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71)

'웃기고 있군. 이미 진실은 드러났어. 그래봐야 절반의 진실이겠지만……. 아무튼 진실은 주문 자체를 그냥 크게 외우는 것뿐이잖아.'

영욱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충이나마 짐작이 갔다. 

기계체조의 구결처럼 아이템마다 맞춤으로 정해진 주문이 따로 있는 듯했다. 그러니 아이템이 판매될 때 함께 제공되는 전용 주문의 능률에 따라서 그 아이템의 증폭 위력과 가격이 상당한 폭으로 달라지는 듯했다.

그렇다면 영욱은 기계체조 구결처럼 굳이 비싼 아이템을 살 게 아니라 적당하거나 싼 아이템을 사서 적절한 주문을 만들어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했다. 물론 구결 만들기와 같이 좋은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구결이나 주문이란 초능력을 발휘하거나 그 힘을 모으기 위해서 정신력을 동원하거나 정신을 집중하는데 도움을 주는 일종의 기합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어떤 초능력의 발현을 돕느냐에 따라서 주문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영욱은 자신에게 필요한 초능력이라면 역시 실드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도 몸을 보호하려는 용도보다는 포크와 휘두르는 칼에 절삭력을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물론 때로는 기척을 감추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불을 끄는 용도로도 사용할 수 있으니 한가지로써 아주 다양한 기능을 가진 초능력인 셈이다. 영욱은 생각을 바꾸어서 다시 화리와 거래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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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욱은 근처에 있는 20미터 쯤 꺼진 절벽 아래로 일부러 기어 내려가서는 구조 요청을 했다.

"살려주세요."

"누구? 혹시 영욱 씨 아닌가요?"

그 소리를 듣고서 화리 일행이 한 달음에 달려왔다. 물어보나마나 영욱인 줄은 알고 있었다.

"맞아요. 화리 씨?"

"대체 거기서 뭐해요?"

"그 녀석들과 싸우다가 그만 이곳에 빠져버렸지 뭐예요."

"그 녀석들은 어디 갔어요?"

이미 뼈와 내장만 남아 있는 잔해를 보았으니까 그냥 물어보는 소리였다.

"이곳에 내려올 엄두가 나지 않는지 그냥 가버리던데 혹시 마주치지 않았어요?"

영욱도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서 거짓말을 했다. 이미 보지 않았느냐는 반문이기도 했다.

"우린 영욱 씨가 처리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달아나버린 거군요."

"처리하려고 했는데 만만치 않은 놈이더라고요. 그래도 여기에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제 손으로 처리했을 텐데 정말 아깝게 되었어요."

영욱과 화리는 서로 거짓말로 일관하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찌 보자면 서로 진실을 이야기할 이유가 없는 사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셈이다. 나는 네가 한 이야기가 모두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서로가 서로에게 비아냥거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무사하니까 다행이에요. 어서 올라오세요."

"여기를 어떻게 올라가요? 줄이라도 좀 내려주세요."

"가진 줄이 없어서 곤란해요."

"그럼 주변에 있는 칡넝쿨이라도 좀 늘여 뜨려 주세요."

기계체조를 10% 이상 연마한 영욱이 줄 없이 올라가지 못한다는 말 역시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무에도 직각으로 기어 올라갔으니 화리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전에 거래부터 먼저 하는 게 어떨까요?"

"거래할 게 전혀 없는데요?"

늑대가죽 두 장을 토룡 가죽 아래에 끼워두었더니 거의 표시나지도 않을 정도로 납작하게 줄어들었다. 토룡피는 영욱의 몸을 세게 조이지는 않지만 다른 것은 가차 없이 조여 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욱은 늑대를 죽인 적도 없고, 거래할 것도 없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증거가 없으니까.

"지금 살려주는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겁니다."

"좀 박절하군요. 같은 사람이 위험에 처했는데 대가를 요구하다니요."

"아까 우리가 도움을 청할 때는 어떻게 하셨죠?"

"하지만 나 덕분에 각개격파가 가능해졌으니 나를 탓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영욱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굴었다. 화리의 화구가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다면 피할 곳이 전혀 없어서 낭패를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영욱은 전혀 걱정하지도 않았다.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고, 그 당시에는 정말 큰 배신감을 느꼈답니다."

