 더 강하다는 걸 모르는 바보라서 일이 그런 식으로 마무리된 것이지만요."

"사실은 나도 진 씨 아저씨의 강권 때문에 너와 결혼하고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어. 하지만 네가 된장녀 흉내를 너무나도 리얼하게 내기에 포기하고 말았지. 그건 네가 작정하고서 했던 행동이니까 내 탓으로 돌리지는 마."

영욱이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진소희가 배경태를 고자로 만들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영욱이 의도했던 일은 아니니까 책임을 느낄 이유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 사이에는 뭔가 찝찝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운명적인 사건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서로에게 상처를 준 것은 사실이니까.

"누가 뭐라고 했어요? 게다가 이미 우리 아빠와의 인연이 끝났으니까 다시 인연을 이을 생각도 전혀 없어요. 그러니 제발 부담가지지 마세요. 다만 그렇다고 너무 배척하지도 말고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이미 끝난 인연인데 우리가 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야 하는 거지? 게다가 같은 곳에서 잠을 자야 하는 거지? 너는 이런 상황이 불편하지도 않아?"

"저하고는 한 번도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끝난 것도 아니죠. 시작이 없는데 어떻게 끝이 있겠어요?"

"말을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나를 어떻게 엮어보겠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내 주변에서 발생하는 찌꺼기나 계속해서 주워 먹겠다는 거야?"

신경을 쓰지도 배척하지도 말라는 진소희의 말은 애매모호했다. 영욱은 인연의 질긴 줄이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끼며 진심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자신은 여자들과 사랑 놀음을 할 시간과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제 코가 석 자인데 무슨 사랑 타령이 나온다는 말인가.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은영에게 양보하기는 좀 아까워요."

"은영이 걷어차기에 쳐다보지도 않았고, 이제 은영이 다시 달라붙으니 빼앗고 싶어진 거였군."

"이미 들었겠지만 어른들끼리도 친하지 않아서 우리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감정이 생겼나 봐요. 그리고 영욱 씨를 떠나보내고 나서 괴로워하는 아빠를 보니까 이건 아니다 싶기도 했어요. 사실 영욱 씨 정도 되는 제자를 구하기가 쉬울 리 없잖아요."

진소희는 계속되는 영욱의 냉랭한 반응에 결국은 진중권까지도 팔았다. 영욱도 이렇게 괴로운데 진중권이 즐거울 리 없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는 즐거웠지만 이제 인연을 끊고 나니 두 배로 쓸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잔상권 등을 일부러 보여준 것인가?"

"예. 구결을 알려드릴 수는 없지만 그 정도는 보여줘도 될 것 같아서요."

"덕분에 도움이 되었어. 하지만 더 가르쳐줄 게 없다면 떠나."

"있어요. 그래서 떠날 수 없어요."

"그래? 그렇다면 기대하겠어."

"얼마든지 기대하셔도 좋아요."

정말 가르쳐줄 초식이 더 있는지는 몰라도 소희는 큰소리를 뻥뻥 쳤다. 하지만 영욱은 소희에게서 나올 것이 더 이상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혹시나 하는 마음과 끝까지 매몰차게 내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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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의 의도는 아니지만 여자 셋이 모이니 삼국지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목표는 천하통일이 아니라 영욱을 쟁취하는 것이지만. 

물론 영욱의 사랑을 쟁취하려는 게 아니라 목표는 영욱의 몸뚱이라는 게 유념해야할 상황이다. 영욱을 남편이라고 부르지만 실상은 노예로 부린다든지 연인이라고 부르지만 꽤 수완이 좋은 사냥꾼으로 부릴 생각인 것이다.

셋 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예쁜 여자들이지만 세 여자 모두가 예외 없이 영욱의 전리품을 노리는 여우나 까마귀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만 몰아붙일 수도 없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사는 방법을 태어날 때부터 터득하고 있다는 속물의 대명사 여자이기에 그 정도라면 그리 나쁜 생각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여자들도 있겠지만 예쁜 여자들은 대부분 그런 생존 본능을 타고 난다. 

요즘은 성형 미인들도 많지만 태어날 때부터 예쁘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유전의 힘이다. 그것은 선조로부터 예쁜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녀들의 피에는 그 미녀 선조와 그 미녀를 차지한 부자나 권력자 혹은 제왕의 냉혹한 유전자가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여인의 아름다움과 속물근성은 늘 빛과 그림자처럼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속물근성이 곧 생존과 직결되며, 그것도 화려한 삶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후하게 지불하는 기업의 사장이 돈을 많이 버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리고 직원들로부터 칭송받는 경우도 별로 없다. 그것은 사람들의 욕심을 임금으로는 도저히 채워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직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열성적인 노력을 기대할 수 없을 바에야 차라리 월급을 적게 주고, 또한 몇 달치 혹은 몇 년 치를 미루다가 부도를 내는 편이 훨씬 더 짭짤한 경우가 많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돈을 쥐고 있고, 떵떵거리면서 살아간다. 그런 부도를 몇 번 내느냐에 따라서 가진 돈의 크기도 달라지기도 한다.