"그랬었군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위로가 될까요?"

"10억이나 10골드에 토룡 가죽 두 장을 다 넘기세요."

"갑자기 강도로 돌변하셨군요.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까 가던 길이나 가보세요. 도와주지 않아도 되니까요."

"어차피 강도 소리는 들은 것이니 그냥 곱게 가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강도 소리는 영욱이 일부러 내뱉은 소리였다. 하지만 화리는 그 소리를 듣고 발끈해서 강도로 돌변했다. 그게 영욱의 계획이었다. 우두머리나 리더들이 가지는 청개구리 성향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럼 밑으로 내려와서 빼앗아 가세요. 물론 곱게 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곳을 불바다로 만들면 간단하겠지만 혹시 가죽이 상할 지도 모르니 물바다가 좋겠군요."

"일행들 중에 물의 초능력자는 없는 것 같던데?"

"저야 불의 초능력이지만 주변에 쌓인 눈이 많으니까 녹이면 되겠죠. 이왕이면 펄펄 끓는 물로 채워드릴까요?"

"겨우 그 정도로 이 넓은 곳에다 물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냥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계신 위치가 불리하니 어차피 새로운 거래 조건에 승복하게 될 겁니다. 서로 얼굴 붉힐 거 뭐 있어요? 그냥 포기하세요."

강도치고는 말도 부드럽고 조건도 좋았다. 10억이나 10골드는 주겠다는 소리였다. 물론 거래가 막상 이루어지는 순간에 다시 번복될 수도 있겠지만.

"혹시 그 팔찌 이전에 쓰던 아이템 없어요?"

"있어요. 사시게요?"

"가죽 한 장을 넘겨줄 테니까 내게 넘기세요."

영욱이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내더니 갑자기 엉뚱한 제의를 했다. 그 이야기에 화리도 반색했다. 물론 그 조건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 반지 아이템이 싸구려기는 하지만 가죽 한 장으로는 어림도 없어요."

"그럼 두 장을 드리죠."

"좋아요. 방금 그 말을 녹음해 두었으니까 나중에 딴 소리 해봐야 소용없어요."

"이제 보니 끓는 물로 익사시켜 죽일 생각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젠장! 괜히 겁먹었잖아요."

"가죽 두 장을 양보하겠다는데 굳이 얼굴 붉힐 이유가 있겠어요? 가죽이 상할 수도 있고요."

"아무튼 이번에는 그 마음이 변치 않기를 바랄 게요."

"당연하지요. 호호호!"

영욱은 화리가 내려뜨린 가느다란 칡넝쿨을 타고서 낑낑거리며 절벽을 올라갔다. 사실 칡넝쿨이 없어도 얼마든지 오를 수 있지만 계약이 성사되었다는 의미로 일종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4권에서 계속됩니다.

*아이템 획득

"이게 바로 그 아이템이에요. 아쉬운 대로 150%까지는 증폭이 가능하니까 유용하게 사용하세요."

"금반지로군요. 남자 체면에 쪽팔리게 이런 반지를 끼게 될 줄은 몰랐군요."

영욱은 반지 아이템을 자신의 손가락에 끼고는 이리저리 살펴보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마음에 쏙 든다는 표정과는 달리 연신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제 보니 상남자셨군요. 어서 약속대로 토룡 가죽 두 장을 넘기세요."

"누가 토룡 가죽 두 장이라고 했어요? 그냥 가죽 두 장이라고 했지."

"처음부터 나를 속일 생각이었군요. 아무튼 가죽 두 장이라도 일단 주세요."

화리는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다지 동요하지는 않았다. 계약 내용이 분명히 가죽 두 장이었으니까 그것을 인정하는 듯했다. 그리고 자신이 건네준 반지 아이템 역시 큰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닌 듯했다.

"여기요."

"역시 대단하세요. 우두머리 암수 변종 환수 두 마리를 영욱 씨가 잡았던 거였군요. 그렇다면 저곳에는 왜 내려가 있었던 건가요?"