영욱은 과연 자신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느냐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결코 그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남보다 조금 나은 점이라면 운이 나쁘지는 않다는 것과 노력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만으로는 명백한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중권으로부터 파문당했으니 그 행운들 중의 하나는 사라진 셈이다. 또한 자신을 노리는 여자들이 많아졌으니 자신의 장점을 살려서 진득하게 수련할 시간이 사라진 셈이다. 그것은 강해지기가 더 힘들어졌다는 소리다.

또한 드림헌터 역시 돈이 아주 많이 필요한 직업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가장 중요한 행운이 자신에게는 없음을 알게 되었다. 보유한 아이템이 곧 능력의 척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실력에 비해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되고 있는 것 역시 결코 좋은 현상은 아니었다. 그것으로 인해 감당치도 못할 정도의 강자를 불러들이게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가 최선을 다해서 수련해도 저 여자들은 그게 최선이라고 믿지 않을 거야. 그렇다면 굳이 수련하는 것까지 눈치를 볼 필요는 없겠군.'

자신의 실력을 많이 감출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더 높은 세상이지만 영욱은 오히려 발상을 거꾸로 하기에 이르렀다. 자신이 아무리 많이 드러내도 어차피 숨겼다고 볼 것이기 때문이다.

영욱은 속으로 구결을 음미하면서 활인심방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다들 비트를 파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영욱은 자신의 할 일을 이미 끝냈으니 그들과 같이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눈곱만큼의 얼음 초능력과 발화 초능력 그리고 코딱지만큼의 염동력이 내가 가진 힘의 전부다. 그 모두가 드림헌터들의 몸 일부를 소화 흡수해서 얻은 능력들이지. 하지만 박상태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자면 더 이상의 초능력들을 흡수하는 것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드림헌터라면 누구나 발휘할 수 있는 고유의 능력으로 현실 세상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실드를 만들 수 있다. 비록 허접하기 그지없지만…….'

영욱은 냉정한 시각으로 자신의 능력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는 다른 드림헌터들처럼 특화된 초능력이 아쉽게도 없었다. 

대신에 여러 가지를 가졌지만 그 힘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미미한 것이었다. 잘 조합해서 사용하면 구명의 수단이 될 수는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미약한 치유 능력과 나노캡슐들이 있고, 또 기계체조가 있지. 이제 두 자리 숫자의 경지는 확실하게 되는 것 같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느낌상으로는 얼추 13% 정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진짜 구결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10%의 위력도 되지 않을 공산이 컸다. 

그렇지만 육식동물의 노린내를 피우지 않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그리고 진소희로부터 심화 동작 몇 가지를 훔쳐 배우긴 했지만 역시 진짜 구결 없이는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자연산 음식들과 변종 환수들의 피를 대량으로 흡수했지.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특히 토룡 두 마리의 피는 거의 다 흡수한 것 같은데 강해졌다는 느낌은 거의 들지 않았다. 흡수한 기운들로 인해서 토룡 가죽이 살아있는 것처럼 강해지긴 했지만…….

뭔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사실 무조건 많이 먹는다고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비만해지거나 건강을 해칠 우려가 더 크다. 

그런 경우가 바로 박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흡수한 기운들을 잘 다루거나 혹은 보관할 수 있는 수단이 따로 필요한 듯했다.

'맞아. 미약하긴 하지만 이 활인심방이 좌식도인법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임맥 순환과 독맥 순환을 돕는다고 들었지만 아직까지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직은 수련의 경지가 일천해서 그런 거라고 애써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야 어느 날 불쑥 활인심방의 숨은 묘용이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을 테니까.

기운의 소화와 흡수에 큰 효용을 보이니 당연히 기운을 다루거나 저장하는 데에도 효용이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머리를 맑게 하고 머릿속의 기운을 돌리는데 특효를 지닌 활인심방이지만 영욱이 생각의 폭을 조금 더 넓히자 흡수되어서 몸속에 흩어져있던 기운들도 구결에 리듬을 맞추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릿속의 기운을 돌리기 위해서는 그 흐름이 몸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여태까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전혀 흐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영욱의 의식이 몸 전체로 미쳤기에 그 흐름이 조금씩이나마 더 도도해지고 커지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소화 흡수를 통해서 얻은 기운이니까 혈액의 순환과 같은 방법으로 움직이는군. 그런데 흐름의 종착지가 머릿속이라니 기분이 조금 묘하군.'

물론 피는 돌고 또 돌아갔다. 하지만 영욱이 흡수한 대부분의 기운들은 정신력이나 초능력과 관련된 것이라서 그런지 대부분 머릿속으로 가서 저장되었다. 

무협소설에서 보았던 단전이나 혈도 같은 게 없어서 조금은 아쉬웠지만 사용되는 용도가 다르니까 당연히 저장 부위도 다른 것이 옳을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들어온 기운들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구나. 내 의지에 따라서 움직이기도 하고, 내 의지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는구나.'

영욱은 자신의 힘이 근래에 보기 드물게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몸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기운들이 모두 머릿속으로 이동한 것은 아니었다. 모두를 이동시키려면 아마도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해서 활인심방을 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기운의 일부는 근육이나 주요 장기들의 기능을 돕는데 이미 취미를 붙인 듯해서 아무리 종용해도 머릿속으로 이동할 것 같지도 않았다. 물론 그 또한 아주 중요한 일이니 말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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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드! 이젠 꽤 질긴 느낌이 드는데?'

영욱은 자신의 초능력들을 하나씩 점검해보기 시작했다. 

서걱.

자신이 가진 만능 칼에 다이아몬드의 성질이 섞인 실드를 소환하고는 나뭇가지를 잘라보았더니 제법 잘 잘려나갔다. 최선을 다해서 만든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두 배 이상의 절삭력 향상이 있는 듯했다.

'아차! 그러고 보니까 나도 반지 아이템이 있지. 하지만 쪽팔리게 소리를 지를 수는 없으니 마음속으로라도 주문을 크게 외워서 작동시켜 보기로 하자. 물론 커져라! 세져라! 는 아니겠지?'

영욱은 자신이 끼고 있는 아이템 반지를 의식하면서 칼을 감싸고 있는 절삭용 실드를 강화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랬더니 그럭저럭 강화의 효과가 있었다.

'뭐야? 커져라! 세져라! 가 맞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주문대로 실드가 커지고 세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절삭력만큼은 대폭 늘어난 느낌이 들었다. 영욱은 자신이 토시의 형태로 끼고 있는 토룡 가죽을 일부 잘라봄으로써 실드의 절삭력을 시험해 보았다. 

단칼에 잘려나가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잘 잘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는 한참 동안 끙끙거리면서 잘라냈는데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니, 훨씬 더 빨리 잘라낼 수도 있었지만 지켜보는 눈들이 있으니 얼굴이 벌게지도록 일부러 숨을 참으면서 애를 쓰는 척했다.

기어코(?) 잘라낸 조각은 손으로 힘껏 늘인 다음에 목에 걸쳤다. 마치 목도리처럼 목을 따뜻하게 하고, 혹시라도 환수들에게 물리더라도 치명상을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앞으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 미리미리 대비해두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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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녁 식사가 끝났으니까 수련할 사람은 수련하고 쉴 사람은 비트 속으로 들어가도록 해. 잠은 자정 무렵에 동시에 자도록 할 테니까 그동안 수련이나 해 둬."

"예. 선배님."

영욱은 이제 노골적으로 자신의 노예인 박상태, 김호진, 윤승언만을 챙겼다. 잠들기 전까지 활인심방을 수련하라는 소리였다. 노예들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는 일제히 비트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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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도 상태 등이 있는 비트 속으로 기어들어가려고 하는데 화리가 급히 다가왔다.

"벌써 자려고?"

"아니, 잠은 자정 무렵에 잘 거야."

"그럼 이야기나 좀 나누자."

그녀도 이제는 반말이 익숙해진 듯했다. 모든 게 처음이 어렵고 불편할 뿐이지 금방 적응하게 된다.

"무슨 이야기?"

"네가 2QB 세상에서 벌려놓은 이야기 말이야. 그래야 우리가 합류하더라도 혼선을 덜 겪을 거 아냐."

"산사태를 당한 것과 늑대를 사냥한 것뿐이야. 이미 다 말했잖아."

"그렇다면 야영지는 어디야?"

"대룡산 정상에서 동쪽 사면으로 조금 내려오다가 적당한 곳에 야영했지. 그건 왜?"

"맙소사! 그렇다면 대룡의 영역 한 가운데잖아."

화리는 영욱 일행이 설마 그런 곳에서 야영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초보 사냥꾼 영욱이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그리고 영욱은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러니까 그 토룡들이 나타난 거 아냐?"

"내 말은 녀석이 우리를 맞이하려고 대대적인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는 소리야."

"네 일행과 함께 나타날 줄은 모를 테니까 만반의 준비는 아니겠군."

"토룡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대룡은 그 자체가 이미 만반萬般이야."

허를 찌르는 영욱의 주장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화리는 토룡과 대룡은 서로 급이 다르다는 사실도 모르는 영욱을 질책했다. 그야말로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곳에서 눈을 뜨게 될 테니 이길 확률보다는 질 확률이 훨씬 많다는 점을 지적했다.

"두려우면 따라나서지 마."

"누가 두렵다고 했어?"

"토룡은 문제없다고 하더니 썩 즐거운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아직도 모르겠어? 토룡이 아니라 토룡들의 왕 대룡이니까 꺼리는 것이 당연하지."

"그래봐야 지렁이가 지렁이지 별 거겠어?"