"그래야 화리 씨가 본색을 드러낼 것 같아서 그랬죠. 그러면 포기하는 척하면서 아이템 구경이나 좀 해보려고 했는데 일이 계획대로 잘 풀렸어요."

"허허실실의 계책인 줄도 모르고 그대로 말려들었군요. 호호호!"

"아무튼 좋은 거래였습니다."

"저도 좋은 거래였습니다. 원래 그 정도 가격밖에는 되지 않는 싸구려 아이템이라서……. 호호호!"

"저야 화리 씨의 본심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정상적인 거래가 아니라서 그런지 화리는 반지의 위력을 증폭시킬 수 있는 주문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영욱도 당연히 물어보지 않았다. 그게 반지를 먼저 건네줄 수 있는 이유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만족하는 거래가 되었다.

"그렇다면 토룡 가죽에 대한 거래는 다시 해야겠군요."

"미안하지만 토룡 가죽에 대해서는 잊어주십시오. 두 장이 아니라 열 장쯤 모을 계획이니까요."

"한 장 이상은 별로 효용이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 왜 그렇게 고집을 피우시는 거죠?"

"그 거짓말을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 아니라는 겁니까?"

화리는 여러 장을 겹쳐 입는 것이 훨씬 더 효용이 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일이 이쯤 되면 바보라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모르신다고 해도 알려드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아무튼 다른 곳에 가서 그런 말을 하시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 겁니다. 참조하십시오."

"그런가요? 그렇다면 참고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이제는 거래도 끝났으니까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팔지 않겠다고 하시지만 혹시 또 마음이 바뀔지 어떻게 압니까? 그러니 이 산을 벗어날 때까지라도 동행하고 싶군요."

"설마 기회를 노리다가 빼앗으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영욱이 떼어내려고 했지만 화리는 의외로 집요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영욱으로서도 별로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두머리 늑대 암수 두 마리를 순식간에 사냥하신 분인데 겨우 토룡피 두 장 때문에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군요."

"저는 뒤끝이 꽤나 오래 가는 편이니 앞으로도 실수하지 않길 바랍니다."

"그럴 리는 없을 테니까 안심하세요. 호호호!"

유화리는 미인계라도 동원해볼 참인 듯했다. 그녀 일행 중에서 한극상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아마도 노예거나 경호원인 듯했다. 그러니 일행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의사를 물어볼 필요도 없이 모든 게 유화리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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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산은 다른 산처럼 정상 부분이 거의 구분이 가지 않는 산이었다. 그러니 영욱 일행들은 등골산 정상이라는 표지판이 있는 다소 밋밋한 곳에서 영욱을 기다리고 있었다. 

"영욱 씨! 무사했군요."

영욱이 나타나자 다들 반가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진소희가 다소 과도할 정도의 반응을 보이면서 영욱을 맞이했다. 

그녀의 평소 행동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아마도 일행들에게 영욱이 벌써 죽었을 거라고 큰소리를 친 듯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당황해서 이렇게 과도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영욱은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살아남은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상황이니까.

"당연하지. 그깟 지렁이 두 마리 때문에 내가 죽을 것 같아?"

"그, 그게 지렁이라고요?"

"그래. 2QB 세상에서 눈사태를 일으켰던 그 놈이 앙심을 품고 보낸 지렁이들이었어."

"하지만 여긴 현실 세계인데 그게 가능해요?"

"믿기 힘들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환수 녀석들이 가끔씩 있다고 하네."

"누가요?"

진소희의 시선은 이미 유화리를 향하고 있었다. 자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꽤나 예쁜 여자라서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분들이 그러시던데."

"이 분들은 누구시죠?"

"드림헌터 겸 환수 사냥꾼들이셔."

"안녕하세요? 저는 유화리라고 해요."

끼어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유화리가 얼른 통성명을 시도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진소희라고 해요. 영욱 씨, 이 분들이 환수 사냥꾼이라면 바로 그 녀석들이 환수였군요."

"그러니까 이 분들 말씀이……."

영욱은 자신이 듣고 이해한 이야기들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다. 물론 진소희만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자신의 세 노예들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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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최은영이니까 서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때까지는 사이좋게 지냅시다."

영욱은 일부러 여자들끼리만 인사를 시켜주고 말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노예들이니까 무시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장비처럼 무식한 성격을 가진 한극상을 제외하고는…….

"나는 한극상이라고 해. 다들 잘 지내자고."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려요."

"염려 마. 나만 믿으라고. 하하하!"

늙으나 젊으나 예쁜 여자만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게 남자다. 특히 한극상의 껄떡거리는 정도는 심한 편이었다. 딸의 나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은영과 진소희를 쳐다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데 영욱은 한극상을 통해서 묘한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은영과 진소희가 오히려 그런 음탕한 시선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실 가진 힘이 없다면 쓸데없이 화를 자초하는 헤픈 행동이 되겠지만 이 두 여자쯤 되면 남자의 혼을 쏙 빼놓아서 오히려 상대를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만드는 수단이라도 되는 듯했다. 

약에 취한 것처럼 몽롱해진 한극상을 보면서 영욱 자신도 전에는 저랬을 거라는 생각을 해내며 두 여자들을 조심해야겠다는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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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산이라는 이름답게 밋밋한 지형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산꼭대기에서 야영할 수는 없으니 영욱은 일행을 데리고 동쪽 사면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영욱의 옆으로 화리가 다가왔다.

"생각보다는 능력이 더 대단한 분이셨군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쁜 여자를 둘이나 거느리고 계셨다니 놀라울 따름이에요."

"제가 인물이 멀끔한 편이다보니 따르는 여자가 좀 많은 편이긴 하지요. 하지만 쟤들은 제 취향이 아니라서 계속 거절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따라다니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남들이 들으면 허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영욱은 사실대로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둘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은영과 진소희에게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소리기도 했다.

"남자의 능력은 본인보다는 주변의 여자들이 더 잘 아는 법이거든요. 제가 보기에도 영욱 씨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어요."

"칭찬은 고맙지만 그런다고 해서 거래할 생각이 드는 건 아닙니다."

"저도 이제는 토룡 가죽을 잊고 다른 것을 노리기로 했어요."

"그게 저라면 사양하겠습니다."

"호호호! 미안하지만 저도 취향이라는 게 있는지라 영욱 씨를 노릴 일은 없을 것 같아요."

"그럼 대체 뭘 노린다는 겁니까?"

"영욱 씨의 놀라운 사냥 실력에 관심을 두기로 했어요."

"실력이면 실력이지 꼭 사냥 실력에 국한시키는 이유는 뭐죠?"

영욱은 화리의 말이 칭찬이라기보다는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실력에 비해서 결과가 좋다는 말은 곧 운이 좋음을 의미한다. 물론 전투나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운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큰 모욕이 될 수도 있는 말이다.

"전투나 통솔력 등의 실력도 상당하지만 사냥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난 것 같아서 그래요."

"뭐든 잘하면 좋은 거니까 욕은 아니겠죠."

"당연히 칭찬이지요."

"그러다가 서서히 나의 마음을 사로잡겠다는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꿈 깨세요. 늙은 여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서……."

여자에게 늙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큰 모욕임을 모를 리 없는 영욱이지만 말로써 화리를 상처주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단어를 사용하는 무리수를 두었다. 할머니에게도 사용하면 안 되다는 바로 그 금기어였다. 그러니 당장 반응이 올 수밖에 없었다.

"흥! 꿈도 야무지시군요. 영욱 씨가 잡게 될 사냥감의 가죽과 부산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영욱 씨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저도 스물세 살밖에 안 되었으니 연상의 여인 취급은 사절이에요."

"예? 그렇다면 학생인가요?"

"예. 고려대 경제학과 4학년이에요."

"이제 보니 가방끈이 아주 튼튼한 분이셨군요."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호호호!"

"10학번이죠?"

"예. 그걸 왜 묻는 거죠?"

"나는 09학번이라서……."

화리가 명문대학에 다닌다는 사실로 영욱을 기를 죽이려하자 영욱은 학번으로 맞섰다.

"말 낮출 생각이라면 꿈 깨세요."