영욱도 화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이러는 것은 아니다. 이미 토룡에게도 당해봐서 충분히 알아들었지만 겁을 먹는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속으로는 덜덜 떨고 있었다. 열 배가 아니라 백 배쯤이나 강한 녀석일 텐데 포크를 소환한다고 해도 도저히 상대가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별 거야. 토룡도 만만치 않지만 대룡은 정말 장난이 아니라고 들었어."

"그렇다면 달리 피할 방법이라도 있어?"

"2QB 세상에 도착하자마자 죽어라고 달아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좋아. 그럼 달아나기로 하자. 불리한 싸움을 굳이 고집할 까닭은 없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영욱도 굳이 싸울 생각은 없었다. 강한 상대에게 가장 좋은 전술은 삼십육계 줄행랑이니까.

"그리되면 전멸은 피할 수 있을 거야."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말이군. 하지만 당한다고 해도 죽는 것은 아닐 테니까 상관없겠지."

"너는 환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모양이구나?"

화리는 영욱의 용감함이 무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뭘 또 잘난 척하고 싶은 거야?"

"환수에게 당하는 것은 차원이 달라. 그렇지 않다면 겁을 낼 이유가 없잖아."

"자세히 말해봐."

"진짜로 죽는다고."

"뭐라고? 그렇게 강해?"

영욱도 전혀 짐작하지 못하던 내용은 아니지만 당장 닥친 일이니 그 느낌은 차원이 달랐다. 이제는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서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욱은 화리를 빤히 쳐다보면서 추가 설명을 요구했다.

"대룡 정도의 강력한 환수에게 삼켜지면 영혼마저도 빠져나올 수가 없어. 그러니 현실 세계에서의 육체가 깨어날 수 없는 거야. 그렇다고 해서 당장 죽는 것은 아니겠지만 결국은 죽게 되겠지."

"정말 무시무시한 이야기군. 솔직히 나는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

"용감한 게 아니라 무식한 거였군."

"흥! 원래 무식한 놈이 용감한 법이야."

"이제 조금은 유식해졌으니까 겁이 나는 모양이지?"

"당연하지. 나도 사람이니까."

"그래, 어쩔래? 그래도 강행할 거야?"

"당연하지. 위험하다고 해서 회피한다면 영원히 강해질 수 없을 테니까.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즐기는 수밖에."

피한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대룡을 피해서 다른 영역으로 2QB 세상에 출입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 추격해온 대룡의 공격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게 훨씬 더 위험하다.

"숨겨둔 수가 있는 모양인데 설마 대룡을 능가할 정도는 아니겠지?"

"마음대로 생각해. 어차피 내 말은 믿지도 않을 거잖아. 그런데 너도 함께 할 거야?"

"나로서도 나쁘지 않아. 언젠가 그런 특급 환수들을 상대한다는 꿈이 있었거든. 물론 싸우는 게 아니라 일방적인 도망이라서 좀 아쉽긴 하지만."

"아쉬우면 싸워. 싸워도 말리지 않을 테니까."

"그건 네가 싸울 때에나 고려해볼 수 있는 사항이야. 네가 도망가는 상황인데 내가 시간끌기용으로 미끼가 되어줄 이유는 없겠지."

"누가 무조건 도망만 간다고 했나?"

"대룡은 한 마리뿐이라서 어부지리를 얻을 수도 없는데 무슨 수로 대들어?"

"그건 내 소관이니까 네가 알 바는 아니고."

영욱은 도망을 계획하고 있는 게 아니라 대룡과 맞서서 싸워볼 참이다. 이제 2QB 세상에서 포크를 소환하면 두 배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깨질 때 깨지더라도 한 판 붙어볼 참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싸우겠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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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비트를 두 개만 팠다. 그래서 은영과 진소희가 조금 작은 비트를 사용하기로 하고, 영욱과 세 노예가 조금 큰 비트를 사용하기로 했다. 

작은 사이즈라고는 하지만 덩치가 작은 여자는 셋도 편하게 잘 수 있을 만큼은 팠다. 그랬더니 유화리가 합류해서 여자 셋이 작은 비트를 사용하게 되었다. 

서로 경쟁자이면서도 겉으로는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게 영욱으로서는 무척이나 신기했다. 그러니 세 여자가 자신을 노린다는 게 그저 해보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영욱은 세 노예들과 함께 활인심방의 수련에 몰두했다. 몸속의 기운을 순환시켜서 머릿속에다 쌓는 작업은 아무리 되풀이해도 끝나지 않았다. 그만큼 많은 기운들이 장소를 잘못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상태를 비롯한 세 노예들의 표정도 아주 밝았다. 활인심방으로 몸속의 기운을 정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깨달은 듯했다. 물론 아직은 영욱처럼 정상적인 소주천과 대주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몸속에 여러 가지 기운들이 산처럼 쌓여 있는 박상태의 표정은 특히 더 밝았다. 어쩌면 녀석은 벌써부터 영욱처럼 기운을 돌리고 기운의 일부를 머릿속으로 모으는 작업이 가능한 듯했다.

'하긴, 저 녀석은 나보다 더 강한 놈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영욱은 박상태의 빠른 적응과 응용이 내심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곧 시기심을 거두었다. 

제 3의 눈으로 박상태를 살피니 거대한 기운이 폭발하기 직전의 분화구처럼 들끓고 있었다. 무려 200명 이상을 삼켰으니까 마땅히 저래야만 했다. 

다만 아직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여러 기운들 때문에 박상태가 활용할 수 있는 기운의 양은 초라할 정도로 적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룰 수 있는 기운들이 늘어나는 게 시시각각 달라진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것은 기계체조와 활인심방의 놀라운 효용이었다.

그리고 그의 빠른 성취는 박상태가 그 동안 그 많은 기운들을 억제하느라고 어쩔 수 없이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기운을 통제하고 다루는 능력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활인심방의 수련에 대한 확신이 서자마자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활용이 가능한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다. 박상태로서는 영욱이라는 대단한 기연을 맞은 셈이었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와는 상관없는 행운이었다.

영욱 또한 박상태의 빠른 성취를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것은 자신의 노예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기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영욱에게도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주인이 노예보다 약할 수는 없다는 자존심이 슬슬 생겨났다. 건전한 경쟁심은 생산적이고도 건설적인 것이다. 

강력한 경쟁자가 생긴 것을 의식한 영욱은 더욱더 정신을 집중해서 몸속에 흩어져 있는 기운들을 머릿속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적어도 박상태에게 뒤질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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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눈을 감고 잠을 자도록 해. 만일 2QB 세상에 나타나지 않거나 늦는 자가 있으면 배신자로 간주할 테니까 그렇게 알도록. 이상."

자정 무렵 영욱은 나지막한 소리로 취침 시간이 되었음을 알렸다. 중얼거리는 소리에 불과했지만 그 소리를 듣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지 다들 서둘러서 잠을 청했다. 늦게 나타나는 자가 대룡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을 굳이 하지도 않았다.

"오빠! 나 잠시 소변 좀 보고 나서 잘게."

"계집애가 그런 말을 하면 창피하지도 않아?"

"생리현상은 누구나 다 겪는 일이야. 미녀는 화장실도 가지 않을 것 같아?"

"화장실 튼 사이처럼 굴지 마. 얼른 볼 일 보고서 합류해."

"알았어."

세 여자들은 사이좋게 볼 일을 보러 갔다가 사이좋게 비트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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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잠이 들자 곧바로 2QB 세상에서 눈을 떴다. 어제 비트를 파고서 잠이 들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볼 일을 보러간 세 여자들은 잠이 들지 않았는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그런데 영욱은 근처의 지형이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뭐야? 이 흔적은.

영욱 일행이 사라지고 나서 간발의 차이로 나타난 대룡이 비트 부근에다 화풀이를 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기척이 사라져서 정확한 위치를 알지는 못했는지 다행히 비트의 속은 무사했다. 

그리고 늑대 가죽 다섯 장도 무사했다. 영욱은 얼른 가죽부터 챙겼다. 토룡 가죽과 가죽 사이에 끼워 넣으면 부피도 거의 차지하지 않을 정도로 납작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말 다섯 장을 넣어도 납작해져서 표시도 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너희들도 괜찮아?

-예. 선배님.

만반의 준비를 마친 영욱이 비트를 기어 나가자 박상태와 노예들도 뒤를 따랐다. 

-화리 일행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나?

-예. 선배님.

-열 번을 헤아려도 나타나지 않으면 바로 철수하기로 한다. 현실 세계에서 무슨 짓을 벌일 지도 모르니까.

-예. 선배님. 그런데 저기 오네요.

-나도 알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죄송할 것까지는 없고…….

영욱은 박상태의 넓고 정확해진 감각에 깜짝 놀랐다. 오히려 자신보다 먼저 여자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박상태가 제 3의 눈이라는 초능력의 원조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이 짧은 시간에 박상태를 탈태환골하게 만든 활인심방의 놀라운 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영욱의 놀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풀 너머에서 한극상을 비롯한 남자 다섯 명이 먼저 나타났고, 뒤를 이어서 유화리, 진소희, 최은영이 나타났다. 아직까지는 배신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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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물거릴 시간 없으니 즉각 하산하기로 한다. 싸울 생각은 전혀 없으니 전력을 다해서 무조건 도망쳐라. 살아서 산 아래에서 보자. 출발!

-예. 선배님.

영욱의 명령이 떨어지자 박상태는 10미터가 훨씬 넘는 거인으로 변해서 산 아래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하룻밤 사이에 훨씬 더 강해졌음을 달리는 속도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어깨에 김호진과 윤승언을 태운 것은 그들을 돕기 위함이 아니라 일종의 보험을 둔 것이다.

그 뒤를 여자들이 따르고, 또 그 뒤를 한극상을 비롯한 드림헌터들이 쫓아갔다. 실력을 드러낸 은영과 진소희는 화리에 못지않은 속도로 빠르게 달려갔다.