"그럼 같이 터든가."

"내가 댁의 후배인가요? 그리고 우리가 언제 봤다고 말을 터요?"

"그렇다면 한극상 씨도 나한테 말을 낮추면 안 되겠네. 안 그래?"

"뭐야? 벌써부터 반말이야? 야! 내가 말 놓지 말랬지?"

"너도 편하게 놓아. 같은 학교는 아니지만 후배에게 말 높일 생각 따위는 전혀 없으니까……. 그럴 바에야 차라리 반말을 듣고 말겠어. 그리고 야가 뭐야? 예쁜 여자 입에서."

영욱이 원래부터 이런 타입은 아니다. 특히 자신이 선배라고 해서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것도 대학조차 다른데 그런 실례를 범할 사람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수작을 걸려는 여자들에 한해서는 막 다루기로 결심했고, 유화리 역시 막 다루지 않으면 자신이 점점 더 불편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아내면서 나쁜 남자 흉내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미인계를 원천봉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상대를 여자가 아니라 아직 어린애로 보는 것이다. 예쁘긴 하지만 건드리거나 마음을 주는 순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아동 성추행이라는 추악한 범죄가 되는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세뇌하기로 했다.

특히 지금처럼 무례한 진상으로 낙인찍히면 효과는 더 좋다. 어지간한 비위가 아니고서는 이런 불편한 관계 속에서 사랑이 싹 틀 리 없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목적이 있다는 소리기도 하고.

"이렇게 싸가지 없는 사람일 줄은 몰랐군요."

"불쾌하면 여기서 헤어지면 되잖아. 대체 뭐가 문제지?"

"이런 취급을 받고 헤어질 수는 없어요. 나에게 이렇게 무례했던 남자는 처음이라서 정말 정신이 혼미해요."

"어차피 좋은 인연은 아니니까 가던 길이나 가라고……. 미련이 남는다면 반말을 감수하든지."

"좋아. 같은 나이라고 했으니 나도 말을 놓겠어. 너도 불만 없지?"

유화리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물론 같이 말을 트는 것이니까 손해는 아니겠지만 그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져서 정말로 혼이 빠진 듯했다.

"없어. 생일 좀 빠르다고 해서 오빠 소리 듣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그럼 영욱이라고 부른다."

"당연하지. 화리야."

"뭐, 뭐야? 왠지 내가 손해 보는 기분인데……."

"손해야 내가 보는 거지. 내가 한 학번이나 빠른데 말이야. 학교야 허접이지만……."

영욱의 뒤끝이 멍해진 화리에게 끊임없이 작렬했다. 아무튼 영욱은 앞으로 화리를 여자로 보지 않아도 되게 되어서 마음이 한결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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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산의 동쪽 사면을 걸어 내려가던 영욱은 비박하기 적당하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멈추어 섰다. 주변에 바위가 둘러쳐져 있어서 바람도 막아주었고 제법 평평한 곳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잔다. 상태와 호진은 우리 몫의 비트를 파고, 승언은 불을 피워. 그리고 은영과 소희는 식사를 준비하도록 해."

"오빠는 뭐 할 건데? 혹시 사냥 갈 거야?"

"사냥은 이미 해두었으니까 나는 놀 거다."

영욱은 은영의 투정 섞인 질문에 일부러 애를 먹였다. 노는 한이 있어도 도와줄 생각은 전혀 없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이었다. 사실 목숨을 걸고 도주함으로써 저희들을 살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고맙다는 소리가 다소 부족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은영은 새로 합류한 화리에 대해서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여자로서의 직감에 의하면 화리가 강력한 경쟁자가 되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그러니 영욱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즐겁기도 했다.

"무엇을 사냥했는데?"

"늑대."

"뭐야? 우리나라에 늑대가 있어? 그것도 이 강원도에?"

"그럼 내가 지금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아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영욱이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짜증을 내자 은영은 자신이 따질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은영은 옛날 여자 친구의 자격으로는 결코 영욱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꾸만 깜빡하곤 했다. 

"늑대고기는 이미 먹어봤잖아. 이건 육포로 만든 거지만 먹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육포?"