영욱은 뒤에서 가장 여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대룡을 만나지 않고서는 벗어날 수가 없을 테니까 힘이라도 아껴두려는 것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박상태의 힘은 예전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생고무로 만들어진 괴물처럼 통통 튀면서 산 아래로 거침없이 내달렸다. 거치적거리는 나뭇가지는 사정없이 꺾어버리거나 밟아버리면서 벌써 까마득하게 멀어져갔다. 

박상태가 낸 길을 따라서 은영과 진소희 그리고 유화리가 빠르게 달려갔다. 박상태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영욱은 그 모습을 보면서 약한 척 내숭을 떨고 있던 은영이 얼마나 강한지를 겨우 깨닫게 되었다. 저 정도로 고수였으니 영욱으로서는 전혀 짐작조차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뒤를 한극상과 네 남자 노예들이 거품을 물면서 달려갔다. 영욱은 그 뒤를 산보하는 것처럼 천천히 따라갔다. 모든 감각을 땅속에서 나타날 대룡에게로 집중한 채로.

대룡은 틀림없이 땅속에서 불쑥 나타날 것이다. 그 타깃이 박상태일지 자신일지 아니면 다른 사람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달아나면 적어도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것만큼은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치면 그 희생이 더 적어지겠지만 역시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가 없을 테니까 이런 식으로 달아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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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그것도 나에게로.'

영욱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면서 얼른 포크를 소환했다. 

그리고 일행들과는 약간 다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일행들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라 혹시 자신을 쫓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꼭 자신만이 대룡의 표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제 포크로 시전하는 잔상수족은 가히 압권이었다. 다리길이만 해도 족히 10미터는 되니 거의 15미터의 키를 가진 포크가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달려갔다. 

-젠장!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군.

영욱이 다른 방향으로 튀자 대룡도 즉각 방향을 바꾸는 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영욱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감히 내 자손들을 학살하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느냐?

그리고 놀랍게도 대룡은 영욱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며 대화를 시도했다. 그만큼 지적으로도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지렁이들을 말하는 건가? 겨우 그 정도 먹었는데 학살이라니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거 아냐?

-그렇지 않다. 걔들은 나의 순수한 피를 이은 직계 자손들이다. 그러니까 그 정도면 학살이라고 부를 수 있지. 게다가 너희들 세상으로 보낸 두 아이를 죽이기까지 했으니 살아남겠다는 망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그 두 아이들이 나를 독식하겠다고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죽었어. 그러니까 난 아무런 죄도 없어.

말이 통하는 환수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영욱은 놀라기보다 변명할 기회가 생긴 것이 더 다행스러웠다. 사실 영욱의 힘으로 두 토룡을 죽일 수는 없으니 변명이 아닌 진실이다. 

-가증스러운 놈 같으니라고. 네 녀석이 근처에서 둘의 싸움을 부추긴 걸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대룡의 견해는 전혀 다른 듯했다. 게다가 벌어졌던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기도 했다.

-겨우 그 정도도 저항하면 안 되는 건가? 그냥 너한테 찍히면 무조건 죽어 줘야 하는 건가? 그건 너무 심한 것 같은데?

-하찮은 인간 주제에 말이 많구나.

-너야말로 하찮은 지렁이 주제에 말이 많구나. 어서 쫓아와보기나 해.

말이 통하지 않자 결국은 시비가 붙었다. 시비를 걸지 않아도 끝까지 쫓아와서 잡아먹으려고 할 테니까 영욱으로서는 별로 아쉬울 것도 없었다.

*대룡 사냥

-너 이제 죽었어.

-잡고 나서 그런 말을 해야 겁을 내지. 병신아.

영욱은 포크를 타고서 이렇게 빨리 달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평소의 보폭은 10미터 정도인데 빠르게 달리는 지금의 보폭은 무려 30미터에 이르렀다. 그러니 서너 번만 발을 바꾸면 100미터가 넘고, 서른 번 정도만 발을 바꿔도 1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그게 겨우 1분 동안에 이동한 거리였다. 발을 한 번 바꾸는데 2초가 조금 덜 걸린다는 소리다.

하지만 대룡의 이동속도는 더 빨랐다. 땅 위를 질주하는 포크보다 돌과 흙으로 가득 차있는 땅속을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게 언뜻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흙과 돌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 존재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대룡에게는 땅속이 곧 안방이니까.

'그렇다면 저 녀석은 땅위로 끄집어내면 오히려 더 맥을 추지 못하겠군.'

영욱은 토룡 두 마리가 자맥질을 하면서 자신을 추격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깥에 노출되는 것이 그리 편치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외선? 아니면 건조한 공기? 뭐가 문제지?'

그 대답은 영욱 자신도 이니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토룡 가죽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할 때는 적당한 습기를 제공했을 때였다. 

즉, 땅 속이나 눈 속에서 가장 질기고 탄력성이 좋았고, 불 옆이나 햇볕에 노출되면 금방 딱딱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땅속의 절대강자 대룡에게 만일 약점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땅과 이별했을 때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힘으로 몸길이 2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대룡을 땅 밖으로 꺼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커다란 녀석의 몸을 내 부실한 실드로 뒤집어 씌워서 수분을 쫙 뽑아낼 수는 없는 일이고…….'