"내가 물기를 쫙 빼버렸더니 저절로 육포가 되더라고."

"물기를 왜 빼?"

"그럼 그 무거운 수분까지 짊어지고 와야겠어? 물은 근처에도 얼마든지 있는데……."

영욱은 육포라기보다는 건포乾脯에 가까운 고기 조각을 내밀었다. 은영의 주제를 모르는 간섭에 소리를 버럭 지르기는 했지만 여전히 밉상은 아니라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또 무슨 초능력이야?"

"육포 만드는데 초능력은 무슨 얼어 죽을 초능력이야? 그리고 염동력 조금에 실드 능력 조금이 내가 가진 전분데 그게 무슨 초능력이라는 거야?"

"그럼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육포를 만들어? 결국 그걸로 육포를 만들었을 테니까 하는 소리잖아."

"도움을 조금 받기는 했지만 초능력은 아니라는 말이지. 진공청소기로 이불을 납작하게 만드는 거 너도 알지? 그게 초능력이야?"

"그것은 초능력이 아니지. 그냥 비닐 속에 이불을 넣고 공기를 빨아내면 되는 거니까."

"맞아. 실드를 비닐 대신으로 사용하고 염동력으로 공기를 빨아내면 이동이 가능한 피와 함께 수분도 함께 밖으로 딸려 나오지. 아주 간단한 원리니까 초능력 운운해서 다른 사람들을 긴장시키지 마. 알겠지?"

은영과 티격태격하면서도 미주알고주알 다 알려주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대개의 드림헌터들이 주로 한 가지 초능력에만 재능을 보이기 때문에 알아봐야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은영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진소희가 매운 연기를 마셔가면서 불을 피워야 하니까 일부러 돌려보내지 않고 이야기를 하는 면도 없지는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두 여자들은 라면이나 끓여먹어야 하겠지만 유화리 일행들이 보는 앞이라 일행의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같이 식사 준비를 하게 배려한 것이다. 그러니 이 정도는 심술을 부려도 진소희로서는 할 말이 없어야 정상이다.

"긴장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해? 아무튼 염동력과 실드 초능력은 별로 신통치도 않은데 육포는 잘 만들 수 있다는 그 말이었군."

"끝까지 초능력 타령이군. 아무튼 내가 잔머리는 좀 돌아가는 편이라서 받는 오해니 내가 참아야지. 하하하!"

"그런데 정말 저 사람들이랑 같이 야영할 거야? 위험하지 않을까?"

"조심해야겠지. 하지만 잠이 들면 2QB 세상에서 합류하게 될 테니까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봐야겠지."

영욱으로서도 동료가 아닌 자들과 함께 잠을 자는 게 편할 리 없다.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되는 한밤중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2QB 세상에서 곧바로 나타나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하고 잠에서 깨어나면 그뿐이니까 전혀 무방비 상태는 아니다.

"그래서 같이 가려는 거야?"

"나는 꼭 그래야할 필요는 없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그런가 봐."

"저들이 뭐가 아쉬워서 오빠랑 같이 가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그래? 저쪽 여자는 너희 둘이 나를 따라 나선 이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하는 것 같던데?"

영욱은 화리가 하지도 않은 말로써 이간질을 시도했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고, 여자는 여자끼리 잘 통하는 법이라는 사실을 역이용하려는 것이다. 

사실 은영이 기를 쓰면서 다시 사귀자고 하는 것은 영욱을 통해서 뭔가를 얻고자 하는 것이고, 진소희가 구박을 받으면서도 성질을 죽인 채로 붙어있는 것도 역시 뭔가를 얻고자 함이다.

그 무엇인가가 무엇인지는 다소 모호하지만 영욱의 사랑이나 돈만을 원하는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사실 유화리를 겪고 난 영욱은 그게 뭔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오빠의 능력이 아직까지 그 정도는 아냐."

"말을 모호하게 한다고 내가 모를 것 같아?"

"아냐. 난 오빠의 사랑만 있으면 돼."

"웃기지 마! 너희들도 그 아이템이라는 게 필요한 거지? 그렇지?"