둘 사이의 거리가 빠르게 좁혀졌지만 영욱은 대책 마련에 여념이 없었다. 

팔분의 일 크기에다 힘도 채 10%를 쓰지 못하는 토룡조차도 거대한 바위와의 정면충돌에서 별다른 내상을 입지 않았으니까 다시 그 작전을 쓸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다른 작전은 전혀 없었다.

작전도 힘과 덩치가 비슷할 때나 통용되는 것이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에서처럼 거대한 자연의 힘을 이용할 수 있으면 모를까…….

'아냐! 체중과 속도가 다르니까 충격량도 더 커질 거야. 그리고 이번에는 정신 차릴 기회를 주지 말고 계속 공격하면 되겠지.'

영욱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현실에서 박치기 작전을 수행했던 곳을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물론 도중에 잡히지 않기 위해서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야만 했다.

뻥. 

'어이쿠, 땅속에서 하는 두더지 게임 같군.'

대룡이 땅속에서 빠르게 솟아오르면서 포크를 삼키려고 했다. 얼마나 빠르고 강한지 콜라 만 병을 동시에 따는 것 같은 큰소리가 울려 퍼지곤 했다. 거대한 덩치가 50미터 이상 솟아올랐으니 그도 그럴 만했다. 

만일 영욱이 제 3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한 치의 앞도 들여다볼 수 없는 땅속으로부터의 공격이니까 벌써 당했을 것이다. 

또한 제 3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너무 빠른 공격이라서 만일 기계체조가 없었다면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당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기계체조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특히 좌충우돌은 취권을 능가하는 움직임으로 대룡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나마 피해낼 수 있었다.

-겨우 그 정도냐? 덩치가 아깝다.

-잔재주가 있다는 걸 인정하지만 너의 그 시건방이 죽음을 재촉하고 있다는 걸 알아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지금부터라도 공손하게 굴면 살려줄 거야?

-그럴 수는 없지. 이미 물 건너갔다.

-그럼 계속 시건방지게 굴어도 되겠군. 맛 좀 봐라.

뻥. 끼기긱.

영욱은 범고래가 자맥질을 하는 것처럼 땅속에서 주기적으로 솟아오르는 녀석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슬쩍 기계 삽의 끝을 들이댔다. 물론 다이아몬드 실드로 최대한으로 코팅한 채로.

하지만 세게 찌르지는 않았다.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혹시라도 기계 삽이 부러지거나 대룡의 몸에 박혀서 빠지지 않는 일이 발생하지는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발생하는 바로 그 순간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그것은 그 기계 삽이 곧 도망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있는 잔상각이기 때문이다. 다리와 팔을 합쳐서 무려 세 개로 보이긴 하지만 결국은 하나니까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얄팍한 다이아몬드 코팅 실드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귀에 거슬리는 거북한 마찰음만 발생시켰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마찰음이 대룡의 화를 오히려 더 돋게 만들었다. 요리조리 피하는 것도 짜증나서 미치겠는데 감히 자신의 몸에 칼을 들이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감히 저항을 하다니 넌 이제 죽었어.

-바보 아냐? 아까부터 날 죽이려 하고 있잖아. 설마 놀고 있었다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런 지렁이만도 못한 새끼가 대룡을 열 받게 만드네? 죽어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 법이야. 어라?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하하하!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성을 갈겠다.

대룡은 한극상을 능가하는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영욱의 조롱 몇 마디에 이성을 거의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살아오면서 그런 조롱을 당해보았을 리 없기 때문에 조롱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대룡에서 소룡으로? 아니면 잠룡으로? 정말 궁금해서 미치겠군.

-입만 살아있는 네 녀석의 피 맛은 과연 어떨까? 나도 궁금해서 미치겠다.

-맛 볼 기회도 없겠지만 별로 맛이 없을 거야. 짐작하겠지만 넌 영원히 잠들게 될 거야. 이 잠룡아!

-크아아아!

영욱은 자꾸만 대룡의 화를 돋게 만들었다. 그래야 바위벽에 들이받게 만들 확률이 높아지니까. 

잠룡이란 하늘에 오르지 못한 용을 뜻하는 것이지만 영욱은 잠꾸러기라는 뜻으로 사용하면서 계속 대룡을 놀려댔다. 물론 대룡의 화를 돋을수록 훨씬 더 위험해졌다. 대룡의 공격은 더 빨라졌고, 강해졌고, 공격의 여파는 커졌다. 영욱은 정말 겨우겨우 그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다.

 대룡의 경우는 영욱의 움직임을 읽으면서 역으로 예측 공격을 하기도 해서 피하기가 더더욱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영욱 역시 페인트 모션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대룡과 치열한 머리싸움을 벌여나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목숨을 건 도박이었지만 영욱으로서는 전승의 신화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단 한 번이라도 머리싸움에서 지면 죽음으로 직결되니까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었다.