영욱에게 앵벌이를 시키거나 사역마 삼아서 그녀들이 얻고자 하는 것은 바로 마법 아이템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보석도 그냥 보석이 아닌 마법적 능력을 가진 보석이니까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소희 언니는 그럴지 몰라도 나는 아직 아니다. 아직 너무 약해서 아이템이 무슨 소용 있겠어?"

"너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없어."

"없어? 확실해?"

"없다니까 왜 자꾸 사람을 의심하고 그래?"

"의심이라고? 좋아, 내 입으로 듣고 싶다면 말하지."

"나는 오빠에게 단 한 점의 거짓말도 한 적이 없어. 그러니 속이는 게 있을 리 없지."

은영은 지나친 부정은 긍정이라는 공식을 연상케 할 만큼 강력하게 부정했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고 날뛰는 것보다 훨씬 더 흥분한 상태였다.

"상태가 그러는데 나보다 너를 먼저 만났다고 하더라."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일 없었어."

"아직도 모르겠어?"

"삼자대면을 해도 좋아. 나는 결백해."

"상태는 내 노예야. 노예가 주인에게 거짓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노예를 거느려본 적이 없는 은영은 영욱의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우긴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님을 깨달은 듯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이기에 자신이 저지른 짓 때문에 애써 외면하려고만 했다는 사실도 뒤늦게야 깨달았다.

은영은 영욱의 팔짱을 끼면서 애교 모드로 일을 수습하고자 했지만 영욱이 그러한 은영을 피해버려서 허공에 팔짱을 끼고 말았다.

"사, 사실 먼저 만난 적이 있었어. 하지만 오빠에게 자극이 좀 필요해서 상태를 끌어들인 것뿐이야."

"자극 한 번 화끈하군."

"그 덕분에 오빠가 드림헌터로서 각성하게 되었잖아.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는 편이거든. 호호."

"네가 아니라 네 둘째 언니겠지."

영욱은 갑자기 박상태가 나타나서 자신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 은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짐작했는데 그게 사실임이 드러났다.

"맞아. 오빠가 상태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나와 함께 우리 언니를 찾아갔다면 일이 잘 풀렸을 텐데 그러지 않은 게 오빠의 불행이었지."

"흥! 너로부터 절교 선언을 당한 게 불행이라는 거야?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그, 그리고 진중권 아저씨로부터도 파문당했잖아."

은영은 영욱이 대놓고 콧방귀를 끼자 그런 말을 한 자신도 머쓱한지 전혀 엉뚱한 이야기까지 꺼내고 말았다. 진중권에 관한 이야기가 은영의 입에서 나오자 영욱은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었다.

"아저씨라고? 서로 아는 사이였어?"

"이제 와서 굳이 숨길 것도 없겠지. 우리 아빠와 사형제 관계야. 울 아빠가 사제고 진중권 아저씨가 사형이야."

변명을 하려다가 점점 더 수습 불능의 사태에 빠져버리자 은영은 체념한 표정으로 진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나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놓고는 기분 좋았겠다."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아니긴 뭘 아냐? 아무튼 너도 어려서부터 기계체조를 배웠겠구나."

은영의 동작이 예사롭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된 영욱은 허탈한 심정이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에 완전히 당한 셈이었다.

"응. 나도 좀 하는 편이지. 오빠보다는 못하지만……."

"어릴 때부터 배웠는데도 나보다 못할 리가 없지. 그런데도 가증스럽게 내 동작을 따라하는 시늉을 내 거야?"

"그게 뭐가 어때서? 그럼 물어보지도 않는데 내 정체를 밝혀야 하는 거야? 솔직히 오빠가 강해지는 것에 관심이나 있었어? 매번 나를 덮칠 궁리나 했잖아."

가능하면 묻어두고 싶었던 과거의 부끄러운 일들이 은영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로서도 나름 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결과론적으로는 그녀 덕분에 강해졌으니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어주지. 그때는 네가 훨씬 더 강한데 덮치는 게 가능했을 리가 없잖아. 나는 그저 운이 나쁘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어. 너도 사람 비참하게 만드는 데는 일가(一家見이 있는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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