뻥. 기기기긱.

영욱의 피하는 실력이 늘어날수록 다이아몬드 코팅 실드의 함량 역시 높아져서 대룡의 가죽을 긁어대는 소리가 점점 더 요란해져갔다. 

아직까지도 가죽을 뚫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흠집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기 시작하자 대룡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더욱더 사납게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콰과광. 우지지직.

결국 대룡은 영욱이 세운 작전대로 거대한 바위산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수십 개의 폭탄이 동시에 터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대룡의 추격이 끝나고 말았다.

2QB 세상의 나무와 동물들의 크기가 현실 세상보다 훨씬 더 큰 것처럼 바위산도 아주 컸다. 게다가 달려오던 속도와 대룡의 중량이 토룡보다는 훨씬 더 무거우니 충돌의 여파는 아주 컸다.

물론 그 정도로 대룡이 죽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대룡의 머리 부분이 바위산을 뚫고 들어가다가 중간에서 꽉 끼어버렸다. 지렁이에게 머리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룡은 잠시나마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거대한 산사태를 일으킬 수도 있는 녀석이 겨우 그 정도로 죽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 역시 천하무적은 아닌 듯했다. 서서히 의식을 되찾고 있었지만 충돌로 인한 고통이 어마어마한 듯했다. 하지만 창피한 마음 때문에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그저 끙끙 앓기만 했다.

영욱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환형동물인 지렁이에게 뼈가 있을 리는 없지만 대룡의 덩치가 워낙 크다보니 모습을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고리 모양의 체절이 있었다.

쾅! 쾅!

체절과 체절 사이가 바로 영욱의 공격 지점이었다. 사실 포클레인의 땅 파는 능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영욱은 포크로 잔상권과 잔상각을 시전하면서 한 부위만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꼭 대룡을 죽이거나 제압하지 못해도 녀석의 피는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영욱은 죽이려고 작정한 것처럼 집요하게 공격했다.

하지만 녀석의 가죽은 질겼다. 비록 다이아몬드 코팅 실드가 아직도 엉터리지만 완벽하다고 해도 뚫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것은 질기기도 하지만 너무나도 빠른 재생 때문이었다. 상처가 잘 나지도 않지만 상처가 나는 순간 바로 복구된다는 사실을 어렵사리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괴물을 화리 일행은 어떻게 사냥할 수 있다는 거지? 혹시 상극의 초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영욱은 공격하는 중에도 뭔가 뾰족한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일단 한극상이 가진 바인딩 마법이나 염동력으로 대룡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화리의 초능력인가? 불?'

화리만큼은 아니지만 영욱도 불을 일으킬 수는 있다. 학과장 김진명의 팔을 하나 통째로 흡수했으니 못할 이유가 없다. 문제는 강한 폭발력을 가진 화구를 만들 수는 없고, 그 위력 역시 아주 미미하다는 것이다.

-화구! 화구! 화구!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영욱은 불 공격을 곁들이기로 했다.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낀 아이템 반지를 느끼면서 마음속으로는 커져라 세져라를 외치고 입으로는 큰소리로 공격 주문을 외쳤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고함을 질렀지만 실망스럽게도 반딧불을 연상시키는 작은 화구들이 생겨날 뿐이다. 그것도 비실거리면서 영욱이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는 대룡의 가죽으로 날아갔다.

그래도 영욱은 화구 비슷한 것이 생겨난 것에 만족했다. 그것은 평소에 영욱이 일으키던 불과는 차원이 다른 불이었다. 반지 아이템의 놀라운 효용이었다. 불을 열 배나 스무 배쯤 압축시키면 폭발력을 가지게 되는데 이 작은 화구들도 그러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타. 타. 타.

물론 크기가 아주 작으니 겨우 콩 볶는 소리 정도밖에는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콩알 화구의 폭발력 때문인지 뜨거운 열 때문인지는 몰라도 대룡의 가죽에 조금씩이나마 상처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재생 속도를 능가하는 데미지를 주고 있다는 증거였다.

-화구! 화구! 화구! 잔상각!

비록 텔레파시지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공격하던 영욱은 실수로 기계체조의 초식 이름도 함께 외치고 말았다. 

마음속으로 주워들은 증폭 주문과 함께 활인심방의 구결을 함께 음미하고 있었는데 자신도 모르게 잔상각이라는 고함을 지르고 만 것이다. 그나마 커져라 세져라고 외친 것보다는 나았다.

-뭐, 뭐야?

그런데 그 소리 덕분에 잔상각의 공격 효과가 배가되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반지 아이템이 증폭할 수 있는 것은 비단 초능력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까 2QB 세상에서 발휘하는 기계체조 역시 일종의 초능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영욱은 자신의 기계체조 역시 반지 아이템을 통해서 증폭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더더욱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최근에 얼렁뚱땅 만든 구결로 인해서 가뜩이나 강해졌는데 또 증폭이 가능해졌으니 없던 힘도 절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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